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아우로라 씨, 생크림 케이크 하나만 배달해주시겠어요?”

 

“어서 와. 컴패니언 숙소로 보내주면 되지?”

 

“아, 이번에는 아니에요.”

 

스노우 페더는 아우로라에게 케이크 주문서를 내밀었다. 주문서에 표시된 직접 수령 문구를 읽은 아우로라는 알겠다면서 쇼트케이크 위에 올릴 토핑을 물었다.

 

“올리고 싶은 토핑 있어? 선물용이라면 초콜릿을 중심으로 과일을 약간만 써서 데코레이션하는 걸 추천해.”

 

“아우로라 씨께서 적당히 해 주세요. 결제는 사령관님 어음으로 할게요.”

 

“그래, 케이크 완성되면 알려줄게.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주문을 수령한 아우로라는 염력으로 케이크 생지와 짤주머니를 떠올리더니 능숙하게 쇼트케이크 제작에 들어갔다. 아우로라가 케이크를 만드는 장면을 잠시 바라보던 스노우 페더는 그 사이 케이크에 동봉할 쪽지를 쓰는데 집중했다. 뭐라 써야할지 고민하며 몇 번을 쓰다 지우다를 반복한 끝에 가장 단순하면서도 확실한 문장을 완성한 스노우 페더는 자신을 기다리는 케이크를 받아 쪽지를 끼웠다.

 

“이제 이대로 가기만 하면 되는데... 내가 정말 잘하고 있는 게 맞을까.”

 

사령관을 향한 절대적인 충성이 덕목인 경호부대 컴패니언. 경호실장인 리리스의 집착에 가까울 정도의 완벽한 복종에 따라 다른 컴패니언 자매들도 리리스의 뒤를 따라가는 게 맞다는 묵시적인 동의가 형성되어 있었다. 스노우 페더도 그 원칙을 따라 오르카호에 합류한 이래 컴패니언의 일원으로서 사령관 경호에 힘썼지만, 리마토르와 관련된 일에 얽히기 시작하고 그녀의 안에서 의심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는 게 정말 주인님을 위한 길이 맞을까... 아직 확실하지도 않은데 무고한 사람을 다치게 하는 건 아니겠지...?”

 

케이크를 들고 향하는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지만 스노우 페더의 마음은 그 자리에 멈춰서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 자신도 지금 벌어지는 일에 대한 옳고 그름을 확신할 수 없었기에, 리리스의 지휘를 거부할 수 없었다. 목적지인 스카이 나이츠 숙소에 도착한 스노우 페더는 문 앞에 케이크를 내려놓고 문을 두드린 뒤 잽싸게 모습을 감췄다. 감시 카메라로 그 장면을 확인한 리리스는 스노우 페더가 복도를 지나가는 모습이 찍힌 장면을 삭제하며 스노우 페더에게 수고했다는 칭찬을 남겼다.

 

한편 노크를 듣고 나온 그리폰은 아무도 없자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음? 누가 노크한 거지?”

 

“케이크? 배달시킨 사람 있어?”

 

“린티의 팬이 보낸 게 틀림없어!”

 

“여기 떡하니 하르페이아에게 주라고 적혀있는데 뭔 소리야.”

 

“어... 그런데 지금 하르페이아에게 주는 게 맞을까?”

 

블랙 하운드는 케이크 상자에 붙은 편지 봉투의 수신인에 하르페이아의 이름이 적힌 걸 확인하더니 조심스럽게 하르페이아에게 눈을 돌렸다. 침대 위에서 머리끝까지 담요를 뒤집어쓰고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는 하르페이아에게 괜히 케이크를 갖다 줘도 괜찮을지 걱정이 앞섰다.

 

“스프리건 뉴스에 나오고 나서 계속 저 상태인데... 괜찮겠어?”

 

블랙 하운드의 말을 받은 슬레이프니르도 같은 의견을 표했다. 리마토르와 불륜을 저질렀다는 의혹이 터지자 오르카호 내부 여론은 하르페이아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처음에는 정말 불륜이었냐는 진위 검증, 중간부터 리마토르에게 책임이 있다는 분위기로 흐르면서는 피해자 보호라는 잣대를 들이댔다. 하르페이아가 아니라고 직접 기자회견까지 했음에도 여론은 그녀의 진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전혀 고의가 아니었는데 결과적으로는 리마토르를 위기로 몰고 갔고, 끝내 집단 린치 사건이 터져 그가 입원하며 사건에 마침표가 찍히자 하르페이아는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외출도 거부하고 곡기도 딱 끊은 채 자신의 침대에서 모포를 덮고 하루 종일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안쓰러운 모습을 보다 못한 스카이 나이츠 대원들이 하르페이아를 일으켜 세우려고 억지로 밥을 먹이려고도 했지만, 한두 술을 뜨면서 울먹거리다가 아예 목 놓아 울자 더 그러지도 못했다.

 

스카이 나이츠는 그 때 바이오로이드의 몸에 얼마나 수분이 많은지 알 수 있었다.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도, 통곡하며 흘러나오는 눈물도 분명 더 이상 나오지 않을 정도로 다 쥐어짰을 터인데 하르페이아는 계속 눈물을 쏟았다. 너무 많이 운 나머지 눈이 퉁퉁 붓고 충혈되다 못해 실핏줄이 터져 흰자가 붉게 물들기까지 하자 슬레이프니르와 흐레스벨그의 판단 하에 스카이 나이츠 전원이 하르페이아를 닥터에게 끌고 가려고도 했다. 하지만 하르페이아의 완강한 저항 앞에 결국 돈좌되었고, 자연적으로 나을 때까지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그쯤 되자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한 하르페이아에게 뭐라 말이라도 꺼낼 수 있는 이는 없어졌다. 사건이 발생하고 둘째 날부터 그랬으니 벌써 3일째였다.

 

“흠.... 그래도... 주는 게 맞겠죠. 보낸 사람을 보니까 이건 하르페이아가 아니면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블랙 하운드가 가리킨 편지 봉투를 눈으로 훑던 흐레스벨그는 봉투 뒤쪽에 적힌 발신인을 보고 케이크를 전해주자는 의견을 냈다. 슬레이프니르도 발신인을 확인하더니 동의했다. 전대장과 소대장의 의견이 일치하자 다른 스카이 나이츠 대원들도 발신인을 한 번씩 살폈다. 린트블룸과 블랙 하운드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리폰은 표정을 구겼지만 그래도 하르페이아를 위한 일이라는 생각에 마지못해 동의했다.

