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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네가 어떻게-”

 

“다물어.”

 

그 말이 개전의 신호였다.

 

스슥-

 

허공에 거미줄처럼 쳐져 있는 와이어들이 붉은 빛을 내기 시작했다. 수백 도에 가깝게 가열된 강철은 거대한 복사열을 내뿜었다.

 

거기서 끝났다면 마리아에게는 얼마나 좋았을까.

 

장화의 손짓과 함께 두꺼운 복도의 격벽이 흔들렸다. 수십 미터 위에 있는 천장의 조명이 삐걱이더니 땅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쨍그랑!!

 

“히익!”

 

바닥에 뒹구는 유리 조각에 마리아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바르그가 장화를 버리고 도망갔다. 정확히는 장화가 바르그에게 도망갈 수 있도록 기회를 주었다.

 

저 둘에게 그런 자매애 같은 게 있을 리 없다. 자신이 아는 한 그렇게 만든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뭐야? 방금 걸로 쫄았어?”

 

저것이 미친 듯이 강해졌다는 것.

 

손짓 한 번에 수천 가닥의 와이어가 움직인다. 그 무게만 따져도 족히 수백 킬로그램은 될 터. 그걸 손가락 하나로 조종할 수 있는 바이오로이드는 인류 역사를 뒤져봐도 흔치 않다.

 

뚝. 뚝.

 

식은땀이 뺨을 타고 흘렀다.

 

“... 아냐. 그래봤자 고작 바이오로이드잖아.”

 

제 두려움을 감추려는 듯 마리아는 장화의 움직임을 유심히 살폈다.

 

스륵.

 

힘 빠진 공작 꼬리깃마냥 기다란 철사 가닥을 바닥에 질질 끌고 있는 모습.

 

저리 여유로워 하는 것도 블러핑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아니, 그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 장화가 상대하는 것은 자신의 창조주니까.

 

“뭐해? 빨리 덤비든 말든 해.”

 

“... 오랜만에 눈을 떴는데 사냥개가 주인을 물려는 꼴을 보고 있자니 속이 뒤집어질 것 같네. 장화야.”

 

마리아가 승리를 확신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비켜.”

 

인간의 명령권.

 

그녀의 말을 들은 장화가 멈칫,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 광경에 마리아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자신은 인간이고, 인간인 이상 바이오로이드를 상대로 지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바이오로이드를 이용해 수많은 인간을 죽여왔던 자신이기에 확언할 수 있었다.

 

“제 주인도 못 알아보고 덤비는 개새끼에겐 매가 약이지. 안 그래?”

 

[맞는 말씀이십니다. 마리아 리오보로스 님.]

 

“그럼 저건 알아서 처리해. 저런 것까지 신경 쓰고 싶지 않으니...”

 

뒷일은 맡긴 후 바르그를 쫓으러 가려던 그때,

 

팅-

 

목 위로 묘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이게 무슨...”

 

뭔가가 턱 하고 자신을 막는 느낌.

 

무언가가 자신의 목덜미를 감싸고 있었다. 머리카락보다도 얇은 뭔가가-

 

스슥!

 

“어머, 실수로 손가락이 미끄러졌네.”

 

장화가 비웃는 듯한 눈빛으로 마리아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땅바닥으로 떨어지는 마리아의 목을.

 

농구공만한 고깃덩어리가 차가운 섹션 구획의 바닥을 데구르르 굴렀다. 잘린 목 끝에서 나온 핏방울이 얇은 실 위에 이슬처럼 맺혔다.

 

[...뭐지?]

 

당혹스러움에 저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온 동우.

 

장화는 마리아였던 것의 머리를 고이 잡아 올린 다음 말했다.

 

“말 할 게 있었으면 조금 더 빨리 하지 그랬어. 안타깝게."

 

그리고는 툭,

 

다시 땅 위로 던졌다. 난생 처음 공기를 맛본 성대에선 붉은 피가 울컥울컥 뿜어져 나왔다.

