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이 배가 알래스카에 도착하기까지 한 시간도 안남았다. 일행 중 전투모듈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마지막으로 장비점검을 하고 있었다.


"이그니스. 소각장비의 연료는 충분히 남아있어?"


"아뇨... 솔직히 말하자면 얼마 안남았습니다."


"음... 알비스, 탄창은 몇개 남았어?"


"1개하고 반! ...이젠 총알 신중히 써야해. 그치만 연막탄은 많이 남아있어"


알비스가 연막탄을 갖고있었던가? 그건 몰랐네. 방어수단은 그럭저럭 갖춘 모양이지만 그래도 공격수단이 부족한 건 곤란했다.


"역시 빠듯한 상황이네... 그럼 클로버. 네 망치하고 무장의 상태는?"


"문제없어! 우정의 힘이 있는 한, 내 에너지는 무한이야!"


클로버가 주변을 안심시키기 위해 큰 목소리로 호언장담을 했다. 그 덕분에 무거워진 분위기가 조금이나마 환기될 수 있었다.


"그래, 너만 믿을게. 그리고 좌우좌는..."


"소방도끼 하나. 끝."


LRL은 전투모듈이 탑재되어있긴 해도 제대로된 무기는 없었다. 가진 거라곤 이 빠진 소방도끼 뿐이었으니까. 날을 다듬을 숫돌같은 것도 없어서 그녀는 한 발 뒤로 물러나 다른 세 명이 장비 점검하는 걸 묵묵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너랑 더치걸은 새 무기를 찾을 수 있으면 좋겠네. 아참, 엘븐. 네 장비는 어때?"


"나? 나는 전투원이 아닌데?"


"혹시 모르잖아. 확인이라도 해보자는 거지."


"뭐... 내 험지용 특수 프레임도 큰 문제는 없어. 급수탱크도 충분히 채워져있고. 그래도 여기 온 김에 포츈한테 정비를 부탁하고 싶었는데 바쁜 모양이더라."


"바쁘다고? 뭐하느라? 배는 자동항해 모드로 돌려놨다고 했는데."


"몰라. 드론 아재랑 둘이서 무슨 작업하고 있던데."


"그런데 대장님. 정말 대장님까지 가는 건가요? 이 일은 저희에게 맡기고, 대장님은 배에 남아있는 편이 안전하지 않을까요?"


이그니스가 걱정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않고 물었다.


"바이오로이드는 바이오로이드를 제조할 수 없다는 제약이 걸려있으니까, 내가 갈 수밖에 없지."


"명령만 내려주신다면 저희 손으로 제조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아, 그런가... 그치만 수용소에 있는 바이오로이드들을 모으는 데도 내가 필요할걸."


"으음..."


"너무 걱정할 거 없어, 친구. 내 우정의 해머로 대장도 너희들도 모두 지켜줄테니까."


자신감 가득한 얼굴의 클로버가 이그니스의 어깨에 손을 올리자 긴장이 풀린 그녀는 부드럽게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배에 실려있는 수많은 짐들 중 우리에게 부족한 총알이나 연료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오메가 휘하의 AGS들이 철저하게 검사한다고 하니 섣불리 빼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장비점검이 끝나가는 게 보이자 나는 전투모듈이 없는 애들까지 불러모아 다음 안건을 꺼냈다.


"혹시 이 중에 밀수나 밀반입 같은 거 해본적 있는 사람?"


"밀수... 요?"


워낙 생소한 단어가 내 입에서 나오자 다들 고개를 갸웃거리던 중 알비스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나! 나 해본적 있어! 옛날에 창고에서 초코바 가져올 때 탄입대에 넣어서 몰래 옮겼어!"


...이 알비스도 오르카 알비스랑 별반 다르지 않은가보다. 모든 알비스는 초코에 대한 사랑이 유전자 레벨로 각인돼있어서 하나같이 긴빠이의 길을 걷게됐던 건가.


"근데, 그거... 결국 들키지 않았어? 안드바리라던가, 베라라던가..."


"헉... 어떻게 알았어?"


"...옛날에 다른 알비스한테 들었어."


알비스에겐 긴빠이 실력은 있었지만 뒷처리가 완벽하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다른 애는 없나 찾아보던 중 더치걸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기... 내가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더치걸? 해 본 적 있어?"


더치걸은 허리춤에 차고있던 손전등을 집어들었다. 군대에서 쓸법한 ㄱ자 형태의 손전등이었는데, 밑부분의 덮개를 돌려서 열자 배터리가 들어가야할 공간이 텅 비어있는게 보였다.


