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 [로열 아스널. 당신은 저의 소유입니다.] 모음집



--


"확실히, 뭔가 숨어 있는 느낌이 풀풀 나는군."


도련님 일행이 도착한 곳은 도시에서 한참 떨어진 산이었다.

인적이 드나들지 않은 깊숙한 산 속에 별관이 하나 지어져 있었다.

그러나 놀러오는 곳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은밀하고 폐쇄된 장소다.

사방이 숲과 산으로 뒤덮여 있었으니까.


"이번에는 비밀리에 잠입이 불가능합니다."


아마 오는 길에 이미 들켰을 거다.

여기는 비스마르크 코퍼레이션이 소유한 사유지였다.


"뒤처리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

"그건 '어머니'가 알아서 해주실 겁니다만, 얼마나 성대하게 일을 벌리냐에 따라 다릅니다."

"만약 안에 인간이 있다면?"

"사람을 죽이면 거기서 아웃인데, 정보에 따르면 인간은 없습니다."

"그럼 무엇이 있지?"

"정보에 따르면 한 기의 바이오로이드가 있다고..."


저벅-


말이 끝나기도 전에 건물 입구에 하얀 레깅스를 신은 다리가 나타났다.


"누구인가?"


여리지만 힘이 있는 목소리.


"누가 소리를 내었는가?"

"....."


나타난 것은 프릴이 주렁주렁 매달린 드레스를 입은 소녀였다.

드레스는 붉은색과 하얀색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었다.

그러나 시간에 빛이 바란 사진처럼, 옷과 몸은 풍화된 바위처럼 낡아 있었다.


"손님이 온 것은 실로 오랜만이로구나. 세 명, 아니, 네 명인가?"

"....."


소녀는 두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나 그냥 감은 것이 아닌.

마치 눈을 뽑힌 것 같은 흉터가 져 있었다.


"사이클롭스 프린세스...?"


케시크가 고개를 갸웃했다.

진조의 공주라던 그 바이오로이드가 맞았다.

하지만 흔히 알려진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무엇보다 외팔이었다.


"설마 하니 이제 와서 비스마르크 코퍼레이션이 인력을 파견했을 리는 없고. 침입자겠군."

"네가 이곳의 파수꾼인가?"


아스널이 말하자 진조가 웃음을 흘렸다.


"후후후, 그렇다. 이곳은 짐의 왕국. 짐의 성이니라."


그녀가 성이라 칭한 것은 제대로 관리도 안 되어 담쟁이가 들러붙은 별장이었다.

외팔에 양쪽 눈을 잃고, 옷도 세월의 흔적이 느껴질 정도로 헤져 있다.


"...죽이면 안 됩니다."


그가 말했다.


"아하하하! 지금 짐을 두고 한 말인가? 하찮은 우민 따위가 이 진조의 프린세스의 옷깃이라도 스칠 수 있을 것 같더냐?"


그녀가 폭소를 터트렸다. 그러더니 하나 남은 팔을 휘저으며 예를 갖춰 인사를 했다.


"어서 오너라. 침입자 제군들. 그리고 이만 작별이다."


자리를 박찬 진조의 오른손에 피의 파도가 휘몰아치더니 거대한 검을 소환했다.

10대 중반으로 보이는 소녀가, 자신의 몸보다 거대한 대검을 한 손으로 휘두르며 달려든다.


파지지직!


사라카엘이 전기의 창을 소환하여 검을 막았다.


"호오. 전신의 솜털이 곤두서는 이 짜릿함. 전기를 다루는가?"

"큭...."

"전기라.... 어둠을 찢는 광명은 언제 봐도 압도적인 힘을 느낄 수 있지."


사라카엘이 밀렸다.


"안타깝구나. 조금만 더 빨리 만났으면 짐의 광명을 선보일 수 있었을 터인데."


진조의 오른 눈에서는 빔이 발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지금 진조의 공주는 두 눈을 잃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훅-


사라카엘이 버티는 동안 아스널이 옆에서 나타나 주먹을 휘둘렀다.


"짐은 빛을 잃었으나, 눈이 없다고 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진조가 몸을 틀며 아스널을 발로 찼다.

눈으로 쫓기도 힘들 만큼 빠른 속도였다.


