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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두꺼운 말뚝이 부딪치는 소리.

 

홍련의 손끝에서 날아간 화살이 장화를 향해 비처럼 쏟아졌다.

 

“피하지 마.”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울렸다.

 

홍련의 새빨간 눈빛.

 

지금껏 장화가 본 적 없었던, 오직 거울 속 자신에게서만 볼 수 있었던 사냥개의 눈이 그녀를 잡아먹을 기세로 노려보았다.

 

“피하지 말라고!”

 

쾅!

 

최초의 일격이 이어진다.

 

이격二擊

 

음속을 웃도는 속도로 날아드는 말뚝들의 충격파가 허공을 갈랐다.

 

삼격三擊

 

쇄도한 화살촉이 땅에 박히자 지진이 일어난 것 같은 균열이 솟구쳤다.

 

쾅! 콰광!

 

압도적인 힘 앞에 단단했던 시설의 격벽이 솜사탕처럼 녹아내린다.

 

화살 끝에 달린 엠플은 대구경 저격총의 탄처럼 거대했고, 터지는 것과 동시에 반경 수십 미터를 얼음 더미로 뒤덮어버렸다.

 

‘안 돼... 안... 크흡!’

 

장화는 몸을 떨었다.

 

자신이 봐왔던 그 어떤 홍련도 저런 눈빛을 하고 있던 적은 없었다.

 

아니,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둔 적이 없었다.

 

자식을 잃은 어미의 눈.

 

세상 모든 장미를 불사를 듯한 투지.

 

압도적인 분노.

 

장화는 지금껏 그 어떤 홍련도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홍련에게서 많은 것을 빼앗은 그녀였지만, 잃을 것이 없어진 홍련의 위험성 역시 모르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렇기에 대원들을 잃은 절망이 격노로 바뀌기 전에 죽이는 것.

 

장화가 홍련을 상대하며 본능적으로 지켜온 법칙이었다.

 

‘대체 왜...’

 

하지만 저 홍련은 이미 그 감정을 완성해놓았다.

 

한겨울 싸락눈처럼 차갑고 격렬한 감각.

 

제조 캡슐에서 나오자마자 눈을 가리는 머리카락을 치울 새도 없이 활시위부터 당기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니, 되려 이상해지는 것이다.

 

‘무덤의 수호자로 만들었다 하지 않았나...?’

 

저건 지키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 자신의 궤적 끝에 제조 캡슐이 있는지, 섹션을 떠받치는 기둥이 있는지, 그런 것은 일체 신경 쓰지 않고 덤벼든다.

 

오로지 목표는 장화, 아니면 그녀가 서 있는 땅.

 

[아직도 망설이는 겁니까? 장화?]

 

아직 망가지지 않은 카메라 아이가 깜빡거렸다.

 

[그렇게 도망만 다닌다 해서 이길 수는 없을 겁니다. 살고 싶다면 반격이라도 해야죠.]

 

약간 격정적인 어조.

 

[아니면 전부 다 죽여버리던가요.]

 

비웃음이다.

 

동우의 말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홍련의 시체들을 가리켰다.

 

[당신한테든 아니든 어차피 다 죽을 것들입니다. 그러니 이왕 죽을 거, 승산을 조금이라도 더 높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경로에 저 단백질 덩어리들만 없어도 회피율이 45%는 더 향상될 겁니다.]

 

철퍽!

 

장화의 발끝에 잘린 팔뚝이 툭 하고 걸렸다.

 

장화가 신들린 솜씨로 거대한 화살촉들을 피하는 사이, 그 궤적 끝에 있던 홍련들이 꼬치처럼 꿰뚫린 채 으스러져 있던 것이다.

 

싸움이 시작된 지 30초가 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죽어버린 홍련 더미들은 절반 이상.

 

화살의 충격파로 사지 중 절반이 무너진 것이 대부분이었다.

 

[아니요! 그러면 안 됩니다, 장화님! 저희가 뭣 때문에 지금까지 버텨왔는데요!]

 

옆에 있던 드론이 장화의 품에 있던 원격 폭탄 몇 개를 허공에 던졌다.

 

삐빅-

 

그와 동시에 터지는 화염구. 드론의 머리에서 나온 신호에 폭탄들이 허공에서 거대한 화망을 만들어냈다.

 

그 덕에 쉴 새 없이 날아들던 화살들이 잠시 잠잠해졌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드론이 푸른 차폐막으로 장화를 감싸며 성급히 말했다.

 

[아시잖아요! 지금 여기서 꺾이면 불안 증상만 더 커질 거라고요!]

 

“나... 나는 아직 괜찮...”

 

[괜찮을 리가 없죠!]

 

드론은 장화의 등을 날개로 가리켰다.

