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일단 얘기나 좀 나눠보자는 내 의견에 다들 의자와 소파에 쪼르르 모여앉았다. 


자... 내가 생존자 일행에 합류하자마자 살육전이 일어나는 통에 분위기가 씹창나버렸다. 다행히 아무도 안죽고 끝나긴 했지만... 방 구석에 치워둔 더치걸의 드릴을 보자 마음이 심란해진 나는 마른 세수를 했다. 오르카 교도소에서 탈옥할 때만 해도 참 고마운 물건이었었는데. 


계속 상념에 잠겨있으려니 다들 아무 말도 안하고 내 눈치만 보고있길래 결국 내가 먼저 입을 열어야만 했다.


"흠. 어디부터 시작해야 하나... 다들 내가 어디서 튀어나온건지 궁금할테지? 어떻게 살아있는 인간이 있는건지, 그리고 어쩌다가 이 근처에 흘러들어오게 된 건지."


다를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고, 나는 여태까지 겼어왔던 일들을 설명했다. 먼저 오르카 저항군과 첫번째 인간인 사령관 등 세계관 설명(?)부터 하고 두번째로 발견된 인간인 내가 거기서 어떤 꼴을 겼었는지, 왜 구속구를 찬 채로 여기서 떠돌아다니고 있는건지, 그리고 이 LRL이 누구인지(이 부분은 LRL한테 말해도 된다고 허락 받은 뒤에) 전부 얘기했다. 


"세상에... 정말 너무하네, 그 인간!"


평범하게 같이 뒷담화 까주는 엘븐. 얜 그나마 중립이다.


"힘드셨겠군요... 이제 걱정하지 마세요. 앞으로는 저희가 힘이 되어드리겠습니다. 인간님."


만난지 하루도 안됐고 뇌파인증도 안했는데도 벌써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기세의 이그니스.


"거봐, 인간이 다 그렇지 뭐. 어차피 너도 마찬가지일걸."


그리고 인간 깔 기회를 한시코 놓치지 않는 더치걸.


"...사람 면전에 대고 못하는 말이 없네..."


"더치걸 양, 말을 가려서 하세요. 제일 마음고생 심하셨을 분한테."


"이그니스 언니는 그동안 인간을 본 적이 없으니까 그러지. 저 인간이 사령관이었다면 달랐을 것 같아? 자기 권력을 위해 똑같이 다른 인간 죽이려고 들었을걸."


"억측입니다. 지금 당신이 하는 행동이야말로 그 사령관이란 인간이 하는 것과 똑같잖습니까."


"뭐...!? 난 언니들을 지키려고 한 것 뿐이야!"


"그 사령관도 그렇게 변명했을테죠, 자기 가족을 지키려고 그랬다고. 그렇다고 해서 그 모든 행위가 용서되는 건 아닙니다!"


"둘 다 그만해! 너무 흥분했어."


더치걸과 이그니스의 말다툼을 보다못한 엘븐이 말리기 시작했다. 멸망 전 생존개체인 더치걸은 인간을 극도로 경계하는 반면 멸망 후에 제조된 이그니스는 인간을 모셔야 한다는 각인이 남아있어서 생긴 의견충돌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사이좋게 잘 지냈을 애들이 나 때문에 서로 싸우고 있네 하하 이런 제길. 이대로 두면 진짜로 내부분열해서 누구는 날 따라오고 누구는 남던가, 아님 합심해서 갈등의 근원인 나를 쫓아내던가, 둘 중 하나겠지. LRL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 광경을 한심하단 듯 쳐다봤다.


"도움 안될 것 같은데, 굳이 저 년들이랑 함께 다녀야 해?"


"그런 소리 하는거 아냐..."


"참, 그렇지! 그러고보니 저기있는 LRL도 레모네이드 오메가 밑에 있었다는 거잖아? 더치 너랑 같네! 둘이 친구가 될 수 있... 을..."


