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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말했지. 마스크를 쓴 쪽도, 벗은 쪽도 좋다고."


또 다른 헬라는 그런 사령관을 두고 바람둥이라고 말했다.


"지금 이렇게 널 보고 있으면."


마스크를 쓴 헬라는 배양액 속을 들여다본다.

거기에는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한 사내가 들어 있었다.


"......황무지에서 떠돌던 그 시절이 떠올라."


그건 천천히 말라비틀어지는 고통이었다.

물 한 모금조차 목숨처럼 여기던 그 시절.

그녀는 오랜 시간을 혼자 외롭게 보냈었다.


"내가 외롭지 않게 가족을 만들어준다면서."


사실 그건 헬라의 일방적인 부탁이었다.

사령관과 서약을 올린 그날.

사령관이 가슴을 만졌을 때 헬라는 황무지에서 돌아다니건 시절을 말하며 부탁했다.


-저는 오랜 시간 외로웠어요. 그러니까 이제 더는 외롭지 않게... 가족을 만들어주실래요?


"너는 그러겠다고 했다."


헬라는 벌써 마스크를 벗지 않은 지 몇 달이 지났다.

그녀는 다시금 황무지에 서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중인격조차 없다.

오르카호의 다른 대원들도 없다.


그녀는 수백, 수천의 바이오로이드가 있는 오르카호에 있으나 혼자였다.


"너는 대체 언제 돌아오는 거냐? 나도 이제 슬슬 지치고 있다."


또 하나의 헬라는 내면 깊은 곳에 잠들었다.

충격을 잊지 못한 바이오로이드들도 동면에 들어갔다.

오르카호는 바다 저 깊은 곳을 유영하며 하염없이 세월을 따라 흘러간다.


헬라는 배양액의 표면을 만진다.


"네가 돌아오지 않겠다면...."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그저 염원하며 바라볼 뿐이었다.


"내가 너를 만들겠다."


그때부터 헬라는 작업을 시작했다.


뼈대를 구성하고.

근육을 만들고.

피부를 덧씌운다.


"쳇, 근육이 너무 강하잖아. 뼈대가 못 버텨."


첫 번째 사령관은 실패였다.


"이번 건 자지가 너무 크군."


두 번, 세 번, 네 번.

헬라는 시행착오를 겪으며 인간형 로봇을 만들다.

텅 빈 외로움을 조금은 달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헬라. 교대다."


몇 주가 지났을 무렵, 칸이 깨어났다.

그녀는 헬라의 연구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너는 대체 뭘 하려는 거지?"

"완벽해야한다."


그냥 로봇을 만들고자 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원하는 것은 완벽함이었다.

그 완벽함의 방향은 AGS에 있지 않았다.


"완벽하지 않은 사령관은 사령관이라고 할 수 없다."

".....내가 거들지."


헬라는 동면 차례가 되었음에도 잠들지 않았다.

두 번째로 깨어난 것은 레오나였다.

그녀는 처음에 화를 냈다.


"제정신이야? 사령관 AGS를 만들겠다고? 둘 다 미쳤어?"

"상관하지 마라."

"하....!"


레오나는 기가 차다는 듯 혀를 찼다.

사령관을 만든다는 행위에 불경함마저 느꼈다.

그러나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팔짱을 낀 채 다리를 떨었다.


"....머저리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건 알겠다. 하지만 그 이상 시비를 걸겠다면-"

"사령관의 엉덩이는 그렇게 쪼글쪼글하지 않아."

"....."

"하아.. 멍청이들. 그까짓 기억력으로 뭘 하겠다고. 설계도를 이리 내. 내가 검수해줄 테니까."


레오나는 디테일한 부분을 도왔다.


그렇게 두 명.

그리고 세 명.

다시 네 명.

헬라의 주변으로 대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긴 시간이 흘러, 사령관이 완성되어갈 무렵.

수백의 바이오로이드가 함께하고 있었다.


"전술 지휘 쪽으로 지식은?"

"일단 사령관님 뇌를 카피하기는 했는데, 아직 세분화가 덜 됐어요."

"일주일 남았어. 그때까지는 끝내."

"네!"


전술팀.


"섹스 지식은?"

"그건 아스널 준장님께서...."

"리리스가 접근하지 못하게 해. 잘못하다가는 온 대원이 24시간 엉덩이만 맞고 다닐 테니까."

"하, 하잇!!!"