 

[잘하셨습니다. 장화 님. 지금 처리하지 않았다면 가장 큰 방해 요소였을 겁니다.]

 

그녀의 옆에서 날던 드론이 떨어진 머리를 몸으로 치우며 이야기했다.

 

[더 고통스럽게 하지 못한 게 아쉽긴 하시겠지만 제가 장담하죠. 지금은 이게 최선이었습니다.]

 

“딴소리하지 말고 집중해라.”

 

[괜찮으십니까?]

 

“내가 괜찮고 말고가 뭐 중요한가.”

 

뭉친 어깨를 풀기 위해 머리를 꾹 누르던 장화가 말했다.

 

인간이 죽었다. 그게 큰 전환점인 것은 맞지만, 지금 자신이 상대해야 하는 것은 수십 명이 넘는 홍련.

 

지금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더 큰 전환점이 필요하다.

 

[흥미롭군요. 이렇게 빨리 죽일 줄은 몰랐는데.]

 

동우의 붉은 눈이 복도 끝에서 깜빡였다.

 

그와 함께 있던 종속 인공지능에서는 장화의 검색 결과를 수십 개의 숫자로 도식화시키고 있었다.

 

[대상 검색: 장화. 엠프레시스 하운드 소속 바이오로이드. 기체 넘버 9079532003. 데이터 베이스 검색 중.]

 

[설계 도면 검색 완료. 주무기 강화 와이어, 원격 조종 폭탄. 승률 계산 중.]

 

[계산 완료. 92.5%]

 

순식간에 판단을 마친 알고리즘.

 

복도는 단숨에 고요해졌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수십 명의 홍련을 조종하고 있는 동우였다.

 

[그런다 해서 당신이 이길 가능성은 없습니다. 복수라도 조금 즐기다 가는 게 좋았을 텐데요.]

 

“인간을 상대할 땐 말보다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저 인간이 알려준 거야.”

 

[인간을 상대할 때라.]

 

쿵.

 

동우 주변으로 붉은 점 수십 개가 반짝였다.

 

그와 동시에 홍련들의 눈에 붉은 안광이 들었다.

 

[발버둥이라도 쳐보겠다는 겁니까?]

 

수십 개의 크로스보우가 한겨울 눈송이 같은 빙결 엠플을 시위에 걸었다.

 

“그래.”

 

[비이성적인 추론이군요. 아니, 막연한 희망입니다.]

 

“막연하다고? 지금 상황에서 나보다 잘 싸우는 년이 있을 것 같나?”

 

장화가 손가락을 움직였다.

 

차락.

 

손끝에 걸린 와이어가 춤추듯 허공에서 일렁였다.

 

멸망 전 몽구스의 천적이라 불린 존재. 대테러부대 수십을 쓰러뜨리고 지금껏 살아남은 생존자.

 

눈앞에 있는 바이오로이드 수십이라 해야 그녀가 지금껏 잡은 것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본인이 특별한 뭔가라도 된 것처럼 말하는군요.]

 

킥킥킥.

 

동우가 비웃듯 말했다.

 

그와 함께 종속 인공지능이 장화를 보며 결론을 내렸다.

 

[특이 사항: 없음]

 

“뭐?”

 

[지금껏 당신 같은 바이오로이드는 수십 명 보았습니다. 암살용으로 설계된 개체들은 각자만의 전투술이 있죠.]

 

홍련들이 있던 곳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철퍽.

 

작은 건물 수준으로 커진 고블린이 그 속에서 몸집을 불렸다.

 

가장 큰 놈을 중심으로 덕지덕지 붙기 시작한 놈들. 지금껏 살아온 고블린들 전부가 한 곳으로 모이는 듯했다.

 

[그 모든 바이오로이드의 대처법이 제 알고리즘 안에 있습니다. 당신의 것도 포함해서요.]

 

“......”

 

장화는 고개를 올려 자신에게 다가온 고블린의 얼굴을 보았다.

 

어느새 다섯 개로 늘어난 눈. 턱 아래쪽에 달린 큼지막한 눈덩이 하나가 두 개의 홍채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쿠오오오...

