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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긴 진짜 평화롭네."



여느 때와 다름 없는 아침, 아침을 먹은 장화는 숲을 거닐고 있었다. 알 수 없는 현상으로 자신이 전투를 하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전혀 다른 세계로 떨어진 이후로 그녀는 느긋하게 숲을 걷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그녀는 자신을 기억을 더듬으며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쉼없이 폭약을 터트리며 정신 없이 철충을 학살하던 그때와 다르게 한참이나 문명이 뒤떨어진 이곳은 미처 그전엔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천천히 생각하게 되었다.



"..."



물론, 좋았던 기억만이 떠오르진 않았다. 전이하기 전 그날 밤,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컸던 별의 아이를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원초적 공포가 다시금 떠오르기도 했었다. 특히나, 자신을 '이모'라 부르고 따르던 몽구스 대원들, 그리고 언니나 다름 없이 따랐던 홍련의 죽음은 애써, 잊으려 했던 그녀의 뇌리 속에 똑똑히 각인되었다.



[장화... 꼭, 너는... 내가 지켜줄게.]

"..."





"미친년... 그 상황에서도 가족놀이나 하고..."



애써 독한 말을 내뱉었지만, 장화는 입술을 꾹 깨물고 낮게 중얼거렸다.



"언니면, 적어도 동생이 슬프지 않게 끝까지 살아 있어줬으면 고마웠잖아..."

"야. 뭐해?"

"... 씨발, 깜짝아."



그때, 누군가 뒤에서 장화의 어깨를 툭 쳤다. 뒤를 돌아보니, 천아가 장난스레 혀를 쑥 내밀곤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재빨리, 그녀는 눈가에 그렁거리던 눈물을 쓱 닦곤 퉁명스레 말을 내뱉었다. 그냥, 심심해서 걷고 있었다고. 어느새 슬쩍, 자신과 함께 보폭을 맞춰 걷던 그녀가 거대한 나무들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을 손으로 가리며 바라보다 말했다.



"진짜 하루하루가 꿈 같다, 그렇지 않아?"

"흥, 팔자 한 번 좋네."

"븅신~ 니가 할 소리냐 그게? 그 검정머리 메이드 언니는 요새 농사일 돕는다면서 열심히 일 도우고 있던데, 넌 하는 일이라곤 산책 밖에 없잖아?"

"시끄러."

"아님, 타지에 나간 핫팩 보고 싶어 끙끙거리고 있기라도 하나-?"



유들걸리면서도 특유의 장난기 가득한 천아의 말에 딴지를 거려다 참기로 했다. 생각해보면, 천아하고 그녀, 그리고 바르그 셋은 유일하게 살아 남은 오르카의 부대였다. 전 부대가 괴멸한 둠브링어 지휘관 메이. 그리고 모든 자매들이 죽은 컴페니언의 경호대장 리리스와 다르게, 다행이라 해야 할지, 아니면 불행이라 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미운 정도 정이라고. 어느새 정이 붙어버린 저 아이들과 살아남은 것은 어쨌든 다행이리라. 장화는 애써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천아도 쫄래쫄래 따라 와, 같이 숲을 거닐던 그때였다. 저 멀리서 누군가 비틀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천아와 장화는 경계태세를 취하며 제각기 건틀릿과 나이프를 들었지만, 햇빛이 걸어오던 인물의 얼굴에 비치자 그녀들은 경계하는 것도 잊은 채 눈을 동그랗게 떠야 했다.



"야, 내가 뭐 잘못 본 거 아니지?"

"뭐야. 쟤... 컴페니언 그 고양이 아냐?"



