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 화: https://arca.live/b/lastorigin/69536997


와이어를 거둔 장화는 다니엘을 쏘아보곤 신경질을 부리며 걸어나갔다. 마치 고양이 손톱이 할퀴어 놓은 숙소의 벽을 보던 천아는 으쓱, 어깨를 흔들곤 침상에 앉았다. 바르그는 손을 몇 번 꼼지락거리곤 중얼거렸다.



"이런 추태를 보여 죄송합니다... 도련님."

"아, 아녜요. 바르그씨. 원래 어느 정도 미움 받을 각오는 했었어요."



생각 이상으로 마찰이 심했다. 레프리콘도 어느 정도 주의를 듣고 오긴 했었지만, 스틸라인의 부대였으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일들이 벌어졌다.



"아무래도 저년은 당분간 없는 애 취급 해야겠네. 그놈의 성질머리는 오르카 호로 합류한 후에도 저러니."

"... 합류를 선택한 것도 의외군요."



레프리콘의 질문에 천아는 자신의 주머니에 있던 인식표를 꺼내 손가락에 빙빙 돌렸다.



"그래도 저 애, 예전 보단 성질 많이 죽었어~ 뭐... 여전히 사령관 아니면 통제하기 어려운 애긴 하지만."



새삼 레프리콘은 사령관의 포용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괜히 오르카 저항군의 수장은 아니었다. 반면 발견되었다는 저 두 번째 인간은 과연, 사령관 만큼의 포용력과 카리스마를 가질 수 있을까, 잠시 상상해보았지만 고개를 내저었다. 한편 다니엘은 금방 나간 장화를 다시 붙잡아야 하나 싶어 숙소의 문을 열고 나가보려는데, 그를 가만히 지켜보던 바르그가 이내 문을 가로 막았다.



"도련님. 지금 가보셔 봤자 화만 돋굴 뿐입니다."

"진짜 미운털이 많이 박혔네요 저..."



다니엘의 엠프레시스 하운드 소대는 출발부터 심히 삐걱거리고 있었다. 레프리콘은 따로 사령관에게 보고를 해야 할 것만 같았다. 이런 상태로작전 투입을 하게 된다면 오메가의 시설 파괴는 커녕,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라고.



**



며칠이 지났다. 차근히 레프리콘은 다니엘에게 대 철충 기초 전술에 대해 가르치고 있었다. 사령관 만큼 바로 이해하진 못했지만 나름 노트에 적어가며 애써 배워나가던 다니엘이었다. 후우, 긴 한숨을 쉰 뒤 레프리콘은 전술 교본집을 덮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기로만 하시죠, 인간님. 그제야 다니엘은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지휘라곤 한 번도 해본 적 없었던 자신이 별안간 지휘라니... 보통 부대라면 그나마 덜 긴장이 되겠지만 멤버 하나 하나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암살 공작 부대였던 만큼 그의 걱정은 켜켜이 쌓여만 갔다.


"주인님. 피곤하실 것 같아 차를 내어 왔습니다."

"... 어? 어. 고마워 이터니티."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이터니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손에는 간단한 다과와 차 두 잔이 들어 있었다. 그녀는 레프리콘에게도 차를 내밀었다.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레프리콘과 다니엘은 쭉 차를 마셨다. 잘 우러나온 자스민 향이 공부로 경직되었던 뇌를 부드럽게 마사지 해주었다. 하지만 다니엘은 여전히 걱정이 앞섰다. 역시나 며칠 전, 자신을 대장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며 문을 발로 뻥 차고 나가버린 오만한 바이오로이드, 장화의 존재는 퍽퍽한 스콘처럼 답답하게 만들었다.



"레프리콘씨?"

"네. 인간님."

"제가 듣기론 레프리콘씨는... 어, 음. 중대장? 그 지위까지 올라오셨다고 들었어요. 그럼 그게 어느 정도 높은 거죠?"

"브라우니 40명 정도가 제 휘하였습니다."

