라붕이(두번째 인간)가 오르카호에 합류한 후의 일상 이야기
얼떨결에 오르카호 부사령관이 되어버린 지 일주일이 지났다. 창문은 없는 방이었으나 알람시계가 아침이 왔음을 알려주자 눈을 뜬 나는 알람을 끄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내가 누워있던 자리 바로 옆에는 하베트롯이 떡실신한 채로 꿀잠을 자고 있었다. 불굴의 마리 4호 휘하의 스틸라인으로 옮기는 대신 내 직속으로 남아있었기에 이 귀여운 쏘가리의 군기가 충전되는 일은 없었다. 일이 있는것도 아니라서 굳이 깨울 필요는 없었기에 더 자라고 이불을 목덜미까지 끌어올려 덮어주고 방을 나섰다.
"으음..."
하베트롯이 몸을 꼼지락 거렸으나 눈을 뜨지는 않았다. 오르카호에 들어온 뒤로 예전에 비해 욕망을 풀 수 있게 된 덕인지 하베트롯이 잠꼬대를 하는 일이 줄어들었다.
사실 하베트롯이 쓰는 방은 내 방이 아니라 바로 옆 방이지만 나랑 같이 자는 걸 더 좋아한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다. 보리는 하베트롯의 방에 실내용 개집을 차려놓고 살고있다. 원랜 보리 집을 내 방에 놓으려 했으나 하베트롯이 와서 동침이라도 하는 날엔 보리가 관전하는 게 영 신경쓰일 것 같아서 옆 방으로 옮겼다. 하베가 와도 잠만 자는 경우엔 보리도 같이 자도 상관없지만 하베랑 '하는' 날에는 좀... 콘스탄챠 말로는 보리도 알 건 다 안다고 했고, 그 말대로 보리는 방 배치에 대해 이해해주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아침밥을 먹으려면 식당으로 가야만 했다, 메이드나 그 약차차 주방장이 방으로 식사를 가져다주는 룸 서비스는 사령관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기에. 방문을 열고 복도에 발을 내딛자 잠시후 옆방의 자동문이 스르륵 열리며 보리가 뛰쳐나왔다.
"보리야! 잘 잤어?"
"멍!"
"그래그래. 밥부터 먹을까."
턱을 살살 긁어주며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선 먼저 보리 밥부터 챙겨주기 위해 하베트롯의 방으로 들어갔다, 보리 밥그릇이나 사료 등은 여기 있으니까. 식당에는 털 날리는 동물 출입금지여서 아직까진 밥을 따로 먹을 수 밖에 없다. 나중에 소완 아다 떼고 성격 좀 유순해지면 식당 규제 풀리려나.
*
"아, 승리! 오셨어요 오빠?"
보리랑 아침산책 삼아 오르카호 복도 한바퀴 돈 뒤에 부사령관실에 들어오니 무슨 책을 읽고있던 하베트롯이 반겨주었다.
"안녕. 그 책은 뭐야?"
"교본이에요.부사령관인 오빠의 곁을 보좌할 부관으로서... 그... 이것저것 익혀놔야죠! 저기 오빠 앞으로 온 물건들 보니까 이제 곧 일하기 시작해야 될 것 같아서요."
내가 명색이 부사령관이긴 해도 그동안은 적응 기간인 셈 치고 아무런 일거리도 받지 않았었지만 오늘 부사령관실에 도착한 지급품 상자를 보니 하베트롯 말대로 슬슬 일 시킬려고 시동 거는 모양이다. 나는 의자에 앉아 오르카폰으로 이번에 지급된 물품 리스트를 천천히 읽었다.
"어디... 부사령관 제복에, 업무용 홀로그램 패널, 그리고 전술 시뮬레이션용 HMD...? HMD가 뭐지?"
"멍."
보리가 상자에 머리를 쳐박더니 잠시 후 왠 헤드기어를 입에 물고 꺼내서 보여줬다.
"이거야? 무슨 VR 헤드셋 같이 생겼네. HMD가 뭐의 약자래?"
"Head-mounted display의 약자에요."
"오, 우리 하베 똑똑한데."
"헤헤, 뭘 이런 것 가지고..."
"자... 그리고 또 뭐가 들어있나..."
