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밝았다.


얄궂게도, 새해 첫 일출을 같이 봐주지는 못할 망정 그는 잠에 들어있었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사람이라니까."


그녀는 웃었다.


그가 옆에 있는게 너무나도 기뻐서.


떠오르는 태양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짙은 주홍으로 물들였다. 그녀는 지금의 광경을 영원히 머릿속에 새기겠다는 양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슬쩍, 자고 있는 그를 바라본 그녀는 말했다.


"새해 복 많이 받아, 달링."


자고있는 그를 따라서, 그녀는 살포시 눈을 감았다.





세상이 멸망했다. 운석이 공룡을 멸망시킨 것과 비슷한 상황이였다. 옛날에는 쿄헤이에서 그렇게나 씨부려대던 빛의 심판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으나, 쿄헤이에 돈을 갖다 바치던 유명인사가 구더기들의 아늑한 쉼터가 된 꼴을 두 눈으로 목격한 이후로 그 생각도 접었다.


난 기부 안했거든. 근데 살아있잖아.


멸망 초기에는 창작물에서 으레 봤듯이, 살아남은 생존자끼리의 투쟁이 시작되었다. 고작 콩 통조림 한 캔을 위해 서로를 죽이기도 했다. 살아있는 아이를 뜯어먹기도 했다. 힘을 가진 이가 무고한 여인들을 범하고 다니기도 하였다. 아니면 멀쩡히 살아가던 생존자 그룹이 철충에게 들켜 와해되기도 했다.


그리고 힙노스 병이 세상에 도래했다.


악인, 선인, 무능한 자, 유능한 자, 남자, 여자, 어른, 아이. 원인모를 병은 만인의 목숨을 평등히 앗아갔다.


그러다보니 세상엔 이제 정말 운 좋은 소수의 사람만 남아있었다. 어쩌면 내가 마지막일지도 모르고. 확인할 방법은 없으니,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적어도 나같은 사람이 인류의 마지막 생존자는 아니겠지.


뭐 그런 생각을 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먹을 것들을 한번에 왕창 가져오고, 쥐죽은듯 숨어 야금야금 처먹다가, 다먹으면 다시 나가고.


생각해보니 멸망 전과 딱히 다르진 않은듯 했다. 그저 근무지가 회사에서 폐허로 바뀌었을 뿐.


그러던 어느날이였다.


"오."


"..............인, 간............?"


오늘도 식량을 위해 하릴없이 돌아다니던 날. 나는 상처입은 암사자 한 마리를 만났다.


세간에 알려진 암사자의 이름은 레오나. 몸에 차가운 피가 흐르는 북방의 여제.


오른쪽 눈을 잃고, 왼쪽 손을 잃은 여인. 뒤에 걸치고 있던 코트는 어디갔는지, 다 찢어진 제복을 입은 그녀는 길바닥에 엎어진채 나를 올려다봤다. 푸석푸석한 금발, 탁한 은색 눈동자.


북방의 무너진 여제. 그게 내가 그녀를 보고서 처음으로 느낀 감상이였다.





나는 고민 끝에 바닥에 널브러진 철혈의 레오나를 거처에 끌고 들어왔다. 그녀는 인, 간? 고따위 한 마디를 내뱉고는 엎어져 기절했기 때문에, 그녀의 의사는 중요하지 않았다.


사실 그녀가 깨어 있었어도 별반 다를바 없었을것이다. 철혈의 레오나는 바이오로이드였고, 바이오로이드는 인간의 편의성을 위해 만들어진 물건이다. 연필을 쓸때 연필의 의사를 묻지 않는 것처럼, 나는 그녀를 데리고 왔다.


상처투성이로 엎어져있던 철혈의 레오나가 불쌍했다거나, 어떻게든 그녀를 구해주고 싶었다거나, 그런건 아니였다. 들은 바로는, 철혈의 레오나는 최고급 군용 개체였다. 비록 그녀가 평균적인 최고급 개체에 비해 전투력이 떨어진다지만, 그래도 브라우니 1 개체만도 못한 나보다는 피지컬적으로 뛰어날 것이다.


나는 진심으로, 그녀를 필요성에 의해 가져왔다. 내 안전을 위해, 전투능력이 버러지라 그게 힘들면 짐꾼으로라도 쓰기 위해서.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야."


".................."


"어휴, 됐다. 그냥 거기 있다가 굶어 뒤질 것 같으면 알아서 나가 뒤져라."


나는 우리 어머니를 걸고 말하건대, 철혈의 레오나가 내게 쓸만한 도구이길 빌며 가져온 것이다. 저 년이 방구석에서 분위기만 썩창내는 병신년인줄 알았으면, 나는 그냥 저게 길바닥에서 뒤지도록 내버려뒀을 것이다. 그러다가 며칠 후에 그 자리에 뒤져있으면 뗄감으로 쓸 옷만 벗겨서 가져왔겠지.


저것은 일어나자마자 내 거처를 다급하게 둘러보더니, 내게 기밀문서로 보이는 무언가를 조심스레 건넸다. 그걸로 본인의 할일은 다 끝마쳤다는 양. 그러나 당연히도 나는 암구호로 떡칠된 문서를 알아보지 못했고, 철혈의 레오나는 내가 일반인이란 소릴 들은 이후로 쭉 저 상태다.


건방지게도 저 씹새끼는 인간에 대한 명령거부권조차 존재해서, 당당하게 내 앞에서 직무유기를 처 할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벌써 철혈의 레오나를 데려온지 3일째 되는 날이다.


그녀는 애초에 쇠악해져 있었고, 그렇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뒤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진지하게 그녀를 식용으로써 고민했다. 옛날에 인간이 건재헀을 시절에는 바이오로이드를 순전히 재미삼아 뜯어먹는걸 즐기는 부류도 있다고 들었다. 어쩌면 바이오로이드는 구워먹으면 꽤 맛있는게 아닐까? 적어도 식량이 떨어졌을때 어떻게든 '사용' 할 수 있겠지.


바이오로이드는 인간에게 봉사하기 위해 태어난 도구에 불과하며, 그렇기에 현재 제 역할을 다하지 않고 있는 그녀는 토막나 저장되어 있다가 식량이 떨어졌을때 내게 먹힘으로써 맡은 바 소임을 완수하는 것이다. 그렇게 배워왔고 그렇게 보아온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리 할 것이라 생각했다.


"얘."


"................"


"얘, 거기 금발 모질아."


"................."


"꼬라지 보니 곧 뒤질 거 같은데, 뒤지기 싫으면 주는거 처먹으렴."


"................"


"실어증 있냐? 말도 못하면서 지휘는 어떻게 한거야. 입여는 법 몰라?"


".........날, 내. 버려, 둬."


"아니네, 아가리 털 줄은 아는구나. 주둥이 벌려서 말 할 줄 알면 처먹을 줄도 알겠죠? 자, 이거 처먹으렴."


"..............."


"뭐 씨발, 비행기 해줘야 먹냐?"


레오나가 우리 집에 온지 일주일이 지났을 때였다.


나는 인조육 통조림을 하나 까서 그녀에게 건넸다. 개십련, 저거 나름 특식인데.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냥, 좀. 어, 그랬다.


