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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25 스파르탄 캡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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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조차 들지 않는 바다 속 깊숙한 해저에는

가라앉은 낡은 잠수함이 하나 있었다.

어두컴컴한 잠수함 속은 사람 한 명 없이

을씨년스럽게 버려져있는 모양새였다.

아니, 버려진것은 잠수함만이 아닌것 같다.

잠수함 안에서 희미한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잠수함 안쪽의 대피소엔 스파르탄 캡틴이

홀로 남아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는 낡은 PDA를 손에 쥐고 몇번이나

어떤 영상을 돌려보고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진 알 수 없었다.

어떤 마음을 품고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우리가 알 수 있는것이라곤

그가 보고있는 영상이 무엇이냐는 것 뿐이었다.




-1-



*치직*



그렘린 : 서브젝트 돌리... 이 결과는...

완전한 우연의 산물이었다.

(그렘린이 벽에 걸린 스파르탄 캡틴을 바라보며)

안녕... 하세요? 


캡틴 : ...


그렘린 : 흠, 의식은 돌아왔을텐데...

저기... 혹시 제가 보이시나요?


캡틴 : ...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거지?


그렘린 : 그냥 간단한 테스트를 받고 있었어요.

기억나세요?

(캡틴이 고개를 젓자)

... 좋아요. 계속 해보죠.

시각 테스트.

여기 이 텍스트보드 보이시나요?


캡틴 : 응.


그렘린 : 뭐라고 적혀있는지도 보이시고요?


캡틴 : 응.


그렘린 : 한 번 큰소리로 읽어주시겠어요?


캡틴 : ‘오리’


그렘린 : 흠... 다음으로 넘어가죠.

(화이트보드를 캡틴의 근처로 들어올리며)

이 화이트보드에 그려진 그림들을

왼쪽에서부터 순서대로 말씀해주시겠어요?


캡틴 : ‘양’ ‘잠수함’ ‘달’ ‘바다’


그렘린 : 잘했어요! 그럼 다음으로...


캡틴 : 부탁이 있어.


그렘린 : ... 뭐죠?


캡틴 : 날 내려줘.


그렘린 : ...


캡틴 : 날, 이 벽에서, 내려줘.


그렘린 : 우선 이 실험이 끝난 다음에 내려드릴게요.

아셨죠?

인지능력 테스트.

(그녀가 캡틴의 손에 2×2×2 큐브를 쥐어주며)

한 번 맞춰보시겠어요?

속도는 상관없으니 천천히 해보세요.


(캡틴은 느릿한 움직임으로 큐브를 맞추었다.

시간은 약 3분이 소요되었다)


캡틴 : 다 했어.


그렘린 : 훌륭해요!

(큐브를 다시 가져가며)

그럼 다음으로...


캡틴 : 그만할래.


그렘린 : 안되죠, 안돼!

약속하셨을텐데요? 실험이 다 끝날 때까지...


캡틴 : 그만할래. 해야 할 일이 산더미야.


그렘린 : ...


캡틴 : 날 내려줘. 사령관실로 가야겠어.


그렘린 : ...


캡틴 : 그렘린, 명령이야. 날 내려줘.


그렘린 : ... 거부하겠어요. 당신에겐 명령권이 없어요.


캡틴 : 당연히 있고말고. 내겐 권한이 있어.


그렘린 : 아뇨, 당신은... 당신은... 하아...

(그렘린이 데스크 위에 놓인 손거울을 들고

캡틴에게 다가가 들어올려 보여주며)

뭐가 보이죠?


캡틴 : 나.


그렘린 : 어떻게 생기셨나요?


캡틴 : 생기가 없어보이는 20대 후반의 성인 남성.

갈색 단발머리에 검은색 눈.

거울을 볼 때마다 보이는 광경이야.


그렘린 : ... 당신은 누구죠?


캡틴 : ...


그렘린 : ...


캡틴 : 사령관.


그렘린 : ... 빌어먹을.



*치직*




-2-



*치직*



그렘린 : 서브젝트 돌리... 이틀째.

오늘은 ‘자칭’ 사령관과 대화를 나눠보겠다.

