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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콰과광!

 

굉음이 울려 퍼졌다. 사방에 더러운 파편들이 가시처럼 튀어나와 허공을 채웠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공방.

 

“어때? 이제 좀 싸울 맛이 나냐?”

 

[이 천박한 도구 따위가!]

 

자줏빛 기운을 온몸에 두른 채 장화가 땅을 박차 나아갔다. 거세게 팔을 휘둘러 와이어로 대기를 베었고 허공을 가르는 소리는 그녀의 뒤를 따랐다.

 

쿵. 둔중하다 못해 과격한 타격음.

 

동우가 조종하고 있는 홍련의 팔이 장화의 발길질을 막았다. 하지만 주변은 ‘막았다’는 표현이 무색하리만큼 엉망으로 변해버렸다.

 

콰자자자자작!

 

으스러지는 섹션. 격벽은 부서지다 못해 두꺼운 티타늄 장갑 밑에 숨겨져 있던 연약한 회로들이 모습을 드러냈을 정도다.

 

그저 단순한 일격. 하지만 족히 10m는 뛰어오른 장화가 허릿심을 이용해 휘두른 왼발은 막아내는 것만으로도 주변 지형을 바꿀 정도였다.

 

“지금까지 내가 너무 봐주면서 싸웠나? 왜 갑자기 힘을 못 써?”

 

[주제도 모르는 건방진 것이! 감히 내 아버지의 무덤을...]

 

“꼬우면 니도 제대로 싸우던가!”

 

쾅! 쾅! 쾅!

 

장화의 권격이 이어졌다. 홍련의 급소를 노린 주먹의 경로는 어지간한 바이오로이드에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날카롭고 다채로웠다.

 

그와 함께 이어지는 와이어의 파찰음. 소리보다 와이어가 더 빨랐기에 홍련을 조종하는 동우는 청각 센서보다 시각 정보에 더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끼릭- 끼리리릭-

 

어두운 그림자 속, 동우의 숨겨진 수백 개의 눈이 카멜레온처럼 360도를 휘저으며 장화의 공격 속 사각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481개. 다 찾았군.”

 

그걸 보고만 있을 엠프레시스 하운드가 아니었다.

 

“미호. 좌표를 불러주마. 놈의 카메라 렌즈를 쏴서 떨어뜨려라. 우린 저놈의 눈을 노린다.”

 

“확인 완료. 좌표, HUD로 업로드 해줘.”

 

격렬한 싸움 속에서 침착하게 들리는 지휘관의 말. 고양이처럼 얇아진 동공으로 전황을 살피던 바르그가 진지해진 말투로 전장에 임했다.

 

본디 무적의 용을 베이스로 만들어진 개체. 그렇기에 출중한 무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지만, 무엇보다도 바르그의 강점은 초인적인 관찰력이었다.

 

“34.11.465, 24.23.445, 1.32.443, 놈의 메인 프레임에 달린 눈이다.”

 

“확인.”

 

피빅! 픽! 픽!

 

소음기를 타고 조용하게 흐르는 격발음이 허공을 갈랐다. 그와 동시에 깊은 그림자 속에서 유리 깨지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깽그랑!

 

[무슨?]

 

장화와의 싸움에 집중하고 있던 동우는 순간 사라진 세 개의 카메라에 갑작스러운 데이터의 부재를 느꼈다.

 

동시에 울리는 시스템적인 경고음. 떠오르는 에러 코드들 속에서 동우는 당혹감이라는 감정을 난생 처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다음 좌표. 발사해라.”

 

피비비빅-

 

꺼져가는 카메라들.

 

동우의 부속 인공지능들이 분주하게 코어를 돌렸다. 사라지는 데이터를 대신할 다른 무언가가 필요했다.

 

촉각 센서, 망가진 레이저 더미, 하다못해 고장 난 회로 묶음까지. 부속 인공지능들은 뭐라도 느껴지는 것이 있다면 하나도 놓치지 않고 전부 동우에게 보냈다.

 

[아니. 안 된다.]

