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트리아이나의 안내를 받아 배의 조종실 안으로 들어간 우리는 또다른 바이오로이드와 만나게 되었다. 트리아이나가 말한 '캡틴'이라는 사람은 바로 포츈이었다.


"캡틴~ 이것 좀 봐! 인간이 왔어!"


"인간이라니, 그럴리가... 어머, 세상에! 정말로 인간님이야!?"


"후후, 나도 놀랐다고! 설마 이런데서 세기의 대발견을 할 줄이야."


"항구에 철충이 나타나자마자 출항하려던걸 말리길래 무슨 일인가 했더니... 이, 일단 다들 와서 몸 좀 녹여! 거기 난로 있으니까!"


포츈이 걱정해주었지만 우리는 하나같이 경계심을 유지한 채 서있었다. 그 중 몇 명은 매복이나 감시카메라 따위라도 찾으려는 건지 빠르게 눈동자를 굴렸다. 여기있는 트리아이나와 포츈은 레모네이드 오메가의 부하니까. 포츈은 그런 반응도 이해한다며 멋쩍게 웃어보였다.


"...궁금한 게 있는데, 이 배에 타고있는 바이오로이드는 너희 둘 뿐이야?"


"응, 맞아. 오메가님은 중요한 직책엔 바이오로이드를 잘 기용하려고 들지 않거든. 대신 AGS 아가들이 몇 대 있긴 한데... 전부 ai를 개조당해서 명령받은 것만 할 수 있는 단순한 로봇에 더 가까워."


"캡틴은 배를 몰고 유지보수하는 역할을 맡고있어. 나는 뭐... 캡틴 하는 일 옆에서 도울 때를 제외하면 배에 들러붙은 따개비 제거하는 게 전부지. 내 쏘우피쉬는 이런 데 쓰려고 있는 게 아닌데 말이야..."


트리아이나가 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면서 말했다. 코트를 벗자 낯익은 수영복 형태의 잠수복을 입은 모습이 드러났다. 아니 코트 밑에 저거 입고있었어?


"잠깐, 요즘은 선박 표면에 전기를 흐르게 해서 따개비가 못붙게 하지 않나?"


내 뒤에 있던 드론이 앞으로 나와서 묻자 트리아이나가 투덜거리며 대답했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지만... 오메가님이 전기세 아깝다며 나같은 바이오로이드한테 직접 떼라고 시키고 있어."


"어, 어머? 너는 드론 04 기종 아니니? 어떻게 말하고 있는거야?"


트리아이나는 그냥 자기가 모르는 로봇이구나 하고 대충 넘긴 반면 포츈은 이 드론이 말했다는 점에 대해 놀란 반응을 보였다. 포츈이라면 이런 드론을 써서 작업할 일이 많았을테니 이 드론 기종을 잘 알고있는 거겠지, 원래는 AGS가 아니라는 것도.


"간단히 요약해서 레모네이드 오메가가 내 알맹이를 AGS로 개조했다고만 말해두지."


"정말? 오메가님이?"


그나저나 얘들은 계속 오메가'님'이라고 부르고있네. 상사라서 그렇게 부르도록 강요당하는 건가, 아니면 정말로 오메가한테 충성하는 건가. 최악의 경우 여기에 도청기가 있을 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다면 이미 내 존재가 들켰다는 것이니... 확인해봐야만 한다. 다행히도 이제 나는 명령권을 사용할 수 있다.


"포츈. 우리한테 어떠한 위해도 끼치지 말고, 우리가 하는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해줘. 명령이야."


왠만해선 명령은 쓰고싶지 않았지만 여기선 확실히 해야한다. 명령이라는 단어를 들은 포츈은 진지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음, 알았어. 뭐든 물어봐도 좋아."


"여기 도청기같은 게 설치되어 있나? 혹시 지금 우리 대화를 레모네이드가 엿듣고 있는 거 아냐?"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도청기는 없어. 내가 배를 점검하면서 꼼꼼하게 살펴봤으니 믿어도 좋아."


"잘나신 레모네이드는 워낙 바빠서 이런 배 하나에 깊게 신경쓰지 않거든."