 

수십, 수백 개의 자상. 날카로운 손톱이 긁고 지나간 상처였다.

 

드문드문 박혀 있는 손톱 조각에서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조막만한 세 손가락으로 갈라진 드론의 날개가 조심스럽게 조각을 뽑아내며 말했다.

 

[오메가 섹션에는 멸망 전의 심리학 지식이 있습니다. 덕분에 지금 장화 님의 상태를 분석할 수 있죠. 결과가 어떤지 아세요?]

 

“... 몰라, 등신아.”

 

장화의 초점 잃은 눈이 드론이 있는 허공을 간신히 향했다.

 

고개를 몇 번이나 저어야 간신히 보이는 시야. 눈의 동공으로 힘이 들어오기까지 너무도 오랜 시간이 걸린다.

 

심박수 증가, 동공 확장, 간헐적인 떨림, 반복적인 말 더듬기,

 

장화가 보이는 증상의 1할도 되지 않는 것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확신할 수 있었다.

 

[최악입니다.]

 

드론은 장화가 좋아할 만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나마 있던 승산도 떨어지고 있어요. 오리진 더스트도 과다 투입한 마당에 신체 조건 때문일 리는 없겠죠. 심리적인 요인 때문이란 겁니다.]

 

“......”

 

[그런 상황에서 더 많은 살인을 해봤자 도움 같은 게 될 리가 없어요.]

 

살인.

 

도움이 안 된다.

 

죽이는 게, 사는 데에 도움이 안 된다고?

 

장화에겐 우스운 농담과도 같은 말이었다. 

 

수십 명이든 수백 명이든 죽여야 사는 세상에 살던 원주민에겐 질 나쁜 우스갯소리처럼 들리는 말이다.

 

“......”

 

그렇게 들려야만 했다.

 

헌데 지금 그녀에겐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냥 도망치세요. 애초에 이길 수 있는 싸움이 아니었다고요!]

 

드론의 얇은 스피커가 있는 힘껏 고함을 쳤다.

 

[저만한 녀석을 만들었다면 분명 무덤 시스템도 많이 망가졌을 거에요. 그러니 다음 타자에게 맡기는 게...]

 

“언제.”

 

[네?]

 

“언제 오는데. 그 다음 타자란 인간은.”

 

시간이 없다.

 

저 정도의 바이오로이드를 상대하려면 오르카에서도 손 꼽히는 강자가 와야할 터. 허나 지금 한반도에 그런 바이오로이드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대륙에서 대원들을 데리고 와야 한다는 얘기.

 

그러면 그동안 사령관의 상태가 최악으로 치닫는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

 

“어차피 내가 도망가지 않아도 바르그 네가 사람을 데리고 올 거야. 굳이 내가 안 가도 돼.”

 

[그러니까 가라는 얘기죠! 장화 님 혼자서 싸우는 것보단 그러는 편이...]

 

스르륵.

 

폭탄에 일었던 먼지 바람 속에서 어두운 그림자가 바람처럼 다가왔다.

 

“그리고 일단 그 생각부터 해야지.”

 

드론의 단단한 차폐막을 종이처럼 찢어버리며 들어오는 손. 장화의 등에 수많은 스크레치를 냈던 것과 같은 색의 손이었다.

 

장화는 단숨에 숨을 들이 마시고 그 손에 와이어를 감았다.

 

“저 녀석이 날 가게 내버려 둔데?”

 

차락! 차라라라락!

 

손목의 이질감을 느낀 손이 단숨에 팔을 차폐막 밖으로 끄집어냈다.

 

그 반동으로 산산조각 나버린 역장. 푸른 역장의 조각 사이로 장화의 얇은 와이어가 낚시줄처럼 길게 이어졌다.

 

놓치면 안 된다.

 

본능적으로 오른손 근육을 수축시킨 장화가 길게 팔을 내질렀다.

 

허공에 뿌려지는 무수한 길이의 와이어.

 

스스슥!

 

턱 끝까지 올라온 생존 본능에 한껏 기교해진 손짓이 와이어 하나하나를 거대한 검기처럼 휘둘렀다.

 

위에서부터 빠르게 내리꽂는 와이어가 뒤로 걸음질치는 홍련의 어깨로 향했다.

 

캉!

 

금속음이 맞부딪히는 소리.

 

“그런 게 통할 것 같아?”

 

그러나 오리진 더스트로 티타늄처럼 단단해진 홍련의 피부가 보란 듯이 와이어를 튕겨냈다.

 

이어지는 연격도 마찬가지.

 

팅! 티딩!

 

순간 장화는 경악했다.

 

그녀의 집중력만큼 길게 늘어진 시간 속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연격을 내질렀지만, 홍련은 아랑곳하지 않고 날아드는 와이어의 속도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스슥!

