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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영은 붙잡을 새도 없이 흘러갔다. 사령관이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환영은 다음 순간으로 변해있었다. 바닐라와 만나고 차를 타고 이동하다 포격을 받는다. 그리고 바닐라는 죽어있다. 


그것으로 한번의 순환이 끝나면 바닐라가 다시 아침인사를 하며 흐름이 반복되었다. 


그 순환이 어느덧 54번째 반복되었다. 사람을 미치게 하는데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주인님? 몸이 편찮으신가요? 표정이 좋지 않아보입니다.”



바닐라가 이전까지와는 다른 말을 했다. 하지만 한계에 다다른 사령관은 듣지 못했다.



“주인님? 안들리시나요? 안되겠습니다. 지금 바로 닥터를 부를테니…?!”



사령관이 무언가에 홀린 듯이 바닐라를 안아들었다. 바닐라가 뭔가 반응할 틈도 없이 사령관은 달리기 시작했다.



"주인님?! 갑자기 왜 이러세요?"


“아아… 더.. 더는 싫어어어!!! 죽이지마!! 더는 죽이지 말란 말이야!!”



광기에 사로잡힌 사령관은 체력의 한계를 넘어서 한참을 질주했다. 한시라도 멈추면 다시 흐름이 반복될 것만 같아 그는 멈추지를 못했다.


몸이 한계에 도달해 쓰러질 때까지 그는 질주를 멈추지 않았다.



“허억…허억… 콜록! 콜록!”


“주인님! 괜찮으신겁니까?!”



사령관은 말없이 바닐라를 꽉 붙잡았다. 손을 놓은 순간 그녀가 떠나갈 것 같아 잡힌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악몽이라도 꾸신건가요?”



바닐라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사령관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그 상냥한 손길이, 바닐라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사령관의 감정을 차갑게 식히기 시작했다.



“어디에도… 당신이 없었어."


"애도 아니고 그것가지고 이 난리를 피우신 건가요?"


"당신이… 내 앞에서 죽어버렸어… 막으려 해도 막을 수가 없었어…”


“...주인님”



바닐라는 자신의 팔을 잡은 그의 손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반대팔로는 고개 숙인 사령관의 얼굴을 들었다.



“결혼식 때 하셨던 말씀도 기억 못하시는건 아니겠죠?”


“결..혼식…?”


"네 맞습니다. 결혼식, 설마 잊으신건 아니시겠죠? 콘스탄챠 언니가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 사랑할 것을 맹세하냐고 물었을때 주인님이 어떻게 대답하셨죠?"



바닐라의 질문에 사령관은 머리에서 무언가 풀려나오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잊어버린 수많은 기억 중에 하나였다.



그의 머리 속에서 바닐라와의 결혼식이 떠올랐다. 



'주례는… 콘스탄챠가 맡아줬었지. 꼭 자기가 해야겠다고 엄청 고집부렸고…'



마치 댐이 가둔 물이 쏟아지듯 과거의 기억이 물밀듯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바닐라가 웨딩 드레스를 입은 모습이 참 예뻤어…”



수건이 물에 젖어가듯 기억은 서서히 머리 속으로 퍼져나갔다. 첫만남부터 수십번의 데이트, 프로포즈까지 그 모든 순간이 사령관의 머리 속으로 들어왔다, 아니 돌아왔다.


늘 비어있던 그의 머리의 한 구석이 완전히 채워지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기억이 좀 나시나요.”


“...죽음이 나와 내 아내를 갈라놓는다 해도 나는… 그녀와 함께하겠습니다.”



바닐라가 미소를 보였다. 정확히 그녀가 원했던 대답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하시는지 아시겠죠?”



그와 동시에 세계가 다시 한번 점멸했다.





***





세상은 잿빛이었다. 사령관은 환영 속에 돌아와 있었다. 그러나 돌려받은 기억은 선명했다.



“바닐라…”



사령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풍경은 다를바 없었다. 전복된 차, 바닥의 혈흔과 뿌연 연기… 그리고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바닐라.



“두고 간건 나였구나.”



사령관의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말고는 누구도 들을 수 없는 말을 이어갔다. 그도 그럴것이 이것은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으니.


눈물이 시야를 가리는 와중에도 사령관은 그녀의 손가락에서 떨어져나온 반지를 보았다.



“미안해. 두고가서. 잊고 있어서 미안해…”



그는 바닐라 앞에 무릎을 끓었다. 땅에 떨어져 있는 반지를 어떻게 해야하는지 그는 알 수 있었다.



“함께... 이 세상의 마지막까지, 아니 그 이후에도 영원히… 당신과 함께하겠습니다.”



사령관은 들고있던 반지를 그녀의 손가락에 끼웠다.


그 순간 사령관을 감싸던 환영은 사라졌다.





***





문자 그대로의 고문, 날 어떻게든 더 고통스럽게 만들어보겠다는 고문은 나를 몇번이고 유린했다. 몸과 마음이 깨질 것 같다는 말을 마음 깊숙히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고문은 끔찍했다.


그러나 나는 아직 살아있었다. 좋은 소식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오메가는 날 죽이려는 생각이 없었다.


몸이 죽기직전까지 가면 어김없이 미친 AGS가 새 몸을 가져왔다. 한차례 의식이 꺼졌다 깨어나면 나는 그 몸으로 이동해있었다.



