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열 아스널. 당신은 저의 소유입니다] 모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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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의 정신이 망가져?"


아스널이 미간을 좁혔다.


"좀 더 자세히 말해봐라."

"알았어. 우선은-"


닥터는 말하면서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단순히 몸이 말을 안 듣는 정도가 아니었다. 아예 작동하지 않았다.


'백 년.'


문득, 지나간 세월을 체감할 수 있었다.

이 육체는 너무 오랫동안 먼지 속에서 방치됐다.

더는 움직일 수 없는 몸이 된 것이다.


'하는 수 없지.'


"아스널 언니. 내 기억 모듈은 어디서 찾은 거야?"

"너의 본체에서 꺼냈다."


아스널이 그렇게 말하며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돌무더기에 반쯤 파묻힌 닥터의 육체가 있었다.


"그럼 지금 내 몸은...."


닥터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몸을 본다.

이 육체는 예비 소체였다. 한때 사이클롭스 프린세스가 잠깐 몸을 담았던 그 소체.


"언니. 내가 따로 백업해둔 데이터를 건드린 적은 없는 거지?"

"그렇다."


닥터는 자폭하기 전, 자신의 기억을 데이터화하는 장치를 머리에 썼다.

드라큐리나와 키르케도 함께.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몇 가지만 부탁을 들어줄 수 있어? 이 육체는 오래 못 가서 죽을 거야."

"...말해라."

"우선, 나를 저 방 안으로 데려가 줘."


닥터가 돌 무더기 중 하나를 가리켰다.

아스널 일행은 지하를 완전히 파헤친 것이 아니었다. 어느 정도는 드러냈으나, 지하의 절반 이상은 여전히 잔해에 파묻혀 있었다.


"알았다."


아스널 일행이 다시 작업을 착수한다.

닥터는 고개를 까딱이는 걸 제외하면 몸을 가눌 수가 없었기에 지켜보기만 했다.


'백 년....'


돌을 드러내는 세 사람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세월이 느껴졌다.

머리카락은 관리하지 못해서 산발이다.

옷은 여기저기 찢어져서 누더기가 되어 있고, 찢어진 옷 사이로 상처투성이인 피부가 보인다.

그러나 그 상처도 최근에 생긴 것들은 별로 없었다. 대부분이 수 년은 됨직한 흉터였다.


무엇보다 돌을 드러내는 작업의 숙련도가 심상치 않다.

바이오로이드라는 것을 감안해도 그 속도와 정확도가 대단했다.

간단히 만든 모래성도 아랫부분을 잘 못 드러내면 쉽게 무너져 내린다.

지금 세 명은 수백 미터 짜리 모래성의 아랫부분을 건드리는 것인데도 모래성이 무너질 기미가 안 보인다.


'정말 고생 많았구나.'


백 년 동안 대체 얼마나 고생한 건지 쉽게 예상이 되지 않았다.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보니 닥터. 너는 아직 바깥 상황을 모르겠군."

"응."

"철충이 침략하고 몇 년은 전쟁이 한창이었다."


아스널이 돌을 드러내면서 설명한다.


"전쟁은 약 4년 동안 계속됐다. 하지만 어느 날, 모든 인간이 죽었다."

"모든 인간이?"

"우리는 숨어 있었기에 사태를 파악하는 것이 조금 늦었다. 백 년 동안 이곳을 파는 것만 한 것은 아니야. 비나 눈, 폭풍으로 구멍이 무너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여러 준비가 필요했다. 거기 필요한 자재와 도구를 구하기 위해 도시로 향했었지."


수백 미터에 다다르는 깊은 구멍이다. 맨손으로 파내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도시에 갔을 때, 모든 인간이 죽어 있었다. 단, 살해 당한 흔적은 아니었다."

"그럼?"

"잠들어 죽었다."

"....?"

"누군가의 수기를 읽기로, 사람들이 점점 잠드는 시간이 늘어났다고 한다. 악몽을 꾸면서 꿈 속에서 살아가는 시간이 길어졌지. 그걸 '휩노스 병'이라고 칭하는 듯했다. 철충과의 전쟁으로 수많은 인파가 죽은 것은 맞다. 하지만 정말로 인류를 끝장낸 건 그 병이었다."