"진짜요?"

"전 사령관님이 깨어나신 직후에 만들어진 스틸라인 부대원이었습니다. 경험이 좀 되다 보니 이것 저것 맡게 되었죠."



지금과 다른 옛날의 오르카를 떠올리며 레프리콘은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지금이야 오르카 저항군 중 가장 거대한 지휘 체계를 가진 부대였지만 그때는 전장에서 홀로 살아 남았던 마리 6호가 전부였다. 공중 지원을 담당할 피닉스도, 레드후드도 없었다. 인간들의 말을 빌려 말하자면 '당나라 부대'에 가까웠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브라우니 분대를 인솔하던 그때를 떠올리던 그가 피식, 쓴웃음을 지었다.



"그럼 레프리콘씨는 지휘 경험이 풍부하시겠네요... 적어도 저보단..."

"그래도 최종적으로 저희를 지휘하는 건 다름 아닌 인간님들이십니다. 지금 사령관님께서도 인간님을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건 바로 인간의 '명령' 때문이죠. 그게 없다면 저희는 숨 쉬는 인형에 가까우니까요."

"... 그렇군요."



다니엘은 세삼 자신의 어깨가 무거워짐을 느꼈다. 잠시 바람이라도 쐬고 오겠다며 그는 의자를 끌고 일어섰다. 그렇게 임시 거처를 나서 오르카호 바깥에 도착했을 때 저 멀리 스틸라인의 부대원들이 훈련하고 있는 모습들이 보였다. 위장을 한 채 일사분란하게 움직였고 지휘소 천막에선 사령관이 마리와 함께 패널을 클릭하며 훈련에 집중하고 있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다니엘의 덥수룩한 머리를 흔들었다. 자신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에 괜스레 한숨이 터졌다.


그때 누군가, 다니엘이 기댄 난간으로 걸어왔다. 쾌활하면서도 동시에 기백있는 여장부의 목소리였다.



"그대가 두 번째 인간인가?"



고개를 돌린 곳엔 대구경 저격총을 들고 망토를 걸친 한 여장부가 서 있었다. 키도 자신보다 한참이나 큰 갈색 머리의 여성은 자신만만한 발걸음으로 걸어와 그의 옆에 섰다. 그리고 그를 세심하게 스케치하듯 살펴보곤 이내 천천히 손을 뻗었다.



"정식으로 인사하겠다. AA 캐노니어의 지휘관, 로열 아스널이다. 그대가 다니엘 리오보로스인가? 흐음... 생각 보다 조금 여리여리하군."



악수를 받아주자 아스널은 그를 자세히 지켜보다 피식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마리 대장이 좋아할만한 체구 같군... 흠, 헌데 모습이 꼭 우리 부대의 에밀리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내 편견인지 모르겠지만, 그대는 인류 재건 계획을 사령관과 도맡아 하기엔 조금 부실해보인다."

"인류... 제건 계획이 뭡니까?"

"이렇게 말하면 역시나 못 알아 들어... 비스트헌터는 조금 더 고상한 어투로 말하라 했지만, 내 천성이 맞지 않으니, 그대에겐 직설적으로 말해야겠군."



그러던 아스널은 자신의 가죽 치마를 통통 두드리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섹스 말이네. 그대여."

"... 예?"

"하하! 뭘 부끄러워 하나! 사령관 혼자서 많은 아이들과 동침을 하긴 힘들텐데. 그대도 어서 사령관을 도와 이 배에서, 철충에 대항할 아이를 생산해야하지 않겠는가!"



멸망 후의 세계에선 '섹스'가 그리 부끄러운 것이 아닌가 보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두 번째 인간, 다니엘에게 다가와 섰다. 뭘 바라보고 있나 싶어 같이 아래를 내려다보던 아스널은 직접 스틸라인의 훈련을 지휘하는 사령관을 보곤 미소를 지었다.



"참으로 대단한 사내지 않은가 그대여."

