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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마지막, 실패. 실패, 마지막.


* * *








2019년. 겨울.


"야."


"…"


"왜 또 이번에는 혼자 왔어."


"…"


"야, 야. 이봐."







* * * 







217x년. 오르카.







* * *






제대로 지나가긴 지나간 건지 의문인 150년이 또 지나고 나서 내가 오르카에 오르게 된 것은, 그저 살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멸망 전은 기억에 없다. 말하고자 하는 것은 멸망 후다. 


처음에는 실낱 만큼의 인지력이 남아있어서 어떻게든 승선을 피하고자하는 시도를 몇 번 했던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해보니 오히려 그런 움직임이 오르카의 승선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낸 것 같았다.


 그 누구도 찾을 것 같지 않은 벽오지에 처박혀있으면 꼭 바이오로이드와 엮였고, 도시도 마찬가지였다. 소통 능력이 제로에 수렴하고 있었으니 상대가 정보로서 인식할 수 있는 단어나 문장 하나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최소한 소통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성립되지 못하는 그런 상태가 원인이었던 것이겠지. 보는 이로 하여금 '그냥 둘 수 없다.' 같은 동정심을 가지게 했던 것일까. 그렇게 저항군에 의탁됐던 것 같다. 그것도 여러 번이나. 저항군에게 구출되면 철충에게 당하고, 다시 구출되고 당하고를 몇 번이나 반복. 터져나가는 임시 막사의 이미지가 몇 장 머릿속에 담겨 있으니 그저 그런 흐름이 아니었을까 생각할 따름이다. 


이건 아무래도 좋을 막 떠오른 것인데, 내 입에 물을 넣어주던 어떤 년에게 "내가 너희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라고 묻는 이미지였다. 목구멍을 타고 흐르던 물은 잠깐 멈췄다가, 계속 흘렀다. 멍청한 년들.


동정심을 심을 의도는 없었다. 그전에 어떤 의도라고 할 만한 것을 가질 기력도, 의욕도 없었고, 따라서 행동이라고 부를 만한 무언가를 한 적도 한번도 없었다. 나조차도 내가 살아있다는 게 안 믿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왜 나는 살아있는 거지? 잔해가 된 막사에서 어떻게 몇 번이나 끌어올려졌던 거지? 멸망 전엔 어떻게 살아남았지? 오르카에 올라버린 시점에서, 몸뚱이가 옮겨져버린 시점에서는 의미없는 의문이 되어버렸다. 넋나간 소리를 하자면 어떤 의지같은 게 개입했다는 느낌마저 든다. '넌 죽어선 안 돼.' '여기는 아니야.' 등등, 그런 악의 가득한 소리를 할 줄 아는 무정형의 의지. 


꼭 넋나간 소리라고 할 수만도 없다. 그런 세계의 의지 같은 것이 정말 있을지도 모른다고, 정말 운명이란 게 있을지도 모른다고 지금의 나는 생각한다. 그야 폐하는 6번을 죽었다. 그야말로 세계가 폐하를 죽이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다. 왜? 라고 묻지는 않는다. 물어봐야 대답은 안 돌아온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다섯 번째와는 달리 진정 구출이란 형태로 오르카에 오른 나는, 그래왔던 것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가볍게 몸을 움직일 최소한의 의욕도 없어서 자살하지 못한 내가 무얼 한단 말인가. 누워있는 내내 이따금 후각이 반응하면 흐릿한 약 냄새와 알코올 냄새 같은 게 느껴졌을 뿐이다. 


그럼에도 내가 이번 오르카의 양상과 흐름을 알 수 있었던 것은, 두 번째 오르카에서 보았던 다프네의 상냥함 덕이었다. 그때는 내 입장이 입장이라 다소 냉정한 상냥함이었지만, 이번 오르카에서 나는 단지 돌봄이 필요한 불쌍한 것, 비하를 첨가해 말하면 짐짝이었기에 오직 상냥한 것 밖에 없었다. 얘가 이렇게나 상냥한 녀석이었나 하는 생각이 눈을 움직이지도 못할 한심한 상태에서도 들 정도였다. 


'얼마 전에 주인님은 복원된 또다른 당신과 테마 파크에 다녀오셨어요.'


'이거 보세요. 크리스마스에 펼쳐진 드론 쇼에요. 당신도 함께 했다면 좋았을 텐데.'


'발렌타인 데이에 만든 초콜릿이에요. 하나 드셔보실래요?'


'요정 마을이란 곳을 발견했어요. 당신이 지내기 좋을 것 같은 곳이라고 주인님이 말씀하셨는데, 어때요? 가보실래요?'


'최근에 별의 아이라는 미지의 존재와 조우했어요. 네스트라는 최고 위험도의 연결체와 전투 중이라 다행이었다는 것 같아요.'


'주인님이 결혼하셨어요. 정말 잘됐어요. 그렇게 기뻐하시는 주인님은 본 적이 없어요. 어머? 왜그러세요?'


'좀 춥죠? 지금 알래스카에 와 있거든요. 난방은 최대로 해놨는데, 그래도 추우시면 담요 더 가져다 드릴게요.'


'낙원이라는 슬픈 장소가 있었다는 것 같아요. 슬픈 낙원이라. 슬퍼서는 낙원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죠. 그래도 어쩐지 좋은 울림이에요. 어딘가에 하나쯤은 있을 법한 부조화라고 할까요. 어쩌면 낙원도 슬퍼할 줄 아는지도요. 그렇게 생각하니까 꽤 멋지네요.'


'창고에 숨어든 밀항자를 발견했대요. 세상에. 꾀죄죄한 여우였다나요. 물자 담당 꼬마 아이를 울린 주범이라고 발할라 여러분들이 잔뜩 화가 났다는 것 같아요.'


'곧 스카이나이츠 여러분이 무대에 오를 거라는 소문이 있어요. 최근 정비담당 여러분이 뭔가 알록달록한 것들을 다루셨던 걸 봐선 진짜인 것 같아요. 기대되네요. 어떤 공연일지.'


'벌써 여름이네요. 덥지 않으세요? 자원 절약 차원에서 냉방을 줄였는데. 너무 더우다 하시면 조금 틀어드릴게요. 그건 그렇고 다들 재밌게 즐기시네요. 당신도 빨리 일어나서 같이 즐겼으면 좋겠는데. 


…그래요. 아직은 말해줄 생각이 없으시군요. 괜찮아요. 기다릴게요. 언젠가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실 때까지 옆에서 지켜드릴게요.'


개소리.


'막 가고시마에서 출항하려던 참이었는데 몽구스 팀이 불의의 습격을 당하셨다는 것 같아요. 다치지 않으셨다면 다행일 텐데요.'


'……하우스키퍼님이, 콘스탄챠 언니가…'


눈을 뜬다.

몸을 일으킨다.


일주일 뒤.


때가 왔다.






* * *






환자복 차림으로 의료실을 나가자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집중하지 않으면 찾기도 어려울 것 같은 작은 초롱이었다. 그것이 발하는 녹색과 노란색의 중간 쯤에 위치한 색은 불길하게 명멸하며, 작동된 격벽 뒤로 사라졌다.


굽낮은 면슬리퍼의 밑창이 잠길 정도로만 복도에는 바닷물이 차올라 있었다. 늦었다면 늦은 것이었고, 아직 괜찮다면 괜찮은 상태였다. 지금부터 하려는 행위만이라면 어떻게든 가능할 것 같다. 아직 시간은 있다.


오르카의 동체가 불안하게 좌우로 흔들리고, 올라간지 얼마 안 된 격벽은 끼익끼익대며 불길한 소리를 냈다. 좀비처럼 다리를 질질 끌며 복도를 돌아 다른 복도로 나오자마자, 발목높이까지 물이 찬 바닥에 엎드려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에게 가까이 다가간다. 지나치며 어깨를 부딪힌 누군가가 어서 피하라고 한다. 피할 곳은 없다. 물이 새는 소리는 졸졸에서 격류의 그것으로 변했다. 바닷물은 종아리까지 단숨에 차오른다. 천장에 등을 향하고 누워있는 그것이 물살에 차분히 흔들린다.


너무 작지도 크지도 않은 신장, 가녀린 체구, 허리까지 덮는 금발, 탑재된 기능을 보조했을 법전 디자인의 장치, 붉은 수단, 수단에서 색이 빠져나온 듯 살랑대는 핏물, 귀여운 로퍼.


너도 실패했니, 라고 속으로 물어본다. 


이번 오르카의 흐름은 나라는 환자 한명이 섞여들었다는 걸 빼면, 내가 복원 개체였을 때와 완전히 동일했다. 


그런 동일함 아래에 누워있는 또다른 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어차피 똑같다는 걸까? 나 아닌 다른 아르망이든 너든 막을 가능성은 처음부터 없었다는 걸까? 그렇다고 한다면 조금 마음이 편하다. 멀쩡했든 미쳐 있었든 예지가 가능했든 불가능했든 어차피 전부 실패로 끝났을 거라고 이 아르망은 죽음으로써 그렇게 말해주는 듯했다. 그 의미를 입맛에 맞게 확대 해석하자면 지금까지 내가 벌인 미친 짓을 모두 용서하겠다고도 말하는 것 같았다. 한편으론 비웃는 것 같았다. 


어차피 실패할 텐데 왜 더 미쳐버리지 않았느냐고. 고작 그 정도로 밖에 미치지 못하는 거냐고. 네가 어땠든 처음부터 결말은 쭉 같았다고.


아르망을 지나쳐 목적한 곳으로 향한다. 격벽에 균열이 늘어간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비극 따위 찾아볼 수 없는 행복한 전개가 될까.