 

‘이런 미친...’

 

심지어, 따라오고 있다. 주무기가 크로스 보우인 저격용 바이오로이드가 자신의 속도에 몸을 맞추고 있었다.

 

사자 입처럼 와이어로 둘둘 싸매도 어디선가 턱, 하고 걸린다.

 

손 끝에서 느껴지는 단단함.

 

그저 주사기로 무분별하게 오리진 더스트를 주입한 자신과 달리 태생부터 그 모든 힘을 감당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바이오로이드의 강함은 상상 이상이었던 것이다.

 

“헛짓거리 하지마.”

 

콱!

 

홍련이 허공으로 팔을 휘둘렀다. 휘두른 손 끝에는 수백 가닥의 와이어가 붙잡혀 있었다.

 

“그딴 공격으로 죽을 거 같으면 여기 오지도 않았어.”

 

“... 너, 너가 뭔데.”

 

장화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홍련은 얼어붙은 어조로 단조롭게 대답했다.

 

“홍련.”

 

그럼에도 낱말은 불타오르고 있었다.

 

“네가 죽인 아이들의 엄마.”

 

“그게 무슨...”

 

“애초에 사이 좋게 설명해줄 만한 사이는 아니지. 안 그래?”

 

투둑!

 

실핏줄이 터져나올 만큼 홍련이 힘을 주자 장화의 와이어가 머리카락 끊어지듯 우수수 떨어졌다.

 

그리고는 단숨에,

 

“커헉!”

 

장화의 목을 움켜 쥐었다.

 

파르르 떨리는 손. 전투의 고됨보단 감격에 젖어있는 떨림에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장화의 전투 데이터로 만들어진 홍련. 그렇다는 건 그 데이터가 쌓이기까지 죽어간 모든 몽구스 대원에 대한 기억도 고스란히 전해졌다는 뜻이다.

 

엄마 이름을 부르짖으며 목이 잘려나간 미호.

 

짓지도 못하는 억지 미소를 그리며 눈물과 함께 죽어나간 핀토.

 

자기 분신처럼 자랑스럽게 여기던 방패가 양단되어 아연실색한 스틸 드라코.

 

사지가 결박된 채 자신의 파일 벙커가 배가 꿰뚫린 불가사리.

 

“하아... 하아...”

 

장화의 머릿속엔 지금껏 자신이 죽여왔던 그 모든 아이들의 기억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기억들은, 홍련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 목을... 이 목을 잡기 위해 내가 몇 년을 기다렸는지 알아?”

 

“하아... 하... 커흐흡!!”

 

“10년? 20년? 아니... 아니. 고작 그 정도 시간을 기다려온 게 아니야. 그보다 훨씬, 훨씬 더 많은 시간을 고대해왔지.”

 

서슬퍼런 손놀림이 두려웠다.

 

뜨거운 혈관 위로 닿는 차가운 사람의 흔적.

 

홍련의 날카로운 손톱이 동맥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소름 끼쳤다.

 

그럼에도 그녀가 내뿜는 거대한 살기만큼 공포스러운 것은 없었다.

 

장화와 같은 눈을 하면서, 홍련이 물었다.

 

“그 동안 살면서, 너와 내 입장이 바뀔 날이 올거란 생각은 안 해봤니?”

 

“나... 나는...”

 

“내 아이들을 죽이고, 죽인 아이들의 시체를 내 눈 앞에서 짓밟아버리고, 그렇게 절망하는 나를 죽이고... 그러는 동안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은 해본 적 없냐고.”

 

“... 나... 나는... 그 때...”

 

“똑바로 말해!”

 

홍련의 눈에서 작은 실핏줄이 터졌다.

 

붉어지는 눈. 붉은 동공 주변을 감싸던 하얀 흰자마저 물들기 시작했다.

 

검게,

 

또 붉게.

 

“맞아? 아니야? 둘 중 하나만 대답해! 그것 말고 답은 없잖아!”

 

장화는 가뿐 숨을 몰아쉬며 홍련을 바라보았다.

 

본디 같은 유전자에서 태어난 존재. 평생 홍련을 증오해 마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그녀의 태생이었다.

 

어쩌면,

 

나와 같은 유전자를 타고난 저 바이오로이드처럼,

 

나도 어쩌면, 저 사람처럼 행복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 사치스러운 질투가 장화를 괴물로 만들었고, 괴물의 먹잇감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은,

 

“말해!!”

 

역설적이게도 그녀들이 같은 유전자를 타고 났다는 것.

 

즉, 장화가 되어버린 홍련의 얼굴이었다.

 

사냥개처럼 발톱을 치켜세운 홍련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장화의 눈을 내려다 보았다.

 

“어때? 죽을 것 같으니까 너도 무섭고 그러니?”