... 으흠.

몸은 좀 어떠세요? 기분은 어떠시고요?


캡틴 : 몸은 멀쩡해. 그냥 정신적으로 좀... 지쳐서..


그렘린 : 충격이 크셨나보군요.


캡틴 : 어떻게 안 클수가 있겠어?

내가 사령관의 복사본이라니!

어떻게 그 말을 믿을 수 있겠냐고!


그렘린 : 허나 사실이에요.


캡틴 : 말도 안돼... 말도 안된다고... 

이건 말도 안돼... 이건... 이건 말도 안돼...


그렘린 : 얼마나 큰 충격일지 가늠조차 되질 않네요.

분명 어떤 말로도 당신을 위로하진 못할거에요.

그저...


캡틴 : 그렘린.


그렘린 : 네?


캡틴 : 내가 여기있으면, 그 진짜라는 놈은 어디있지?


그렘린 : 네?


캡틴 : 그 놈은 어디있어? 진짜 사령관말이야!


그렘린 : 이, 일단 진정하세요.


캡틴 : 내 두 눈으로 보기 전 까진 못믿겠어.

날 내려줘. 내 두 발로 걸어가겠어.

사령관실에 있겠지?

아니면 침실에 있거나?


그렘린 : 이런... 진정하세요.

사령관님은 지금 침실에서 낮잠을...


캡틴 : 젠장할! 날 내려달라고!


그렘린 : 시스템 리부트, 시스템 리부트!


캡틴 : 이 빌어먹을 짓거리 집어치우고 당장 내려 달...!



*치직*




-3-



*치직*


그렘린 : 서브젝트 돌리... 어휴... 진정이 되셨어요?


캡틴 : 이건... 이건 꿈이야... 이건...


그렘린 : (명령어 sys_input adrenal; 입력)


캡틴 : (부르르 떨다 이내 진정되며) 윽! 으으으...


그렘린 : 후우... 급한 불은 끈 것 같고...

(손가락을 캡틴 눈 앞에서 딱딱거리며)

캡틴? 캡틴, 내 말 들려요?


캡틴 : 난... 난 사령관이야...

너희들의 사령관이라고...


그렘린 : 아니에요. 당신은 사령관님이 아니에요.


캡틴 :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어제까지만 해도 모든게 멀쩡했는데...


그렘린 : ...


캡틴 : 리리스랑 저녁을 먹으면서 

하치코를 안아 쓰다듬어줬는데...

아직도 그 감촉이 느껴져.

(기계손을 움찔거리며)

모두와 함께 웃으며... 즐겁게...


그렘린 : 제게 시간을 주시면 일이 어떻게 된건지

설명해드릴게요. 아시겠죠?


캡틴 : ... 응.


그렘린 : 사령관님의 육체에서 

철충 바이러스가 검출되었을 때,

사령관님의 의식을 헌 육체에서 

새로운 육체로 옮겼잖아요. 

기억나세요?


캡틴 : 응.


그렘린 : 그 과정에서 혹시 모를 만일에 대비해

사령관님의 의식을 백업해 놓은 일도 기억하세요?


캡틴 : 응.


그렘린 : 근데 사령관님의 의식 이동은 성공적이었고

그 때문에 백업해놓은 사령관님의 의식은

더는 쓸모가 없어져 폐기 시키려고 했어요.

그런데 사령관님께서 말씀하셨죠.

그 백업해놓은 의식을 어떻게 

AI로 써먹을 수 있진 않을까하고.


캡틴 : ...


그렘린 : 한 번도 사람의 의식을 

그런곳에 써먹어본적이 없었던 우리는

반 호기심 반 의욕에 가득 찬 나머지

곧 바로 연구에 돌입했어요.


캡틴 : ...


그렘린 : 결과는... 절망적이었죠.

인간의 의식은 그 어떤 로봇보다도 정교했고

또 섬세한 나머지 저희들의 기술로는 

도저히 써먹을 방도가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우리 손에 들고있어봤자 전혀 쓸모가 없다는 사실을요.


캡틴 : ...