"... 아스널씨. 아스널씨는 제가 고깝진 않으세요?"

"내가 고까울 게 뭐가 있나. 레오나 대장이나 마리 대장은 지휘 체계에 혼선이 생길까 걱정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쉽지 않은가? 그대가 부사령관 자리에 앉는다면 지휘 체계가 명확해지겠지."

"부, 부사령관이요?"

"그래. 사령관이 그래서 그대를 따로 교육시키고 있지 않은가?"

"... 그렇긴 한데. 제가 어떻게 사령관님처럼 될 수 있겠어요?"



며칠 전, 자신에게 으르렁거리며 방을 뛰쳐나간 장화를 떠올리자 다니엘은 눈앞이 깜깜하기만 했다. 하지만 아스널은 다가와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마치 친구에게 말하듯 그녀는 부드러운 어투로 말을 이어갔다.



"세상 모든 인간이 사령관처럼 똑똑하고 유능했다면 어째서 인류는 멸망했겠는가? 너무 걱정하지 말게 그대여."

"..."

"내가 늘 대원들에게 하는 말이 있다. 누군가를 부러워하기만 한다면, 절대 그 누군가가 될 수 없다. 그 누군가와 자기를 매일 비교하기 때문이지."



아스널은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자신을 대뜸 보자마자 섹드립을 날리던 것과 다르게 역시나 한 부대의 지휘관 다운 그녀였다. 반면 자신은 그녀보다 자신감도 없었고, 체격도 왜소했으며 게다가 부대원들은 대놓고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리오보로스의 꼬맹이'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대놓고 장화는 반항까지 한 마당에, 과연 자신이 사령관처럼 될 수 있는 날이 올까.


솔직히 요 며칠간 레프리콘에게 지휘 교육을 받으면서도 몇 번이나 이해를 하지 못해 그녀는 몇 번이고 다시 설명을 해주어야 했다. 민간인... 그것도 거의 실험실 아니면 방에 가두어지듯 자랐던 다니엘에게 있어 여간 고역이 아닌 교육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교육을 받더라도 과연 엠프레시스 하운드의 대원들이 자신을 따라줄 지도 의문이었다. 어딘가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천아에, 자신을 그저 '도련님'으로만 생각하는 바르그. 그리고 여전히 그의 머리에 가득 찬 트러블 메이커 장화까지.



"생각이 많아지나 보군."

"아무리 생각해도 전 오르카의 지휘관이 되긴 힘들 것 같아요. 아스널씨... 자신이 없네요."



조금 맥 없는 대답에 아스널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힘을 주어 말을 이어갔다.



"그대여. 우리가 왜 그대와 사령관 같은 인간을 필요로 하는지 아는가?"

"... 레프리콘씨한테 들었어요. 우리가 명령을 해야만 비로소 움직일 수 있는 존재라고요."

"그래, 그대도 알겠지만 우리 바이오로이드는 명령에 담긴 뇌파를 인식해 임무를 수행한다. 철충도 뇌파를 쏘기에 우리는 인간이 없다면 제대로 된 임무를 수행할 수가 없다. 우리에게 있어 그대와 사령관은 꼭 필요한 존재지."

"..."

"우린 인간보다 분명 강하다. 하지만 강하기만 할 뿐, 우리는 면밀히 말하자면, 장전된 총에 불과하다."



그렇게 말하며 아스널은 자신이 어깨에 들춰 맸던 대구경 저격총을 다니엘에게 들이밀었다. 묵직하고 무거워보이는 저격총, 금방이라도 방아쇠를 손가락으로 누르면 불을 뿜으며 발사를 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노리쇠에는 안전장치가 걸려 있었다. 다시 말해 누군가 안전장치를 해제하고 어깨에 견착한 뒤 자세를 잡아야 했다. 그리고 조준을 한 뒤 손가락으로 방아쇠를 당겨 발사를 해야 했다.