첫 번째 폐하가 나를 복원하지 않았다면 폐하는 웃고 계시지 않았을까.

애초에 서로 만나지 않았다면 행복하시지 않았을까.


폐하는 조명이 깜빡대는 사령관실에 우두커니 서서 등을 보이고 있었다. 왼편으로 삐져나온 왼손에 올려둔 진주 반지와 안경을, 그것이 손바닥 위에 제대로 있는지 확인하는 듯한 눈으로 보고 있다. 그런 폐하를 본 순간, 내가 제대로 가지고 있긴 했던 건지 의심스러웠던 윤리, 도덕, 양심, 자격, 입장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졌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참고, 내뱉고를 다섯 번 반복했다. 다른 사족없이 순수하게 폐하를 지켜내지 못했다는 죄악감만을 가지고 마지막을 준비한다. 


이것이 마지막. 나는 한번 더 스토커가 된다. 끝까지 이기적으로 굴기로 한다. 스토커임을 순순히 인정하기로 한다. 사랑은 이기적이고 오만하며 독선적이라는 스토커식의 위험한 논리를 휘두르기 위해, 스토커로서 이 자리에 선다. 


뭐가 어쨌든 나는 폐하를 사랑하는 것이다. 네가 해온 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부정해도 좋다. 네가 사랑한 것은 폐하만이 아니라고 비난해도 좋다. 전부 괜찮다. 이런 마음을 품는 상대는 지난 900년간 폐하가 유일했다. 지금까지 해온 행동을 막무가내로 정당화하거나 억지로 합리화 할 생각은 없다. 그것이 정말 사랑이었느냐며 증명하라고 몰아세운다면 지체 없이 사랑이었다 대답할 수 있다. 지금의 나는 이기의 화신이며 폐하를 더 구할 생각도 살아남을 생각도 없다. 살아남는다 한들 살 생각도 없다. 나는 오직 나 자신을 위해서, 내가 나에게 행하는 소소한 구원만을 위해서 폐하를 이용하고자 한다. 


정말로 운명이 있다면.


7번의 단막극을 억지로 엮은 듯한 이 이야기 끝에, 지금 뱉으려는 대사는 운명이 정해준 걸지도 모른다. 

나는, 오직 이 순간만을 위해 살아온 걸지도 모른다.


사이렌 소리가 열 번, 탁한 노란빛이 사령관실을 다섯 번 오가고 나서, 나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


"사랑해요."


900년 분의 크기가 된 마음을, 나는 마네킹에게 말하듯 폐하에게 건넸다. 대답은 중요하지 않다. 대답을 듣고자 한 고백이 아니다. 나만 편하고자 하는 혼잣말같은 것이었다. 


이로써 조건은 갖춰졌다. 이것으로 나도 내안의 그녀들도 모두 구원받을 수 있다. 900년 전의 나도 800년 전의 나도 700년 전의 나도 600년 전의 나도 500년 전의 나도 400년 전의 나도 300년 전의 나도 200년 전의 나도 100년 전의 나도 언니도 매니저도 마틸다도 어머니도 모두 바닥 없을 심해로 부글거리며 폐하를 껴안은 채 거품처럼 사라질 수 있다. 다음 150년을 지나 또 폐하와 오르카가 나타난대도 더 이상 그곳에 나는 없다. 아르망 추기경이 다시 탄생한다 한들, 그것은 발을 딛게 된 오르카를 첫 번째 오르카로 인식할 아르망 추기경이다. 처음부터, 나는 없었던 존재가 되는 것이다.


사이렌이 열 번 더 울리고, 노란빛이 다섯 번 더 사령관실을 스쳐 지나가고서야 폐하가 뒤를 돌았다. 설마 대답을 해주시려는 건가 순간 기대하지만 표정을 보니 긍정적인 대답은 아닐 것이다. 입으로 대답해주실 것 같지도 않다.  뭐, 괜찮다. 처음부터 대답이 중요한 고백이 아니었으니까. 까마득히 낮은 확률을 뚫고 긍정적인 대답을 받을 수 있대도 그건 그것대로 문제다.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보내온 시간이 너무나도 허무해진다. 현 상황도 상황이고, 역시 여기서는 내쳐지는 게 맞다. 


스쳐간 생각에 갑자기 웃음이 터져나왔다. 지금까지 보내온 시간이 허무해진다니. 애초에 기회도 없었지만 이제껏 폐하께 거절당하기 위해 보내온 시간같아서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마지막은 비록 말뿐이더라도 맺어지는 편이 역시 나을 텐데. 


나란 년도 좀처럼 포기를 모른다. 시체와 다름없어졌으면서도 가슴 만큼은 '사랑해요.'라는 말에 영향을 받아 두근두근 요동치고 있다. 이거, 생각보다 괜찮다. 폐하 얼굴만 봐도 얼굴이 화끈대던 복원 개체 시절로 돌아간 것 같다.


떠오른 시절에 잠깐 발을 담글 수 있던 시간이 지나, 평온하게도 보이는 얼굴로 폐하가 다가온다.


다가오면서 폐하의 손은 경로에 있던 테이블에 닿고, 


테이블 위에 있던 피스톨을 쥐고,


절대 피할 수 없는 거리까지 다가와 내 이마에 겨누고서,


쏘지 않고 복도로 나섰다.


그것이 폐하와의 마지막이었다.


…그렇게, 내 소소하기 짝이없는 구원은 불완전하게 끝났다.


사라지자.


가을의 매미처럼.

봄 속의 눈사람처럼.

배려깊은 길고양이처럼.


인정하자.


운명은 존재한다는걸.


맺어지지도 않았던 관계에 조용히 페이드 아웃을 고하고, 나도 복도로 나섰다. 폐하는 보이지 않았다. 무너진 격벽과 깨진 창에 걸린 두 다리가 잠깐 보였을 뿐이다.


이렇게 나의 뇌수명은 900년을 넘기게 되었다.







* * *






침몰한 오르카에서 익사와도 같은 페이드 아웃을 고한 것을 비웃듯, 내 눈에 비친 것은 와이프 인되는 겨울 공원의 풍경이었다.


내가 몇십 초 전 침몰한 오르카를 마지막이라고 여긴 것은 오르카가 마지막일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마지막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시간은 계속 흐를 것이고, 오르카는 내가 겪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또 나타날 것이다. 


그 새로운 오르카에, 내가 더는 갈 수 없게 된다는 소리다.

지금의 나는 그런 상태다. 


남자가 말했었다. 

바이오로이드의 기대수명은 천년. 늙지도 병들지도 않는 다른 부분과 달리 뇌는 늙는다. 뇌는 수복이 불가능하다. 뇌가 죽는다.


그 말이 사실임을 지금 몸으로 느끼고 있다. 겨울바람이 때려대는 피부로 느끼고 있다. 어디가 아픈 게 아니다. 나라고 하는 것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들의 밀도가 현저히 낮아진 듯한, 그런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 몸 구석구석을 파고들고 있다고 해야 할까. 오르카에 오르기 전에도, 오른 후에도 이런 적은 없었다. 의지의 유무와 상관없이 내색하지 않을 수 없는 감각이었다. 평범하게 짧은 수명을 살다 가는 인간이라면 분명히 '내가 왜 이러지?' 같은 느낌으로 몸 여기저기를 더듬어댔을 것이다. 


오감이 서로 뒤틀린 느낌. 분명 내 몸인데 내 몸이 아닌 느낌. 두 다리로 서 있는데 외발이 된 기분이고, 두 눈으로 보는데 사이클롭스가 된 기분이다. 폐하를 구해내지 못했다는 죄책감과는 무관하다. 확실히 마지막까지 실패했다는 사실에서 오는 죄어듬과 더는 오르카로 갈 수 없다는 절망적인 선고를 받은 영향도 한몫하고 있지만, 그런 건 어디까지나 신체에 간접적인 영향 밖에 못 주는 감정의 범주에 속한다.―물론 감정이 원인이 되어 생기는 이상도 있다. 심신증이라던가.― 내가 지금 느끼는 것은 직접적으로 느껴지는 이상이다.


그 말이 정말이구나, 라며 나는 젖은 환자복 차림으로 공원에 드러누웠다.

이렇게 죽는구나. 그 외에 별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슬퍼해야 할 타이밍이다. 나 자신에게 분노해야 할 타이밍이다. 몇 백 년 전의 나라면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울지도 웃지도 분노하지도 절망하지도 않았다. 이미 끝나버렸다, 돌이킬 수 없다, 최악의 마무리였다, 한편으론 최선의 마무리였다, 같은 체념이 아니다. 지금의 내 상태를 뭐라 설명할 수가 없다. 


잠깐 좋아진 오감 덕에 다시 떨어진 2019년 겨울의 추위를 제대로 느끼게 됐을 무렵, 뺨에 특히 차가운 감각이 있었다. 손을 가져가 뺨을 쓸어내고서야 그것이 눈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팔과 다리를 대자로 펴고, 엉망으로 배합된 시멘트 색깔같은 하늘에 눈을 고정했다. 바라보는 각도가 평범한 각도가 아니어서인지 차분하게 내리는 눈 한송이 한송이가 유독 커다랗게 보였다.


…이러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더는 오르카로 갈 수도 없는데, 계속해서 여기에 떨어뜨리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를 알아 낼 의욕은 없다. 떨어지는 눈을 보며 가만히 생각해보니, 오히려 마무리로는 다시 여기로 떨어지는 것이 익사보다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멸망한 세계의 주민들과 폐하는 절대 모를 이곳에서, 이 시간대의 주민들도 모르는 곳에서 사라진다. 

나쁘지 않다. 배려심이 넘쳐나는 고양이 같아서 마음에 든다.


