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중국과 러시아를 가르는 국경 근처에 위치한, 폐허밖에 안남은 주택 단지. 늘 적막했던 평소와는 달리 시끄러운 총포음이 오가자 이변에 놀란 한 소녀가 둥지로 삼은 건물에서 후다닥 뛰쳐나왔다.


쌀쌀한 날씨에 대비해 두터운 코트를 껴입은 소녀는 작은 구체 드론을 하늘에 띄운 뒤 한쪽 눈에 망원경을 갖다댔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 비춰진 광경에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도무지 셀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철충이 국경을 뚫고 쳐들어오고 있었다. 소녀의 입장에선 인류멸망 이후 철충이 이렇게 대규모로 움직이는 건 처음 본 지라 자연스레 오싹함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국경을 지키던 회색의 AGS들이 매섭게 발포하며 응전했으나 얼마못가 새까만 파도에 휩쓸려 철충의 일원이 되고말았다. 


"히익... 큰일났다...!"


사태의 위험성을 파악한 소녀는, 그동안 모아둔 과자와 식량 따위를 탄입대와 핸드백에 있는대로 쑤셔넣은 뒤 허겁지겁 내륙쪽으로 도망쳤다.


***


냉대 기후 지역에 들어선 모양인지 어느새 도로 양 옆에 자라난 가로수가 전부 침엽수로 교체돼있었다. 창문을 열어보니 차가운 바람이 세차게 부는 게 느껴진다. 여기서 더 가면 눈 덮인 땅도 나올텐데, 지금 옷으로 버틸 수 있을까.


"대장, 창문 닫아! 바람 들어와!"


"그냥 기온만 확인해보려고 했을 뿐이야."


옆에서 운전중이던 엘븐의 투덜거림에 손가락으로 창문 버튼을 위로 당기자 창문이 스르륵 올라가 닫혔다.


지금 엘븐이 입고있는 옷이라고는 가슴골이 훤히 드러난 반팔 셔츠와 팬티 수준으로 짧은 핫팬츠 뿐. 물론 보기엔 좋긴 한데 이 날씨에 저런 꼴로 다니면 당연히 추울 수 밖에 없다.


"엘븐, 지금 입고있는 것 말고 다른 옷은 없어? 계속 그 옷만 입고 다니면 추울텐데."


"당연히 있지, 예전에 우리 셋이서 러시아 건너서 한반도까지 들어갔는데. 여분의 옷도 조금 챙겨왔긴 한데... 외투는 셋이서 입을 거 한벌씩밖에 없거든. 대장이랑 LRL이 입을 옷은 있어?"


"없어, 지금 입고있는 옷 뿐이야. 식량만 신경쓰느라 옷은 전혀 못구해뒀거든. 클로버도 단벌신사인 것 같고."


"다음 마을에 도착하면 옷도 좀 구해놔야겠네... 스읍, 안되겠다. 신경쓰니까 더 추워! 잠깐 차 좀 세울게."


산길 한가운데서 트럭이 부드럽게 멈췄다. 엘븐이 뒷창문을 열고 트레일러에 있는 이그니스한테 외투를 건네받는 동안 나는 한가하게 경치나 구경했다. 차가 움직이는 소리가 사라진 덕에 바람 소리가 더 선명하게 들렸다. 


그러다 문득 바람소리에 이상한 소리가 섞여 들린 것 같은 느낌이 들자 나는 다시 창문을 내렸다.


"아~ 뭐하는 거야, 정말. 바람 들어온다니까..."


"무슨 소리 안들려?"


"뭐?"


엘븐이 표정을 굳히고선 가만히 귀를 기울이더니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가서는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트레일러에 타고있던 LRL과 클로버 에이스도 뛰쳐나와 소리의 근원을 파악하려고 했다. 


차에 시동이 걸려있는 이상 차 안에선 바깥의 소리에 제대로 집중할 수 없었기에 나 역시 차에서 내렸다.


"인간, 뭐하는거야! 왜 너까지 내리는 건데!"


"아니, 나도 뭔지 확인해보려고..."


내리자마자 LRL에게 한 마디 들은 나는 잠시 멋쩍어하다가 다시 소리에 집중했다. 저 멀리서 두두두 하는 소리가 간혈적으로 들리고 있었다.


"이거... 총성이지?"


"맞아, 그것도 기관총같은데.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 싸우고 있는 게 분명해. 기계제국에 맞서는 생존자인걸까?"