레오나는 내게 문서를 돌려받은 이후로 한시도 손에서 그걸 뗴어놓은 적이 없었다. 달랑 하나 남은 손으로 그걸 계속해서 꼭 쥐고 있었다. 마치 놓치면 안된다는 양. 당연히 손이 하난데 그 손으로 쓸모없는 종이쪼가리나 쥐고 있으니, 저 년이 밥은 처먹을 수 있나 궁금할 따름이였다. 다만 쩍쩍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은 하니, 밥도 먹을줄 알겠거니 했다.


저랬는데도 안먹으면 그냥 뒤지는거고.


근데 또 뒤지기는 싫었는지 잘 처먹었다. 먹는 모습을 본건 아니고, 그냥 자고 일어나면 그녀 옆에 놓아있는 빈 깡통을 보고 어련히 잘 먹었겠지 싶었다.


그렇게 한 달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나는 이틀에 한 번, 그녀에게 통조림을 건넸고, 레오나는 내가 자는 사이 그걸 먹고 다시 찐따마냥 구석에 처박혀있었다. 왜 이틀에 한 번이냐면, 레오나에게 주는 통조림은 하나같이 칼로리가 높았고, 그녀는 움직일 일이 없으니 그 정도로 충분할 것이라는 판단이였다. 


그런 삶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였다.


"이제 그만 좀 해!"


내가 레오나의 앞에 깐 통조림을 놓자, 그녀는 내가 악에 받쳐 소리쳤다. 저 시발련은 내가 준 통조림과 물로 체력을 비축해서 처음 하는 일이 나한테 지랄하는 일이다. 북방의 암사자가 그냥 금빛 개새끼로 변하는 순간이였다.


그러나 나는 얌전히 다음에 레오나가 할 말을 기다렸다.


나는 총 세번의 레오나의 지랄을 겪었다. 그녀가 일어났을때 한번, 문서를 건네받고서 한번, 지금 한번. 세 번이면 짐승도 학습을 한다. 다만 나는 짐승보다 우월한 존재였고, 무슨 말이냐면 레오나의 지랄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는 소리다. 저 앙칼진 십새끼는 분명 다음에 할 말이 남아있을 것이다. 거기까지 계산한 나는 얌전히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왜 자꾸 나한테 식량을 주는거야?!"


거 봐. 아니 근데 저새끼가 줘도 지랄이네?


"뭐 주는거 다 깨끗하게 처먹어놓고 말을 왜 고따구로 해?"


"그러니까 주지 말라고 하는거잖아! 그냥 죽게 내버려 둬!"


"뭐, 죽고 싶어? 그럼 나가. 지금 당장 나가서 지나가는 철충한테 개기면 깔끔하게 죽을텐데 왜 나한테 지랄이니?"


레오나가 입을 다물었다. 나는 마침내 지휘관급 군용 개체를 말로 논파할 수준까지 성장한 것이다. 


"그냥 죽고 싶은데 나가 죽을 깡이 없으니까 나한테 꼬장 부리는거잖아, 내 말 틀려?"


"............그래, 당신 말이 맞아. 알면, 알면 나를 내버려두면 되잖아......! 애초에 당신이야말로 왜 갑자기 이런 짓을 하는거야?! 그냥 처음에 그랬던 것 처럼, 나 같은 바이오로이드는 없다고 생각하고 내버려 두면되잖아!"


이번엔 내가 입을 다물 차례였다. 생각해보면 맞는 말이다. 주는대로 받아먹고 떽떽대는 년따위, 내가 알아서 무시하면 굶어뒤지겠지. 그럼 끝날 일이다.


"음."


목구멍이 꽉 막힌 듯 말이 나오지 않았다. 병신같이 한참을 우물거리고나서야, 나는 입을 열 수 있었다.


"..........지난번에, 네가 온지 얼마  안 지났을때, 먹을걸 구하러 가다가 타죽은 시체 두 구를 봤어."


그녀를 무시하면 끝날 일인데,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난 둘 다 인간인줄 알았어. 그런데 자세히 보니까, 옆에 타죽은 여자는 메이드복을 입고 있더라고. 그때 깨달았지. 아, 저건 인간이 아니라 콘스탄챠 모델이구나."


바이오로이드와 인간은 다르다. 그건 변하지 않는 대명제였다. 바이오로이드는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고, 인간의 감정을 지니고 있지만, 도구다. 나는 그렇게 배워왔으며, 한 치의 의심도 가져본 적이 없었다. 1+1이 왜 2인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인간은 없으니까.


그렇지만 그 시체를 보고, 의문을 가져버렸다. 정말 다른가? 인간과 바이오로이드를 구분짓는건 뭐지?


인간의 말에 복종하는 것? 인간도 다른 인간의 말에 복종한다.


그렇다면 강제성? 인간도 말 들을때까지 두드려패면 말 잘 듣는다. 그러면 인간은 바이오로이드가 되는 것인가?


뇌에 박힌 모듈? 인간도 박을 수 있다. 오리진 더스트? 인간도 못 쓸건 없다.


고민은 깊어져만 갔다. 그렇게 생각의 생각을 거듭하던 차였다. 과거의 여러 기억이 범람하는 홍수처럼 나를 집어삼켰다.


회사일에 지칠때면, 테마파크로 가서 키르케들에게 화를 풀었다. 내 집을 관리해주던 콘스탄챠에겐 그 흔한 칭찬 한 마디 해준 적 없고, 나를 지키기 위해 앞에 선 하치코를 당연하다는듯이 버렸다.


그 외에도, 인간에게 해선 안될 수많은 행동들을 바이오로이드들에게 저질렀다.


왜냐하면 그 년들은 바이오로이드니까. 인간의 도구니까. 바이오로이드는 인간과 다르니까.


그런데 시체를 본 그 날, 그 대명제가 흔들렸다.


숨이 턱 막혀왔다.


그래서 나는, 그 날부터 레오나를 유심히 관찰했다. 어떻게 해서든 그녀가, 바이오로이드가 인간과 다른 점을 찾기 위해서.


레오나는 늘 무릎에 얼굴 묻고있어 표정을 볼 수 없었지만, 내가 침대 위에서 눈을 감을때면 언제나 미약한 흐느낌이 들려왔다. 그렇게 울다가 잠이 들면, 진즉 죽어버린 대원들의 이름을 잠결에 중얼거렸다.  캔을 따서 건네주면 그녀는 조금 탐욕이 담긴 눈으로 캔을 쳐다봤고, 슬픈 생각을 하면 울었으며, 내가 아니꼽게 말하면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찾아봐도, 레오나는 인간과 다를게 없었다.


그렇게 대명제는 깨졌다. 둑이 깨지자 바닷물이 범람했고, 나는 범람하는 물에 서서히 잠겨가고 있었다. 바닷물의 이름은 죄책감이였다.


그런 내 앞에서, 레오나는 점점 말라 죽어갔다.


그걸 도저히 보기만 할 수 없었다.


어쩌면, 레오나가 인간과 다를 바 없다는걸 꺠달은 순간부터 당연히 인간에게 있어야할 존중이 피어난 것일지도 모르지. 아니면 내가 막 대했던 바이오로이드들에게 쌓인 죄책감을 그녀에게 풀고 있는 것일지도.


"그냥, 그렇다고."


정적이 거처 안을 가득 매웠다. 왠지 모르게 피곤한 기분이였다. 오늘은 별로 밖에 나가고 싶지 않아서 침대에 누웠다. 통조림이 야금야금 없어지는 소리만이 귓가에 들려왔다.