옆에서 트리아이나도 거들었다.


"그럼 다음 질문. 너희들은 레모네이드 오메가한테 충성하고 있는건가?"


"그럴리가 없잖아. 거기 펙스제 바이오로이드가 있는걸로 봐선 레모네이드에게서 도망친 애들도 섞여있는 것 같은데, 인간님도 우리가 어떤 심정인지 잘 알거라고 생각하거든?"


"거역하면 총살당한단 말이야. 특히 캡틴같은 기술자 바이오로이드는 요주의 관리대상이라서 자리에서 이탈하는 순간 경비 AGS가 날아와. 도망칠 수도 없지."


"...오메가한테 님 자 붙이는건 뭔데?"


"혹시나 말 잘못해서 꼬투리 잡히지 않게 평소부터 입단속하는 거거든."


"...레모네이드 오메가 개새끼!"


트리아이나가 갑자기 소리치자 모두의 시선이 그녀를 향해 쏠렸다.


"헷, 어때? 이러면 우리가 진짜로 레모네이드한테 충성하지 않는다는 증명이 되었을까?"


"...그래, 그거면 될 것 같네."


내가 수긍하자 트리아이나는 히죽 웃었고 포츈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마지막 질문, 오메가가 지금 내가 여기있다는걸 알고있진 않겠지?"


"걱정마. 우리가 입 다물고 있으면 제 아무리 레모네이드라도 모를거야. 그보다 인간님도 레모네이드한테 들킨다는 게 무얼 의미하는 건지 아는구나? 워낙 상황이 급했으니 이미 배에 탄 건 어쩔 수 없지만... 

이 배는 지금 알래스카로 가는 중이거든? 거긴 레모네이드 오메가의 영토라서 되게 위험하거든, 인간님뿐만 아니라 너희들 모두 다. 보트를 내려줄테니까 그걸 타고 도망가도록 해."


"그건... 배려는 고맙지만 사양할게. 사실 우린 이 배에 볼 일이 있어서 탄거거든.."


"응? 볼일이라니, 무슨 말이야? 누나한테도 좀 알려주면 좋겠거든?" 


"이 배를 얻으러 왔어."


""뭐어!?""


포츈과 트리아이나는 당연하게도 기겁했다.


"그, 그건 불가능해! 이 배는 회사 재산이라서 우리가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게다가 우리도 레모네이드 오메가의 명령권에 묶여있단 말이야!"


"잠깐, 그게 무슨 소리야. 오메가의 명령권이라니? 걘 바이오로이드잖아."


"내가 대신 설명해주지. 레모네이드 시리즈는 펙스의 특급 바이오로이드로 유사시엔 회장 대리로서의 권한을 사용할 수 있네, 명령권도 포함해서 말일세. 

물론 바이오로이드가 내리는 명령이라 인간의 명령에 비하면 제약이 좀 많지. 펙스 바이오로이드, 그것도 레모네이드 이후에 개발된 바이오로이드에게만 먹히는 데다 명령권 자체도 강제성이 약하다네."


"저 드론이 말한대로야. 오메가의 명령을 덮어씌우는 건 다른 레모네이드가 와도 불가능하거든. 인간님이 직접 명령이라도 내리지 않는 이상-"


난색을 표하던 포츈은 그 순간 뭔가 깨달았다는 듯 말을 하다말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내 얼굴을 바라봤다.


"어머... 인간님을 본 게 100년만이라 실감이 안났네..."


"뉴...! 뉴 캡틴! 이름 알려줘! 명령권자 재등록하게! 드디어 오메가의 손아귀에서 벗어난다!"


한껏 들뜬 포츈과 트리아이나는 즉각 나를 새 명령권자를 설정해버렸고, 나는 꽤나 맥빠지게 배를 손에 넣게 되었다.


***


엔지니어인 포츈이 팀에 들어오게 되자 첫번째로 부탁한 일은 바로 내 목에 채워진 구속구를 떼어내는 일이었다. 배터리가 다떨어지면서 뇌파를 가리는 기능은 사라졌지만 구속구 자체는 그대로 남아서 불쾌한 감각을 어김없이 선사했다.