"혹은 펙스랑 철충이랑 영역다툼 하는 것일수도 있지."


어렴풋이 소리가 들리는 방향은 우리가 가던 길, 즉 앞쪽이었으나 정작 쭉 뻗은 도로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하늘 위도 마찬가지로 텅 비어있었다. 만약 저 앞에 철충이나 다른 적이 있는거라면 이대로 직진하는 것은 무모한 짓이다. 적이 없는 방향으로 가기 위해선 정확히 어디서 소리가 나는 건지부터 알아야만 했다.


잠시 기다리자 소리의 근원이 가까워지면서 비로소 자세한 방향을 특정할 수 있었다. 소리가 들린 곳은 언덕 밑에있는 다른 도로였다. 최대한 몸을 수그린 채로 울타리에 기대어 언덕 밑을 내려다보자 철충 여러마리한테 쫓기는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사람의 형상인 걸로 보아 바이오로이드임이 분명했다.


흰 코트를 입은 하얀 여자애가 한 손에는 진압 방패를, 다른 한 손에는 총을 들고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대략적인 형상만으로도 누구인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저건 알비스잖아...!"


알비스는 도망치는 중간중간 주변의 버려진 차에 몸을 숨겨가며 간간히 철충한테 대응사격을 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녀를 쫓고있는 철충의 수가 이상하리만치 많다는 것이었다. 어림잡아 한 다스는 넘을 듯한 수의 철충이 고작 바이오로이드 한 명을 쫓는다니, 분명히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알비스도 철충도 이 위에있는 우릴 눈치채지 못한 모양인지 우리에겐 눈길도 안주고 있었다. 이 광경을 싸늘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던 LRL이 입을 열었다.


"저 녀석한테 시선이 쏠렸군. 빨리 차에 타, 인간. 이 틈에 빠져나가자."


이 아이가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말에 나는 물론이고 옆의 엘븐과 클로버까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뭐? 아니, 알비스는... 저 아이는 어쩌고!"


"어차피 곧 죽을거야."


"아직은 안죽었잖아!"


"냉정하게 상황을 봐, 인간. 저 더럽게 많은 철충이 안보여? 괜히 구하겠다고 뛰어들었다가 우리가 쫓기게 되면 살 수 있을 것 같아? 우리 몸 챙기기도 바쁜데 영웅 행세할 여유따윈 없어."


눈을 부릅 뜬 LRL이 또박또박 따지자 나는 할 말을 잃었다가 다시 총성이 들리는 쪽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총알이 다 떨어진 모양인지 알비스의 총구에서 불꽃이 사라졌다. 당황한 알비스는 방패 뒤에 숨어서 허겁지겁 탄입대를 뒤적거렸으나 애꿏은 초코바만 땅에 후두둑 떨어졌다. 본능적으로 초코바를 주우려고 숙였다가 방패에 총탄이 튕기는 소리에 놀라 머리를 감싸며 웅크렸다.


그 위태위태한 모습을 보니 마음이 옥죄여왔고, 내 입은 머리를 거치지 않고 결정을 내려버렸다.


"구하러 가자."


"인간!"


"좌우좌, 감옥에 갇혀있을 때를 생각해봐. 우린 누구에게도 기대지 못하고 홀로 죽음을 기다린다는 게 어떤 심정인지 잘 알잖아."


순간 움찔한 LRL은 잠깐동안 침묵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모두를 구할 수는 없어."


"눈앞에 있는 단 한 사람 정도는 구할 수 있겠지. 안 그래, 클로버...

...클로버 어디갔어?"


고개를 돌리니 아까까지만 해도 엘븐 뒤에 서있던 클로버 에이스가 안보였다. 그 때 언덕 밑에서 누군가의 우렁찬 외침이 들렸다.


"클로버~~~!"


어느새 무기를 들고 언덕을 뛰어내려간 클로버가 속도를 살려 있는힘껏 도약했다. 그녀가 외친 기술명이 쩌렁쩌렁 울리자 반사적으로 시선이 쏠린 철충 무리는 당황한 탓에 공격을 멈춰버렸고, 클로버는 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


"킥—!!!"


이윽고 철충 무리의 선봉에 서있던 나이트칙이 클로버의 날라차기에 정통으로 맞고 날아갔다. 멋지게 착지한 클로버는 곧바로 알비스를 등지고 철충 무리를 마주했다.


