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편 https://arca.live/b/lastorigin/67031280



3.



소완은 말을 꺼내기를 잠깐 망설이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소첩은 기계가 아닌 주인께서 소첩이 만든 요리를 맛보시며 기뻐하실 때 삶의 보람을 느끼옵니다. 그렇기에 소첩은 언제나 '주인의 입맛에 어떤 음식이 맞을까, 어떤 것을 특히 드시고 싶어하실까'를 생각하며 시간을 보내곤 하옵니다."



"슬슬 부끄러운데. 이제 그만하면 안될까?"



"소첩의 요리를 맛보시기 위해 입을 벌리실 때, 희고 거대한 치아로 고기를 씹어 와인색이 섞인 육즙이 터져나올 때, 탄력있는 혀로 먹히기를 기다리는 음식을 애태우듯 핥고 섞어 마침내 궁극의 맛이 입안에서 탄생할 때.. 소첩은 그런 광경을 볼 때마다 소첩이 격하고도 상냥하게 다뤄지는 것 같아 몸이 달아오르고 아랫배가 따뜻해지는 것 같사옵니다."



"아니야. 그만두지 말아봐. 거의 다 준비됐어."



"또한 주군께서 음식을 씹어삼키시며 움직이는 목젖을 보면 소첩은 하아... 무심코 주인의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음식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넘쳐흐를 때가 많사옵니다."



"역시 멈춰. 장르가 바뀌었어."


소완의 갑작스러운 성벽 고백과 기가 막힌 드리프트 실력에 사령관은 가까스로 정신을 다잡으며 그녀의 말을 막았다.



"아무튼.. 요약하자면 나에게만 식사를 대접하고 싶기 때문에 하고 싶지 않다는 거지?"



"..불경하오나."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왠일로 쉽게 포기하는가 싶어 '대타출동'에 달아놓은 도청기로 얘기를 엿듣고 있던 닥터는 조금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래도 좀 아쉽네.. 이게 있으면 소완에게 조금은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무슨.."



"..이럴 거 같았어. 드디어 본색이 나오네."


오르카호에 약과 관련된 인물은 크게 2명인데, 각자의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는 약쟁이 소완이고, 둘째는 약팔이 사령관이다. 외부에서 약을 들여오는 소완은 한계가 있지만, 사령관은 입에서 약이 나왔다. 처음부터 이길 가능성도 보이지 않는 절대적인 상하관계. 무일푼으로 안드바리에게 자원 털던 실력을 유감없이 뽐내며 사령관은 소완을 향해 반수치사량을 달하는 약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괜찮아. 다 알고 있으니까."



" ? "



"숨길 거 없어. 요즘 포티아 때문에 많이 힘들지?"



" ! "



"요즘 보니까 소완. 예전에 비해 눈화장이 짙어진 거 같은데. 혹시 수면부족으로 다크서클이라도 생긴 거 아니야?"



"..이건 최근에 자매분께 새로운 화장품을 소개받아 사용해 본 것 뿐이옵니다."


저 신들린 기억력과 관찰력. 어떻게 보면 업무처리 능력보다 더 뛰어난,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사령관의 고유영역이다. 평소의 얼굴을 사소한 것 하나하나까지 기억해둔 뒤, 미세한 표정 변화는 물론 화장의 밀도까지도 알아맞혀 상대로 하여금 사령관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한다.



"거기다.. 피부에서 은은한 라벤더 향기가 나네? 분명 오르카샵에 새로 들어온 불면증 향초였지, 아마?"



"그, 그건 여가시간에 산책 겸 나왔을 때 흥미가 생겨 사본.."



"아냐, 말하지 않아도 돼. 날 믿어. 나는 알 수 있어."


상대의 마음이 흔들려 말까지 더듬었을 때, 오르카호 제일의 약팔이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능숙하게 파고들어 반론을 막는다. 그리고



"그리고, 소완.. 부끄러워할까봐 말하지 않으려 했는데 그.. 관계가 있던 날에 잠꼬대를.. 조금 하더라고. 계속 '포티아.. 약불 10분과 강불 1분은 다르다고 몇 번을..'이라고 중얼거렸었어."



"..."


소완은 기억을 거꾸로 떠올리며 그런 잠버릇이 있었는지를 떠올리기 위해 머리를 굴려봤지만 조금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럴만도 했다. 스스로의 잠버릇을 알아차리기도 힘들 뿐더러, 애초에 그런 적도 없었으니. 소완은 최근 일이 바빠 마지막으로 비밀의 방에 초대받은 이후로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포티아의 교육을 시작한 것은 그 다음의 일. 처음부터 성립될 수 없는 개소리였다. 


하지만 소완은 자신의 기억력을 의심했다. 이것이 약팔이의 가장 무서운 점이다. 실제 있는 증거를 토대로 상대의 정신을 흔들어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하도록 만든 뒤 말도 안되는 증언까지 덮어씌워 자신이 아닌 사령관의 기억력에 의지하게 된다. 사령관의 가스라이팅 실력을 당해낼 자는 적어도 오르카호에는 없었고, 소완 또한 그러했다.