그렇게 하자,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 * *





그 공원에서는 머리카락 끝부분이 눈에 잠길 때까지 누워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따뜻한 매트리스에 누워 담요를 애벌레처럼 둘둘 말고있는 나를 발견했다. 머리맡에는 체크 카드와 스마트폰이, 다리맡에 있는 협탁 위의 탁상 시계는 오후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매트리스가 면한 벽의 창문 너머로는 눈이 내리고 있었기에, 조명을 키지 않은 방은 어두컴컴했다.


그렇다. 방. 세이브포인트를 거쳐 다시 시작하게 되는 곳. 그 남자가 소유한 건물의 단칸 방이다.


작은 빨래건조대에 걸린 오르카의 환자복을 보고 몸을 더듬었다. 기모가 들어간 분홍색의 귀여운 파자마 차림이었다. 빨래건조대 근처에는 깔끔하게 개어놓은 옷가지들이 쌓여 있었고, 싱크대 앞에는 6개들이 생수 번들이 여러 개, 심하게 웅웅대는 소리로 봐서 싸구려 냉장고에는 온갖 식재료가 가득 쌓여있을 거란 걸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 남자도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방에 있다는 걸 인지한 날부터 며칠 동안, 현관문이 열렸다가 20초에서 30초 정도 뒤에 다시 닫히는 일이 있었다. 이불 속에 있느라 확인은 안 했지만, 보나마나 그 남자였다. 잘 살아있나 확인이라도 하러 온 것이겠지. 


거기서 또 며칠은 스마트폰이 울리기도 했다. 하루 세 번 꼴, 한 번은 아무 생각없이 확인했는데 공백 뿐인 문자였다. 그 밖에 따로 온 문자는 없었다.


일주일이 지나가기 전에 처음으로 입에 물을 댔다. 인간은 3일만 수분 섭취를 하지 못해도 죽지만, 바이오로이드는 좀 더 버틸 수 있다. 딱히 살고 싶어서 마신 것은 아니었고, 그렇다고 이렇게 죽어버리자고 안 마신 것도 아니었다. 어쨌든 나는 죽는다. 아직 길고양이에 어울리는 것이 떠오르지 않아서 이렇게 연명 중일 뿐.


구상 중인 것이 있고 아직 그게 떠오르지 않아서 죽고있지 않을 뿐이라면, 누워서만 시간을 보낼 필요는 없었다. 어쨌든 죽는다면 조금 활동적이어도 될 것이고, 반대로 가만히 누워있는 것보다 더 심한 상태가 되어도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후자를 택할 경우 구상이 제대로 안 될 뿐더러 구상을 마친들 실행할 여력이 없을 테니까, 나는 남자가 준비해둔 것에 손을 대는 것을 시작으로 점차 생활력을 회복해갔다. 


죽기 위해 회복한다. 불을 끄기 위해 불을 지른다. 웃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주 오랜만에 샤워를 했다. 그 전까진 느끼지 못했는데, 도대체 이게 인체에서 날 수 있는 냄새인건가 의심스러운 냄새가 온몸에서 풍기고 있었다. 


그래도 이런 상태가 되어버려서 떠오른 첫 번째 150년보다는 나은 편이었다. 진짜 문제였던 것은 거울 너머의 나였다. 거울에 서린 김으로 보정이 됐다고 해도, 지금의 내가 얼마나 약해졌는지 뼈만 남은 팔다리가 오싹할 정도로 강조하고 있었다. 눈은 충혈됐고, 입술은 말랐고, 머리는 감았음에도 조금도 윤기가 돌지 않았다. 이래서야 곤란하다. 길고양이도 배만 채워진다면 몸단장을 한다. 길고양이같은 마무리를 그리고자 한다면 생활력 다음은 외모 회복이 우선이었다.


나야 원래 공감받기 어려운 감성의 소유자다 보니, 하는 말도 하나같이 공감받을 수 없는 괴상한 것들인 것은 자각하고 있다. 그런 내가 말하겠는데, 번거롭게 자살할 것도 없이 이제 곧 죽을 거라는 사실은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다시 말하는데 나는 공감받을 생각 따윈 추호도 없다. 그래. 너라면 자살 외엔 답이 없겠구나, 라고 이해하는 척해봐야 딱히 기쁘지도 않다. 그저 지금의 나에겐 어떻게 죽을지가 최대의 목표고 최고의 관심사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이들과 동일선상에 선 것과 같은 것이지만, 나는 그들처럼 회한에 잠기거나 하지 않았다. 다가올 죽음은 매력적이었고, 다양한 구상을 통해 더 매력적으로 만드는 중이고, 하루 중 대부분을 죽음의 구상에 시간을 쏟게 되자 죽음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미치광이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디 철없는 중2병 모지리들 같다고 하면 서운하다. 그런 것과는 결이 다르다. 


그래서 무슨 차이라고 묻는다면 대답이 궁해진다. 무려 죽음이다. 죽음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것도 뭐한데 과연 얼마나 공감받겠는가? 애초에 나는 공감받기 어려운 감성의 소유자다. 그런 이의 발언은 비판을 넘어 비난받기 마련이다. 이런 나지만 비난받는 것은 싫다. 


커튼을 친 방에 틀어박혀서, 근처의 편의점에서 구입한 맥주를 마시며 아메리칸 뉴웨이브 시네마나 사실주의를 기조로 한 실화 기반의 영화 등을 통해 죽음에 관한 다양한 시선을 섭렵했다. 


영화 선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재미였다. 갈래가 비슷하다해도 내가 다큐멘터리만큼은 절대로 선택하지 않은 이유다. 재미가 선택의 중심에 있었다보니 영화들이 말하고자 하는 죽음들마저 재미있게 느껴졌다. 계속 돌려보고 곱씹어 볼수록 죽음이란 건 사실 재밌게도 바라볼 수 있는 게 아닐까 싶기도 했는데, 알 파치노를 보려고 선택한 '뜨거운 오후'에서 존 카제일의 머리통에 총알이 박혔을 때는 배를 잡고 웃었다. 나는 기권하고 죽음은 재밌기도 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대부 시리즈를 다 보고 별로 재미없었다는 감상을 품은 시점에서 외모는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컴퓨터 모니터도 tv도 끄고 오랜만에 외출하기로 했다.


아이보리 터틀넥 스웨터에 슬림 진, 베이지색 트렌치 코트 조합은 남자가 준비해둔 차림이었다. 무난해서 괜찮았고, 그것 밖에 외출에 어울리는 옷이 없었다.


근방의 개천변은 한적했다. 겨울 특유의 맑은 햇살은 적적한 개천에 존재감을 과하게 불어넣고, 몇 마리의 까치가 목욕이라도 할 예정인지 물가를 서성였다. 눈이 너무 부셔서 가능한 개천은 귀로만 즐겼다. 


코르크로 포장된 산책로를 걷다 자동차 소리가 들리게 될 즈음해서 상가 건물이 드문드문 보이기 시작했다. 산책로를 떠나 아무 카페에 들어가 에스프레소를 테이크 아웃했다. 2020년임을 실감하게 하는 쏟아지는 시선이 짜증났다. 지나쳐가던 어떤 놈은 대놓고 빤히 쳐다보길래, 환하게 웃으며 중지를 세워줬다. 


에스프레소는 다시 산책로로 돌아와 즐길 셈이었지만, 다다르기 전에 다 식어버릴 것 같아서 그냥 마셔버렸다. 산책로를 다시 걸었다. 왜가리 한 마리가 개천을 유유히 날아가며 나보다 조금 앞선 곳의 수면에 착지했다. 지내고 있는 건물 근처까지 다시 돌아왔을 땐 벤치 위에서 햇볕에 몸을 녹이고 있는 고양이를 발견했다. 귀여운 치즈였다. 열 걸음 떨어진 벤치에 앉아 관찰하고 있으려니 어느새 치즈는 내 무릎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동네 주민들이 다같이 보살피는 녀석이다. 이 녀석 말고도 몇 놈 더 있다. 길고양이들 먹으라고 먹이터까지 만들어주는 동네니까, 내가 아는 녀석들보다 더 많은 녀석들이 이 동네에 있을 것이다. 


고롱고롱대느라 진동하는 목을 손끝으로 느껴가며 잔뜩 귀여워해줬다. 그러다가, 갑자기 짜증이 솟구쳐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것으로 녀석을 내쫓았다. 


일주일이 지나자 뉴스에서 곧 설날이라는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설날 전에는 한파가 몰아칠 것이니 주의하란다. 


생활력이 돌아오고 외모도 정상화된 내 상태는 평온 그 자체였다. 다시 과거의 존재가 됐다는데에서 오는 고독은 착실히 느끼고 있었지만, 이 수백 년간 나는 외톨이로 살지 않은 시간보다 외톨이로 산 시간이 더 많았다. 견디지 못할 것이 없었다. 여자들 사이에서 겪어야하는 부당한 고독보다는, 철저히 외톨이란 점에서 느끼는 순수한 고독 쪽이 훨씬 나았다. 


설날이 지나간 다음부터 수백 년을 따라다닌 두통에 시달리는 빈도가 격감했다. 최종적으로는 두통이라 부를 만한 것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신경을 긁는 게 사라진 것은 좋았지만, 이제 내 뇌는 그 정도의 경고 기능조차 불가능하게 됐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것을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잘 알 수 없었는데, 결국 기쁜 것으로 하기로 했다. 이제 그 두통은 오랜 친구같은 것이었지만, 착착 다가오고 있는 죽음이라는 기쁨이 근소하게 오랜 친구를 잃은 슬픔을 웃돌았다. 