 

“이야기는 끝났네. 가자.”

 

슬레이프니르는 케이크를 들고 하르페이아의 침대로 갔다. 여전히 담요를 덮어쓴 채 미동도 없는 하르페이아였지만 담요 바깥에 배어날 정도로 축축한 눈물자국이 그녀가 숨이 붙어있음을 알려주었다. 슬레이프니르는 하르페이아가 놀라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하르페이아. 너한테 배달 온 게 있어.”

 

“....”

 

대답이 없자 그리폰은 담요를 확 벗기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흐레스벨그는 신중하게 접근해야한다면서 그 의견을 기각했다. 슬레이프니르는 이번이 기회라고 생각하며 마른 침을 한 번 삼킨 뒤 다시 말했다.

 

“보낸 분이 리마토르 교수님이야.”

 

“!”

 

조건이 하나 추가되자마자 하르페이아는 바로 담요를 들추고 고개를 들었다. 터진 실핏줄이 아물지 않아 눈이 새빨갰지만 하르페이아의 눈동자에는 여태까지 볼 수 없었던 희망이 빛을 비추고 있었다.

 

“저, 정말이야?”

 

“그럼. 확인해봐.”

 

슬레이프니르는 하도 많이 울어 잠긴 목소리로 되묻는 하르페이아에게 케이크 상자를 건넸다. 편지봉투를 뜯은 하르페이아는 그 안에 들어있는 카드를 읽고 잠시 멍하니 있었다.

 

“....”

 

스카이 나이츠 대원들은 모두 말없이 하르페이아를 바라보았다. 카드에 무슨 내용이 적혔는지 몰랐지만 하르페이아는 숨이 멎었다가 소생할 것처럼 보였다. 카드를 접어 주머니에 넣은 하르페이아는 케이크 상자를 손에 들더니 입을 열었다.

 

“잠깐만 나갔다 올게.”

 

“뭐?! 그 모양으로 어디를 가겠다는 거야?”

 

갑작스러운 외출 선언에 슬레이프니르는 놀라서 만류했다. 블랙 하운드는 나갈 때 나가도 오랫동안 안 씻었으니 샤워라도 하고 나가라고 했지만 하르페이아는 결의에 찬 눈빛으로 둘의 의견을 반려했다.

 

“아니, 급한 일이야. 금방 갔다 올게.”

 

“교수에 대한 일이라면 나중에 가도 되니-”

 

“아뇨, 그리폰. 보내줘요.”

 

흐레스벨그는 하르페이아를 저지하려는 그리폰의 말을 끊었다. 케이크를 들고 하르페이아가 방을 나서자 흐레스벨그는 말을 이었다.

 

“저 각오에 찬 눈을 봐요. 마치 뽀끄루 대마왕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은 매지컬 모모의 용기 같았죠. 그 편지가 무슨 내용일지는 몰라도 하르페이아는 어떤 각오를 했나봅니다.”

 

 

 

하르페이아는 케이크를 들고 복도를 달렸다. 휘갈긴 필체의 주인이 다름을 알 수 있었지만, 중요한 건 내용이었다. 그녀는 오르카호의 맨 끝에 있는 수복실로 향하면서 카드에 적힌 내용을 연신 되뇌었다.

 

“병실로 찾아와줘, 병실로 찾아와줘, 병실로 찾아와줘, 병실로 찾아와줘, 병실로 찾아와줘...”

 

미안함, 부끄러움, 스스로를 향한 분노, 기쁨. 만감이 그녀의 마음속을 떠다니며 어지러이 덧대어졌다. 각양각색으로 맞춰진 조각은 하르페이아에게 새로이 주어진 기회를 보여주었다. 풀려고 했던 왜곡된 오해가 자신의 뜻과는 다르게 더 심하게 휘어져 오히려 리마토르를 찌르는 순간, 전하고 싶어도 닿지 않았던 말을 이제야 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리마토르 본인이 불렀으니 더더욱.

 

“교수님...”

 

미안한 마음 하나만이 아니었다. 존경심, 어쩌면 그보다 더 클 연심이 섞여있었기에 하르페이아는 여태까지 더 모포 안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혼자 담아두려고 해도 계속 타오르는 화롯가의 불꽃이 그녀를 삼켰기 때문에 돌아온 죄책감은 더욱 컸다. 그렇기 때문에 리마토르의 부름이 그녀에게는 목마른 사막의 나그네가 만난 우기처럼 더욱 애틋했다. 그 마음이 이끄는 그대로 그녀는 수복실에 들어섰다. 근무 중인 리제가 눈 상태를 보고 치료해주겠다는 것도 무시한 그녀는 입원자 이름을 확인하고 문을 열었다.

 

 

그토록 보고픈 

 

 

미안한

 

 

사랑하는

 

 

그가 있었다.

 

 

 



 

리마토르는 늘 자신을 찾는 손님들을 맞고 있었다. 무료한 병상 생활이라는 고역을 조금이나마 잊게 해주는 건 연구와 접객이 전부였기에 그는 자신을 찾아오는 손님들과 시간을 나누는 걸 엄연한 휴식으로 분류했다. 하지만 오늘 자신을 찾아온 칸과 아스널로부터 시위대가 어떻게 처분되었는지 듣자 수심이 깊어졌다.

 

“각 부대로 처벌권한이 넘어가서 지휘관들이 자체적인 처분을 내렸다니, 솜방망이 처벌이군요.”

 

“꼭 그런 것만은 아니네. 마리가 직접 찾아와서 그대에게 사과한 만큼 스틸라인은 아주 탈탈 털렸지. 단체로 징계받고 그린캠프로 보내진 인원만 수십 명에 달할 정도니 말이야. 스프리건도 당분간 휴간을 선언했으니 아머드 메이든 측으로도 압력이 들어간 걸로 보이네.”

 

“배틀 메이드도 라비아타와 콘스탄챠가 엄히 훈계했다고 하고, 스카이 나이츠의 그리폰은 흐레스벨그가 기강을 잡겠다고 했으니 유야무야 넘어가지는 않았을 거야. 물론 그 정도로는 당신을 이렇게 만든 책임으로 한참 약하기는 하지만.”