"걱정마, 꼬마 친구! 구하러 왔어!"


***


난데없이 눈 앞에 나타난 영웅에 알비스는 놀랄 수 밖에 없었다. 


클로버는 아직 일어서지 못하고 있는 알비스에게 자신의 뒤에 숨으라고 외친 뒤 곧장 적에게 달려갔다. 철충을 부숴버릴 정도로 강하게 칠 수는 없었지만 하나하나 망치로 쳐서 날려버리면서 거리를 벌릴 수는 있었다. 


그러나 적이 당황하는 것도 잠시, 새로운 적을 인식한 적들이 공격을 재개하자 수에 밀려 주춤할 수 밖에 없었다.


"큭...!"


"어, 언니! 알비스 뒤로 숨어! 알비스한테 방패가 있어!"


"걱정마! 이 정도로 끄덕없으니까!"


"하지만 언니 혼자서는...!"


그 때, 측면에서 검게 도색된 트럭이 나타나 철충에 감염된 램파트를 들이받았다. 램파트 철충이 나가떨어지자 트럭은 급정지했다.


"히익... 사람을 쳐버렸다...!"


"엘븐, 정신차려! 저건 철충이야!"


"아, 맞다. 그랬지. 뇌파 때문에 순간 헷갈렸네."


트럭 창문 너머로 운전대를 잡고있는 엘븐과 그녀의 옆에 앉아있는 대장을 본 클로버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먼 길을 돌아오지 않고 클로버가 그랬듯이 저 언덕 위에서 비탈길을 타고 바로 내려온 것이었다. 


"대장! 와줬구나!"


"어서 타!!"


트럭이 클로버, 알비스와 철충 사이를 가르면서 바리케이드 역할을 해주었다. 방탄은 기본옵션으로 달린 차라서 잠깐동안이라면 철충의 공격에도 버틸 수 있었다.


트레일러 문이 열리자 클로버는 냅다 한 손에 알비스를 들고 뛰어가 안으로 몸을 던졌다. 클로버와 알비스 두 명 다 올라탄 걸 확인한 LRL은 차문을 쾅 닫았고, 그 소리를 신호로 엘븐은 차를 몰아 철충이 오는 반대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눈매가 사나운 사백안으로 변한 그녀는 거침없이 난폭운전을 하고있었다. 한편 덜컹거리는 트레일러 안에서 알비스는 다른 바이오로이드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있었다.


"괜찮나요?"


"어, 어어..."


갑작스런 구사일생에 어안이 벙벙해진 알비스는 이그니스의 물음에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그런 그녀의 정신을 차리게 해준 건 수십년 만에 듣는 남자의 목소리였다.


"클로버, 어디 다치진 않았어? 알비스는 무사하고?


"물론, 문제없어! 고마워, 대장. 덕분에 살았어!"


"어라...? 인간? 설마 인간님이 타고있는 거야?"


"그렇다네, 저기 조수석에 타고있지. 뇌파도 안느껴지고 여기선 얼굴도 안보이지만. 그보다 뭣 좀 물어보고 싶네만."


드론이 알비스의 얼굴 앞으로 날아오자 그녀의 시선이 드론에게로 옮겨갔다.


"어? 정찰 드론...이야?"


"나는 정찰용이 아니라 공업용이라네. 아무튼 내가 하려던 말은, 자네 혼자인건가? 다른 일행은 없나?"


드론이 던진 질문에 알비스는 우물쭈물하다 주눅 든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으응...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베라 언니랑, 님프 언니랑 같이 살고 있었는데, 다 철충한테..."


"그렇군... 유감이네. 그나저나 어쩌다가 저 많은 철충에게 쫓기게 된건가?"


"알비스도 몰라... 저어기 마을에서 숨어살고 있었는데, 어제 엄청나게 많은 철충이 국경을 뚫고 여기로 넘어오는 걸 봤어. 그래서 도망쳤는데, 몰려드는 철충한테 총 쐈더니 화났나봐."


"자네, 철충을 공격할 수가 있는건가?"


"응. 옛날에 인간님들이 살아있을 때 철충이 나타나면 싸우라고 명령을 들었었거든."


"아하, 생존개체였군. 그보다 국경에서 철충이 넘어왔다는 건... 이거 큰일났구만."


드론은 창문을 넘어 운전석 쪽으로 날아갔다.