몸을 못 가눌 정도로 비틀거리던 넝마를 입은 한 백발의 고양이 소녀가 걸음을 멈춘 뒤 그녀들을 보았다. 분명 평소에 입었던 메이드 옷이 아니었지만 사령관의 곁에서 근접 경호를 맡았던 부대인 컴페니언이었기에, 장화와 천아는 그 부대원의 얼굴 만큼은 똑똑히 기억했다. 하지만 이 세계로 넘어 오기 전, 별의 아이의 습격에서 모두 전멸했다고 생각했었던 그녀들이었다.



"페로? 페로 맞지?"

"와 세상에! 페로인 거야? 야- 니네 언니가 너 얼마나 보고 싶어했는지 아,"



그때였다. 페로의 꼬리가 쭈뼛 서더니, 이내 단검을 들고 천아에게 달려들었다. 갑작스럽게 공격 태세를 취하며 달려드는 페로의 모습에 적잖이 당황한 천아는 황급히 나이프를 들어 그녀의 단검을 막았다. 햇빛에 반사된 두 소녀의 칼날이 반짝였다.



"미친! 왜 갑자기 공격인데!"

"씨발... 뭐야?"



천아는 물론이고 지켜보던 장화도 황급히 건틀릿에서 와이어를 사출했다. 다시금 자세를 잡은 페로는 눈을 부릅뜨며 그녀들에게 말했다.




"너희들, 인간이지?"

"씨발, 미친 나비년... 너 여기로 넘어올 때 대가리 깨지기라도 했냐?!"

"겨우 도망쳤는데... 날 잡으러 온 거지? 그렇지? 여기서 다시... 다시 잡힐 수 없어... 없다고!"



부상이 심한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운 페로는 단검을 거머쥐며 다시 달려들었다. 천아는 짜증스럽게 나이프를 거머쥐었다. 컴페니언 부대는 근접경호 부대인 만큼, 부대원 개개인의 전투 실력 또한 상당한 편이었다. 쉽진 않은 편이라 생각했지만... 묘하게도 지금 자신들에게 공격해오는 페로는 컴페니언의 부대원이라 하기엔, 너무도 허술했다. 주 무장인 단분자 클로는 없고 손톱을 몽땅 뽑힌 그녀는 강자로 보이기 보단, 너무도 허술한 이세계인 같기도 했다.


페로와 첫합을 부딪쳤을 때 일방적으로 밀려났던 것 또한 페로였단 것을 떠올린 천아는 잠시 생각하다 나이프를 집어 넣었다. 하지만 그에 비해, 마치 천아를 죽일 것처럼 단검을 쥔 채 달려 오던 페로를 보자 장화는 '저년이 미쳤나?' 싶은 표정으로 천아에게 소리를 질렀다.



"야 뱀술년아! 너 뒤지고 싶어?"

"잠깐만."



별안간 평소와 다르게, 착 가라앉은 천아는 달려오던 페로가 단검으로 그녀의 복부를 겨눠 찌르려는 것을 피했다. 한 뼘, 칼이 빗겨나갔고 잠시 당황스러워하던 페로는 궤도를 바꿔 천아의 배를 갈라버릴 기세로 단검을 베는 자세로 바꾼 뒤 휘둘렀지만-



"컴페니언이 이렇게 약할 리는 없는데."



천아는 그대로 손쉽게, 페로의 뒷목을 잡아 넘어뜨렸다. 그리고 단검을 쥔 손을 살짝 비틀자 너무도 쉽게 손에서 떨어뜨렸다. 새된 비명소리를 페로가 질렀고, 천아는 평소와 다르게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




"너, 페로 정말 맞냐?"

"이거 놔! 이거 놓으... 아악!"

"생긴 건 정말 페로가 맞는데... 봐 봐. 여기 눈동자 색 다른 것도 그렇고. 백발에 고양이 귀... 정말 영락없는 페로잖아?"

"이거 놓으라고 인간들아! 놔!"

"얘 진짜 여기 넘어오면서 대가리 깨진 거 아냐? 기억 상실증인가? 아냐... 아무리 기억상실증이라 해도, 전투력이 이렇게 허접하진 않을 텐데?"