엘븐이 화제를 돌리기 위해 LRL을 언급했지만 곧 더치걸이랑 LRL이 싸운 게 방금 전이었다는 걸 기억해내자 말꼬리를 흐렸다. 더치걸과 LRL의 눈이 마주치자 서로 몇 초 간 침묵하더니 이내 더치걸이 먼저 입을 열었다.


"레모네이드한테 강화수술을 받았었다고... LRL치곤 강한 것도 납득이 되네. 신체능력 강화에 전투모듈 탑재, 바뀐 건 그 2개 뿐이야?"


"신경 끄셔."


LRL이 시니컬하게 대화를 끊어버리자 다시 침묵에 휩싸였다. 조금 전의 엘븐의 말에서 이상한 점을 느꼈었던지라 이번엔 내가 말을 꺼내봤다.


"저기 엘븐, 너희 셋 다 오메가한테서 탈출한 거 아니었어?"


"응? 아냐아냐. 레모네이드 오메가 밑에 있었던 건 더치 뿐이야. 나는 레모네이드 제타 밑에서 일하다가 도망쳤고, 이그니스는 레모네이드 감마 밑에 있었대."


"전부 다 다른 세력에서 왔었어? 그런데도 이렇게 셋이 모이게 되다니, 운이 정말 좋았던 거네."


"음... 10년 넘게 세상을 떠돌아다녔는데 두세명밖에 못만났으면 운이 좋았다고 하기는 힘들지?"


"그런데 오메가의 영토는 북미대륙이잖아. 더치걸은 어떻게 바다를 건너온거야?"


"밀항."


더치걸은 내 질문에만큼은 단답형으로 대답했다.


"...그렇군."


***


밤이 됐다. 나와 LRL은 모닥불을 피운 뒤 바닥에 침낭을 깔고 잘 준비를 했다. 엘븐 일행이 머무르는 지하실이 아닌 조금 떨어진 옆집에.


이유인 즉슨 원래 엘븐 일행이 잘 때는 침대같은 것도 없어서 지하실 바닥에 이불깔고 다같이 모여서 자는데, 더치걸이 거기에 내가 끼여서 같이 자는 게 싫다고 고집을 피웠기 때문이다. 엘븐과 이그니스의 만류에도 뜻을 굽히지 않자 그냥 내가 한 발 물러섰다.


낮에 더치걸이 드릴로 내 배때지에 구멍 뚫으려고 한 이상 나도 더치랑 한 방에서 자다가 암살당하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하지만... 사실 제일 큰 문제는 엘븐이나 이그니스같은 애들이랑 누워서 부대끼다가 자칫 텐트 치기라도 하면 존나 쪽팔릴 것 같았다는 거다. 만약 그랬다간 더치걸이 날 경멸하는 눈빛으로 쳐다보겠지. 그리고 날 예비성범죄자 취급하며 더 싫어할테고, 내부분열이 고조되고... 그런건 싫다.


그래서 일단 오늘밤은 따로 자는걸로 했다. 침낭에 몸을 발부터 밀어넣던 중 모닥불 앞에 의자를 끌어다놓고 앉아있는 LRL이 말을 걸었다.


"인간."


"응?"


"꼭 저 년들이랑 같이 다녀야 해? 억지로 일행을 늘려봤자... 물자도 빨리 동날테고, 이동 속도도 느려질 거야. 의견충돌이 생길 수도 있고. 그냥 쟤들은 여기 버려두고, 전처럼 우리끼리 움직이자."


평소와 같은 차가운 눈빛, 그러나 목소리에는 왠지모르게 슬픔이 담겨져있었던 것 같다.


"그게 무슨... 왜 그러는 거야?"


"여태껏 우리끼리 잘 해봤잖아. 식량도 찾고, 잠잘 곳도 찾고, 위험도 다 피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 앞으로도 그럴거야, 나만 있으면 돼."