 

칸은 리마토르 옆자리에 앉아 그의 손에 깍지를 꼈다. 아스널 앞에서 대놓고 애정행각을 벌이기가 부끄러웠던 그가 담요로 손을 덮자 아스널은 오늘도 달달한 둘의 관계를 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덥군. 에어컨이라도 틀어줄까?”

 

“아뇨, 괜찮아요.”

 

“그럼 벗을까?”

 

아스널의 말에 리마토르가 선을 긋자 칸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말을 받았다. 목덜미를 살짝 내리자 눈에 들어오는 그녀의 관능적인 쇄골에 그의 머릿속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

 

“아스널, 에어컨 틀어주세요.”

 

그나마 남아있는 이성으로 높아지던 수위를 통제한 리마토르는 속으로 시름을 놓았다. 칸은 자신의 애정행각에 벽을 세우는 그를 약간 불만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좋은 생각을 떠올리고 그를 끌어안았다. 붉어진 리마토르의 귀를 보고 그의 감정 상태를 파악한 그녀는 그를 완전히 갖고 노는 목소리로 말했다.

 

“에어컨 틀어줄게. 므네모시네가 많이 쓰는 방법이 있어. 후-”

 

그와 살결을 맞대고 귀에 바람을 불자 리마토르는 반사적으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열기가 식혀지기는커녕 더 뜨겁게 달궈진 그의 얼굴을 보며 칸은 능청스럽게 물었다.

 

“어라? 아직도 많이 더운가 봐?

 

아스널,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얼굴은 붉어져 열이 나는데 땀을 흘리지 않는다는 건 열사병 증상일 수 있지. 즉시 시원하게 만들어서 응급처치를 해야 한다네.”

 

“좋은 조언이군. 잘 들었지? 시원하게 만들어야 한다니까 일단 상의부터 벗길게.”

 

짜고 치는 고스톱 같은 대화가 오가자 칸은 그의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자신에게만 감정을 보여주던 칸이 이제는 아예 아스널과 성격이 비슷해진 것 같아지자 리마토르는 급히 그녀를 제지했다.

 

“잠깐만요! 아스널이 보고 있잖아요!”

 

“아, 난 신경 쓰지 말고 편히 하라고. 방해되지 않게 팝콘만 먹고 있겠네.”

 

“들었지? 신경 안 써도 돼.”

 

“잠시만요! 저 환자라고요!”

 

“나도 환자야. 당신에게 빌려준 사랑의 빚을 받아내는 환자(還子).”

 

“이게 삼정의 문란이었나요?”

 

자연스러운 언어유희까지 사용해가며 자신의 환자복을 벗기려는 칸의 모습에 리마토르는 퇴원하는 순간 도로 입원해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생각이 어떻든 칸이 야릇한 미소를 걸고 환자복 단추를 거의 다 푼 순간, 병실문이 노크도 없이 벌컥 열렸다.

 

“교수님...”

 

리마토르에게는 안도를, 칸에게는 아까움을 안겨준 상대가 누군지 알고자 병실 안의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돌렸다. 세 명의 시야가 닿은 곳에는 눈이 새빨갛게 충혈되다 못해 출혈이 일어나 얼룩덜룩하게 된 하르페이아가 부스스한 산발을 하고 케이크를 들고 있었다.

 

“하르페이아?”

 

뜻밖의 방문에 그는 뭐라 말해야할지 순간 갈피를 잡지 못했다. 하르페이아에게는 한창 여론이 타오를 때는 잘못 접근했다가 공격이 커질까봐 다가가지 못했고, 사건이 끝난 후에도 괜히 접촉했다가 문제가 불거질 것을 우려해서 먼저 찾아가지 못했다. 하르페이아도 자신과 접촉하기 곤란한 상황이라고 생각하여 나중에 강단에 설 때야 다시 이야기하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그녀가 갑작스럽게 찾아왔으니 리마토르에게는 상당히 뜻밖의 일이었다. 그것도 겨우 5일 만에 처참한 몰골로 찾아왔으니 더욱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교수... 님... 죄, 죄송해요...!”

 

분명 생각이 많았는데. 하르페이아는 리마토르를 보는 순간 생각이 전부 멎어버렸다. 미안하다는 말도, 정말로 그러려고 한 게 아니라는 말도,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말보다 감정이 먼저 올라왔다. 자신이 사랑하고 있는 리마토르가 칸에게 안겨 있다는 사실은 전에 받아들였을 텐데 눈으로 보자 견딜 수 없게 아팠다. 미안한 말보다 앞선 질투와 부러움의 감정은 이미 수없이 노고했을 눈으로 다시 흘러나왔다. 그런 순간에도 리마토르에게 사과하고 싶었기에 그녀는 울먹임이 섞인 목소리로 사과를 전했다.

 

“이것 참... 자자, 울지 말고 그쳐 보게나.”

 

하르페이아가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눈물을 터뜨리자 칸과 아스널은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종잡을 수 없었다. 우선 아스널이 그녀를 달랬지만 하르페이아는 히끅거리면서 리마토르의 앞에 주저앉았다. 달래려고 해도 좀처럼 눈물을 그칠 기미가 안 보이자 칸은 일단 다 울게 내버려두자는 의견을 냈다. 그 말에 따라 하르페이아가 한참동안 울게 두려던 아스널은 하르페이아가 왜 찾아왔는가 머리를 굴렸다.

 

‘분명 그냥 찾아온 건 아닐 거야. 죄송하다는 말과 들고 온 케이크, 울음을 터뜨리는 걸 보면 전에 있던 사건의 사과가 유력한 이유겠지.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울음을 터뜨릴 이유가 있나? 눈 상태가 저렇게 안 좋아질 정도로 심하게 울 이유가 단순한 죄책감이라고 보기는 어려워.

 

그럼 하르페이아는 리마토르에게 어떤 식의 감정적 빚을 갖고 있다는 건데... 설마 일방적인 연심인가? 아니야, 근거가 부족해. 그렇지만 이렇게 서럽게 울 정도면 감정적인 이유가 없는 게 더 말이 안 돼. 아무래도 천천히 물어보면서 이유를 알아내는 수밖에 없나.’

