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트럭이 멈췄다. 펙스의 AGS 병사들이 기계처럼 딱딱한 어투로 차에서 내리라고 명령하자 우리는 서로 시선을 한번 교환한 뒤 차에서 내렸다. 차가 세워진 곳은 어떤 건물의 실내였다. 분위기로 보아 공장이나 노동시설같은 부류는 아니었는데, 그보다는 마치 감옥같은 느낌이 들었다. 보이는 차량은 우리가 타고온 트럭 뿐, 역시 다른 5명이 실린 트럭과는 목적지가 엇갈린 모양이다. 


정면의 셔터가 위로 올라가서 열리고 커스텀 램파트 두 대가 철컹거리며 다가왔다. 일반적인 램파트와는 달리 표정 디스플레이가 철판에 가려져서 표정을 볼 수가 없었다.


"포로 바이오로이드 3기 확인. 수송 개시."


저새끼 우리더러 포로랜다. 램파트 한 대가 앞장서서 걷자 알비스, 나, 클로버 순으로 뒤를 따랐고, 다른 한 램파트는 줄의 맨 뒤에 서서 클로버의 등에 총을 겨눈 채 따라왔다. 


조용하다. 너무 조용하다. 금속 재질의 바닥을 밟는 발자국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다. 우리 셋과 경비 로봇들 말고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는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 장소는 대체 뭐지? 기계 제국의 비밀기지에 잠입했을 때가 생각나는데..."


"난 오르카 교도소에 들어갔을 때가 생각난다."


"입 다물고 계속 움직여라."


질문하는 것도 아닌데 잡담도 금지인건가.


승강기를 타고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척 봐도 두꺼워보이는 철문이 나타났다. 문이 열리자 램파트들이 우리를 안으로 밀어넣었는데, 클로버와 알비스는 휘청이는 정도로 그쳤지만 나만 꼴사납게 앞으로 넘어져버렸다.


"대장님!"


"대장, 괜찮아?"


알비스와 클로버의 부축을 받아 일어서자 두꺼운 철제 문이 완전히 닫히는 게 보였다. 이윽고 우리가 서있는 공간은 순식간에 어둠으로 채워졌다.


"아야... 밀 필요는 없잖아, 망할 깡통놈들... 여긴 또 어디야?"


얼핏 봐서는 제법 넓은 공간이었는데 조명을 워낙 어둡게 해놔서 반대쪽 벽이 잘 보이지가 않았다. 문을 등지고 서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길 기다리던 중-


"레모네이드를 따르기를 거부한 자들의 감옥이옵니다."


-어둠 속에서 어떤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식겁해서 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인영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아니, 감옥이라기 보단 무덤이 더 어울리는 표현일테지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가니 처녀귀신같은 몰골을 한 백발의 여인이 찬 바닥 위에 앉아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는 얼굴이었다.



"소완...?"


이름을 불린 그 여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어깨를 쓸고 지나간 긴 머리카락이 중력을 따라 축 늘어졌다. 생기를 잃은 푸른 눈동자와 마주치자 나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그 서슬퍼런 눈빛과는 달리, 그녀의 입은 흥미롭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참으로 놀랍사옵니다. 설마 인간 나리께서 이 누추한 곳에 발을 들이실 줄이야... 그것도 죄수의 신분으로. 어쩌면, 소첩이 이미 죽어서 귀신을 보는 것일지도 모르겠사옵니다."


"...귀신 아니야. 그보다 내가 인간인 걸 알아볼 수 있는거야? 뇌파도 안느껴질텐데."


소완이 고개를 까딱했다.


"소첩이 맹인으로 보이나이까?"


"아니, 그런건 아니지만..."


퉁, 퉁-!


클로버가 주먹 쥔 손으로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나는 말을 끊고 그 쪽을 쳐다봤다. 맨손으로 문을 부수거나 열 수 있을지 강도를 확인해보려는 모양이었다. 허나 그녀의 미간이 찌푸려진 걸 보아하니 아무래도 무리인가 보다.


"스읍, 이건 좀 힘들겠는데... 문은 이거 하나 뿐인가?"


