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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십 년 만에 본 앙헬의 인상은 그리 좋지 않았다.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었지만, 그도 휩노스 병으로 여간 고생했는지 눈 밑이 검었고 안색이 창백했다.

 

 뭐, 지금 세상에서 우리 손녀를 제외하고 시한부 아닌 사람이 없겠다만, 살날도 얼마 안 남은 노인네가 호위용 AGS를 주렁주렁 달고 오는 걸 보니 피식 웃음이 나올 뻔했다. 다행히 내가 헬멧을 쓰고 있어서 표정이 보이지 않은 게 다행이다.

 

 앙헬이란 인간이 웃음이 나오긴 해도 그의 등장만으로 전황은 대치 상태가 되었다.

 

 엠프레시스 하운드 전원이 덤벼도 압도하지 못한 로크가 무려 둘. 설령 페레그리누스랑 글라시아스가 합류한다고 해도 승패를 장담할 수 없는데, 앙헬이 끌고 온 병력도 참전한다면 굉장히 불리했다.

 

 술기운에 정신이 온전치 못한 마리아가 다 같이 죽자며 소리라도 질렀다간 우리끼리라도 도망가야 할 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술기운에 무너질 사람이 아니었다.

 

 “천하의 앙헬이, 죽으려고 직접 행차하다니. 그래, 오늘이야말로, 네놈을 내 손으로…….”

 “마리아, 안 그래도 추한데 말하는 것마저 추해졌군. 저 졸부랑 지내다 옮겨붙기라도 했나.”

 “닥쳐! 너나, 나나, 오늘내일 죽을 몸인데, 추하고 자시고, 할 게 있어?”

 “적어도 나는 너처럼 추한 최후와 달리 최후의 최후까지 누리고 싶은 것은 전부 누리고 화려하게 최후를 맞이할 수 있겠군.”

 

 확실히 알코올중독에 간암 말기로 온몸이 만신창이인 마리아와 다르게 인상이 어둡지만 그래도 겉모습은 멀쩡한 앙헬이 대조되었다.

 

 “아니. 앙헬, 네놈의 최후는 화려한 최후가 아니야. 내 손에, 죽는 것이야말로 네놈의 최후다!”

 “큭큭, 나를 죽이겠다고? 고작 이딴 것들로?”

 

 앙헬의 말이 끝난 직후, 엠프레시스 하운드와 대치 중인 로크와 우리를 노리는 로크의 몸이 붉은 전기에 휩싸였다. 활짝 핀 로크의 날개에서 무시무시한 스파크가 불꽃을 튕겼다.

 

 동시에 앙헬이 끌고 온 AGS들이 우리를 겨냥한다. 레이저 포인터가 나와 마리아를 비추자 글라시아스가 날개를 펼쳐 우리를 덮어주었다.

 

 심상치 않은 느낌에 사냥개들은 표정을 굳히며 자세를 잡았고, 금란이와 페레그리누스가 우릴 지키기 위해 앞을 막아섰다.

 

 “여제님!”

 

 바르그도 합류해 금란이의 옆에 섰지만, 역장이나 보호막을 가진 것도 아닌 이상 별다른 의미는 없었다.

 

 최악의 상황이다. 로크 둘까지 상대하는 건 예상했지만, 앙헬이 직접 병력을 이끌고 올 줄은 몰랐다. 각개격파면 모를까, 압도적인 다수를 지휘하여 몰아붙이면 우리에겐 답이 없다.

 

 당장 앙헬이 신호만 하면 살아남는 것도 어려웠다.

 

 하지만 앙헬은 다행히 바로 공격하지 않았다.

 

 “세상이 멸망하면 나를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나와 같은 위치라고 생각했나?”

 

 앙헬은 담담하게 현실을 말하였다.

 

 “헛된 망상은 망상일 뿐이다. 설령 내가 이 빌어먹을 병으로 먼저 죽었다 하더라도 마리아, 너는 내 시체조차 건들 수 없었을 것이다.”

 “닥쳐, 닥쳐, 닥치라고 앙헬…….”

 “애초부터 너는 나에게 아무런 가치도 없었다.”

