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라붕이의 등 뒤에서 신규 이벤트와 총력전에 대해 글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카 게시판은 유저들의 의견의 표출장인 것과 동시에 감시당한다. 라붕이가 쓰는 글이 아무리 사소하다 하더라도 모두 걸려든다. 그뿐 아니라 여기서 고닉으로 활동하는 이상, 그가 하는 행동은 과거와 현재가 모두 드러나있다. 물론 언제 감시를 받는지는 알 수도 없다. 아이샤가 얼무나 자주, 그리고 어떤 계통으로 한 유저를 감시하는가는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심지어 아이샤는 일붕이들까지 언제나 감시한다고 볼 수도 있다. 어떻게든 그녀는 필요하다면 언제든 감시의 시선을 향할 수 있다. 그래서 모든 라붕이들은 자기가 쓰는 글과 댓글이 모두 포착되고 로갓을 할 때 외에는 자신들의 모든 의견이 세세히 감시되고 있다는 전제 아래 살아가야 했고 또 그게 본능처럼 습관화되어 있었다.


 라붕이는 얼마동안 멍하니 글쓰기창을 바라보며 앉아있었다. 게시판의 뻘글들이 눈에 거슬렸다. 이상하게도 그는 자신을 표현할 힘을 잃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애초에 무얼 말하려고 했는지도 잊어버린 것 같았다. 지난 몇 주일 동안 이 순간을 위해 준비해 왔고 용기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철석같이 믿어 왔던 것이다. 쓰는 일 자체는 간단하다. 그가 할 일은 문자 그대로 지난 몇 시간 동안 그의 머릿속에 스쳐가는 수많은 독백을 화면에 옮기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에 독백마저 말라 버렸다.


그가 '장미는 리메이크다'라고 썼든 참고 쓰지 않았든 아무 차이가 없었다. 그가 비추를 먹든 호감작을 하든 아무 차이가 없는 것이다. 아이샤는 똑같이 취급할 것이다. 그가 글을 올리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미 댓글로 모든 지엽적인 죄까지 포함하는 본질적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그게 바로 '라할배'라는 거다. 라할배는 영원히 숨어있을 수 없다. 얼마 동안, 혹은 몇 년 동안은 어떻게 피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조만간 반드시 지게를 타고 만다.


그것은, 그 라할배 지게는 예외 없이 부지불식간에 이루어진다. 활동 내력을 보려 하자 특정 시점 이후로 다른 게시판에 올린 글들, 그리고 사라진 라오 활동 내역. 대부분의 경우 후회도, 씁쓸함도 없다. 라할배들은 언제나 조용히 사라져 버린다. 어느 시점 이후로 댓글도 없고 그에 관한 모든 글들도 사라진다. 그가 잠시 활동했었다는 것도 부인되고 드디어는 망각 속에 파묻힌다. 없어져 무화한다. 이런 경우를 흔히 '탈주했다'라고 말한다.


개념글 한편에 글 하나가 '공지'란 탭을 달고 올라왔다. '공지', '공지'의 신성한 강령, 챈어, 이중사고, 과거의 무상함. 라붕이는 괴상한 세계 속에서 자신도 라틀딱이 되어 길을 잃고 해저의 숲 속에서 헤매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는 혼자였다. 과거는 죽었고 미래는 상상할 수 없었다. 단 한 명이라도 제정신인 라붕이가 있어 내 말을 들어줄까? 라오가 '영원히' 계속될 수 없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에 대한 대답이라도 하듯, 개념글 목록에 걸린 단어들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장미는 갓이벤트

총력전은 갓컨텐츠

태시는 신


그는 자기 아이디를 검색했다. 어떤 뻘글이라도 조회수가 0이 아니었고 짤이 없는 글에는 광고가 나와있었다. 뻘글에도까지 피그의 눈이 쫓아오고 있었다. 뻘글에도, 댓글에도, 창작물에도, 소신발언에도, 그리고 콘에도, 어디에서든 쫓아오고 있었다. 언제나 파딱의 눈이 감시하고 포위했다. 잘 때나 깨어 있을 때나, 창작을 하든 뻘글을 쓰든, 집 밖에서든 안에서든 - 도대체 그로부터 도피할 수가 없었다. 몇 글자의 아이디 외에는 도대체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없었다.


한 라붕이가 글을 올렸다.

"이벤트의 목적이 과거를 죽이는 것이란 걸 알고 있나? 결국 우리는 과거를 기억조차 못하게 될거야. 왜냐하면 그걸 겪은 라붕이들이 사라질 테니까. 늙은 라붕이들은 지게를 탈 것이며 해녀복 콘스탄챠는 기억 속에 사라지고 말지. 이미 만우절에서 피그는 벌써 그 정도로는 해놓았어. 그러나 그 과정은 너희나 내가 꼬접한 뒤에도 계속될거야. 한 해 한 해 스마조의 흔적은 사라지겠지. 물론 지금에도 라할배들이 사라지지 않는건 아냐. 그것은 단순히 옛 정이 남아있기 때문이야. 그러나 결국 그나마도 사라지지. 갓겜은 라할배가 사라질때 완성돼." 그는 은근히 만족한 듯 덧붙였다. "늦어도 다음 복각까지 만우절을 추억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은가?"