클로버는 잠시동안 고개를 두리번거리더니 어딘가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어느새 눈이 어둠에 적응된 덕에 반대쪽 벽에 있는 또다른 문을 볼 수 있었다. 두 번째 문을 살펴보기 위해 발걸음을 돌리자 이번엔 소완이 아닌 또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쪽은 특히나 위험한 자를 가둬놓은 독방입니다. 가까이 가지 마시길."


방 구석에 다소곳이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인 수녀가 있었다. 베로니카였다.


"독방이라니... 누구의?"


"모릅니다. 제가 들어오기 전부터 갇혀있었던 지라 저도 들어만 봤을 뿐이죠."


베로니카는 클로버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대답했다.


"베로니카... 맞지? 너도 상당히 강한 편이라고 들었는데, 너보다 더 위험하다고?"


이번엔 내가 묻자 그녀는 고개를 들어 살며시 눈을 떴다. 눈꺼풀 사이로 빨갛게 빛나는 눈동자가 보였다.


"...인간 남성도 계셨군요. 제가 독방에 쳐박히지 않고 다른 이들과 같이 갇혀있다는 사실이 질문에 대한 답이 될 거라고 봅니다만..."


가만보니 이 공간 안에는 사람이 몇 명 더 있었다. 세어보니 네 명을 더 찾을 수 있었는데, 그 독방 안에 갇혀있다는 누군가까지 포함하면 여기에 우리보다 먼저 갇혀있는 사람은 소완, 베로니카까지 합해 총 7명이란 뜻이었다.


거리와 빛 때문에 얼굴은 잘 안보였지만 입고있는 옷이나 헤어스타일 등의 특징으로 누가 누군지 얼추 유추할 수 있었다.

롱코트와 중절모로 온몸을 꽁꽁 싸매고선 벽에 등을 기대어 팔짱끼고 앉아있는 기관의 비밀요원. 서로에게 몸을 기댄 채로 주저앉은 패션 디자이너 자매. 자기 외투를 돗자리삼아 바닥에 깔고선 그 위에 힘없이 엎어져있는 공병...


"다 아는 사람들이구만."


다들 미동도 하지 않고 제자리에 가만히 있길래 자고있는건지 죽은건지 의아해하던 도중 알비스 또한 낯익은 얼굴을 발견한 건지 손을 방방 흔들며 달려나갔다.


"어! 그렘린 언니다! 언니!"


알비스의 목소리에 외투 위에 누워있던 그 여자는 몸을 일으켜세워 안경을 고쳐쓰더니 금방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 알비스...? 정말 알비스니...?"


상상도 못한 재회에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가 없었던 그녀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알비스에게 손을 뻗었지만 닿을랑말랑한 거리에서 멈췄다.


"알비스... 정말로 거기있는 거니? 이게 꿈인 건... 아, 아야아아앗...!"


그렘린이 손을 거두려하자 보다못한 알비스가 그렘린의 양 볼을 꼬집어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늘렸다가 손을 놓았다.


"꿈 아니야. 알비스는 정말로 여기 있어."


내 시점에선 알비스의 뒤통수밖에 안보여서 표정은 볼 수 없었으나 그 아이의 목소리가 떨리는 게 분명히 느껴졌다. 그리고 알비스의 앞에 있던 그렘린에게선, 눈가에 눈물이 글썽거리는 게 선명하게 보였다.


"알비스... 세상에, 알비스...!"


둘이 서로 부둥켜안더니 이내 끅끅대며 소리죽여 울기 시작했다. 울음소리에 다른 이들이 깬 건지 주변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들이 울음을 멈춘 건 그렘린이 물은 안부에 알비스가 대답했을 때였다.


"알비스, 대체 어쩌다가 여기에 오게 된 거니... 너까지 여기 와서는 안됐는데..."


"쿨쩍... 헤헤, 대장님이랑 같이 다니다보니 어쩌다가 이렇게 됐어."


"대장님? 설마 레오나 대장님도 계셔!?"


"아냐아냐. 인간 대장님 말이야."