포츈은 흔쾌히 부탁을 들어주었다. 먼저 구속장치를 면밀히 살펴보았는데, 다행히 억지로 열면 폭파한다던가 그런 위험한 기능은 없는 모양이었다. 나를 의자에 앉혀놓고 공구상자를 옆의 탁자에 올려둔 채 해체작업을 시작하자 뒤에서 끼릭끼릭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는 동안 다른 일행은 혹시나 포츈이 허튼짓을 하지 않을까 걱정하며 포츈의 작업을 지켜보고 있었다.


"...저기, 얼마나 더 걸려?"


"음... 조금만 더 기다려주면 좋겠거든? 정말이지, 대체 누가 이런 못된 짓을..."


"오르카호의 년놈들이 한 짓이지."


"오르카호? 그게 뭐야? 펙스랑은 다른 세력이야?"


"나 말고 다른 인간이 자리잡은 곳인데, 나랑 마찰이 좀 있었거든."


"인간님이 또 있다고!? 세상에..."


아무래도 여기엔 그 '최후의 인간'이 있다는 소식이 닿지 않은 모양이었다. 펙스의 정보통제가 있으니 어쩔 수 없는건가.


"아...! 이제 거의 다 된 거 같거... 든...!"


철컥!


구속구가 풀렸다. 포츈이 구속구를 가져가자 금새 목이 허전해졌다. 하도 오랜만에 느낀 편안함이라 한편으로는 어색하게도 느껴졌다. 두 손으로 내 목을 더듬자 손의 촉감과 온기가 느껴졌다. 덕분에 나는 나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흐으으...! 마침내..."


"후후, 이런 건 누나 전문이거든? 누나가 여기서 일하면서 수갑같은 거 많이 따봤거든!"


포츈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자네 일은 이 배를 모는 게 아닌가?"


"오메가 밑에서 도망친 애들이 이 배에 숨어탔다가 나나 캡틴한테 들키는 경우가 가끔 있단 말이야. 그럴 땐 보통 시침 뚝 떼고 못본척 해주는데, 그 중 수갑이나 족쇄를 찬 애들은 캡틴이 서비스삼아 풀어주고 그랬어."


"탈주자를 도왔다고? 그럼 왜 너흰 같이 도망치지 않은거야?"


"물론 우리도 도망가고 싶었지! 하지만 말했다시피 캡틴같은 기술자는 일반 노동자보다 더 중요한 감시대상이라서 섣불리 자리를 이탈할 수가 없어. 나는 노동자 계급이지만 캡틴이랑 같이 일하다보니 덩달아 감시 범위에 포함돼있고, 내가 사라졌다간 캡틴이 책임을 물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너희한테 위치 추적기라도 달려있어? 아님 위성카메라로 실시간 감시중인 건가?"


내 물음에 포츈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로 삼엄한 감시는 아니야, 물론 이 배에 gps가 달려있기는 하지만. 나같은 기술자의 경우에는 감시자 AGS가 보고있거든? 블랙 리버의 와쳐라는 AGS를 펙스에서 사들여 개조한 인터셉터 기종인데, 상공에서 우릴 감시하고 있거든."


"담당 감시대상이 정해진 위치에서 이탈하면 순식간에 날아와서 총을 겨누고 위치로 돌아가라고 위협해. 아, 참고로 미국 영해에서만 활동하니 러시아에서 너희가 탄 건 못봤을거야."


"그런 시스템이 있었어? 그럼 곤란한데... 기껏 배를 얻었는데 이미 감시대상에 놓여져있는 상태라면 도망쳐도 금새 추격대가 온다는 거잖아."


미처 예상못한 변수에 곤란해하던 중 포츈과 트리아이나는 서로 시선교환을 하더니 이내 포츈이 입을 열었다.


"사실은 말이지... 기회가 있어. 인간님이랑 너희 모두 딱 좋은 타이밍에 찾아온 거거든."


"기회라니...?"


"얼마 전에 얻은 정보인데, 지금으로부터 3일 후에 대규모 시스템 점검이 있을 예정이거든. 그 때 감시 AGS도 무력화되니 우린 그 틈에 도망치면 되거든? 참고로 배의 gps는 내가 알아서 처리할 수 있으니까..."