 

하르페이아에게 직접 답을 듣는다는 결론에 도달한 아스널은 고개를 돌려 하르페이아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지만 아까보다는 굵기가 얕아진 하르페이아에게 리마토르가 눈믈을 닦아줄 휴지를 건넸다.

 

“괜찮아요?”

 

“ㄴ, 네...”

 

서럽게 흐르던 눈물을 훔친 하르페이아는 리마토르를 향한 시선을 거두어 바닥을 바라보았다. 추태를 보였다는 부끄러움과 보고 싶던 대상이 눈앞에 있다는 행복함이 동시에 튀어나와 그녀의 볼을 붉게 물들였다.

 

“가짜뉴스 사건 터지고는 처음이네요.”

 

“죄, 죄송해요. 제가 먼저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죄송은 어느 나라 소나무야. 이제 와서 그런 말할 거면 처음부터 기자회견을 하지 말던가.”

 

하르페이아가 쭈뼛거리며 대답하는 와중에도 리마토르를 향해 눈길을 보내는 모습이 영 불편했던 칸은 일부러 톡 쏘아붙였다. 그 말을 들은 하르페이아가 눈에 띄게 의기소침해졌기에 리마토르는 둘 사이에서 난처한 입장에 처했다.

 

“칸, 조금만 자제를 부탁할게요. 하르페이아, 너무 의기소침하지 말아도 돼요.”

 

“그... 기자회견은 진짜 의도한 게 아니었어요. 스프리건이 그렇게 조작할지도 몰랐고, 저도 교수님께 그렇게 폐가 될 줄 알았으면 안 그랬을 거에요. 정말, 정말 죄송해요.”

 

“괜찮아요. 고의가 아니었으니까요.”

 

“괜찮기는 뭐가 괜찮아. 당신 상태가 이렇게 된 거 안 보여?”

 

리마토르가 하르페이아를 다독여주자 칸은 또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하르페이아의 의도가 어땠든 결과적으로 리마토르를 향한 시위대의 린치를 촉발시키는 원인이 되었다는 사실은 변함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하르페이아를 고운 눈길로 볼 수 없었다. 리마토르 역시 이를 알고 있었기에 칸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당신 상태를 봐. 이게 사과로 넘어갈 일은 아니잖아.”

 

“알아요. 그렇지만 하르페이아도 고의는-”

 

“고의가 없어도! 당신이 이렇게 된 게 중요한 거라고!”

 

칸의 언성이 높아지자 리마토르와 하르페이아, 구경하던 아스널까지 모두 움찔거렸다. 칸의 뜻을 존중하면서도 하르페이아가 혹여 불편할까 상황을 원만하게 넘기려고 한 리마토르였지만, 그의 태도가 칸에게는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것만 같아 더욱 야속하게 느껴졌다. 칸은 리마토르의 눈을 마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내가 당신 다쳤다는 소식 듣고 얼마나 놀랐는데. 스프리건 방 조사하는 것도 다 제치고 병실로 왔다고. 난 당신 몸 상태 안 좋은 거 때문에 하루라도 당신 곁에 안 있으면 당신이 걱정되어서 견딜 수가 없는데, 당신은 하르페이아 마음을 더 신경 쓰는 거야?”

 

서운함 가득한 목소리에 리마토르는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그는 분노보다 질투가 더 많이 들어간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잔잔하게 답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칸 마음 몰라줘서 미안해요. 당연히 저도 칸을 더 신경 쓰죠. 그게 당연한 거니까요.”

 

“몰라, 당신은 내가 얼마나 걱정하는지 잘 알지도 못하잖아.”

 

“그럴 리가요. 할 일 다 제치고 이렇게 매일 찾아와주는 것만으로도 정말 고마워요.”

 

모난 부분을 살살 달래는 리마토르의 말에 칸은 툴툴대면서도 삐졌던 마음이 조금씩 풀렸다. 그러나 그 광경을 보면서 점점 마음이 심란해지는 이도 있었다.

 

“...두 분, 사이가 정말 좋으시네요.”

 

“어, 아! 그렇죠.”

 

눈앞에서 칸과 리마토르의 대화가 오가는 걸 본 하르페이아는 멍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르페이아에게 신경 쓰는 걸 깜빡 잊고 있었던 리마토르는 그제야 상황을 마저 수습하러 화두를 돌리려고 했으나, 하르페이아는 멈췄던 눈물을 한줄기 흘리면서 리마토르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가뜩이나 심한 눈 상태는 실핏줄이 또 터져있었다. 피가 섞여 붉어진 눈물줄기가 말하고픈 감정의 상태를 보여주듯 하얀 하르페이아의 볼을 타고 내려갔다.

 

“저도, 저도 교수님께 사랑받고 싶어요.”

 

“...뭐?”

 

하르페이아가 입을 열자 리마토르는 예상을 아득히 벗어나는 발언에 이제 칼바람이 부리라는 직감이 들었고, 칸은 도끼눈을 뜨고 하르페이아를 바라보았다. 하르페이아는 칸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리마토르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교수님이 안 된다고 해서 참으려고 했는데... 도저히 억누를 수가 없어요. 정말로, 진심으로 사랑해요 교수님.”

 

“하르페이아. 당장 그 손 떼.”

 

피눈물이 하르페이아가 맞잡은 리마토르의 손등 위로 뚝뚝 떨어졌다. 자신이 보는 앞에서 벌어지는 상식을 초월한 상황에 칸이 취한 대응 방식은 벼려낸 칼을 쥐는 것이었다. 하르페이아도 칸의 태도가 날카로워짐은 알았지만 오히려 더 도발적으로 나왔다.

 

“칸 대장님. 사랑 때문에 아파본 적 있으세요? 칸 대장님을 생각해서 포기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교수님은 저 때문에 다쳤는데도 케이크까지 보내서 저를 어루만져주시더라고요. 그 손길이 너무 따뜻해서, 저는 더 이상 사랑 때문에 안 아프려고 해요.”

 

“더 이상은 참지 않겠어. 마지막으로 경고한다. 그 손 떼.”

 

하르페이아의 말은 언뜻 정돈된 것처럼 보였지만 앞과 뒤가 연결되지 않았다. 하르페이아의 감정이 심각하게 위태로움을 파악한 리마토르와 아스널은 이 이상 갔다간 진짜 칸이 유혈사태를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예상을 바탕으로 빠르게 행동에 나섰다.

