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  우리집 브닐라 모음집 - 라스트오리진 채널 (arca.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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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화 



조만간 구조를 위해 함대가 올 것이라던 에바의 말과는 달리, 삼안 조선소에서의 생활은 예정보다 훨씬 길어졌습니다. 며칠, 길어야 몇 주 정도를 예상했던 일행이었지만, 벌써 수 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에바는 한번도 연락을 주지 않았습니다. 답답해지고 짜증도 날 법도 했지만, A와 일행들에겐 그럴 틈이 없었습니다.


졸지에 삼안산업 한국지부의 실질적 대표가 되어버린 A는, 한반도 각지에서 패잔 바이오로이드 부대 및 AGS, 거기에 몇몇 운 좋은 민간인들까지 몰려들면서 더더욱 바쁜 일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으로, 수많은 군용 AGS를 이용해 처절한 방어를 펼치던 중국 방향으로 철충 주력이 집중되면서, 한반도- 나아가 이 조선소 주변은 비교적 한적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여유를 반증하듯 일행들의 행색도 이전에 비해 한층 나아보였습니다. 한층 생기가 돌기 시작한 인간 난민들과 표정이 밝아진 더치걸들, 의료 사양 리제와 다프네 등의 도움으로 부상을 회복한 미호와 핀토 등이 대표적인 예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한편, 그 동안 점점 길어지던 이비의 머리칼은 어느새 눈에 띄게 치렁치렁해져 있었습니다. '보기도 좀 그렇고, 거추장스러우니 조만간 정리하겠다'는 이비에게 A는 긴 머리도 예쁘고 잘 어울린다고 대답합니다. 그녀는 괜히 비행기 띄우지 말라면서도 얼굴을 붉게 물들입니다. 


명목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대표자가 된 A는 주변에 자리잡은 수많은 바이오로이드들의 도움으로 업무를 수행합니다. 테마파크 인근에서 데려온 콘스탄챠와 바닐라는 업무 시간 동안 그의 곁의 머물며 사소한 것까지 챙겨주려 들고, C에게서 자유로워진 블랙 리리스는 근접 경호를 위해 거의 매 순간 A를 따라다녔습니다. 조선소 내의 조리 업무 전반을 관리하던 소완 또한, A의 식사만큼은 손수 준비하고자 노력했지요. 


이비가 가진 메이드로서의 입지는 언뜻 볼 때 상당히 애매해진 상황이라고도 볼 수 있었지만, 이비는 크게 개의치 않았습니다.





A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것이라는 점만은 분명했으니까요. 그것을 확실히 하고 싶은 마음 탓인지, 밤마다 A를 찾아오는 '의무방어전'의 빈도는 나날이 늘어만 갔습니다.


여느 밤과 같던 애정행위가 끝난 뒤, A는 그동안 꿋꿋이 간직하고 있던 반지를 살펴봅니다. 진작에 줬어야 했지만, 그간의 일 때문에 정신이 없어 너무도 오래 미뤄뒀던 일이지요.


그는 상황이 안전해지면 날을 잡아서 정식으로 이비에게 청혼하겠노라고 다짐합니다. 


그리고 다음날, 시라유리와 홍련, 유미 등 지휘소 인원들은 긴급한 일로 A를 호출합니다. 해도 채 뜨지 않은 이른 새벽에 갑작스레 불려나간 A는 세수도 하지 못한 채 회의실에 도착합니다. 그곳에서는 에바의 목소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죠.


A를 맞이한 에바는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하나씩 있다고 말문을 떼더니, 좋은 소식은 삼안-블랙리버 연합함대 중 일부 분함대가 곧 생존자 구출을 위해 도착할 거라는 사실이라고 전합니다. 


그리고 나쁜 소식은, 





중국 방면 전선이 사실상 무너지면서, 대기하고 있던 철충 세력들이 조선소 방향으로 대거 집결 중이라는 소식이었죠. 과장을 좀 보태서 한반도 전역의 철충들이 일제히 몰려오고 있다고 할 정도의 규모였습니다.


함대가 도착하기까지는 짧아도 사흘, 이 철충들이 교전 거리까지 도달하는데는 길어야 이틀이 걸릴 전망이라는 말을 덧붙인 에바는, '당신이라면 하루 남짓 정도는 어떻게든 살아남을 거라 믿는다'며 그대로 통신을 종료했습니다.


홍련과 시라유리, 그리고 발키리는 통신이 오기 전 실시했던 자체 정찰 결과, 에바의 말이 사실임을 확인해줍니다.


잠시 당황한 A였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방어 태세와 대피 준비를 서둘러 줄 것을 부탁합니다.