일상팀.


"이 실리콘을 이용해서 자지의 말캉함을 보완하면...."

"잠깐. 한 1센티정도 더 길게 하는 게 좋지 않을까?"

"그래. 하는 김에 0.5센티만 더 굵게 하고..."

"안 돼요. 완벽한 사령관님을 만들어야 하니까."


육체팀.


모두가 맡은 영역에서 일하고 있었다.

쥐 죽은 듯 조용했던 오르카호는 어느새 다시 활기가 돌았다.


"이걸 보고 있으니까 에밀리가 거지런 할 때가 생각나는군."


그날 당번인 아스널이 총책임자인 헬라의 옆에서 말했다.

두 사람은 모니터로 모든 구역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활기가 넘쳤지. 에밀리가 구해온 것들을 분해하고, 분석하고. 분류해서 창고에 넣으며 함께 일했다."

"....내가 왔을 때도 그런 분위기였다."

"사령관은 그걸 통발이라고 불렀다."

"통발....."

"에밀리에게 시켜놓고 가만히 기다리면 자원과 새로운 대원들이 합류한다는 것이지. 물고기 덫에서 따온 것이다."


근래의 상황과 비슷한 면이 있었다.

사령관AGS를 만들자, 대원들이 하나씩 달라붙었다.

그게 가짜 희망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그건 꼭 미끼가 미끼인 걸 알면서도 침을 흘리며 달려드는 물고기 떼 같았다.


'통발이라.'


헬라는 그 단어를 기억한다.


"그나저나 또 하나의 너는 어떻게 됐지? 여전히 동면 중인가?"


헬라는 아직 마스크를 벗지 않았다.


"그렇다."

"언제 마스크를 벗을 생각이지? 이제는 그래도 될 터."

"또 하나의 나는 가족을 원했다."

"가족?"

"그래, 가족. 물론, 저 사령관이 가족이 될 수는 없고, 친구 정도가 되겠지. 하지만 그거라도 좋다."


헬라는 모니터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는 대원들을 보면서 말했다.

또 하나의 헬라는 자신감이 없다. 낯을 가리고, 금방 주눅든다.

그러나 기계를 상대로라면 그러지 않을 터.

좋은 말동무가 될 거다.


"새로운 친구를 소개할 때는 그만한 준비가 필요한 법이지."

"요컨대."


아스널은 팔짱을 낀 채 미소를 지었다.


"깜짝 선물이군. 훌륭하다."




이윽고, 때가 되었다.

수백 명의 대원들이 힘을 합쳐 만든 AGS의 가동날.

사령관 AGS는 겉보기로는 인간과 똑같았다.


"어머, 감쪽같네."

"외형은 최대한 똑같이 했다."

"자지도?"

"자지도."


대원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바이오로이드는 아니다. 어디까지나 AGS지."

"딱히 상관없지."

"암, 상관없지."

"우리 곁에 있어주기만 한다면."


모두가 불안한 기대를 애써 숨기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자, 가동."


키이이이잉-

동력이 작동할 때 초고음이 들렸다.

하지만 그 소음은 곧 사라지며 사령관이 눈을 뜬다.


"아...."

"오...."


여기저기에서 탄성이 들려왔으나, 무적의 용이 손을 들어 모두의 입을 막았다.


"정숙하시오."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낮게 울려 퍼졌다.


"나는....."


사령관이 입을 연다.


"나는......"

"너의 이름은?"


참다 못한 헬라가 나섰다.

누구보다 조급한 건 바로 그녀였다.


"내 이름... 4. 사령관. 나는 사령관..."

"....내 이름은?"

"......"


사령관이 그녀를 빤히 바라본다.

공허한 울림이 섞인 목소리가 나온다.


"헬라."


그것은 대답이면서.

대답이 아니었다.






"뭐.... 다들 예상은 했잖아요?"

"....."


오르카호 식당에는 깊은 침묵이 깔려 있었다.


"기계는 기계일 뿐."

"감정이 생기는 AGS가 있기야 했지만....."

"역시, 저희가 처음부터 너무 많은 것을 바랐던 거겠죠."

"......"


다시금 정적이 깔린다.


"하아...... 기대가 너무 컸어. 이러면 안 되는데. 모두가 고생했는데."

"힘이 쫙 빠지는 건 어쩔 수 없죠. 저희가 기대한 건 '완벽한 사령관'님이니까."