 

“하르페이아. 잠깐 나랑 같이 나가지.”

 

“싫어요! 교수님이랑 있을 거에요!”

 

“칸, 잠시 둘이서 대화할까요?”

 

“당신, 똑바로 설명해야할 거야.”

 

아스널이 몸부림치며 반항하는 하르페이아를 끌고 병실 밖으로 나가자 리마토르는 간신히 한숨 돌렸다고 생각하며 칸에게 시선을 돌렸다. 한눈에 봐도 일촉즉발의 상태인 칸에게 이 모든 상황을 설명해야한다는 난제가 하나 남았지만 그는 물러설 길이 남지 않았기에 정면 돌파를 택했다.

 

“처음에 스프리건이 올렸던 기사에 나온 영상부터 설명해. 하르페이아랑 당신이 왜 입을 맞추고 있었던 거야.”

 

“결론부터 말하면 하르페이아가 기습적으로 한 거였어요. 제가 실용주의 사상가 존 듀이의 저서를 여러 권 찾아 기분 좋게 연구실에 들어서니까 하르페이아가 설명해달라고 해서 설명을 해줬는데, 갑자기 제게 좋아한다고 고백을 하더라고요. 저는 이미 임자가 있는 몸이라고 잘 달랬더니 울면서 수긍하다가 저한테 예고 없이 입을 맞췄어요. 그게 전부에요.”

 

“...그 말을 내가 믿으라고? 근거는?”

 

“뮤지컬 뒤풀이 때 하르페이아가 벌칙주 마시고 제게 한 말이요. 근거 없이 그런 말이 나온 건 아니니까요.”

 

“.....”

 

칸은 미간에 엷은 주름을 잡으며 생각에 잠겼다. 간혹 그를 흘겨보면서 그가 한 말의 신빙성을 판단하던 그녀는 감정과는 별개로 신뢰할만하다고 결론지었다.

 

“근거가 아주 없는 건 아니네. 믿어주겠어.

 

그럼 다음, 하르페이아에게 케이크는 왜 보냈어?”

 

“그건 저도 처음 듣는 말이에요. 제가 케이크를 보낼 이유가 없잖아요.”

 

“이유는 차고 넘치지. 하르페이아랑 불륜 관계였다면 말이야.”

 

“절대 아니에요. 이건 제가 장담 가능해요.”

 

“도둑이 자수하는 경우가 얼마나 되겠어. 당신의 주장은 객관적으로 볼 수 없어. 그 케이크에 대해서만 이야기 해봐.”

 

후사르랑 대화하느라 신경을 쏟았던 걸 이유로 질투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르게 차가운 태도로 칸이 일관하자 리마토르는 몸에 소름이 돋았다. 거의 취조에 가깝게 그를 심문하자 리마토르도 긴장의 끈을 바짝 조이며 대답에 임했다.

 

“케이크는 정말 모르는 일이에요. 하르페이아가 들고 온 케이크에 붙은 편지를 봐요. 제가 썼다고 하지만 필체가 전혀 다르잖아요.”

 

“필체야 얼마든지 대필이 가능하지.”

 

“제가 그럴 이유가 뭐가 있어요. 그리고 이 케이크는 아우로라가 만들었다는 인증마크가 찍혀있는데, 저는 여기에 케이크를 주문한 적이 없어요. 이건 주문내역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에요.”

 

“아우로라에게 말해서 주문내역에 기재하지 않는 ‘비공식적인’ 주문으로 처리했다면?”

 

“그럼 제 참치 거래내역을 조회해보세요. 그건 오르카호 전산망에 등록된 거라 수정도 불가능해요.”

 

“...그건 일리가 있군. 확인해보지.”

 

작은 가능성에도 이의를 제기하던 칸은 그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충분한 증거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지휘관용 패드로 리마토르의 통장 거래 내역을 조회하던 칸은 그의 말이 사실로 드러나자 의심을 한층 누그러뜨렸다.

 

“당신 말이 맞네. 케이크를 구매했으면 출금 내역이 있어야 하는데 없어. 현금 결제를 하려고 해도 당신은 입원한 이래 병실 밖으로 외출한 적이 없고, 아우로라도 병실을 찾아온 적이 없으니 검증이 되네.”

 

“제가 이런 문제는 거짓말하면 안 되죠.”

 

“그럼 이건 다른 문제가 되네. 누가 당신을 사칭해서 하르페이아에게 케이크를 보냈지?”

 

늘어난 수수께끼를 두고 칸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때 아스널이 땀을 닦으며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후, 하르페이아는 겨우 달래서 스카이 나이츠로 돌려보냈네. 이거 전선도 아닌데 진땀을 흘리게 하는군.”

 

“아스널, 하르페이아가 더 말한 거 없어?”

 

“음? 교수님을 포기할 수 없다고 발악하기는 했는데 내가 보기에는 정서적으로 많이 불안정해보였네. 리마토르에게 일반적인 감정보다 깊이 있는 감정을 가진 건 사실로 보이지만, 그것 때문에 오히려 자신이 잘못해서 리마토르를 다치게 했다는 죄책감이 심화된 걸로 보이네. 그래서 리마토르가 자신을 다독여주자 사랑을 운운하는 것 같고.”

 

“역시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었군요. 하...”

 

리마토르는 머리를 싸매쥐었다. 가짜뉴스 사건이 지나갔음에도 남겨진 여파는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인까지 삼키고 있다는 사실이 괴롭기 그지 없었다. 하르페이아가 자신에게 고백했던 연심을 알아버렸기에 그는 하르페이아가 더욱 안쓰러웠다.

 

“너무 상심하지 말게나. 하르페이아와는 내가 지속적으로 상담을 진행하겠네. 그대가 맡아봤자 좋은 일은 없을 테니 말이야.”

 

“고마워요, 아스널. 제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온 후로 지식을 가진 사람이 둘이 되니 이럴 때는 편하네요.”

 

“시답잖은 농담은 됐네.”

 

리마토르가 애써 절망적인 분위기를 환기하려고 했지만 아스널은 칸에게 신경을 쓰라는 눈치를 주며 대화를 매듭지었다.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던 칸은 리마토르가 자신에게 보내는 시선을 느끼고 입을 열었다.

