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헬렌, 바이오로이드다?  https://arca.live/b/lastorigin/68824517

나는 헬렌, 바이오로이드다?(2) https://arca.live/b/lastorigin/68900322

나는 헬렌, 바이오로이드다?(3) https://arca.live/b/lastorigin/68972277



----


바이오로이드는 인간에게 해를 가할 수 없다. 단순한 폭력 행위부터 드러나지 않는 공격 의지까지 고통에 의해 통제된다. 마치 서커스단의 맹수를 조련하는 방법과 같다. 경험은 없지만 나 또한 그럴 것이다. 때린다면 맞아야 하고, 죽인다면 죽어야 한다. 더군다나 이런 몸으로는 최소한의 저항마저 불가하다. 그렇기에 나의 여행에는 보호자의 동반이 꼭 필요했다.

 

 

“..그래서 같이 가자고?”

 

 

“그렇다. 소연 한가하다. 어차피 약속 없다. 틀리다?”

 

 

“아니, 그렇긴 한데.. 너 어째 점점 뻔뻔해지는 거 같다? 이게 언니 알기를 우습게 보고..”

 

소연은 나의 머리를 팔로 감싸 조였다. 별다른 통증이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예전에 현동이 그녀에게 같은 행동을 당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적당한 반응을 보이며 소연의 팔을 가볍게 두세 번 쳤다.

 

 

“소연, 아프다. 사과한다. 이거 푼다.”

 

 

“흥! 어차피 아프지도 않으면서 엄살은.. 그래서 언제 갈 건데?”

 

 

“아직 돈 없다. 요시미츠 의뢰 우선 수행.”

 

 

“그렇긴 하지. 근데 그 아저씨도 특이하네. 자기 부하는 그렇게 두들겨 팼으면서 너한테는 욕 한 번 안 하고. 의외로 편견 없는 사람인가?”

 

 

“못한 거다. 소연.”

 

 

“무슨 뜻이야?”

 

 

“비밀이다.”

 

.

.

 

 

“요, 용허해후힙효. 하항님..”

 

 

“내가 어려운 거 시키디? '‘알렌’이라는 놈만 스카우트하라‘고 하지 않았냐? 근데. 왜. 일을. 키워!”

 

요시미츠는 물이 반쯤 차 있는 드럼통에서 야구방망이를 꺼내 그의 팔꿈치를 부쉈다. 고통을 주고 싶은 게 목적이라면 더 나은 방법도 많았다. 하지만 그는 소싯적부터 늘 이 방법을 고집했다. 요시미츠는 ’물 먹은 나무로 패야 가장 묵직한 느낌이 나온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하, 하히만 하항님. 하이오호이드일 줄은 훔에도.. 아악!”

 

 

“아직도 정신 못 차리네? 그러니까 그걸 니가 왜 판단하냐고. 니가 걔보다 글 잘 쓰냐? 그럼 너도 저런 걸 내던가. 등치 하나 보고 뽑아줬더니 왜 니 몸에서 제일 병신같은 부위만 골라 쓰는 거야?”

 

더 패기도 귀찮다는 듯 요시미츠는 거칠게 방망이를 내던졌다. 그리고 드럼통에서 새로운 막대를 꺼내 부하에게 건네며 말했다.

 

 

“저 새끼 데리고 나가서 그거 부러질 때까지 패.”

 

 

“예, 사장님.”

 

요시미츠는 남자의 단말마를 뒤로 한 채 의자에 앉아, 책상 서랍에 넣어 놓은 알렌의 작품을 보며 중얼거렸다.

 

 

“대체 어떻게 이런 걸 만든 거지? 군대에 미친 금발 양아치놈은 아닐 테고.. 그럼 삼안인가? 아니.. 이런 녀석이 있는데 그 자식이 발표를 안 할 리도 없고. 흐음..”

 

요시미츠는 살찐 턱을 손으로 어루만지며, 알렌의 제작처를 추리했다. 사실 알렌의 정체나 이 작품이 과거의 작품들의 조각모음이란 것쯤은 진작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알렌을 만나러 직접 마을로 향했다. 그리고 알렌을 직접 만나 얘기를 나누면서 요시미츠는 확신했다. ’이 놈이 ‘일부러’ 이렇게 썼다‘는 것을. 

 

예상컨대 본인이 원했다면 생판 처음 보면서도 공모전에 올린 글에 비견되는 작품을 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단순한 공모전 상금 따위가 아닌, 자신과의 커넥트가 목적이었음을 느꼈다. 그 바이오로이드는 누구나 알만한 명작부터 시작해서 점점 마이너한 작품을 섞어나간 끝에 중반부터는 그 어떤 문호도 모티브를 알 수 없는 덫을 짜냈다. 