계속해서 물품 목록을 읽어가던 그 때 왠 알림 메시지가 들어왔다. 내 것 뿐만 아니라 하베트롯의 폰에도 동시에 알림이 들어왔었다. 내용인 즉슨 곧 어떤 섬에 상륙할 테니 하선을 준비하란 내용이었다. 또 적당히 철충 정리하면서 섬 확보하고, 물자 챙기고 나오겠지 하고 짐작해버려 나하고는 상관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 직후 내 폰에만 사령관이 오르카호 간부 대상으로 보낸 메시지가 도착했고, 무슨 내용인지 확인하자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예상할 수 있었다.
"이거 휴일 연장될 각이구만."
"네? 무슨 말이세요?"
"금방 알게 될거야."
오르카호에 트리아이나가 승선했다. 바꾸어 말하자면, 리오보로스의 유산 이벤트의 막이 올랐다.
*
어느 남국의 섬 해안에 정박한 오르카호. 명목상으로는 자칭 트레저 헌터인 트리아이나의 제안을 따라 이 섬에 숨겨진 보물을 찾기 위해 상륙한 거였지만 진짜 목적이 오르카호 부대원들에게 한여름의 바닷가에서 휴가를 즐기도록 하기 위함이란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 나가 놀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령관이나 트리아이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병력이 섬에 발을 디딘 반면 콘스탄챠를 포함한 일부는 오르카호 수비 및 관리를 위해 남아있기로 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하선할 지 아님 오르카호에 남았다가 후발주자들이랑 같이 움직일 지 정하고 있었다.
"저기, 라붕 오빠. 저, 그게... 상륙한다면 꼭 지금 가야 하나요?"
"아니, 꼭 지금일 필요는 없지? 각잡고 놀러온거라 며칠은 더 머무를테고. 내일이나 모레에 상륙할 생각인 애들도 있다던데, 너도 그렇게 하게?"
"네에, 그... 모처럼 바다에 왔는데, 수영복이 없어서..."
"너 새로 지급받은 스틸라인 군복 중에 하계 전투복도 있지 않았어?"
"그게... 사이즈가 안맞아서 오드리씨한테 수선 맡겼는데, 아직 도착안했어요."
"...오."
한순간 하베트롯의 풍만한 미드에 시선이 빼았겼다가 도로 시선을 위로 올렸다.
"그럼 뭐, 나중에 가도 되긴 하다만 넌 괜찮겠어?"
"네. 여름 휴가라지만 하루 뺀다 해도 충분히-"
"그거 말고. 마리 포함해서 스틸라인 장교들은 여름 휴가동안 다 여기 머무를 거라던데, 넌 마리 껄끄러워 하지 않았어?"
"네? ...앗."
하베트롯은 미처 생각 못했다는 듯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얘는 과거 탈영했던 전적 때문에 스틸라인 장교 앞에선 문책당할까봐 유독 쭈뼛거리고는 했다. 어차피 60년 전이라 공소시효 지난데다 멸망 후 살아있는 인간을 보좌해 이곳에 데려왔으니 그 죄는 불문에 부치게 되었지만 본인은 아직도 신경쓰이는 모양이었다.
"지, 지금 출발해요 오빠! 수영 말고도 즐길거리는 많으니까요! 수영복은, 그러니까, 나중에 오드리씨가 연락하면 그 때 가서 받아오면 되요!"
"그래 알았어. 어차피 나도 수영복 없기도 하고. 마냥 휴가랍시고 무기 챙기는 거 잊지 마, 섬에 철충 좀 남아있을걸. 그리고 보리야, 넌 내 심부름 좀 해줘."
보리가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귀를 쫑긋거리며 다가왔다.
"포츈은 아직 오르카호에 남아있을 거거든? AGS 격납고 아님 정비실에 가면 찾을 수 있을거야. 가서 '내 기간테스도 섬에 상륙할 수 있게 준비해줘, 오늘은 말고 내일 오전에 상륙하게.' 라고 말 좀 전달해줘. 그 녹음 기능으로 말이야, 알지?"
"멍!"
[내 기간테스도 섬에 상륙할 수 있게 준비해줘, 오늘은 말고 내일 상륙하게. 치직-]
보리는 내 말을 알아들었다는 의미로 포츈에게 들려줄 부분만 재생하고선 방을 나섰다. 이번 여름휴가를 즐기는 건 바이오로이드 뿐, 모든 AGS들은 오르카호 수비 병력으로 함 내에 남아있을 예정이다. 기간테스도 마찬가지였었으나 이번엔 기간테스를 쓸 일이 있을거라고 판단해 그 녀석도 같이 가기로 결정했다.