레오나는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지휘관은 언제나 마지막에 죽어야한다. 지휘관은 지휘를 해야하며, 지휘관이 죽으면 조직이 와해되기에, 지휘관은 지휘할 부대원이 남아있지 않을때까지 죽으면 아니된다.


그렇게 레오나는 추하게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다.


하늘에서 낙하한 샌드걸의 시체는 터져버려 살점 조각들로 전락했다. 베라는 전신에 총알구멍이 난채 죽었다. 그렘린은 철충에 감염된 포탑에 맞아 머리통이 날아갔다. 


발키리는 반으로 찢겨 죽었다. 님프는 안드바리를 지키다가 죽었고, 안드바리는 끝끝내 목숨을 바쳐 레오나가 살아남을 수 있을 만큼의 보급품을 지켜내고 죽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어렸던 알비스의 시체까지 즈려 밟고 넘어가, 작전기지에 도달했다.


시체와 잔해물만 남은 작전기지에, 수많은 동료들의 피로 쓰여진 기밀 문서를 들고서.


인정할 수 없었다. 대도시로 가야했다. 대도시로 가서, 높으신 분을 만나 기밀정보를 전달해야했다.


자매들의 피를 그저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 이따위 종이쪼가리에 자매들 모두의 생명만큼의 가치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식량을 아끼고 아껴서, 발이 틀때까지 걸어서 도시에 도착했고, 인간을 만났다.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한 인간을.


높으신 분들은 진즉에 어딘가로 도망치고 없었다. 그리고 그곳의 위치를 알 방법도, 찾아갈 힘도, 레오나에게는 없었다.


그 사실을, 그 인간의 거처에서 레오나는 깨달았다.


제 꼴을 봐라. 자매들의 피를 마시고 뼈를 밟으며, 육신을 뜯어먹고 구차하고 비굴하며 비열하게 삶을 이어온 주제에, 임무의 달성조차 하지 못했다.


결국 자매들의 죽음은 개죽음이였고, 자매들의 혈서는 한낱 종이쪼가리로 전락했으며, 레오나는 한쪽 손을 잃은 퇴역군인이 되었다.


목숨을 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레오나의 목숨은 수많은 자매들의 목숨으로 떠받들여지고 있는 것이라서, 자결조차 그녀의 것이 아니였다.


그래서 레오나는 굶어죽기로 했다. 식량을 구할 힘이 없다, 어차피 저 인간에게 착취당하다가 버려지겠지, 식량이 다 떨어졌을 수 도 있다. 


핑계는 많았다. 그냥 여기서, 미련밖에 되지 않은 종이뭉치를 한 손에 꼭 쥐고, 자매들과의 추억을 회상하며 조용히 생을 마감하자.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는 레오나의 삶의 이유였다. 추악한 인간들, 인간성을 잃은 지휘부. 떠받들 가치가 없는 무능한 존재들 사이에서, 인간을 떠받들기 위해 만들어진 북방의 암사자는 제 자매들을 지키기 위해 살고자 했다.


자매들을 지키기 위해선 임무를 달성해야 했고, 결국 철혈의 레오나는 자매들을 죽게 내버려둔채 임무를 실패했다.


그래서 죽기로 했다.


고려해보니, 살아갈 이유보다 죽을 이유가 더 많아서. 레오나는 죽기로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윤기있던 피부와 머리카락은 푸석해지고, 뱃속에서 굶주린 위장이 아우성쳤다. 눈이 점점 감겨오고, 발할라로 떠난 자매들이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 곧 있으면 발할라로 갈 수 있어. 아니, 가지 못하려나. 이런 불명예스런 죽음으론. 하지만 괜찮아. 지옥으로 떨어져도, 위를 올려다보면 발할라에 지내고 있을 너희가 보일테니까.


그러나 레오나는 발할라로도, 지옥으로도 가지 못했다.


"얘."


"................"


"얘, 거기 금발 모질아."


"................."


"꼬라지 보니 곧 뒤질 거 같은데, 뒤지기 싫으면 주는거 처먹으렴."


"................"


"실어증 있냐? 말도 못하면서 지휘는 어떻게 한거야. 입여는 법 몰라?"


".........날, 내. 버려, 둬."


"아니네, 아가리 털 줄은 아는구나. 주둥이 벌려서 말 할 줄 알면 처먹을 줄도 알겠죠? 자, 이거 처먹으렴."


"..............."


"뭐 씨발, 비행기 해줘?"


발할라로 향하려는 레오나를 억지로 현실에 끌어내린 남성의 탓이였다. 남성은 경박한 말투와 과격한 욕설로 레오나를 깨웠다. 날카로운 눈초리로 레오나를 내려다보며, 인조육 통조림을 그녀에게 건넸다.


레오나가 마지막으로 본 인간은 그녀가 마음대로 죽는 것 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무시하려했다. 한계까지 내몰린 위장이 살아남기 위한 에너지를 보고 아우성 치는 것도, 극한의 공복에 시달려 예민해진 후각에 짭잘하고 기름진 인조육의 냄새가 기어들어오는 것도,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 남은 손으로 쥐고 있는 쓸모없는 종이쪼가리가, 미련 덩어리가, 자매들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유일한 흔적이, 그녀에게 죽지 말라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또다시 구차하게 삶을 연명했다.


저 인간 남성의 변덕이겠지. 인간은 무릇 그런 존재니까. 바이오로이드는 인간과 다르니까. 바이오로이드는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도구니까. 도구를 불쌍히 여기는 인간은 없으니까.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게 하루가 되고, 일주일이 되고, 한 달이 되자, 그게 단순한 변덕이 아님을 깨달았다.


화가 났다.


당신이 뭔데, 내가 죽는 것 조차 방해해?


마구잡이로 소리쳤다. 그 귀한 식량을 나눠준 이에게 엉터리 논리로 마구잡이로 소리쳐댔다. 그렇게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고 그에게 아득바득 대들다가, 마침내 그와 시선을 마주하고는 깨달았다.


레오나는 그의 거처에 들어온지 한 달만에 비로소, 제대로 그와 얼굴을 마주했다.


날카로운 눈. 짧게 친 검은 머리. 적당히 다부진 체형. 조금 사납게 생긴 인간.


다만 그의 눈은 레오나를 향한 정체모를 일렁이는 감정을 품고 있었다.


"..........지난번에, 네가 온지 얼마  안 지났을때, 먹을걸 구하러 가다가 타죽은 시체 두 구를 봤어."


그는 고해성사하듯, 레오나에게 말했다.


인간 남성은, 바이오로이드에게, 너희도 인간과 같지 않냐고. 인간이 인간을 도운 것 뿐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죄책감이 담겨있었다.


그는 굉장히 어이없는 이유로, 인간은 바이오로이드와 같다고 생각하게 된 듯 했다.


자매들과 함께하던 시절, 그녀가 정말이나 보고싶어하던 종류의 사람이였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샌드걸은 같이 차를 마셔보고 싶다고 했다. 베라는 수다를 떨고 싶다고 했고, 그렘린은 탑돌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싶다고 했다. 님프는 펑펑 울것 같다고 했고, 안드바리는 떡볶이를 같이 먹고 싶다고 했다. 알비스는 초코바를 잔뜩 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모두가 죽고 나서야, 저 남자는 바이오로이드를 인간으로 봐주었다.