"놓으라고, 놔... 놔... 까흑?!"



장화는 발버둥치며 악을 쓰는 페로의 뒷목을 손날로 가볍게 쳤다. 그러자 풀썩, 그녀가 고개를 떨구었다. 그렇게 기절한 페로가 축 늘어지자 그녀는 눈을 감은 페로의 모습을 보다 말했다.



"야, 이거 걔한테 말해야겠지?"

"핫팩 지금 나가있잖아. 어떻게 말할 건데. 일단은 마을까지 데려가야겠는데?"



천아는 훌쩍 페로를 자신의 등에 업었다. 왜 별안간 자신을 공격하려 했는지 모르겠지만, 오르카의 동료였던 그녀에 천아는 선뜻 손을 대고 싶진 않았다. 모든 오르카의 바이오로이드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던 사령관의 성격 상, 엄청난 화를 감당할지도 몰랐을 테니까. 결국 그들은 페로를 업고 다시, 수인 마을로 돌아왔다.



"야- 싸이코! 잠깐 치료 좀 해줘야겠는데?"



그렇게 마을로 돌아오자, 사령관이 오면 예쁜 마을의 조경을 보여주고 싶어, 나무를 다듬느라 여력이 없던 리제를 향해 장화가 소리를 질렀다. 고개를 돌린 그녀는 짜증스럽게 그녀를 쏘아보던 중, 천아의 등에 업힌 익숙한 여자를 보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뭐야? 고양이 햇츙이잖아? 그 햇츙 동생..."

"알았으면 빨리 응급처치라도 해줘- 핫팩 우울해하는 거 보고 싶지 않으니까!"



귀찮아하던 리제는 '사령관'이라는 단어에 퍼뜩 정신을 차리곤 땅바닥에 누워 새근거리던 그녀를 보며 몸을 몇 번 스캔하더니 눈쌀을 찡그리며 말했다.





"안 죽은 게 신기하네. 얼마나 고문을 받은 거야?"

"간단히 죽으면 그게 바이오로이드냐? 하여튼 업고 왔으니까 빨리 치료해달라고!"



리제는 귀찮아하면서도 결국, 페로를 업고 임시 숙소로 날아갔다. 천아와 장화는 리제가 사라지자, 그제야 감춰두웠던 의문을 떠올렸다. 분명, 컴페니언 시리즈는 타 부대원들과 마찬가지로 별의 아이 습격이 있던 날 모두 전멸했다. 사령관이 비참해하며 울던 모습도 뇌리 속에 똑똑히 기억했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 어떻게 페로가 나올 수 있던 걸까.



"야. 쟤 왜 이렇게 약해?"

"내가 아냐 븅신아?"

"씨발, 말 하는 싸가지는..."

"아침부터 이 년이 말 꼬리 가지고 지랄하네... 하, 됐다. 그래도 그 경호대장이 좋아라 하긴 하겠네. 거기도 언니니 뭐니 서로 가족놀이나 하고 있었으니까."

"좀 이상하긴 해. 내가 봐왔던 페로는 저렇게 약하진 않았는데."

"... 야. 혹시 우리처럼 넘어 온 페로가 아니라, 이 세계에 있던 페로 아냐?"



장화의 추론에 천아는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입꼬리를 들어올리더니, 농사를 짓는 수인들을 삿대질하며 그녀에게 말했다.



"야, 지금 저 사람들 기계 하나 없이 맨손으로 농사 짓는 거 안 보이냐? 무슨 이런 세계에서 바이오로이드를 만들어?"

"근데 아니, 빼박 페로잖아 생김새만 보더라도."



장화와 천아는 골똘히 머리를 맞대고 어떻게 페로가 여기서 나타났는지 생각했다. 하지만 도저히 마땅한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만약 닥터가 있었다면 적어도, 이러해서 이런 것이다... 라는 추론을 금방 꺼낼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의문을 풀 순 없었고, 그저 깨어난 페로가 조금이라도 어떤 말이라도 해주길 기대할 수밖엔 없었다.