"그것을 쏘는 것은 손이다. 다시 말해 아무리 강한 무기라도 그것을 조작하는 손이 있어야 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인간이란 그런 존재다."

"..."

"그대여, 옛날 인간들이 쓰던 무기 중엔 석궁이 있었다. 어느 정도 연습을 요하던 활과 다르게 석궁은 사용 방법을 알게 되면 적은 훈련량으로도 능숙하게 쏠 수 있었다."

"..."

"다시 말해, 석궁을 쏠 수 있을 정도로 훈련만 하더라도, 그대는 이미 어엿한 사수이다. 우리 오르카에 필요한 건 엘리트 사수가 아니라, 석궁을 잡고 쏠 수 있는 사수이다."



그렇게 말한 아스널은 다니엘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제야 그는 아스널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백전 백승의 인간이 되기 보단, 그들을 지휘할 수 있는 인간이 되는 것. 아스널은 심란해하던 그의 표정이 풀어지는 것이 보자 그제야 해맑게 웃어보였다. 그리곤 마치 친우를 부르듯 툭툭, 어깨를 두들기곤 그에게 말했다.



"그대여. 나는 그대에게 기대가 많다. 다른 대장들이야 걱정하겠지만 나는 그대가 훌륭한 엠프레시스 하운드의 대장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

"그대는 바이오로이드도 많이 아끼는 인간이라고 하지? 그것 만큼은 사령관과 견줄 수 있겠군. 그대 옆에 있는 이터니티가 온화한 웃음을 짓는 걸 보니 말이다."

"..."

"지휘관에게 필요한 건 완벽한 지휘 능력일 수도 있지만 더 중요한 건 부대원들을 생각하고 사랑하는 마음이다. 비록 그대는 사령관보다 부실한 몸이지만 사랑은 지휘처럼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 아니다. 힘껏 몸으로 부딪치는 것이 바로 사랑 아니겠는가!"

"그렇군요..."

"사령관은 늘 밤마다 힘껏 몸으로 부딪쳐 우리들을 사랑하고 아낌을 증명하지! 하하하! 어제는 넘치도록 힘들어 내가 그 뜨거운 사랑에 기절해버렸지 뭔가!"



사랑, 조금 아리송한 감정이었다. 며칠 전에도 그런 감정에 대해 이터니티와 이야기를 했었는데. 아스널은 호탕한 웃음으로 재차 다니엘의 어깨를 격려하듯 친 후 말했다. 훌륭한 지휘관은 부하들을 잘 지휘하는 지휘관이 아닌, 부하들을 사랑하는 지휘관이라고. 그렇게 따지면 이미 다니엘은 어엿한 지휘관이 된 거라며 그는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다 아스널이 떠나고, 조용히 말을 듣던 이터니티는 그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저는 군인과 군대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아스널 양의 말을 듣다보니 주인님께선 훌륭한 지휘관이 될 수 있으실 것 같아요. 멸망 전에도 늘 제게 따뜻하게 대해주셨잖아요."

"..."

"자신감을 가지세요 주인님. 저는 주인님이 잘 해내시리라 믿어요."

"... 고마워. 이터니티."



사랑, 물론 다니엘은 사랑을 한 적이 없었지만 사랑이 부대원을 아끼는 것이라면 그는 꼭 부대원들을 사랑해줄 것이었다. 조금 막막하던 마음의 안개가 걷히는 것 같았다. 물론 장화를 생각한다면 갈 길이 멀기야 하겠지만 말이다. 어느새 그의 뒤에서 이터니티는 그를 꼭 끌어 안았다. 풍만한 감촉과 그녀만의 달콤한 체향이 그를 부드럽게 감쌌다. 부드러운 머리칼이 그의 목 언저리를 간질였다.



"저는 주인님을 늘 믿어요."



그리고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이들이 있었다. 팔짱을 낀 채 지긋이 그들을 바라보는 건 다름아닌 바르그였다. 그리고 옆에선 천아가 다리를 꼰 채 턱을 괴곤 다리를 흔들거렸다.