"글쎄..." 한 라붕이가 댓글을 달았다.

"글쎄 라악귀 외에는..." 하는 말이 손가락 끝까지 나왔으나 이 말로 호감작을 하지 않을까 해서 그만둔 것이다. 그러나 글을 쓴 라붕이는 댓글의 의도를 알아챘다.

"라악귀는 평범한 유저가 아냐." 그는 거침없이 적었다. "다음 복각 까지는, 아마 그 전이 되겠지만, 스마조에 대한 지식은 모두 사라질걸세. 모든 과거의 흔적도 없어지고 초장낙지, 이들은 다만 리메이크 기억으로만 남을 거야. 그것도 리메이크 되었다는 정도를 넘어 리메이크 되었다는 사실마지 사라질거야. 라오의 표어까지 변할거야. 밈까지 변할거야. 똥이벤트가 사라졌는데 '초장낙지'라는 밈이 있을 수 있겠나? 모든 유저의 분위가도 변할거야. 실상, 우리가 지금 이해하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란 없어져 버릴거야. 갓겜은 생각하는 것, 생각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냐. 무의식 바로 그거야."

조만간 이 라붕이는 탈주할 것이다. 그는 갑자기 이런 확신이 들었다. 그는 라오 하기에는 너무 지능이 높다. 그는 너무 명백하게 관찰하고 너무 정확히 이야기한다. 이런 사람은 라오를 오래 하기 어렵다. 언젠가 그는 탈주할 것이다. 그의 글에 그렇게 씌어 있다.


라붕이는 공지에 들어가 새로 나온 신캐의 일러를 보았다. 최면을 거는 듯한 젖이 자기 주장을 하고 있었다. 마치 어떤 거대한 힘이 쥬지를 잡고 난타하며 신념을 위협하고 설득하여 자신의 감각으로 확신하는 것을 부인하려는 듯, 그를 압박해 오는 것 같았다. 결국 피그는 머리보다 작은 젖은 빈유라고 발표해서 그걸 믿게 만들 것이다. 조만간 그런 주장을 해올 게 분명하다. 그들의 논리가 그렇게 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체험의 가치뿐 아니라 외적 현실의 존재마저 그들의 철학에 의해 은연중 부인될 것이다. 이단자의 이단자가 정상적이다.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을 영정 시키는게 무서운 것이 아니라 그렇게 생각하고 그들이 옳을지도 모른다는 게 무섭다. 도대체 머리만한 젖은 거유란 걸 우리는 어떻게 아는가? 그런 옷은 공연 음란죄란 건? 장미는 갓이벤트란건? 과거와 외적 세계가 오직 기억 속에 존재한다면, 그리고 그리고 라할배는 지게에 태울 수 있다면 - 그렇다면 어떻게 되는가?


이벤트를 읽는 동안 라붕이는 갓겜이 무엇인가를 모르면서 갓겜충적 태도를 갖는다는 게 얼마나 쉬운 일인가를 깨달았다. 어떤 점에서 피그의 세계관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가장 잘 납득되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것이 얼마나 간단한 일이며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벤트에 충분한 관심을 쏟기 때문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찌찌만 봐도 행복하기 때문에 정신이 정상적이다. 마치 어미의 음란한 몸뚱이에 안겨 젖을 빨고 있으면 행복하듯, 아무 생각을 할 필요가 없기에 그들에게 아무런 해로움도 줄 수 없는 것이다.


"난 내가 라할배라 생각한다." 그는 뻘글을 올린다. "난 초장낙지를 기억한다. 난 만우절을 기억하고 또 겪었다. 우애옹을 기억하고 철룡이와 장화를 기억한다. 묻는다. 장미는 갓 이벤트인가?"

"과거는 중요하지 않아. 장미는 갓 이벤트다."

댓글이 달린다.

"다른 이벤트도 리메이크 될까?"

"물론 되겠지. 왜 안되겠어?"

"라오는 갓겜이 될까?"

"우린 그걸 영원히 알 수 없을거야. 꼬접하고 언젠가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섭종 후 추억한다 해도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은 여전히 얻을 수 없을거야. 네가 라붕이인 이상 그건 우리 마음 속에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인 거야."


"이거 라할배였구만." 댓글이 다시 달린다. "너야말로 라악귀다. 이제 네가 어떤 유저인가 좀 봐라. 훈장을 보라고." 라붕이는 로비로 들어가 훈장을 보았다. 어느시점에선가부터 그는 한 번도 훈장을 신경써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숫자를 살펴보자 저도 모르는 사이에 비명이 새어 나왔다.

