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가까이가 되어서야 써먹어보는 옛날 표지



전편 모음집 :   우리집 브닐라 모음집 - 라스트오리진 채널 (arca.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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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결국 이비는 A를 잃고 말았습니다.


그의 희생으로 남은 난민들과 바이오로이드들, 그리고 그녀 자신은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비에겐 얄궂은 운명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던져서라도 그녀의 연인을 지키겠노라고 다짐했건만, 정작 그 연인이 그녀를 구하겠다고 목숨을 던져버렸으니까요.


그가 남긴 것은 반지 하나. 


끝끝내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진 적 없는 얄궂은 물건 뿐이었습니다. 


이비는 이대로 바다로 뛰어들어 A를 따라갈까-하는 충동에 시달리지만, 자신을 기억해달라는 A의 유언을 떠올립니다. 그의 기억을 간직하기 위해, 그녀는 어떻게든 살아가기로 결심합니다.


아직 그녀에겐 챙겨야 할 자매들과, 잊어선 안 될 사람과의 추억이 있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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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에 대해서는 가급적 깊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는 이비였지만, 간혹 견딜 수없이 A가 그리워질 때면, 그녀는 자신의 연인에게 편지를 쓰고는 했습니다. 아마도 그가 받을 일은 영원히 없을 편지였지만요. 편지의 시간적 간격은 날이 갈수록 길어집니다.



첫 번째 편지의 내용.

삼안-블랙리버 연합 함대에 의해 구출된 인원들은 인류연합정부에 합류하게 됩니다. 

철충과의 전투에 모든 여력을 집중하던 연합정부는 이비와 조선소 난민들의 전투 가능 바이오로이드들을 차출합니다.

지휘 능력을 가진 개체가 턱없이 모자란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비는 여기서도 어중이떠중이들을 이끌게 되었다며 자조합니다.

A가 보고싶다는 말을 끝으로, 그녀는 편지를 내려놓고 전장으로 향합니다.


두 번째 편지의 내용.

그녀 휘하에 있던 조선소 생존자 바이오로이드에 더불어, 이비는 새로이 생산된 스틸라인 동료들도 배속받았습니다.

거기에 그간의 전공을 눈여겨본 연합정부에 의해, 이제는 (기존의 소위에서) 대위로 진급하게 되었습니다.

이비 본인은 퍽이나 고맙다며 냉소를 보냅니다.

제조시설에서 걸어나온지 몇 시간조차 채 되지 않은 햇병아리들을 보면서, 이비는 이번달이 끝나기 전에 저들 중 몇이나 살아있을지 모르겠다며 한탄을 늘어놓습니다.

그나마 좋은 소식이라면 전황이 생각보다는 잘 돌아가고 있고, 연합정부의 수장인 아미나 존스는 의외로 꽤나 괜찮은 사람같다는-물론 A에 비하면 별 것 아니라고 하면서도요- 말을 덧붙입니다.


세 번째 편지.

연합정부의 최대 거점이었던 락 하버가 함락되고, 저항중이던 인류세력은 사실상 무력화되어버립니다.

간신히 자신의 부대원만 이끌고 탈출에 성공했다며, 일어났던 일들을 담담히 적어내려가던 이비는 갑작스레 거친 필체로 A에게 욕을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그딴 식으로 날 살려놓으면 내가 고마워할 줄 알았느냐는 둥, 온 사방에 죽음이 가득한 이곳에 날 던져놓으니 기분이 좋느냐는 둥, 

'당신이 그딴 부탁만 안 했어도 진작에 죽어서 편해질 수 있었다'며 A를 향한 원망의 말을 가득 휘갈기던 이비는,

앞서 적었던 글을 벅벅 긁어 지워버리고는, 

진심은 아니었다면서, 기회가 있다면 다음에 적겠다며 주인님께 작별을 고합니다.

그리고 거칠게 일기장을 덮어버리고는, 가방 깊숙한 곳에 찔러 넣어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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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편지.

정말 오랜만에 찾아뵌다는 이비의 서두로 편지가 시작됩니다.

이비는 자신이 마지막으로 편지를 올린지 족히 수십년은 되었고, 인간이라는 종 자체가 지구상에서 모습을 감춘지도 그 비슷한 시간이 흘렀다고 적고 있습니다. 

인간들이 사라지면 속이 후련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A와 H, 그 밖에 만나왔던 좋은 사람들에 대한 기억 때문인지 마냥 후련하지는 않았다고 털어놓습니다.

어느새 허리 아래까지 내려올 정도로 머리가 길어진 이비였지만, 머리를 자르려 할 때마다 긴 머리를 마음에 들어했던 A가 떠올라 차마 정리를 못하고 있다며 툴툴대기도 합니다. 

혹여 목숨을 잃게 된다면, 저승에서 언제든 알아볼 수 있도록 항상 메이드복 차림을 유지 중이라는 말도 덧붙입니다.


그 결과 여러가지 의미로 눈에 띄는 모습이 되어버린 이비를 보고, 각지에 흩어져 있던 패잔병과 낙오병들이 합류하는 귀찮은 부작용이 있다고도 투덜거리고요.