"..그래서 말인데, 소완? 이게 도움이 좀 될 것 같아서 너만을 위해 준비한 거야."



"소첩만을.. 위해?"



"이게 있으면 네가 직접 포티아의 보조를 맡아야 할 필요성도 적어질 테고, 그 시간에 다른 걸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를테면.. 이렇게 같이 '둘이서만' 차를 마시면서 '특별한' 대화를 나눈다던지.."



"둘이서만.. 특별히..?"


닥터는 기가 찼다. 자신과 오빠의 순수한 흥미 충족을 위해 만든 장치가 주방장을 향한 사령관의 따뜻한 애정으로 멋지게 탈바꿈했다. 닥터는 말로만 듣던 사령관의 소문을 직접 목도하며, 예전에 브라우니 2056 언니에게 전해 들은 '사령관과 40만의 자원창고' 얘기가 실제였음을 제대로 통감했다.



"하지만 소완은 쓰고 싶지 않다고 했고.. 그럼 어쩔 수 없네.."



"아, 아니옵니다! 주인께서 저를 위해 만들어주신 선물이온데.."



"에이, 아니야. 강요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 억지로 거짓말까지 할 필요도 없고."



"거짓말이 아니옵니다! 소첩은.."



"..소첩은?"



"저 기계가 꼭 갖고 싶사옵니다! 부디 허락을!.."



"소완도 참.. 무슨 허락까지 구하고 그래. 처음부터 너만을 위해 만들었다니까? 그냥 손만 뻗어서 가져가면 돼. 자.."



'아, 지금 오빠 엄청 기분 나쁘게 웃고 있겠네."


닥터는 철저한 이과이며, 성경은 실존인물을 토대로 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판타지소설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 사령관의 현란한 혀 드리블을 보며 닥터는 스스로가 세운 한 가지 가설을 굳게 믿게 되었다. '이브에게 선악과를 따먹게 한 뱀도 실존인물을 모티브로 했다면, 저 인간 DNA 속에 그 뱀의 유전자가 분명히 끼어있을 거다.'라고.


그 다음부터는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었다. 소완은 개인의 선택으로 굳게 믿고 있는 '대타출동'의 사용을 허가받아 무척이나 감사한 듯했다. 그러고는 주방으로 가 낼 수 있는 가장 빠르면서도 훌륭한 맛을 부여한 요리를 만들어 사령관실로 대령했다.



"맛은 어디.. 역시 소완이야. 내 '유일한' 주방장다워."



" ! "



"소첩은.. 소첩은 이제.. 여한이 없사옵니다.."



"아주 지랄을.."


소완이 식사를 가져오고 사령관은 그것을 먹으며 순수한 마음으로 그녀를 칭찬한다. 오르카호에서 일어나는 매우 일상적인 일 중 하나였다. 그럼에도 소완은 주저앉아 입을 틀어막고 눈물을 삼켰다. 사령관은 그런 소완을 보고는 가증스러운 웃음을 지은 채로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너밖에 없어. 앞으로도 잘 부탁해. 소완."


닥터는 이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며 바이오로이드의 신체에도 암이 발생할 수 있는지를 생각했다. 정말 그럴 거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와중 불현듯 어떤 의문이 그녀의 머릿속에 자리잡았다.



'잠깐만.. 소완 언니가 포티아 언니 교육 때문에 힘들어하는 걸로 저렇게 된 거잖아. 그럼 포티아 언니의 교육을 소완 언니에게 맡긴 건 누구지? 눈에 바르는 새로운 화장품을 소완 언니에게 전해주도록 한 건? 라벤더향 불면증 향초의 발주를 넣은 건? 


설마 이걸 목적으로 나한테 접근한건가? 그럼 창고를 털어가면서까지 자원을 털어서 날 만든 것도?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된 거지? 설마.. 요리대회 이전에 자신을 가지고 논 소완 언니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이런 빌드업을 짰다고? 저 약팔이 오빠가?'


의심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어느샌가 닥터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닥터의 지능이 보통 수준이었다면 이런 일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닥터는 오르카호 최고 지능의 소유자, 거기다 그녀는 사령관이 소완에게 팔아재낀 약에 처음부터 끝까지 빠짐없이 노출되었다. 그의 말이 들리는 범위 내에서 약을 사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사령관 뿐이다. 닥터의 의심 중 어떤 부분까지는 맞고 어떤 부분까지가 틀린 것일까. 해답은 사령관만이 알고 있을 거라는 사실에 닥터는 다시 한 번 소름이 돋았다.



"그럼 어디.. 인형에게도 소완의 요리를 맛볼 수 있게 해줘야겠네."