"커헉-"


아스널이 침을 토하며 날아갔다.


"무슨 힘이....!"


한 명을 발로 찰 때 균형이 흐트러졌음에도 사라카엘과의 균형은 진조가 우위였다.


"사라카엘 씨!"


케시크가 총을 겨누고 쏜다.

사라카엘이 휘말리지 않으려고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그게 악수였다.

진조는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검을 회전하며 총알을 전부 털어냈다.


"눈도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케시크가 경악했다.


"짐을 우습게 보지 마라. 짐은 십 수 년 동안 이곳을 지켜온 위대한 왕이니라."


진조가 씩 웃으며 말한다.


"그리고 무언가 착각하는 것 같구나. 짐은 두 눈을 잃은 게 아니다. 처음부터 이리 태어났지."

"...? 진조는 양쪽 눈이 모두 있는데요?"

"그건 서사의 중심에 해당하는 또 다른 나의 이야기다."

"또 다른 나....? 잠깐 그러면..."

"짐의 이야기를 아는 자가 있는가? 훌륭하구나. 짐은 용살자에게 두 눈을 내어주는 역할로써 태어났다."


그녀의 연극에는, 동료인 용살자가 악룡 니드호그에게 두 눈을 잃었을 때 진조가 자신의 눈을 내어준다는 내용이 있다.


"오직 그 역할만을 위해 존재했으나, 안타깝게도 짐은 연극 중 사고로 팔을 잃었다."


진조가 어깨를 으쓱였다.


"뭐, 이미 지난 과거의 이야기다. 그보다 한심하구나. 외팔이를 상대로 그런 추태라니."

"......"

"한 명은 방어형이고, 다른 둘은 지원형이구나. 이 자리에 짐과 대등하게 검을 맞댈 자는 없는가?"


대답은 없다.

아스널과 사라카엘, 케시크는 신중한 표정으로 다음 수를 계산하고 있었다.


"흐음.... 겨우 이런 규모라니. 너희는 비스마르크 코퍼레이션을 너무 우습게 본 게 아니더냐? 또는 짐의 마검에 피를 공급해주기 위해 온 것이더냐? 그것 참 고마운 일이구나."

"......."

"도, 도련님!"


그가 앞으로 나서자 케시크가 말렸다.

하지만 그는 당당하게 앞으로 나섰다.


"인간이구나. 인사도 없이 물러서 있기에 섭섭하던 차였다."

"......저희는 안에 있는 바이오로이드를 구조하려고 왔습니다."

"구한다? 후후후, 짐도 뚫지 못하면서 무엇을 구하겠다는 것이냐?"

"물러서 주십시오."

"물러서게 해보아라."


진주가 검을 휘두른다.

날카로운 대검의 끝이 그의 목을 노리고 파고드는 찰나.

케시크가 그의 옷깃을 잡고 당겼다. 검은 허공을 갈랐다.


"호오."


이어서 아스널과 사라카엘이 진조에게 달려든다.


"양쪽에서의 협공이라니. 외팔이에 대한 배려가 없구나."

"방해되면 처리할 뿐이다."


사라카엘이 눈을 번뜩이며 번개를 담아 주먹을 지른다. 진조는 상대하지 않고 피했다.

아스널이 그에 호응하여 진조의 품속을 파고들었다. 그러자 진조가 반격한다.

아스널은 그녀가 휘두른 검을 아슬아슬한 간격에서 피했다. 머리카락이 몇 가닥 잘렸다.


"흐음, 한 쪽은 교단의 처단자라 움직임이 썩 괜찮은데, 너는 경우가 다르구나. 맞지 않은 모듈을 낀 듯하다."

"....."

"지휘개체의 육체로 공격형의 모듈을 탑재한 것이냐? 재미있구나."


아스널은 묵묵히 공격을 이어간다.

두 사람의 협공으로 진조는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그러나 공격이 맞지는 않는다.

오히려 진조의 흐름에 끌여들어지고 있었다.


'좋지 않군. 장난감이 된 기분이다.'


분명 외견상으로는 이쪽의 흐름이다.

그러나 실상은 진조의 흐름이었다.

진조는 두 사람의 실력을 떠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서걱!


마검이 사라카엘의 번개를 갈랐다.