 

하지만 상대는 괴물. 오리진 더스트를 치사량까지 주입한 바이오로이드다. 수천 분의 일 초가 일격을 가르는 괴물들의 싸움에서 그런 널브러진 데이터 조각 따위는 의미가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지금껏 져본 적이 없었다. 철충이 알파 섹션에 쳐들어 왔을 때도, 오르카 호의 사령관이 생체 재건 장치를 이용했을 때도, 침입은커녕 정체조차 발각된 적이 없었다.

 

정체가 드러난다 해도 이곳에 들어올 수 있는 것은 바이오로이드뿐. 이미 수천, 수만 바이오로이드의 정보를 알고 있는 동우에게 지는 것은 상정할 수 없는 시나리오였다.

 

그 위대하다는 기적의 ‘칸’도, 살아 움직이는 재앙이라는 ‘레아’도, 전부 이길 수 있었고, 또 이겨냈다.

 

[어떻게?어떻게?어떻게?어떻게?어떻게?어떻게?어떻게?어떻게?어떻게?어떻게?어떻게?어떻게?]

 

그런데 어떻게?

 

“뭘 그렇게 생각해?”

 

콰자자자자작!

 

순간 멍해진 동우의 정신이 돌아왔다. 장화의 주먹이 홍련의 오른팔을 으스러뜨린 까닭이었다.

 

신체를 타고 흐르는 격통. 부러진 뼈가 근육을 찌르고 혈관에 구멍을 냈다. 복잡한 계산 없이도 일반적인 바이오로이드라면 머리가 꿰뚫렸을 일격이었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무슨, 무슨 짓을 한 거지?]

 

“뭔 짓을 하긴. 싸우는 거지.”

 

[그럴 리가 없다! 이 신체의 효율이라면 네년의 공격 따위에 당할 리가 없단 말이다!]

 

전황 분석 결과, 장화의 움직임은 지극히 단순했다. 약간의 페인트가 있긴 했지만 거의 일직선이라 봐도 무방한 경로로 동우를 몰아붙인 것이다.

 

피하려 했다면 어렵지 않게 피하려 했을 터. 헌데 이상하게도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파직!

 

[뭐?]

 

“불가사리, 여기 뜯으면 되는 거야?”

 

“몰라! 일단 싹 다 부숴! 부수다 보면 뭐 하나 나오겠지!”

 

당혹감에 연산이 어지러워지려던 차, 동우가 신경쓰지 않고 있던 청각 센서로 지성이라곤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이거 빨간선이다. 보통 이런 거 자르면 일 터지던데.”

 

“그런 말 할 시간에 잘라!”

 

“그러다 일 잘못되면 어떻게 해.”

 

“일 잘못되게 하는 게 우리 임무니까 그냥 해!!”

 

빠직! 빠직! 빠직!

 

“알았어. 그럼 힘준다?”

 

“뭐? 잠깐, 너무 그러지 말고...!”

 

“하압!”

 

쿠구구구구구궁!

 

고이 방패를 들고 하늘 높게 두 손을 든 드라코가 있는 힘껏 땅으로 방패를 찍었다. 그와 동시에 거의 지진에 비할 만한 진동이 섹션 전체를 뒤흔들었다.

 

원래라면 보강용 강철들로 피해가 분산되어야 했을 정도의 일격이었으나, 장화가 한바탕 휘저어준 덕분에 드라코의 방패는 티타늄 격벽을 유리처럼 깨뜨릴 수 있었다.

 

“이러면 되지?”

 

“...에이 씨발, 나도 모르겠다!”

 

그와 함께 파일 벙커를 장전한 불가사리.

 

그녀의 팔에 달린 추진체가 거대한 불꽃을 내뿜는 걸 보며 동우는 이번에 황당함을 느꼈다.

 

묘하게 느린 데이터 전달 속도. 부속 인공지능들의 기이한 과열량.

 

장화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보고 있지 못했던 것들이 이제야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비상 상황 발생! 긴급 수복 프로토콜 199203 시작!]

 

[대상을 배제하라. 사이드 암 제네레이터 과부하 허가. 가동률 153%!]

 

천장에 달려있는 거대한 로봇팔들이 시뻘건 레이저를 충전했다. 원래라면 동우의 개입 없이도 시설을 유지 보수할 인공지능들이 각 팔을 담당하고 있었을 터였다.