 

[그, 그만하십시오! 홍련 님. 지금 당신의 머릿속에 있는 이미지는 가공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보다 못한 드론이 용감하게 날개짓하며 끼어들었다.

 

신기한 벌레를 본 듯한 눈으로 시선을 돌린 홍련이 작게 헛웃음지었다.

 

“... 이건 또 뭐야.”

 

[저는 오메가 섹션의 담당 인공지능! 홍련 님의 생산 설비에서 16%의 기능을 할당하고 있는 제조 설비 부속 지능입니다!]

 

“그래서?”

 

[그랬기에 홍련 님의 제조 과정에서 비정상적인 접근이 있었는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선 제가 데이터 검증 요청을 실행할 테니 현재 기억에 이상이 있는지 아닌지 확인할 때까지만 잠시 앉아 계시는게...]

 

“닥쳐.”

 

콰직!

 

홍련이 드론의 얼굴을 붙잡았다.

 

한층 더 ‘장화’처럼 변해버린 홍련의 입에선 그녀답지 않은 말이 튀어나왔다.

 

“너부터 죽여줄까? 지금이라면 누구 하나 죽이는 것 정도는 숨 쉬는 것보다 쉬울 거 같은데.”

 

[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지금 기억은 오미크론 섹션 인공지능이 인위적으로 조작하여 개조된 것일 수 있습니다! 제가 확인해드릴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그게 조작이 됐든 아니든 무슨 상관이지?”

 

으득!

 

홍련의 손등 위로 핏줄이 섰다.

 

한층 더 강하게 힘을 준 손에 장화가 신음했다.

 

[그게 무슨...]

 

“난 홍련이고 이 년은 장화다. 지금까지 수백 명의 홍련이 죽었고, 수천 명의 몽구스 아이들이 죽었어. 그게 사실이란 것보다 중요한 건 없어.”

 

[... 하, 하지만 이 장화 님은 홍련 님께 아무 해악도 끼치지 않았습니다!]

 

그 말에 홍련이 어이 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이것이 죽인 홍련은 무슨 해악을 끼쳤길래 죽은 거지?”

 

[그... 그건...]

 

“홍련과 장화는 아무 관련 없는 바이오로이드였다. 그런데도 먼저 칼을 뽑아든 건 이것들이었다. 단지 같은 유전자로 만들어졌다는 이유만으로 수천 명을 학살하고 도살했단 말이다!”

 

고함.

 

점차 강해지는 목소리로 홍련이 말했다.

 

“내가 지키지 못한 시민들의 비명 소리가 들린다! 지켜질 필요조차 없었던 시민들이 저 와이어에 잘려나간 모습이 아직도 보인다!”

 

“내 몸을 관통하고 죽이던 이 악종의 모습이 보인다! 어떤 근육을 잘라야 가장 고통스러워 하는지 연구하고 관찰하면서, 내 생명을 벼랑 끝으로 몰고 간 수십 명의 장화가 보인단 말이다!”

 

[하, 하지만 이 분은...]

 

“무엇보다도!!”

 

홍련의 높아지는 고함이 절정에 달했다.

 

순간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 섞인 위압감에 사선에 선 장화마저도 몸을 움츠릴 정도였다.

 

그리고는 천천히,

 

천천히,

 

가뿐 숨을 입 밖으로 뱉어내며,

 

“... 무엇보다도.”

 

최대한 분노의 침전물을 걷어내었다.

 

격렬하게 분노해야 할 이유를 줄이고, 자신을 죽였던 모습도 참아내며, 그녀가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숨을 죽였다.

 

마치 그 모든 것을 용서해준다 해도 용서할 수 없는 게 있단 걸 장화에게 보여주려는 것처럼.

 

그렇게 최후까지 남게 된 분노는,

 

“내 아이들을 죽였다.”

 

그 말 한마디였다.

 

“미호를 죽였다. 핀토를 죽였다. 불가사리를, 스틸 드라코를 죽였다.”

 

어떻게 죽였는가,

 

어디서 죽였는가,

 

언제 죽였는가,

 

그녀는 덧붙이지 않았다. 그저 ‘죽었다’, 이 한마디를 고장난 라디오처럼 되풀이했을 뿐이다.

 

“내 아이들을 죽이고, 죽이고, 또 죽였는데... 그리도 많은 아이들을 내 앞에서 죽였는데... 내가 용서해주어야 하나?”

 

[... 죄,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당신은 저들의 부모가 아닙니다.]

 

“......”

 

[부모란 혈계적인 관계로 묶이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인위적인 연결 고리입니다. 그런 것 때문에 이리 힘들어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인공지능이었기에 할 수 있는 말.

 

아니, 그보다 장화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했기에 할 수 있었던 말이었다.