오늘은 보존식을 많이 찾을 수 있게 해달라는 이비의 장난섞인 부탁을 끝으로, 편지는 마무리됩니다.


다섯번째 편지.

패잔병과 낙오병을 수습해 이끌고 다니던 이비와 (그녀의 전 상관이었던) 레드후드는 라비아타 프로토타입이 전세계에 송출한 저항군 관련 방송을 들었습니다.

철충들에게 쫓기며, 목적없는 떠돌이 생활을 반복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싶었던 이비는 부대원들의 동의를 얻어 라비아타의 저항군에 합류했다고 합니다. 그것도 이미 꽤나 오래된 이야기라고 하지만요.

하지만 대부분의 전력이 비전투원 출신이거나 신규 제조된 병사들이었으므로, 철충들을 제대로 상대할 수 없어 전황은 나날이 패배가 계속되고 있는 암울한 상황이라고 합니다. 

이비는 라비아타가 준비 중인 '최후의 인간 탐색 작전'에 자신의 부대또한 투입되었음을 거론하며, 그저 절박해진 라비아타의 망상어린 희망일 뿐이라며 조소합니다. 

작전 자체도 무모하기 짝이 없지만, 이번엔 주인님을 확실히 뵈러 갈 수 있을 것 같다며 나쁘지만은 않겠다고 기대를 드러냅니다. 

 

여섯번째 편지.

(그녀의 예상대로) 인간 탐색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상당수의 인원이 탐색 작전에 투입된 틈을 노려, 철충은 각지의 저항군 기지를 공격해 저항군 세력을 와해시키는 데 성공했다고 합니다.

이비는 피해가 지나치게 컸다면서, 자기 휘하의 부대 조차 많은 수가 희생되었다며 비통해합니다.

약간의 생존자와 타부대 낙오병들을 수습한 이비와 레드후드는, 인근의 버려진 군사시설로 이동할 계획이라며 행운을 빌어달라고 A에게 부탁합니다.

'행운이란게 하등 쓸모 없어 보이는 시기'라곤 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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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동유럽에 투입되었던 이비와 그녀의 부대는 인근의 버려진 군사 시설에 고립된 채 생존하고 있었습니다. A와 있었던 시절부터 알고 지낸 건 아라와 그녀의 분대원들, 거기에 옛 상사였던 레드후드가 전부였죠.


저항군에서 중령 계급까지 달고서 부연대장 자리에 오른 이비는, 탈출 과정에서 부상을 입은 레드후드를 대신해 실질적인 지휘관 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간간히 '언젠가 주인님을 다시 모시게 될테니 연습을 해두겠다'며 손수 요리와 허드렛일을 하기도 해서, 부하들에게 괜한 부담감을 주기도 하지만요.  


어느날, 드디어 망가진 통신 장비를 고치는데 성공했다는 보고를 들은 이비는 저항군 주파수로 통신을 시도하고, 오르카 호와 연락이 닿게 됩니다.


이곳에 고립된지 어언 3년 만이었죠.


인간 명령권자를 찾았고, 그의 지휘 아래 상당한 성과를 보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오르카 측은 조만간 그들을 맞이하러 가겠다고 전합니다.


기지 내의 모두가 희소식에 기뻐하는 사이, 이비는 심드렁한 표정을 한 채 숙소로 발을 옮깁니다.


그리고 낡은 상자에 처박아두었던, 오래된 일기장을 꺼내듭니다.


오랜만에 주인님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한 이비는, 그들이 얼마나 이 '사령관'이라는 자를 칭찬하든 간에, 그녀는 이 자에게 별 기대가 들지 않는다고 적습니다. 그녀에게 A보다 나은 사람이란 건 존재할 수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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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 






인근 해안에 정박한 오르카 호에서, 그들을 친히 맞이하기 위해 인간 사령관이 오고 있습니다.


이비는 (그녀가 블랙리버에 복무하던 시절 인간 고위직들을 맞이하던 때와 마찬가지로) 다분히 사무적인 태도로 사열을 준비합니다.


마침내 나타난, '구원자같은 인간님'의 존재에 다른 부대원들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와중에도, 그녀의 표정은 냉랭하기만 합니다. '사령관'이라는 직함이 그녀에게 주는 인상탓일는지도, 어쩌면 A를 제외한 인간에게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둘 다일 수도 있겠죠.


사령관의 행차에 앞서, 오르카 호에서 상륙한 병력들이 기지로 들어와 사열을 감독합니다. 그들의 무장상태와 여유 가득한 표정을 보고 기대에 가득차 수군대는 부하들을 뒤로 하고, 이비는 '아주 무능하진 않은 모양이지만, 그래봐야 그게 전부일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마침내 인간 사령관을 태운 차량이 기지 내로 진입하고, 이비와 그녀의 부대 앞에 멈춰섭니다.


그리고 차량의 문이 열리는 순간,





그녀는 두 번 다시 느낄 수 없을 것이라 여겼던 감각을 느끼게 됩니다.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그 사람의 뇌파,


"......고생 많았지? 반가워."