"안좋은 소식일세! 중국에 모여있던 철충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 같네. 십중팔구 펙스도 그동안의 대치 상태가 깨진걸 눈치챘으니 앞으로 경계가 더 삼엄해질 것으로 보이네."


"그건 나중에 얘기하자. 지금은 더 중요한 일이 있으니까..."


"여태껏 왔던 길을 역주행하고 있다는 점 말인가?"


"아직도 적들이 쫓아오고 있다고!"


손에 땀 날 정도로 운전대를 꽉 쥐고있는 엘븐이 소리를 질렀다. 트레일러 안에 탄 바이오로이드들은 창문이 하나도 없어 바깥 상황을 볼 수 없었기에 문이 닫힌 순간 안도의 한숨을 쉬었으나 운전석의 엘븐과 대장은 그럴 수가 없었다, 사이드미러로 자신들을 맹렬히 쫓아오고 있는 철충 무리가 보였으니까.


"나이트칙이 저렇게 빨리 달릴 수가 있었어!?"


"고작 차 탄걸로 그리 쉽게 도망칠 수 있었으면 인류가 멸망하지 않았겠지!"


철충 떼거지를 보고 기겁한 대장이 내뱉은 말에 엘븐이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엘븐의 난폭운전에 더불어 지치지도 않고 몰려드는 철충에 그는 정신이 혼미해질 것만 같았다.


"일단 밟아! 최대한 밟아!"


"이미 그러고 있으니 조용히 좀 해!"


최대속도로 달리고 있음에도 뒤를 쫓던 철충 무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고, 사정거리 안에 들어서자 기어코 발포하기 시작했다. 트레일러 문에 총탄이 박히는 소리가 나자 안에 타고있는 이들도 일제히 긴장하기 시작했다.


"제, 제가 화염방사기로 적들을 물러나게 해보겠습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하지 마! 문 여는 순간 방패가 사라지는 꼴이라고!"


"그건 걱정마! 알비스한테 방패가 있어!"


"이 멍청한 꼬맹이가, 니 키보다도 작은 방패로 가린다고 얼마나 가려지냐!"


"너, 너도 꼬마애잖아...!"


"아앙!?"


"히익!"


"LRL, 우리끼리 싸워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트레일러 안에 탄 이들이 옥신각신하며 이 상황을 타계할 방법을 모색해봤지만 그녀들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저 엘븐의 운전만으로 적들을 따돌리도록 빌 수밖에 없는 상황. 그러나 기름이 다 떨어질때까지 밟아도 뭔가 변화가 생기지 않는이상 철충을 따돌리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그 순간, 알비스가 클로버의 난입에 의해 살아나났듯이, 예상치 못한 난입이 상황을 바꾸었다.


"엘븐, 앞에!"


"왜, 또 뭔데... 어...!?"


계속 사이드미러를 힐끔거리며 무작정 직진하던 엘븐은 앞창문을 본 순간 놀라서 할 말을 잃었다. 까만 색의 전투기 3대가 편대를 짜서 정면 하늘에서 날아오고 있었다. 2m 남짓한 크기의 소형 전투기, 그걸 즉각 알아본 건 드론이었다.


"정찰형 인터셉터! 펙스의 병력일세!"


"이번엔 펙스라고!?"


인터셉터 편대는 순식간에 그들이 타고있는 트럭을 지나쳐 그 뒤를 쫓고있는 철충 무리에 미사일을 쐈다. 대장과 그의 일행은 사이드미러로 철충이 터져나가는 게 보였음에도 안심할 수 없었다. 


눈 앞에 요새화된 도시가, 즉 레모네이드 감마의 거점이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폴른과 포트리스 따위로 이루어진 AGS 병력이 도시를 감싸서 진을 치고 있었다. 


뒤에는 철충, 앞에는 펙스. 조금 전까지 철충 추격대에 미사일을 퍼붓던 인터셉터 편대도 어느새 돌아와 트럭을 따라오고 있었다.


"이런 젠장...! 대장, 어떡하지? 옆으로 꺾을까?"


"직진하게나! 저 도시로 들어가야 하네!"


"뭐!? 드론 너 임마, 지금 뭔 소리를 하는거야!"


"여기서 꼬리를 빼면 펙스한테도 쫓길걸세! 그리고 나한테 생각이 있네!"