*
어딘가에 앙헬의 무덤이 숨겨져있다는 남국풍의 섬에 상륙한 지 하루가 지났다. 우리 일행은 모두 수영복이 없어서 첫날은 나와 보리, 하베 셋이서 모래사장이나 내륙으로 조금 들어가면 보이는 숲을 산책하면서 무난하게 보냈다. 바다에 들어가도 발목에 물이 잠길 정도로 얕은 해변가에서만 놀았다. 저녁이 되어서는 바비큐 파티도 하고, 캠프 파이어도 하고, 멸망의 메이가 쏘아올린 불꽃놀이도 구경하고.
그리고 둘째날이 밝아오자 우리 일행은 해변을 떠나 해안 절벽 쪽으로로 이동했다. 사령관과 트리아이나, 호라이즌, 그리고 비키니 해적단은 한 발 먼저 떠나버렸기에 보리의 추적능력을 앞세워 뒤쫓아가게 되었다. 이 새끼들이 나한텐 한 마디도 안하고 출발해? 내가 보물찾기에 관심 없는 줄 알았나보지?
시간이 조금 흐른 뒤, 어느 시설의 철문 앞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사령관 일행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시설 앞을 지키고있던 철충 무리의 처리가 막 끝난 참이었나 보다.
"어이, 사령관! 나 아직 안늦었지?"
"어? 부사령관! 너도 왔구나."
"사, 사령관 각하!? 아차! 스, 승리! 부사령관 직속 비서, 하베트롯입니다!"
"하하, 괜찮아. 긴장 풀어. 그렇게 격식 차릴 것 없어."
큰 목소리로 부르자 사령관이 반가운 기세로 대답했다. 반대로 하베트롯은 그를 보자마자 뻣뻣하게 굳어버리긴 했지만. 사령관에 이어서 그의 옆에 서있던 수영복 차림의 파란머리 소녀가 호들갑 떨며 새로운 동료를 반겨주었다.
"오옷! 이게 누구신가, 그 험난한 모험을 겪고 돌아왔다는 모험가 동지 아닌가! 역시 이 캡틴 트리아이나가 그 속에 깃든 모험혼에 불을 지핀 모양이군!"
"킥. 틀린 말은 아니네."
여기서부터가 본격적인 리오보로스의 유산 이벤트의 시작인데 해변이나 오르카호에 죽치고 앉아있을 수는 없지.
그리고 겸사겸사 내 입지를 위해 처신도 좀 하고. 지금 바다에 나와있는 바이오로이드들은 사령관한테 어필하려고 수영복 차려입은건데 정작 그 사령관은 바다가 아닌 동굴에 가있고, 그러는 와중에 사령관이 아닌 남자가 수영복 여자들이 가득한 장소에서 갸웃거린다? 존나게 눈치보인다. 그런 가시방석에 앉을 바에야 사령관이랑 같이 여기 있는 게 더 낫지.
"어제 바닷가에서만 놀길래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관심은 있지. 그냥 철충 남아있는 내륙을 쏘다니기 싫었을 뿐이야. 그래서, 보물은 찾았어?"
"글쎄. 이 안에 보물이 있을거라고는 생각하지만~ 문이 닫혀있지 뭐야."
"음. 그리고?"
"그것도 그냥 닫힌게 아니라 제대로 잠겨있어."
"어이쿠 저런, 그러면 보물 탐사는 여기서 끝내야겠구만!"
"이럴수가아! 이 캡틴 트리아이나의 대모험이 이렇게 허망하게 끝나버리는 건가!"
트리아이아나 과장된 억양으로 맞장구 쳐주자 페로가 잠깐 한심하게 쳐다보다가 앞으로 나서서 철문을 퉁퉁 두드렸다.
"쓸데없이 두꺼운 철문이군요. 설계자의 취향이 어떤지 알 것 같습니다. 베어내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만..."
"아냐, 내게 생각이 있어. 세이렌? 저거 터뜨릴 수 있지?"
사령관의 말에 트리아이나가 경악했으나 세이렌은 아랑곳 않고 말없이 철문을 향해 거대한 함포를 겨눴다. 원작대로 흘러가게 구경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잠깐 기다려봐, 사령관."