 

아니, 이미 그러고 있었다. 조준 보정 시스템은 정상 작동하고 있었고, 플라즈마 캐논 역시 수차례 발사한 로그가 시스템에 남아있었다. 심지어 화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에너지 실드까지 꺼놓은 상태였다.

 

다만 그 인공지능들이 간과한 것이 있었다면,

 

[발사!]

 

쿠구구구구궁!

 

“드라코.”

 

“알았어.”

 

몽구스 팀의 저력.

 

[록 온 완료. 정밀 타격 성공. 대상 피해 분석... 분석 결과... ...]

 

추기경, 교황, 별의 아이,

 

온갖 기괴한 것들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 싸워 이겨낸 그녀들의 힘을 상정하지 못한 것이다.

 

[... 유의미한 데미지. 없음?]

 

“어때? 이번 건 막을 만했어?”

 

“응. 얘들이 쎄봤자 예전 철충만 하겠어? 추기경한테도 살아남았는데 이 정도쯤은.”

 

철충? 추기경?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연달아 일어나고 있었다. 지금껏 동우가 만난 철충이라고 해봤자 길 잃고 이곳에 들어온 AGS 몇 마리 정도. 그마저도 이곳에 배회하는 고블린들에게 파괴당할 만큼 약한 놈들뿐이었다.

 

그런데 철충이라고? 만약 놈들이 상대했던 철충이 자신이 아는 그것이 맞다면 방금의 일격에 가루가 되었어야 했다.

 

“확실히 용 대장님 핏줄은 다른가? 지휘관이 있으니 편하긴 하네.”

 

목을 잡고 근육을 풀던 드라코가 뒤를 돌아 팔짱 끼고 있는 바르그에게 눈길을 주었다. 핏줄이란 얘기를 들었는지 바르그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내 어머니는 한 분뿐이시다.”

 

“에이, 이젠 알 거 다 아는 사람들끼리. 내가 바보 같아 보여도 눈썰미는 좋다고?”

 

“... 쓸데 없는 소리 할 힘이 있다면 마저 부숴라. 내가 시킨 일이 어려웠나?”

 

“아니. 엄~청 쉬웠어. 그럼 마저 부숴볼까?”

 

그렇게 말하며 드라코는 다시 방패로 땅을 가격했다. 무슨 요령이라도 생긴 것인지 그녀의 손에 들린 방패는 방패라기보단 거의 삽에 가까웠다. 눈 깜짝할 사이에 격벽 속으로 사라진 그녀 뒤로는 압도적인 힘에 찢긴 회로의 스파크만이 튀어나올 뿐이었다.

 

[수복... 프로토콜... 가동... 가동... 가동...]

 

두더지가 땅굴을 파듯, 드라코와 불가사리는 마음껏 시설을 파괴했다. 부속 인공지능에서 나오는 소리는 이젠 거의 처량한 구슬픔처럼 들렸다.

 

‘어차피 필요한 건 섹션 내부의 데이터 코어.’

 

그러니 다른 것들을 얼마든지 깨부숴도 된다.

 

미호와 달린 민첩하게 움직일 수 없는 둘을 위해 바르그가 세운 계획이었고, 그 계획이 실제로 들어먹히고 있었다.

 

수십 개에 달하는 로봇 팔들이 축 늘어졌다. 부속 인공지능들이 한시라도 빨리 시스템을 정상화시키기 위해 드론을 뛰워 자체 수복을 하긴 했지만, 오르카의 도굴꾼들을 막기란 역부족이었다.

 

“찢고 부순다! 이거 마음에 드네! 오랜만에 머리 안 쓰고 일하니까 속이 다 시원해!”

 

“언제부터 니가 머리를 썼다고.”

 

“왜? 사령관은 내가 늘 인텔리한 사람이라고 해줬다고. 물론 오늘은 아니겠지만! 하핫!”

 

참 지들 나잇대다운 대화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바르그는 이어폰을 껐다. 오랜만에 신나하는 드라코의 부끄러움은 고스란히 바르그 옆에 있는 미호의 몫이 되었다.

 

“... 다음 좌표 불러. 빨리!”