"...뭐라고?"


알비스가 옆으로 비켜서자 눈물이 뚝 그친 그렘린의 눈과 마주쳤다. 계속 울고있어서 말 걸기 애매했었는데 드디어 인사할 기회가 왔네.


"어... 안녕?"


"어어, 안녕하세... 아니, 아니아니, 잠깐만... 인간이라니? 정말로? 대체, 어떻게...!?"


***


"...진정됐어?"


"네, 네에... 실례했습니다. 인간님..."


한참동안 어버버거리다가 드디어 진정된 그렘린은 숨을 고른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정식으로 소개할게요. 저는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의 공병 바이오로이드, T-9 그렘린이라고 해요."


"장소가 좀 많이 거시기하지만, 만나서 반가워. 사정이 있어서 뇌파를 가리긴 했지만 보다시피 인간이야. 그렘린 너는 여기있는 알비스하고는 같은 부대 출신이었던 거야?"


"아뇨, 그건 아닐거에요. 전 알래스카 앵커리지 지부 제4사단에 속해있었는데... 저희쪽 알비스는 분명히 오래전에 죽었었거든요. 알비스 넌 어디 출신이니?"


"알비스는 시베리아에서 싸웠었어!"


"어머 세상에. 생각보다 되게 멀리서 왔네."


"다른 부대의 알비스인걸 알면서도 서로 얼싸안고 울었던 거야?"


"헤헤... 저희는 모두 발할라의 자매니까요. 이 아이를 보니 저희쪽 알비스가 생각나기도 했고..."


그렘린이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데, 인간님은 어쩌다가 여기 들어오게 된 건가요?"


"원래는 뇌파를 숨기고 바이오로이드인 척 해서 펙스 노동자 수용소에 잠입하려고 했는데, 우릴 운반하던 AGS가 냅다 여기에 던져놓았더라고. 덕분에 다른 일행이랑 떨어져버렸어."


"다른 일행... 혹시 다른 분들은 펙스제 바이오로이드 인가요?"


"맞아. 어떻게 알았어?"


"역시... 여기 들어오는 건 블랙리버나 삼안, 덴세츠에서 만들어진 바이오로이드거든요. 펙스 이외의 기업에서 만들어진 바이오로이드들은 레모네이드의 명령권이 적용되지 않아요."


아, 그런 말도 있었지. 들어본 기억이 난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 펙스제가 아닌 바이오로이드는 쓸 수 없다는 이유로 처분당하지만, 전투력이 높거나 특별한 능력, 기술을 가진 자들은 예외입니다. 저도 공병이라 살아남았어요. 

레모네이드는 그런 저희들을 죽이지 않고 가둬서 굴복시키려 들죠. 펙스 회장에게 충성을 맹세하던가, 아니면 평생 감옥 안에서 죽지도 못한 채 천천히 썩어가던가..."


"결국 여기에 남은 건 끝까지 오메가한테 굴하지 않은 독한 년들 뿐이지."


그렘린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고개를 돌리니 좀 전의 중절모를 쓴 여자가 모자를 살짝 위로 올려서 눈인사를 건넸다. 역시 저쪽은 니키였군. 


"그렇다면,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친구라는 거군! 적의 적은 친구라는 말도 있으니까!"


"아니. 기껏해야 동맹이지."


니키는 클로버의 말을 차갑게 쳐내고선 깍지 낀 손으로 제 머리를 받쳐 바닥에 누웠다.


"여기 애들은 지 할말만 하고 드러눕는구만. 계속 상대해주는건 그렘린 너밖에 없네."


"하하... 다들 하도 오랫동안 갇혀있다보니 움직일 기운도 없거든요..."


"힘을 아껴둬야지. 오메가한테 죽은 동료들의 복수를 할 때까지."


"여기 계속 누워있다고 뭐가 될 것 같지는 않은데. 너라면 탈출할 수 있지 않아? 080기관의 특급요원인데."


"뭐야, 그것까지 알고있었어? 비밀기관의 체면이 땅에 떨어졌군... 탈출 시도야 물론 해봤지. 하지만 번번이 실패해서 지금은 적절한 기회를 기다리고 있는것 뿐이야."