"아니... 그렇지 않아. 지금까진 운이 좋았지, 철충도 한번에 한 두 마리씩밖에 못봤고, 우리가 먼저 발견해서 피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그럴거란 보장은 없어. 철충이 우릴 먼저 발견해서 기습한다면, 철충이 떼거지로 몰려온다면, 혹은 철충이 아닌 오르카나 펙스가 공격해온다면..."


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우리는 약해. 살아남기 위해선 사람을 모아서 힘을 키워야 해."


"...그래..."


LRL은 도로 모닥불로 시선을 돌렸다.


"...잠이 안와서 그래?"


"먼저 자. 난 좀 있다가 잘거야."


"그래... 난 이만 잘게. 피곤해서..."


침낭에 몸을 끝까지 밀어넣고 눕자 천장 대신 별이 가득한 밤하늘이 보였다. 눈에 비친 하늘이 노숙이나 다름없는 현재 상황을 괜히 일깨워주길래 그냥 눈을 감아버렸다.


"이건 먼저 말하고 잘게. 잘 자, 좌우좌."


"...잘 자, 인간."


***

(더치걸 시점)


이그니스 언니도 엘븐 언니도 잠들자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벼운 체중 덕분에 나무 계단을 소리없이 밟고 올라갈 수 있었다. 문을 열고 지상으로 올라오자 서늘한 바람이 뺨을 스쳤다. 나는 그 인간이 묵고있는 옆집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불을 피우고 있는건지 불빛이 슬쩍 보였다


엘븐 언니와 이그니스 언니는 인간의 악의를 모른다. 나는 봤다. 은퇴 후 보내진 테마파크에서, 자매들의 피와 내장이 흩뿌려진 그 참상을. 인간들이 내 사지를 붙들고선 수술용 톱으로 자르려던 그 순간, 바깥에서 총소리와 비명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이윽고 철충이라 불리는 괴물들이 쳐들어왔다. 톱을 들고있던 인간은 눈 깜짝할 새 구멍이 숭숭 나서 죽었고, 날 붙잡고있던 인간은 나를 철충한테 밀어던지고 도망쳤지만 철충은 날 무시하고선 도망치던 인간한테 미사일을 쏴서 허리를 두동강냈다. 철충이 내겐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에 그 지옥에서 도망칠 수 있었다. 그 뒤 인간이 전부 죽은 것 같자 안심하고 돌아다니다 레모네이드의 수색대한테 붙들려 공장으로 끌려갔지만.


중요한 건, 인간이, 그 잔인한 족속이 돌아왔다는 거다. 이그니스 언니와 엘븐 언니도 아무것도 모른 채 똑같은 꼴을 당할지도 모른다. 그 인간이 명령권을 되찾으면 본색을 드러낼거다. 내가 언니들을 지켜야만 한다. 


그 인간을 죽인다. 명령을 쓸 수 없는 지금이 기회다. 이 선택으로 언니들이 나를 비난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지금쯤이면 그 인간도 자고있을거다. 목을 졸라서 죽일까? 나는 손을 몇 번 쥐었다 폈다. 아니, 그 인간 목에 채워져있는 구속구때문에 목을 잡을 수가 없다. 머리를 공격해서 즉사시킬까, 인간의 뼈와 살은 약하니까 내 주먹으로도 충분할 테지만 확실하게 하기 위해 무기를 들고가자.


지하실의 공간은 한정돼있는 만큼 필요도가 낮은 물건들은 지상에 둔다. 지금 내가 집어든 곡괭이가 바로 그런 물건 중 하나였다. 나는 곡괭이를 꽉 쥔 채로 인간이 있는 집을 향해 걸어갔다. 나약한 인간 정도라면 손쉽게 죽일 수 있다. 문제는 그 LRL이지.


레모네이드 오메가 밑에 있는동안 LRL 모델을 여럿 봐왔다. 노역에 막 끌려왔을 때는 흔한 어린이처럼 투정부리고 징징대다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자신들과 같은 눈을 한 채로 아무 말 없이 일만 하게 된다. 