"....그럼 오빠는?"

"도련님은 괜찮을 거다."


아스널은 그 질문을 예상했다는 듯 즉각 대답했다.


"우리는 멀쩡했다. 철충들도 멀쩡했다. 그렇다면 우리와 철충이 섞인 도련님도 멀쩡하겠지."

"....하기야, 지금 오빠는 33.3333333333퍼센트만 인간이구나."

"굳이 소수점까지 말할 필요가 있나?"


아스널이 뒤를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닥터도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오빠가 백 년이나 돌아오지 않은 건 이상하네. 내가 준 모듈에는 분명 5년에서 10년 후에는 복귀하는 걸로 설정했는데."

"맞아요. 저도 그렇게 설정했는데...."


포티아가 말했다.


"나도 그 부분을 오랫동안 고민했다. 그리고 답은 하나뿐이라고 결론을 내렸지."

"...에바. 인가."


아스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뿐이다."

"에바가 어째서?"

"이유는 몇 가지로 예상이 되지만, 아마도 휩노스 병일 가능성이 크다. 그 해답을 찾을 때까지 도련님을 지구로 돌려보낼 수 없었겠지. 확신을 가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내가 한 말도 결국 확증 없는 추측에 불과하다."

"음, 그러네. 그게 가장 가능성 있겠어."


아스널이 말해준 정보들을 토대로 생각하면 그게 가장 타당했다.


"다 됐다."


드러난 건 감금되어 있는 육중한 문이었다.


"문의 잠금 장치가 작동하는지 확인을 부탁할게."


아스널은 문을 건드려본다. 그러자 비밀번호를 입력하라는 음성이 흘러 나왔다.


"백 년이 지나도 전력이 보존되어 있는 건가. 대단하군."


닥터는 비밀번호를 알려주었다. 아스널이 문을 열자, 꼭꼭 숨겨두었던 닥터의 발명품이 실루엣을 드러냈다.

작고 귀여운 장난감들이었다.


"언니, 내 기억 모듈을 떼서 저기에 이식해줘."

"알겠다."


아스널이 다가와 뒷덜미에 손을 댄다. 의식이 끊겼다.

그리고 잠시 후, 닥터는 새로운 몸에서 눈을 떴다.


"음."


팔을 앞으로 쭉 뻗어본다.

팔이 짧다.

다리도 짧다. 몸통은 동그랗고, 머리는...


"머리가 좀 무겁네."

"2등신이니 그럴 만도 하지."

"...귀여워."


에밀리가 다가와서 닥터의 뺨을 쿡 찔렀다. 손가락이 뺨에 파묻힐 정도로 볼이 탱탱했다.

본래도 닥터와 에밀리는 19센티미터정도 차이가 있었다. 닥터가 확실히 작았지만 지금은 아무리 높아봤자 에밀리의 허벅지를 넘지 못할 정도로 큰 차이가 났다.

어른과 아이 수준으로.


"그게 네가 만들었다던 미니 시리즈인가?"

"응."

"귀엽군."


닥터는 미니 닥터닥터맨이 되었다.


"설마 이 장난감에 내가 들어올 줄은 몰랐어."


이 육체는 바이오로이드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장난감으로 만든 기계에 가까웠다.

하지만 나름 정교하게 만들었기에, 기억 모듈을 이식하는 건 문제도 아니었다.


"자, 닥터. 이제 설명해다오. 도련님의 정신이 망가진다니, 무슨 말이지?"

"언니도 기억할 거야. 난 도련님한테 전술 전략에 대한 지식이 담긴 메모리 카드를 건넸어."

"그랬지."

"문제는 그 메모리 카드에 담긴 용량이 어마어마하다는 거야. 인류의 전쟁 역사가 전부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거든."

"......"


아스널이 미간을 오므렸다.


"그게 무슨 문제가 있나요?"


포티가아 물었다.


"모듈처럼 이식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우리는 그렇지. 그냥 모듈을 이식하면 정보가 자연스럽게 흘러 들어와. 그건 우리의 정신이 회로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야."