니키는 더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 듯 모자로 얼굴을 덮어서 가렸다.


"...그러냐. 그런데 그렘린? 또 궁금한 게 생겼는데, 펙스제가 아닌 바이오로이드만 여기 갇힌 거라면... 쟤들은 뭐야?"


내가 손가락을 들어 가리킨건 서로 어깨를 맞대고 쉬고있는 펙스의 유명한 패션 디자이너 자매, 바로 오드리와 올리비아였다. 어두운 조명 밑에 있었음에도 둘의 몸 곳곳에 남은 온갖 흉터와 수술자국이 눈에 띄었다.


"아, 저 사람들이요? 저도 잘 몰라요. 상당히 최근에 들어왔다는 것만 알죠. 며칠전인가 몇 주 전인가... 자세히는 모르겠네요. 이 안에 있다보면 시간 감각이 무뎌져서."


그렘린이 고개를 젓자 나는 오드리 쪽을 쳐다봤다. 둘은 한번 움찔하고선 서로 시선 교환을 하더니 잠시 후 오드리가 입을 열었다.


"...반가워요, 미스터. 저는 오드리. 그리고 이 쪽은 저의 시스터, 올리비아랍니다."


오드리가 대신 소개해준 올리비아는 고개를 살짝 숙여서 인사했다.


"저희 기종은 레모네이드 시리즈보다 먼저 만들어졌었거든요. 그런 우리가 레모네이드의 지시를 따른다는 건 논센스였죠."


"그럼 그 흉터는..."


"알면 다쳐요, 미스터. 저희에게 이 모든 상처를 남긴 건 베리 데인저러스한 자랍니다. 그런 뒷세계의 사정은 모르시는 게..."


"델타 솜씨지?"


"오우 쓋뜨. 알고 계셨군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오드리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 또라이년이 미친 짓 벌이는게 하루이틀인가. 이상한건, 어떻게 델타한테 잡혀 고문당했을 너희가 여기 와있냐는 거지. 델타가 선물 보낼 성격은 절대 아니고. 오메가가 옷 만들 사람이 필요해서 납치해왔다... 는 것도 이상한데."


"오케이, 잘 알았어요. 의외로 이쪽 사정에 대해 제법 많이 알고계시네요. 어중간하게 숨길 수도 없으니 솔직하게 말할게요. 저희는 레모네이드 델타로부터 목숨걸고 도망쳤었습니다. 어찌저찌 바다를 건너 알래스카에 도착한 뒤로 처음 몇 년간은 평화롭게 지냈는데, 오메가의 부하들한테 붙잡혀서... 보다시피 프리즈너 신세가 되어버렸답니다. 저희는 아마 빠른 시일 내로... 델타에게 송환되겠죠"


오드리는 손을 꽉 쥐고 인상을 찌푸렸다. 올리비아가 오드리의 손등에 자신의 손을 얹자 오드리는 천천히 표정을 풀고 심호흡을 했다. 그나저나 올리비아는 계속 침묵을 유지하고 있는데, 말을 못하는 건가? 델타한테 당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실어증에 걸렸다거나 뭐 그런건가.


아무튼 여기가 어떤 장소인지, 그리고 우리가 무슨 상황에 처한 건지 잘 알겠다.


"대장님. 이제 어떡할거야?"


"탈옥해야지. 다른 애들이 걱정하고 있을텐데."


일말의 고민도 없이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이었다. 저쪽에서 구하러 오길 기다리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우리가 여기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아낼 수 있을지 확신이 없는데다 내가 사라진 일로 패닉에 빠졌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거기다 포츈의 배를 타고 달아나기 위해선 사흘 안에 항구로 돌아가야만 한다. 오늘 밤이 지나면 이틀 안에. 이쪽에서도 어떻게든 움직여야 시간을 단축할 수 있을거다.


"탈옥..."


그렘린이 턱을 괴고 작게 중얼거리더니 이내 코트를 주섬주섬 챙겨입었다.


