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밤이 깊자 철충의 공격이 시작되고, 라붕이 일행은 다급히 응전한다. 오르카호의 구조대가 도착할 때까지 버텨야만 한다. 베로니카는 전투력이 전무한 라붕이에게 자신의 비상용 권총을 쥐어준다. 자살용이 아니라 위급할 때 적에게 최소한의 저항이라도 할 수 있도록. 무기를 손에 쥐고있는 것 만으로도 용기가 생길 테니까.


이윽고 철충이 대피소 안까지 들어오자 낫을 든 수녀와 검을 든 기사는 어린 양을 지키기 위해 싸우기 시작한다. 수적으로도 화력으로도 불리한 전황이었지만 고군분투 끝에 철충 선발대를 해치우는 데 성공한다.


그 작은 승리에 방심한 탓이었을까, 아니면 생체회로 없이 감히 철충에 대적한 AGS의 필연적인 운명이었을까. 해치운 줄 알았던 철충의 장갑을 찢고 그 속에서 튀어나온 철충 유충은 곧장 새로운 숙주를 향해 달려들었다. 베로니카가 눈을 부릅뜨고 그 유충을 베어버리려 했으나 그 철충이 몸을 비틀어 피하는 바람에 일도양단에 실패한다. 유충은 베인 상처에도 아랑곳않고 움직이더니 기어코 에큐토스의 몸 안에 파고들어 기생하고야 만다.


순식간이었다. 에큐토스가 놓친 검이 땅에 떨어진다. 유충이 파고들면서 생긴 구멍이 매꿔지는 걸 기점으로 에큐토스의 몸이 빛을 반사하지 않는 철충 특유의 검은 재질로 뒤덮인다. 노란색으로 빛나던 에큐토스의 눈이 흉흉한 빨간 빛을 내기 시작한다. 라붕이는 경악하고, 베로니카는 침을성을 삼킨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에큐토스였던 그것이 일어서고, 오른팔을 기과하게 변형시켜 무기의 형태로 만들었다.


철충 중에서도 무리를 짓지 않고 단독으로 싸울 정도로 강력하고 위험한 개체, 사이클롭스. 그것이 눈 앞에 있다. 성기사가 악마로 타락하고야 만 것이었다.


이미 그것에게 에큐토스로서의 자아는 남아있지 않았다. 사이클롭스가 무자비하게 공격하기 시작하자 베로니카 또한 변절자에게 심판을 내리기 위해, 또한 옛 동료에게 안식을 주기 위해 응수한다. 한편 숨어서 지켜보던 라붕이는 통신장비에 대고 오르카호에 다시 연락을 시도한다.


베로니카는 바이오로이드 중 강자에 속하긴 하나 사이클롭스가 가진 힘은 명백히 그 이상이었다. 베로니카의 낫이 부러지고 그녀 또한 중파당한다. 사이클롭스가 마무리를 지으려고 쓰러진 베로니카 앞에 성큼성큼 걸어오던 중, 누군가 그의 등 뒤를 공격했다. 베로니카가 위험해지자 다급해진 라붕이가 그녀에게 받은 권총으로 사이클롭스을 쏘기 시작한 것이었다. 물론 그런 작은 딱총으론 아무리 쏴봤자 사이클롭스의 장갑을 뚫을 수는 없었다. 오히려 어그로만 끌 뿐이었다.


그걸로 충분했다. 베로니카가 회심의 일격을 할 빈 틈이 생겼다. 그녀는 땅에 떨어진 에큐토스의 검을 주워들어 사이클롭스의 몸통 정중앙에 찔러넣었다. 피인지 기름인지 모를 검은 액체가 검날을 따라 흘러나오더니 뚝뚝 떨어지고, 사이클롭스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더니 이내 고개를 푹 떨구었다. 사이클롭스의 움직임이 멎었다.


상황이 얼추 정리된 듯 하자 라붕이는 베로니카한테 달려가 상태를 본다. 그녀는 중상을 입어 제대로 서있을 수도 없는 상태였다. 응급처치라도 하려던 그 순간, 분명 정지됐을 터인 사이클롭스의 손이 까딱하자 라붕이와 베로니카는 화들짝 놀라며 얼어붙었다. 사이클롭스가 천천히 팔을 들어올리더니 제 복부에 박힌 칼 손잡이에 손을 걸치듯이 올려놓았다. 전투속행이 발동됐다.