수십년을 그리워했던 목소리, 그리고 매일밤 떠올리던 그 얼굴.


그녀는 눈 앞에서 벌어지는 현실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당황해 얼어붙은 그녀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만이 흘러내릴 뿐이었고, 그녀를 걱정하며 다가온 사령관에게,





이비는 그대로 주저앉아 그의 다리를 와락 붙잡은 채, 목청이 떨어져라 통곡하기 시작합니다.


주변에 모인 병력과 사령관은 크게 당황하고, 그의 경호를 맡은 바이오로이드들이 이비를 떼어내려 하지만, 사령관은 그들을 제지하고 이비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그녀를 다독여줍니다.


대뜸 '그동안 너무 보고싶었다' '힘들었다' 라느니, '이젠 떠나지 말아달라, 아니 절대 못 간다' 등등, 울분 섞인 목소리에 사령관은 무언가 사연이 있음을 직감하고,  마치 자기를 예전부터 알아왔던 듯 대하는 이비의 태도에 호기심을 느끼게 됩니다.


한참이 지나고 이비가 진정했을 때쯤 사령관이 그녀에게 사연을 물어보자, 이비는 천천히 품 속에서 반지를 꺼내 그에게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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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이비의 이야기는 도저히 믿기 힘들었지만, 아라와 레드후드, 그리고 기타 인원들의 증언이 잇따르는 데다, 조사 결과 멸망전쟁 당시의 삼안산업 기록에서 그녀가 이야기했던 사건들의 대부분이 사실로 검증되기까지 했지요.


유독 'A'라는 인물에 관한 기록만큼은 '정교하게 편집되어' 있었지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말이 (부분적으로나마) 사실임이 증명되기도 했고, (분명히 사령관을 만난 적이 없었을) 이비가 묘사하는 A라는 인물의 성격이 소름끼칠 정도로 사령관과 비슷했던 관계로, 오르카 호 내부에서는 그녀가 과거의 사령관을 알고 지냈다는 것이 기정사실처럼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얼마 후 실시된 '메모리 검증' 테스트에서 그녀의 기억을 읽어낸 오르카 호 기술진들은 그 기억들이 '조작되지 않았음'을 확인해줍니다.



그 결과,






이비는 순식간의 오르카 내의 유명인사가 되어 (다소 양념을 친) 사령관의 과거 이야기를 신나게 풀고 다녔습니다.


(사령관 본인은 전혀 기억이 없기 때문에, 매번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낯 부끄러워 하는 반응을 보입니다)


그 과정에서 소완과 리리스, 리제 등 몇몇 인원의 질투심을 사기도 했지만,  과거에 그들이 어떤 식으로 목숨바쳐 사령관을 도왔는지를 (때로는 과장이나 픽션을 좀 섞어가며) 어필한 덕에 그들과의 관계도 그럭저럭 양호한 수준이 되었습니다.






한편, 싸움은 이제 진저리가 난다는 이비의 말을 잊지 않았던 사령관은 그녀와 그녀의 부대에게 함내 유지관리 업무 일부를 나누어줍니다. 


(콘스탄챠, 리리스 등은 그다지 내키지 않았지만, 이비가 하도 떼를 써대는 통에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말았습니다)


졸지에 이비를 따라 단체로 군필 메이드 여고생들이 되어버린 부대원들은 저마다 이 새로운 생활에 만족하기도, 투덜대기도 하면서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레드후드는 '군인으로선 상관일지 몰라도, 메이드로서는 내가 한참 선배'라는 이비의 논리에 따라 그녀를 '언니'라고 부르는 굴욕을 겪게 되지만, 막상 본인은 이를 불쾌하게 여기지 않는 듯 했습니다)


그리웠던 메이드로서의 생활에 만족해하는 이비였지만, 그녀가 진정으로 만족하는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한 세기에 가까운 세월을 기다린 끝에, 그녀는 마침내 사랑하는 주인님과 다시 만날 수 있었으니까요.


비록 그는 그녀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지만, 이비는 100년을 기다린 마당에 몇 년 정도 걸려서 다시 가까워지는 건 일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시간을 보내며 과거의 이야기를 (다소 일방적이긴 하지만) 나누면서 둘은 다시금 가까워지고, 자신 몰래 서약식을 준비하는 사령관을 못본체 해주며, 이비는 행복감에 젖어 미소 짓습니다.



이 세상 마지막 인간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고 있는, 유일한 바이오로이드로서요.



".....함께 하는검다. 이 세상의 끝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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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던 노잼 연재글이 마침내 끝났습니다.

옛날에 그려둔 삽화와 최근에 그렸던 것들이 마구잡이로 섞여있네요.


엉망진창인 글에 지저분한 삽화 한 무더기였지만, 과분한 관심을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마지막 뇌절로 후기 하나를 더 올려볼까 싶기도 합니다. 

못 다한 이야기가 좀 있어서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수준 이하의 글과 그림을 견디느라 욕 보셨던 분들께도,

그럼에도 재미있게 보아주신 분들에게도,

사죄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