내가 이번에 죽는 것으로 가장 기쁜 것은, 미래로 고정된 시간의 흐름에 따른 다양한 감정의 축적을 전혀 심려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점이었다. 육체적인 고통은 대수로울것 없었다. 지난 시간 동안 괴로웠던 것은 언제나 육체적 고통은 가볍게 상회하는 심적 고통 탓이었다. 


그 무엇도 신경쓰고 고려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좆같은 년놈들의 노골적인 시선부터해서 바이오로이드의 탄생으로 인한 윤리의 범세계적 퇴락이라는 것은 이제 다 남의 일이었다. 머지않은 죽음으로 900년에 걸쳐 드리운 악영향이 모두 도려내지자, 나는 처음 느껴보는 상쾌함에 전율했다. 쇄락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그것은, 나를 당당하고 유연한 여자라는 형태로 하루아침에 다시 일으켰다.


길거리라면 금연구역에서의 흡연은 대단할 게 없지만, 실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카페, 식당, 영화관, 심하게는 관공서까지. 담배를 불허하는 그 모든 곳에서 나는 거리낌없이 담배를 피워댔다. 그래서 제지를 당하게 될 쯤이면 내가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를 적극 사용해 유연하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담배냄새가 몸에서 채 빠지기도 전에, 쫓겨났던 곳을 다시 찾아가 또 흡연했다.


제지가 심해져 슬슬 폭력을 사용하게 됐을 때부터는 번화가를 걸어다니며 커피 마시듯 술을 들이키기 시작했다. 맛이나 가격보다 휴대에 용이한 것이 좋았기에 주로 마시는 것은 맥주가 됐다. 가끔은 소주도 마셨다. 맛을 고려한다면 맥주가 더 나았으나, 음주 후의 소박한 뒷풀이를 고려한다면 소주도 나쁘지 않았다.


많은 유리 중에서도 가장 깨부순다는 행위에 걸맞은 것은 역시 소주병이 아닐까하고 나는 생각한다. 창, 잔, 도기, 전구, 거울, 세면대, 변기. 그 어느 유리더라도 소주병 만한 쾌감을 선사해주지 못했다. 색깔부터 눈에 띄고, 그립감 좋고, 던질 수도 있고, 파열음은 모든 유리 중에서 최고다. 벽에 던지는 것도 좋은데, 특히 인간의 뒤통수가 강할까 소주병이 강할까를 알아볼 때가 최고의 소리를 낸다.


대략 10명의 뒤통수에 소주병 파편을 박아버린 후부터는, 잃을 게 없다고 말하고 다니는 인간들만 찾아다녔다. 그런 놈들이야 거진 시궁창 같은 곳에 포진해 있었으니 주먹을 사용하는 일이 늘어갔고, 끝까지 개기며 차라리 죽이라고 말하는 놈들한테는 죽이지 않는 선에서 칼맛을 보여줬다. 


잃을 게 없다니. 허세도 그런 허세가 없었다. 단 한 놈도 빠짐없이, 칼맛을 다 보기도 전에 제발 살려달라고 발목에 매달려 목숨을 구걸했다. 잃을 게 없으니 무섭지 않다는 태도는 결국 법망 내에서나 가능한 행동이었다는 걸, 아무나 선을 넘을 수는 없다는 걸 깨달은 얼굴들이 줄을 이었다. 제발 우리 오빠에게 그러지 말라며 나를 말리는 동생이 딸린 놈을 조질 때는 김이 새버려서, 그 놈을 마지막으로 나도 멈추기로 했다.


오랜만에 스마트폰 시계를 확인했다. 많이 지나갔을 거라고 생각한 시간은 아직 1월에 걸쳐 있었다. 그러면 그렇구나, 시간 얼마 안 지나갔구나, 하면 되는 일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이건 뭔가 잘못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이 되어 번화가로 나섰다. 그날의 인파는 유독 컸다. 커플과 가족이 반반으로, 홀로 걷는 인간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 하나하나가 사랑과 행복을 이야기하는 그림의 완성을 위한 조각보 같았다. 겨울의 냉혹함은 현기증이 날 것만 같은 엄청난 열기와 계절을 거스르는 색감의 일루미네이션에 지워져 있었다. 어디를 보나 사랑이 스며나오고 행복에 젖어 있었다.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저기요?" 늘 꼬이는 똥파리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폐하?"

"예?"


폐하가 아니다. 

그냥 닮은 얼굴이다.


걱정된다는 얼굴을 한 폐하를 닮은 남자는, 조심스럽게 내 왼쪽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을 이었다.

옆에서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는 여자는 연인으로 보였다. 

드문, 호의였다.


"어, 괜찮은 거에요? 저기요?"


괜찮게 생겼네, 라고 생각하던 참에 몸을 살폈다. 버젓이 여자도 있는 이 정도되는 남자가 가던 길을 멈춘다는 건 좀처럼 없는 일이다. 문제는 내 쪽에 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내가 주저앉아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남자의 눈이 높은 곳에 있지 않았던 것은, 쪼그려 앉아 나와 눈높이를 맞췄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게 사라졌다. 조각보들도 일루미네이션도 시야에서 전부 한순간에 사라져버렸다. 눈을 감고 있는 건가 싶어서 몇 번이나 깜빡여봤지만 제대로 보이는 건 없었고, 광시증의 증상처럼 잔영같은 풍경이 빠르게 슬라이드되며 눈을 스치고 지나갈 뿐이었다.


방에 도착해서야 내 시각은 정상으로 돌아왔다. 몸은 땀에 젖었고 다리는 저렸다. 그것으로 쉼없이 뛰었다는 걸 알았지만, 가슴이 미어지는 느낌은 숨이 차서가 아니었다.


그리고 몸이 진정되고서, 내 안에서 무언가가 부서져 내렸다.


…예고된 죽음이 900년 분의 악영향을 도려내자 남은 것은, 체념에서 오는 쇄락이 아니었다.

뼈저린 외로움이었다. 


코트깃을 찢어질 정도로 당겨 입 앞에 모으고 몸을 둥글게 말아 웅크렸다. 옆에서 보면 누군가에게 기도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을까 싶던 그 자세 그대로, 죄어들고 미어지는 감각에 몸을 떨었다. 나는 이 감각을 알고 있다. 괴물이다. 오래 전에 임계점을 돌파한 공허함은 지금에 다다라서야 시간의 괴물로서 완성된 모습을 취하고, 몸 구석구석 깊숙하고 소중한 곳까지 철저히 유린하려는 것이었다.


정말로 죽는다니. 이렇게 죽는다니. 두려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순순히 두려움에 떨기 시작하자, 제정신이 아니었던 걸 당당하고 유연한 모습이라 포장했던 것은 단순한 허세였을 뿐이었다고 솔직하게 인정할 수 있었다. 끝까지, 나는 끝까지 허세를 부리고 있었다. 


애써 외면해왔던 지난 시간이라는 덫에 걸린 상처가 일거에 몰려와, 괴물의 덩치를 키워갔다. 


시간의 괴물에게 당해가며 나는 깨달았다. 공허는 흐르는 시간을 타고 나를 찾아온 것이 아니라 내가 자처해 공허를 키워왔다는 사실을. 현실을. 


두 번 다시 폐하를 볼 수 없다는 게 두렵다. 두 번 다시 폐하를 살릴 시도조차 못하게 된다는 게 두렵다. 외롭다. 무섭다. 이렇게 죽고 싶지 않다. 폐하가 보고 싶다. 이번에는 실수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


그렇게 조명없는 방구석에서 듣는 이 없는 기도를 올려봐야 대답해주는 것은 웅웅대는 냉장고 밖에 없었다. 


이후 며칠 간, 나는 닥치는 대로 아무 남자나 만나고 다녔다. 그냥 외로움을 무마하기 위한 까닭없는 만남이었다. 그렇다보니 성공률 100%를 자랑하던 헌팅으로 만든 자리는 1시간을 넘기지 못했고, 몇몇은 대놓고 꺼려진다는 눈을 하거나, 또 몇몇은 화장실에 간다 거짓말하고 도망쳤다. 유일하게 단 한 명만이 나를 걱정해주는 말을 했던 것 같은데, 이미 그때는 한층 더 제정신이 아닌 상태였던지라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진짜 문제였던 것은, 그 누구도 악의를 내비치지 않았음에도 나는 그것을 악의적이라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만남이 거듭될수록 증상은 심해져, 이제는 간단한 대화조차 바이오로이드 시대의 통제 구역이나 이색 클럽의 악의에 준하는 독으로 다가왔다. 드문 호의도 익숙한 악의도 모두, 독이었다. 


중증 간질환 환자에게 해독능력을 기대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게는 세계의 독을 견뎌낼 여력이 더는 남아있지 않았다. 이렇게 살아있게 된다면 나는 멀지 않은 미래에 고통스럽게 독살 당할 것이 자명했다.


만약, 조금 여유를 가지고 상대를 대했더라면 누군가 한명 쯤은 내 안의 고독과 공허를 어루만져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내가 회복을 기대할 수 없는 여자란걸 깨닫고, 어설픈 불건전함을 두르고, 되는대로 내 몸을 탐하여 기꺼이 함께 타락해주었을지도 모른다. 


모두 만약의 이야기다. 설령 그런 전개가 펼쳐졌다해도 끝은 길동무가 하나 생겼다는 결말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리라. 결국 나는 죽는다. 그 어떤 희망적인 가능성이 있다 해도, 이제와서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 *





그로부터 몇 주간, 나는 영화나 드라마만 보며 시간을 죽였다. 영화의 남주인공을 폐하로 두고, 여주인공에 나를 둬서 폐하와 관련된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망상을 계속했다. 만약 이랬더라면, 저랬더라면 하며 혼자서 웃고 울적해지기를 반복했다. 슬픈 가사의 음악을 들으면 현실에서조차 비극이 여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그게 기뻐서 웃고, 망상으로 수정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현실로 끌어올려지면, 이불 속으로 숨어들어갔다. 지난 900년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니까.