"아니, 잠깐만. 그거 어디서 난 정보야?"


"익명의 누군가로부터 온 정보야. 누군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도망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했어."


"익명의...? 뭐야 그게? 그거 정말로 믿을 수 있는거 맞아?"


때마침 이런 형편좋은 해결책까지 준비되어 있는것도 수상한데 정작 그 정보의 출처는 불분명하다고? 엘븐이 어이없어하자 트리아이나가 자기도 같은 심정이라면서 입을 열었다.


"믿을 수 있다기 보다는... 그거밖에 기댈 대가 없는 상황이야. 만약 오메가가 우리 충성심을 시험하려고 판 함정이라면 꼼짝없이 당하는 거지. 하지만 수십년간 일하면서 그런 적은 없었어. 애초에 오메가는 우리한테 연락을 잘 안해, 정기보고만 잘 한다면 말이지."


"으음..."


"인간. 어떻게 할 거야?"


LRL이 물었다. 말투로 보아하니 그녀는 믿지 않는 모양이었다.


"...수상한 정보긴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는 건 우리도 마찬가지야. 그래도 아직 3일의 여유가 있으니 상황을 보고 움직여도 될 것 같아. ...아마도."


LRL은 마지못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럼 다들 사흘간 여기서 지낼거지? 따라와! 선원용 숙소로 안내해줄게. 말했다시피 선원은 캡틴과 나, 둘 뿐이라 자리가 엄청 남거든."


"그전에 잠깐... 물어볼 게 있어. 이 배에 바이오로이드 제조기 있어?"


"제조기? 유전자 씨앗이라도 갖고있어? 미안한데 이 배에는 없거든?"


"그럼 알래스카 항구에는?"


"거기도 없을것 같거든. 있을만한 데가... 잠시만 기다려봐."


포츈이 태블릿같이 생긴 패널을 툭툭 두드리니 액정 위로 알래스카의 지도가 떴다. 그 중 한 곳에 빨간 점이 찍혀있었다.


"여기에 펙스의 바이오로이드 수용소가 세워져있거든? 멸망 전에 알래스카에 매장된 지하자원을 캐는 무인시설이었는데, 지금도 펙스의 지배를 받는 바이오로이드 노동자들이 계속해서 일을 하고 있거든. 여긴 무인시설이니 옛날에 쓰던 바이오로이드 제조기가 남아있을 가능성이 크거든?"


"무인시설에 바이오로이드 제조기가 왜있어? 무인시설이면 기계만 알아서 돌아가는 거 아냐?"


"자네, '무인'시설을 뭐라고 생각하는 건가."


"아..."


나는 새삼 멸망 전에 바이오로이드가 인간 취급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짧막한 탄식을 들은 더치걸이 뒤에서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대장은 대체 무슨 세상에서 살다 온거야?"


"내가 바이오로이드가 없는 세상에서 왔다고 하면 믿을 수 있겠어?"


"...빈민가 출신이라고?"


"아니아니, 왜 말이 그렇게 되는... 아무것도 아냐. 나에 관한건 당장 중요한 게 아니니 넘어가자고. 포츈, 그 수용소는 가까워?"


"어어? 설마 가려고? 그게, 차를 타고 가면 하루안에 왕복할 수 있는 거리거든? 그리고 바이오로이드 제조시간은 아무리 길어도 하루를 넘기지 않으니까..."


"그럼 사흘안에 다녀올 수 있겠네."


"인간, 지금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그 누군지도 모르는 유전자 씨앗을 복원하려고 굳이 위험을 감수하겠다고?"


LRL이 내 앞으로 걸어와서 나를 마주보고 섰다.


"언제 또 제조기를 볼 수 있을지 모르잖아. 그리고 버뮤다 팀에서 만든 바이오로이드라면 분명 큰 도움이 될거야."


"쉐이드가 한 말 잊었어? 그건 시험기라고, 정식출시되지 못한 미완성 바이오로이드! 아무런 능력도 없을지도 모르지! 도움이 된다는 보장이 어디있어?"