"사령관과의 섹스에 미친 여자라 생각했는데... 저런 말도 하는군."

"왜 조용히 따라 온 걸까, 꼰대?"

"시끄럽다. 괜히 이상한 소리나 하는 게 아닐까 싶어 따라온 것 뿐이었다."

"흐음... 혹시 아스널 그 색녀가 강제로 도련님을 범할까 봐 걱정되서 온 건 아니고?"

"재미없는 농담 집어 치워라. 천아."



틱틱거리는 말투에도 불구하고 천아는 유들유들거리는 보라색 눈동자를 홉떴다. 특유의 보랏빛 뱀 모양 세로동공이 살짝 보이다 사라졌다. 바르그는 흥, 외마디 콧소리를 내더니 뒤로 돌아 걸어갔다. 다시 오르카 호로 들어가려던 바르그에게 천아가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야~ 꼰대?"

"..."

"넌 지금 저 코찔찔이 도련님이랑 여제 둘 중에 누가 더 나아보이는 지휘관 같냐?"

"당연히 여제님이시다. 도련님께선 필요 이상으로 감상적이시다."

"그래?"

"암살자에게 있어 감상은 독일 뿐이다. 우리 부대는 그 특성 상 여제님처럼 냉정해야만 한다. 로열아스널, 저 여자는 우리 부대의 특성을 모르고 나불거리는 것일 뿐."

"흐음... 그래? 그런데 어쩌나~ 그년, 그렇게 다루면 금방 삐뚤어질 텐데 말이지?"



바르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원래 마리아의 아래에 있었다면 그저 필요 없는 사냥개였고 주인을 물려는 사냥개는 자신이 직접 죽일 뿐이었다. 하지만 여제는 한 줌 흙으로 사라졌고, 사령관이 이끄는 오르카 호는 아스널이 말했던 모토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물론 바르그는 여전히 오르카의 그런 분위기에 적응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적어도 장화에게는 그렇지 않나 보다. 한때 주제 모르고 날뛰던 그녀를 어떻게 구워 삶았는진 모르겠지만 그녀를 길들이고 오르카의 일원으로 받아주는데 성공했다.



"바르그."

"... 왜 자꾸 귀찮게 질문하는 것이냐?"

"네 생각으론 저 응석받이 도련님. 완전 지휘관 실격 아냐?"

"실격이다."

"으흥~ 단호하네 꽤?"

"... 하지만 도련님과 비슷한 사령관이 저항군을 이끌어 이 자리까지 온 거라면. 내가 틀린 것일 수도 있겠지."



그렇게 말한 바르그는, 더는 대답하지 않겠다는 듯 단호한 걸음으로 입구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천아는 알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훌쩍 일어서곤 터벅거리며 다가왔다. 발걸음 소리에 사령관과 이터니티가 돌아보니 늘 그랬듯 보라색 세로 동공을 반짝이던 천아가 보였다. 그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다가오더니 이내 다니엘의 손을 잡았다.



"뭐하는 겁니까, 천아양?"

"아~ 괜찮아. 네 주인님 안 잡아 먹어. 지휘 교육은 끝인가? 그럼 나랑 좀 놀아도 되지 않을까?"



그나마 조금 편한 대원인 천아. 잠시 생각하던 다니엘은 이터니에게서 조금 물러섰다. 약간 아쉬운 눈빛이 그녀의 얼굴에서 묻어났다. 잠깐 천아랑 이야기 좀 하다 올게, 라고 말한 순간이었다. 천아는 그의 연약한 팔에 팔짱을 꼈다. 그리곤 그를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겼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다니엘은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지만, 혀를 쏙 내밀며 천아는 능글거리듯 그에게 말했다.



"며칠 전에 우리 데이트 약속 잡지 않았나~ 어이 관짝녀. 네 주인이랑 나랑 약속 잡았는데, 둘이 데이트 좀 하고 와도 되지?"

"관짝... 녀요?"