드론의 제안에 대장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엘븐은 이판사판으로 돌진했다. 펙스의 AGS 분대는 양 옆으로 조금씩 이동해서 차가 지나갈 틈을 만들었다.


그렇게 AGS를 지나쳐 도시 안으로 들어오는 데 성공하자 요새의 문이 닫혔고, 엘븐은 곧장 나갈 길을 찾기 시작했다.


"좋아, 이제 이대로 도시 반대편으로 나가면 되는 거겠지!"


"아니, 그게 아닐세! 차를 세우게! 안그랬다간-"


'콰지끈!'


갑작스런 충격에 트럭이 들썩이면서 멈췄고, 동시에 에어백이 터져서 엘븐과 대장의 얼굴을 강타했다. 그리고 드론은 관성으로 차 앞유리에 쳐박혔다.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엘븐이 에어백을 치우니 트럿 보닛을 짓밟고있는 거대한 로봇의 발이 보였다. 회색 기간테스가 트럭을 밟아 세운 것이었다.


대장뿐만 아니라 트레일러에 타고있던 모두가 급제동의 충격에 얼얼해하고 있는 사이 펙스 소속의 군용 AGS들이 몰려와 트럭을 포위했다.


"스캔 요청."


"스캔 중... 신원 미상 바이오로이드 8기 확인됨."


트럭 주변을 맴돌던 펙스의 드론은 대장까지 바이오로이드로 판단해서 총 8명이 타고있다고 응답했다.


"대, 대장! 어떡하지?"


"드론! 네가 말한 생각이란게 뭐야?"


"잠깐만... 내가 지금 움직일 수가 없는..."


"침입자 확인. 현장 사살하겠음."


기간테스의 지시에 AGS들이 공격태세를 갖추었다. 일촉측발의 상황 속에서 앞유리에 끼어있던 드론이 소리쳤다.


"잠깐 기다려! 아군이다! 특수식별코드 ZB-2401!"


"공격 중지."


당장이라도 쏠 것 같았던 AGS들이 얼어붙은 것 마냥 일제히 멈췄다. 


"특수식별코드 ZB-2401. 레모네이드 오메가 직속 스파이 드론, 확인됨."


펙스 기간테스의 말에 대장과 엘븐은 새삼 잊고있던 사실을 깨달았다. 속으로 아 맞다, 얘 펙첩 출신이지 하고선.


"너 이 자식! 적의 끄나풀이었...! 으읍!"


"쉿, 쉬잇!"


그 사실을 모르던 클로버가 날뛰려했으나 LRL과 더치걸이 잽싸게 입을 틀어막았다.


대장이 드론을 살짝 밀어줘서 몸을 빼낼 수 있도록 도와주자 자유가 된 드론이 기간테스의 머리 높이까지 날아올랐다.


"드론 ZB-2401. 이곳에 온 목적을 밝혀라."


"내가! 그... 레모네이드 오메가의, 아니, 오메가님의 임무를 수행중이었네! 그 임무는... 이 바이오로이드... 탈주자들을 잡아서... 미국으로 배송하는 일이지!"


누가봐도 서투른 연기였으나 드론의 펙첩이라는 신분은 진짜였기에 기간테스는 저 즉석으로 지어낸 임무를 묵묵히 들어주고 있었다. 


"탈주자 포획 임무라면 펙스제가 아닌 바이오로이드가 포함된 이유는 뭐지?"


"그게... 아, 그래. 비밀! 비밀임무일세! 내가 레모네이드 감마 소속인 자네들한테 모든걸 얘기할 이유는 없지! 안그런가?"


"포로 제압에 문제가 있는가?"


"아니, 없네! 내가 잡은 모든 포로는 완벽한 통제 하에 있네!"


"그렇다면 조금 전에 차량이 돌진한 건-"


"완벽한! 통제 하에 있네!"


"...확인됨. 운송 수단은 무엇인가."


"그야 이 트럭이... 아니, 그게..."


드론은 말끝을 흐렸다. 여태껏 타고다녔던 트럭은 기간테스한테 밟혀 고장나버렸기 때문이다.


"여분의 이동수단이 없다면 레모네이드 오메가한테 연락을-"


"아니아니아니아니 하지말게! 통신을 최소한으로 써야하는 임무라서 멋대로 연락해서는 안되네! 레모네이드 오메가가 직접! 미국에 도착하고 난 뒤에 연락하라고 했다네!"