"그렇다 해도... 쉐이드랑 약속했잖아. 이 아이에게도 생명을 부여받을 기회를 달라고. 그리고 수용소에 가면 겸사겸사 거기서 일하는 바이오로이드들도 해방시킬 수 있을테고. 이젠 배도 생겼잖아?"


LRL은 대답하는 대신 인상을 찌푸리고 나를 노려봤다. ...내가 뭐 잘못 말했나? 뭔지모를 불편한 분위기가 감돌던 도중-


"저기... 이건 어떡할까?"


포츈이 입을 열어 우리들의 시선을 모은 뒤 손에 들고있는 그 구속장치를 보여줬다.


"그냥 갖다버ㄹ... 잠깐, 저거 또 필요한가?"


"유감이지만 미국에 또 들어갈 예정이라면 필요하네. 자네는 이번에도 바이오로이드인 척 해야지."


"하아..."


저 지긋지긋한 물건을 기껏 풀었는데 또 차고다녀야한다는 생각에 나는 마른세수를 했다.


"...포츈."


"으, 응?"


"그거 배터리 충전해서 돌려줘..."


이 기구한 팔자는 도무지 나아지질 않는구나.


***


트리아이나가 안내해준 숙소엔 있을 건 다 있었다. 의자와 탁자, 침대가 구비되어있을 뿐더러 화장실엔 물이 나오는 세면대까지 있었다. 그동안 줄곧 거지같은 곳에서 먹고자다보니 눈이 낮아져서 이런 정상적인 방에서 잘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이 벅차올랐다.


침대에 누워 다리뻗고 쉬려던 차에 드론이 내 앞으로 날아왔다.


"이보게 대장. 한가한가?"


"...한가하지? 여기서 달리 할 일이 뭐가 있다고."


"그렇군. 그럼 나랑 같이 나가서 바람이나 좀 쐬지 않겠나?"


"어... 추워서 싫은..."


거절하려고 했지만 드론이 지 몸을 이리저리 까딱거리며 몸짓하는 게 뭔가 하고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결국 포츈한테 빌린 외투를 걸치고 갑판으로 나오게 되었다. 갑판 위엔 컨테이너가 잔뜩 적재되어 있어서 우리가 다닐 수 있는 틈이 적었다.


"멀리 갈 필요없네. 안에 있는 다른이들이 듣지 못할 거리면 되니 여기면 충분하네."


밖으로 나와서 문으로부터 몇 걸음밖에 안떨어졌는데 드론이 나를 불러 멈춰세웠다 


"굳이 밖으로 끌고온 이유가 뭐야?"


"할 얘기가 있네. LRL에 대해서 말일세."


"남들이 들으면 곤란하기라도 해?"


"그런 셈이지. 그동안은 좁은 장소에 우리 모두 옹기종기 모여있다보니 얘기할 기회가 없었는데 드디어 자네랑 다른 일행들이 떨어졌구만. 그래서, 용건이 뭐냐면..."


드론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계속했다.


"우리가 엘븐을 따라가 더치걸을 만났던 그 날을 기억하나? LRL과 더치걸이 싸웠던 그 일도?"


"...당연히 기억하지. 그 일은 왜꺼내?"


"그날 밤 자네는 자고있었을 테지?"


"그래. 그건 또 왜... ...밤에 무슨 일 있었어?"


"...대장.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듣게."


드론은 공중에 뜬 채로 한바퀴 돌아 주변을 가볍게 살핀 뒤 말을 계속했다.


"LRL을 주의하도록 하게."


"뭐...?"


드론은 그날 내가 자고있던 동안 일어났던 일들을 들려주었다. LRL과 더치걸이 만나 또 서로를 죽이려고 했던 일, 그리고 그 때 LRL이 했던 말까지도. 


LRL은 다른 일행을 견제하고 있다. 나를... 독점하기 위해서. 


"...거짓말이지?"


"그렇지 않네. 내가 뭐하러 그녀를 모함하겠는가."


"증거는 있어?"