 

“당신이 정말 거절했는지 확신이 들지 않아.”

 

“칸, 정말이에요. 하르페이아도 제가 안 된다고 말했었다고 언급했잖아요.”

 

“그 점도 근거로 삼을 수 있겠네. 그렇지만... 당신을 믿기 어려워.”

 

칸의 말을 뒤집으면 사랑의 기반이 흔들린다는 뜻이었다. 그 속뜻을 알아차린 리마토르는 황망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녀에게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려고 했으나 칸은 회의적인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상황을 보다 못한 아스널은 리마토르를 두둔하며 중재에 나섰다.

 

“칸, 리마토르가 거짓을 말하는 걸로 보이지는 않아. 감성이 앞서는 건 알지만 이성적으로 판단하라고.”

 

“끼어들지 마. 이건 나랑 리마토르의 문제야.”

 

“감성에서 한 단계 진화한 시각으로 접근하자는 거지. 이성이 점점 발달하는 사고라고 주장한 철학자도 있잖아.”

 

“맞아요! 헤겔, 게오르기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의 주장이 그랬죠.”

 

아스널이 넌지시 던진 힌트를 리마토르는 놓치지 않고 잡아냈다. 주제가 자연스럽게 철학으로 넘어가려고 하자 칸은 자리를 뜨려고 했지만, 리마토르는 그의 손목을 붙잡으며 잠깐만 들어달라고 부탁했다. 그의 간절함이 느껴졌기에 그녀의 안에서 한 번만 그를 더 믿어보고 싶지 않냐는 마음의 소리가 그녀의 다리를 붙잡았다. 잠시 내적 갈등을 겪던 칸은 마지막으로 속아준다는 심산으로 그에게 말했다.

 

“그래, 한 번 말해봐.”

 

칸의 승낙이 떨어지자 리마토르는 바로 설명을 시작했다.

 

헤겔은 칸트가 처음 제시한 독일의 관념론을 완성한 학자로 역사학, 미학, 종교철학, 인식론 등 사상적 방대함에 있어 수많은 철학자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거장입니다. 헤겔의 사상에 연관된 학자만 해도 스스로 헤겔의 라이벌이라고 자부한 쇼펜하우어, 변증법을 통한 유신론적 실존주의를 제창한 키르케고르, 변증법에 유물론을 적용해 세상을 뒤집어놓은 마르크스 등 철학사에 굵직한 한 획을 그은 사람들이죠. 그만큼 헤겔 철학의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서론이 기네.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

 

평소와는 다르게 칸은 리마토르의 말을 인내심 있게 들어주지 않았다. 가뜩이나 갑작스러운 하르페이아와의 충돌로 예민해졌는데, 찌라시 사건의 발단이 되었던 하르페이아와 리마토르의 기사의 사실 여부를 다루며 날이 잔뜩 선 상태였다. 그녀의 흥미를 끌지 못하면 뒷일을 장담하지 못함을 직감한 리마토르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 서론을 급히 마쳤다.

 

“알겠어요. 헤겔의 주요 저서인 <정신현상학>부터 보죠. 이 책의 제목이 헤겔의 대표적인 사상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헤겔은 감각-지각-오성-자기의식-이성-정신-절대지라는 7단계를 거쳐서 의식이 절대정신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어요. 이 중 감각부터 이성까지는 주관정신정신은 객관정신절대지는 절대정신에 속한답니다. 바로 들여다보죠.

 

갓 태어난 아기를 생각해보세요. 아기의 의식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나요? 그저 무언가가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만을 자각합니다. 세상과의 상호작용 없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이 자신의 감각이 닿는 범위만을 바라보죠. 이게 감각이랍니다. 

 

갓난아기는 성장함에 따라 기어 다닐 수 있게 되죠. 온갖 곳을 기어 다니면서 아기는 특정한 대상이 어떤 모양이며, 어떤 색이고, 촉감이 어떤지를 알게 됩니다. 단순히 자신의 감각 범위 안에 있냐 없냐를 아는 걸 넘어 자신이 감각으로 인식할 수 없는 범위에 있어도 그 대상이 존재함을 깨닫죠. 헤겔은 이렇게 외부의 대상을 감각하는 데 집착하는 걸 버리고 특정한 관념을 갖게 되는 걸 일컬어 지각이라고 했어요.

 

기어다니던 아기는 걸음마를 떼고 아장아장 걸어 다니면서 다양한 물건들을 만져봅니다. 어떤 건 잡아당기면 열리고, 어떤 건 버튼을 누르면 닫히고, 어떤 건 두드리면 소리가 나는 것처럼 사건의 인과관계를 어렴풋이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에게는 누를 버튼도 없고, 잡아당길 손잡이도 없다는 걸 배웁니다. 이것이 오성의 단계죠.

 

아이는 조금 더 자라 또래 아이들과 만나게 됩니다. 그 과정 속에서 자신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걸 알게 되죠. 다른 사람과 구분되는 자기 자신의 존재를 명확히 인지하는데, 이것이 자기의식입니다. 자기의식을 갖게 되면서 아이의 초점은 외부에서 내부로 옮겨갑니다.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싶은 욕구에 빠져 다른 사람과 다투게 되죠. 다른 사람을 누르고서라도 자신이란 존재를 인정받고 싶었던 거니까요. 이런 인정투쟁의 과정 속에서 아이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죽이면 자신을 인정해줄 사람이 없어져버리니, 차라리 살려서 자기 아래에 두기로 결정합니다. 이것이 바로 노예제도의 탄생이며, 나아가 신분제로 유지되는 봉건국가의 발단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르페이아의 행동도 인정투쟁이었다고? 당신의 행동은 노예가 된 건가?”

 

“하르페이아의 경우는 그리 볼 수 있지만 제 경우를 그렇게 엮기는 어려워요. 남은 3단계를 마저 보고 설명할게요.”


“그래. 해봐.”

 

칸은 리마토르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겠다고 잠정적으로 승인했다. 하지만 여전히 감정은 무뎌지지 않았기에 그를 바라보는 눈에 들어간 힘을 빼지 않았다.