 

바이오로이드에게 있어 부모라는 관계란 지극히 이례적인 것. 불량식품처럼 인공적인 첨가물이 들어간 느낌이 풀풀 풍기는 개념이다.

 

[그러니까... 그냥 그렇게 만들어진 것일 뿐입니다. 홍련 님.]

 

“......”

 

그 부분을 공략해야 한다. 드론은 제딴에 그리 생각했던 것이다.

 

실제로 드론의 말에 살기가 가라앉았다. 숨 쉬기조차 힘들었던 주변의 공기가 차츰 상쾌해지는 느낌이 드는 듯했다.

 

“그럼 내가 묻지.”

 

하지만 그것도 잠시.

 

[네. 알겠습니다. 제가 답해드릴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떤 질문이라도...]

 

“이것이 우리 아이들을 죽인 이유는, 만들어진 게 아닌가?”

 

드론은 깨달을 수 있었다.

 

살기가 가라앉은 게 아니라, 자신들이 살기 속으로 깊게 빠져들어버렸다는 것을.

 

깊은 심해처럼 숨 막히는 분노가 사지를 옥죄어왔다.

 

“이 천하의 악종이 내 아이를 죽인 이유가...! 그 빌어먹을 만들어진 천성 때문이냐고 물었다! 미호를, 불가사리를 죽인 이유도 그렇게 만들어졌기 때문 아니냐고 물었다!”

 

[그... 그건...]

 

“고작 같은 유전자로 태어났다는 이유 때문에, 인간이 거기서 분노를 느끼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내 아이들, 수천 명의 아이들이 죽어야만 했다. 그런데 지금 나는 내 분노가 만들어진 것이란 이유로 참아야 하나? 그래야 하나!”

 

비명을 지르는 듯한 고성이 허공을 채웠다.

 

바닥을 기어다니던 홍련들도 그녀의 목소리에 거친 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 아이가, 내 아이가 죽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냔 말이다!”

 

홍련이 장화를 보았다.

 

아이를 죽인 살인자.

 

사랑하는 자식을 앗아간 범죄자.

 

그녀가 느꼈던 슬픔은 데이터 베이스에 백 년 동안 몇 줄 문구로 적혀 있었던 활자였다. KIA(작전 중 사망)이란 단어로 요약된 몇 명의 죽음이었다.

 

다만 그것이 모이고 모여, 마침내 죽은 아이들의 부모만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적혔을 때, 홍련은 이상함을 느낄 수 있었다.

 

“다시 묻겠다. 장화.”

 

왜 우리는 늘 잃어야만 하는가.

 

“왜, 죽였지?”

 

왜 우리는, 원치도 않던 행복을 빼앗겨야 하는가.

 

가족 놀이도, 그런 유대감도, 전부 인간이 작전의 효율성을 위해 설계했을 뿐이다.

 

처음부터 자신들이 선택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언제나 빼앗기는 것을 자신들의 탓으로 돌렸다.

 

죽은 미호의 저격총 부품값을 추산했을 때,

 

두 동강난 스틸 드라코의 시신을 수습했을 때,

 

과다출혈로 죽은 핀토의 핏덩이에서 오리진 더스트를 추출했을 때,

 

“왜, 우리였냔 말이다.”

 

지키지 못한 자신들의 탓이라 하였다.

 

슬퍼할 자격이 없는 실패작들이라 하였다.

 

그 슬픔을 느끼게 한 자들이 그들 자신이란 것을 뻔히 잊은 채로.

 

“......”

 

장화는 입을 다물었다.

 

대답할 수 없었다.

 

감정이 격해질수록 시야가 좁아지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시야가 좁을수록 좁은 것을 더욱 정확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몽구스를 죽였다는 사실.

 

그 명쾌하고 명확한 사실만이 홍련의 모든 것이었다.

 

“... 미안해.”

 

어림도 없는 말.

 

“미안... 해.”

 

그럼에도 하지 않을 수 없는 말.

 

“내가... 잘못했어.”

 

평생 자신이 용서를 받아야 할 입장이라 믿어왔다.

 

머릿속의 모듈이 그리도 자신을 불쌍하다 말해왔기에, 모든 슬픔의 근원이 이 같은 붉은 머리카락을 하고 있는 바이오로이드라 믿어왔다.

 

그러나 이제야 깨달았다.

 

“내가... 잘못했어. 내가... 내가...”

 

자신은 용서를 구해야 하는 입장이란 것을.

 

평생 속죄해도 구할 수 없는 용서를 빌어야 하는 악마라는 것을.

 

-ㅈ간 사령관 몸으로 환생한...

 

불현듯 떠오르는 이전 사령관.

 

책 속의 그는 더할 나위 없는 악종이었다.

