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님도 참. 이런 때도 일하시기예요?"


남자는 태블릿으로부터 눈을 뗐다. 맞은편의 리리스가 턱을 괴고 살짝 불만스런 얼굴이었다.


"그냥 차만 마시긴 심심해서... 가볍게 보고 있던 거야."


"우- 리리스랑 있는게 심심하시다니."


그녀는 과장스럽게 실망한 반응을 보였다.


"뭐, 정식 데이트도 아니고. 간식시간에 같이 차 마시는 거잖아."


"...하긴, 데이트랑 티타임이랑은 다른 거니까요."


그것으로 다소 납득하는 눈치였다.


데이트하는 것과 티타임은 뭐가 다른 걸까. 역시 여자 마음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떤 일을 하시길래 리리스랑 차 마시는 것보다 더 재밌으신 거예요?"


리리스가 고개를 기울이며 살짝 비꼬듯이 물었다.


"재밌다기보단, 그냥. 애들 신상명세 파악 중이었어. 아무래도 본지 오래된 거 같아서 좀 까먹었거든."


남자가 아무리 전문 군인이 아니라지만, 저항군 총사령관이라는 입장에서 부하들의 신상을 외우고 다니는 일은 중요한 것이다.


하여 웨이퍼와 커피를 번갈아 먹으며 대원들의 정보를 훑어보던 중, 문득 리리스와 태블릿을 번갈아보았다.


화면 스크롤은 리리스의 프로필에서 멈추어 있었다.


"왜 그러세요?"


"그게, 전에 물어보려다가 잊은건데."


"네."


"리리스는 언제 태어난 거야?"


"...."


인조인간인 바이오로이드들도 인간들처럼 제조날짜 - 태어난 날짜가 있기 마련인데, 리리스와 오베로니아 레아 같은 일부 부하들은 어쩐지 태어난 날짜가 따로 적혀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간단히 말해서 리리스 등이 일부러 나이 정보를 적지 않은 탓이었다. 게다가 전쟁통에 나이가 중요할 리 없으니, 데이터베이스를 만든 라비아타도 그런 걸 따로 적어둘 이유가 없는 것이다.


덕분에 남자가 알 수 있는 점이라고는, 리리스에겐 그가 처음 모신 주인이라는 것 정도였다.


리리스는 잠시 말 없이 바라보더니, 문득 살포시 웃으며,-"주인님도 참. 여자 나이 물어보는건 실례에요. 아시면서...."


하고 넘겨버리는 것이었다.


"에이. 알려 줘. 가족은 여자가 아니라잖아."


이에 그녀는 짐짓 삐진 듯이 입을 내밀었다.


"또 그러신다... 안 알려드릴 거예요. 흥."


사실, 수백년을 넘게 사는데다 노화도 없다시피한 리리스 같은 바이오로이드에게 실제 나이는 사소한 문제였다. 남자도 중요한 건 정신적인 나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사람 심리라는 게 막상 궁금해지면 부쩍 알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는 일단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그나저나, 페더나 펜리르는 살아온 기간이 꽤 길지 않아? 라비아타 정도는 아니더라도 말이지."


"그렇긴 하죠. 거의 멸망 직전부터 살아온 아이들이라."


"말이 나와서 생각하지만 둘이 잘도 언니라고 해 주는구나. 둘다 리리스보다 신체든 살아온 쪽이든 나이가 많을지도 모르는데. 그렇지?"


"후후, 나이만으로 자매가 되진 않지요."


대원들이 서로 언니라고 부르는 건 단순히 나이만 따지는 것이 아니라, '형님' 이라고 호칭하는 것과도 비슷하단 사실은 그도 이미 아는 바였다.


"나이에 상관없이 아이들이 다들 잘 따라줘서 항상 고마워하고 있어요."


"음."


리리스는 능숙하게 유도심문을 피했다.


그녀는 얼마나 오래 산 걸까. 나보다 연하일까 연상일까. 남자는 여간 궁금증이 가시지 않았다.


"참, 히루메도 은근히 리리스를 언니처럼 따르는 것 같던데? 부대는 다르지만."


히루메는 컴패니언처럼 리리스의 유전자에 여우 유전자가 섞인 무녀 메이드였다.


"흠, 소속은 달라도 제 동생인 걸요. 언니처럼이 아니라 당연히 언니지요."