 

 손만 뻗으면 닿을 것 같은 거리였다. 평생을 앙헬에 대한 복수심으로 살아왔는데, 최후의 최후에서조차 그에게 닿지도 못한다는 현실은 너무나 혹독했다.

 

 “적적하던 차에 제법 볼만한 광대놀음이었다. 이제 그만 패배자답게 바닥을 기도록 하게.”

 

 더 이상 흥미를 잃었는지 앙헬은 자기 할 말 끝나자마자 몸을 돌렸다. 뒤돌아선 앙헬에게 마리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건지, 아니면 말할 기운이 없는 건지 힘겹게 숨만 쉴 뿐이었다.

 

 과정은 좋지 않았지만, 앙헬에 대한 마리아의 집착을 풀기는 하였다. 마리아가 더 이상 그녀들에게 앙헬을 죽이라고 명령할 일도 없을 테니 원작에서처럼 방황할 일은 없을 거다. 그래, 여기서 물러나기만 한다면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봐, 앙헬.”

 

 보자마자 남의 외모로 인신공격하고, 사람 피곤하게 만들 정도로 히스테릭이 심한 할망구다.

 

 “듣자 듣자 하니까 도저히 못 듣겠네.”

 

 그러나 목적을 이루기 전까지 술과 약에 의지해 죽음 앞에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다.

 

 그런데 그녀가 마신 독주만큼, 아니 그보다 더 지독했던 그녀가 좌절하여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두고 볼 수 없었다.

 

 나를 감싸주고 있던 글라시아스의 날개를 벗어나 앙헬을 향해 똑똑히 전했다.

 

 “패배자가 뭐? 패배자는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너야말로 패배자지.”

 “내가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패배자다?”

 

 앙헬은 다시 뒤를 돌아보더니 그제야 나를 똑바로 보았다.

 

 병약하다고는 하지만, 상대는 인류의 정점에 선 지배자였다. 그런 압도적인 존재와 마주해서인지 아니면 글라시아스의 냉기 때문인지 손발이 절로 떨렸지만,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거 궁금하군. 내가 무엇을 남기지 못했다는 것이지?”

 “설마 이곳에 쌓인 금은보화랑 잡동사니 따위가 네가 남겨둔 거라 생각한 거냐? 이딴 것들은 멸망한 세계에선 참치캔 하나만도 못해.”

 

 돈도, 보석도, 사치품 따위 어차피 인류가 멸망한 시점부터 가치 따윈 없다. 그렇기에 나는 철충이 침략하기 직전 모든 재산을 처분하였고, 멸망 이후를 대비할 수 있었다.

 

 “그런데 똑똑한 네가 이렇게 쌓아둔 걸 보면 뭐, 언젠가 전쟁이 끝난 뒤 부활을 노리기라도 하는 건가? 미안하지만, 앙헬. 지금도 에바 프로토타입이 휩노스 병의 치료를 위해 연구하고 있고, 내 손녀가 살아있어. 새로운 인류의 지도자가 될 그녀들이 너를 되살려줄 거라 생각하나? 절대 그럴 리가 없지.”

 

 원작에서 앙헬의 무덤은 로크의 형제기가 자폭하는 바람에 무너지고 말지만, 설령 무사했다 하더라도 아무도 그를 살릴 이는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졸부, 방금 손녀가 살아있다는 말은 휩노스 병에 걸리지 않았다는 건가?”

 “그래, 휩노스 병은 치료할 수는 없지만 예방할 수는 있거든.”

 “그건 흥미로운 얘기군.”

 “기대하게 만들어서 미안하지만, 펙스 그 망할 노인네들 때문에 유일하게 시술할 수 있는 내 아들이 죽었다.”

 “그거 아쉽게 되었군.”

 

 누가 같은 리오보로스 핏줄 아니랄까 봐 마리아가 눈을 번뜩였을 때랑 실망한 기색을 보였을 때랑 똑 닮긴 닮았다.

 

 막내가 죽어서 휩노스 병을 예방할 수 있는 시술자는 아무도 없다. 물론 그가 남긴 연구자료를 통해 닥터나 의료용 바이오로이드에게 시술을 할 수 있겠지만, 굳이 그것까지 꺼내지 않았다. 앙헬을 자극하는 건 이것 말고도 많으니까.