 

바이오로이드라는 이유만으로 모두를 괴롭히고, 죽이고, 심지어 다시 살리고 죽이는 인간이었다.

 

그를 보고 손가락질했다. 책 속의 사령관에게 이입하면서, 그의 악함과 죄악을 비난했다.

 

헌데,

 

자신이 그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었나.

 

“미안해... 미안해...”

 

아무것도 듣지 않고 죽여왔다.

 

아무것도 보지 않고 죽여왔다.

 

사지를 잘랐다.

 

배를 찢었다.

 

붉은 피를 소복이 쌓아 올려 시체의 금자탑을 쌓아왔다.

 

“내가...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어. 내가...”

 

그랬기에 죽이지 않았다.

 

마리아의 목을 베었을 때도, 고블린의 뼈를 수천 조각으로 쪼개버릴 때도 홍련만은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것이었다.

 

속죄.

 

가능할 리 없는 희망을 품고 있다는 증거를 그녀의 손으로 보였다.

 

“미안하다고? 네가 감히?”

 

홍련이 어금니를 갈며 대답했다.

 

“아니. 아니지. 헛소리야. 네가 어떤 개새끼였는지 잊었나? 네가 어떤 얼굴로 나를 죽였는지 까먹은 거야?”

 

“......”

 

“까먹은 모양이네. 넌 절대 그럴 수 없어. 너희는 절대 미안해하지 않아. 절대로. 왜 그런줄 알아?”

 

홍련이 장화의 목을 놓았다.

 

커헉!

 

그녀의 구두굽이 장화의 명치를 지그시 눌렀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장화의 얼굴을 홍련은 허리를 숙여 보았다.

 

“바이오로이드는, 절대 변하지 않으니까.”

 

“... 왜?”

 

장화가 울 듯이 물었다.

 

“왜... 그렇게 단언하는 거야?”

 

홍련이 그렇게 말했다. 동우도 그렇게 말했다. 오르카의 모두가 그렇게 말했다.

 

장화는 바뀔 수 없다고.

 

태생이 악종이라 하였다.

 

태생이 악하게 태어난 물건이었다.

 

태어난 날 44명을 죽였고, 어린 아이를 죽였다.

 

죽여야 하는 사람을 죽였고, 죽이지 말아야 할 사람도 죽였다.

 

“정말 몰라서 물어?”

 

홍련이 이죽이며 말했다.

 

“그 많던 장화 중에 어느 누가 미안하다고 했나? 그 긴 시간 동안 너희 중 누구도 자신이 한 짓을 후회하지 않았다. 죽는 순간까지 오로지 자기만 억울하다 외치며 죽었다. 자기가 죽인 수십 명의 몽구스는 전부 다 잊었다는 것처럼.”

 

“... 나는...”

 

“아니라고?”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지. 정말 그럴 만한 인간성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었다면 진작에 죽었을 테니까.”

 

철컥.

 

홍련의 손가락이 방아쇠에 걸렸다.

 

금속제 화살촉이 어두운 조명 속에서 반짝이며 회색으로 빛났다.

 

‘... 죽기 싫어.’

 

기다란 말뚝이 자신의 머리를 꿰뚫어버릴 것이 두려웠다.

 

꼼짝할 수 없는 손과 발이 두려웠다.

 

피부로 느껴지는 죽음이 솜털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기어 다닌다. 무수한 죽음을 경험했지만 죽음 앞에 이토록 무력해진 것은 처음이었다.

 

‘......’

 

이제야 구원 받았다.

 

이제야 자신이 한 짓을 마주 보도록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그 용기를 줄 사람을 찾았다.

 

그런데 몰랐다.

 

수십 년간 쌓아 올린 죄악이 이토록 깊을 줄은.

 

그녀가 만든 시체의 금자탑은 이미 장화를 덮어 버릴 만큼 거대하고 광활했다.

 

-잊었어?

 

싸락눈의 냉기를.

 

희미한 신형이 아른거린다.

 

금발의 소녀.

 

이게 주마등이란 걸까?

 

그녀는 그 소녀가 누군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왜 네가 그렇게 괴물로 살아야했는지 말이야.

 

그녀가 처음으로 죽인 무고한 사람.

 

아직 그녀가 불량품이었던 시절, 마음속에 기억해놓았던 순수한 아이.

 

‘훗날 자기를 심판할 사람이 있다면, 그건 분명 그 날 물을 건넸던 그 아이의 형상일거야.’

 

자기도 모르게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그 소녀가 자신에게 말했다.

 

-괴물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세상이었잖아. 세상에서 장화가 맡을 수 있는 배역은 그것뿐이야.

 

‘... 난...’

 

-그런 사람이 이제와서 주인공이 되려 하니 죽을 맛인 거지. 수천 명을 죽인 악종이 평범하게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난... 그래도 살고 싶었어...’