이비는 필연적인 희생이 따를 것임을 직감하고, A에게 이들 모두를 구할 수는 없을 것이라 충고하지만, A는 다른 모든 걸 버려두는 한이 있더라도, 여기 있는 (바이오로이드와 인격 모듈 탑재 AGS들을 포함한) 사람들 목숨만큼은 구해내겠다고 대꾸합니다.



32화





제대로 된 방어를 준비하기에는 벅찬 시간이었지만, 인간과 바이오로이드, AGS 모두의 협력으로 최소한의 대비는 갖출 수 있었습니다. 이 조선소는 본래부터 군용 시설이었던 만큼 상당한 수준의 방어시설이 갖추어져 있었으며, 시설 주둔 AGS급이 아니더라도 단순한 자동 포탑 또한 많은 수가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모두가 긴장하고 있을 무렵, 조선소 인근까지 도달한 삼안산업-블랙리버 연합 함대에서 통신이 날아듭니다. 스스로를 '세이렌'이라고 밝힌 앳된 바이오로이드(이 분함대의 지휘관이었습니다)는 '구조 대상은 삼안산업 또는 블랙리버의 주요 인물들로 한정되며, 그 밖의 인원들은 태울 수 없다는 명령을 받았다'고 발언합니다.


그러자 A는, 자신의 직권으로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인원들을 삼안 산업에 채용하고, 현 시간부로 그들 모두가 삼안산업 한국지부 주요 직원들이라고 선언합니다. 실질적 권한대행의 권한을 무시할 수 없었던 세이렌은, (내심 민간인들을 버려둬야 한다는 죄책감을 덜 수 있어 후련해진 표정으로) 나머지 인원들또한 구조하겠다고 약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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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도 보이지 않는 감염된 기계들의 파도, 그것이 일행들의 앞에 당도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무수한 철충 무리가 조선소로 쇄도하기 시작하자, 전투가 가능한 바이오로이드와 AGS, 거기에 더해 참전 경험이 있는 일부 노인들까지 가세한 방어세력은 약간의 시간을 버는 데 주력합니다. 적어도 비전투 인원들이 구조선이 안착할 부두까지 대피하는 데는 충분한 시간을 말이죠. 


A는 사전에 전투원들에게는 생존을 최우선으로 삼을 것, 필요하다면 뭐든 내던지고 와도 좋다고 명령하고, 비전투원들에게는 가방 한개 분량을 제외한 모든 소지품을 버리고 올 것을 지시했습니다. 덕분에 대피는 비교적 빠른 시간 안에 완료될 수 있었습니다. 전투원들 또한 일부 부상자를 제외하면 큰 인명피해 없이 항구 근처까지 후퇴하는데 성공합니다.


방어군은 유류창고까지 폭파해가며 처철한 저항을 이어갑니다. 그러나 몇 겹으로 이루어진 방어선은 점차 철충들의 기세에 눌려 후퇴를 반복하고, 마침내 거주 구역 및 공장 지대와 부두를 잇는 유일한 다리 앞까지 몰리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지점이었던 만큼, 이곳에 집중된 방어는 철충들의 파상공세로도 쉽사리 뚫리지 않았습니다. 바닷물을 극도로 경계하여 가까이 다가갈 엄두조차 내지 않는 철충들을 상대로, 도개교 형식의 이 다리는 나름 유효한 장애물이 될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모든 전투원들까지 다리를 건너자, 일행은 도개교를 들어올려 철충을 해안 조선소에 묶어두려 합니다.   



하지만 도개교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시설 전체를 제어하는 중앙 제어소가 손상된 탓으로 판단되었고, 유미의 신속한 진단 결과 시설 제어 시스템이 무력화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유미는 이를 우회하기 위해서는 상위 권한을 지닌 인간 관리자의 현장 접근이 필요하다고 밝힙니다. 


마침내 도개교 인근에 배치되었던 자동화 포탑들마저 가동을 멈추고, AGS와 바이오로이드 등이 남은 화력을 동원해 철충들을 저지하지만, 이들이 언제까지고 버틸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잠시 동안 고민하던 A는 시설 중앙 제어소 방향을 바라보고, 그의 생각을 눈치챈 이비는 그를 막으려 합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A가 빨랐습니다.





이비 주변에 있던 전직 스틸라인 병사들에게 '내가 갈 때까지 그녀가 움직이지 못하게 하라'는 명령을 내린 후, A는 이비에게 다가가 '언제까지고 자신을 잊지 말아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리고 그를 붙잡기 위해 버둥대는 이비의 손에 작은 상자 하나를 쥐어줍니다.


"당신이 죽으러 가는 꼴은 못 본다"며 발악하는 이비에게 A는, 


"내가 죽으러 가는 게 아냐. 너를 살리려고 가는 거지."


라고 마지막 한 마디를 남긴 뒤, 일부 자원자(바이오로이드, AGS)를 대동하고 시설 제어소로 향합니다. 블랙 리리스와 소완, 거기에 앵거 오브 호드 등이 섞인 자원자들은 능숙한 솜씨로 길을 열어가며 목적지까지 도달하지만, 그 과정에서 차례차례 목숨을 잃어갑니다.