그녀의 말에는 자부심이 묻어나 있었다. 사실, 저항군에서 컴패니언을 비롯한 동물 유전자가 섞인 대원들은 거의 다 리리스의 혈통을 모체로 해서 태어났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니 어떻게 보면 리리스는 그녀들의 언니이자 어머니와도 같은 존재인 것이다.


"그앤 멸망 전부터 살아왔을 텐데도 그러네."


리리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흐음. 그것도 제 인덕이라는 걸까요? 아니면 그애한테 컴패니언이 어울려서일까요. 어쨌든 중요한 건 나이가 아니란 것이겠죠."


남자는 리리스의 자기자랑을 가볍게 받아쳤다.


"뭐, 리리스가 나보다 저항군 짬은 더 높은 거 같지만."


"그건... 그러네요. 주인님을 발견하기 전부터 싸워 왔으니까."


"그럼 나보다 연상이란 거려나?"


리리스는 여전히 장난기 어린 미소였다.


"어머나... 글쎄요? 물론, 주인님께서 연상을 좋아하시면 리리스는 기꺼이 연상이 되어드릴 거예요."


"비밀스럽긴."


"나이는 여자의 비밀이라고요."


물론 그녀의 제대로 된 나이는 라비아타에게 물어보면 간단하리라. 하지만 출장 나간 라비아타에게 그런 사소한 일로 연락을 한다는 건 예의도 아니고 자존심도 허락하지 않았다. 하물며 그녀에게 직접 물어보면 게임에서 지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이겨서 무슨 이득이 있는 게임인지는 모르겠지만.


요새를 공략할 때는 정면으로 부딪히기보다 약점을 찾거나 주변을 먼저 공격하라고 했지. 남자는 계속해서 리리스와 관련 있을 대원들 이야기를 꺼내며 떠보았다.


"아, 리제도 저항군 경력으로 따지면 나보다 선임이겠네. 의외려나."


"스토커 양이요? 뭐, 그렇게 되겠네요. 역시 리리스보다는 경력이 아래지만요."


그녀는 저항군 경력에 대해 자부심을 갖는 것 같았다.


"오... 그럼 리리스가 리제보다 연상이라고 봐야 하려나?"


"글쎄요. 스토커 양이 리리스보다는 신체 나이가 한살 많은 건 분명하지요. 그래도 자세한 건 레아 씨한테 물어보시면 될 듯한데...?"


리리스는 웃었다. 역시 직접적인 답은 피해가는 그녀였다. 하지만 시저스 리제가 레아보다 늦게 부활했음을 감안하면 리리스가 리제보다 오래 살았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약간 단서를 잡은 걸지도 모른다. 그는 갑작스레 생각났다는 듯이 또 말했다.


"맞다. 그건 그렇고, 소완은 라비아타가 부활시킨 거잖아? 알렉산드라와 리리스가 반대했지만, 그녀가 워낙 유능해서 라비아타는 반대를 무릅쓰고 부활시켰다고 하던데."


"리리스가 딱히 반대했다기보단... 뭐, 유능한 건 사실이니까요. 요리 실력이든 싸움이든."


그녀는 입맛을 다시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렇지만 소완은 곧 저항군을 빠져나갔고 말이야."


"모실 분이 없는 저항군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해서, 혼자 수련을 떠났다나요. ...사실, 그녀의 심정은 이해해요. 리리스도 주인님이 없는 저항군 활동에 별로 보람을 느끼지 못했으니까요."


"그렇구나... 그렇게 한참을 수련하다가 내가 발견됐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거니까. 소완도 나이가 아주 적진 않겠지. 그치?"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로써 신체 나이는 소완과 리제 리리스 순으로 많았어도 실제 살아온 기간은 리리스가 제일 많았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흐음. 그런 나이 같은 건 소완 양에게 직접 물어보시는 게 빠르겠지요.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비밀주의적인 분이라. 아시잖아요?"


"소완도 나이 이야기는 안 하더라고... 그보다 잠깐, 여자한테 나이 묻는 건 실례라면서?"


리리스는 헤헤 하고 혀를 내밀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로 빙둘러 묻고는 해 보았지만, 리리스에게 직접 캐지 않는 한 그녀의 나이를 가늠하기엔 어려워 보였다. 알 수 있는 점이라고는 그녀가 다른 간부들처럼 오래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 뿐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애매한 부분 투성이었다.


결국, 남자는 지는 기분으로 직접 물어보려다가 잠시 멈칫했다.


그런데 나는 내 나이가 몇인지는 알고 있나.