샌드걸은 더 이상 차를 마실 수 없고, 베라는 수다를 떨 수 없고, 그렘린은 탑돌이에게 죽음을 맞이했으며, 님프는 울지 못하게 됐고, 안드바리와 알비스는 먹을 것을 먹을수도, 줄 수도 없게 되었는데.


왜 당신은 이제야 나타난거야.


말도 안되는 억지 논리의 비약이였다. 그러나 위태로웠던 레오나에게는 합당하게 느껴지는 분노였다.


그렇게 그에게 당장이라도 총을 겨누려던 순간, 그의 표정이 보였다.


어디선가 본 표정이다. 지금도 보이는 표정이다.


그의 표정은, 그의 눈동자에 비친 레오나의 표정과 똑같았다.


아.


레오나의 눈망울에서도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렁거렸다.


더 이상 그에게 화를 낼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그는 지친 듯 침대로 향했고, 캔 한 통을 깔끔하게 비운 레오나는 제대로 자리에 누워 잠을 청했다.


멸망한 세상에서, 그는 죽을 이유가 생겼고, 레오나는 살 이유를 잃었다.


그것 참 아이러니한 일이네.


레오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일렁이던 감정의 이름은 동질감이였다.


그렇게 또 다시 시간이 지났다.


그 날 이후로, 레오나의 일상에는 자그마한 변화가 생겼다.


"왔어?"


"오냐, 왔다."


"어서와."


"다녀왔다."


첫째로는 그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처음 시작은 그냥, 잘 다녀와, 뭐 그 정도.


생각해보니 환자랍시고 염치없이 밥만 축내는 주제에, 그와 대화조차 안하지 않았나.


그래서 인사라도 하기로 생각했다.


".........잘 갔다와."


"? 뭐야 너 미쳤냐?"


"뭐어?!"


"왜 갑자기 인사해?"


"당연한걸 하는 것 뿐이야."


"왜 여태까진 안했대, 그럼."


"당신.......... 원래 그렇게 말투가 기분나빠?!"


"그런 편이야."


"야!!!!"


........다만 대화의 물꼬를 트게 되는 계기는 딱히 로맨틱한게 아니였지만.


둘째로 달라진건, 그가 없어진 동안 거처를 청소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어느날 갑자기 그는 침대를 끌고 오더니, 니꺼 하라며 집어던졌다. 핑크핑크 소녀소녀한 침대였다.


"오다 주웠다."


"다시 갖다놔, 당장."


"뭐가 문젠데?!"


"그러게, 당신은 뭐가 문젤까."


갑자기 침대같이 큼지막한 가구가 하나 더 느니 집이 어수선해졌고, 레오나는 그게 거슬렸다. 거슬리는건 못참는 레오나는 가구배치를 정돈했고, 그러다보니 청소까지 하게 되었다.


언제나 붙잡고있던 종이뭉치들은 빗자루 잡을 손이 없어서 어딘가에 두었다. 지금은 어디있는지도 가물가물하다.


........레오나의 침대는 그의 침대 바로 옆에 자리했다. 그냥, 별다른 이유는 없고, 그게 미관상 보기 좋으니까. 그렇다고, 그냥.


그런 생활의 반복.


생활은 반복되면 일상의 일부가 된다.


멸망한 세상에서, 레오나는 그 어느떄보다 느긋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아무런 특별한 점이 없는 일상. 그에게 다녀오라고 말하고, 그를 기다리다가, 그와 밥을 먹고, 그와 이야기하며, 그의 옆에서 잠에 드는 일상.


가끔, 어쩌면 자주, 죽어버린 자매들이 생각나긴 하지만, 이제 레오나는 그들을 후회와 슬픔이 아닌 추억으로써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최후의 최후에서야 북방의 암사자에게 들어온, 따뜻하고 포근한, 소중한 일상이 계속 되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진.


그 날은 그가 유독 늦었다.


그는 밤에 밖에 돌아다니는걸 병적으로 싫어했다. 시야가 좁아진다는 이유로. 지난번에 밤에 깝치다가 옆구리에 총알 박힌 이유로 안한댄다. 그런 그가 밖이 어두컴컴해졌는데도 돌아오지 않았다.


까득, 까드득. 레오나는 하릴없이 손톱을 물어뜯었다.


어쩌면, 오다가 철충에게 발각당해 죽은걸지도.


어쩌면, 레오나를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 그렇겠지. 임무 하나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실패자다. 이빨빠진 암사자, 상처투성이 여제. 절대로 호감가는 수식어는 아니지.


어쩌면, 그가 그녀를 버렸을지도 모른다.


까득, 까드득.


뭘 그렇게 침울해해, 레오나. 당연한거야. 너는 쓸모 없고, 무능해. 그는 언제나 식량을 너에게 갖다 바치고.


까드득, 까드드득.


이 무능한 년. 뭐라도 했어야지. 네가 그러니까 버려지는거야. 여태까지 그의 호의에만 기대서 살아온 주제에, 말투도 그딴 식으로밖에 못했잖아.


으득, 으드드득───다녀왔──까드득, 까득.


그는 결국 널 버릴 운명이였어. 네가 그딴식으로 밖에 못하니까. 애초에 그에게 왜 그렇게 쌀쌀맞게 대한거야? 너는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길레────


"야, 야! 너 뭐해, 이년아!"


아.


투박하고 큼지막한 손이 피투성이가 된 레오나의 엄지 손가락을 감싸고 있었다.


조금의 땀냄새가 섞인, 익숙한 그의 체취.


레오나는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짜증이 났다. 당신이 한 말은 좀 지키라고. 왜 이렇게 늦게 들어와? 등등, 하고 싶은 말이 무척 많았다. 또 퉁명스럽게 튀어나오려는 말에 다시 한번 짜증이 났다.


"..............어?"


그리고 그런 생각은, 그의 머리에 굳은 핏자국을 보자마자 사라졌다. 정확히 말하면, 머리가 새하얗게 물들어서 아무 것도 생각 할 수 없었다.


"...........뭐야?"


".......뭐가."


"머리, 왜, 왜 그러냐고."


아, 따가. 레오나가 뻗은 손이 그의 환부에 닿자 들려온 목소리. 레오나는 황급히 손을 뒤로 뺐다. 머릿속을 두 가지 감정이 지배했다. 그에 대한 걱정과, 그를 저렇게 만든 존재를 찢어죽이고 싶다는 울분. 그게 생존자든, 철충이든, 설령 그게 그녀가 가져온 정보를 이해할 수 있는 몇몇 높은 지위의 인간이라고 해도.


"별거 아니야, 그냥, 좀......... 졸다가 대가리 박았어."


뭐?


"졸아? 존다고? 말이 돼? 당신 뭐 병이라도───"


아. 병.


레오나의 뇌리에 한 병명이 스쳤다.


있잖아, 그런 병이.


"휩, 노스............"


".........그런 거 아니거든, 아직 쌩쌩해."


순간 그의 눈이 새차게 떨렸다.


언제부터? 그럼 병에 걸린지는 얼마나 된건데? 내가 그를 만나기 전부터인가?


그 날, 레오나는 깨달았다.


레오나에게 굴러들어온 사랑스런 일상은, 반드시 종말이 찾아오는 잔인하기 짝이 없는 행복이라는 사실을.


그 이후로, 레오나의 일상에는 조금 더 변화가 생겼다.


"미쳤니?"


"뭐가?"


"손 한 짝 없는 애가 어딜 싸돌아다니려고 해?"