검이 그녀의 갑옷을 통째로 베었다.

섬뜩함을 느끼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나지 않았으면 칼날이 몸을 깊이 베고 지나갔을 거다.

물론, 지금도 멀쩡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몸에 사선으로 금이 생기더니 피가 치솟았다.


"반사 신경만은 칭찬하마."


퍽-


그녀가 사라카엘을 발로 차 날렸다.


"사라카엘!"

"너도 마찬가지다. 캐노니어의 저격수여."


이어서 아스널에게도 발길질이 날아갔다.

머리를 발로 차인 그녀는 수 미터를 날아가 땅에 처박혔다.


"자, 다음 수는 없느냐?"

"......"


사라카엘은 전투불능. 아스널도 진조를 상대하기에는 벅차다.


"하는 수 없군요. 케시크 씨. 목줄을 풀겠습니다."

"하, 하지만 죽이면 안 된다고..."

"가능한 구하고 싶지만, 안쪽이 더 급합니다. 죽이지 않으면 나아갈 수 없어요."

"네....!"

"그 작은 체구로 힘을 숨겨봤자....라고 하고 싶지만 짐도 작은 몸이니 힘껏 기대해보겠다."


진조는 케시크를 막지 않고 기다렸다. 얼굴에는 여유와 미소가 있었다.


케시크가 목줄을 푼다.

여린 소녀의 표정이 일그러지며, 피눈물을 흘리는 늑대로 돌변했다.


"이건....."


진조가 피식 웃었다.






한 군용 바이오로이드가 있었다.

피를 두려워하도록 설계된 그 군인은 동료가 다치는 일에 민감했다.

그 걱정이 너무 과하고, 마음이 여린 나머지 동료의 피를 보면 정신이 나가는 일도 종종 있었다.

때문에 항상 후방에서 동료가 귀환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어느 날, 겁쟁이로 소문난 그 바이오로이드가 전장의 영웅이 되었다.

지휘관이 죽은 그 전투에서, 겁쟁이는 총검을 쥐고 앞으로 달려 나가 적의 목을 꿰뚫었고,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동료의 등을 보며 떨던 자가 어느덧 동료에게 등을 보이는 듬직한 지휘관이 된 것이다.

그 개체는 칸이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하며 호드의 희망이 되었다.


케시크는 칸을 동경했다.

모든 칸 굿즈를 사들이고.

칸에게 편지를 보내며 그녀를 찬양하고.

동시에 케시크가 아니라 칸으로 태어났으면 하는 바람을 품에 안고 있었다.


'어쩌면 나도 칸 대장님처럼 될 수 있지 않을까?'


전장의 여신. 호드의 영웅.

겁쟁이인 자신도 그녀처럼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칸이 될 수 없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전투가 벌어졌다.

아군이 총을 들고 전진했으나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패배를 전달할 병사도 남기지 않고.

그녀의 부대에 패배를 전달한 건 적군의 포탄이었다.


기지에 폭격이 쏟아졌다.

수 없이 쏟아지는 포탄 속에서. 전우가 하나씩 사라졌다.

포탄이 맞은 몸은 하반신만 남기고 사라졌고, 때로는 상반신만 남기고 사라졌다.

피와 내장이 난자하는 전쟁터 한복판.

들리는 소리는 폭격음과 비명, 그리고 비명 뿐이었다.


수도 없이 쏟아지던 폭격이 멈추자, 기지를 수습하려는 적군의 병사가 다가왔다.


-역시, 포병은 신이라니까! 전장의 신이야!


포병을 찬양하며 시시덕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을 때, 케시크의 머릿속에서 무언가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그녀는 핏물로 목욕을 한 것처럼 온몸이 엉망이었다.

그렇게 또 한 명. 전장의 여신이 탄생했다.

그러나 그녀는 칸이 될 수 없었다.


-이거 전부... 제, 제가 한 건가...요....?


주변은 곰이 찢어 죽인 것 같은 사체로 가득했다.

적과 아군이 분간이 가지 않았다.

군복도 죄다 찢어져서 모든 시체가 나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찢긴 시체 중에는 그녀가 알던 얼굴도 있었다.


-우욱....!


케시크는 자리에 쓰러져 토했다.

피아를 식별하지 못했다.