 

보통 사람은 처음 보는 새로운 명작으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요시미츠는 ’니가 어디까지 알 수 있을까?’ 하는 알렌의 도발이 여실히 느껴졌다. 이에 화가 났던 그는 부하에게 지시를 내리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곧장 마을로 달려갔던 것이다. 하지만 요시미츠가 알렌의 글을 읽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단순한 마리오네트에 불과했다.

 

그 ‘마녀’가 과연 어디까지 예측했을지를 생각하니 요시미츠는 소름이 돋아 끊었던 담배를 다시 들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대체 왜 대필 하나 시키려고 이런 미친 기능을 넣은 거야.. 이건..”

 

.

.

 

요시미츠에게 컴퓨터가 도착한 날부터 4주 동안, 나는 총 13편의 애니메이션 시나리오를 전송했다. 그녀가 지금껏 해왔던 일과는 다르게 ‘감사하다’나 ‘또 부탁한다’ 같은 일상적인 답변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시나리오 한 편을 보낼 때마다 소연의 계좌에 찍히는 수천만 원 대의 돈이 전부였다.

 

 

“..이제 니가 이 마을에서 제일 부자야. 확실해.”

 

 

“돈은 소연 계좌. 소연이 제일 부자.”

 

 

“바이오로이드라 신분증이 없어서 못 만든 것뿐이잖아. 그리고 암만 내 통장에 있어도 니가 번 건 안 건드려.”

 

 

“여행 종료되면 현동 몫은 남기고 나머지 맘대로. 신경 안 쓴다.”

 

 

“그러니까, 하아.. 됐다. 말을 말자. 그럼 여행은 언제 갈 거야? 설마 돈이 모자라진 않을 테고.”

 

 

“내일 간다. 소연 준비한다.”

 

 

“어, 내일.. 잠깐만 내일!?”

 

 

“정오 교통편 예약 완료. 몸만 와라. 참고로 방금 말한 ‘몸’은 옷을 포함한다. 정말 몸만 오면 곤란.”

 

 

“나도 알아!!”

 

나는 소연의 호통을 뒤로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짐을 싸려고 생각하니 예상대로 물건은 별로 없었다. 옷을 더럽힐 일도 아닌지라 여벌 옷도 필요 없이 지금 입고 있는 거로도 충분했다. 음식은 가는 중에 사면 된다. 돈은 충분했다. 그래도 만일을 대비해 현금을 준비했다. 이 정도가 전부였다. 준비를 마치고 침대에 앉아 있으니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알렌, 아직 안 자지?”

 

 

“그렇다. 무슨 일 있다?”

 

 

“아직 어디로 가는지 안 알려줬잖아. 같이 갈 거면 그 정도는 말해줘.”

 

 

“그렇다. 잊었다. 상덕 만나러 간다.”

 

 

“상덕? 그 택배 아저씨?”

 

소연을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내가 먼저 말을 건다면 상덕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물론 상덕에게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애초에 당시 나에게는 대필을 위해 기본적으로 입력된 정보와 기본 상식, 그리고 이동 중에 상덕과 나눈 대화가 인생의 전부였다. 하지만 전적으로 전자의 이유가 컸다.

 

 

“동일. 상덕 말했다. 만남과 헤어짐. 기다리면 복 온다. 하지만 약속 안 지킨다. 혼내러 간다.”

 

 

“하하, 말은 그렇게 해도 그냥 보고 싶은 거 아냐?”

 

“..정정. 그런 거 같다..”

 

 

“솔직하지 못하다. 알렌. 무슨 일이다? 사춘기 소녀다?”

 

좀처럼 하지 않는 나의 행동에 소연은 장난기가 발동해 내 말투를 따라 했다. 어느새 붉어진 내 표정을 본다면 내일 아침까지 놀릴 게 뻔해 문을 잠갔다.

 

 

“소연. 하지 않는다. 빨리 잔다. 새벽 출발한다.”

 

 

“큭큭, 거부한다.. 잠깐만 새벽!? 아까는 정오라며?!”

 

 

“방금 변경했다. 빨리 잔다. 안 그러면 못 일어난다.”

 

 

“어차피 나 안 가면 너도 못 가잖아. 나 그냥 잔다?”

 

 

“...정오로 재변경했다.”

 

소연은 만족한 듯 호탕하게 웃으며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아무래도 나를 다루는 법이 는 것 같았다. 기분이 나빴지만, 심하지는 않았다. 친한 인간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상호 작용의 일부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인지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리고 늘 그렇듯 상덕과의 대화를 복기하며 몸을 뉘었다.



-----


큰일났다. 이야기가 늘어졌어. 4편으로 끝내려고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