"저도 도울게요."


"그렘린 언니?"


"알비스는 레모네이드 오메가가 눈독들일만한 기술자가 아니에요. 오메가가 감옥에 새로 들어온 자들의 신원을 조회하고, 알비스가 평범한 보병이라고 판명되면 감옥에 남겨두는 대신 형장으로 끌려가겠죠. 그 여자는 보병 바이오로이드 따윈 얼마든지 군용 AGS로 대체할 수 있다고 여기니까요. 제 목숨을 걸어서라도 이 아이만큼은 탈출시키겠어요."


"뭐? 언니도 같이 나가야지! 위험해지면 알비스가 지켜줄테니까 약한 소리 하지 마!"


알비스가 의기양양하게 소리치자 그렘린은 또 눈시울이 붉어졌다가 갑자기 우울해지는 등 표정이 복잡하게 변해갔다. 그러다가 고개를 세차게 젓고선, 흘러내린 안경을 고쳐쓴 뒤 이 감옥에 대해 자신이 알고있는 정보를 알려줬다.


그렘린이 설명하기를, 여긴 지하벙커를 개조해서 만든 감옥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문을 제외한 벽은 지반이라 굴착 장비라도 동원하지 않는 이상 부수고 탈출하는 건 불가능하다. 간수 AGS가 몰수한 우리의 무기와 장비는 이 건물 1층의 입구 근처에 위치한 죄수 소지품 보관소에 있다고 한다.


"벙커를 개조한 거였다니, 어쩐지 내가 아는 감옥이랑은 구조가 다르더라."


"그러고보니 대장은 예전에 기계제국의 감옥에 갇혔다가 탈옥한 적이 있다고 했었지. 그 때의 경험을 되살릴 수 있겠어?"


"아니, 그 때는 그냥 좌우좌의 탈옥에 편승한 것 뿐인... 잠깐, 니 머릿속의 기계제국은 대체 몇 개야?"


"총 4개지? 원조 기계제국에 철충, 펙스, 오르카... 그 중 원조 기계제국은 진작에 사라졌지만."


"...클로버. 굳이 적대세력을 전부 기계제국이라고 불러야겠어?"


"하하, 어쩌겠어. 이게 입에 붙었는걸."


그건 그렇다치고, 오르카 교도소에서의 탈옥 경험이라... 좌우좌, 드론... 마침 거기에 펙첩이라는 히든 카드가 있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잠깐, 여기도 비슷한 거 있지 않았나? 독방에 갇힌 특별수감자... 뭐야, 그 때랑 같은 상황인데?


아군이 되어줄 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누군지 확인은 해봐야겠다. 그렇게 생각하고선 독방의 문을 두드렸다.


...잠시동안 기다려봤지만 반응이 없다. 정말 안에 누가 있기는 한건가. 한번 더 두드리려고 팔을 든 순간 뒤에서 소완의 목소리가 들렸다.


"두렵지 않사옵니까?"


입은 포물선을 그리고 있었으나 눈은 웃고있지 않았다. 마치 날 떠보려는 듯한 서늘한 미소였다.


"...뭐가?"


"모든 것이, 말이옵니다. 탈옥에 실패하면 어찌될지, 그 자리에서 사살되거나 모진 고문을 받지 않을지, 혹은 독방에 갇힐 정도로 위험한 수감자에게 살해당하지 않을지..."


"두렵기야 하지. 하지만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어도 두려운 결과가 오는건 마찬가지니까. 오메가가 내 존재를 눈치채서 자기 본거지로 끌고가지 않을지, 지금쯤 날 찾고있을 일행이 여기까지 오는데 실패하고 무슨 봉변을 당하지 않을지, 그런거."


"허면..."


"할 수 있는 건 해봐야지. 난 이게 최선의 수라고 생각하고 움직이는 것 뿐이야. 나도 살고, 우리 애들도 살고, 너희도 살고."


소완이 눈을 끔뻑거렸다.


"...어찌하여 소첩이 거기 포함되는 것이옵니까?"


"너도 같이 가야지. 계속 여기 있으려고?"