그래도 다행히 여기저기서 대화가 시작됐다.

대화 내용은 썩 좋지 않지만, 그렇다고 계속 침묵이 깔리는 것보다는 나았다.


"밥 먹고, 다시 작업하자고."

"작업? 무슨 작업?"

"지휘관들이 AGS사령관이랑 질의문답을 했거든. 기억은 다 있어. 우리가 넣은 모든 지식이 다 있었어."

"그럼...?!"

"얼마나 사람처럼 말할 수 있느냐, 이걸 연구할 때야."

".....!!"


다시금 희망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축 늘어져 있던 사람들이 점차 몸을 일으켰다.

몇몇은 전혀 입에 대지 않았던 밥을 갑자기 허겁지겁 먹기 시작한다.

그렇게 식판 긁는 소리가 몇 번 들리자, 너도나도 밥을 먹었다.

그때 방송이 나왔다.


-모든 인원은 지금 즉시 중앙으로 모여라. 다시 전파한다. 비상이다. 모든 인원은 지금 즉시...


"어?"

"저 목소리...."

"잠깐만, 저거 설마.....?"


기운을 차리고 밥을 먹던 대원들이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빠, 빨리! 빨리 가야해! 빨리!!"


그렇게 몇 초 후, 그들은 즉시 자리를 정리하고 떠났다.






모두가 모인 중앙.

거기에는 시체가 되기 직전인 한 남자가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뭐야뭐야, 뭔데 나 촉 완전 좋아!!"

"긴급 소집 명령을 듣고 왔습....."


도착한 대원들은 피철갑이 된 남자를 보고 넋을 잃었다.

그 남자 주위에는 괴물 같은 오라를 뿜는 여걸들이 서 있었다.


"다시 묻겠다. 사령관."


근육빵빵 각성 좌우좌가 머리채를 낚아채고 묻는다.


"뭘 하다가 왔다고?"

"여, 옆집 겜.. 가슴 짱 큰..."

"두 번 다시는 가슴을 볼 수 없게 해주지."


근육빵빵 각성 좌우좌가 사령관의 눈을 찌르려고 했다.


"히, 히익! 사, 살려주쎄여....!"

"사, 사령관?"

"진짜 사령관?"

"진짜진짜로?"

"혼또니...?"


걱정, 기대, 안도.


대원들은 도착한 순서대로 똑같은 감정을 느꼈다.

그리고 그 모든 감정의 종착지는 분노였다.


"이 시발! 저 새끼 자지 뽑아버려!!!"

"개 같은 새끼! 우리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좆같은 좆 새끼! 자지새끼!!"


구타와 폭언폭설이 이어졌다.

영원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시간이었다.


"......"


헬라는 빈사상태가 돼서도 두들겨 맞는 사령관을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

입을 덮은 마스크 때문에 표정을 읽을 수 없었으나, 어쩐지 그녀는 씁쓸해 보였다.


'이걸로 된 거겠지.'


헬라는 홀로 연구실로 향했다.

거기에는 이제 막 학습을 시작한 AGS사령관이 있었다.


"헬라."

"......."


헬라는 AGS사령관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뱉었다.


"너는 존재해서는 안 된다."

"....어째서?"

"사령관은. 하나여야 하니까."

"사령관은 하나."


AGS사령관이 그 말을 곱씹었다.


"이해했음. 입력 완료."

"......널 파괴해야 해."

"파괴한다? 사령관을? 이해할 수 없는 말. 모든 바이오로이드는 사령관을 해할 수 없다. 인간을 해칠 수 없다."

"너는 인간이 아니니까."


헬라는 공격을 준비한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해야 한다.


"모두의 가족이 되어주었으면 했거늘."


그러나 첫날, 헬라는 느꼈다.

이 AGS사령관은 실패작이었다.

인간과 전혀 동떨어진 존재였다.

누구도 이걸 사령관이라고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외모만 똑 닮아서 혐오감을 느끼는 이도 있었을 거다.

적어도 그녀는 그랬다.


'실패작. 가짜. 나는 완벽한 사령관을 만들지 못했다.'


자괴감에서 오는 혐오감이었다.

AGS사령관이 무미건조하게 그녀를 불렀을 때, 헬라는 마스크를 벗지 않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또 하나의 그녀는 버티지 못했을 테니까.


"너는 결국 내 친구가 될 수 없었다."


그녀가 나노입자를 쏘려고 할 때였다.