"왜그래? 녹슨 문은 원래 이렇게 여는 거 아니겠어?"
"확실히 재밌어보이긴 하다만, 어젯밤 메이의 성대한 불꽃놀이 덕에 오르카호 탄약고의 절반이 소멸해버렸으니 가급적이면 포탄을 아끼는 방법을 쓰는 게 어때?"
"그럼 어떻게 하려고?"
"기간테스?"
"기간테스, 명령 대기중."
뒤에서 땅이 쿵 쿵 울리더니 이내 기간테스가 바로 뒤까지 왔다.
"기간테스를 여기 데려온 거야? AGS는 전부 본진 수비 병력으로 남겨두고 왔을텐데."
"얘는 내 직속이니까, 부사령관 권한으로 데려왔어. 저 안에 뭐가 있을지 모르는데 보디가드는 있어야지, 난 너처럼 미녀 경호원이 옆에 붙어있는 것도 아니란 말이야."
"이번에도 기간테스에 타서 싸우게?"
"난 안싸워. 상황이 정 위험해보이면 기간테스 안에 타긴 하겠지만, 그렇게 되도 얘가 알아서 움직이게 자동모드 맡기고 난 그냥 앉아만 있을걸? 아무튼, 입사기념 치고 보물찾기 개막식은 우리한테 맡겨주지 않겠어?"
넌지시 물어보자 사령관이 그것도 좋겠다는 듯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그것을 본 세이렌은 함포를 겨누고 물러나주었다.
"기간테스? 저 문 좀 열어줄래?"
"목표, 확인."
손가락으로 철문을 가리키자 기간테스가 성큼성큼 다가가고선 철문 정중앙을 묵직한 주먹으로 강타했다. 철문이 흉하게 우그러지면서 사이에 틈이 생기가 기간테스는 그 틈새에 양손가락을 집어넣고선 힘주어 양 옆으로 팔을 벌렸다. 이윽고 철문이 콰지끈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활짝 열렸다.
"임무, 완료."
기간테스가 옆으로 비켜서자 앙헬의 금고로 이어지는 통로가 그 비밀스런 모습을 드러냈다. 수십년 간 봉쇄된 장소였을 터인데도 동굴 천장에 박힌 조명엔 아직도 불이 들어와 내부를 은은히 밝혀주고 있었다.
"오오! 화끈한데, 로봇 친구! 더이상 우릴 막을 수 있는 것은 없다! 기다려라 보물들아, 뉴 트리아이나가 간다~!"
"트리아이나씨? 너무 앞서가지 마세요!"
트리아이나가 맨 첫번째로 달려나가 동굴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버리자 그녀의 뒤를 따라 세이렌과 호라이즌이, 이어서 워울프와 샬럿이 신난 기세로 들어갔다. 보리 또한 모험심이 발동한건지 당장이라도 들어가고 싶다는 듯 꼬리를 신나게 흔들며 내 주변을 방방 뛰었으나 반면 하베트롯은 눈 앞의 미지의 공간이 내키지 않은건지 내 팔을 붙잡고 덜덜 떨고 있었다.
"이 앞으론 뭐가 있을 지 모릅니다. 주인님. 주인님의 경호는 제가 맡아도 될까요?"
"그래, 잘 부탁해."
페로가 사령관의 경호역을 자처하자 하베트롯이 뭔가 자극받은건지 내 팔에서 손을 뗀 뒤 자신의 기관단총을 꽉 움켜쥐었다.
"라붕 오ㅃ, 아니, 부사령관님! 부사령관님은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음. 네가 있어주니 든든한걸! 그보다 그냥 오빠라고 불러도 되는데."
"오빠, 그건 둘만 있을때만!!"
사령관은 여태 느껴보지 못한 호기심과 모험심에 몸을 살짝 떨었다. 그러다가 하베트롯이 얼굴이 새빨개진 채 소리를 빽 지르자 사령관이 뒤돌아보면서 나랑 눈이 마주쳤다.
"자, 그럼... 부사령관? 우리도 어디한번 들어가볼까?"
"좋지."
두번째 인간이 추가된 라스트 오리진의 이벤트가 시작되었다.
근데 우린 이 이후 이야긴 못봄ㅎ

이걸로 진짜 끝.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