물론 모른다. 기억을 상실한 채로 발견되어 저항군의 사령관이 된 신세니까. 그는 부모도, 나이도, 살던 곳도, 자신이 누구였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 점에선 적어도 자신이 언제 태어났고 누구인지 아는 바이오로이드 대원들보다도 못했다.


하다못해 자신은 깨어난 걸 기준으로 보면 아무리 많이 잡아도 몇살 안되는 어린애나 마찬가지 아닌가.


게다가, 기억을 영영 떠올리지 못하거나- 어쩌면 과거의 기억 자체가 없는 신세일지도 모른다.


거기에 생각이 미친 남자는 쓰게 웃었다.


"그냥,포기할래."


"예?"


"여자 나이를 묻는 건 확실히 실례니까. 남의 나이 묻기 전에 자기 나이를 먼저 밝히는 게 예의잖아."


그는 자조하듯이 중얼거리곤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의 말뜻을 알아듣고, 잠시 바라보던 리리스가 나직이 말했다.


"주인님. 만약, 주인님의 기억이 돌아오신다면... 그땐 리리스도 진짜 나이를 알려드릴게요."


그러자 그가 눈을 들었다. 가라앉은 기분을 애써 다스려야 했다.


"...역시 하루빨리 기억해내야겠네."


"후훗. 그러게요. 그러니 포기하지 마셔야 해요."


리리스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한동안 그를 응시하였다.


남자는 그녀의 깊게 가라앉은 듯한 금색 눈동자를 마주 보면서, 문득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무언가 기억에 관련된 일이 생길 때마다 나오는 버릇이었다.


그때, 마침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뛰어들어왔다.


"주인님! 하치코 탐사 다녀왔습니다-"


"다녀왔습니다."


리리스의 동생이자 컴패니언인 페로와 하치코였다. 시계를 보니 벌써 오후가 늦을 무렵이었다.


"오오, 어서오렴."


하치코는 냉큼 남자의 허벅지 위에 앉아 배시시 웃었다. 남자도 그런 하치코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언제나처럼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에 고민이 절로 사라지는 듯했다. 이것도 어떤 의미로는 자주 있는 일과 중 하나였다.


리리스도 미소를 지었다. 그녀에게 자매들은 남자 다음으로 가장 소중한 존재들이었다. 그런 동생들이, 사랑하는 사람한테 귀여움 받는 모습은 무엇보다도 흐뭇한 것이다.


"하치코. 다녀와서 샤워는 다 했죠? 냄새 나면 주인님께 실례니까."


"물론입니다."


뒤따라 온 페로가 대답했다. 그녀는 하치코와는 정반대로 터키산 고양이의 유전자를 통해 만들어진 리리스의 동생이었다.


하치코와 다르게 차분한 표정이었지만, 페로의 시선은 하치코- 그리고 남자에게 머물러 있었다. 역시 주인님을 좋아하는 그녀로선, 남자의 허벅지 위가 자기 것인마냥 올라타 어리광 피우는 하치코가 부럽지 않을 리 없었다.


그 눈치를 아는 리리스가 빙그레 웃었다.


"페로도 언니 무릎에 앉으렴."


"됐습니다. 애도 아니고."


"뭐 어떠니. 자주 그러면서."


"그렇게 해. 좀 있다 하치코랑 자리 바꿔줄게."


남자까지 거들자, 페로는 얼굴을 붉히면서도 리리스의 무릎에 얌전히 앉았다. 그녀에겐 리리스 또한 주인님 다음으로 따르는 언니인 것이다. 리리스도 그런 페로가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로부터 남자는, 리리스 자매들을 어루만지듯 아무 말도 않고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언제나 그랬지만 역시 그녀들과 함께라면 나이든 과거든 중요하지 않았다.


멸망한 세계에서 이렇게 잠시나마 평화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건 축복일 게다. 위선이나 '가족놀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언제까지고 계속할 순 없더라도, 조금이나마 더 오래 느끼고 싶었다.


부끄러워하는 페로와 뺨을 부비던 리리스도, 시선이 마주치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아무것도 모른다 한들- 누구라 한들 신경 쓰지 않아요. 아무렴 어때서요.


혼자만의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남자는 어쩐지 그녀가 눈빛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느끼어 가슴이 따뜻해졌다.


심심한 티타임과 하루가 그렇게 저물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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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그렇듯이 멸망 전의 리리스일 수도 있고 후의 리리스일 수도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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