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것 치고는 꽤 태연한 자세인데."

"뭐, 사령관 님께서 당신을 믿기에 저도 그런 스텐스를 보이는 것 뿐이죠."


바르그는 눈 앞의 시라유리를 대면하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여전히 의심하는 자세를 보이는 시라유리의 태도도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자신은 '첩자'라는 타이틀을 달고(당시에는 들키지 않았다 치더라도) 처음 그녀와 대면했으니, 자신에 대한 의심을 순순히 거두었다면 다른 의미로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시라유리는 하물며, '오르카의 방첩부대' 소속이지 않던가. 만약 허술한 면모를 보였다면 본인부터 먼저 나서서 문제를 제기했을 것이다. 주인님의 곁에 그런 무능한 집단이 있었다면, 주인님을 위해서라도 먼저 나서서 처단했을 것이다.


"나도 바로 신뢰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 따위, 추호도 하지 않았으니까... 뭐, 상관없겠지."


바르그는 취미를 겸해 이렇게 정박하고 있을 때면 홀로 막사 주변을 거니는 산책을 하고 있었으나, 오늘은 낯익은 인물과 조우했다. 바르그 본인을 취조하며 '나쁜 경찰' 역할을 했던 시라유리가 그 주인공으로, 처음 대면했을 당시에 그녀는 바르그의 머리를 열어 강제로 뇌를 스캔할 수 있다는 살벌한 말을 했었으니 바르그로서는 잊을 수 없는 인물이리라.


"후훗, 그런 태도는 마음에 드는군요."

"본론이나 꺼내시지. 우리가 이렇게 형편 좋게 산책을 함께 할 정도로 살가운 사이는 아니지 않던가?"


머리로는 이해해도, 본능적인 거부감이 밀려오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첫 인상이 반은 먹고 간다고 했던가. 아무리 배신자의 처단 같은 험한 일을 해온 바르그도, 첫 대면부터 살벌한 협박을 했던 당사자와 속 편히 거리를 쏘다닐 정도로 신경줄이 굵지 못했다.


"어머, 아직도 제가 당신의 취조 당시 했던... 그 때를 신경 쓰고 계신가요?"

"미안하지만, 난 너같이 낯짝이 두텁지 못해서 말이야."

"푸훗! 그래도 제가 사죄의 의미로 무녀에 대한 지식을 알려드렸으니 그걸로 합의하죠?"

"그래서 지금 이렇게 어울려주고 있지 않은가."


바르그는 문득 자신이 많이 변했다는 생각에 도달했다. 과거의 자신이 이렇게 친밀하게 타인과 어울려본 적이 있던가. 과연 없을 것이고 그것에 불편함을 느끼지도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격의 없는 대화를 주고받으며, 심지어 함께 산책을 나서다니. 그때 옛 주인을 스스로 묻으며 새로운 주인님께 충성을 맹세하고 부터는 많은 부분이 변해버렸다.


"뭐, 홀로 고독한 늑대인 것 마냥 음침하게 있는 꼴이 보기 안쓰러웠을 뿐이었어요."


바르그의 속내를 훤히 꿰뚫어 보고 있다는 듯 중얼거리며 앞장서는 시라유리의 뒷모습에 바르그는 자신도 모르게 발끈해 대답했다.


"그렇게 남을 훤히 꿰뚫어 보고 있다는 듯 말하는 거... 정말 좋지 못한 버릇이다."

"어쩌죠? 첩보원의 숙명과도 같은 버릇이라... 고치기가 힘든 걸."

"하아..."


그래, 차라리 시라유리 처럼 저렇게 뻔뻔한 모습으로 접근해오는 편이 차라리 편할 것이다. 이적 행위에 대한 용서를 사령관에게 받았다고 하지만, 다른 동료들에게 용서 받은 것은 아니었으니까. 하물며 바르그 자신을 제압할 때 칼을 나누었던 동료들에게는 아직 사과의 말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스스로가 솔직하지 못한 성격이기도 했거니와, 무엇보다도 규율과 명예를 중시하는 주제에 뻔뻔하리 만치 아무런 처분 없이 합류한 본인의 상황에 도저히 먼저 말을 걸 용기가 나지 않았다.


"제가 아는 다른 오르카호 대원들은 저랑 다르게 순진해 빠져서 금방 용서 할 겁니다."

"그렇게 속내를 꿰뚫어보지 말라고 그러지 않았나?"

"어머! 이게 참, 습관이라는 게 무섭죠?"


결국 피식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바르그는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 참에 칼을 겨눴던 새로 생긴 동료들에게 용서를 구하자. 그리하여 주인님의 곁에 오래 있을 수 있도록, 모두가 받아들일 그 날까지 계속해서 속죄하자. 그렇게 결심했다.


"저라면, 사과 따위 하지 않겠지만... 바르그, 당신은 참... 고리타분 하네요."

"장화와 천아 그 녀석들이 늘 내게 그런 말은 하지. 이제 보니 너도 그 암캐들과 잘 어울리겠군."

"후후... 저에게 그럴 말씀을 하실 상황이 아니시죠?"


어느새 시라유리의 손에 들려있는 익숙한 물건과, 그리고 시라유리의 귓가에 꽂혀있는 검은 색 이어폰. 그것들이 의미하는 것은 단 한 가지.


"너, 너! 그거 이리 내!!"

"어머머! 사령관 님의 목소리가 모조리 녹음 되어 있다니! 녹음기는 되돌려 주겠지만, 어쩌죠? 이미 내용이 전부 기억나는 걸."


바르그의 머릿속에 시라유리를 평가하는 동료들의 발언이 불현듯 떠올랐다.


-절대 시라유리에게 책 잡히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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