설상가상으로 바깥에선 더 많은 철충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퇴로는 없다. 밖으로 통하는 모든 길에서 철충이 오고 있다.


겁에 질린 라붕이는 다친 베로니카를 끌고 대피소 안쪽 방으로, 통신실로 들어갔다. 달팽이나 소라게같은 미물이 위험을 느끼면 껍질 안으로 몸을 웅크리듯 조금이라도 안쪽으로 들어가려 발버둥쳤다.


베로니카는 죽음을 각오했다. 자신이 만전의 상태였다 하더라도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사이클롭스를 포함해 저 많은 철충 무리를 이길 순 없을 것이다. 하다못해 조금이라도 더 많은 철충을 길동무로 삼고, 죽으면 저승에서라도 라붕이가 외롭지 않게 그 곁을 지킬 수 있기를 빌었다. 철충 본대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사이클롭스가 의식을 되찾았을 때 그의 눈에 들아온 건 자신의 배에 박혀있는 검이였다. 그 검의 코등이는 코헤이 교단의 문양을 띄고있었다.


빛이시여, 빛이시여. 제게 무얼 바라십니까. 제가 무엇을 해야합니까.


발성하는 것 조차 허락받지 못했던 그가 속으로 허구의 신에게 물음을 던지지만 응답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신성한 의무도, 거룩한 사명도, 그 무엇하나 남지 않았다. 의식이 도로 절망의 늪 속으로 빠져들려 한다. 그리고 그 때.


살려줘


낯익은 목소리에 그가 고개를 들었다. 자신에게 했던 말이 아니었다. 라붕이가 통신기를 움켜쥐고 오르카호에게 빨리 와달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르카호는 이곳에 없다. 그의 부름에 응답할 수 있는 게 누가 있겠는가.


그는 맹세했었다, 기사로서 약자를 수호하겠다고. 신의 응답을 기다리던 그에게 응답해야 할 차례가 왔다. 목소리로 응답할 수 없다면, 행동으로. 그는 제 몸에 박힌 검을 뽑아서 손에 쥐었다. 그는 등을 돌려 철충 무리를 향해 마주 보고 선 뒤 검례를 했다. 그의 눈은 붉은빛이 아닌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는 성기사 에큐토스도, 흑기사 사이클롭스도 아니었다. 홀로 최후의 성전에 돌입한 단 한명의 기사였다.


철충 무리가 공격범위 내로 들어오자 그는 곧장 검을 휘둘러 철충들을 차례차례 베어넘겼다. 검을 한번 내리칠 때마다 철충 한 마리가 반으로 갈라졌다. 오른손 자체를 무기로 변형시켜 싸우는 사이클롭스의 전투법과는 달리 그는 손에 검을 쥐고 기사로서 싸움에 임했다. 무력한 인간 하나만 죽이면 된다며 쉽게 생각하고 있던 철충들은 철충에 감염된 AGS가 통제권을 되찾는 유례없는 사태에 당황했다. 하물며 그것도 철충 중에서도 특히나 강한 개체인 사이클롭스가 인간의 편으로 돌아서서 자신들을 공격하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철충들이 본격적으로 반격하기 시작했다. 물량을 앞세워서, 먼저 죽은 철충을 방패로 써가면서 까지 총포탄을 퍼부었다. 계속된 집중포격의 효과가 있는지 마침내 사이클롭스가 공세를 멈추었다. 검끝을 땅에 박고 한쪽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쓰러지지 않았다.


전투속행, 그것도 두 번째. 기사는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싸웠다. 더 많은 철충을 베었고, 동시에 더 많은 공격을 받았다. 그가 다시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다시 일어섰다. 세 번째 전투속행, 이어서 네 번째, 다섯 번째. 그는 결코 쓰러지지 않았다. 광신적인 신념에서 비롯된 불굴의 의지는 계속해서 싸울 힘을 주었다. 그 어떤 철충도 그의 뒤에 있는 인간 한 명과 바이오로이드 한 명을 공격할 수 없없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갑작스레 철충의 진영이 눈에 띄게 흐트러졌다. 바이오로이드로 이루어진 군대가 철충 무리의 후방에서 공격한 것이었다. 이로서 철충의 증원이 끊겼다. 남은 철충들을 전부 처리하고 나자 자연스레 그 바이오로이드 부대와 기사가 대치하는 구도가 되었다.