"아....."

"도련님은 이것저것 섞이긴 했어도 인간이야."


인간의 두뇌는 바이오로이드의 것보다 한계가 명확하다.

인간은 옛 기억을 망각하지 않으면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일 수 없다.

용량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처음 몇 년은 괜찮아. 고등학교에서 수업을 받는다고 중학생 시절을 전부 다 잊는 건 아니니까."


닥터가 간단한 예시를 들었다.


"하지만 막대한 정보가 10년, 20년 계속 되풀이되면서 뇌에 주입되면 싫어도 그 정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 심지어 그게 50년도 아니고 근 백 년 가까이 지속됐다면..... 과거의 기억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지. 머리가 터지지 않고 버티는 게 용한 수준이야."

"하, 하지만 도련님은 철충과 융합했잖아요. 그 방대한 지식을 다 받아들이셨는데..."

"그래서 더 문제야. 이미 막대한 정보가 있는 상태에서 또 막대한 정보가 주입되는 거니까."

"아......"


포티아가 고개를 숙인다.


"그렇다면 에바는? 내 가설대로 에바가 우주선 체류 기간에 손을 댔다면, 캡슐에도 손을 댈 수 있었을 거다."

"아니, 우주선을 조작할 수는 있어도 캡슐에는 손을 댈 수 없어."


닥터가 확신했다.


"그걸 조작하려면 우주선에 직접 들어가야 해. 에바가 우주선을 해킹했다고 해도, 캡슐을 멈출 방법은 없어. 포티아 언니도 캡슐을 설정할 때에는 도련님한테 직접 지시했을 거야. 그렇지?"

"네.... 도련님이 직접 설정하셨어요."


외부에서 캡슐을 조작할 수 있게 되면, 그걸로 캡슐의 인원을 전부 죽일 수도 있다.

여러 이유로 악용을 방지하기 위해 캡슐은 우주선은 내부에서만 건드릴 수 있게 설계되었다.


".....그렇다면 지금 도련님이 어떻게 됐을 지는 전혀 예상할 수 없다는 건가?"

"응."

"큰일이군."

"...미안. 조금 더 좋은 방법이 있었을지도-"

"아뇨, 닥터의 잘못이 아니에요!"


포티아가 외쳤다.


"닥터는 최선을 다해주셨어요. 정말로!"
"....."

"포티아의 말이 맞다. 네가 아니었으면 모두 죽었을 터. 너는 긴박한 상황에서도 할 수 있는 것 이상을 이뤄냈다."

"하지만 오빠가 모든 걸 잊었다면...."

"괜찮다."


아스널은 에밀리를 본다.

모든 걸 잊었던 장본인이 여기 있다.

에밀리는 한때 아스널과의 관계는 물론, 자신의 이름조차 잊을 정도 심한 기억상실증을 겪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기억을 되찾고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살아만 있다면 상관없다. 몇 년이 걸리든, 기억을 되찾을 때까지 옆에서 도우면 된다."

"언니...."

"만약 기억을 못 찾는다고 해도 상관 없다."


언젠가, 아스널은 에밀리가 평생 기억을 못 찾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때도 낙담하지 않았다.


"추억은 다시 쌓으면 되니까."


정적이 흐른다.

슬픈 정적은 아니었다.

포티아는 자신이 희망을 되찾았던 날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닥터도 비록 다른 몸이 됐지만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자신을 떠올리며 살짝 웃었다.

잔잔하게 흐르는 침묵 속에는 부드러운 희망이 맴돌고 있었다.


슈우우웅-


"아."


에밀리가 고개를 든다.


"아주 큰 별똥별이다."


그녀들이 백 년 동안 파헤친 구멍 위로 불타오르는 무언가가 지나갔다.


"하하하! 에밀리. 별똥별은 저렇게 낮게 떨어지지 않는다."

"그럼?"

"...자, 닥터."


아스널은 대답하지 않고 닥터를 본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소중히 보관하고 있는 모두의 기억 모듈을 매만지며 묻는다.


"미니 시리즈는 몇 개나 만들 수 있지?"








"윽...."