 

 “나는 비록 네가 말한 대로 보잘것없는 졸부에 불과하지만, 나의 핏줄을, 의지를 이을 후손을 남겼다.”

 “………….”

 “너는 역사의 뒤안길에 사라질 반면, 내 후손은 새로운 인류의 지도자가 되어 영원히 기록되겠지. 그리고 나는 이 세상에 살아있었다는 흔적을 영원히 남기는 거고.”

 

 레모네이드조차 펙스의 회장들을 잊히지 않도록 역사 왜곡과 미화를 일삼아서라도 분주한데, 앙헬은 그런 바이오로이드조차 없었다. 인간 자체에 아무런 흥미가 없었으며, 홀로 고고하게 살아온 만큼 멸망한 세계 이후, 그를 기억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역사는 승자의 것이고, 살아남은 것이 곧 강자였다.

 

 그렇기에 후손을 생존시킨 나는 승리자였고,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앙헬은 패배자였다.

 

 “하…….”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는지 앙헬은 헛웃음만 지었다.

 

 “네 녀석의 쓸데없는 헛소리를 듣느라 시간만 낭비했군.”

 “하여간 리오보로스 핏줄은 왕재수가 패시브구만.”

 

 남을 존중이라고는 하나도 모르는 사이코패스 같으니라고. 그래도 나는 하고 싶은 말 다하고, 덤으로 손녀 자랑도 했으니 이 정도면 훌륭한 비틱질이라고 할 수 있겠지? 커뮤에서도 차단당해도 할 말이 없겠구만.

 

 그런데 내 말이 아주 쓸데없지는 않았는지 앙헬은 어째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저런 얼굴을 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해서 멍하게 쳐다보고 있었더니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봐, 졸부. 아무래도 네놈은 내가 인정할 정도로 운 하나는 좋은 것 같군.”

 “크흠, 내가 좀 끝내주긴 하지.”

 “그래, 조금만 더 일찍, 하루만 더 일찍 왔어도 나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네 손녀를 찾았을 거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갑자기 소름이 확 돋는다. 내 손녀는 왜 찾는 건지 모르겠지만 절대 좋은 의도는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 앙헬은 누가 멸망 전 ㅈ간 아니랄까 봐 정말 엿 같은 이유였다.

 

 “네놈의 말대로 나의 ‘핏줄’과 ‘의지’를 이을 후손을 뒤늦게라도 만들었을 테니까.”

 “미친 새끼가 어디서 남의 손녀를 씨받이로 쓰려고!!”

 

 아마 헬멧을 벗고 있었다면 내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했을 거다. 아니, 사람이 할 말 안 할 말 따로 있지 대놓고 남의 가족을 씨받이로 썼을 거라 하니 그냥 욕부터 자동으로 나오는 건 당연했다.

 

 원작에서도 레모네이드가 탄생하게 된 비화를 듣고 역겨웠는데, 내 가족이 그 대상이 되었을 거라 하니 분노에 몸이 떨릴 정도였다.

 

 “내가 입이 찢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앙헬 네 새끼가 원하는 말은 결코 없을 거다!”

 “그러니까 운이 좋다는 것일세. 나는 한번 말하면 거두는 일이 없었으니까.”

 “미친 새끼…….”

 

 언제 쓰러질지 모를 병약한 몰골인데도 저 독한 눈빛을 보니 허언이 아니었다. 나랑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는 노인네가 이제 막 20살을 넘긴 손녀를 넘보려고!

 

 나는 더 이상 이 공간에 있고 싶지 않았다. 목숨이 아깝다든가 그런 이유가 아니라 앙헬이란 저 ㅈ간이 또 무슨 미친 소리를 내뱉을까 무서워서 도저히 있을 수가 없었다. 마리아의 상태를 보니 어느 순간 잠들었는지 힘겨운 숨소리만 들렸다.

 

 싸워도 이길 수 없고, 어차피 휩노스 병으로 디지고, 100년 뒤에는 무덤조차 자폭 버튼으로 무너질 예정이니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 없다. 그저 앙헬에게 엿이나 먹이고, 침이나 뱉으려고 했다가 식겁한 참이다. 마리아도 의식을 잃었으니 이걸로 여기에 계속 있지 않아도 된다.