군수공장에서 일하는 바이오로이드는 한 둘이 아니었지만, 그 중에서 LRL 모델은 눈에 띄는 특징을 갖고있었다. 바로 그녀들은 전부 허약하다는 점이었다. 중노동을 위해 개발된 더치걸은 인간보다 훨씬 강력한 근력을 갖고있으나 LRL의 제조목적은 그저 등대에서 불을 비추는 것 뿐이라 신체능력 자체는 인간 어린이와 크게 다를 바 없다. 남들보다 유독 약했던 LRL 모델들은 고된 노동을 견디지 못하고 일찍이 명을 달리했다. 


인류멸망 직후엔 곳곳에서 회수한 LRL들을 공장에서 흔히 볼 수 있었으나 몇 년이 지나자 그 아이들만은 모두 사라져버렸다. 레모네이드 측에서도 노동력으로서 가치가 낮은 LRL은 추가생산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던 모양인지 LRL이 모두 죽은 뒤론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저 LRL은 대체 뭔가. 멸망 전에 제조되었건 개체가, 그 나약한 LRL이, 펙스의 혹독한 환경 속에서 수십년을 견뎌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그런 인생을 겪어왔다면 독기가 쌓일대로 쌓이고, 남보다 자신을 더 챙길만한 성격이 됐을 법도 한데, 어째서 스스로 그 인간을 따르는 것인가.


이해할 수가 없다. 머릿속에서 생각이 복잡해지자 걸음걸이가 점점 느려졌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이쪽으로 오는 게 보였다.


그 LRL이었다. 


손에 소방도끼를 쥔 채로 걸어오다가 나랑 눈을 마주치자 멈춰섰다. 나 역시 발을 멈춰서 거리를 둔 채로 그녀를 마주보았다.


"..."


"..."


"...한밤중에 무슨 일이지? 무기까지 들고서 말이야."


"산책. 넌?"


"...산책."


말은 그렇게 했지만 우리 둘 다 그자리에서 발을 떼지 않고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내가 올 것을 예상하고 경계를 서고 있었던 건가.


나는 낮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아무리 방심했다 한들, 이 LRL은 자신을 몰아붙였었다. 그 때 느꼈던 충격은 어린이가 무기를 휘두른다고 낼 수 있는 정도의 힘이 아니었다. 레모네이드 손에 개조되었던 거라면 LRL 모델치곤 비정상적으로 강한 것도 납득이 됐다. 신체강화와 전투모듈 외에도 뭔가 숨겨둔 능력이나 기능이 있음을 짐작했지만 LRL은 대답을 회피했었다. 억지로 캐물어봤자 선뜻 대답해줄 것 같지는 않았기에 그냥 넘겼었지만 다시 싸우게 됐으니 뭐를 숨기고있을지 주의를 기울여야 겠지.


허나 기왕 이렇게 마주친 거, 나는 마음 속에 품었던 의문을 입 밖으로 꺼냈다.


"너. 왜 저 인간을 따르는 거야?"


그 사람은 네가 생각하는 나쁜 인간이 아니야, 그런 하찮은 대답이 나오면 바로 달려들려고 했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대답이 돌아오자 내 사고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무능하니까."


"...뭐?"


"무능하고, 약하고,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니까. 나를 필요로 하니까."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뭔가 이상하다. 이 LRL은 이상하다. 이 LRL은... 어긋났다.


"그런 이유로... 아니, 그게 이유가 돼? 그럼 우리가 너를 필요로 한다면?"


"알 바야?"


"뭐가 다른건데...?"


"니들은 내가 없어도 되지만, 그 인간은 내가 없으면 안되거든. 나를 필요로 할 수 밖에 없지."


LRL이 도끼를 휘두르기 쉽게 고쳐잡았다. 


"그런데 네가, 너희들이 있으면, 인간이 의지할 데가 늘어나버려. 그럼 나를 필요로 하지 않게 돼."