물론 감마 휘하의 기간테스가 오메가한테 직통으로 연락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연락하겠다고 하면 기간테스 위의 지휘관 AGS에게, 그 AGS를 통해서 레모네이드 감마에게, 감마를 통해서 오메가한테 연락이 가게 될 것이다. 즉 두 레모네이드에게 인간의 존재가 알려지는, 지뢰 2개를 동시에 밟는 상황. 그것만큼은 피해야 했었기에 드론은 알아서 하겠다며 상부로의 연락을 차단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북미 대륙으로는 어떻게 갈 계획인가."


"배를 훔ㅊ, 빌리려고 했지! 자네들의... 배를 말일세. 우리 모두 펙스의 일원이니 그 정도 지원은... 가능하겠지?"


"확인됨. 벤쿠버 항구로 가는 배에 실어 이송하도록 하겠음."


"엇, 잠깐. 지금? 아니, 아니아니, 그게 아니라...!"


"베링 해! 알레스카!"


밑에서 보다못한 대장이 소근거리며 힌트를 주자 그걸 캐치한 드론이 즉각 새 변명거리를 만들어냈다.


"나는 포로들을 베링 해협을 거쳐서 알레스카로 이송해야 되네! 다른 데는 안되네! 무조건! 알레스카로!"


"알레스카로 이송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건, 비밀일세! 아무튼 알레스카로 보내야 하네! 그것도 반드시 베링 해협을 통해서 보내야만 하네!"


드론이 억지부리기 시작하자 기간테스는 어이없어 하는건지 새 배편을 계산하는건지 잠시동안 말없이 응시하다가 마침내 답을 내놓았다. 


"확인됨. 모든 포로는 베링 해협을 건널 항구까지 철도로 운송하도록 하겠음."


***


"거 참 끝내주네. 기어코 기차에 타서 이동하게 됐으니 말이야."


"그래도 철충의 추격도 떼어냈고, 펙스에 붙잡혀 현장 사살되는 엔딩도 피했으니 그리 나쁘지많은 않지? ...아마도."


바닥에 앉은 더치걸이 빈정거리자 엘븐이 달래보았지만 그녀도 자신없는 목소리였다. 우리는 지금 트럭을 버리고 펙스의 기차에 타서 이동하고 있다. 아니, 운반되고 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거다. 


뇌파을 가리는 구속구 덕에 펙스의 AGS가 나를 바이오로이드로 인식했고, 거기다 드론이 펙첩 신분을 이용해 펙스 소속인 척 해서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실상 펙스의 포로로 잡힌 상태인 건 변함없다. 짐짝마냥 기차의 화물칸에 실려진 데다 마음대로 기차에서 내리긴 커녕 다른 칸으로 이동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 상황, 어찌보면 죄수 호송 차량이나 다름없다. 게다가 여긴 창문도 없고 의자나 앉을만한 데도 없어서 트럭 트레일러에 탔을 때보다 더 안좋았다. 우릴 산 채로 이송해야 한다는 건 아는 모양인지 적어도 난방은 틀어주는 것 같다.


"난 지쳤어... 오늘 엄청난 일들이 자꾸 일어나서 피곤해..."


알비스는 바닥에 대자로 뻗었다. 그러고보니 알비스 구한 뒤로 정신없는 일의 연속이라 얘기를 나눌 겨룰도 없었지. 나는 쓰러져있는 알비스한테 다가가 손을 슬며시 내밀었다.


"저기, 우리 아직 인사도 제대로 못나눴지? 만나서 반가워, 알비스."


"아, 맞다! 인간님 있었지! 인간님이 여기 대장님이야?"


알비스가 눈을 반짝이며 벌떡 일어났다.


"응. 일단은."


"일단은이 뭐야, 일단은이. 대장이면 대장인거지."


옆에서 더치걸이 팔꿈치로 툭 치며 말했다. 알비스는 신경쓰지않고 내가 뻗은 손을 잡고 붕붕 흔들었다.


"응, 반가워 대장님! 난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의 T-13 알비스라고 해! 배고프지? 초코바 먹을래?"


"아니, 지금은 괜찮아. 넣어둬."


"어? 대장님, 초코바 싫어해..?"


"아니아니, 그게 아니라... 나중에 배고파지면 그 때..."


"알았어! 배고파지면 말만 해!"