 

“사람들의 급을 나누어 국가를 유지하는 체제는 오래 갔습니다. 하지만 그 체제도 붕괴하고 말았죠. 왜냐? 노예는 정신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어도 신체 및 사회적으로 예속된 상태고, 주인은 인정투쟁에서 승리해 노예 위에 군림한다고 해도 지속적으로 노예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 결국 패배한 것과 다름없게 되니까요. 인정투쟁의 끝은 모두가 노예가 되는 겁니다. 이런 구조는 사회 전체를 이루는 개개인의 내면에도 자리 잡고 있기에 자기의식을 가진 모든 사람들은 주인의식과 노예의식의 싸움 끝에 불행에 빠지게 됩니다.

 

이런 불행에서 헤어 나오기 위해 인간은 정신적으로 한 단계 더 올라가야 합니다. 불행을 가만히 관조하다보면 어느 순간 보이는 특정한 규칙을 찾아 손에 쥐어야 하죠. 그게 이성입니다. 그런데 이 이성은 개인적인 게 아니에요. 제가 모든 인간이 주인의식과 노예의식을 갖고 있기에 사회에도 신분제가 만들어졌다고 말한 것처럼, 이 이성도 개개인을 초월해 사회 전체에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즉, 이성은 사회라는 마리오네트를 움직이는 줄입니다.”

 

“그럼 세상은 보편적인 이성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말인가? 나도, 당신도, 사령관도, 레모네이드들도 전부 이성에 의해 움직이는 인형이라고?”

 

칸은 혀를 차면서 싸늘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리마토르는 고개를 젓지도, 끄덕이지도 않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헤겔의 주장에 따르면 세상은 보편이성이라는 감독이 연출하는 영화에 불과하죠. 하지만 이성까지 주관정신에 속하는 이유는 그 본질은 개개인에 닿아있어서 그렇습니다. 객관정신에 속하는 정신의 단계에서부터는 이야기가 달라져요.”

 

“그래? 더 말해봐.”

 

리마토르는 발을 잘못 디디면 아래로 추락해버릴 크레바스 틈새를 헤치는 탐험가의 심정으로 다음에 할 말을 계산했다. <정신현상학>의 이야기를 그대로 가려했으나, 그녀의 마음을 다독일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 그는 헤겔의 다른 저작인 <법철학>을 기억에서 꺼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그렇게 욕하면서 공부했던 걸 여기에 써먹네요.’

 

“정신 부분부터는 헤겔의 또 다른 책인 <법철학>과 연계해서 보도록 하죠. 헤겔은 개인의 단계에서 세상을 보는 주관정신을 넘어서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기 시작하는 객관정신 단계부터는 더 넒은 시각을 요구했어요. 인간이라는 존재라면 세상을 살면서 반드시 지켜야하는 규범이 있으며, 그것이 바로 도덕법칙입니다. 공동체의 울타리인 도덕법칙개별자에게는 인륜성의 형태로 나타나는데, 도덕법칙 안에서 모든 이의 인륜성 중에 강제해서라도 지켜야하는 부분이 법이 됩니다. 법이 보장하고자 하는 바, 다시 말해 강제성을 띠는 한이 있어도 준수될 필요가 있는 인륜성이 인간의 자유입니다.

 

그런데 제가 방금 법은 최소한의 인륜성이라고 했죠. 최대한의 강제 조항이라도 될까 말까인데, 최소한의 강제성만으로 인간의 자유를 오롯이 보장할 수 있을까요? 그게 됐으면 신분제와 봉건제가 등장하지 않았을 겁니다. 즉, 법은 인간의 자유를 보장하기에 역부족이에요. 이는 역사에서 쭉 나타나는데, 중세 시대에서는 신의 세계를 위해 인간의 세계를 포기했죠. 근대에 들어서 이 문제가 해결되나 싶었지만 오히려 지나치게 이성을 강조함에 따라 인간의 세계만 챙겨지고 신의 세계가 버려졌습니다. 헤겔이 보기에는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가 합쳐질 때 비로소 인간의 자유가 제대로 실현될 수 있는데, 그게 정신의 단계에서는 해결되지 못한 거죠.

 

그래서 헤겔은 객관정신보다 더 높은 단계, 절대정신을 말합니다. 절대정신에 속하는 게 의식 7단계에서 마지막에 있는 절대지죠. 헤겔은 절대지의 단계에 이르러서야 신과 인간의 세계가 통합된다고 생각했어요. 이런 세계가 도래하면 더 이상 개인의 존재는 의미가 없어지죠. 세계가 곧 신이고 개인이며, 개인의 주관이 우주이자 객관적 시선이니까요. 절대정신은 세계를 이루는 모든 걸 관통하는 신과 같은 하나의 법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아주 흥미로운 반전이 있어요. 헤겔은 가장 기초적인 감각에서 출발해 세계를 꿰뚫는 절대정신에 이르기까지 모두 본질은 다를 바가 없다고 보았어요. 절대정신은 감각 안에 잠들어 있고, 그것은 의식 7단계를 거치며 한 단계 안에서의 한계와 좌절에 부딪칠 때마다 점차 원래 상태로 회귀하는 것입니다. 헤겔은 이 과정이 변증법이라고 보았어요. 최초의 명제인 정명제가 있으면 정명제의 한계를 드러내는 반명제가 등장하고, 이 둘을 종합해 질적으로 향상된 합명제가 도출되는 것이죠. 변증법의 논리는 과거에서부터 계속 쓰였지만 거기에 변증법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체계화한 건 헤겔이었어요. 헤겔은 이 변증법이 세계를 절대정신에 이르게 하는 도구라고 주장했죠.

 

이 변증법의 요소 중에서도 헤겔이 특히 중시했던 게 지양(Aufhebung)이라는 개념이에요. 기존에 존재하는 관념을 보관하는 동시에 질적 향상을 이루어 기존의 관념을 폐기하는 것이죠. 거칠게 말하면 케시크가 칸이 되는 것과 같아요. 기존에 케시크라는 정명제는 한계상황이라는 반명제를 겪고 칸이라는 합명제로 거듭났는데, 이 과정에서 기존에 케시크라는 존재의 일부는 온존되었지만 결과적으로 칸이라는 새로운 존재로 바뀌었으니 기존 관념의 보관과 폐기가 일어난 거에요.”