"안을 파내서 통으로 개조했어. 공장에서 일하던 동안은 쓸 일이 없었거든. 덕분에 손전등으로는 못쓰지만 눈속임용으로는 쓸 수 있지."


나는 더치걸한테 그 손전등을 건네받아 안쪽을 살펴봤다. 얼핏보아 250ml짜리 알루미늄 캔 정도는 들어갈만한 공간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다. 더치걸, 부탁할 게 있어."


"응. 뭘 옮기면 될까?"


나는 가방을 뒤적여서 유전자 씨앗이 보관돼있는 유리로 된 원통을 꺼내보였다. 북한에 있는 버뮤다 팀 연구시설에서 쉐이드한테 받아온 그 유전자 씨앗이었다.


"나 대신 이 유전자 씨앗을 보관해줘."


"그건... 대장이 갖고있는 편이 낫지 않아?"


"우린 포로 신분으로 이동하게 될텐데, 짐검사라도 당했다가 유전자 씨앗이 보이면 압수당할지도 모르잖아. 숨길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그래."


"음... 그건 그렇네. 알았어."


더치걸은 유전자 씨앗을 건네받아 손전등 안에 쏙 집어넣었다.


"한가지 더. 제조기에 도착했는데 만약 내가 무슨 사정이든 간에 직접 제조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너희둘 중 누구라도 좋으니 대신 그 유전자 씨앗으로 제조해줘."


"...뭔가 마음에 걸리는 점이라도 있는거야?"


"아니. 그냥 보험을 들어두자는 거지."


"...알았어. 이건 내가 보관할게. 명령도 확실히 이해했어."


더치걸이 뭔가 결의에 찬 표정을 지으며 손전등의 덮개를 빙글빙글 돌려 잠궜다. 이제 도착하려면 얼마나 더 남았나 생각하던 중 문이 열리며 포츈과 드론이 선실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 다들 잘 쉬고 있었어? 누나 왔거든?"


"오, 포츈. 어서와. 트리아이나는?"


"조종실에 있어. 자동항해 모드라고 해도 계속 자리를 비워둬서는 안되거든. 그보다 이것 좀 봐줄래?"


포츈은 손에 든 그 구속구를 들어올려 나에게 내밀었다.


"아, 그거... 충전 다 됐어? 아직 도착도 안했는데 벌써부터 차야 하는거야?"


"그러려고 부른 게 아닐세. 이걸 잘 보게나."


"왜, 뭐 달라진 거라도 있...? 뭔가 디자인이 변한 거 같은데?"


그 구속구의 앞쪽엔 분명 전원이 켜지면 불이 들어오는 (그리고 착용자 입장에서는 볼 수 없는) 손톱만한 램프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 램프는 없고 대신 누르면 들어갈 것 같은 철판이 붙어있었다.


"대장이 무슨 일을 겪으면서 이걸 차게 된 건지 드론한테 다 들었어. 그런데 누나는 대장이 죄수라는 것도 인정할 수 없고, 죄수마냥 목에 이런 흉흉한 걸 차고 다니는것도 절대 눈 뜨고 못봐주거든? 그래서 드론이랑 힘을 합쳐서 구속구를 최대한 개조해봤지!"


"개조...? 어떻게?"


"먼저 앞에 있는 이 버튼! 이걸 눌러서 뇌파를 가리는 기능을 온오프 할 수 있거든? 버튼이 눌려서 안에 들어가면 켜진거고, 밖으로 돌출되면 꺼진거야."


"그걸 마음대로 껐다킬수가 있다고?"


"그 뿐만이 아니야, 이젠 마음대로 구속구를 벗는 것도 가능하거든! 전에 해체한 부분을 안전벨트처럼 개조해놨으니, 찰 때는 그냥 끼우면 되고, 벗을 때는 여기 뒤쪽에 있는 버튼을 누르면 되거든?"


"참고로 전원을 킨 상태에서 벗게되면 자동으로 전원이 꺼지도록 설정해놓았다네."


"오오...!" 


나는 감탄을 감출 수가 없었다. 구속구를 건네받아 이리저리 돌려보기도 하고, 잠궜다가 풀어보기를 몇번 반복하기도 했다. 나 뿐만 아니라 주변에서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거나 포츈의 공로를 칭찬해주고 있었다.