 

거대한 철골 같은 골격과 용수철처럼 휘어져 있는 근섬유.

 

암살용 바이오로이드라면 절대 일대일로 대면해선 안 되는, 압도적인 힘의 결정체였다.

 

고블린이 자신의 어깨에 달린 팔 두 개에 주먹을 쥐고 장화에게 내질렀다.

 

2 m도 안 되는 작은 유기물은 단숨에 짓눌러버릴 기세로.

 

“야.”

 

허나,

 

동우가 잘못 생각한 것이 있다.

 

“눈, 깔아.”

 

쾅!

 

거대한 굉음이 복도를 채웠다.

 

하지만 고블린의 주먹은 아직 바닥에 닿기 전이었다.

 

-쿠오?

 

완벽하게 접힌 고블린의 오른쪽 네 번째 다리.

 

제 몸보다 두꺼운 골격 덩어리에 장화의 주먹이 쇄도한 것이다.

 

-쿠오오오오오!!!

 

[이게 무슨...?]

 

주먹의 반동으로 나가떨어진 고블린이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다리 역할을 하는 복도 전체가 덜컹이며 울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한 번으로 엄살이야?”

 

장화의 미소와 함께 고블린의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콰과광!

 

고블린의 다리 사이로 질주한 장화가 위쪽으로 다리를 뻗어 일격을 날린 것이다.

 

고블린의 팔은 쉴 새 없이 장화를 잡으려 움직이고 있었다.

 

허나 장화의 움직임 앞에 힘없는 버둥거림으로 전락할 뿐, 그녀의 머리카락조차 스치지 못했다.

 

“이번에는 덩치값 좀 해봐.”

 

이번이라고?

 

어느새 고블린의 이마로 올라온 장화가 다시 땅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쿠오오오오오오!!

 

고블린은 그대로 땅에 처박혔다.

 

두꺼운 콘크리트 더미 위에 조형처럼 박힌 탓에 고통에 몸부림칠 수조차 없었다.

 

쾅!

 

이어지는 연격.

 

쾅! 쾅! 쾅!

 

수십, 아니, 수백이 모인 고블린의 군집이 일개 바이오로이드 하나에게 무너지고 있다.

 

[......]

 

어떻게?

 

단지 주먹 한 번이었을 뿐이다. 종속 인공지능이 주무기라 판단한 와이어와 원격 폭탄은 아직 쓰지도 않았다.

 

싸움? 아니, 이건 농락이다.

 

네 번째로 바닥에 부딪힌 고블린의 입에선 두꺼운 핏덩어리가 떡이 된 채로 튀어나왔다. 

 

면역 반응을 억제하기 위해 주사한 약물에 엉킨 것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역류한 것이다.

 

그 모습을 보는 홍련들의 얼굴이 점차 새파랗게 질려 갔다.

 

[대체 뭐를... 놓친 거지?]

 

잊고 있었다.

 

사냥개.

 

저건 사냥을 위해 만들어진 개다.

 

이빨을 갈고 닦아 인간도 죽일 수 있게 만들어진 사냥개.

 

짐승 다루듯이 다뤄 이길 수 있는 게 아니다.

 

“어이. 거기 붉은 눈깔이.”

 

5분도 지나지 않아 끝난 싸움.

 

고블린의 몸에서 주먹을 빼낸 장화가 피를 닦아내며 복도 끝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내가 ‘특이 사항: 없음’이냐?”

 

[......]

 

동우는 전투 데이터를 다시 한 번 검토했다.

 

전술을 바꿔야 한다. 인해절술로 밀어붙여봐야 무의미한 소모전만 계속될 게 뻔한 상대.

 

홍련의 크로스보우가 효과가 있을지, 상처라도 낼 수 있는지, 그곳에서부터 재검토해야 한다.

 

장화.

 

소속: 엠프레시스 하운드.

 

제조 목적: 표적 암살 및 미행.

 

[어떻게 이리 평범한 바이오로이드가...]

 

저런 움직임을 보일 수 있는 거지?