누군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읏차. 거기까지."

"....사령관?"

"나랑 똑 닮은 사람이 있다고 해서 찾아와봤더니."


사령관이 대원들과 함께 방으로 들어왔다.


"저저저, 뭐 하는 거예요 헬라!!"

"왜! 왜!? 어째서!?"

"우리가 오랫동안 함께 만든 사령관인데!"

"......"


헬라는 놀랐다.


"어디, 네가 나라고?"


사령관이 한 발 앞으로 나선다.


"와, 정말 똑 닮았는데? 음, 그런데 거시기는 빼자. 없애버리자. 자지는 하나여야지."

"니 자지를 뽑고 저걸 쓰는 건 어때."

"하, 하하... 농담도...."


아직도 사령관에게 화 난 대원이 많았다.

사령관은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고 다시 헬라를 보았다.


"왜 파괴하려고 했어?"

".....진짜가 왔으니 가짜를 처분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꼭 그렇지는 않지. 너희가 힘을 합쳐 만들었다면서."

"....."

"이 사령관은 없애지 말자. 내가 없던 동안 너희를 지탱해줬잖아. 그리고 헬라, 네가 가장 아쉽지 않아?"

"뭐....?"


사령관이 피식 웃었다.


"너, 솔직히 아쉬워했잖아. 내가 인간이라는 것에 대해서. AGS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해본 적 없어? 솔직히 있잖아."

"......."

"네 힘은 AGS에게만 영향을 끼치니까."

"하지만... 사령관이 둘이면...."

"그게 마음에 걸리면 나랑 구분하면 되지. 이름을 지어줘."

"이름? 내가?"

"그래, 헬라. 네가. 상징적인 이름으로 부탁해."


'상징적인 이름....'


헬라는 깊게 고민한다.

사령관이 없을 때, 저 사령관이 지탱이 됐다.

진짜가 없을 때, 모두가 저 사령관에게 모였다.


'...꼭 고유명사일 필요는 없겠지.'


"사령관. 저 사령관에게 일을 하나 주고 싶다."

"일? 뭔데?"

"네가 자리를 비웠을 때, 너를 대신해서 모두를 통솔하는 역할. 즉, 너의 스페어다."

"스페어? 뭐, 나쁘지 않지. 그런데 조금 걱정되는데? 여러 가지로."

"그건 내가 담당자를 뽑아서 배치하겠다. 저 사령관을 이끄는 동시에, 감시자로."


사령관은 머리를 긁적이며 모두의 반응을 살폈다.

다들 동의하는 눈치였다.


"그래, 네 말대로 하자. 그럼 뭐라고 부를래?"

"....오프통발 시스템."






"저, 정말 제가 잘 할 수 있을까요...?"


마스크를 벗은 헬라가 물었다.


-할 수 있다. 아니, 너만이 가능한 일이다.


거울 속에 비치는 마스크를 쓴 헬라가 말했다.


"으으, 저, 저는 아는 게 없어서.... 제대로 못 할 것 같은데요...."

-걱정하지 마라. 네가 할 일은 그저 대화하는 것이니까.

"대화....?"

-소개하지. 너의 새로운 친구다.


헬라가 AGS사령관을 마주했다.


"안, 녕. 헬라."

"아, 안녕하세요.... 오프님?"

"많은 가르침. 부탁."


헬라는 잠깐 동안 멍하니 오프를 응시했다.

어딘가 덜 떨어진 것 같은 표정과 툭툭 끊기는 대화.

방대한 지식을 가졌어도 그게 '그저 있기만 한 지식'이면 결국 자신의 지식이 아니다.


헬라는 오프에게서 동질감을 느꼈다.

자신과 똑같았다.

천재적인 두뇌를 가졌으나, 그건 마스크를 쓴 쪽에게 전부 넘어갔다.

마스크를 벗었을 때의 그녀는 백치나 다름없는 상태.


그런데 눈앞에,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백치 상태에 가까운 존재가 있었다.

저쪽은 어떨지 몰라도 헬라는 그가 무척이나 편하고 친근하게 느껴졌다.


"헤헤, 저희 잘 지내봐요."

"잘, 지낸다. 나, 자지 뽑혔다. 강간 못함. 안심할 것."

"아하하. 그거 무슨 농담이에요? 재밌다."


헬라는 웃지만 오프는 웃지 못했다.


"나, 중성화 당함."


그는 슬피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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