그래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행복한 결말의 영화를 틀어놔도 망상 속 커플의 결말은 언제나 비극이었다. 


망상이 차츰 현실 감각을 앗아가고, 외로움은 갈수록 커졌다. 공허해야 하는데 외로움만은 착실히 느끼고 있는 게 이상해서, 나는 나만의 외로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다.


외로움이란 감정의 핵심은 최종적으로 모든 것을 서먹하게 만든다는 것이 아닐까.

눈에 맺히는 모든 상들에서 서먹함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이 시간대엔 매일 드나들던 편의점이 먼 과거의 골동품점인 건 아닐까. 딱 봐도 지은지 20년은 훌쩍 넘은 골목 식당은 먼 미래의 유명한 맛집이 아닐까 그런 서먹한 착란에 시달리자, 새삼 기묘하구나 싶었다.


어째서 나는 계속 150년 전으로 떨어지고 있는 걸까? 그거야 더는 이상할 것도 없는데 왜 여기까지 다다라서 모든 것이 서운하게 비춰지는걸까? 이상할 게 없는 것이다. 지난 900년간 나라는 년은 그랬다. 어느 시점에서 한참 멀어진 기억을 가깝게 느끼고, 가장 최근의 기억을 하루라도 빨리 사라졌어야할 머나 먼 과거의 것으로 느꼈다.  


그거 참 대단하다고 남의 귀에 속삭이듯이 내 귀에 들려주었다. 현실 감각만 없는 게 아니라 시간 감각도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인지에 필요한 그밖의 여하한 감각도 이미 먼 미래 같은 과거와 과거 같은 미래에 흩뿌려놨을 것이었다. 마이너스와 마이너스가 만나면 플러스가 되는 것이 상식이고 법칙인데, 두 개의 마이너스를 겸비한 내가 품고 있는 것은 여전히 끝도 없이 커져가는 마이너스였다.


하늘도 수풀도 바다도 꽃도 바람도 구름도 어렴풋 들려오는 음악도 전부 내게 서먹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도 똑같은 얼굴로 마주보고 있었다. 이제 내게는 당연하고 익숙한 풍경마저 그런 서먹함의 결말이 그러하듯 인연없는 외계의 것이 되어가고 있었다.


발을 돌려 방으로 향했다. 아직 그곳은 내게 웃어준다. 검버섯같은 곰팡이가 피고 황달같은 찌든 떼가 뭍은 얼굴을 가진 곳이지만, 내게 우호적인 곳은 이제 그곳 뿐이었다.


언젠가 이 방도 내게 서먹한 얼굴을 하게 될 것이다. 호의도 악의도 기쁨도 슬픔도 긍정도 부정도 플러스도 마이너스도 모두 독으로 받아들이는 나에게 언제까지고 우호적일 리 없다.


계속 영화를 봤다. 영화를 통한 망상조차 독이었기에 나는 서서히 아무것도 느끼지 않게 되어갔고, 더는 느끼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영화말고도 음악이든 책이든 뭐가 됐든 전부 뇌수명을 단축시키는 독이었다.


그런 건가, 라고 나는 생각했다. 모든 감각이 옅어져만 가는 이 감각은 결국 뇌의 문제였나. 단순히 사고하고 숨만 쉬는 것조차도 전부 수명의 단축으로 이어진다면 나는 그렇게 죽자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때까지 폐하를 그리고 또 그리며 마지막에는 소멸해버리듯이 세상을 뜨자고 생각했다. 육체는 남아서 죽음의 악취로 이웃 주민에게 민폐를 끼치겠지만, 무슨 상관인가. 이미 죽은 자에게 산 자의 욕지거리는 들리지 않는다. 침을 뱉어도 모른다.


완전한 공허. 나는 그것을 목표로 했다. 메워낼 수 있는 공간을 뜻하는 공허가 아닌, 무엇으로 메우든 전부 먹어치워버리는 완벽한 허무.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품을 수 있는 진짜배기 공허라고, 공허함에 신나게 유린당한 나는 결론지었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때가 됐을 때. 폐하를 생각하면 마음이 갈가리 찢기는 그 고통의 소중함마저도 느끼지 못하게 됐을 때. 바로 그 때다. 공허가 완성되는 날이 내가 떠날 때다.


그 때는 금방 찾아왔다. 세상 누구도 울지 않고는 못 배긴다는 평을 가진 영화를 봐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자, 나는 디데이를 선언했다.







* * *






상행선 지하철을 타고 네 정거장 지나서 내린 다음, 목적지에 도착하자 부슬부슬 이슬비가 내렸다. 목적을 수행할 최적의 장소에 도착했을 때엔 장대비로 변신해버려서, 근방의 일대 전체는 빗줄기에 난타 당하는 소리로 가득했다.


재건축을 위해 반쯤 무너진 5층 빌라는 베란다가 없다. 외벽이 훤히 드러나있다. 


길고양이같은 죽음은 포기했다. 그런 구상이 완성되기까지의 여유가 없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 그렇게 생각하고 바닥이 끊긴 곳의 경계에 서서 암흑 뿐인 풍경을 바라보니까, 우연히도 구색은 맞춰졌구나 싶었다. 인간이 나돌아다니지 않는 곳. 심야. 시체가 발견되기까지는 꽤나 시간이 걸리겠지. 그것에 만족하고 바닥에 앉아 허공에 다리를 걸쳤다.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틀어두고 그네를 타듯이 다리를 휘적거렸다. 한 곡이 끝나고 다음 곡이 재생될 타이밍에 스마트폰을 공중에 던졌다. 얕은 포물선을 그리며 시원하게 날아간 스마트폰은 암흑 속 장대비의 행렬과 하나가 되었다.


여기는, 그곳이다. 처음으로 폐하와 과거의 시간대로 떨어졌을 때, 폐하를 뒤따르려고 찾은 곳. 그때도 오늘처럼 이렇게 비가 내렸다. 그때의 나는 그걸 보고 세계의 톱니바퀴가 엇나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900년을 보내고 나니까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겨울에도 비는 온다. 오늘처럼 아주 거칠 게 내릴 때도 많다.


무너질 예정인 빌라 5층에 걸터앉아있는 내 모습은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다. 내 눈에도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세계에는 암막이 쳐졌고, 이렇게 비도 내리니, 나는 오랜만에 마음 놓고 소리내어 오열해본다. 비만 오면 생각했던 것인데, 비가 올 때 우는 것은 참 비겁한 짓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비겁하다고 생각하느냐면, 아니다. 비겁하다는 것은 내게 칭찬 밖에 되지 않는다.


생각보다 눈물은 많이 나오지 않았다. 뺨에는 여기로 오기까지 우산으로도 막지 못한 빗물이 더 많이 묻어 있었다. 눈물을 흘려야만이 꼭 운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억지로 슬퍼해봐야 눈물도 안 나오고, 너무 울어버리면 멈출 때를 놓칠 것 같으니까, 이제 자리에서 일어선다.


머리 먼저 떨어질 지상은 군데군데 콘크리트 더미들이 작은 피라미드처럼 쌓여있다. 높이가 애매해도 고사리같은 철근들이 내게 손을 뻗고 있다. 혹여나 살아남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은 필요없을 것 같다.


마음의 준비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 따로 무서운 것도 없다. 오른발을 허공으로 내딛는다.


"크흠…"


잘못 들었나 생각했다. 직후 콘크리트 가루가 구둣발에 으스러지는 소리를 들린다.

착각이 아니다. 들릴 리 없는 소리였고, 얼마든지 들릴 수 있는 소리였다. 


"방해했냐?"


강한 기시감을 느낀다.


그 기시감을 방아쇠로, 허공에 몸을 날린다.

가장 큰 빗방울이 되어 겨울 밤의 행렬에 몸을 끼워넣는다.


시야는 반전되어 나달대는 코트 자락과 보이지 않던 빗물의 간격을 포착한다. 2초도 안 되는 시간 전까지 서있던 곳이 터진다. 뭔가하는 찰나의 의문이 듬과 동시에 방금까지 발이 있던 곳에 반원 모양의 허공이 생긴다. 장대비가 밀려난 것이다.


빨리. 나는 빨리 라고 중얼댄다. 5층이라면 허공에 몸을 던진 순간부터 지상에 다다르기까지 5초도 걸리지 않을 텐데, 갑자기 내 머리를 박살내지 않겠다는 듯 시간의 흐름이 한없이 느려진 것 같다. 


다시 허공을 메운 장대비와 콘크리트 파편 사이로 인간 모양의 실루엣이 나타났다. 나는 이제 중얼대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간절하게 기도한다. 


빨리. 어서 빨리 머리통을 박살내줘.


실루엣이 사라졌다. 눈에 스쳐지나간 빌라의 층은 3개. 이제 1초도 남지 않았다.

무슨 짓을 하든 어떤 수작을 부리든, 이제 늦었다. 나는 죽는다. 애써 보라지. 이건 무조건 죽는다.


머리에 뭔가가 닿는다. 아니, 내 머리가 뭔가에 닿았다. 


격통이 달린다.


머리가 아니라, 다른 곳에.


새카맣게 물든 콘크리트의 피라미드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아무 장애도 느껴지지 않는 내 눈은 그것들을 똑바로 인식할 수 있었다. 그것이 말하는 사실은 하나 뿐이다.


나는 죽지 못했다.


"이게!"


무슨 수를 쓴 건지 나를 끌어안고 쿠션이 되어준 누군가가 윽박 질렀다. 


