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가을도 끝자락이네."


형형색색으로 하나 둘 물들던 낙엽이 이제 완연히 발에 채일 정도가 되자 사령관은 하늘을 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시나브로 다가오는 계절은 올 때는 모르지만 늘상 돌이켜보면 성큼 다가와 있었다. 볼 때마다 푸르렀지만 오늘따라 가을의 공활함을 가득 담은 하늘은 지나간 시간의 흔적이 만든 사건의 지평선 같았다.


"시간이 훑은 흔적을 볼 때면 느끼는 이 싱숭생숭함.... 이런 기분이 드는 날에는 왠지 모르게 시를 읊고 싶어진단 말이지."


누가 자신을 보면 나이 든 사람 같다고 핀잔을 주었겠지만, 자신의 청취를 감추고 싶지 않은 사령관은 감정을 담아 떠오르는 시를 읊었다.



"세상에 가득 찬 가을이건만

내 손에는 텅 빈 허공뿐이다


생각해보니 가을이 되면

모든 건 텅 비어간다


나무도 볏단도 풀들도 나도

가진 걸 내놓고 자신을 드러낸다


가을은 세상에 가득 찼는데

나는 비어 허공이 된다


가을은 가득 찬 허공

가을은 텅 빈 풍요"



즉석에서 지은 자유시치고는 마음에 꽤 들었기에 사령관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자신의 작품을 다듬어 보려하자 한 쪽에서 박수를 치며 아스널이 걸어나왔다.


"훌륭하군. 그대가 이렇게 좋은 시인일 줄은 몰랐네."


"아스널? 언제부터 듣고 있었어?"


"그대가 식물원에서 들어왔을 때부터 보고 있었네. 계절이 바뀌는 냄새를 맡기에 이 곳만큼 더 좋은 곳도 달리 없지."


아스널은 그가 서 있던 자리에서 20m 가량 떨어진 벤치를 가리켰다. 단풍나무가 만든 은은한 붉은빛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게 계절의 감각을 완상하기에는 적격이었다.


"명당 잘 잡았네. 그보다도 계절이 바뀌는 냄새라니, 시적인 표현인데?"


"과찬이라네. 난 시에 대해서 아는 게 없다네."


"문학을 파고들면 복잡한 연구의 대상이지만,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시가 별 거 있나. 느낀 바를 풀어내면 되지."


아스널에게서 자신과 같은 자질을 얼핏 본 사령관은 그녀를 격려했다. 그의 말을 들은 아스널은 말없이 미소를 지었지만 자신감을 얻은 것처럼 보였다. 사령관은 그 점을 놓치지 않았다.


"Gray clouds처럼 어떤 걸로도 대체할 수 없는 아스널만의 세계를 노래하면 돼."


"흠, 그럼 나도 해볼까? 그대의 말을 들으니 무언가 떠오르는군."


"좋지, 한 번 듣고 싶어."


아스널을 꾀는데 성공한 사령관은 속으로 성공의 미소를 지었다. 아스널은 생각을 다듬더니 나직이 말을 풀어 시를 그렸다.



"가을에 깨어나

푸르른 하늘을 보고 있으면

이 세상 깊은 어디에 마르지 않는

사랑의 샘 하나 출렁이고 있을 것만 같다


가을에 깨어나

찬 바람이 연 마음의 창이

내 마음의 깊숙한 뜨거움을 꺼낸다

다시 고통하는 법을 익히기 시작해야겠다


가을에 깨어나

계절이 바뀌는 코스모스 꽃향기를 맡기 위하여

진정으로 진정으로 그대를 사랑한다는 한마디

가을 담은 사랑 편지를 쓰기 위하여


가을에 깨어나

가을을 본다"



낭송을 마친 아스널이 말문을 닫자 사령관은 반응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상당히 뛰어난 아스널의 문필력에 그는 말이 아닌 눈빛으로 경외를 표했다.


"어떤가? 괜찮았는가?


그 표정을 보니 말 안해도 알겠군."


아스널은 사령관의 표정을 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웃음에 드리운 가을을 본 사령관은 계절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잠시 멈췄던 사고를 깨운 그는 그녀의 말에 답했다.


"대단한데 아스널. 이렇게 뛰어난 실력을 갖고 있을 줄은 몰랐어."


"칭찬 고맙네. 예전에 읽었던 시집에서 인상 깊게 본 시를 변주한 건데 그렇게까지 말할 줄은 몰랐군."


"그걸 기억하고 사용하는 것도 능력이지. 내가 널 너무 몰랐던 거 같아."


"그리 느꼈나? 사실 나도 그대가 시를 말할지 몰랐네."



서로의 모름이 교차하자 둘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은은한 미소를 머금었다. 선선한 바람이 전하는 가을 내음이 둘을 감싸 안았다. 말 없이도 통한 둘의 순간이 계절에 새겨지고 있었다.









다음 달이면 겨울 온다는 생각에 가을 느낌 내보고 싶어서 순애보 아스널을 휘갈겨 써봤어. 교양 들었던 기억 살려서 쓰려고 했는데 역시 창작은 버겁네.


아스널이 변주했다는 시의 원본은 곽재구 시인의 <새벽 편지>라는 시야. 원문도 잔잔하지만 깊은 맛을 주니 한 번 읽어보길 추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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