 

 나만 그런 생각을 한 게 아니었는지 금란이랑 두 AGS가 내 신호를 기다렸다. 바르그와 장화도 사전에 나와 계획한 대로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지금 우리 일행중에서 모든 결정권자는 다름 아닌 나뿐이었으니까.

 

 “하하, 그런가. 나는 패배자였다는 건가…….”

 

 언제 신호를 보내야 할지 각을 재고 있는 와중에 앙헬이 씁쓸한 목소리로 자조했다. 이윽고 그는 나를 보더니 그대로 손을 들어 AGS들에게 명령하려는 순간, 다리가 풀렸는지 비틀거리며 쓰러지자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페레!”

 “맡겨만 달라고!”

 

 이미 휴먼 폼으로 전환한 페레그리우스는 닥치는 대로 천장을 향해 레이저를 쏘아댔다. 그 무식하게 두꺼운 금속제 문도 뚫어버린 위력에 동굴의 잔해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고, 로크 두 기가 앙헬에게 안위를 위해 그에게 달려갔을 때 나는 마리아를 안고 금란과 빙룡에게 탔다.

 

 “자, 가자 빙룡아!”

 “……하아, 꽉 잡거라.”

 

 시급한 상황에서까지 따질 순 없었기에 글라시아스는 한숨만 내쉴 뿐, 우리를 태운 채 전속력으로 우리가 들어왔던 입구를 향해 날아갔다.

 

 바르그 쪽을 보니 그녀의 지시 아래 사냥개들이 분주히 퇴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죽은 사람 한 명 없이 앙헬의 금고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

 

 할아버지가 앙헬의 금고에서 탈출하는 이야기까지 들은 부사령관은 아직 가시지 않은 소름에 두 팔을 감쌌다.

 

 “……나 리리스에게 발견되기 전부터 위험할 뻔했네.”

 “각하의 조부께서 흥분하신 나머지 성급하셨습니다. 앙헬 공께서 휩노스 병으로 상태가 온전치 않았으면 진짜로 각하를 찾아냈을 겁니다.”

 “감히 주인님을……!”

 

 로크의 설명에 리리스는 빠득 이를 갈며 주먹을 꽉 쥐었다. 얼마나 꽉 쥐었는지 주먹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그걸 본 부사령관은 화들짝 놀라 그녀의 손을 잡았다.

 

 “진정해, 리리스! 어차피 옛날 일이고, 나는 괜찮으니까.”

 “죄송합니다, 주인님. 무슨 수를 쓰더라도 앙헬을 처형했어야 했는데, 여제님의 상태가 걱정되어서 그만…….”

 

 전황은 불리했지만, 당시 바르그는 결사의 의지로 뛰어들었다면 앙헬을 죽일 수 있었을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피를 토하며 쓰러진 마리아의 상태 때문에 도주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마리아가 여제였기에 어쩔 수 없었지만, 지금의 주인인 부사령관을 위하지 못한 게 천추의 한이었다.

 

 “바르그도 그만. 어차피 앙헬도 말만 꺼냈지, 실제 뭔가 저지르지 않았으니 자책할 필요 없어.”

 “아, 참고로 그 이후의 얘기입니다만. 앙헬 공께서 영면에 빠지시기 전, 만약 그 졸부의 손녀를 만나게 되면 제거하라고 저희 형제에게 명령을 내렸었지요.”

 “로크!?”

 

 별것도 아니라는 듯이 그냥 그런 일이 있었다는 어조로 꺼낸 로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리리스는 로자아줄을 전개했고, 바르그와 함께 그를 잔뜩 경계했다. 이터니티조차 부사령관과 아이들을 뒤로 몰고 언제든 몸을 받칠 준비를 하였다.

 

 오르카 내 무기 반입 금지가 아니었다면 이들은 로크를 향해 망설임 없이 무기를 겨누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경계를 받는 대상은 너무도 태연했다.

 

 “그렇게 경계하시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제가 받은 명령은 ‘손녀’를 만나면 이었지, 실제 저는 인간 여성이 아닌 인간 남성이신 사령관 각하를 먼저 뵈었고, 그를 모시기로 한 이후부터 앙헬 공의 명령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그런 건 빨리 말해야지!”