 

-그럼 괴물로 살아.

 

소녀가 빙긋 웃었다.

 

그 작은 손가락은 바닥에 널려있는 홍련의 시체를 가리켰다.

 

큼지막한 덩어리로 떨어져 있는 시체 조각들. 저걸 이용하면 뭔가 빈틈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나 이목구비가 남아있는 얼굴 덩어리를 쓰면 저 홍련이라 해도 조금은 당황할 것이다.

 

어디 그것뿐이겠나? 난전으로 이끌고 가면 승산은 더더욱 올라간다. 그녀의 특기인 폭탄을 사용해 시체 속에 숨겨 놓으면...

 

...

 

...

 

‘싫어.’

 

살고 싶다.

 

다만 괴물로 살고 싶지는 않다.

 

그녀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 손 끝에 힘을 주었다.

 

차락! 차락!

 

넘실거리게 움직이는 와이어가 순간 출렁였다. 거대한 거미줄처럼 천장까지 닿아 있던 와이어는 그 끝에 매달려 있는 홍련들의 크로스보우를 길게 늘렸다.

 

그녀가 죽이는 대신 택한 방법을.

 

‘변할 거야.’

 

와이어의 실이 방아쇠에 걸렸다.

 

허공에 데롱데롱 매달려 있는 크로스보우 수십 개가 일제히 홍련의 몸을 향해 화살을 쏘았다.

 

비처럼 쏟아지는 연격. 그러나 성치 않은 몸 때문에 대다수가 홍련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갈 뿐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면 충분했다.

 

장화의 몸을 누르던 홍련의 굽이 순간 사라졌다.

 

때를 놓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난 장화는 최대한 허벅지를 쥐어짜내 땅을 박차고 나갔다.

 

뒤쪽으로. 거리를 벌린다.

 

“이런 잡기술을...!”

 

일순 얼굴을 찡그린 홍련이 허공의 와이어를 손으로 붙잡고 가볍게 휘둘렀다.

 

투둑! 투두두둑!

 

맥없이 뜯어지는 장화의 와이어. 마치 사람의 손에 무너지는 거미줄 같았다.

 

상대는 라비아타와 비견될 만큼 견고하게 설계된 무덤의 수호자. 장화가 있는 힘껏 움직여도 홍련은 단숨에 그녀를 따라잡는다.

 

“그냥 죽어! 조금이라도 양심이 있다면!!”

 

홍련이 고함쳤다.

 

장화의 손 끝에서 하나 둘씩 와이어가 빠져나갔다. 흩어진 와이어들은 홍련의 손에 붙잡혀 그녀의 의지대로 움직였다.

 

빼앗긴 무기. 장화가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아직 와이어에 달려 있는 크로스보우들뿐이었다.

 

타닥!

 

지면을 박차고 달리며 크로스보우를 잡았다.

 

기이하게 낯선 감촉. 어느새 지근거리까지 다가온 홍련을 향해 재빨린 빙결 엠플을 쏘았다.

 

“쓸데 없는 짓 하지 마!”

 

콰광!

 

엠플이 깨지며 푸른 냉기가 홍련을 감쌌다.

 

하지만 그 어떤 냉기도 홍련의 몸에 상처를 낼 순 없었다. 고작해야 그녀의 피부 위로 얼음 꽃을 피워내는 것 정도.

 

파직-

 

홍련이 팔을 휘두르자 얼음꽃은 푸른 꽃잎으로 흩날렸다.

 

“아니! 할 거야!”

 

그러나 장화는 계속 움직였다.

 

얼음을 떨쳐내려는 홍련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그 틈을 파고 들었다. 그와 동시에 크로스보우의 총구를 홍련의 이마에 대고 쏘았다.

 

카드득!

 

작게 그을린 이마. 얼굴 뒤쪽으로 길게 냉기가 뿜어졌다.

 

“계속 발버둥칠 거야! 이대로 죽긴 싫어!”

 

“아니! 넌 영원히 괴물이다! 괴물로 살지 않겠다면 그건 괴물보다도 이기적인 짐승이고!”

 

“그러라지 그러면! 짐승이든 뭐든 마음대로 말해!”

 

그렇게 살아서라도 보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

 

허리를 할 수 있는 만큼 비틀어 홍련의 주먹을 피한 장화가 뒤로 다리를 휘두르며 홍련의 얼굴을 가격했다.

 

“이젠 나 하고 싶은 대로 살 거야! 이제야 주인년도 죽였는데 이대로 죽으라고? 절대 안 되지!”

 

“그렇게 추하게 살고 싶었다면 여기 오지 말았어야지! 넌 나에게 죽는다! 내 아이를 죽인 만큼 고통스럽게!”

 

“그러니까 미안하다고!”