"굉장한데? 이젠 전보다 훨씬 도움이 되겠다! 고마워, 포츈... 왜그래? 표정이 안좋은데?"


고개를 들어보니 아까까지만 해도 신나게 신기능을 설명하던 포츈의 얼굴이 뭔가 아쉬운 듯한 기색을 띄고있었다.


"이걸로는 한참 부족해... 애초에 목에 차는 구속구 형태인 것부터가 뜯어고쳐야 하는 부분이거든? 그치만 시간이랑 재료가 부족해서 이 기능 2개밖에 추가하지 못했거든... 다른 애들 장비를 점검해주지도 못했고..."


"괜찮아. 이걸로도 충분해. 모습은 이래도 더이상 날 구속하지는 않게 됐잖아. 정말 고마워."


"...내가 더 고맙지. 그렇게 말해줘서..."


포츈은 다시 미소를 지어보였다.


"자, 그러면! 알래스카에 도착한 뒤 어떻게 움직일 지 정리해보도록 하세."


드론이 방 한가운데로 날아와서 빙빙 돌며 시선을 모은 뒤 말을 이었다.


"계획은 이러하네. 일단 포츈과 트리아이나 둘은 표면상으론 여전히 펙스 소속인 척 해야하니 배에 남기로 하고.

이번에도 내가 오메가 휘하 AGS 인 척 해서 대장을 포함한 7명을 인솔하도록 하겠네. 노동자 바이오로이드들을 포츈이 알려준 그 알래스카 수용소로 운송하는 게 내 임무라는 설정일세. 


"그냥 이번에도 오메가한테 데려가야한다고 둘러대면 안돼? 여기 최고권력자한테 보내야한다는 건데 누가 막겠어?"


"아니, 이번엔 상황이 다르네. 러시아에서 감마의 부하를 상대할 때는 '이 포로는 오메가한테 배송해야 한다'고 하면 니들의 관할 밖이라는 뉘앙스를 전할 수 있었지만 오메가의 부하 앞에서는 NG워드일세. 바래다드리겠습니다, 호위를 붙이겠습니다, 혹은 여기서부턴 제가 인수하겠습니다 이런식으로 나올 수 있단 말이지."


"아, 그렇게 되는건가..."


"계속하겠네. 오메가의 영토 안에서 바이오로이드 노동자를 옮길 때는 AI가 운전하는 트럭에 싣는다네. 즉, 이번에 쓸 이동수단은 트럭이라는 거지. 혹시나 바이오로이드가 탈출하지 못하도록 밀폐된 트레일러 안에 실리게 되겠지만 저번에도 그렇게 다녔으니 익숙하겠지?

알래스카의 수용소에 도착하게 되면 무력한 포로인 척 하다가 틈을 봐서 통신을 무력화한 뒤 경비 AGS를 싹 다 처리하고, 그 다음에 자네의 명령권으로 바이오로이드 노동자들을 해방시켜 영입하고 겸사겸사 그 유전자 씨앗을 복원하는 걸세."


"...뒷부분은 너무 대충 아니야?"


"어쩔 수 없잖은가, 그곳에 관한 명확한 정보가 없으니까. 추측할 수 있는 거라곤 거기서 바이오로이드 노동자들이 경비 AGS들한테 감시받으며 일하고 있다는 것 뿐인데. 이 배로 돌아올 방법은 거기 가서 생각해야 하네. 수동운전 가능한 차량이라도 찾아봐야지."


"일이 전부 잘 풀려서 여기로 돌아오게 되면 그대로 배 타고 바다로 떠나게 되는거지?"


"맞아. 하지만 사흘 안에 돌아와야 한다는 걸 잊지 말아줬으면 하거든? 사흘 뒤, 그 때가 감시망이 무력화되서 배를 몰고 떠날 수 있는 유일한 기회거든. 참, 그렇지. 잠깐만 있어봐..."


포츈이 바지 주머니에서 왠 무전기를 꺼내서 보여줬다.


"이걸 가져가. 이것만 있으면 언제든지 누나랑 연락할 수 있거든.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해, 뭐든 도움이 될 수 있을거야. 펙스 공용 채널이 아니라 독자적인 채널을 쓰는 거니까 레모네이드 오메가한테 도청당할 걱정은 안해도 되거든?"


"자네들이 들고있으면 짐검사에서 걸릴지도 모르니 내가 들고가겠네."


"잠깐 기다려, 펙스 영토 안에 오메가가 모르는 통신망이 있다고?"