시설 내에 도달했을 때는 A와 리리스, 소완 밖에 남지 않은 상황. 


이 순간 난데 없이 등장한 연결체 하나가 그들을 공격하고, 일행은 가까스로 놈을 뿌리친 뒤 시설 메인 컴퓨터에 도달합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소완은 목숨을 잃었고,





A와 블랙 리리스는 치명상을 입은 채, 숨만 붙은 채로 간신히 기대 앉아 있을 뿐이었습니다.


마지막 힘을 짜내어 권한을 재설정하고, 도개교를 작동시킨 A. 그는 자신이 살아나가기는 이미 글렀다고 판단합니다.


도개교가 작동된 것을 보고 그가 살아있음을 알아챈 이비는 무전을 통해 온갖 성토와 애원을 쏟아내지만, A에게는 그것에 일일히 대답할 기력이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세이렌에게서 통신이 들어옵니다. 조선소 전역에 모인 수많은 철충들 때문에 수송선들이 접안할 수 없다는 것이었죠. 하지만 A의 위치가 그곳에 있는 것으로 파악되기 때문에 화력을 투사할 수 없다고 그녀는 전합니다.


그러자 A는, 자신은 신경쓰지 말고 이 위치에 사격하라고 지시합니다.


곧 그의 주변으로 수많은 함대지 미사일과 함포가 착탄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마지막임을 느낀 A가 리리스에게 괜히 이런 데 끌여서 미안하다고 말하려던 순간, 리리스는 자신의 몸과 푸른색 로자 아줄로 그를 감싸고, 모든 것은 굉음에 휩싸입니다.


 



이비는 철충 무리와 함께 쑥대밭이 되어버린 조선소를 목도합니다. 간신히 형상만 유지한 채로 파괴되어 버린 시성 중앙 제어소를 포함해서요.


 믿기지 않는 현실에 한참을 가만히 서 있던 이비는, 아라를 비롯한 다른 스틸라인 식구들이 끌고 가다시피 해서야 겨우 수송선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그때서야 그녀의 손에 쥐어진 상자를 쳐다본 이비. 그녀는 자신의 주인이 남긴 마지막 물건을 조심스레 열어봅니다.





그곳에 들어있던 반지를 본 이비는 그대로 주저앉아 오열하기 시작합니다.


수송선은 점차 바다를 향해 멀어져가고, 다른 모두가 정 들었던 조선소의 마지막 모습을 바라보며 서 있을 때,


오직 이비만이 반지를 움겨쥔 채 주저앉아 흐느낄 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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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런 그녀의 위로, 작은 군용 VTOL기 하나가 파괴된 조선소를 향해 날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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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안 산업 특작 부대는 파괴된 조선소 한복판에서 '회수'한 '실험 자산'을 비밀 연구시설까지 무사히 이송합니다.


그곳에서 여러 기업 출신의 다국적 연구진과 함께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바로 에바 프로토타입이었습니다.


삼안 특작부대가 회수한 그 '자산'의 정체는 A. 아니, '간신히 A라고만 알아볼 수 있는 무언가'였습니다.


특작부대 지휘관은,


"이 정도면 계획명 '마지막 기원'은 실패했다고 봐야합니다. '인격 데이터 수집용 자산' 중에서 건진 거라곤 이거 하나 뿐인데, 그마저도 가장 보잘 것 없는 개체 아닙니까."


라며 회의감을 드러냅니다.


에바는 배우자였던 아담과 자신의 유전자를 사용한 여러 '시제품'들을 사회 각지에 뿌려놓고, 일명 '마지막 기원' 프로젝트- 즉, 그의 '진정한 자녀'를 완성하기 위해 사용될 인격 데이터를 수집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모든 시제품들이 철충 사태의 여파로 사망한 와중에, 유일하게 건질 수 있었던 A는 여러 시제품들 중에서도 가장 평범하고, 성취한 것도 없으며, 특정 분야에 비범한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닌.....모든 면에서 평범할 뿐인 개체였습니다.


하지만 에바는 자신은 이 '사람'의 가능성을 봤다며, 그가 특출난 재능은 없을지언정 '아담을 쏙 빼닮은' 도덕성과 근면함을 갖추었음을 언급하면서 "어쩌면 그의 평범하고 소시민적인 성품이 우리 예상보다 유용하게 쓰일지도 모른다"고 평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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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이번이 통합 완결이었는데, 분량 상 다음화가 진짜 완결이 되겠네요.

그동안 떡밥은 줄창 뿌렸지만, 막상 떡밥이 밝혀지고 나니 별 것 없어보이기도 합니다.





조만간 (진짜) 완결 요약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