캡슐 속의 남자가 신음을 흘렸다.

그는 두 눈을 질끈 감은 채로 몸을 움찔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선잠을 자는 건 아니었다. 그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아주 깊이.


-xx은 이런 상황을 상정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말했다.

말한 사람은 누군지, 그리고 xx이 누군지, 기억나지 않는다.


-침략과 전쟁을.


지지지직-


머릿속에 영상이 떠오른다.

영상 또는 사진으로 기록된 가장 먼 전쟁 역사부터 시작해서 현대까지.

수많은 전투의 이론과 실제 흘러간 양상, 전투를 치르는 실제 병사들의 모습이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윽.....!"


그는 크게 움찔했다. 


인류가 지금까지 쌓은 모든 전술 전략. 수십 년 넘게 쌓인 다량의 정보들.

기록된 모든 전투가 끊기지 않는 롱테이프처럼 줄줄이 이어지며 머릿속에 깃들었다.

그건 한 인간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도 방대한 양이었다.


또, 인간처럼 생겼지만 인간이 아닌 무언가에 대한 지식도 함께 들어왔다.

그 인간들은 평범한 인간들보다 훨씬 빠르고 강했다. 특출한 능력을 지닌 경우도 있었다.


'이건 대체 뭐지?'


전쟁에 대한 지식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괴물들에 대한 지식이 들어 있었다.

그런 와중에 전쟁과 바이오로이드에 대한 방대한 정보가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온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너무 혼란스러워서 정신이 나가 버릴 것 같았다.


그냥 정보만 전달되고 끝나는 거면 견딜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방대한 정보가 끝나지 않고 계속 되풀이되며 머릿속의 공간을 채웠다.

새로운 정보가 계속 비집고 들어오자, 기존에 있던 기억이 뒤로 밀리다 못해 짓눌리고 바스라지며 소멸한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정보를 받아들이기 전에 자신이 무엇이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새로 온 이방인들이 원주민을 내쫓고 원래부터 자기들이 살았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지냈다.

그런데 원주민들은 대체 어디로 간 걸까?

실존했는지도 모를 먼 기억에 대해 고민할 때, 머릿속에 강렬한 목소리가 떠올랐다.


'절대 잊지 말자.'


그 목소리는 그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잊지 말자니, 뭐를?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다시는 누구도 죽게 놔두지 않겠어.'


내면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그에게 잊지 말 것을 강요했다.

남자는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떠오를 때면 이상하게 마음이 아려왔다. 그 말을 반드시 지켜야 할 것 같았다.


'난 뭔가.. 뭔가를...'


그는 인간이 담을 수 없는 방대한 정보를 머릿속에 담았다.

그 대신 무언가를 잃었다. 아주 소중한 무언가를. 그의 인생 전체에 걸쳐 겨우 얻어냈을 지도 모를 만큼 소중한 것을.

그것을 떠올리려고 하자, 원인을 알 수 없는 슬픔이 가슴 속에 차올랐다.

또다시 목소리가 들린다.


'더 이상 나를 위해 희생하는 사람이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


만약 나 혼자 모든 것을 혼자 짊어질 수 있다면.

그럴 역량이 될 만큼 강해지고 똑똑해진다면.

누구도 그를 위해 희생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내가 모든 걸 다 해낼 수 있다면.'


나 하나의 목숨을 불태워 그리 할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절대 잊지 말자.'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그러나 긴 세월의 풍파는 그런 기억조차 뒤덮을 정도로 드넓었다.

무언가를 잊었다는 사실조차 잊을 만큼.


[죄송해요. 지상에 문제가 있어서, 그 원인과 해결법을 알아내는 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건 기억 속에서 들리는 게 아니었다. 우주선 안에서 울리는 소리였다.


[너무 오랜 시간 우주선이 체류해서 연료가 남아 있지 않아요. 그래서 정상적으로 착륙할 수가 없어요.... 당신은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는지 인지하지 못하고 있겠지만.]


여성이 계속 말한다.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였다.