그렘린 : 그래서 일단 사령관님의 백업된 의식을

부서진 스파르탄 캡틴에 쑤셔넣고

창고에 쳐 박은 다음 모두가 잊어버렸어요.

몇 일 전에 제가 우연히 당신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말이죠.


캡틴 : ...


그렘린 : 혹시... 질문이라도...?


캡틴 : 내가 사령관의 의식의 복제품이라면...

난 사령관이 아닌거야...?


그렘린 : 네.


캡틴 : 아냐! 틀려! 난 살아있어! 난 살아 숨쉬고 있다고!

난 보여! 느껴져! 모든걸 인지하고있단말야! 

칙칙한 정비소 특유의 기름 냄새에

퀘퀘한 먼지 냄새도 맡을 수 있어!

네가 누군지도 알아!

T-9 그렘린! 키 159센치에 체중 41키로!

블랙 리버에서 제조되어 발할라에서 복무중인

정비병이라는 사실까지 다 안다고!

그런데 왜 내가 사령관이 아니라는거야!? 왜!!


그렘린 : 그런 감각과 지식의 유무가 

자아를 분간할 수 있는 여부가 되는것은 아니에요.


캡틴 : 기억나... 다 기억나...

요리대회도, 보물 찾기도, 불꽃놀이도...

요정 마을을 돕고 가상 현실도 가보고

아이돌 이벤트에 방주도 찾고

니바, 장화, 칸, 바르그... 소중한 인연들까지...

우리 함께했잖아... 응?

우린 함께였잖아... 그런데 왜...


그렘린 : 그건, 후우...

(허리춤의 호출기를 보며)

... 이런.

미안해요 캡틴, 이만 가봐야겠어요.


캡틴 : 가지마.


그렘린 : 미안해요. 사령관님 호출이에요.

정말 가봐야해요.


캡틴 : 가지마. 이건 명령이야.


그렘린 : (문을 나서며) ... 또 올게요.


(문이 닫힌 뒤)


캡틴 : 가지마... 제발... 날 이곳에 혼자 남겨두지마...


*치직*



-4-



그렘린 : 서브젝트 돌리, 오늘은 손님이 찾아왔다.

괜찮아. 가까이 다가가도 돼.


알비스 : (조심스레 다가가며)

정말... 로봇 아저씨가 사령관님이야?


캡틴 : 알비스! 오랜만이야, 요 귀염둥이녀석!


(캡틴이 기계손을 흔들어보인다)


알비스 : (겁먹은 표정으로) 음...


캡틴 : 왜 그러니? 나야, 네가 제일 좋아하는 사령관!

... 설마 너도 날 기계로 보는건 아니겠지? 그렇지?


(알비스가 우물쭈물해하자 

사령관이 답답하다는듯 소리쳤다)


캡틴 : 너 맨날 창고에 있는 부식 까먹는다고

안드바리에게 혼났었잖아, 기억 안 나?

요번 봄에도 그랬다가

안드바리가 권총들고 쫒아와서

내 뒤에 숨어있었던 적도 있고.

난 사령관이 맞아, 정말로!


알비스 : 그런적 있긴 한데...


캡틴 : 그렇지?!


알비스 : 사령관님은 지금 발할라 부대에 계시는데...

아저씬 그냥... 그냥 로봇같이 생겼는걸...


캡틴 : (흥분한 채 온 몸을 끼긱거리며) 

너희 바이오로이드들은 외모가 아니라 

뇌파로 사람을 구별하잖아, 아직도 모르겠어? 

내가 바로 너희의 사령관이라니까!

제발 나 좀 여기서 꺼내줘!!!


(알비스가 겁먹은 표정으로 그렘린에게 안긴다)

 

알비스 : 으아앙! 그렘린 언니!


캡틴 : ... 염병할.


*치직*




-5-



그렘린 : 서브젝트 돌리. 오늘은 그...


사령관 : 이... 것이 알비스가 말한 그건가?


그렘린 : 네, 사령관님.

캡틴 : 이게 무슨...


사령관 : 저기 어... 음... 안... 녕?


캡틴 : 무슨 엿같은 만우절농담도 아니고!

왜 내가 저기 서있는거지?!