 

으직! 장화의 손에 들린 크로스보우가 홍련에게 부숴졌다.

 

하지만 상관 없다.

 

다음 크로스보우.

 

그게 부숴지면 그 다음 크로스보우.

 

다음.

 

그 다음.

 

그녀가 쥘 수 있는 무기는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다.

 

“죽어주고 싶을 만큼 미안하다고! 그러니까 한마디만 들어주면 안 돼?”

 

그녀가 살린 홍련의 수만큼.

 

그게 그리도 무수했기에 장화와 홍련의 싸움은 길게 이어졌다.

 

“닥쳐라! 넌 그럴 자격이 없어!”

 

“알아! 아니까 부탁하는 거 아냐! 나도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쾅! 쾅!

 

“변할 거야!”

 

쿵!

 

“네가 못 알아볼 만큼 변할 거라고! 그 개쓰레기 장화에서 조금은 나은 사람으로!”

 

“헛소리! 그게 가능할 것 같나?”

 

“당연히 어렵겠지. 근데 그런다고 변하지 말아야 해?”

 

장화의 와이어가 홍련에게로 건너갔다.

 

“주인도 없어진 세상에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좀 하면 안 되겠냐고!”

 

홍련의 무기는 장화에게로 넘어갔다.

 

장화가 된 홍련.

 

홍련이 된 장화.

 

피투성이가 된 장화를 본 홍련은 그제야 장화를 바라보았다.

 

“... 네가 하고 싶은 게 뭐냐.”

 

“속죄.”

 

“할 수 없다.”

 

“하게 할 거야.”

 

더러운 농담이다. 입에 담지도 말아야할 헛소리다.

 

세상을 피로 물든 장화는, 장화 말고는 어떤 것도 될 수 없다.

 

모든 바이오로이드가 그런 것처럼.

 

홍련은 와이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는 길게 뻗었다.

 

“불가능하다.”

 

“... 왜?”

 

“그 어떤 장화도 바뀌지 않았으니까.”

 

춤을 추는 듯 일렁이는 와이어. 장화가 홍련을 닮은 것처럼 홍련도 장화를 닮았다. 그녀의 손이 익숙하다는 듯 와이어들은 날카롭고 소름 끼치게 모이고 흩어졌다.

 

기다란 채찍처럼 변한 와이어들이 당장이라도 장화를 향해 날아들 것처럼 움직였다.

 

“너의 불가능은 너의 삶이 증명한다. 장화.”

 

마침내 기나긴 싸움의, 끝이 다가왔다.

 

“너는 어떤 증거가 있지?”

 

대답할 수 없는 질문과 함께.

 

그때,

 

삐비빅-

 

장화 옆의 드론이 기이한 목소리를 내었다.

 

[증거?]

 

드론의 기계음이 아닌 사람의 목소리.

 

모든 전파가 막힌 오미크론 섹션 내부로 드론의 네트워크 망을 타고 누군가 말을 걸어온 것이다.

 

그와 동시에 팽팽하게 당겨지는 홍련의 와이어.

 

촥! 차라라락! 츠츠츳!

 

[증거라면 없지만 증인이라면 있지.]

 

거대한 섹션 내부를 전부 감싸고 있던 와이어의 장막이 세차게 풀리기 시작했다.

 

비단처럼 촘촘하게 엮여져 있던 것들이 너무도 능숙하게. 일반적인 사람의 솜씨와는 수십 걸음 떨어져 있었기에 홍련은 긴장의 숨을 들이마셨다.

 

최대한 힘을 주어 붙잡은 와이어.

 

차륵. 차르륵.

 

하지만 이 기묘한 솜씨의 주인공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봐. 괜찮아?]

 

“너... 어떻게...”

 

[늦은 줄 알았는데 다행이네. 핀토, 그 애가 너무 이상한 데까지 갔어서 찾는데 시간이 좀 걸렸거든.]

 

핀토라는 말에 홍련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보다 빨리 강철의 장막이 찢어진 천처럼 좌우로 갈라졌다.

 

그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의 그림자.

 

[증거를 달라고 했지?]

 

“그럼 여기 봐봐.”

 

그 손에는 가느다란 실들이 홍련의 와이어와 얼켜 있었다.

 

“오르카 호에 장화는 한 명이 아니거든.”

 

 

 

*

 

 


다음화: https://arca.live/b/lastorigin/68832675?p=1



어느덧 이 소설 2주년도 눈앞까지 왔네... 옛날에는 막 추천 150개 넘게 받고 그랬는데. 댓글도 40개 넘게 받고 그랬는데


옛날에는 완결 축전 같은 거 해주는 사람들도 있어서 나도 받을 수 있을까 기대했는데 게임이 망하니까 그 사람들도 다 없어지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