 

“말 할 생각 없으면 내가 먼저 간다.”

 

잠시 의식을 다른 코어로 옮겨놓은 사이, 장화의 신형이 사라졌다.

 

수십 명이 넘는 홍련 사이로 거침 없이 질주한 뒤 크로스보우의 시위를 와이어로 묶어두는 신기를 보이며 그녀는 섹션 안쪽으로 침투해 들어갔다.

 

삐빅-

 

삐빅-

 

섹션 내에 비허가 프로그램이 실행됐다는 신호.

 

적들의 데이터 디스크가 작동을 시작했다. 그 얘기는 김지석의 시체를 보존하는 프로토콜이 곧 가동을 중단한다는 뜻.

 

[방법을... 방법을...]

 

찾아야 한다.

 

라비아타와 맞먹을 괴물을 막을 방법을.

 

그때, 동우의 눈에 무언가가 비췄다.

 

땀.

 

장화가 흘린 땀.

 

집채만한 고블린을 쓰러뜨리고 수십 명의 적을 상대로 압살하고 있으니 일반적인 바이오로이드라면 땀을 흘리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저기 있는 게 정말 라비아타 정도의 바이오로이드였다면? 아니, 라비아타 본인이었다면 ‘고작’ 이 정도 일을 하고 땀을 흘렸을까?

 

[... 방법을,]

 

결론은 한 가지.

 

[찾았다.]

 

놈은 억지로 신체 능력을 끌어올리고 있다.

 

동우는 장화를 다시 한 번 스캔하려 했다. 하지만 움직일 때마다 시설 내에 균열을 일으키는 장화의 움직임을 따라갈 수가 없었기에 거대한 오미크론 섹션 전체를 스캔해야 했다.

 

고작 바이오로이드 하나를 위해 내야 할 비용은 아닐 터.

 

그럼에도 동우는 만족스러운 신호를 종속 인공지능들에게 보낼 수 있었다.

 

[오리진 더스트 과다 복용.]

 

장화의 혈압, 심박, 호흡, 체온, 모두가 미친 듯이 솟구치고 있다.

 

이미 체온은 40도에 육박했고, 심박은 200에 도달했다.

 

인간이었다면 이미 사망. 바이오로이드라 해도 걸어다니는 시체 수준이다.

 

[전술 변경 – 승인됨]

 

[전투 시간을 연장해야 합니다. 시설 내 유기물 생산 설비 가동 시작.]

 

만약에 라비아타가 직접 시설 내로 침입해 올 경우를 대비해 김지석이 예비해놓은 것들.

 

그 괴물을 상대론 전투라는 개념이 성립하지 않는다. 계란 수천 개를 던진다 해서 바위를 깰 수 없는 것처럼.

 

하지만 바위에도 틈은 있다.

 

시간을 끄는 것이라면, 아무리 강인한 바이오로이드라도 돌파할 통로가 있다.


곧 공략할 약점이 있다는 뜻.

 

김지석이 보았을 때 라비아타 같은 괴물들의 약점은 단 하나였다.

 

[마리아 리오보로스, 재생산을 시작합니다.]

 

인간.

 

바이오로이드의 태생적 약점.

 

라비아타가 들어올 경우 그녀의 정신적 아버지였던 애덤 존스를 만들 생각이었다. 칸이 온다면 그녀가 케시크였던 시절 상관이었던 사람을 생산했을 것이다.

 

그러니 만약 상대가 라비아타처럼 강력해진 장화라면?

 

[생산 완료.]

 

“멈춰.”

 

장화의 뒤쪽에서 들려오는 음성.

 

그 잠깐 사이에 다시 몸을 되찾은 마리아 리오보로스가 장화에게 말했다.

 

움찔.

 

순간 장화의 사지가 멈칫거렸다.

 

“... 뭐?”

 

“어머, 내가 죽은 줄 알았니? 주인도 모르고 무는 개새끼에게?”

 

장화의 눈이 동그래졌다.

 

명령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신이 죽인 인간이 버젓이 되살아 명령을 내리는 모습에 기가 찼던 탓이다.