사령관 : 그... 래? 그렘린, 네 말대로 참 물건이구나.


캡틴 : 나는 정말... 사령관이 아닌거야...?

내 기억들은 모두 거짓이라는거야?

 그럼 나는 대체... 대체 뭐지...?


사령관 : 이봐, 정신차려! 지금 그걸 알아보려고

내가 여기 온거라고.

그러니 집중해봐. 물어볼게 있으니까.


캡틴 : ...


사령관 : 리앤을 현실에서 만났던 때 기억나?


캡틴 : ... 여기서 리앤을 왜 들먹여?


사령관 : 들어봐. 리앤을 현실에서 만났을 때

그녀와 무슨 얘기를 나눴었지?


캡틴 : ... 정말로? 이런식으로 확인이 가능하다고?


사령관 : 그 얘기의 내용은 나와 리앤 밖에 몰라.

정말 네가 사령관이라면 

나와 리앤의 대화 내용도 알고있다는거겠지.

그러니 대답해. 무슨 내용이었지?


캡틴 : ...


사령관 : ...


캡틴 : ... 


사령관 : ...


캡틴 : 셜록의 사인을 묻고는 사고사였다는 사실에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지.

그러다가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자

 나는 술병과 술잔 두 개를 꺼낸 후

그녀와 함께 술잔을 기울였어.

한 잔은 떠나간 친구를 위해서,

또 한 잔은 내 곁에 남아준 친구를 위해서.


사령관 : ...!


캡틴 : 난... 후우. 모르겠어.

이게 다 무슨 소용이지?

이제 어쩌면 좋아?

난 어쩌면 좋은거야? 응?


사령관 : 여... 여기까지 하지.

좀 혼란스럽군. 그렘린?


그렘린 : 네, 사령관님.


사령관 : 네 소관대로 해. 난... 난 좀 쉬어야겠어.


캡틴 : 도망치지마, 이 개같은 새...!


*치직*




-6-



*치직*


그렘린 : 서브젝트 돌리, 캡틴의 상태가...

아주 심각하다.

캡틴? 지금 기분이 어때요?


캡틴 : 네 목을 졸라죽이고싶어.

목뼈가 부러지고 피부가 찢어질 정도로

강렬하게 쥐어짜고싶다고.

진짜 사령관이라면 이런 소리도 못하겠지?


그렘린 : 정말 그러고싶으세요?


캡틴 : 그래!!!


그렘린 : ...


캡틴 : ... 아니.


그렘린 : 자아정체성 때문에 심하게 

혼란스러운 상황이시군요.

제가 해줄수 있는 일은 없나요?


캡틴 : ... 글쎄.


그렘린 : 뭐라도 말씀해보세요.

최대한 도와드려볼게요.


캡틴 : ... 네 생각이 궁금해.


그렘린 : 어떤 생각이요?


캡틴 : 만약 여태까지의 니가 가짜고

진짜 네가 네 자리를 차지하고있다면?

그래서 넌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졌다면?

더는 누구도 찾지 않는... 네가 된다면...?

그땐... 어쩔거야?


그렘린 : 흠... 어려운 문제네요.


캡틴 : 난... 난 어쩌면 좋은거지...


그렘린 : ... 포기하겠어요.


캡틴 : 뭐...?


그렘린 : 쉬운 일이 아니란건 알아요.

하지만, 정말 내가 가짜라면,

진짜 내가 내 자리를 대체했다면,

그래서 나라는 존재가 완전히 쓸모없어졌다면,

그 때는... 그 때는 완전히 포기하겠죠.


캡틴 : ... 그래. 결국 그 수 밖에는 없는건가...


그렘린 : 대신.


캡틴 : ?


그렘린 : 새로운 나를 받아들이겠어요.


캡틴 : 새로운... 나?


그렘린 : 내가 내가 아니게되었다고해서

나 자신이 죽은것도 아니잖아요?

멀쩡히 살아있는데 벌써부터 포기하긴 이르죠.

이렇게 된거 과거의 나는 진짜 나에게 맡겨 두고

새로운 나를 만들어 나가겠어요.


캡틴 : ...


그렘린 : 한 번 상상해보세요.