"이게 최근에 생성된 거거든? 감시AGS의 점검 시간에 대한 정보도 이 채널을 통해서 받은 거거든."


오메가의 눈과 귀를 피해 정보를 주고받을 수도 있는데다 그 정보도 오메가 밑에서 벗어나는 데 굉장히 유용한 정보라니... 너무 형편좋은 물건이라 그 출처가 더 의심스러워졌다. 가능하면 저걸 쓸 일이 없기를 빌어야겠네.


그 때 포츈이 옆구리에 끼고있던 패널에 무슨 전화음같은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포츈이 패널을 들어 툭툭 건드리자 전화음이 꺼지고 트리아이나의 목소리가 나왔다.


"응, 무슨 일이야?"


[이제 슬슬 입항 준비해야 돼! 조종실로 돌아와줘, 캡틴!]


"알았어, 금방 갈게! 대장, 무전기의 사용 방법은 드론한테 들어줘. 누난 이만 가봐야겠거든?"


"잠깐."


계속 조용히 있던 LRL이 불러세우자 포츈이 문 손잡이를 잡은 채로 멈춰서 돌아보았다.


"으, 응? 왜그래? 궁금한 거라도 있어?"


"USB 메모리가 하나 필요해. 갖고있어?"


"USB? 있긴 한데, 뭘 담으려고?"


"아무것도. 미끼로 쓸 게 필요할 뿐이야."


"미끼...? 일단 남는 건 얼마든지 있으니까, 트리아이나한테 가져다달라고 할게.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포츈이 문을 닫고 나가자 내 시선은 LRL을 향해 옮겨졌다.


"그 USB로 뭘 낚으려고?"


"레모네이드 오메가."


"...어떻게?"


"만약 그 년이 나타나면 그 USB 안에 니가 원하는 정보가 들어있다고 해야지, 휩노스 병의 치료제나 뭐 그딴거."


그리고 그걸 던져준 다음 튀겠다 이건가. 뭐야 그거, 무슨 상자 속의 양이야? 그보다 그 신중한 오메가가 과연 그걸 덥석 믿을까... 내가 못미더워하는 표정을 본 보양인지 LRL이 설명을 덧붙였다. 


"내가 첩자로서 오르카호에 잠입했었다는 사실을 잊지마. 오르카호에서 직접 빼낸 정보라고 하면 적어도 귀는 귀울이겠지."


"아, 그거 그럴싸한데. 생체재건장치의 설계도나 위치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하면 반드시 날 노리지는 않겠네. 날 해부해서 치료 방법을 알아낼 수고를 덜게 되는거니까..."


"생체재건장치?"


LRL이 고개를 갸웃했다.


"응. 그게 휩노스 병의 치료법이잖아... 몰랐어?"


"몰랐지. 나는 실제로 그 정보를 얻는데 실패해서 감옥에 갇혔던 거니까."


"아하... 그럼 내가 아는 정보를 좀 알려줄게. 거짓말에 진실을 섞으면 더 그럴싸해지는 법이니까."


물론 나도 생체재건장치에 대한 핵심적인 정보는 모른다. 내가 알고있는 사실은 그런 물건이 존재하고, 김지석의 묘에서 구했다 그 정도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LRL에겐 충분히 유용한 정보였던 것 같다.


"...이 정도면 확실히 오메가를 속일 수 있겠어. 고마워, 인간. 이걸 미끼로 던지면 협상을 시도할 수 있을거야."


"아니 애초에 오메가가 나타나지 않는 게 최선이잖아... 물론 최악을 대비하는 게 나쁜 건 아니지만."


"...그게 최악의 시나리오인가..."


LRL이 중얼거렸다. 이거 말고도 더 안좋은 경우의 수를 생각하는건가. 잠시 후 선실에 들어온 트리아이나에게 빈 USB를 건네받은 뒤, 우리는 본격적으로 배에서 내릴 준비를 했다.


***


러시아 극동지역 다음은 베링 해협, 그리고 이번엔 알래스카라니. 요즘 갈수록 추운 곳만 다니고있네. 다행히도 이번엔 포츈한테 옷과 식량을 원조받아서 얼어죽거나 굶어죽을 일은 없다.


방한복을 차려입고 갑판으로 나오자 포츈과 트리아이나가 먼저 나와서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어째 두 명 다 안절부절해하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포츈. 트리아이나. 마중나와준 거야?"