 

게다가 명령의 영향도 있었다. 


그녀는 아직 명령권을 해제하지 못한 상태. 고블린을 상대하기 위해 신체 능력만 올렸지, 설마 인간을 상대하게 될 거라곤 닥터도 생각하지 못했다.

 

“생각해보니 내가 너에게 명령을 내리진 않았구나? 그래서 그 지랄을 떠는 거고.”

 

“......”

 

“개새끼가 어디서 주인 행세인지. 세상 말세야. 그렇지?”

 

본래 악한 천성대로 폭언을 쏟아붙는 마리아를 동우는 말없이 지켜보았다.

 

기억의 영속성을 위해 죽기 직전까지의 기억을 그대로 업로드 했다. 그 때문에 공포에 질릴 경우를 대비해 신체 전체에 안정제를 투입했다.

 

상대하는 것은 바이오로이드. 자신의 도구일 뿐임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해.

 

하지만 상대는 괴물이다.

 

[유기물 생산 설비, 재가동을 준비합니다.]

 

동우는 다시 한 번 마리아 리오보로스를 뽑아내기 위해 단백질 코드를 초기화했다.

 

아버지를 위해서라면 인간도 도구일 뿐이다.

 

“그럼 이번에는 내가 정확하게 말해줄게.”

 

마리아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고압적인 태도로 장화를 쏘아붙였다.

 

“죽어. 방법은 너 알아서.”

 

툭, 내뱉은 말.

 

장화의 손이 자신의 목덜미를 움켜 잡았다.

 

“저기 뒤에 있는 놈들한테 맞아 죽든, 아니면 와이어로 모가지를 뜯어버리든, 알아서 해. 그거까지 생각하긴 귀찮다.”

 

“......”

 

마리아는 승리를 확신했다.

 

설령 자신을 죽이려 한다 해도 명령 때문에 움직임이 정상은 못 될 터, 그 사이면 홍련들에게 활을 맞고 고슴도치 신세가 될 게 뻔하다.

 

만약에 자신이 죽는다 한들 명령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는 없다.

 

살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자신이 명령을 철회해주는 것이다.

 

“이봐.”

 

장화가 팔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죽기 전에 욕이라도 하고 싶었던 걸까? 그녀의 눈은 뒤쪽의 홍련들을 흘깃거렸다.

 

역시, 제아무리 악종이라 해도 죽는 게 무섭긴 한가 보구나.

 

마리아가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내가 지금까지 죽인 인간들이 몇 명인지 아나?”

 

장화가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뭐?”

 

“당신이 나한테 죽이라고 한 놈들 중, 나한테 명령하려고 한 인간들이 몇이나 있었는지 아냐 물었다.”

 

“내가 그딴 걸 왜 알고 있어야...”

 

피빅.

 

느낌이 이상하다.

 

분명 제 목을 옥죄어야 할 팔이 서서히 풀어졌다.

 

자유로워진 손끝. 그녀가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말했다.

 

“‘죽이지 마라.’, ‘자결해라.’, 되도 않는 명령을 내리려는 인간들이 더럽게 많았지. 그런데 내가 그 인간들을 어떻게 죽였을까? 당신이라면 잘 알 텐데.”

 

바이오로이드는 인간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다.

 

그건 장화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그녀가 인간을 상대로 언제나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비단 그녀의 속공 때문만은 아니었다.

 

명령을 덮어씌우는 것.

 

어떤 인간의 명령보다 최우선 명령을 설정하는 것.

 

“나한테 그 짓거리를 한 인간이 당신이잖아.”

 

그렇다면,

 

그 우선순위를 재설정할 ‘인간’이 저 밖에 있다면 어떨까?

 

“너 어떻게...?”

 

장화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지금 내가 따르는 명령은 하나뿐이야.”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사람.

 

-장화야.


-그저, 네가 하고 싶은대로 하거라.


그 사람이 책 속에 적어준 문장을 떠올리며, 장화는 땅을 박차 나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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