 

 사달이 벌어질 뻔한 상황이 재밌는지 로크는 큭큭 웃고 있었고, 부사령관은 놀란 새가슴을 쓸어내리며 빼액 소리 질렀다.

 

 당시 부사령관직에 적응하기 위해 자신을 혹사하는 게 일상이었다. 그런 부사령관을 보다 못한 사령관이 휴식을 권했었다.

 

 마침 남국 섬이기도 해서 리리스와 함께 모래사장에서 쉬고 있었는데, 그덕분에 로크한테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니 아이러니했다.

 

 “이거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각하의 반응이 신선한 나머지 자꾸 이러는군요.”

 “감히 깡통 따위가 주인님을 우롱하시는 건가요!”

 “비록 앙헬은 이 손으로 처형하지 못했지만, 오래 묵은 미련을 해소할 수 있겠군.”

 

 또 험악해지려는 분위기에 부사령관은 지쳤는지 한숨을 내쉬고는 리리스와 바르그를 껴안았다.

 

 “주, 주인님?!”

 “으읏!”

 “너희가 이러니 로크가 자꾸 놀리잖아. 이제 좀 진정하고 다음 얘기 좀 해줘 바르그.”

 “예, 뭐…….”

 

 바르그는 할아버지와 마리아가 재혼하셔서, 마리아의 손녀가 된 부사령관을 새로운 여제로 모시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현재까지 얘기를 들어보면 마리아 리오보로스의 삶은 끝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도대체 어떻게 재혼하게 된 것인지 부사령관은 물론 리리스랑 로크도 관심을 갖고 조용히 바르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

 

 이놈의 방정맞은 입, 그놈의 비틱질이 뭐라고 앙헬 같은 미친놈 앞에서 우쭐거려서 하마터면 진짜 큰일 날 뻔했다. 나이를 뒤로 처먹은 탓에 사령관에게 손녀를 시집보낸다는 내 원대한 계획이 망가질 뻔했다.

 

 간신히 앙헬의 금고에서 탈출한 직후 우리는 서둘러 섬을 벗어났다. 앙헬 그 미친놈이 작정하고 쫓아왔다간 대책이 없었기도 했고 마리아의 상태가 너무 위중해서였다.

 

 당장 숨 넘기 직전이었던 마리아에게 마약성 진통제를 투여해서야 그녀는 안정화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물론이고 우리 모두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살날이 진짜 끝에 도달했음이라고.

 

 휩노스 병 때문에 안 그래도 쇠약한 몸인데, 잠들지 않겠다고 발악하듯 약과 술을 달았으니 멀쩡할 리가 없었다. 오히려 전문지식이 없는 내가 보더라도 아직까지 살아있다는 게 놀라울 뿐이었다.

 

 앙헬의 대한 집념 때문일까. 아니면 리오보로스 일가가 명줄이 질긴 것일까. 무엇이 정답이든 마리아 리오보로스라는 인간의 끝이 여기까지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앙헬은 어떻게 되었지?”

 

 섬에서 탈출한 지 나흘이 지난 시점에서 마리아는 눈을 뜨자마자 앙헬부터 찾았다. 정말 대단한 집념에 혀를 내두를 뻔했다. 하지만 나는 이 시대의 유일한 신사 라붕이, 이번이 마지막일지 모를 그녀의 물음에 성의를 다해주기로 했다.

 

 “아마 죽었을 거야. 동굴이 무너져서 잔해에 깔려 시체도 찾지 못하겠더라.”

 “그런가.”

 

 물론 거짓말이다.

 

 페레그리누스의 빔이 아무리 위력이 강해도 그 큰 동굴을 한 번에 무너트릴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빠져나오는 것도 벅찬데 앙헬을 죽이는 건 무리였다.

 

 그녀 또한 내 서툰 거짓말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다. 하지만 마리아는 거기에 뭐라 하지 않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거, 못생긴 얼굴이 뭐가 좋다고 뚫어져라 보고 있어? 사람 무안하게 시리.”

 “……너는 앙헬을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패배자라고 하였지.”

 

 분위기 띄워보려는 내 말에 무색하게 마리아는 담담히 자신의 할 말만 꺼냈다. 어조가 너무 진중해서 장난칠 엄두도 들지 않았다.