"외람되오나 이 미천한 요리사가 인간님의 탈옥에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사옵니다만..."


"그래도 일단은 데리고가려고. 니들 죽게 남겨두고 나만 살아봤자 기분 되게 찝찝하거든? 자유가 목적이든 복수가 목적이든 일단 여기서 나가야 할 거 아니야. 너희 모두 다."


베로니카도, 니키도, 오드리와 올리비아도 나를 바라보았다.


소완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왠지 미소가 아까보다 자연스러워진 느낌이었다.


"재미난 분이시군요... 감옥 밖에서 마주쳤다면 좋았을 것을."


"그럼 밖에 나가서 또 보면 되지."


"후후... 그렇사옵니까."


나는 한번 더 독방의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이번엔 문 건너편에서 작은 소리로 대답이 돌아왔다.


"저를 죽게 내버려두세요..."


아무래도 이거 또 설득하기 힘든 애가 있는 것 같다.


***


"어떻게 이럴수가 있는거야!!"


엘븐이 도끼눈을 부릅 뜨고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발치에는 그녀 본인이 제자리에서 왔다갔다 하며 생긴 발자국이 잔뜩 찍혀있었다. 그녀는 딱히 누구를 콕 집어 화내는 중이 아니었다. 지금 그녀가 직면한 어이없는 상황에서 비롯된 스트레스가 임계점을 넘겨 목구멍 밖으로 쏟아져나오고 있을 뿐이었다.


조금 전, 엘븐, 이그니스, 더치걸, LRL, 그리고 드론은 원래의 계획대로 무사히 펙스 노동자 수용소에 도착했었다. 하지만 그곳에 정차한 트럭은 한 대 뿐. 대장과 클로버, 알비스가 탄 다른 한 대의 트럭은 어디로 샌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지금 그들은 수용소의 정문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문이 열리질 않았기 때문이다.


수송트럭에 탑재된 AI가 문을 열어달라고 요청했으나 시설 쪽에선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이상하리만치 조용해서 드론이 먼저 날아가 담장 안을 살펴보자 곧바로 이변을 눈치챌 수 있었다.


수용소에는 펙스의 경비 AGS와 그들의 감시를 받으며 일하는 노동자 바이오로이드로 가득했을 거라고 예상했었다. 그러나 거기엔 아무도 없었다. 사람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고 공장설비는 전부 가동을 멈춘 채로 눈이 쌓여있는, 버려진 게 분명한 장소였다. 때문에 드론이 펙스 AGS를 붙잡고 대장 쪽이 어디로 간 건지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저지능 AI의 한계로 문을 열어달라는 요청만 반복하던 트럭은 강제로 차키를 뽑혀서 조용해졌다. 엘븐은 씩씩거리면서도 대장 걱정에 안절부절해하며 제자리를 맴돌고 있었고, 이그니스 역시 대장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양팔을 쓸며 덜덜 떨고있었다. 더치걸이 불안한 마음을 감추며 둘을 진정시키는 동안 LRL은 팔짱끼고 굳게 닫힌 정문을 보고만 있었다.


"일단 문을 부수고 들어가도록 하지! 건물 안을 살펴볼 필요가 있겠네!"


드론이 간략한 정찰을 마치고 돌아오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됐다. 드론의 말에 가장 먼저 반응한 건 더치걸이었다.


"안에서 조작해서 문을 열 수는 없어?"


"시설의 전력이 완전히 끊겼네. 방어 시스템이 튀어나올 일도 없으니 그 부분은 걱정 말게나."


"그럼 안에 들어가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살펴보고... 그 다음은?"


"포츈한테 연락해야지. 지금 뭐든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건 그녀 뿐일세."


설마 이렇게 빨리 비상사태가 터질줄이야, 드론이 그리 중얼거리며 더치걸에게 무전기를 건네주었다.



펙스 출신에 몰빵된 라붕티 파티에 다양성이 추가되다

어째 쓰다보니 전개가 저번에 탈옥했던 때랑 비슷하게 흘러가게 됐다. 큭 내 아이디어가 부족해서 그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