저쪽이 공격태세를 갖추는 동안 나는 움직이지도 못하고 LRL의 두 눈을 쳐다보기만 했다. 잠깐, 두 눈? 안대를 쓰고있지 않아?


평소 안대로 가려져있던 그녀의 왼쪽 동공에서 미약한 불빛이 보였다. 그녀는 언제든지 빛을 쏴 나를 실명시키고 공격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아, 그렇구나. 방어가 아니라 공격이 목적이었구나. 나와 언니들을 죽이려고, 그 인간을 독점하려고.


지금처럼 서로 거리를 둔 이 상황에선 내가 LRL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내가 움직이려 들면 바로 눈에서 빛을 뿜어 무력화시킬 테지. 막무가내로 눈 감고 곡괭이를 휘두른다 해도 맞출 수 있는 가능성은 낮다.


지하실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쉬운 일이라도 생각했었는데 오판이었다. 어떻게 해야 저 미친 바이오로이드에게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머릿속으로 방법을 모색하던 중 제 3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네들, 오밤중에 모여서 무슨 작당모의를 하고있는겐가?"


목소리의 주인은 그 안전모를 쓴 드론이었다. 저 드론도 분명 인간, LRL과 한 패거리였지. LRL은 자신의 등 뒤에서 날아온 드론한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대답했다.


"...무슨 일이야. 아저씨. 아저씨야말로 왜 안자고 있는건데."


"난 불침번일세, 잊었는가? 잠깐 바람 좀 쐬고 오겠다고 해놓고선 돌아오질 않으니 걱정되서 와봤지! 자, 감기 걸리기 전에 이만 돌아가세."


"곧 갈테니까 먼저 들어가. 난 좀 생각할 게 있어서 그래."


"...괜한 '생각'하지 말게. LRL."


계속 태연하게 쾌활한 척 하던 드론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LRL은 잠깐동안 침묵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저씬 아무것도 몰라."


"그럴지도. 하지만 자네가 그릇된 길로 들어서려는 것 정도는 볼 수 있다네."


"..."


LRL은 드론과 얘기하고 있으면서도 시선은 나에게 고정시킨 상태였었다.


"LRL."


"..."


"LRL!"


이젠 드론이 아무리 불러도 무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좌우좌."


LRL이 본명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불린 순간 움찔하더니, 그제서야 드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돌아가세."


LRL은 침묵했다. 속으로 갈등하는가 싶더니 나를 한번 쳐다보고선 그대로 뒤돌아서 그들이 머무르는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저 LRL을 이해할 수 없다. 사실 이해하고 싶지도, 깊게 엮이고 싶지도 않다. 흔한 인간과 바이오로이드간의 주종관계도 아니고, 사랑이나 이타심 따위로 엮인 것도 아니다. 그럼 대체...


...그 인간을 죽이는 건 포기하자. 역시 그건 못할 짓인가보다.


***

(LRL 시점)


돌아와보니 인간은 이미 푹 잠들어있었다. 나는 도로 모닥불 앞에 둔 의자에 가서 앉았다. 


"...하나라도 줄일 수 있었는데..."


작게 중얼거리며 불을 잠시 바라보다가 인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옛날에 아무것도 모른 채로 등대에서 일할 땐, 내가 배를 인도하는 중요한 역할이니 뭐니 하길래 특별한 사람인 줄, 누군가에게 필요로 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 언제였던가 내가 흔한 등대지기 중 한 명에 불과하단 사실을 알게됐지만 거기까진 견딜만 했었다. 그러나 멸망전쟁이 터지자 바다 위에 배가 다니지 않게 되면서 등대지기로서 설 자리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후 레모네이드 오메가 밑에서 일하게 됐을 땐 그저 공장을 돌아가게 만드는 톱니바퀴 중 하나에 불과했다. 나랑 똑같이 생긴 동형기들이 끊임없이 투입되고, 픽픽 쓰러질때마다 다른 바이오로이드가 자리를 교체하고.