 

 “핏줄과 의지를 이을 후손을 남기지 못한 패배자. 그러면 그 패배자에 나도 포함되는 건가?”

 “아니, 그건 아니야 마리아.”

 

 나는 병실 앞을 지키고 있을 바르그와 바이오로이드를 향해 시선을 주며 마리아의 물음에 답했다.

 

 “비록 핏줄은 아니더라도 너의 의지를 이어줄 아이들이 있잖아.”

 “하, 그것들은 어차피 도구에 지나지 않아.”

 “하지만 네가 죽으면 슬퍼 울어줄 수 있고, 너를 기억해줄 수 있지.”

 “………….”

 

 앙헬은 수많은 보물과 AGS에게 둘러쌓인 채 세계의 삼분지 중 하나를 지배했던 자답게 화려한 최후를 맞이했지만, 아무도 그를 슬퍼해 주지 않았다. 그는 홀로 외롭고 쓸쓸하게 최후를 맞이하였고, 그렇게 잊어져 갔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렇지 않았다. 원작에서도 죽은 그녀의 명령을 따르고, 잊지 못해 살아간 이들이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평생을 도구로 여긴 바이오로이드였고, 사냥개들이었다.

 

 “너의 말대로 앙헬보다 사정은 낫군.”

 “알았으면 지금이라도 걔들한테 잘 좀 해줘. 이제 앙헬도 없으니까.”

 “그래, 사냥이 끝난 이상 사냥개의 역할은 끝났으니.”

 

 가족으로 생각해줬으면 좋겠지만 평생을 도구로 여겼으니 아무래도 거기까지는 무리인가 보다. 그나마 목적을 이뤘으니 더 이상 학대하지 않는 것만으로 감지덕지였다.

 

 “……그때, 앙헬을 죽인 뒤 무엇을 할 거냐고 물었었지?”

 “아, 그때를 말하는 건가? 그래, 앙헬을 죽인 뒤엔 뭐할 거냐고 물었었지.”

 “나는 일평생 앙헬을 죽이겠다는 복수심만으로 살아왔어. 아무리 불가능하더라도 언젠가 죽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지. 그래서 그 이후의 삶은 생각해본 적도 없었고, 생각할 시간조차 없었지.”

 “……그렇군.”

 

 평생의 숙원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 이후를 생각해본 적도 없고, 이제는 생각해볼 시간조차 없었다. 그녀가 말한 뜻이 무엇인지 알기에 나는 뭐라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네가 앙헬에게 했던 말을 생각하니 하고 싶은 게 생기더군.”

 “잘됐네. 뭔지 모르겠지만 말만 하라고. 내 최선을 다해 도와줄 테니.”

 

 이건 내 진심이다.

 

 복수를 끝낸 뒤 남은 공허함을 씻을 수 있는 건 새로운 목표였다. 나는 마리아가 저렇게 공허함만 남긴 채 삶을 마감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얼마나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동원해서라도 그녀가 하고 싶은 걸 이뤄주고 싶었다.

 

 “너의 손녀에게 나의 모든 걸 넘겨주고 싶다.”

 “……응?”

 

 내가 잘못 들은 건지 마리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시한부인 게 무색하게 또박또박 자신의 바람을 말했다.

 

 “나의 의지, 리오보로스의 성, 엠프레시스 하운드의 여제를 넘겨주고 싶다.”

 “마리아, 너 그 말은……!”

 “가능하면 내 손녀로 입양되었으면 좋겠지만…….”

 “그건 절대 안 되지!”

 

 시한부라도 해도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이 따로 있지. 어딜 남의 손녀를 호적에서 파내려고 해!

 

 내 반응을 예상했는지 마리아는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이것밖에 없군. 나와 결혼하도록 하지.”

 “……알코올로 정신에 이상이라도 생겼냐?”

 “내 머리는 어느 때보다 맑아. 살아생전 이보다 맑았던 적은 없는 것 같군.”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이라고 보이지 않게 마리아의 얼굴엔 여유로움이 담겨있었다.

 

 “……설마 나한테 반한 건가?”

 “미쳤다고 너같이 못생긴 돼지한테 반했겠어?”