 

“너도 고생이 많았겠군.”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픽! 피비비빅!

 

미호의 신들린 사격이 허공을 갈랐다. 처음에는 몇 차례 로봇 팔에 걸리기도 했지만 불가사리와 드라코 덕분에 이젠 막을 장애물도 없어졌다.

 

“속도를 더 높여라. 할 수 있지 않나.”

 

바르그의 말에 미호가 더욱 재빨리 움직였다. 그녀의 총구에서 나오는 총알은 소총의 연사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한 발, 그 다음 움직이는 총구, 다시 한 발.

 

총구가 미친 듯이, 허나 섬세하게 움직이며 동우의 눈이 되어준 수백 개의 카메라를 깨트렸다.

 

[... 아니. 아니다. 아직까진 대응할 수 있다.]

 

점차 검어지는 시야. 어느새 홍련의 두 눈 말고는 시야가 사라진 동우가 길게 호흡하듯 생각했다.

 

[외벽 시스템은 파괴되도 내부 데이터는 건들지 못할 거다. 그러니 보안 프로토콜을 데이터 섹션에서 진행하고, 전장을 안으로 끌어들이면 승산은 있다.]

 

아버지의 무덤이라는 것.

 

자신을 뒤흔드는 수많은 변수 속에서 동우는 오직 그 하나만을 믿고 침착함을 유지하려 힘썼다. 드라코가 갉아먹은 전기 회로가 강렬한 시냅스 파장을 일으키긴 했지만, 그래도 참아야만 했다.

 

[물론 제대로 싸우려면 놈들 숫자를 줄이긴 해야겠지만... 방법은 있다.]

 

알파 섹션에 남아 있는 고블린들.

 

지금껏 오르카 호가 수많은 고블린 청소 작업을 진행해 왔지만 아직 그들이 모르는 곳에 숨겨놓은 실험체들이 남아 있다.

 

애초에 그 고블린들은 김지석의 신체를 대신했어야 했던 것들. 그의 부활을 시행착오 없이 준비하기 위해 동우가 지금껏 실험해왔던 결과물들이다.

 

그러니 완전히 청소하는 건 불가능한 일. 그 많은 고블린들로 인해전술을 펼치면 놈들 몇은 동귀어진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게 동우의 계산이었다.

 

그런데.

 

[... 왜지?]

 

아직까지 오지 않는 고블린들.

 

복도에는 이미 유인용 페로몬을 뿌려놓았다. 플랜 B라곤 하나 확실한 승리를 위해 진작에 실행한 계획이었다. 그러니 원래대로라면 저기 입구에서 팔짱을 끼고 있는 바르그의 몸을 짓밟으며 수백 마리 고블린이 이곳에 왔어야 했다.

 

[왜 아직도 오지 않는 거냐!]

 

당혹, 황당, 그 미묘한 경계를 경험하고 있던 동우의 통신 채널 속으로 묘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어이, 잘 보이나 몰라.”

 

알파 섹션과 오미크론 섹션을 연결하는 복도. 거기에 설치된 감시 카메라에 왠 망토를 뒤집어 쓴 여자가 서있었다.

 

빨간 머리.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짜인 와이어. 복도에 별처럼 반짝이는 폭탄의 LED 등까지.

 

“역시 뒤 꿍꿍이가 있을 줄 알았지. 덕분에 고생 좀 했어.”

 

수십 개의 고블린 시체 더미 위에서 기지개를 피던 장화가 투정 부리듯이 말했다.

 

“확실히 이 놈들이 저쪽에 쏟아졌으면 조카들이 무사하진 못했겠네. 근데 말이야, 이렇게 좁은 곳에서 혼자 싸우는 게 원래 내 전문이었거든.”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장화는 오른손을 탁, 하고 튕겼다. 그러자 어둠 속에 가려져 있던 와이어들이 일제히 가열되며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궁. 고블린들이 달려오는 소리.

 

하지만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들던 짐승들은 자신이 뭐에 걸린 지도 모른채 와이어에 잘려 고깃조각으로 전락해버렸다.

 

“내가 조카들에게 빚진 게 좀 있어서 말이야.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갚아야지.”