'미친년… 안나박사의 바이오로이드를 얼마나 만든거야…'



나는 수차례 죽기직전까지 내몰렸고 수차례 새로운 육체로 갈아탔다. 그럴때마다 느껴지는 끔찍한 멀미감도 나를 정신적으로 내몰리게 하는데 큰 공을 세우고 있었다.



'사람 정신이 이렇게 옮기기 쉬운건가…?'



모르는게 너무 많다. 내 정신을 어떻게 옮기는 것인지, 그날 보여준 환상은 누구의 소행인지, 알파의 계획이 무너진 이유는 무엇인지.



철컹!



'생각해볼 틈도 주지 않는건가…'



문이 열리는 소리, 내 고문을 담당하는 미친 AGS가 들어오는 소리다.



"기분은 어때?"



 하지만 예상과 달리 내가 듣게 된 목소리는 다른 이의 것이었다.



“질문 하는… 꼬라지 봐라. 미친년…”


"잘 지냈나 보네."



오메가는 내 분노하고 힘빠진 목소리가 못내 만족스러운듯 했다.



“여기에만 있었으니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몰랐겠네. 바깥은 3일 정도가 지났어. 너의 원래 몸에 있는 정보들을 끄집어내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지.”



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 년이 바라는건 분명 내 동요였을테니까.



“덕분에 오르카의 녀석들이 아직도 근처에 있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었어. 방금 놈들을 포위할 군대가 준비된 참이고.”


‘…!’


"곧 총공세를 시작할거야. 그 순간이 오면 불러줄게. 니가 그토록 지키고 싶어했던 것들이  전부 죽어나가는 꼴을 눈 앞에서 볼 수 있을테니까."



만족스럽다는 듯 오메가는 낮게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 즐거워 하는 표정, 그 웃음소리가 내 안의 무언가를 터트렸다. 



“야이 개씨발년아!!”



입에서 악에 받힌 고함이 쏟아져나왔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거야!!! "


"왜…? 왜 이러냐고?! 하!"



오메가의 눈이 순간 다른 색으로 변했다. 분명 보라색이었다.



"아, 그래… 넌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지."



이번에는 오메가의 붉은 눈이 완벽히 보라색으로 변했다. 존재하지 않던 위압감이 그녀에게서 퍼져나왔다. 아니 그녀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무언가 다른 존재다.



"그래 어차피 전부 끝났으니. 너를 더 고통스럽게 하려면 이 편이 좋겠구나."



퍼져나오는 위압감이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빛이 방안에 퍼지듯, 그것이 사방으로 퍼져나갔고 형태가 되었다.



“큽…! 허억…허억….”



숨도 쉬기 어려운 공포감, 압도적인 존재감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두려움에 떤다. 생명체로서의 본능이 공포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흠… 역시 바이오로이드의 몸에 들어가면 정신도 연약해지는 모양이구나.“



지구의 것이 아닌 색과 형상이 그리 말했다. 불가해의 존재였으나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분명 별의 아이였다. 정확히는 그 생명체의 눈이 이곳, 내 앞에 떠있었다.



“그래 더 두려워해라. 니놈이 감히 무엇에 선전포고를 했는지 알도록 해라.”


“별… 별..의… 커흡…!”


"말도 하기 힘든가 보구나. 살덩이를 먹는 자, 바다에 들어간 모든 영혼을 찢는 자, 인간 영혼의 수확자. 너희들은 이상한 이름을 많이도 붙이더구나.”



이형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깨지는 듯한 목소리를 내었다.



“난 그저 별의 아이다.”



오메가의 머리 위로 그 존재의 거대한 눈이 완전히 현현했다. 고작 신체의 극히 일부만이 보였으나 그것만으로도 형용할 수 없는 위압감이 느껴졌다.



“오메가… 무슨 짓을…”


“이 여자는 딱히 한 것이 없단다. 내게 조종당했을 뿐이지.”


“정..정신을 지배.. 하는거냐…?”



공포에 질려 덜덜 떠는 모습이 재밌다는 듯 별의 아이는 웃음소리를 흘렸다. 혐오와 공포의 감정이 배는 더 커져가는 끔찍한 소리였다.



“그래. 나만이 사용할 수 있는 권능이란다. 내가 직접 이곳에 올 수는 없으니 대행자가 필요했거든. “


“어…어째…서”


"내가 오르카를 그리고 너를 증오하는 이유를 묻느냐?”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하는 듯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놈은 내 말의 뜻을 파악했다.



“이거 참… 웃기는 질문이야. 니가 내 아들을 죽이지 않았더냐? 그토록 잔인하게 갈기갈기 찢어죽여 놓고선 내 복수의 이유를 묻느냐?”



찢어지는 듯한 소리의 진동이 내 머리를 수차례 울렸다. 머리를 산채로 으깨는 듯한 두통마저 느껴졌다.



"살해당한 아이의 부모가 살인귀를 향해 분노하는 이유도 모르느냐?”



별의 아이의 눈이 더욱 강한 빛을 쏘아내기 시작했다. 눈동자로 보이는 부분은 강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놈이 인간처럼 감정을 표현한다면 눈동자가 흔들리는 이유는 분명 분노였을 것이다.


살해, 아이, 부모, 별의 아이 여러가지 키워드가 머리 속을 빙빙 돌았다. 눈 앞의 존재가 뿜어내는 강렬한 위압감 때문에 생각하는 속도가 평소보다 느렸지만 결국 떠올릴 수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네스트에게 죽게되는 별의 아이를, 나와 알바트로스가 죽인 그 괴물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