"하, 내가 우스워, 당신? 내가 그렇게 호락호락해 보이나봐."


"어, 야밤에 남의 손 만지작대면서 웃고있는거 보면 좀 웃겨."


"뭐어?! 그걸 봤어?!"


"그럼 손을 그렇게 쪼물딱대는데 안깨니?"


"이, 이이익........!"


"뭐 그럴 수 있지, 한참 그런게 고플 나이긴 해."


"야아!!!!"


그와 함께 움직이게 되었다. 그는 레오나에게 거세게 반발했지만, 한 손으로 그를 탈탈 털고나니 납득하더라. 레오나는 그를 조금, 아주 조금 특별하게 보고 있었지만, 객관적으로 봤을때 그의 전투능력은 1 브라우니 미만이였다.


"어휴, 오랑우탄 같은 년."


"뭐라 그랬어, 지금?"


"어휴, 오랑우탄 같은 년!!!!!!!!!!!!!!!"


"안 닥쳐?!!?!"


레오나가 그와 동행한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로는 그를 혼자 놔두기 불안해서. 지난번에는 운좋게 머리만 다치고 끝났다지만, 만약 잠든 사이에 철충과 조우한다면? 끔찍한 일이였다.


둘째로는 그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였다. 끝이 정해져있는 행복 속에서, 레오나는 최대한 그 행복을 즐기기로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무턱대고 그녀가 따라 나선건 아니였다.


철혈의 레오나는 신속의 칸과의 라이벌 관계다.


신속의 칸은 뛰어난 지휘능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특유의 무지막지한 전투능력으로 전장을 헤집으며 지휘의 필요성을 상실시킨다.


즉, 지휘관으로써 유명한 레오나는, 무려 그 신속의 칸의 전투력과 비견되는 지휘능력이 있다는 소리다.


"어때, 내가 신속의 칸보다 낫지?"


"엉? 그게 누군데."


"당신, 신속의 칸을 몰라?!"


"엉, 난 너밖에 몰라. 나머진 다 나 사는 곳이랑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 그래?! 큼, 크흠, 좋아, 그거면 됐어."


그녀는 폐허가 된 도시의 지형구조, 생존자가 있을 가능성, 철충이 출몰할 가능성을 모두 조합해서, 그에게 가장 안전하고 최적인 루트를 구사할 수 있었다.


"어때. 내가 바로 북방의 암사자, 철혈의 레오나야."


"이야, 확실히 편해지긴 했어."


"그렇지? 조금 더 나를 칭찬해도 좋아."


"근데 조금만 더 빨리 해주지 그랬냐, 그럼."


"으그그극..........."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걱정과 위험이 사라지는건 아니였다.


그는 점점 기절하듯 잠에 빠지는 빈도가 늘어나고 있었다.


오늘도 그런 날이였다.


조금 큰 건물 안에서, 레오나는 잠에 빠진 그와 함께 있었다.


무릎 위에 행복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조금 까슬까슬한 머리카락이 무릎을 간지럽혔다. 레오나는 그가 눈을 감고 잠에 빠져 있으면, 이렇게 무릎에 그의 머리를 올려놓고 앞머릴 정리해주곤 했다.


언제나 악몽을 꾸던 그는, 그녀가 이렇게 하고 있으면 조금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정리라고 할 것도 없었다. 그는 앞머리를 언제나 짧게 잘랐고, 그냥 손끝에 감기는 사락거리는 감촉이 마음에 든 레오나가 만지작거리고 있을 뿐이였다.


레오나는 멍하니 잠든 그를 바라보았다.


가만히 누워 자고 있는 그는 평소의 날카로운 눈매와는 다르게, 고요했다. 물론 이것도 충분히 멋있긴 하다. 아니지, 이게 아니라.


우리는 어떤 관계일까.


레오나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그와 레오나는 동거하는 사이다. 바로 옆에서 같이 숙면을 취하고, 언제 어디서나 같이 다닌다. 그러나 스킨쉽은 손을 잡는 것까지만. 그것도 레오나가 밤에 슬쩍 잡는 것 뿐이다.


레오나는 아직도 처음 그의 손을 잡은날 터질듯이 뛰던 심장을 기억한다.


그래, 인정하자. 인정해야했다.


레오나는 초조해하고 있었다. 이미 그에게 빠질만큼 빠져버렸다.


동질감에 불과헀던 그것은 몸집을 크게 부풀려 어느샌가 레오나를 집어삼켰다.


그래서 레오나는 불안했다.


당신도 나와 똑같이 생각할까.


레오나는 첫만남을 생각했다.


꾀줴줴한 몰골로 길바닥에 엎어진채 그를 만났다.


일어나자마자 그에게 문서를 건네고, 그가 문서를 못읽어내자 화를 냈다.


방구석에서 먹을 것만 축내다가, 그에게 화를 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지금.


'세상에. 레오나 이 미친년..........'


만약 레오나가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녀는 당장 돌아갔을 것이였다. 초췌한 몰골로 바닥에 엎어진 과거의 레오나를 억지로 일으켜 세워 세탁 한 뒤에 예쁘장한 옷으로 갈아입히고 그의 앞에 세워놨겠지.


그리고 그에게 말하는 것이다.


"뭐해."


응? 아냐, 이렇게 퉁명스럽게 말하지는 않을꺼야.


"뭔 생각을 그렇게 하냐고."


왜 더 퉁명스러워지는데? 생각하렴, 레오나. 옛날 티타임때 자매들이 뭐라고 했더라.


"자니?"


"그, 그건 전남친 멘트라고 베라가 그랬어!"


"? 어......... 음, 그러냐?"


"어?"


"왜?"


아, 젠장, 레오나.


"뭐해."


"무릎배게."


"오."


"좋아?"


"개좋은데?"


"후후."


"몸 돌려도 돼?"


"응? 불편해?"


"아니, 허벅지 사이에 코박죽하게."


"아, 안 돼."


"까비."


"오, 오늘 땀 흘리고 아직 안 씻었잖아."


"오히려 좋아."


"아, 쫌!"


그와 처음 만났을때와 비교하면, 무척이나 가식없고 친근한 대화였다. 그만한 시간이 흘렀고, 그것보다 큰 유대가 둘 사이에는 존재했다.


시시콜콜한 대화를 하며, 레오나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레오나를 올려다보았다. 서로의 시선이 교차했다. 레오나는 조금 더 고개를 숙였다.


사라락, 레오나의 길다란 금발이 깨어진 창문 너머로 스며드는 달빛을 가로막았다. 가을의 밀밭과도 같은 장막 속에서, 눈을 사로잡는 광원은 오직 서로의 눈 뿐이였다.


"..........아."


레오나가 막힌 숨을 토해내듯 눈을 크게 떴다. 조금 멍한 표정의 그가, 홀린듯 손을 뻗어 그녀의 뺨에 닿은 탓이였다.


"..........레오나."


".........당신."


"음."


그는 조금 뜸을 들였다. 레오나는 기다려 줄 수 있었다. 레오나는 완벽했지만, 그녀의 소중한 사람까지 완벽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음.


"........목욕할레?"


야 이 개새끼야.





인간이라는 종족의 멸종은 지구상의 많은 것을 바꿔놨다. 엄밀히 말하자면 내가 있으니까 멸종까진 아니긴 한데, 아무튼.