 “너보다 이쁜 우리 할멈도 내 매력에 반했었다고.”

 “송구합니다만, 주인마님이 반한 게 아니라 주인어른이 몇 번이고 구애하신 걸로 기억하옵니다.”

 “아니, 금란아! 여기서 그걸 말하면 어떡하냐!”

 “풉, 확실히 바이오로이드도 나쁘지 않군.”

 

 금란의 말에 마리아는 웃음을 참지 못했고, 나는 씩씩거리며, 애써 진정했다.

 

 “후우, 아무튼 왜 나랑 결혼까지 하면서 내 손녀에게 넘기고 싶은 거지?”

 “나는 앙헬처럼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채 잊히고 싶지 않다. 마지막에 승리한 건 앙헬 리오보로스가 아닌, 마리아 리오보로스로 남고 싶다.”

 “마리아…….”

 “……안 되는 건가?”

 

 애처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마리아에게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보면 반칙이잖아.”

 “나는 마리아 리오보로스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는 법이 없지.”

 “하여간 리오보로스 일가는 왕재수가 패시브여.”

 

 사랑하는 손녀야. 다이어리에 적진 못했지만, 할애비는 황혼에 재혼하게 되었구나. 너도 모르는 사이 마리아 리오보로스가 새할머니가 되면서 이름 석자 뒤에 리오보로스가 붙게 되었지만, 그래도 제법 간지나지 않느냐? 사령관도 여제님 소리는 못 들어봤을 텐데, 애들한테 여제님이라 불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훗날 알게 되더라도 너무 놀라지는 말거라.

 

 냉동장치에 잠들어있을 손녀에게 짧게 위안을 보내주고, 나는 앙헬의 금고에서 몰래 챙겨둔 블랙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 하나를 꺼냈다.

 

 블랙 다이아몬드가 로크를 연상시켜서 기념품으로 챙겨뒀었는데, 설마 결혼반지로 사용하게 될 줄은 몰랐다.

 

 “마리아 리오보로스. 나랑 결혼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병실 침대에 상체만 일으킨 그녀에게 나는 한쪽 무릎을 숙여 반지를 내밀며, 최대한 로맨틱한 분위기로 프러포즈를 해봤다. 그러나 이런 내 노력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마리아는 질색했다.

 

 “어울리지 않게 징그러운 짓하지 마라. 이러지 않아도 충분하니까.”

 “아오, 마지막까지 진짜……!”

 “하지만, 그래도 고맙군. 너랑 있으면 심심하지 않아서 좋더라.”

 

 마리아는 살며시 웃으며 약지에 반지를 끼웠다. 그리고 그걸 소중히 감쌌다. 솔직하지 않은 건지, 저렇게 좋아하는데 화도 낼 수 없고. 마지막 소원인데 내가 참아줘야지.

 

 “손녀의 사진이 있나?”

 “당연히 있지. 내 보물이지만, 이제 가족이 되었으니 특별히 보여주도록 하지.”

 

 지갑 속에 소중히 간직한 사랑스런 우리 손녀의 사진을 보여주자 마리아는 반지만큼 소중하게 다루었다

 “다행히 너를 닮지 않고 사랑스럽네. 리오보로스의 성을 물려주어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우리 손녀가 사랑스럽긴 하지만 끄응, 닮지 않았다고 하는 건 너무한데…….”

 “그래, 이 아이가 내 손녀로구나…….”

 

 만나 본 적 없지만, 마리아는 옅은 미소를 지은 채 사진 속의 손녀를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상냥하게 미소 지으며, 의젓하게 앉아있었다. 뒤에서 바라보고 있는 블랙 리리스의 표정만 보아도 그녀가 얼마나 사랑받았는지 알 수 있었다. 비록 뭔 해괴망측한 인형을 들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사랑스러움이 깎이는 일은 없었다.

 

 얼마나 손녀의 사진을 보았을까. 눈에 조금이라도 그녀의 모습을 담아두려던 마리아의 안광이 밝아졌다.

 

 “정말, 행복하구나…….”

 

 안색이 밝아진 마리아는 앉은 자리에서 허리를 꼿꼿이 펴더니 병실 밖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바이오로이드들에게 말을 전했다.