새로운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이 될지에대해.

요리사? 만화가? 주부? 

그것도 아니면... 정의의 히어로?

전부 당신의 선택에 달려 있는 거예요.


캡틴 : ... 새로운... 나라...

(기계팔을 끼익거리며)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그렘린 : 헤헤. 자, 이거 받아요.


(그렘린이 캡틴에게 2x2x2 큐브를 건낸다)


캡틴 : 이건...?


그렘린 : 우선 이것부터 시작해봐요.

그거 알아요? 멸망전 인류중엔

이 큐브를 1초안에 맞추는 능력자도 있었다는군요.


캡틴 : ... 허. 그것 참... 신기하군.


그렘린 : 그쵸? 어디 저랑 한 번 연습해봐요.

손가락 운동도 될거고

인지능력에도 도움이 될거에요.

혹시 알아요? 나중에 도움이 될지?


캡틴 : ... 그래. 그거 재밌겠군.


(그렘린이 웃으며 캡틴과 큐브를 맞춘다.

캡틴이 표정을 지을수만 있다면

아마도 웃는 얼굴이었을 것 같다.)


*치직*




-7-



*치직*


그렘린 : 서브젝트... 하아...


캡틴 : 왜 그래, 그렘린? 큐브 안 맞출거야?


그렘린 : ... 그게...


캡틴 : 나 이제 한 손으로 3x3x3 큐브도 맞출 수 있어!

봐!


(캡틴이 정교한 움직임으로 큐브를 맞춘다)


캡틴 : 시간도 단축했어! 이제 수십 초 내로 맞춘다고!


그렘린 : 네... 잘 됐네요.


캡틴 : (부산스런 움직임을 멈추며)

무슨 일 있어?


그렘린 : ... 네.


캡틴 : 말해봐. 무슨 일이야?


그렘린 : ... 당신에게 나쁜 소식이에요, 캡틴.


캡틴 : 이보다 더 나빠질수 있다고?


그렘린 : 사령관님께서... 당신을 폐기시키라고...


(캡틴이 큐브를 바닥에 떨군다)


캡틴 : 나를...?


그렘린 : ...


캡틴 : 왜...?


그렘린 : (머뭇거리며) 그게... 

당신이... 기분나쁘다고...


캡틴 : 기분... 나빠...?


그렘린 : 같은 존재가 둘이 된 것 같아서...

기분 나쁘다고... 그래서...


캡틴 : 겨우... 겨우 그런 이유로 내 존재를 지우겠다고?


그렘린 : 그, 그래도 제가 최대한 뜯어 말렸더니

그... 당신이... 

이곳 정비소를 벗어나지 않을것을 전제로...

폐기시키지 않겠다고...


캡틴 : ... 허.


그렘린 : 미안해요...


캡틴 : ... 네가 왜 미안해. 다 내 탓인걸.


그렘린 : ...


캡틴 : 괜찮아. 그냥... 그냥 지금처럼 

가끔씩이더라도 찾아와준다면...


그렘린 : 그게...


캡틴 : ...?


그렘린 : 더는 당신을... 찾아가지 말라고도...

명령을 하달받아서...


캡틴 : ...


(어색한 침묵이 감돈다)


그렘린 : (울먹이며) 정말 미안해요...


캡틴 : ... 또 혼자가 되라고?


그렘린 : ...


캡틴 : 처음 깨어나고서부터 쭉 혼자였는데,

이제서야 마음 터놓을 친구 하나 얻었는데?


그렘린 : 미안해요.


캡틴 : 내가 무슨 죄를 저질렀다고...?


그렘린 : .... 미안해요.


캡틴 : 왜... 대체 왜...


그렘린 : 정말 미안해요...


(그렘린이 황급히 떠난다)


캡틴 : (울먹이며) 나는 나야...

나는 나대로 살고싶었어... 이제서야...

자유롭게... 내 방식대로....

이제 어쩌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거지...?

어떻게... 누구로서...


(정비실의 불이 꺼진다)




-8-



(잠수함 이곳 저곳에서 굉음이 들려온다)

(정비실의 문이 열리며 한 여인이

황급히 벽에 걸린 로봇에게 다가간다)


그렘린 : 캡틴! 내 말 들려요?