 

“답지 않게 꼴값 떨지 마라. 장화.”

 

“원래 사람이 변하려면 꼴값 좀 떨어야 돼. 바르그. 너도 이 참에 좀 변해보라고.”

 

바르그의 말이 작은 미소를 짓던 장화는 다시 한 번 어둠 속으로 시선을 돌렸다. 둥둥, 울리는 진동에 그녀는 평소 쓰지 않던 망토까지 둘러 쓴채 그림자로 몸을 숨겼다.

 

마치 자신이 원래 어떤 사람이었는지 보여주려고 하는 것처럼.

 

다만 그녀의 몸놀림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가벼워보였다.

 

[... 왜지?]

 

당혹감. 당황스러움.

 

수 조 개의 시뮬레이션을 돌려보았다. 하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장화와 몽구스 팀이 협력하는 수는 없었다.

 

[어떻게 이렇게 협동할 수 있는 거냐.]

 

장화의 탄생 배경. 김지석이 마리아 리오보로스를 회유시킬 수 있었던 이유. 마리아의 개인적인 트라우마.

 

그 모든 악의가 뭉쳐 만들어진 것이 장화다. 몽구스라는 팀 자체를 죽이려고 태어난 개체가 그녀였다.

 

헌데 그런 장화가 몽구스 팀과 함께 싸우는 것.

 

그건 동우가 가진 바이오로이드란 개념 자체를 뒤엎는 것이었다.

 

“어이.”

 

파스락.

 

홍련의 두 눈으로 바라본 세상에선 장화가 있었다. 널브러진 자신의 신체 위에 올라타 구두굽으로 자신을 지그시 누르고 있었다.

 

아픔. 흉통을 비롯한 각종 고통.

 

숫자로 치환되는 몇 가지 데이터들이 동우에게 흘러들어왔다. 그와 함께 장화의 미묘한 표정도 숫자로 변환되었다.

 

“게임 끝이다.”

 

분노, 경멸, 역겨움, 두려움, 행복, 중립, 슬픔, 놀람.

 

표정을 분석하는 여러 클래스. 각자의 가중치에 분배되어 있는 숫자들.

 

헌데 기이하게도 그녀의 숫자들은 잡히지 않았다.

 

온 몸의 뼈가 부러진 탓이었을까, 그 때문에 센서가 엉망이 된 탓이었을까,

 

“... 어떻게.”

 

동우는 홍련의 입을 빌려 물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지?”

 

“뭐가.”

 

“넌 홍련을 증오한다. 그 증오심을 이용하기 위해 온갖 화학 물질이 네 모듈 속에 들어가 있다.”

 

동우는 그녀의 설계도를 안다.

 

“네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왜 만들어졌는지, 무엇을 하기 위해, 또 어떻게 살 수 있게 설계되었는지, 모두 다 알고 있다. 너보다도 더 자세하게!”

 

그렇기에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넌 오류다! 불량품! 애초에 이렇게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협력할 수 있지?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도구의 설계도를 알면 도구의 생산 과정, 작동 메커니즘, 폐기 조건,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동우는 그렇게 배웠고, 또 그게 맞았다. 인류가 살아온 시대는 곧 바이오로이드의 도구됨을 증명한 세월과 같았다.

 

김지석과 삼안 그룹이 만든 모든 바이로오이드. 그 모든 존재들이 도구처럼 살다 도구처럼 버려졌다. 만들어진 목적대로 수행했고, 폐기됐다.

 

그러니 구태여 김지석이 좋아하던 약간의 문학적 표현을 더해보자면,

 

“그게 너의 운명이었다! 넌 그리 죽었어야만 했다! 그런데 어떻게...!”

 

동우는 소리쳤다.

 

살아온 세월이 통째로 부정되는 감각. 아버지의 무덤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 그 모든 것이 한데 뒤섞여 복잡한 숫자로 일렁이기 시작했다. 어마어마한 수열로 수렴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점차 수열의 의미조차 희미해질 때쯤, 장화가 말했다.

 

“야.”

 

“알빠냐?”

 

 

*




일진 성질머리 어디 안 가쥬? 바로 알빠노 입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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