"응... 그런데, 그... 역시 걱정되거든? 수십년만에 눈 앞에 나타난 희망인데, 이대로 떠나보내는 게 정말로 좋은 생각인건지 확신이 안서거든..."


"일단 대장이 부탁한 거니 어떻게든 도와주겠지만... 그... 돌아올거지? 혹시 알래스카에 들어갔다가 오메가한테 붙잡히기라도 하면..."


"...괜찮아. 다 잘 될거야."


물론 나도 확신은 없다. 또 무슨 변수가 생길 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니까. 이건 그저 포츈 쪽을 안심시키기 위한 거짓말에 불과하다. 내심 불안한 건 나 역시 마찬가지니까. 포츈은 그런 내 심정을 눈치챈 모양인지 내 앞으로 다가와 나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꼭 무사히 돌아와야 해? 약속이야?"


"...약속할게."


나 또한 팔을 들어 포츈의 등을 몇 번 토닥여주자 진정된 그녀는 나를 풀어주었다. 작별인사도 마쳤으니 나는 구속구를 들어 스스로 내 목에 찬 뒤 뇌파를 숨기는 버튼을 눌렀다.


"어때? 제대로 작동되고 있어 이거?"


"그래. 뇌파가 안느껴지네. 그나저나 눈 앞에 인간이 서있는데도 뇌파를 못느낀다는 건 역시 기분나쁜걸... 방금전까지 멀쩡히 뇌파를 느낄 수 있었으니 특히나 더."


"몸은 걸어다니지만 뇌는 죽어있는 좀비가 실제로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글쎄, 난 모르겠네."


"준비는 다 끝났나? 이제 움직이세! 다들 일렬로 서서 날 따라와주게나. 대장은 줄 가운데에 서고."


우리는 드론의 지시를 따라 일사분란하게 배에서 내렸다. 수갑을 차고 걸어야 한다거나 하진 않았지만 땅에 발을 딛자마자 항구에서 일하는 드론 여러대가 날아와 우리가 들고있던 무기와 가방을 가져가버렸다. 짐은 따로 운반한다는 모양이다. 졸지에 비무장 상태가 되어버려 다들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지만 항구의 AGS들은 전혀 신경쓰지 않고 하는 일에만 집중했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으로 입고있는 옷까지 가져가지 않았다. 엘븐과 이그니스가 입고있는 강화외골격과 클로버의 변신 건틀렛은 옷으로 판정된 모양인지 입은 채로 움직여도 되는 모양이다. 코트 안을 수색하지도 않았기에 더치걸이 허리춤에 차고있는 손전등(과 그 안의 유전자 씨앗)도 감출 수 있었다.


그 다음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 건 펙스의 커스텀 램파트와 커스텀 드론이었다. 우리쪽 드론이 맨 앞에 서서 신원을 증명한 뒤 노동자 바이오로이드 수송이라는 (거짓)목적을 밝히자 커스텀 드론이 한 줄로 선 우리를 지나치며 하나하나 빠르게 스캔했다. 제발 인간인걸 들키지만 마라.


"스캔 종료... 총원 바이오로이드 7기 확인됨. 펙스제 바이오로이드 4기, 블랙 리버제 바이오로이드 1기, 제조사 불명 바이오로이드 2기."


다행히 여기있는 놈들도 AI가 너프먹은 놈들인건지 내가 인간이란 걸 안들키고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제조사 불명이 2기? 하나는 나일테고, 다른 하나는 클로버인가본데. D엔터가 듣보잡 기업은 아닐텐데, 문화산업이라고 무시하나.


"자, 문제없지? 이제 차 좀 불러주게나, 난 한가한 몸이 아니네!"


"절차 확인... 규정 확인... 승인 요청. 펙스 노동자 수송 임무를 맡기겠음."


아무래도 잘 풀린 것 같다. 수송 트럭 두 대가 와서 우리 앞에 멈춰섰다. 하나는 우리가 타는 용도고 다른 하나는 짐을 싣는 용도라고 생각했으나 그 직후 커스텀 램파트의 스피커에서 나온 말에 내 추측이 틀렸다는 걸 알게되었다.


"펙스제 바이오로이드 5기는 앞의 트럭에 타고 나머지 3기는 뒤의 트럭에 탈 것."


"뭐?"


벌써부터 뭔가 꼬이기 시작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어째서 따로-"


"자리로 돌아가라. 질문은 받지 않는다."