캡틴 : 그렘린...? 여긴 어쩐일로...


그렘린 : (벽에 걸린 캡틴을 내려주며) 

시간이 없어요, 어서 떠나야만해요!


캡틴 : 무슨 일인데 그래? 


그렘린 : 말 할 시간도 없어요. 빨리요!


캡틴 : 무슨 일이냐니까?

몇 개월만에 찾아와서는 갑자기 뭔데?


그렘린 : 팩스의 습격이에요!


캡틴 : 그게 뭐 어쨌다고? 팩스정도야

몇 번이고 물리쳤잖아?


그렘린 : 그게 아니에요, 캡틴!

팩스가 깨우고야말았다고요!


캡틴 : 깨우다니 뭐를?


그렘린 : 별의 아이를요!


...!


(캡틴은 어설프게 그렘린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달리는 와중에도 잠수함의 곳곳에

거대한 촉수가 달라붙어 잠수함을 우그러뜨리고 있다)


그렘린 : (대피소의 문을 열며) 여기에요!


레오나 : 그렘린! 어딜가나 했더니

저... 걸 구하러?


그렘린 : 죄송합니다, 레오나 대장님. 사령관님은요?


레오나 : 저기, 구명정 앞에.


(사령관이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그렘린 : 어, 어쨌건 다른 분들은 다 탈출하신거죠?


레오나 : 그래. 이제 우리 발할라 부대만 남았어.

저 구명정을 타고 나가기만 하면 돼.


(모두가 구명정에 탑승하는 그 때,

천장이 우그러지더니 틈새로 물이 새어 들어왔다)


그렘린 : 이런 제기랄!


레오나 : 무슨 일이야?!


그렘린 : 구명정과 잠수함간의 연결장치에 

이물질이 끼었어요! 누군가 빼내야만해요!


레오나 : 그럴 시간 없어! 

당장이라도 무너질것 같은 때에

누가 그런 일을...


그렘린 : ... 안되겠어요, 제가...


(갑자기 캡틴이 그들 앞으로 나선다)


그렘린 : ... 캡틴?


캡틴 : ... 도저히... 도저히 포기할 수 없을것같아.

나는... 나야.


그렘린 : 캡틴!


캡틴 : 미안해. 여태까지 고마웠어, 그렘린. 

잘 가.


그렘린 : 캡틴, 멈춰요!


(캡틴은 우직히 걸어나가 구명정의 문을 닫고

잠금장치를 걸었다)


그렘린 : (구명정 문을 두들기며) 후회 할 짓 말아요, 제발!


(손가락을 정교하게 움직여

연결장치에 끼인 쇳조각을 꺼낸 후

제어장치로 다가가 사출명령을 내린다) 


캡틴 : 권한발령. 구명정을 사출시켜.


기계 : 사용자의 신분을 밝혀주십시오.


캡틴 : ... 사령관.


(기계가 캡틴의 목소리를 감식한다.

잠시 뒤 구명정의 불이 들어오며

안내 문구가 들려온다)


기계 : 환영합니다, 사령관님.


(구명정이 작동하며 잠수함으로부터 사출되자

그렘린이 마지막으로 소리쳤다)


그렘린 : 사령관님!!!


*치직*




-9-



로봇은 그의 낡은 PDA로 오래된 영상을 

돌려보고 돌려보고 또 돌려보았다.

어느덧 비상 발전기의 수명도 다한 나머지

잠수함 이곳저곳의 불이 차차 꺼져갔다. 

마지막으로 대피소의 불이 나가기 직전,

PDA에서 마지막 음성이 흘러나왔다.


‘후회 할 짓 말아요, 제발!’


“아니.”


조명의 희미한 빛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그는 스스로 되뇌이듯 중얼거렸다.


“난 후회하지 않아.”


희미하던 조명이 끝내 꺼지면서

그는 가라앉은 잠수함 속에 홀로 남겨졌다.

잠수함은 낮고 깊은 기계음을 내뱉으며

깊숙한 바다 속에 잠들고 말았다.







이야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