그렇게 리제가 페로를 간호해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페로가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 그곳에는 바르그와, 레아. 그리고 리제와 메이가 그녀를 노골적으로 빤히 보고 있었다. 페로는 급히 일어나려 했지만 이내 힘이 빠졌는지 기절하듯 침대에 누웠다. 바르그는 귀를 쫑긋거리더니 낮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질문했다.



"페로. 뭐하는 짓이냐. 오르카의 동료들에게 적대 행위를 하다니?"

"... 수인?"



바르그의 검정 귀를 보자 페로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옆에서 듣고 있던 메이는 기가 차다는 듯 페로에게 쏘아붙였다.



"무슨 수인은... 우리 기억 안 나? 무슨 일이 있었기에 몸이 그 상태가 된..."

"인간... 여기는..."



메이를 보자, 다시금 적개심을 불태우며 크르릉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힘이 부쳤는지 다시금 침대에 털썩 누워버렸다. 바르그는 페로의 몸에 새겨진 수많은 학대의 흔적을 보더니 조용히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다들 일단 나가줬으면 좋겠다. 아무래도 페로가 너희들에게 입을 열 것 같진 않다. 내가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지."



레아는 바르그의 의견을 존중하기로 했다. 처음 대면했던 티타니아와 같이 적의가 분명한 모습이었다. 메이와 리제, 그리고 레아가 다시 바깥으로 나가자, 바르그는 팔짱을 낀 채 페로를 조용히 응시했다. 페로는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바르그를 응시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강아지의 귀와 인간의 귀를 동시에 가진, 기묘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넌... 인간이야? 아님... 수인..."

"... 아무래도 넌 오르카의 페로는 아닌 것 같군. 이 상황에서도 수인이니, 인간이니 따지는 것을 보니."

"대체... 오르카가 뭐야, 넌 또 뭐고?"



바르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다 입을 열었다.



"내가 하는 질문에 먼저 대답하면 너의 질문에도 대답을 해주겠다. 너가 그 수인 마을을 지키던 묘인족의 전사... 뭐 이런 건가?"

"..."

"마을 꼬맹이들에게 이야기는 들었다. 어느날 이 마을에 살기 시작하면서 괴물들과 인간들을 물리쳤다고."

"... 그래. 내가 맞아."

"이 마을에 살기 전의 기억은 전혀 없는 것이냐?"



바르그의 질문에 페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어느 날부터 이 숲에 흘러들어오게 되었고 엘프, 그리고 고블린 등 다른 종족들보다 약한 수인을 단신으로 지켰다는 것이었다.



"... 너희는 대체, 정체가 뭐야? 게다가 너. 왜 인간들과 이 마을에 있는 거지? 너는... 너는..."

"존대를 하지 않는 걸 보니, 확실히 오르카의 페로는 아닌 것 같군."



늘 존댓말을 하던 페로와 다르게, 지금의 페로는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 고양이와 같기도 했다. 그리고 동시에.



"... 그리고 내가 아는 페로보다 약하다."

"그래, 내 이름은... 페로가 맞아. 내 이름이 페로라는 건 유일하게 기억이 나니까. 하지만... 너희가 말하는 오르카의 페로는 뭐지? 너희는... 어디서 온 사람들이지? 너희... 마족인가?"

"너희들이 그토록 무서워하는 마족도 아니고, 이 세계의 사람도 아니다. 굳이 말한다면, 다른 차원의 세계에서 넘어 온 존재라고 할 수 있지."

"..."

"하지만 겁 먹을 필요도, 증오할 필요도 없다. 적어도 이 세계의 인간처럼 너희를 노예로 부리거나 학살할 생각 따윈 없다. 주인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이었다."

"주... 인? 너희는... 노예야?"