알비스가 배시시 웃었다. 멸망 전 생존개체임에도 불구하고 좌우좌나 더치걸과는 달리 순수한 원래 성격을 유지하고 있는 모습이 괜히 신기하게 느껴졌다.


"이보게들, 내가 왔네! 즉흥적인 계획이라 아슬아슬했는데 어떻게든 된 모양이구만."


앞칸에 있던 드론이 잠겨있던 문을 레이저커터로 따고 들어오자 우리 일행 8명 모두 다시 한 자리에 모일 수 있었다.


"그냥 들어와도 되는거야?"


"들키면 포로 감시하러 온거라고 둘러대야지."


"정말로 감시하러 온 건 아니고? 기계제국의 첩자였다가 대장 편으로 전향했다고 들었는데, 혹시 아직도 우릴 속이고 있는 거 아냐?"


클로버가 째려보면서 쏘아붙이자 드론은 침착하게 자신의 행동의 이유를 설명했다.


"철충이랑 펙스랑 몽뚱그려 다 기계제국이라고 부르는 건가... 아무튼, 내가 정말로 오메가가 내린 임무를 수행하려고 했으면 인간만 챙기고 나머지는 죽게 내버려뒀겠지. 하지만 안그러고 전부 다 살 수 있도록 했잖은가, 거짓 임무를 지어내면서까지."


"그래서 놈들이 그걸 다 믿고 속아넘어간거라고?"


"현재 펙스에서 기용하는 AGS는 대부분이 AGS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AI의 지능이 낮춰진 상태라네. AGS라도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서 반기를 드는 걸 원치 않기 때문일세. 그래서 내 입장에선 속이기가 쉬웠다네. 놈들은 깊게 의심하고 따진다거나 하질 않지. 벽에 대고 얘기하는 느낌이라 답답할 때가 종종 있긴 하다만."


"잠깐만 아저씨. 아저씨는 전에 기능 한계상 거짓말은 못한다고 하지 않았어?"


더치걸이 끼어들자 드론은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속여서 미안하다만 그건 거짓말이었네. 그 때 더치 자네는 워낙 흥분했었기에 그렇게라도 말했어야 진정시킬 수 있을 거 것 같아 보여서 그랬네."


둘의 대화를 듣고 언제적 얘기를 하는거지 생각하다가 엘븐 일행과 처음 만났을때 더치걸이 날 죽이려했던 걸 기억해냈다. 그 때 드론 말빨로 겨우 멈출 수 있었지. 더치도 당시의 일을 기억해낸건지 더이상 캐묻지 않았다. 하지만 드론과 보낸 시간이 짧은 클로버는 아직 믿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거짓말이 가능하다는 증거는 있어? 지금 아무거나 해봐, 거짓말."


"알겠네. 1+1은 3일세."


"...아니, 그런 거 말고, 뭔가..."


"여기있는 대장은 사실 여자라네."


""뭐?""


"거짓말일세."


"..."


"...음. 클로버, 드론이 우리 편인건 사실일거라고 생각해. 결과적으로 드론 덕분에 우리 모두 살아남고, 이동수단도 얻었으니까."


내가 나서서 드론을 변호하자 클로버는 잠시 복잡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다가 드론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대장 말도 일리가 있네. 알았어. 의심해서 미안해. 친구끼리 의심해서는 안되는건데 말이야."


"괜찮네, 충분히 이해하네. 우린 만난 지 얼마 안됐기도 하고, 내가 펙스의 스파이였던 건 사실이니 말이야."


"이참에 미리 말해두자면 나도 아저씨랑 같은 스파이 출신이야."


"뭐!?"


갑작스런 LRL의 펙밍아웃에 클로버는 화들짝 놀랐다.


"그래. 그러니 나중에 내가 스파이 신분을 써먹어도 놀라지나 마."


"이럴수가... 이런 어린아이까지 스파이로 부려먹다니, 간악한 놈들 같으니라고...!"


"...저기, 왠지 내가 스파이란걸 알았을 때와 반응이 다르지 않나?"


클로버가 왠지 열의에 불타기 시작하는 한편 이번엔 이그니스가 질문을 던졌다.


"드론 씨, 저희의 무기와 짐은 어디에 있나요?"


"바로 뒷칸에 있네. 억지 좀 부려서 손 닿는 데에 싣도록 했지. 참고로 화장실도 뒷칸에 있으니 알아두게나. 간이 화장실 수준이지만."


"여기 밥은 나오는 거야?"