내가 입을 열자마자 커스텀 램파트가 기관총을 겨누어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갑작스런 위협에 일행 중 전투모듈을 가진 애들이 곧장 반응하며 자세를 잡자 주변의 다른 경비 AGS까지 우리를 향해 총구를 올렸다.


"지...! 진정하게 다들! 도로 일렬로 서게! 여기 AGS들은 통제되지 않는 바이오로이드한테 특히나 민감하게 구니 줄에서 벗어나지 말아주게!"


드론이 황급히 우리 주변을 돌며 싸움을 만류했다. 내 뒤에 서있던 클로버가 살짝 몸을 숙여 귓속말을 건넸다.


"대장, 어떡할까? 한바탕 날뛸까?"


"아니... 비무장 상태로 포위된 이 상황은 너무 불리해. 여기선 드론의 말대로 하자."


클로버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긴 해도 내 말을 들어주었다. 하나둘 마지못해 팔을 내리고 다시 정렬하자 주변의 경비 AGS들도 일제히 총구를 땅으로 내렸다. 발언권이 없는 나 대신 드론이 말하도록 눈짓하자 그 신호를 캐치한 드론이 스피커를 열고 질문을 던졌다.


"좋아, 다들 진정된 것 같으니... 그, 제조사에 따라 나누지 않고 한 차에 싣는 것은 안되겠는가?"


"규정에 예외는 없다."


"그으렇군... 그럼 펙스제가 아닌 노동자들을 따로 수송한다는 것 말인데, 결과적으론 전부 다 제대로 목적지에 도착하는 거겠지?"


"그렇다."


"그렇군. 그러면..."


드론이 생각하는 척 하면서 은근슬쩍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작게 말해도 들릴 정도의 거리로. 나는 최대한 작은 목소리로 소근거렸다.


"놈들의 말대로 하자."


"정말 괜찮겠는가?"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그리고 머리 맞대고 회의할 시간도 없다. 급하게 내 의사를 확인한 드론은 커스텀 램파트에게 돌아가 문제없다고 말했다.


우리는 두 팀으로 나뉘어 각각 다른 트럭에 몸을 실었다. 펙스에서 제조된 LRL, 더치걸, 엘븐, 이그니스와 그들을 인솔할 드론이 한 팀. 그리고 나와 클로버, 알비스가 다른 한 팀.


트럭 트레일러 안은 창문 하나 없는 밀폐된 공간이었다. 북한에서 트럭타고 이동할 때도 이런 식으로 다녔으니 크게 낯선 경험은 아니었다. 바닥이 떨리기 시작하자 트럭이 출발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대장, 정말로 괜찮을까? 펙스에서 만들어진 바이오로이드만 따로 구분한 이유가 뭔가 있을텐데..."


"알비스도 걱정돼... 혹시 이대로 영영 헤어지는 건 아닐까... 이제와서 제조사같은 게 뭐가 중요하다고..."


"제조사...?"


왜 펙스 출신만 챙기고 다른 기업의 바이오로이드들은 분간하지 않고 한 곳에 던져놓는가, 그 이유를 생각하던 중 문득 배에서 나눴던 얘기가 떠올랐다.


"그러고보니 드론이 이렇게 말했었잖아, 레모네이드 시리즈의 명령권이 먹히는 건 펙스 바이오로이드 뿐이라고. 오메가는 자신의 영토에서 일할 노동자로서 펙스 바이오로이드만 쓰고싶은 게 아닐까 싶네."


"음? 잠깐만 대장. 그러면 노동자로 부적합한 다른 기업의 바이오로이드는 어떻게 되는거지?"


"글쎄, 그건..."


"설마 쓸모없다고 처형되는 건가?"


"뭐? 아니, 그럴리가! 그 램파트가 말했잖아, 다른 차에 실어도 전부 다 목적지에 도착할 거라고. 도착하고 차에서 내리면 다시 만나겠지."


"그거 두 트럭이 같은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뜻 맞아? 둘이 따로 정해진 목적지에 제대로 도착할거라는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지 않아?"


"...어?"


좀 전에는 여유가 없어서 제대로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지금와서 보니 클로버의 말대로 그 램파트는 우리에게 필요한 정보를 명확히 명시하질 않았었다. 내 입은 클로버의 분석을 반박하지도 못하고 군말 하나만 내뱉은 뒤 저절로 닫혀버렸다.


이거 혹시,


우리 셋 지금 ㅈ된건가?



제약 우회해본 경력이 있는 클로버의 냉철한 분석! 고생을 사서 하는 라붕이는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벌써부터 위태위태한 북미편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