나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누군가 나를 꼭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니다. 죽으면 얼마든지 대체 가능한 존재다.


그런 의미없는 삶을 연명하던 중 어느날 레모네이드 오메가가 나를 불러들이더니 무슨 사상검증같은 걸 하고선 첩자로 만들어버렸다. 펙스에 남은 유일한 LRL 모델인 나만이 간택되었다. 살짝 들뜬 마음에 나밖에 할 수 없는 일이냐고 묻자 레모네이드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이내 내 뺨을 쳤다.


'너까짓 게 뭐라도 됐다고 착각하지마. 실패하면 얼마든지 새 첩자를 뽑아 보낼 수 있으니까. 주제를 알고 움직이는 게 좋을거야.'


레모네이드 오메가한테 있어 내 가치는 그 정도밖에 안됐다. 그녀는 애초에 큰 기대도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하면 그 여자를 되돌아보게 만들 수 있을까 싶었지만 그녀가 예상한대로 어이없게 붙잡혀버렸다.


오르카호의 구금실에 수감되었을 때는 사령관 그 남자가 다정한 표정과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를 회유하려고 했었다.


'힘들었지? 이제 괜찮아. 더이상 아무일도 하지 않아도 돼.'


그는 그렇게 말하며 한 사진을 보여줬다. 나와 똑같은 LRL 동형기를 포함해 어린이 바이오로이드가 모여 웃으며 놀고있는 사진이었다. 그는 나에게 전부 내려놓고 또래 아이들처럼 자유롭게 뛰어놀아도 된다고 했다.


그렇기에 거절했다.


너에게 있어서 내 가치는 무엇이지? 정말로 나를 필요로 하나? 


좋은 대우? 그래. 밥도 잘 주고, 힘든 일도 시키지 않겠지. 그렇다고 내가 그 사람에게 특별하고 중요한 존재가 된다는 뜻은 아니다. 


죽으면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는 존재. 결국 나를 어항 속의 관상용 금붕어 정도로밖에 보는 것이 아닌가.


설득도 회유도 막히자 그는 나를 감옥에 쳐넣었다. 차라리 이게 낫다. 누구도 보지 않고 살 수 있다면. 같이 첩자 역할을 맡았던 드론은 틈만나면 와서 말걸었지만 이 드론도 마찬가지. 그는 내가 없어도 혼자서 살 길 찾을 수 있다. 나를 필요로 하지 않다.


그 때 이 인간이 나타난 거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나약한 인간.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하는 인간. 


그리고 그 인간이 의지할 데는 나밖에 없다. 그에게 있어 나는 대체할 수 없는, 반드시 필요로 하는 존재다. 이 사람 덕분에 비로소 내 존재가치를 증명할 수 있게 되었었다.


...지금까지는 그랬지.


지금은 다른 바이오로이드가 셋 늘어난 정도지만, 만약 나중에 더 늘어나면? 정말로 사람을 잔뜩 모아 세력을 구축하는 데 성공한다면, 그렇게 되면-


"그 때도... 내가 필요해?"


인간은 자고있어서 대답하지 못했다. 애초에 일부러 자고있을 때 물어본 거니까, 내가 원하는 답이 나오질 않을까봐 두려워서. 정신차려보니 나는 어느새 인간이 누워있는 침낭 옆에 쭈그려앉아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도로 모닥불 옆의 의자로 돌아가 앉았다.


그리고선 그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지자 그대로 잠에 빠졌다.


(저녀석도 정상이 아니야...)


주인공 이름을 안정해서 주인공 부르는 장면은 인간아 하고 부르는걸로 얼버무리고 있는데 계속 이러려니 좀... 라붕이라고 부르기는 분위기 깨고. 조만간 인간 대신 부를 호칭으로 바꿔야지. 다음화는 안되고, 좀 더 나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