"숫자를 봐. 잘 보라고. 캐릭터 획득 목록도 보란 말이야."

그는 놀라 로비를 빠져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왼쪽과 오른쪽 숫자가 같은 글귀가 그의 눈에 비쳐졌다. 자기 자신이 라악귀란걸 깨닫기 앞서 달성 목록 자체가 너무나 놀랄 지경이다. 장비 창으로 갔다. 베타칩이 잔뜩 있었다. 이게 틀림없이 내 장비창이다. 그러나 캐릭터 획득 창은 장비창보다 더 심하게 변한 것 같았다. 이름들은 자기가 생각했던 것과 똑같을 것 같았다. 그러나 정말 놀라운 것은 이름이 모두 바뀌어진 캐릭터들이었다. 승급이 마쳐진 캐릭터들의 이름은 전부 천박한 이름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개념글에서 보던 라악귀의 캐릭터 목록 같았다.

"세상에 저런 라악귀가 있나 하고 넌 가끔 생각했겠지. 그런데 너 스스로는 어떤가?" 댓글이 물었다.


라붕이는 차츰 인정하게 되었다. 서약 목록을 보고 일일 훈련을 돌리며 자신을 재교육시킬 일퀘를 천천히 시작했다.

그는 라악귀였다. 그렇게 작정한 것이다. 사실 그렇게 되기로 결정하기 오래 전부터 마음속으로는 스스로가 라악귀임을 의심했단걸 인정했다. 캐릭터 창을 살펴볼 때부터, 아니 그가 오리진  더스트가 부족하지 않았던 순간부터 자신이 라할배가 아니라고 하는 것이 경박하고 무용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처음 고닉을 판 순간부터 아이샤가 확대경 속에 든 딱정벌레처럼 자신을 감시해 왔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모든 행동이나 말을 그들은 남김없이 알고 있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까지 추측했다. 파딱들은 그가 뻘글을 올린 것까지 전부 살펴볼 정도였다. 그렇다. 그런 것까지... 그는 더 이상 라악귀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게다가 피그의 입장이 옳다. 그래야만 한다. 무슨 외적 기준으로 그들의 결정에 시비를 걸 수 있는가? 제정신을 갖고 있다는 것은 통계에 의한 것이다. 그들이 생각한 대로 따라 생각하는 법을 배우는 게 문제다.


일퀘가 끝다고 할 일이 없어졌다. 그는 챈에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적기 시작했다.


장미는 갓 이벤트

 

그리고 거침없이 내용을 적는다.

 

총력전은 갓 컨텐츠

 

그러나 그때 쓰던 것을 멈칫했다. 무엇인가에 겁을 내는 것처럼 생각을 집중시킬 수 없었다. 그다음에 무얼 쓰려는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게 무언지 생각나지 않았다. 무엇을 써야 하는가 의식적으로 따져 보고서야 생각이 났다. 저절로 떠오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썼다.

 

장미는 리메이크가 아니다

 

그는 모든 걸 받아들였다. 과거는 변경할 수 있다. 


테이블 아래에서 라붕이의 다리가 후둘후둘 떨렸다. 그는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못했지만 마음으로는 펄펄 뛰면서 다른 라붕이들과 함께 뻘글을 쓰면서 귀가 막히도록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그는 다시 태시의 일러를 바라보았다. 라오를 구원한 거인! 이벤트 일러스트를 완성하는 거석! 10분 전, 그렇다 겨우 10분 전까지 그는 공지가 올라오지 않는걸 보고 불안해 하던 것을 생각한다. 그는 많이 변했지만 이 순간에 결정적으로, 불가피한 구원의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공지에서 여전히 이벤트 예고며 신규 컨텐츠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댓글 달리는 속도는 좀 죽었다. 다른 라붕이들도 다시 뻘글을 쓰기 시작했다. 창작물 하나가 올라온다. 라붕이는 창작물을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고 개추를 날린다. 그는 이제 흥분해 댓글을 달지 않았다. 라악귀임을 인정하고 그의 영혼을 눈처럼 깨끗이 한 것이다. 예전 장미 이벤트를 머리에서 지운다. 그는 갓겜을 하는 기분으로 총력전을 한다. 오랫동안 소망해오던 갓겜 인증이 박힌다. 그는 태시의 일러를 쳐다보았다. 저 커다란 젖에 숨은 의미를 알아내는데 4년이 걸렸다. 오 잔인한, 불필요한 오해여! 오, 머리만한 젖을 거유라 주장하며 스스로 택한 유형이여! 모든 것은 잘 되었다. 싸움은 끝났다. 그는 자기 자신과의 투쟁에서 승리한 것이다.


그는 라오를 갓겜이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