이그니스 다음에 질문한건 엘븐이었다.


"저기 구석에 있는 상자를 열어보게나. 식량이 들어있다네."


엘븐이 상자 덮개를 조심스레 들어올리자 아무런 상표도 이름도 안적혀있는 금박지로 포장된 직육면체의 무언가가 차곡차곡 쌓여있는 게 보였다.


"이건...?"


"우와! 초코바! 초코바다!"


알비스가 냉큼 하나 집어들어 포장지를 뜯자 길고 네모난 짙은 갈색의 내용물이 드러났다. 초콜릿이라기엔 검은 광택이 번들거리는 게 양갱이 연상되는 모양새였고, 아니나 다를까 행복한 표정으로 우물거리던 알비스의 얼굴이 금방 울상으로 변했다.


"초코... 초코가 아니야..."


"무슨 맛이야?"


"아무 맛도 안나... 씹는 느낌밖에 없어서 이상해..."


"일일 권장섭취량이 함유된 에너지바네. 옛날에 탄광에서 일할 때 이것만 지급됐어서 알아."


알비스 손에 들려있던 이빨자국이 선명하게 남은 덩어리를 유심히 살펴보던 더치걸이 말했다.


"진짜로 노예 취급이군..."


"그러니 지금 화물칸에 타고있지. 사고라도 나지 않는 이상 중간에 휴게소에 들리지도 않을테니 그동안 챙겨둔 식량이라도 꺼내먹는 수밖에 없네.

아무튼, 여기 타고있는 동안은 안전하네. 이 기차엔 레모네이드 감마 휘하의 경비 AGS 또한 타고있네. 우리가 위치를 벗어난다던가 하지만 않는다면 우릴 지켜줄걸세, 철충이 또 나타나도 우리 대신 요격해줄테고. 감마와 오메가가 내가 말한 임무를 교차검증하기라도 한다면 들통나겠지만..."


"미국에 도착하면 알아서 보고할테니 말하지 말라고 했잖아?"


"그거야 조약한 시간벌이지. 그 거점에 있던 깡통들이 분명 상부에 보고할걸세. 레모네이드나 그녀의 부관에게 직통으로 보고하진 않을테니 그 중간관리직인 것들이 계속해서 상부로 보고하지 않기를 빌어야지.

문의 잠금장치도 뚫었으니 상황에 따라선 도망칠 수도 있다네. 물론 달리는 기차 위에서 뛰어내리면 크게 다칠테니 그건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두세."


"그럼 더이상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는 것 같네... 그냥 쉬면서 항구에 도착하기를 기다리자."

 

내가 눕는 자세로 고쳐앉자 다들 차례차례 긴장의 끈을 느슨하게 풀면서 바닥에 편한 자세로 앉거나 누워 휴식을 취했다.


"저기 대장님. 무릎배게 필요하세요?"


"아, 괜찮... 아니, 필요한 것 같다. 신세 좀 져도 될까?"


"네, 이쪽으로 오세요."


이그니스가 싱긋 웃으며 무릎을 두드리자 나는 고맙게 호의를 받아들여 그녀의 무릎에 머리를 올려놓았 세상에 너무좋아 그동안 조수석에 괜히 탔나봐. 기왕 이렇게 된 거 베링 해협을 건널 때까지 느긋히 쉬자는 마음에 눈 좀 붙이려고 하던 그 때였다.


삐- 삐- 삐- 삐-!


갑작스레 불길한 음색의 비프음이 울렸다, 그것도 가까이에서. 나는 물론이고 다들 급박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인간, 뇌파...! 뇌파가 느껴져!"


"철충이 나타났다고!? 이것들이 벌써 따라붙은-"


"철충 말고! 니 뇌파가 느껴진다고!"


"뭐...?"


나는 그제서야 나를 제외한 7명이 일제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는 걸 인지할 수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비프음이 울렸던 건 바로 내 목에 걸려있는 구속구였다. 설마하는 마음에 조용해진 구속구를 툭툭 건드렸다.


"하지만... 이게..."


"...그거 불 꺼졌어."


"...오."


결국 이 지긋지긋한 구속구의 배터리가 다 떨어졌고, 바이오로이드들은 마침내 내 뇌파를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근데 왜 하필 지금?



라붕이 파티 2.0

뇌파 빽 없이 모은 파티원들, 드디어 정식으로 파티 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