오르카호에서 온 구조대는 좀 전의 싸움에서 철충끼리 싸우는 것을 보고 프레데터처럼 같은 철충을 공격하는 특이개체인건가 하는 의문에 눈 앞의 수상한 사이클롭스를 냅다 공격하지 않고 있었다. 저 쪽은 무슨 생각인지 말없이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두 세력이 대치하면서 생긴 불편한 기류는 두 번째 인간과 그를 따르는 듯한 베로니카의 난입으로 인해 깨지게 된다. 오르카호는 실존했던 두 번째 인간의 존재에 놀라기를 잠시, 그가 사이클롭스 앞을 가로막으며 아군이라고 하자 한 번 더 크게 놀란다. 이윽고 사이클롭스가 검을 땅에 박고선 손을 떼자 오르카호 일행도 무기를 거둔다.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할 시간. 오르카호 구조대는 성공적으로 두 번째 인간 및 그의 일행의 신병을 확보했으니 이제 오르카호로 돌아갈 차례지만 문제는 저 사이클롭스였다. 어떻게 철충에 감염된 AGS가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앞으로도 계속해서 얌전할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오르카호 안에 들였다가 철충이 몸의 통제권을 탈환해서 날뛰기라고 하면 곤란해질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어찌 된 영문인지 그는 그 자리에 뿌리라도 내린 듯 가만히 서서 따라오지 않고 있었다. 라붕이와 베로니카는 이미 오르카호 일행 속에 섞여들었는데 그는 같이 가기를 거부했다. 


가만 보니 연이은 싸움에 너무 많은 부상이 누적된 그 몸은 이미 고철이나 다름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철충에 감염된 순간 죽은 거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생명이 다했음에도 그의 맹세를, 신념을, 약자를 지키기 위해 한계를 넘어서서 버텨냈다. 라붕이가 안전해질 때까지, 라붕이가 구조대의 보호를 받게 될 때까지, 바로 이 순간까지. 그리고 지금, 그의 임무는 끝났다.


그가 말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는 베로니카가 그를 대신해서 그의 뜻을 전달해준다. 그녀는 삶의 절반을 보낸 사이비 종교가 아닌 이 곳에서, 인생 처음으로 진정한 기적을 목도했다고 말하며 그에게 잠드는 것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한다. 이에 라붕이는 구조대 행렬에서 빠져나와 그의 앞에 섰다.


에큐토스.


이름을 불린 기사는 말없이 라붕이를 내려다보았다. 


고마워.


라붕이의 그 말을 듣자 그는 감사인사라도 하는 것처럼 고개가 조금 앞으로 숙여지더니 이내 눈에서 불이 완전히 꺼졌다. 그 기사는 그대로, 선 채로 죽었다.


이후로는 별 거 없다. 두 번째 인간과 그를 따르는 베로니카는 정식으로 오르카호에 합류했다. 그 뒤로 기적이라 부를만한 특별한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이따금, 한 수녀의 입을 통해 신념만으로 기적을 일으킨 한 기사에 관한 이야기가 회자된다고 한다. 워낙 현실성 없는 이야기라 누군가는 그것이 지어낸 이야기라 하지만 그 날 두 번째 인간을 데리러 갔던 구조대의 일원들은 입을 모아 진실이라고 말했다. 이야기를 들은 어린이들이 눈을 빛내며 종교행사에 참가했다가 잠만 오는 연설문을 듣고 실망한 적도 있었지만 아무렴 어떠랴. 


그리고 아직까지도, 코헤이 교단의 한 요새 안에는, 수많은 철의 악마의 사체 사이에 그 기사가 석상처럼 고고히 서있다고 한다.



블본 루드비히 보고 철충 감염된 AGS가 자아를 되찾는 스토리 있으면 뽕 차지 않을까 하고 써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