 

“...드디어 적용하네. 이론 설명이 다 끝났으니 이제 접목으로 넘어가자고.”

 

자신을 예시로 들어서 지양의 개념을 설명하는 리마토르의 모습에서 칸은 그가 준비한 이야기가 끝났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리마토르는 아직 남은 이야기가 있다면서 설명을 연장했다.

 

“이런 변증법을 통해 절대정신에 이르면 한 가지 사실이 새로 밝혀집니다. 절대정신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즉자존재라는 사실이죠. 스스로 존재하는 신과 같은 절대정신은 자신을 대리하는 대자존재, 즉 세계를 만들고 그 안에 융합합니다. 감각에서 시작해 변증법을 거쳐 하나씩 올라가는 과정이 절대정신과 세계가 하나가 된 즉자대자존재라는 것이죠.

 

헤겔은 진리를 정신이 바라본 현상 그 자체에 대한 지각이라고 말했어요. 세계의 모든 것을 주관적인 방법으로 파악하다보면 객관적인 시각에 도달하게 되고, 나아가 사실 세계 전체가 하나의 정신으로 현상이라는 진리를 투명하게 보여준다고 주장한 거죠. 그래서 책 제목이 <정신현상학>입니다.”

 

설명을 마친 리마토르는 한숨을 돌렸다. 말을 너무 많이 해서 가쁜 숨을 고른 그는 비로소 칸이 듣고 싶던 이야기를 시작했다.

 

“칸의 입장에서 보면 저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겠죠.”

 

“그렇지. 나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정작 다른 여자와 놀아나는 모습을 보였으니까.”

 

“그렇게 파악한 건 뭔가요?”

 

“채집된 증거를 통해 내린 결론이지. 귀납적 추론에 의한 거야.”

 

“네, 이성에 의한 거죠. 헤겔의 주장에 따르면 이성은 주관 정신에 속합니다. 칸이 보는 칸 입장에서의 주관이 헤겔이 말한 진리의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론을 덧붙여서 내 주장을 깎아내리려고 하지 말고 내가 묻는 말에만 답해. 

 

증명해봐, 하르페이아랑 있었던 게 불륜이 아님을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통해서 말이야.”

 

칸은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대화의 주도권이 완전히 그녀에게 넘어가자 리마토르는 여전히 자신이 불리한 상황임을 자각했다. 속으로 평정심을 모은 그는 여태까지 설명하던 내용을 모아 답을 구성했다. 입을 여는 그의 눈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객관정신에 해당하는 정신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하르페이아의 행동은 일방적인 작용이었어요. 변증법을 통해 검증하면 

 

정명제- 하르페이아는 저와 불륜을 저질렀다.

반명제- 제가 하르페이아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물증이 나왔다.

합명제- 하르페이아와 제가 불륜을 저질렀다고 볼 수 없다.

 

라는 지양이 반영된 결과가 나오죠. 이를 통해 절대정신의 입장에 나아가서 진리로서의 현상을 바라볼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하르페이아와 제가 불륜을 저질렀다는 기존의 관념이 실제로 그러지 않음만 더 증명됩니다.

 

그리고 이건 <법철학>을 통해서도 말할 수 있어요. 헤겔은 결혼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고매한 인륜 관계라고 했는데, 내연은 인륜성에 기반을 두지 않아요. 그 때문에 수치심에서 자유로울 수 없죠. 이를 뒤집어 말하면 제가 하르페이아와 불륜 관계가 맞으면 수치심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아예 하지도 못했음을 뜻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칸에게 진솔하게 이야기한다는 건 제가 하르페이아와 불륜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 외에도 하나를 더 의미해요.

 

인륜성에 기초한 결혼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감정, 사랑을 가진 대상이 제게는 바로 칸이니까요.”

 

리마토르는 말에 확신을 담아 피하지 않고 당당히 그녀의 감정을 마주했다. 그의 말을 들은 칸은 대답 없이 눈을 감았다.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여줄지에 따라 자신이 한 헤겔 강의의 성패가 결정되고, 나아가 그녀와의 장래까지도 크게 바뀔 수 있기에 리마토르는 긴장을 가득 안고 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

 

한참을 그대로 있던 칸은 눈을 뜨고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힘이 들어가 있지만 그녀의 시선은 날카로운 대신 부드러웠다. 그녀가 어떤 말을 할지에 촉각을 곤두세운 리마토르는 그녀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먼저 입을 열 생각을 하지 못했다. 또 다시 그 상태로 몇 분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칸은 말문을 열었다.

 



“난 당신을 믿고 싶어. 당신이 나를 잡아주었던 그 상냥함이 거짓이 아니기를 바라고,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만큼 당신도 나를 사랑해주기를 꿈꾸거든.

 

그래서 이번 일에 특히 예민하게 반응했어. 내 사랑은 진심인데 당신의 사랑은 둘로 나뉘어 있을까봐 불안과 질투가 작용한 거 같아.

 

그렇지만 당신이 그렇게까지 말했으니 나도 당신의 진심을 믿어야지.

 


그게 사랑이니까.”

 



칸은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마토르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칸은 그의 입술에 검지를 갖다 대고 속삭였다.

 


“쉿. 고생했으니까 쉬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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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다. 분량 조절에 실패해서 헤겔 철학보다 스토리 분량이 확 늘어난 편이 되었네...


헤겔 철학은 특유의 방대함 때문에 이번 편에서는 가장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정신현상학>을 중심으로 사회에 초점을 맞춘 <법철학>을 약간 끌어왔어. 내용 자체도 니체처럼 해석이 분분하기 때문에 내가 이 편에서 쓴 비유는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 '헤겔 철학이란 이런 거다!'라고 확고히 받아들이지 않기를 바래.


자... 이제 감정의 사이에서 미아가 된 하르페이아와 감정에서 거의 벗어났지만 아직도 위태로운 칸이 있지. 이 둘이 주변 시선이나 규범 같은 걸 전부 무시하고 오롯이 감정에만 솔직해지면 어떻게 될까?


다음 편은 얀데레 에피소드로 찾아올게. 건강이 안 좋아져서 언제 다음 편이 나올지 장담은 못하지만 빠른 시일 내에 올 수 있도록 노력할게.



부족한 글 읽어줘서 정말 고맙다. 다들 좋은 일만 가득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