[때문에 사출할게요. 제가 캡슐을 열 방법은 없으니 캡슐 채로 사출하게 될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의 육체는 이미 인간을 초월했고, 캡슐은 대기권에서 추락하는 충격을 견딜 수 있을 테니까. 설령 문제가 생기더라도 제가 파견하는 아이들이 있으니 즉각 조치할 수 있어요.]


여자의 말이 끝날 무렵, 우주선의 문이 개방됐다.


[자, 이제 집으로 돌아오세요.]


그날, 하늘에서 별똥별이 추락했다.









"으으윽...."


그는 끙 앓았다.

등에서 부서지는 것 같은 아픔을 느꼈다.

몸이 너무 아파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다.


눈을 뜰 힘조차 없어 어둠 속에서 여기가 어딜까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고 머리만 격렬하게 아파온다.


"숨은 쉬는데? 살아 있는 것 같아!"


누군가의 목소리.

두 여자가 뭐라고 두련두련 이야기를 나누더니 목이 따끔했다.

무언가를 주사한 듯 체내에 차가운 액체가 흘러 들어왔다.

그리고 눈이 뜨인다.


"살아났나? 눈을 깜빡거리는데? 숨도 제대로 쉬는 것 같아."

"휴, 다행이야. 이분이 명령만 내려 주시면 우리도 이젠 제대로 싸울 수 있을 테니...."


'명령? 싸움?'


남자는 두 여인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


"괜찮긴 한 거야? 그러니까 명령을 내릴 수 있을 정도로 말이야. 분명히 기억이 없을 거라고 했잖아."


'기억이 없을 거라고?'


노란 머리의 여자가 보인다.

말랑말랑한 볼을 가진, 어깨에 닿는 단발의 여성.

처음 보는 그 여성이 그의 상태를 알고 있었다.

기억이 없다는 걸 인지하고 있다.


"이상한 명령이라도 내리면 어쩌지?"

"그럴 리야 있겠니?"


이 소녀들은 누구고,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까.


"어? 잠깐, 지금 움직였어. 깨어난 것 같은데? 인간, 깨어난 거지? 깨어난 거 맞지?"


그는 움직이지 않는 몸을 애써 움직이며 두 여자를 보았다.

머릿속에 두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여긴 어디고.


저 둘은 누굴까.


.....그는 무엇을 먼저 물을지 고민하다가 입을 연다.


"너흰 누구야?"

"반갑습니다 인간님. 전 가정경비용 바이오로이드 콘스탄챠. 그리고 이 아이는 기동공격용 바이오로이드 그리폰이라고 해요."


바이오로이드.


그 단어가 귀를 파고들었다.


'뭐지? 뭔가 생각날 것 같기도....'


"저, 인간님? 저희에게 파괴 명령을 내려주실 수 있으신가요?"


자신을 콘스탄챠라고 밝힌 바이로오이드가 말했다.


"파괴 명령? 그게 무슨 말이야?"

"저흰 사령관 인간님의 명령 없이는 방어 외의 파괴가 금지되어 있어요. 인간님이 파괴 명령을 내려주신다면... 싸워서 포위를 돌파할 수 있어요."


포위, 돌파. 파괴.


"누구와 싸운다는 거야?"

"당연히 철충이지! 설마, 철충도 모르는 건 아니지?"


철충.


그 단어를 듣는 순간, 불현듯 무언가 떠올랐다.


'절대 잊지 말자.'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뭐, 뭐야? 갑자기 왜 그렇게 심각한 표정이야? 모르면... 그냥 내가 설명해주면 되는데..."


그리폰이 말하지만 그는 듣지 못했다.

수많은 이미지와 정보가 눈앞을 지나갔다.

정보가 홍수처럼 몰려오며 철충에 대한 지식이 떠올랐다.


그는 자기 자신이 누군지조차 모른다.

그러나 하나는 알 것 같았다.


'나의 적.'


철충이란, 반드시 근절해야 하는 적의 이름이었다.


"파괴 명령을 내릴게. 지휘는 내가 해도 되겠지?"


다시는 누구도 죽게 놔두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혼자 짊어지더라도 소중한 누군가를 희생 시키지 않기 위해.


나는 오르카호의 사령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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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이 마지막 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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