"너 맨날 주인이랑 같이 죽겠다고 관짝 들고 다니잖아. 아냐? 흐음..."

"제 숭고한 사명이에요 천아양."

"그래? 그래~ 그럼 너 어차피 주인이랑 관짝 들어가서 영원히 있을 텐데, 그럼 살아있을 땐 내가 빌려가는 거에 불만은 없겠지?"

"그, 그건..."



아까까지만 하더라도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던 이터니티가 당황한 듯 두 눈을 연신 깜빡였다. 통쾌한 한 방을 먹였다는 듯 천아는 혀를 내밀어 파닥였다. 그리곤 다니엘을 끌고 오르카 호 내부로 들어갔다. 그렇게 안으로 들어 온 천아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그를 어디론가 끌고 갔다. 오르카 호의 중앙으로 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멸망 전의 도시 중심가를 떠올리는 듯한 거대한 삼점가에 들어섰다. 천아는 신기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그에게 말했다.



"오르카 호 엄청 크지? 나도 처음 왔을 땐 놀랐다니까? 그렇게 방에만 박혀있지 말고 나랑 좀 돌아다녀보자고~"

"... 아, 아 네. 천아씨."

"아. 내가 잠깐 알바뛰는 곳이 있는데 말이야. 거기 한 번 가볼래?"

"아 그, 그럴까요?"

"거기 커피 꽤 맛있거든. 호라이즌 애들이 운영하는 카페야."



지리를 알 수도 없고.... 하는 수 없이 다니엘은 그녀에게 끌려가듯 그곳으로 향했다. 환자복을 입은, 천아보다 조금 큰 키의 남성과 마치 그의 친한 친구처럼 착 달라 붙은 천아의 모습이 바이오로이드들에게 보였다. 그간 소문으로만 듣던 두 번째 인간을 보던 그들은 사령관과 다르게 조금 연약한 그의 모습에 의아해하면서도 호기심이 생긴 듯 시선을 집중했다.



"너도 꽤 인기 있네? 지나가는 애들이 다 쳐다본다?"

"그, 그게... 이런 곳을 환자복 입고 돌아다니니까..."

"아~ 그럼 카페 들렸다가 오드리한테 옷이라도 하나 만들어달라 부탁하자~"



정신 없는 천아의 말에 어지럼증을 느끼는 다니엘이었다. 그렇게 먼저 끌려간 곳, 시원한 바다 풍경이 보이는 유리벽이 보이는 간판에는 『Cafe Horizon』이라 써 있었다. 들어오자마자 그들을 반겨준 건 세이렌이었다. 금발의 메이드 복장... 이터니티를 보았기에 익숙할 법했지만 어딘가 상당히... 노출도가 높은 느낌이 들었다. 물론 얼굴을 붉히는 것과 다르게 그녀는 바짝 다가 와 애교 가득한 목소리로 다니엘에게 인사했지만 말이다.



"어서오세요? 어, 두 번째 인간님이시죠? 이렇게 얼굴을 뵙는 건 처음이네요!"

".... 반가워요."

"꺄하하하! 진짜 두 번째 인간님? 천아가 데리고 온 거야?"



그리고 자신을 마치 깔보는 눈빛을 한 조그마한 여자 아이 테티스가 메뉴판을 들고 총총거리는 발걸음으로 따라왔다. 천아는 기분 내키는 대로 웃으며 그를 자리에 앉혔다. 그렇게 메뉴판을 들고 온 테티스에게 음료 주문을 시키는데, 대뜸 주문을 받고 가려는 테티스를 향해 천아는 베시시 썩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맞다~ 테티스. 내가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응? 뭔데~"

"지금 혹시, 그 성질 더러운 고양이도 알바 하는 중?"

"지금 옷 갈아 입으러 들어갔어. 왜?"

"걔한테 서빙 좀 부탁할게~ 두 번째 인간이 왔다는 말은 빼고 말이야."



