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세요, 선생. 난 비루한 인간입니다.



날마다 말라비틀어지는 내 가난한 이상을 쥐어짜 현실의 목을 축이는 인생의 빚쟁이입니다.



이상에서 꾸어온 꿈을 현실에서 갚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몸부림치는 물밖의 잉어 같은 신세란 말입니다.



숨 쉴 수 없는 현실 속, 나는 꾸어온 꿈으로 잠시 숨을 쉽니다. 잠시 몽롱히 -정말 꿈에 취했으니 이보다 좋은 표현도 없겠지요- 취해있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네모난 원고지에 펜을 놀리는 것 뿐입니다.



내 목을 짓누르는 죽음의 손가락이 힘을 못 쓰는 동안, 난 이상에 진 빚을 갚기 위해 내 손가락에 힘을 쥡니다.



사각형의 내부의 사각형의 내부의 사각형의 내부의 사각형 의 내부의 사각형.



나는 사각형의 한 귀퉁이를 붙잡고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귀퉁이에서 중앙으로 옮기는 내 검은 생명선이 얽히고 설킬 때, 나는 비로소 잃어버린 활기를 찾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는 못합니다. 느슨해졌던 죽음이란 놈의 손아귀가 슬그머니 내 목을 쥘 때, 내 변제는 끝이 나고 맙니다. 다시금 숨을 쉬기 위해 꿈을 꾸어올 수밖에 없는 기구한 신세가 된단 말입니다.



비척비척 걸어가 내 누울 자리를 찾을 때면 이런저런 생각이 들고는 합니다. 



박가분, 칼피스, 경성제대, 운명.



그래, 운명. 혹, 선생께서는 운명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나도 모르는 사이 옮겨지는 내 목숨이라니. 실로 우습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옳은 게 아닐까하는 생각도 듭니다. 아무리 뒷다리를 움직여도 포르말린 웅덩이를 벗어날 수 없는 청개구리처럼, 나도 박제된 천재니 말입니다.



선생,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



내가 그런 인간입니다. 천재로 살며 무언가를 이루려 했으나 종국에는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자.





그야말로 인간, 실격.








"후..."


손에 쥔 궐련을 재떨이에 툭툭 치며 사령관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방안에 뿌옇게 퍼졌다가 흩어지는 매캐한 담배 연기가 그의 마음을 환기했다.



두 달 전, 오르카호는 덴세츠 엔터테인먼트의 옛 촬영장을 수색했다가 동면되어 있던 한 남자를 구출했다. 자신을 경성제대 건축과 출신의 문학도라고 소개한 남자는 아직도 일제가 계속되고 있냐, 전에 있던 이들이 글을 쓸 수 있게 해주었는데 그들은 어디 있냐는 등을 물으며 바깥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일단은 인간이니 전력이 될 수 있다는 이유로 데려와 부사령관에 앉혔지만, 뛰어난 능력과는 별개로 병색이 완연했던 남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쓰러지더니 병상에서 일어나지를 못했다.


닥터의 기술로 감기처럼 치료할 수 있는 폐결핵이었지만 어째서인지 치료는 조금도 진척이 없었다. 최후의 수단으로 남자의 유전자를 복제해 새로운 신체를 만들고자 했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기계가 오작동을 일으켜 그마저도 무위로 돌아갔다.


그야말로 백약이 무효인 상황에서 남자는 급기야 의식까지 잃고 말았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 이어지던 중, 남자는 힘겹게 눈을 뜨고 종이에 마지막 글을 써내렸다. 반드시 자신이 죽은 이후에 펴보라고 신신당부한 남자는 다시 정신을 잃더니 이틀 후 숨을 거두었다.


장례식을 치른 후 오르카호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허나 단 한 사람. 남자의 편지를 읽은 사령관만은 생각을 놓지 못했다. 앉은 자리에서 줄담배만 뻐끔뻐끔 피던 사령관은 요절한 천재에게 애도사를 읊었다. 그는 나직히 천재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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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톤 체호프의 <갈매기>라는 희곡을 읽고 러시아 문학 느낌을 내보고 싶었는데, 쓰다보니 이상 시인이 떠올라서 주인공으로 설정했어. 중간에 나온 연작시 <건축무한육면각체>의 첫 작 'AU MAGASIN DE NOUVEAUTES'의 일부와 수필 <권태>에서 따온 구절로 눈치챈 사람이 많을 거라고 생각해. 


마지막에 나온 인간 실격은 갑자기 떠올라서 넣은 건데 대체할 표현이 영 떠오르지가 않네. 혹시 의견 있으면 알려주길 부탁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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