대표적인 예로는, 밤하늘이 무척이나 예뻐졌다는 것이다. 인간의 온갖 악질적인 자연파괴공작에서 벗어난 밤하늘은 이제 스스로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뽐내고 있었다.


그렇게 가만히 밤하늘을 올려다볼때면, 쏟아져내릴 듯한 밤하늘을 보고 있노라면, 무척이나 오묘한 기분이 들곤 하는 것이다.


그리고 혹시 그거 아나? 이렇게 인간이 감성에 젖을때 감성의 바다에서 끄집어내주는 가장 효과 확실한 도구가 있는데, 바로 통각이다.


아플때 감성 찾는 인간은 그냥 미친놈이다. 그리고 난 미친놈이 아니지.


무슨 뜻이냐면.


"나 뺨이 너무 아픈데, 이년아."


"..........자업자득이야."


때는 초겨울인데 볼따구에 단풍잎이 폈다. 그것도 존나 크게.


씨발.


"...........그래도 여기 되게 좋지 않아?"


"그건, 인정할게."


나와 레오나는, 오늘 탐색하러 왔던 건물의 최상층에 위치해 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원래 최상층으로 설계된 곳은 아니긴 한데, 윗부분이 통째로 날아가서 최상층이 되었다.


이 건물은 게임장, 식료품점, 옷가게, 보석점, 등등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유흥과 사치를 처박아놓은 욕망의 탑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온천이고.


자동적으로 지하수를 끌어오는 최고급 스파. 비록 지금은 노천탕이 되어버렸지만, 지금의 밤하늘을 생각하면 이게 훨씬 더 운치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절묘하게 뜯겨져 나간 온천탕 구석을 통해 온천수가 계속해서 낙하했다. 좁은 통로로 물이 새어나가는 소리는, 그것만으로도 이 절경에 묘한 안정감을 더해준다.


생존자 생활을 개시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시절, 우연히 찾게된 나만의 비밀기지였다.


"이제 나만의 비밀기지는 아니다마는."


"뭐?"


"별거 아냐."


우리 거처는 기본적으로 정수장치가 풀가동하고 있고, 물이 부족했던 경우는 딱히 없었다. 그래도 아껴서 나쁠건 없으니 욕조에 몸 담구는건 생각조차 하지 못했고, 레오나는 여성인 만큼 한번쯤 푹 씻고 싶을 것 같아서 데리고 왔다. 아마 골든정답인듯 하고.


"근데 표정이 왜그래?"


"당신, 여기 분위기랑 완전히 동떨어진 저 파라솔배드랑 테이블은 당신이 가져다 놓은거야?"


"어, 개쩔지 않니?"


"당신은 디자인적 시각이 정말로 부족하구나. 오드리 개체가 봤으면 심장마비로 즉사했을거야."


".......그렇게 안어울려?"


"동양식 디자인 배경에 서양풍 디자인 가구가 떡하니 놓여져 있으면 이상하지 않을거라고 진심으로 생각한거야?"


"동서양의 조화라는 말이 있지."


"우리는 피자에 김치를 얹어먹는걸 조화라고 하지 않아."


".........그정도야?"


"그래도, 봐줄게."


"건방지긴. 그 의기양양한 태도가 쏙 들어가게 해주마!"


콧대를 납작하게 눌러주지, 건방진 녀석.


내 완벽한 디자인에 불만을 표하던 레오나를 앉힌 나는 급하게 자리를 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까리하게 빛나는 서빙카트에 몇 가지 요리들을 싣고 돌아왔다.


"으응?"


서빙카트 위의 음식들에서 풍겨오는 맛있는 냄새에, 레오나는 반쯤 누워있던 몸을 다시 천천히 일으켜 세웠다. 저런걸 보면 어째 암사자 같기도 하고.


"와아......!"


그리고 이번에는 그 북방의 암사자, 레오나조차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겠지.


서빙카트 트레이 위에는 무려 멸망 이후에는 제대로 보지도 못했던 '요리'들이 그 자태를 뽐내고 있었으니까!


"이게 어디서 난거람......?"


"어차피 시간이 늦어서 오늘 여기서 자고 가기로 했으니까, 식량들도 챙길만큼 챙겼고, 마트에 있는 재료들로 힘좀 썼지."


"헤에, 이런 즉석요리들도 있었어?"


"뭔소리야, 당연히 직접 만든거지."


"그렇구나, 직접 만들었....... 잠깐, 뭐?"


"직접 만들었다고."


"........이걸? 당신이?"


"아니 이년이?"


떨리는 한 손으로 포크를 집은 레오나는 조심스럽게 파스타를 말아 입에 넣었다. 조막만한 입으로 오물오물 파스타를 씹어삼킨 레오나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와 음식을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말도 안 돼!"


"개쩔지?"


"진짜로, 말도 안돼."


"왜, 북방의 암사자 씨는 이런거 못하시나아?"


존나 못한다. 나는 아직도 레오나가 요리랍시고 인조육과 콩을 때려박아 섞은 무언가를 내놨을때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그, 그때는 재료가 이상했던 탓이야! 나도 잘할 수 있어!"


"정말?"


"..........앉아, 밥먹어."


"오냐."


그렇게 둘이서 조금 많이 호화로운 식사를 했다. 레오나의 뺨이 식탁 위의 조명을 받아 옅은 다홍색으로 빛났다. 레오나의 금발은 짙은 달빛을 받아 황홀하게 빛났다. 음식을 먹을때마다 그녀의 눈이 반짝였고, 바쁘게 움직이는 입이, 매력적이였다.


그래, 인정해야했다. 레오나는 무척이나 매력적인 여자였다. 나같은 얼간이는 눈치채지도 못한 순간 사랑에 빠질 만큼.


북방의 암사자에게 완벽히 사냥당한 것이다.


"후우, 잘 먹었어."


"신나서 막 먹어놓고 이제와서 우아하게 입 닦아봤자 별로......"


"당신은, 꼭, 한 마디가, 많아!"


"아, 아야! 아, 아, 아!"


배부른 암사자가 된 레오나의 무차별적인 폭력이 나를 덮쳤다.


그거 알고 있나? 암사자는 사람을 찢는다. 알고싶지 않은 정보였는데.


".............음."


".............."


"저, 그, 뭐냐. 씻어라."


조금 이례적인 분위기의 침묵 속에서, 나와 레오나는 눈이 마주칠때마다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평소와는 색다른 장소에서, 달빛을 받으며 평소와는 다른 식사를 했다. 그러다보니 아무래도, 음, 조금 묘한 분위기가 되는건 당연한 일이였다.


풋풋한 급식들이나 할 짓인데, 유감스럽게도 나는 풋풋할 나이는 애저녁에 지나버렸다.


"나는 가있을게, 씻고 와라."


숨이 턱 막혀왔다. 그게 부담감 때문인지, 설레임 떄문인지는 모르겠다. 그냥 숨이 막혔다. 어쩌면 맞은편에서 무언가를 망설이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있는 레오나의 탓일지도.


"그, 그러고보니!"


그래서 애써 물러나려고 말을 꺼내자, 레오나가 조금 다급하게 말을 꺼냈다.


"여, 여기, 넓네!"


"어, 어, 그렇지."


"평소에 이렇게 씻을 기회는 좀처럼 어, 없는데."


"그, 치.........."


"마침, 여기는 둘이 들어 갈 수 있을 정도로 넓고........?"


"............."


"그러니까, 음."