고양이? 다니엘은 누구를 말하는지 잘 분간이 가지 않았다. 천아는 낄낄거리며 말했다. 됐고, 재밌는 구경일 테니 보라고. 하는 수 없이 기다리던 와중 얼마 지나지 않아, 앞치마를 필사적으로 내려 자신의 아랫부분을 감추면서도 어쩐지... 분노와 치욕스러움 그 중간의 어떤 감정을 품은 채 빨갛게 달아 오른 표정으로 누군가가 걸어왔다. 다니엘은 그녀를 보자마자 당황스러움에 사로잡혔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에게 살기를 내뿜었던 장화였기 때문이었다.



"어머~ 주인한테 화내고 도망간 길고양이가 여기서 알바를 하고 있었네?"

"시, 시끄러워!"



빨간 고양이 귀와 고양이 꼬리가 장화의 분노와는 언벨런스하게 살랑거렸다. 신경질적으로 테이블에 음료를 내려 놓은 장화는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며, 심지어는 얼굴을 붉히기까지 하는 다니엘을 보자 울화통이 치밀었다. 하필 자신이 제일 보이고 싶지 않은 복장을 보이게 될 줄이야. 사령관이 아이들과 한 번 어울려 보라 해서 못 이긴 척 일을 하게 되었는데, 하필 그 좆같은 여제의 아드님이 올 줄은 몰랐다. 치욕스러웠다. 가슴이 그대로 드러나는 비키니와 보일듯 말듯 비키니 팬티를 가린 앞치마를 필사적으로 내리려 했다.



"장화야. 일할 땐 '야옹'이라 붙이는 거 몰라?"

"씨발년이... 장난 하냐?"

"못된 고양이네요. 그렇죠 도련님?"

"... 아, 음..."

"못된 고양이한테 벌을 좀 줘야겠어요 도련님. 그렇죠?"



베시시 웃던 천아는 대뜸 다니엘의 팔목을 잡더니



"꺄악?!"



그대로 냅다 장화의 둔부를 때렸다. 멋도 모르게 손이 나갔던 터라 장화의 왼쪽 볼기는 그의 손자국이 선명히 남았다. 천아는 놀리듯 턱을 괴곤 장화에게 말했다.



"버릇 없는 고양이 같으니라고~ 그렇죠 도련님?"

"씨발.... 년이. 너 끝나고 두고 보자?"

"손님으로 온 도련님이랑 나한테 꽤 무례하네?"



천아는 다시 다니엘의 팔목을 잡곤 시원하게, 장화의 볼기를 때렸다.



"흐읏?!"

"이제 좀 균형이 맞네~ 아아... 양쪽에 도련님의 손바닥 자국이 나 있는 음란한 암컷 고양이라~ 탈론 허브에 기획물로 등장하는 거 아냐?"

"이 개같은 년이?!"



다니엘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장화를 보았다. 금방이라도 죽일 듯 노려보는 보랏빛 안광이 잔뜩 낀 경멸의 시선, 수치와 분노에 사로잡혀 욕짓거리를 하는 와중에도 어쩐지 자꾸만 자신의 가슴을 가리고 앞치마를 계속 내리려는 그 모습은 아이러니하면서도 조금... 야하게 느껴졌다. 그 때문일까, 잠잠했던 그의 아랫도리가 정직하게 불룩, 올라가기 시작했다. 천아가 이를 눈치 못 챌 리 없었다. 잔뜩 성난 그의 아랫도리를 보자 그녀는 장화를 놀리듯 웃으며 말했다.



"쇼타 자지에 암컷 타락당한 나. 푸흐흐흡! 아~ 너무 재밌는 제목 아냐?"


역시나 초고속 암컷 타락 부대 엠프레시스 하운드.



근데 생각해보니 이터니티까지 쓴 걸 보면

의도치는 않게 테시 딸내미들 팬픽이네.


테시가 넘 꼴리게 잘 그려서 그런 거야...


다음 화: https://arca.live/b/lastorigin/69666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