장대비에 뺨이 따갑다. 머리칼도 코트도 묵직해졌다. 어깨를 둘러 껴안고 있는 팔을 치우고, 나는 굼실굼실 일어났다. 이마와 뺨에 들러붙은 머리카락이 거슬렸지만, 그저 거슬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 다른 것이 내 밑에 깔려 있었다. 


"…너."


왜 나를 가만히 두지 않는 거야.


"도대체 뭐가 문제야?"


그 남자다.


남자의 어깨를 뚫은 철근을 잡고 서서히, 그리고 격하게 흔들었다.


"나한테 왜이래."


대답이 없다. 얼굴도 잘 안 보인다. 암흑과 비를 이용할 셈이다.


"나한테! 이 개새끼야! 도대체 왜 이러냐고!"


"오랜만에 보자마자 한다는 소리가 그런 거냐."


암흑에 익숙해진 눈에 보인 것은 진심으로 섭섭하다는 듯이 웃고 있는 얼굴이었다.


떠올랐다.


그때도 이랬다. 이번에는 내가 몸을 날렸다는 것만 다르지, 그때도 이렇게 뛰어내리기 직전에 나타나서 폐하를 다시 볼 수 있다며 나를 혹하게 했다. 정말로 다시 만나게 됐지만, 그것도 7번이나 만나게 됐지만, 그렇게 될 줄 알았다면 나는 그냥 그때 죽었어야 했다. 첫 번째 폐하를 따라갔어야 했다. 전부,


"다 네 탓이야."


전부 이 남자 탓이다.


"다! 다 네 탓이야!"


철근을 놓고 안면에 주먹을 날렸다. 계속 날렸다. 그런데도 남자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나는 안 보인다는 듯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넥타이와 셔츠 깃을 잡고 흔들었다. 반응이 없다.


"살려주면, 네 몸 날려서 살려주면 내가 감사합니다, 하고 너한테 고개 숙일 줄 알았어!? 어떻게 책임질 거야. 어떻게 책임질 거야!"


"주먹 맵네."


"닥쳐! 닥쳐!" 다시 주먹을 휘둘렀다. "도대체 몇 번째냐고! 왜 매번 나타나서 제대로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하는 거야! 말해! 이번에도 변덕이야!? 변덕이냐고 이 개새끼야!"


가격하는 손의 감각이 점차 사라져갔다. 남자의 뺨에 묻은 피는 남자의 것이 아니라 내것이라는 걸 알게 되자, 더는 휘두를 의욕이 사라졌다. 고개를 하늘로 쳐들었다. 전부 다 짜증나고 허무해져서 웃음 밖에 안 나왔다. 


빗방울이 약해졌다. 그렇게 되기까지 남자의 하복부를 방석으로 쓰고 있었다. 더 때릴 마음도, 말할 기력도 없었다.


일단 일어나서 콘크리트 더미를 벗어나기로 했다. 둔부 쪽과 손에 힘을 줘 남자의 가슴과 하복부를 찍어버리고, 어렵게 일어섰다. 남자가 쿠션이 되었어도 충격 흡수가 제대로 안 됐던 건지, 온몸의 마디가 비명을 질렀다.


이제 어쩌지, 오늘, 방금이야말로 최적의 타이밍이었다. 그것을 남자가 망쳤다. 최적이라고 생각할 만한 타이밍이 언제 다시 찾아올지는 알 수 없다. 그런 타이밍이 올 때까지 살아 있어야 하는 건가. 이미 엉망이 된 거, 지금이라도 대로에 뛰어들까. 그런 생각을 하며 공사 현장의 출구에 다다랐다.


"일주일."


등 뒤로 목소리가 들렸다. 눈은 암흑에 적응 됐지만,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운 거리에 남자는 서 있었다. 닥치고 꺼지라 해도 지멋대로 하는 인간이니 일단 하는 말만 들어보기로 했다.


"일주일만 줘."

"또 네 얼굴 보라고?"


남자는 끄덕였다. 


"말할 게 있어."


"그러셔?" 나는 웃어서 빈정대고 거리를 조금 좁혔다. "아, 그래. 맞아. 난 지금 할 말 있어. 막 떠올랐어."


"말해봐."

"네가 죽여줘."


남자의 눈꺼풀이 눈에 띄게 움직인 것 같았다.


"너, 폐하가 죽여달라고 했을 땐 들어줬잖아. 근데 나는 왜? 내가 알아서 저세상 가겠다는데 씨팔 왜 자꾸 방해해? 왜 자꾸 망쳐? 응? 그렇잖아. 그러니까 네가 죽여."


남자는 침묵하고 있었다.


"빨리."


10초가 넘게 빗소리만 들려왔다. 거절의 의사로 알고 나는 등을 돌렸다.


출구를 다 나서기 전에, 남자의 목소리가 다시 등에 닿았다.


"네 기준으로 일주일 뒤에, 그 호텔에서 봐."


그 호텔이라고 하면 어디를 지칭하는지 알 것이라는 제멋대로인 말투가 마음에 안 들었다. 강풍이 불었다. 그 남자는 바람을 이용해 사라지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뒤돌아서 확인하지 않아도 사라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견딜 수가 없다. 어떻게 내던진 몸인데. 정말로 견딜 수가 없는 것은 이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해야 할 나에게 발작하기 직전의 분노를 집어넣었다는 점이다. 온갖 부정적인 것이 그 개새끼를 생각하면 무분별하게 피어오른다. 그것으로 아직도 내가 살아있음을 자각한다는 것이, 이미 돌아버린 머리를 더 돌아버리게 만들었다.


정했다.


갈 때 가더라도 그 개새끼는 죽이고 가자.


길동무로 삼자.


다 망쳐놓고 죽여주지 않겠다면 내가 죽여버리자.


"어서와. 잘 기억하고 있었네." 다음날 같은 일주일 뒤에 남자와 만났다. "아무데나 앉아."


아무데나 앉으라고 해봐야 의자는 두 개 뿐이었다. 붉은색 테이블보가 덮힌 큼직한 라운드 테이블 위에 팬텀과 리리스를 올려두고, 의자를 끌어 듣기 싫은 소리를 낸 뒤에 자리에 앉았다.


맞은편의 남자는 웃는 건지 무표정인 건지 알 수 없는 얼굴로 일련의 동작에 대한 감상을 꺼냈다.


"예의가 아니야."


그렇다면 유감이었다. 최대한 예의를 차렸던 것이다.


남자의 얼굴은 또 바뀌어 있었다. 얼터드 카본에 출연했을 시절의 조엘 킨나만 같은 외모였다. 


테이블에 요리는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클래식한 정장에 냅킨을 착용 중이었던 남자는 절반만 남긴 상태였다. 


요리부터 먹으라는 고갯짓에 나는 리리스를 집어 테이블에 두어번 두들겨 마주앉은 목적을 알렸다.


"죽이고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마. 다친다."


죽기를 바라는데 조금 다친다고 눈 하나 깜빡할 내가 아니었다. 화가 끓어올라서 리리스 옆의 팬텀을 집어들고, 남자의 이마를 겨눠 투척하기 위해 자세를,


날카로운 것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다친다고 했잖아."


남자의 등 뒤에는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이 걸려 있고, 그 옆의 허공에 둥실대는 소총의 총구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죽거나 다쳐도 상관없는데, 본능적으로 멈추고 말았다.


"나는 널 죽일 생각이 없는데." 남자가 반만 남은 스테이크에 나이프를 대며 말했다. "이 아가씨들은 다르거든. 내가 대항할 의지가 없으면 알아서 튀어나와. 네가 안하면 내가 한다, 뭐… 그런거지."


브라우니, 들어가라. 라며 남자는 나이프로 소총을 툭툭 치고 포크를 입에 가져갔다.


남자는 다시 고개로 요리를 권했다. 나는 요리는커녕 식기에도 손 댈 의사가 없음을 눈으로 전했다.


"여기 오랜만이지 않아? 그 아이들도 부를까?"


남자가 옅게 미소지었다. 비웃는 걸로 밖에 안 보였다.


"…총성이 울렸는데, 왜 아무도 안 와?"

"전세냈어. 그건 기억 못하는군."


전세를 냈대도 어느 호텔의 레스토랑이 총성에 반응을 안 한단 말인가.


남자의 다음 말이 알려줬다.


"단골이라니까? 더한 짓 해도 다 넘어가 준다고. 그 만한 돈을 줘. 넘어가주지 않으면…  그건 그때가서 해결할 문제인 거고."


정상적인 대화를 하려고 온 것도 아니고 길게 앉아있을 생각도 없어서, 이번에는 리리스로 손을 뻗었다.


"할 말이 뭐야."

"그렇게나 본론을 원해?"

  

남자는 서운하다는 미소를 지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이 남자가 할 말만 하고 끝나는 것은 부당했다. 언제나 멋대로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도 그렇고, 재수없는 말투로 말 안 할 거냐며 늘 내가 이야기하기를 강용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이야기하는 것은 항상 나였다. 


왜 이 씨발놈만 나를 알고 있지? 그렇게 긴 시간이 흘렀는데 나는 왜 아는 게 없지?


"아니. 본론도 본론인데." 숨을 크게 들이쉬어 화를 삭인다. "다 오픈해."


"오픈?"


"그래. 오픈. 너는 뭐하는 새끼고 어느 시간대든 나를 졸졸 따라다니는 이유가 뭔지, 하나도 숨기지 마. 다 밝혀."


난 또 뭐라고, 라고 남자가 피식했다.


"뭐하는 새끼긴, 시간과 차원의 여행자지."

"그건 알아. 또?"

"또라니?"

"다 말하라는 거 못 들었어?"

"그러니까 뭐가 궁금한지 알아야 말해주지."

