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세계의 모든 종자가 모여있는 스발바르 제도의 기억의 방주...의 옆에 있는 오르카호의 갑판. 자정의 스발바르 제도의 하늘에는 비단 같은 오로라가 깃발처럼 팔랑인다. 사령관은 이곳을 거점으로 삼고 꽤나 오랜 시간을 보냈지만 이 풍경만큼은 질리지 않는다. 보면 볼 수록 더욱 예쁘게 보인다. 목도리를 목에 두르고 손에는 가죽장갑을 끼고 갑판으로 나온 사령관. 그의 손에는 커피 한잔이 들려있다. 그의 입김과 커피에서 모락모락 나는 김이 별을 수놓은 밤하늘 안에 섞인다.

-후룹

코에 달라붙는 향을 품은 쓴맛이 입에 들어온다. 그의 삶은 전쟁 속에서 싹이 텄고, 전쟁의 풍랑을 맞았다. 지금도 전쟁 중이나 그가 밤 늦게 바깥에 나와 찬 공기를 마시며 따뜻한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여유를 준 것은 그를 여기에 있게 만들어준 그녀들, 바이오로이드들 덕분이다. 작년의 잔잔한 망망대해와는 다른, 반짝반짝한 불빛의 기억의 방주의 풍경은 그에게 지켜야 할 거점이 생겼다는 걸 상기시켜준다. 코에 들어오는 신선한 바람은 지금의 평화를 의미하며 동시에 전쟁이 벌어지기 전의 경직이기도 하다. 사령관이 이 커피잔을 들고있는 시간은 그가 사랑하고 아끼는 그녀들을 상대의 공격에서 지키고 방어하기 위한 티타임이다. 항상 웃고 있던 눈을 감는다.

-또각 또각

눈을 감은 사령관의 뒤에서 누군가의 구두소리가 들린다. 사령관은 그녀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선홍색의 머리카락을 날리며, 손에는 꽃향기가 나는 작은 궐련 담배를 들고 사령관의 옆에 짝다리로 선다.

"레모네이드 델타의 함대가 전부 괴멸했습니다."

"그래. 걸려들 거라 생각했어."

사령관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마지막 한모금 남은 커피를 마셨다. 사령관이 찻잔과 받침을 내려놓는 시늉을 하자 작은 드론이 날아와 그것들을 동그란 동체 위로 받아 천천히 원래 날아오던 방향으로 날아간다. 사령관의 전속 부관 나이트앤젤은 눈을 감고 있는 사령관을 유혹하듯, 왼쪽 팔을 그의 목에 감고, 오른쪽 손은 그의 뺨에 갖다대며 자신의 입술을 그의 귀에 갖다대어 간지럽게 속삭인다.

"델타는 사령관님께서 준비하신 미끼를 먹어치웠어요. 탐스러운 먹이였죠. 그 안에 미늘이 있는 줄도 모르고 턱 밑에 미늘이 걸린 그 꼴이 참으로 가소롭네요."

사령관은 눈을 감은 채로 고개를 끄덕인다.

"음. 델타는 지금도 제딴에는 앞으로 나아가려 하겠지만, 나중에는 후회할 거야. 그 탐스러운 먹이를 만지지 말고, 금지된 문 앞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말았어야 했을 거라고."

나이트앤젤의 오른손의 손가락이 사령관의 커피향 묻은 입술을 훑는다.

"델타는 이제부터 점점 끌어올려질 거예요. 사령관님이 파놓은 심연 속으로. 끌어올려지는 와중에도 계속 생각하겠죠. '이 이상의 바닥은 없겠지', '이젠 더는 없겠지'라고."

사령관은 자신의 입술을 훑는 나이트앤젤의 손을 잡는다. 그의 눈은 여전히 감고 있지만 그의 눈은 확실히 나이트앤젤을 보고 있다.

"자신의 턱에 걸린 바늘 끝은 결국, 자신이 있던 바다를 보게 만들고, 우리가 만든 밤의 끝은 델타의 존재를 부정하며 지워버릴 거야. 델타가 오드리를 부정한 것처럼. 바르그의 미련을 부정한 것처럼.

"네. 저희가 없애보일게요. 사령관님. 여보."

"아니. 우리가 없애야지."

나이트앤젤과 사령관의 입술이 가까워지고, 그 거리는 0보다도 0에 가까워졌다. 방주에서 쏘아올려진 한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폭죽이 터지기 직전, 12월 31일이 끝나고 1월 1일이 시작되기 전, 두 독사의 눈이 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