큰 힘을 손에 얻었으나 그 힘에 아군도 찢겼다.


그녀는 칸이 될 수 없었다.

칸이 되기 위해 필요한 건 힘이 아니라 정신력이었다.

반면, 케시크는 결정적으로 마음이 여렸다.


최초의 칸 이후, 케시크 중에서는 제2의 칸이 나타나지 않았다.

어쩌면.... 최초의 칸이 불량품이었던 게 아니었을까?

칸이 된 그 개체는 이례적으로 정신력이 강했다.

그러나 케시크들은 그러지 못했다.


-이젠... 싫어..... 누가, 누가 좀.....


피로 물든 손이 보기 싫었다.

또다시 미쳐버릴까 봐 두려웠다.


찰칵-


그때, 누군가 그녀의 목에 목줄을 채웠다.


-이 목줄을 차면.


누군가가 말한다.


-당신은 평소의 케시크 씨가 되는 겁니다.


그 말은 그녀에게 걸린 족쇄이자.

안전핀이 되었다.







찰칵-


목줄이 다시 채워지는 순간, 케시크가 정신이 들었다.


"하아... 하아...."


목줄을 풀었을 때의 기억은 희미했다.

정신이 차리면 일이 끝나 있는다.

하지만 단편적인 기억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녀는 누군가의 심장을 꿰뚫었다.


".....너의 이름을 밝혀라."


앞에는 방금까지 아스널과 사라카엘을 압도하던 진조가 쓰러져 있었다.

심장에 뚫린 구멍에서 피가 쏟아져 나온다.


"케, 케시크...에요..."

"후, 후후..... 불안정한 것 치고는 제법이구나. 짐을 한 합에 제압하다니."


진조의 공주가 웃음을 흘린다.

케시크는 마음이 일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그때 따스한 손길이 머리칼을 휘저었다.


"고생하셨어요."

"아....."


도련님이 그녀를 뒤로 보내고 앞으로 나섰다.

그가 진조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와 눈높이를 맞췄다.


"피할 수 있지 않으셨습니까?"

"짐은....."


그녀가 말을 멈추더니 목소리 톤을 바꿨다.

이제는 정말로 소녀와 처녀의 중간인 목소리가 나왔다.


"이제 연기는 지쳤어. 나는 귀족이 아니야.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실천하는.... 그런 귀족이 아니라고."


그녀가 쓴웃음을 지었다.


"고통 받는 걸 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나는 명령에 따르는 기계에 지나지 않아. 하나씩 죽어 가는 걸 보면서도 도망치지 못하게, 아무도 못 들어가게 막을 수밖에 없었어....."


감긴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최소한 죽음은 스스로 선택하셨습니다."

"......"

"그리고 마지막에 고뇌하고, 인정하는 모습은. 제가 보기에 누구보다 인간다웠습니다."


소녀가 피식 웃었다. 목소리에 다시금 위엄이 깃든다.

감긴 두 눈은 떠지지 않으나, 그는 소녀가 자신을 보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군, 네가 용살자였나."

"....?"


소녀가 그의 손을 잡았다.


"아아, 용살자여. 나는 빛을 잃고 내 마음에 깃든 어둠에 타락했다. 함께 싸워야 했을 우리가, 어긋난 운명으로 인하여 적으로 만났구나."


그는 소녀의 손을 맞잡고 가만히 이야기를 들었다.


"다시 만나는 날에는, 다시금 함께 싸울 수 있기를. 진심을 담아 간절히 염원하노라."

"....저도 바랍니다."


그는 진조의 머리칼을 쓸어주었다. 그 손길을 느꼈는지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후... 후후...."


웃음이 멈췄다. 미소가 힘없이 형태를 잃었다.


"....케시크 씨. 죄송하지만 사라카엘 씨를 차로 데려가 주시겠습니까? 그리고 이 소녀도 함께."

"아, 네...."

"나는 됐으니 저 소녀부터 챙겨라. 상처는 깊지 않다."


사라카엘의 말에 케시크는 진조를 들고 옮겼다.


"아스널 씨. 같이 가주시겠습니까?"

"알았다."


아스널은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간다.



--




다음편 :  "로열 아스널. 당신은 저의 소유입니다."-9.t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