"씨발럼아! 왜 따라 다니냐고!"

"내 딸이니까 따라다니지."


만남을 권한 놈의 태도가 아니다.

피가 쏠려서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았기에 자리를 뜨기로 했다.


"아무래도 내가 너무 가혹했던 것 같아."


막 일어서려는데, 남자가 나를 가리키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너는 B를 해결하려고 하는데, 나는 A를 해결할 방법만 가르쳐준 게 아닐까. 뭐, 그래도 A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B를 해결하는데도 도움이 됐을 텐데 말이야. 어쨌든, 이해가 안 돼서. 어떻게 그렇게 기회가 있었는데도 모조리 실패할 수 있는 걸까 싶어."


"네 일 아니라고…"


"조용히 해. 말 안 끝났어."


남자는 와인잔을 돌려 향만 맡고 다시 말했다.


"마지막으로 다녀온 오르카가 끝이라는 건 너도 알 거야. 다음 오르카야 또 나타나겠지만, 넌 죽을 거고. 길게 살아봐야 멸망 언저리까지겠지."


그건 기적의 수준이다. 당장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 


"내가 느끼기로는 일주일도 못 버틸 것 같은데."


이번에 남자는 애매한 것 없이 대놓고 비웃는 얼굴을 했다.


"웃기지 마. 그렇게 빨리 안 죽어.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바이오로이드는 튼튼해. 그래. 말이 나와서 말인데, 엄살이 너무 심했어. 아주 쓰레기 짓이란 쓰레기 짓은 다하고 다녔잖아. 뒤처리 하느라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이제는 아주 2020년대에도…"


예상은 했다. 그런 짓을 하고 다녔는데 경찰이 한 번도 찾아오지 않은 것은 이 남자가 무슨 수를 썼기 때문이다. 


완전히, 진짜로 스토커다. 나야 비자발적으로 스토커를 졸업했다지만, 이 새끼는 아직도 나를 따라다닌다.


"감상은?" 남자가 말했다. "이제 더는 갈 수 없게 된 감상."


쓸데없이 대화가 늘어지는 것은 짜증났지만, 이 질문에는 답하기로 했다. 했는데, 이 마당에 와서 감상이랄 것도 없었기에 나는 아무런 대답을 꺼내놨다.


"이해가 안 돼."

"뭐가?"


"왜, 어째서, 폐하는 7번 전부 콘스탄챠만 사랑한 건지. 다른 부분은 다 다른 전개가 펼쳐졌을 수는 있었어도 그것만은 늘 똑같았어. 폐하는 콘스탄챠만을 사랑했어. ……끝까지."


"그게 이해가 안 돼?"


남자는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보나마나 운명이니 뭐니 지껄일 것이니 나는 따로 덧붙이지 않았다. 애초에 나도 인정했다. 운명이니 뭐니 그런 건 분명히 있는 것 같다.


내 생각을 읽었다는 듯 남자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네 폐하는 멋진 녀석이야."


의외의 말이었다.


"한 여자만 한결같이 좋아하는 게 멋지다고? 그래서 망가지는데 그게 멋져?"


"멋져. 난 다 알거든."


"네가 뭘 알아."


"알아. 장담하는데, 네 폐하에 대해서는 내가 너보다 잘 알 거야."


그야말로 망언이었다. 멋지니 어쩌니, 나보다 더 잘 안다니, 부탁받았대도 폐하를 죽였던 놈이 할 말이 아니다.


"그리고 씨발아." 나는 화제를 돌렸다. "이왕 도와줄 거 좀 제대로 도와줬으면 안 됐니? 이딴 단검이나 피스톨을 쥐여줄 바에야, 더 쓸만한 걸 내놨으면 얼마나 좋냐고. 너 뭐, 네가 거느렸던 바이오로이드들의 무장은 다 가지고 있다며."


"다른 걸 줬어야 됐다?"


남자가 키득거렸다.


"그래. 예를 들면."


예를 들면, 예지가 가능한 거라던가.


"아르망 추기경이라던가."


키득거림을 멈추고 남자는 정색했다. 그리고 십여 초가 좀 넘게, 뭔가를 참는 듯한 두 세번의 눈깜빡임을 보이고 작은 한숨을 쉬었다.


"뭐야…?"


남자는 잡아먹을 듯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했다는 듯, 곧바로 고개를 미세하게 흔들었다.


분 단위의 침묵이 흘렀다. 전세는 흡연도 허용되는 것인지 남자는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나도 한차례 머뭇거리고서, 담배를 물었다.


"다 오픈하라고 했지."


아무 전조없이 남자가 말했다. 입에 물린 담배가 남자의 아래로 사라졌다.


"좋아. 지금부터가 네가 바라던 본론이야."


뭔가가 달라졌다. 인상이라던가 태도가 아니라 아우라라고 말할 것이 변했다.






* * *






너한테는 미안한 게 많아. 

거짓말도 많이 했어.






* * *






네 폐하에 대해서 뭘 아느냐고? 나도 오르카의 사령관이었으니까.


모든 바이오로이드의 무장을 가지고 있는 건 사실이야. 네게 쥐여준 건 내 리리스와 팬텀의 것이었어. 그리폰, 티아멧, 네오딤. 전부.


사령관이었다는 걸로 어떻게 안다 말할 수 있냐고? 말할 수 있어. 


하지만 단 하나, 단 하나만은 없어.


네 폐하는 나랑 똑같으니까.


나는 모든 바이오로이드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지만, 그것만은 할 수 없어.


나는 네 폐하랑 똑같으니까.


나는 예지만은 할 수 없어.


나와 네 폐하의 차이점은 하나 뿐이야. 자신의 반 쪽에게 유언이나 유서를 남길 시간이 있었는가, 없었는가.


나는 아르망 추기경만은 가지고 있지 않아.


한 명만 사랑하는 걸 이해할 수 없다고? 왜 이해를 못 해. 너도 한 명만 사랑했잖아. 지금도 사랑하고 있잖아. 너는 이해해야 하잖아.







* * *






"나는."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남자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뜨고서 말했다.


"아르망 추기경을 사랑했어."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정장 매무새를 정리하고 행거에 걸어둔 체스터 코트를 걸친 다음, 나를 지나쳐 나가기 전에 테이블에 낯익은 물건을 툭 던졌다. 


단말기다. 남자와 연락할 때 쓰던.


"사용법은 기억하고 있을 거라 믿어. 번호는 뒤에 적어놨어."


"……뭐, 어쩌라는 건데?"


"3일 뒤에 연락하지. 연락을 받으면 다시 만나겠다는 걸로 알겠어. 받지 않으면 거기서 끝. 더는 만날 일 없어."


"그게 본론이야?"


"그래. 그리고," 남자가 다가와 몸을 내밀고 고개를 가까이 가져와 속삭였다. "이런 타이밍에 그런 말을 하다니, 다 끝난 마당에 그런 말을 하다니, 뭐 그런 식으로 생각해서 오해할까봐 말해두겠는데, 나는… 너 진짜 죽여버리고 싶었어."


얼굴도 남자도 멀어져갔다.


……남자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일견 고백같은 것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직접 듣는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그런 말을 하는 중에도 남자는 아르망 추기경이란 소리가 처음 나왔을 때처럼,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마지막엔 죽여버리고 싶었단 소리까지 했다. 


싶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죽이기 싫어진 것인지, 지금까지 따라다닌 이유가 뭐였냐는 질문의 답이었던 것인지, 거기까지는 모르겠다.


레스토랑을 나오자 해는 이미 저물어가고 있었다. 그리 오래 앉아있던 것도 아닌 듯했는데 벌써 그런 시간이었다. 춥지는 않아서 코트는 열어둔 채로 돌아가기로 했다.


얼떨떨하다거나 동요로 인한 떨림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아르망 추기경을 사랑했네 뭐네 하는 소리를 들었어도, 남자에 대한 분노는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전부 오픈하겠다면서 본론을 3일 뒤로 미뤄버린 것은 괘씸하기까지 했다.


3일이 지나갔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3일을 보냈다.

따로 하고싶은 게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오전 중에 단말기가 울렸다. 고민할 것도 없이 나가보기로 했다.


죽이고 싶었어? 나도 죽이고 싶었다. 죽이고 싶다. 죽이려면 만나야 한다. 간단히 죽어줄 놈도 아니니 죽이기 위해서라면 최대한 이 개새끼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야 한다.


약속 장소는, 집회소였다. 남자는 자켓 대신 검은 앞치마를 한 정장 차림으로 테라스에서 맞이해왔다. 


여기를 도대체 얼마 만에 온 건지 모르겠다. 실로 수백 년 만이다. 그 아이들은 아직 고딩이라 방과후에나 온다고 남자가 말하지 않았다면, 오지 않았을 것이다.


멸망 전에 좋았던 시간을 꼽으라면, 이곳에서 보낸 시간은 세 손가락 안에 꼽힌다

추억이나 감회에 젖을 생각은 없었다. 실내의 가장 안쪽에 자리를 잡고, 남자가 오기를 기다렸다.


"기다렸지. 애들 밥 좀 주고 오느라."


애들이란 고양이를 말한다. 그리고 라쿤 한 마리. 이름도 기억하고 있다. 하얀 녀석은 페로, 검은 녀석은 포이. 알기 쉽다. 라쿤은 심술이다.


말투에 다정함이 묻어나와서 무기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놨다.


"본론만 해."


레스토랑과 같은 전개는 용납하지 않겠다고 엄포를 놨다.

남자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 주방 쪽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총과 칼이 놓인 테이블에 종이와 에스프레소 잔이 올라왔다.


커피는 마실 생각이 없었고, 종이는 뭐냐고 묻기도 전에 남자가 말했다.