 

 “엠프레시스 하운드는 모두 들어와라.”

 

 마리아의 부름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바르그와 장화, 천화, 그리고 이름 모를 바이오로이드들이 착잡한 표정으로 병실에 우르르 들어왔다. 다행히 VVIP급의 넓은 병실이었기에 그녀들이 모두 들어와도 꽉 차는 일은 없었다.

 

 “……너희들은 못난 주인 수발하느라 고생 많았다. 여기 이 사진 속에 있는 아이가 내 손녀이며, 언젠가 너희들 앞에 나타날 때 새로운 여제로서 섬기도록 해라.”

 

 그녀들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마리아 리오보로스가 든 사진 속의 손녀를 머릿속에 기억해두기 위해 뚫어지듯이 바라보며, 여제의 다음 말을 기다릴 뿐이다.

 

 “앙헬은 죽었다. 너희의 쓰임은 다 하였고, 내 손녀가 다시 나타났을 때, 그때까지 자유롭게 살아가도록.”

 

 본능적으로 느껴진다. 다음이 그녀의 마지막이라는 것을, 이 자리의 모두가 알아차렸다.

 

 “고마웠다, 나의 딸들아…….”

 

 그 말을 끝으로 마리아 리오보로스는 숨을 거두었다.

 

 숨이 끊어진 마리아를 향해 그녀의 딸들은 털썩 무릎 꿇었고, 모두가 울면서 여제를 어머니를 불렀다.

 

*

 

 바르그의 이야기가 끝으로 부사령관은 그동안 있었던 의문을 풀 수 있었다.

 

 어째서 바르그가 자신을 여제로 불렀고, 할아버지와 마리아가 재혼하게 되었는지.

 

 모든 사실을 알게 되자 부사령관은 쓴웃음을 지었다.

 

 “……앙헬 공의 마지막을 지켜본 만큼 답할 수 있겠군요. 마리아 리오보로스는 확실히 앙헬 공을 이겼습니다.”

 “그래, 주인님이야말로 여제님이 옳았다는 증명이다.”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채 쓸쓸히 죽은 앙헬을 모신 로크, 모든 걸 남긴 채 가족의 곁에서 죽은 마리아를 모신 바르그.

 

 리오보로스의 각 주인을 모신 AGS와 바이오로이드는 추억을 회상하며, 여운에 잠긴 듯 했지만, 리리스는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퉁명스러웠다.

 

 “리오보로스라니, 마음에 들지 않아요.”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은 거니, 리리스.”

 

 리리스의 불만에 바르그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지자 부사령관은 허둥지둥 물었다. 괜히 좋은 분위기 망쳐봐야 좋을 게 없었다.

 

 “마리아 리오보로스는 목적을 위해 엠프레시스 하운드를 만들어서 테러를 저질러왔어요. 그중에는 무고한 자들도 있었을 테지요. 이유야 어찌 되었건, 복수를 위해서 무고한 자들도 죽이면서 손에 피를 묻힌 악인이 주인님의 조모라니요. 저는 납득할 수 없어요.”

 “리리스…….”

 “주인님은 테러로 인해 조모님과 고모 일가를 모두 잃었어요. 백부께선 고블린을 파헤치다 블랙리버한테 돌아가셨는데, 리오보로스라고요? 어르신께선 제정신이셨던 건가요?!”

 

 급기야 리리스는 울먹이면서 소리쳤다.

 

 차마 부사령관의 가정사까진 몰랐던 바르그는 리리스의 말에 심히 눈동자가 흔들렸다. 로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그런 모두를 둘러본 부사령관은 착잡하기만 하였다.

 

 그리고 무거워진 분위기 속에 아이들은 울음을 터트렸고, 이터니티가 조용히 아이들을 달래주었다.


커미션 받은 부사령관과 리리스. 본 소설의 장르는 백합은 아닙니다!


어우 저녁에는 올리려고 했는데 갑작스런 일정 때문에 겨우 일요일이 끝나기 전에 올리게 됐네요.


마리아와 하운드는 구원 받았지만, 정작 라붕이의 오지랖으로 리리스는 상처 받고, 부사령관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


다음 화는 내일.....올리고 싶지만 예비군으로 패스. 화요일에 올려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