"가진 거라곤 내 기억밖에 없네. 그 일의 당사자인 LRL이나 더치걸에게 물어 교차검증하는 방법도 있긴 하지만... 일단 여기선 내 말을 들어주게. 잘 생각해보게나. LRL이 그동안 보여줬던 모습과도 일치하지 않은가?"


생각해보니 완전히 말이 안되는 소리는 아니었다. 일행을 늘려야 생존에 유리할텐데 LRL만큼은 일행이 늘어나는 것에 대해 유독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그 이유가... 좌우좌가 무슨 얀데레같은 성격이었기 때문이고? 그 성격때문에 LRL이 그렇게 행동한 거라고 생각하면 앞뒤가 맞아떨어진다. 


LRL이 모든 심정을 털어놓은 건 아니었기에 드론도 그녀의 마음을 완벽히 파악한 건 아니라고는 했지만, 지금까지 표면으로 드러난 증거만 모아봐도 그녀는 생각보다 위험한 상태였다. 그러면 좀 전에 LRL 앞에서 새 바이오로이드 복원에 일행 증강을 밀어붙인 건... 지뢰 밟은건가?


"그럼... 좌우좌를 쫓아내야 한다건가, 그런 말을 하려는 거야?"


"그게 아닐세."


드론이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그 아이는 아직 선을 넘지 않았잖은가, 자네의 의견을 존중해서. 그러니까... 이걸 말해준 이유는, 물론 조심하라는 의미도 있지만, 그보다는... 그 아이에게 좀 더 신경을 써달라는, 그런 얘기였네. 그 아이는 100년을 살았음에도 제대로 성장하질 못한 불쌍한 아이잖은가. 그러니... 부디 그녀를 버리지 말아주게나."


드론이 간곡히 호소했다. 로봇임에도, 이성보단 감성에 기대어서. 물론 나 역시 LRL을 버린다거나 그러고 싶진 않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아무런 조치 없이 안고갈 수도 없다. 어떻게 해야하는지, 어떻게 LRL에게 다가가야 할지, 드론에게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 지 갈피를 잡지 못하던 도중...


"인간."


LRL이 우릴 찾아 밖으로 나왔다.


"아, 좌우좌... 무슨 일이야?"


"이제 곧 미국 영해에 진입할 거야. 감시 AGS한테 걸리기 실으면 빨리 선내로 들어와. 그런데 아저씨랑은 무슨 얘기 하고있었어?"


"그냥 뭐... 남정네들끼리 잡담이나 좀 나누고 있었다네."


"흠."


LRL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고선 턱으로 활짝 열린 문을 가리켰다.


"알았어, 알았어..."


나는 LRL을 지나쳐 선실 안으로 걸어갔다. 드론이 따라오는 소리는 들리는데 LRL의 발자국 소리는 안들리길래 뒤돌아보니 그녀는 아까 그 자리에 선 채로 나를 보고 있었다.


"...안 와?"


"곧 갈거야."


"...추우니까 너무 오래 있지는 마."


나는 도로 몸을 돌려 선실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LRL은 문턱을 넘어선 인간이 통로 안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작아지는 뒷모습을 묵묵히 보고 있었다. 그녀는 새로 합류한 두 명을 추가해 이 팀의 인원이 총 몇 명인지 세었다.


"10."


총 10명. 누구도 듣지 못할 정도로 작게 읊조렸다. 


"10..."


대장인 인간까지 포함해서 10명. 거꾸로 말하자면 그 인간을 따르는 이들이 9명이나 된다는 뜻이었다.


"...너무 많아."


LRL은 왼눈을 덮고있는 안대를 어루만지다가 바다로 고개를 돌렸다. 수평선을 가리고 있는 하얀 육지가 보였다. 바로 알래스카였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덮은 구름을 잠시 쳐다보다가 배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토막상식: 든든거리는 말투는 오르카 포츈언냐만 그런거다. 

따라서 다른 포츈은 정상적으로 말하는게 설정에 맞지만 솔직히 포츈하면 든든인데 이 캐릭터성을 포기할순 없지. 말투만으로 누가 말하는건지 파악할수 있다는 이점도 있고


그림체 정리해볼겸 그려본 현재의 라붕이 파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