"계약서."

"뭐?"

"날 좀 도와줬으면 좋겠거든."


죽는 건 도와줄 수 있다고 말했더니 일단 읽어보라고 손짓해서, 종이를 잡아 얼굴 쪽으로 당겼다.





* * *





기간제 및 장시간 근로계약서.


상호명 집회소 대표(이하 폐하라 함)과(와) 아르망 추기경(이하 근로자라 함)은 다음과 같이 계약을 체결한다. 본 근로계약서의 내용은 계약체결일부터 유효하며, 별도의 의사표시가 없는 경우 근로계약은 본 근로계약서의 내용을 내용으로 하여 갱신된다.


1.근로계약기간:

계약체결일로부터 폐하의 목표 달성일까지로 한다.


2.수습기간:

수습기간은 입사일로부터 (3개월)(0개월)로 하고 급여는(100%)(200)%로 하며, 수습기간 중 근태상태, 근무태도, 능력, 자질, 성실성 및 건강상태등이 불량할 경우에는 본 채용을 거절할 수 있다.


3.근무장소:

폐하 마음대로.


4.업무의 내용:

폐하 마음대로.


5.소정근로시간:

폐하 마음대로.


*폐하의 실정 및 사정에 맞게 소정근로시간이 변경될 수 있으며, 연장근로, 야간근로 및 휴일근로 실시에 동의합니다. 

□동의확인:___(인)


6.근무일/휴일:

폐하 마음대로. 


7.임금:

폐하 마음대로(개많이 줌. 보너스 많음.)


8.연차유급휴가:

폐하 마음대로(개많이 줌)


9.계약의 해지:

폐하는 근로자가 정당한 업무지시에 거부하거나 업무를 게을리하는 경우, 기타 사회통념상 근로관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사유가 발생할 경우, 본 근로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


10.근로계약서 교부:

폐하는 근로계약을 체결함과 동시에 본 계약서를 사본하여 근로자의 교부요구와 관계없이 근로자에게 교부함. (근로기준법 제17조 이행)

□교부확인:___(인)


11.기타:

이 계약에 정함이 없는 사항은 폐하 마음대로 함.

*계약이 체결되면 폐하라고 불러야 함.

*계약 체결시 아빠가 아니게 됨!


2020년 2월 19일.


근로자

주소:

연락처:


폐하

상호:집회소(폐하)

주소:하늘 아래, 땅 위.





* * *





종이를 테이블에 올려놨다.


"…이게 뭐야?"


"뭐긴 뭐야. 계약서잖아.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도 안 봤어? 그 영화에 나오는 섹스 계약서같은 건 아니니까 걱정 마."


누가 계약서를 이 따위로 작성하느냐고 말하고 싶은 걸 참고, 팬텀을 들이밀었다.


"나랑 장난해 씨발아?"


"장난하는 거 아니야."


너무 진지한 얼굴로 말해서 내가 다 얼떨떨했다. 의식 밖으로 밀려나려고 하는 목적을 다시 잡아놓고, 내가 말했다.


"나 너 죽이러 온 거야."

"안 돼. 너만 손해야."

"손해 아니야. 난 이제 너만 죽이면 돼."

"손해야. 보너스가 어마어마할 거거든."


애초에 넌 나 못 죽여, 라고 남자는 빈정대는 미소를 지으며 관심없으면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네가 계약을 받아들인다면,"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 "난 너한테 미안한 놈이 될 생각이야."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데, 너 진짜 이상한 새끼다."


나는 솔직하게 감탄했다.


"보너스가 뭔지는 말할 수 없어. 네가 알았다면 절대 거절할 수 없는 계약이라고만 알려줄게."


"거절 못할 건 없어."


"있어. 네 폐하와 관련된 거니까."


"무슨…"


순간 동요한 나를 보고 남자가 득의양양하게 웃었다.


"비밀. 네가 알아버리면 나만 손해야. 역시, 넌 이거 거절 못 해. 두 번 다시 폐하는 볼 수 없게 됐는데도, 폐하 소리 나오니까 이런 얼굴이잖아."


'이런 얼굴'을 따라 하듯이 얼굴을 구긴 남자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어차피 그렇게 버릴 목숨 아니었냐? 그럴 바엔 차라리 나한테 팔아. 어찌되어도 상관없는 목숨, 그렇게 갖고 있지 말라고."


"…말, 진짜 개 좆같이도 하네."


"내가 마음대로 쓰게 해줘."


그런 말들을 이 남자가 하는 게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도 폐하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계약서에 사인 했을 것이었다. 


결국 사인은 하게 됐지만 바로 사인하지 못한 이유로는, 역시 계약을 제안한 게 이 남자여서였고, 계약서의 내용대로라면 이 남자를 폐하라 불러야 한다는 것과, 자살을 막은 데다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화법을 구사했기 때문이었다.


아르망 추기경을 네 번 적기까지 몇 시간이나 소요됐다. 내 개체명이 끔찍하게 여겨질 정도로 꺼림칙한 계약서였다. 그러나 남자의 말대로 어찌 되든 상관없는 목숨이다. 강간을 당한들 온갖 모욕과 수치를 당한들, 더 떨어질 곳이 없다. 


더해서 만약 남자가 말한 거절할 수 없는 보너스가 거짓말이라면, 내 과오에 걸맞는 결말로 끝날 뿐이고, 사실이라면 아직은 모르는 기쁨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상태에서도 기쁨이란 걸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밑져야 본전이었다. 내게도 손해일 것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계약과는 상관없이 이 남자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 그날, 드디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됐다고 생각했는데, 우습다는 듯이 아주 간단히 나를 분노하게 했다. 그게 크나큰 마음의 상처로 다가왔다. 텅 빈 마음에도 상처를 입을 수 있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다.


"좋아." 남자는 계약서를 껴안듯 품고 만면에 꾸밈없는 미소를 지었다. "이상한 건 안 시켜. 그냥 하란 대로 도와 주면 돼."


"굳이 이상한 거라고 말하니까 더 이상하잖아."


"그런 게 신경 쓰이냐? 목숨의 소중함도 내다 버린 녀석이? 신기하네."


"네가 믿을 만한 새끼가 아니라서 그런 거라곤 생각 안 해? 계약서니 뭐니, 너 해온 거 보면 하루아침에 찢어버리고 갑자기 멋대로 날뛸지 어떻게 알아."


"왜, 내가 너 덮치기라도 할 것 같아?"


"그러면 뒤져. 다른 놈들은 그렇다 쳐도 넌 안 돼."


진심으로 씁쓸하다는 한숨이 흘러나왔다.


"절대 안 그래. 확인시켜줄 수 있어."


찢어버리면 그만인 계약서 같지도 않은 계약서에, 어디까지나 말 뿐이다. 속을 모르겠는 놈이 그렇게 말해봐야 안 믿긴다.


내 표정에 드러난 불신을 감지하고, 남자는 헛기침을 한 뒤에 양팔을 벌렸다.


다가와서 안기라는 듯이.


"내가 알고있는 네 이야기까지 이용할 생각은 없어. 나도 내가 쓰레기인 것은 잘 알고 있지만, 그렇게까지 쓰레기는 아니야."


"뭐하는 거야?"

"안겨."

"미쳤어?"

"안 미쳤어. 자, 빨리."


도대체 뭘하자는 건지 감을 못잡고 있자, 남자는 맥빠진 얼굴을 보였다가 강조하듯 뻗은 양팔에 힘을 넣었다.


"힌트는, 네가 클럽의 사장을 주인님이라 부르던 때야. 그때 만났을 때, 네가 말한 게 있어."


"…"


"크흠. 그러니까, 나는 기억하고 있어."


"별걸, 다 기억하고 있네."


"너에 대해 모두 알고 있어. 그걸로 됐잖아."


몇 분이 지나도 굳건한 걸 보니 남자는 물러날 생각도, 보내줄 생각도 없다. 계약의 마무리에 반드시 필요한 과정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는 수 없어서, 팬텀을 집어넣고 남자에게 다가갔다.


남자의 명치 부근에 머리부터 들이받듯 댔다. 그냥은 닿지 않아서 살짝 발돋움을 해야했다. 키가 쓸데없이 크다. 


남자가 '윽…'하고 막힌 소리를 내며 주춤거렸다. 나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공격적으로 남자의 등에 팔을 둘렀다.


"다녀왔어요. 폐하."


품에서 베이비파우더 향이 난다. 

폐하가 생각나는, 폐하는 쓰지 않던.


어깨가 감싸인다.

손길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와. 아르망."


이리하여 그는 나의 폐하가 되었다.


하지만 그간의 악감정이 사라졌다거나, 갑자기 남자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눈에 띄게 바뀌었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바뀐 것은 어디까지나 호칭 정도였고, 안겨있는 이 순간에도, 언젠가 내가 저세상으로 가기 전에는 반드시 이 남자를, 폐하를 죽여버리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폐하도 같았을 것이다. 슬쩍 확인했던 폐하의 얼굴에는, 앞으로 나를 굴릴 생각에 어쩔 줄 모르겠다는 기분 나쁜 눈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 * *




안녕하세요 글싸개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취향에 안 맞으시면 그냥 뒤로가기 눌러주세요.

저도 악담 듣기 싫습니다. 상처 받아요.

저 쓰고 싶은 거 다 쓰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제목에 굳이 사심이라고 붙여놓은 거고요.

이런저런 소리 듣는다면 완결은 내고 듣고 싶습니다. 


어쨌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새해되자마자 바빠져서 다시 늦게 올리게 됐습니다.

읽어주시는 분들 위해서 다시 빨리빨리 써보도록 할게요.


오탈자를 발견하신 경우 댓글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