레오나는 눈을 꼬옥 감았다. 가녀린 눈꺼플이 파르르 떨려왔다.


"누, 누가 들어와도 나는 아무것도 몰라. ......눈 감고 있어서."


아, 그러니까, 다시 한번 더 말하지만.


그녀는 무척이나 사랑스러운 여인이였다.





레오나가 가장 긴장했던 작전은 언제였나. 마지막 작전은 불가능에 가까웠던 작전이였으므로 긴장이 아닌 체념에 가까운 감정을 지닌채 참여했다. 그러니 다른 작전을 꼽자면, 전장에서 처음 칸과 마주했을 때였겠지.


"무, 물 온도는 어때?"


그리고 지금은 그거보다 네 배쯤 긴장해있다.


언젠가 내가 그를 1 브라우니의 전투력이라고 칭한 적이 있던가? 정정하겠다. 그는 4명의 칸만큼 강한듯 하다.


"조, 좋네........."


어깨까지 물에 담군 레오나가 뜨거운 한숨을 토해냈다. 느슨하게 풀어지는듯 했다가, 한숨소리에 바로 옆에서 움찔거리는 한심한 남자 탓에 레오나도 덩달아 다시 몸에 긴장감이 돌았다.


아, 레오나, 지난번부터 다이어트 하기로 했었잖아! 다이어트 하기는 했니? 아니 잠깐, 아까 엄청 먹었잖아! 저 남자는 어쩌자고 혼욕하기 전에 그런걸 막 먹인거야!


레오나의 뺨이 점점 붉게 물들어갔다. 레오나는 본인이 먼저 혼욕을 제안했다는 사실은 깔끔하게 잊은듯 했다.


"레오나."


무언가를 결심한듯한 그의 목소리. 레오나는 힐긋, 그녀의 오른편을 곁눈질했다.


그는 물에 잠긴채 벽면에 기대,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너를 만나고서 많은 생각을 했어."


그의 뺨이 붉게 물든 것 처럼 보이는건, 무릇 욕탕의 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웃기지만, 나는 멸망 전, 멸망 후를 통틀어서 지금이 제일 행복해."


그리고 아마, 레오나의 뺨이 뜨거운 것도 열기 때문만은 아니겠지.


"나도."


툭, 레오나의 입에서 믿기 힘들만큼 쉽게 긍정의 대답이 튀어나왔다.


"나도, 그래........"


레오나는 홀린듯 그를 바라보았다.


레오나가 사랑에 빠질 사람은, 분명 그녀에 걸맞는 우아하고 완벽한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품위 없는 남자였다. 경박하고, 과거에 수많은 바이오로이드들을 괴롭혔을 것이였다.


그러나 그는 배려심 깊은 남자이기도 했다. 요리를 잘하고, 지금 레오나를 무척이나 아껴주는 사람.


그와 레오나는, 둘 다 과거에 시야가 고정된 이들이였다.


누구는 과거 아무 생각없이 행했던 것이 죄악임을 깨달아서, 누구는 과거 너무 많은 것을 잃었어서.


그리고 그런 둘은 지금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레오나는 그런 그를 볼때마다, 가슴이 터질듯이 두근거렸다.


이제 그가 없는 삶은 생각할 수도 없을만큼.


레오나는 그의 입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가 원하는 말이 어서 그의 입에서 나오길 빌며.


"나 말이야, 레오나."


그렇게 그는 고했다.


"요즘 잠이 부쩍 많아졌어. 앞으로도 더 많아지겠지. 그리고 언젠가. 언젠가는, 깨지도 못할 정도로 푹 자겠지."


그렇게 그는 묵묵하게, 그의 끝을 고했다.


"그러니까."


그는 그렇게 달빛 아래에서 레오나에게 말했다.


"레오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


"우리, 사랑하지말자."


사랑해.


그는 그렇게 덤덤히, 그녀에게 사랑을 고했다. 부정 속에 교묘히 섞여버린 진하디 진한 사랑을, 그 레오나가 포착해내지 못할 리 없었다.


레오나는 그래서, 달빛 아래에서 그에게 말했다.


"당신."


내가 사랑하는 사람.


".......응, 우리, 사랑하지말자."


사랑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둘은 서로에게 다가갔다.


서로 격렬하게 혀를 뒤섞으며 타액을 교환했다. 끈적한 타액 사이사이에는 그것보다 몇배는 농밀한 사랑이 뒤섞여있었다.


"하아, 하아, 하아아악....!"


숨이 흘러 넘틸때까지 서로를 탐하던 둘은, 어느샌가 물 밖으로 나와 있었다.


달빛 아래에서, 그가 레오나를 내려다봤고, 레오나가 그를 올려다봤다.


"으, 흐."


그가 레오나의 손가락을 강하게 깨물었다.


따끔한 고통보다도 진한 황홀함이 전신을 휘감았다.


반지따위는 없었다. 그들은 서로를 사랑하면 안되니까. 파멸을 향해 나아갈 사랑에 빠지는건 어리석인 짓이니까.


그래서 레오나는, 오른손 약지에 반지처럼 자리한 그의 잇자국을 느릿하게 핥았다.


하늘에서 달빛이 내리쬐고 있었다.


이곳은 폭신하고 우아한 침대도 아니다. 샹들리에는 커녕 천장조차 존재하지 않고, 럭셔리한 가구도 없으며, 상대는 상상 속의 완벽한 남성 역시 아니다.


그럼에도 레오나는 단언할 수 있었다.


레오나가 상상했던 그 모든 첫경험들을 그러모아도, 지금만큼 행복하진 않겠지.


휘영청 떠있는 달이 무척이나 아름다운 밤의 일이였다.


그 날, 레오나는 인생에서의 행복의 정점을 찍었다.


그만큼 행복했고, 그만큼 황홀했다.


그리고 정점에 도달했다는건, 이젠 내려갈 일만 남았다는 뜻이다.


그의 증상은 점점 심해져갔다.


4시간, 8시간, 반나절, 하루.


그는 이제 일주일 중 깨어있는 시간보다 잠에 든 시간이 더 많았다.


다부졌던 몸은 그 건강함을 잃었고, 눈가에는 짙은 피로가 묻어났다.


그게, 레오나는 견딜 수 없이 괴로웠다.


마침내 그가 일주일을 내리 잠에 들던 그날, 레오나는 평생 찾지 않은 신께 빌었다.


제발, 제발요, 신 님.


제게서 그를 앗아가지 말아주세요.


신 님, 제발, 제발, 누구든지.


이번 한 번만, 이번 한 번만 그를 지켜주신다면, 죽고 나서도 평생 당신의 종이 되겠습니다.


발할라의 신이시든, 그 잘난 쿄헤이에서 들먹이던 빛이든, 누구든지, 제발.


제게서 그를 빼앗아가지 말아주세요.


"내, 내가.........."


숨이 쉬어지질 않았다. 그가 오랫동안 깨지 않는다. 하루에도 몇번, 몇십번이나, 그가 숨을 쉬고 있는지 아닌지를 확인했다.


"내가, 마지막이 되서야 겨우 찾은, 내 모든 것이란 말이예요..........."


레오나는 그렇게 달빛 아래서 울었다.


잠든 그의 곁에서, 목이 쉴때까지 울며 기도했다.


그러나 그 다음날 아침에도 그는 깨지않았고, 그날 오후가 되어서야, 땅거미가 지는 때에 눈을 떴다.