사령관은 그릇의 바닥에 조금 남은 소스를 스푼으로 조금 떠서 인형의 혀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대타출동'은 아직 2번밖에 쓰지 않았지만 그와 소완에게 매우 이례적인 분석 결과를 보여주었다.


[도출 결과: 만한전석의 편린]



'..난 이런 걸 매일 먹었던 건가.'


[간: 불경]



"큰일났다."



"무슨 뜻인데!?"


이해조차 할 수 없는 평가에 놀라 사령관이 무심코 소리를 질렀을 때, 닥터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그건 '감히 맛을 평가하는 것 자체가 불경할 정도로 뛰어난 맛을 지님'을 요약한 거야."



"적당히 줄였어야지! 요약한다는 표현이 맞긴 해?!"



"어, 음.. 오빠. 근데 이제 그만 보는 게 좋을 거 같아. 그거 버튼 한 번 더 누르면 꺼지거든? 그러니까 슬슬.."



"무슨 소리야. 이제 하이라이튼데."



"아, 아무튼, 보면 안된다니까!? 빨리 꺼야 한다고!"


사령관은 실제로 닥터가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손사래를 치며 전화를 끊고, 종합 평가에 어떤 결과가 나올지를 기계가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종합 평가: 미미]


미미. 그게 끝이었다. 맛을 표현하고 평가하는 모든 행위가 사족이 될 정도로 완벽한 맛을 지녔다는 뜻이었을까. 사령관과 소완은 그 의미를 어렴풋이 이해하고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사령관은 다시 닥터에게 전화를 연결했다.



"뭐야, 닥터. 설마 평가란 좀 적게 채워진다고 실망할 것 같았어? 넌 걱정이 너무 많아서 탈이야."



"이제 진짜 꺼! 점수 나오려면 시간 좀 걸리니까 아직 세이프야!"



"오~ 점수까지? 언제 이런 기능까지 넣은 거야? 이건 꼭 봐야지. 너도 재미있자고 넣은 걸텐데."



"아니, 재미있자고 넣은 건 맞는데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거든?! 하다못해 혼자서..!"



"이렇게까지 숨기시는 걸 보니 소첩도 흥미가 돋기 시작했사옵니다."



"아, 제발!"


(띠링!)



[점수 : -9999점]



"이런 ㅆ"



"어?"



"하?"


차가운 시간이 멈춘 듯 흘러갔다. 닥터는 안경을 벗고 반대쪽 손으로 눈을 가리고 천장을 쳐다보고, 사령관과 소완은 얼빠진 표정으로 '대타출동'에 시선이 고정된 채로 있었다. 이내 사령관은 닥터의 조언을 뒤늦게 실천하여 버튼을 눌러 상자를 닫았지만, 이미 모든 일이 끝나있었다. 소완은 박스가 닫힌 후에도 멍하니 기계를 바라보았다.



"어... 소완. 그러니까.. 뭔가 오류가 있던 게 아닐까? 그래! 오버플로우라도 터진 걸 거야!"



"..."



"..소완? 내 말 들려? 소완?"




"흐윽.. 흑..."



'ㅈ됐다.'


소완은 자신의 주인 앞에서 어린 아이처럼 소리내어 울었다. 마녀가 울면 마법을 못 쓴다지만 소완은 마법이 아닌 화학 전공이었기에 독기가 심해질지언정 약해질 것 같지는 않았다. 자신의 주인 앞에서 당한 창피로 생긴 부끄러움 때문일지, 기계를 향한 한계를 뛰어넘는 노여움 때문일지, 사령관조차도 알지 못했다. 그저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닭똥같은 눈물을 흘리며 엉엉 우는 소완을 끌어안아 얼굴을 묻도록 해주는 것 뿐이었다.


소완은 그 뒤로 비슷한 색의 상자만 보면 경기를 일으키며 자리를 피했고, 예전처럼 돌아오기까지 사령관의 부단한 노력과 시간 투자가 필요했다는 것 정도만이 전해진다. 그 후로..



"그래서 그 점수는 뭐였던 거야?"



"그거? 맛 평가 점수가 아니고 식욕을 높여서 얼마나 많은 음식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은지를 수치화한 거야."



"? 뭔소리야?"



"오빠도 살면서 그런 적 있지? 분명 배가 불렀다가도 맛있는 향이 풍기면 더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경험."



"있기야 하지. 근데 그게 무슨.. 아."



"예를 들어서 70의 포만감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맛있어 보이는 음식을 보면 일시적으로 포만감이 40이 된 것처럼 느껴져서 더 먹을 수 있는 느낌이 드는 거지."



"아 그래서 -9999.. "



아니, 근데 그냥 맛 평가만 해서 양수로 뜨게 해주면 좀 덧나? 그것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왜냐니?.."







"그게 더 재밌잖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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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카호에 광기와 관련된 인물은 크게 2명인데, 각자의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는 설계광 사령관이고, 둘째는 재미코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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