생각해보면 그랬지.


신께서는 언제나 레오나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만약 그가 한 번이라도 레오나의 부탁을 들어줬더라면, 그녀 혼자 길바닥에 널브러져 그를 만날 일을 없었겠지.


그러니 언제나 그럤듯이, 결국 레오나가 직접 쟁취해야한다.


그리고 레오나는 이미 그 방법을 알고 있었다.


레오나는 이젠 옛날이라고 불러도 좋을 때에, 그녀가 미련처럼 한 손에 쥐고 있던 문서를 살펴보았다.


그 내용은, 김지석이라는 인간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공간에 대해서였다.


발할라가 정말 우연히 찾아낸 그 공간에 대해 상부에선 조사를 강요했고, 레오나는 모든걸 잃어가며 그곳의 조사를 어느 정도 끝마쳤다.


그리고 어쩌면, 그곳에 그를 살릴 수 있는 열쇠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레오나는 바쁘게 준비를 시작했다.


조금 더 깨끗하게 권총을 손질하고, 여러 약품들을 챙겼다.


그렇게 조금 더 시간이 지난 어느날, 운 좋게도 그가 깨어있던 날, 그는 말했다.


"..........가게, 레오나?"


"응, 당신."


"레오나."


"응."


"곧 있으면 새해네."


"응."


"그 전에 돌아와 줄 수있어?"


"응, 물론이지."


까득, 레오나는 새끼손가락을 강하게 씹었다. 과거 아름답고 황홀했던 첫날밤, 그가 새겨준 작은 증표. 비록 그 증표는 이제 사라져 없지만, 레오나는 이렇게 잇자국을 남길때마다 그때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같이 새해를 맞이해야하니까."


그렇게 레오나는 익숙해진 둥지를 떠났다.


철충들을 만나 위험할때도 있었고, 아니면 단순히 자연 환경이 그녀를 반기지 않을때도 있었다.


적지 않은 거리를, 레오나는 빠르게 달려나갔고, 마침내 예전 모든 발할라의 아이들이 죽었던 그 장소에 도달했다.


그때, 레오나는 도망쳤다. 그녀가 살기 위해서.


그러나 지금, 레오나는 이곳에 찾아왔다. 그를 살리기 위해서.


지친 몸을 이끌고, 수백 수천 수만 가지의 전술을 세웠다. 그리고 기어코 그녀는 해냈다.


철충들이 안에 있긴 했지만, 이전 발할라와의 전투로 인해  그렇게 많지는 않았고, 다행히 고위급 철충개체는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이곳에 철충들의 눈길을 끌만큼 위협적인 인간이 없어서 그런걸지도.


그녀는 명백히, 철혈의 레오나 모델의 한계를 뛰어넘는 기지를 발휘해 최후의 최후의 공간까지 도달했다.


그리고 생체 재건 설비를 찾아냈다.


아, 이거면. 이거라면.


레오나의 눈이 희망에 반짝 빛났다.


그를 살릴 수 있어. 끝이 정해진 그와의 행복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어.


그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


레오나는 빠르게 둥지로 돌아갔다. 당연하게도 돌아가는 길은 더더욱 험난했지만, 레오나는 오히려 왔을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그의 품에 돌아올 수 있었다.


거처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살폈으나, 그가 없었다.


문득 그가 멸망한 세상의 하늘을 좋아한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그는 거처로 삼은 건물 옥상에 조촐한 테라스를 만들어놓고, 거기서 레오나와 하늘을 올려다보는걸 좋아했다. 어울리지 않게도.


쿡쿡 웃은 레오나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아니나 다를까, 테라스의 의자에 기댄 채, 그는 꿈 속에 빠져 있었다.


이제 곧이다. 그가 깨어나면 바로 그와 함께 김지석의 무덤으로 향해야지.


그는 분명 깜짝 놀랄 것이다. 어쩌면 네가 최고야, 레오나, 따위의 칭찬을 속삭여줄지도 모르지.


행복한 상상 속에서, 레오나는 그가 일어나길 기다렸다.


하루를 기다렸다.


그가 잠에 빠져든지 얼마 지나지 않았나보다, 그렇게 생각했다.


일주일을 기다렸다.


곧 일어나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일주일 더 기다렸다.


그는 여전히 일어나지 않았다.


"..........늦어."


그렇게 일주일을 또 기다려서.


"늦다고, 당신."


레오나가 돌아온지 3주가 조금 넘어서야, 그제서야 레오나는 인정했다.


"왜, 안 일어나는거야.......?"


이미 그는 깊디 깊은 잠에 빠져버렸음을.


그녀가 너무 늦어버렸음을.


우우웅, 우우웅!


동이 튼다.


테라스 책상 위에 올려진 알람이, 이제 곧 새해 첫 일출이 올라온다며 요란스레 떨어댔다.


레오나는 울었다.


그의 옆에 앉아서, 목이 다 쉴때까지 울었다.


너무나도 고통스러운데, 그와 함께했던 기억 하나하나가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서, 차마 그를 사랑했으면 안됐다고 말하지 못했다.


레오나는 지쳐있었다.


피로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는 자고있었다. 깨지 않을 꿈을 꾸고 있었다.


괘씸하게도, 몸은 여기 덩그러니 남아있는 주제에 정신은 깨지 않을 꿈 속에 있었다.


그럼 따라가줘야지. 내조란 무릇 그런거 아니겠나.


그래서, 편히 의자에 앉아 쉬고 있는 그의 옆에 털썩 앉았다.


살포시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새해에 처음으로 세상을 비추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새해가 밝았다.


얄궂게도, 새해 첫 일출을 같이 봐주지는 못할 망정 그는 잠에 들어있었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사람이라니까."


레오나는 울었다.


그가 옆에 있는게 너무나도 슬퍼서.


떠오르는 태양이 레오나의 머리카락을 짙은 주홍으로 물들였다. 레오나는 지금의 광경을 영원히 머릿속에 새기겠다는 양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슬쩍, 자고 있는 그를 바라본 레오나는 말했다.


"새해 복 많이 받아, 달링."


그를 따라서, 레오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새해에도 오르카 호의 인원들은 언제나 바쁘다. 철충들은 새해랍시고 공격을 멈춰주진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즉, 새해 첫 날이라고 해서 오르카 호가 쉬지는 않는다는 소리고, 새해 첫 날이라고 해서 그녀들의 업무가 멈추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베라 언니."


"으응? 왜 그러니, 알비스?"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 복잡한 지형에서의 전투를 주로 삼는 오르카호의 주력 전투부대 중 하나가 자원탐사를 위해 도시를 수색했다.


어떤 인간이 거처로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 그 옥상에서, 알비스는 멍하니 서있었다.


"이건........."


사랑스런 동생의 부름에 고개를 돌린 베라는, 알비스가 보고있던 광경을 눈에 담고 조심스럽게 인상을 찌푸렸다.


레오나와 똑같은 복장을 한 여성으로 추정되는 시체와, 평범한 인간 남성으로 추정되는 시체 두 구.


여성은 남자의 어깨에 고개를 기댄 채로 생을 마감한 듯 했다.


때는 오후였다. 해가 지고 있었다.


세상을 주홍빛으로 물들인 낙양이, 두 구의 시체를 주홍색으로 물들였다.


슬그머니 기어온 황혼이, 서로를 붙잡고있는 손을 옅게 비추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