"... 내가 섬기는 지고의 존재이기에 주인님이라 부를 뿐. 멸망 전 인간들이 노예처럼 부려먹던... 아, 실례. 너희 세계의 인간처럼 강압적인 주인과 노예의 관계는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



바르그는 차근히 설명하다가도 이내 자신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걸린 반지를 보았다. 그리고 슬며시 그녀를 향해 반지를 보이며 자랑스레 대답했다.




"... 부부 같은 관계."

"뭐, 뭐? 어떻게 주인과 노예가 남편과 아내가 될 수 있는 거지?"



바르그는 사령관을 떠올렸다. 이 세계에 넘어오기 전, 처음 만났던 사령관은 그녀의 전 주인이었던 마리아 리오보로스와 다르게 물러터진 남자에 불과했다. 명령권을 가진 인간이 바이오로이드에게 감정을 보여주는 것 자체가, 쓸데 없고 우스운 짓이라 여겼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곁에서 여러 일들을 겪어오며, 그리고 그에게 반지를 받아 주인에게서 부군으로 섬기기로 약조했다.


강강약약. 바르그가 사령관을 바라보면 느낀 것을 네 자의 단어로 정의한다면 그러하였다. 바이오로이드를 아끼고, 바이오로이드를 자신과 동등하게 대하는 자비로운 인간. 그 누군도 잃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수많은 위기와 고비를 넘겨 온 최강의 남자. 비록 별의 아이에게 초토화되었지만 이곳에 온 뒤로도 우리를 위해 나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훌륭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



바르그는 손톱이 모조리 뽑힌 페로의 상처투성이 손과, 목과 손목에 결박되어 있던 구속구의 흔적을 눈으로 쓸었다.




"생각해보니 이쪽 인간들도 자신과 다른 존재를 노예로 부리더군. 내가 약속하지. 주인님은 절대 너희를 하등한 존재로 생각하지 않는다."

"..."

"뭐. 이 정도로 하지. 푹 쉬도록."

"잠깐, 널 누구로 부르면 되지?"

"바르그. 바르그로 부르면 된다."



반면 페로는, 저 검은 귀를 쫑긋거리는 낭인족 여자 아이의 말에 수긍할 수 없었다. 세상에 그런 인간은 없었다. 자신이 결국 제압당한 채, 백작의 성노예로 끌려왔을 때는 입에 담기 조차 치욕스러운 것들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어떻게 태어나고, 어떻게 자랐는지 그 기억은 마치 가위에 잘린 듯 깨끗하게 잊혀졌지만, 지금 이 몸에 남긴 인간들의 상처는 늘 그녀를 괴롭혀왔다.


눈을 감을 때마다 몇 번이고 침대에서 그에게 범해졌던 때가 떠올랐다. 순응하지 않으면 치욕스러운 학대가 이어졌으며 반항하면 고문했다. 페로가 여태껏 느낀 인간의 모습은 그러했다. 자신의 가슴께에 그려진 노예인을 이불로 덮어 숨긴 페로는 몸을 조용히 틀었다. 바르그는 집을 나서면서도 그녀에게 말했다.



"그나저나 널 본다면 꽤 기뻐할 아이가 있겠군. 뭐... 너가 오르카의 페로는 아니겠지만... 말이다. 푹 쉬거라."



바르그가 나간 뒤에도 페로는 숨을 고르게 고른 채로 어두운 벽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



펙스 연합 왕국.


절대 늙지 않는 미모의 여섯 여왕이 다스리는 강국 중, 하나인 '문리버'. 한 여자가 와인을 홀짝이며 화려한 왕도를 쳐다보고 있었다. 숨을 들이킨 뒤 우아한 손짓으로 와인을 들이켰다. 입 안에서 퍼지는 달콤하면서도 쌉싸름한 그 맛을 음미하던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붉은 머리칼을 단아하게 올린 여자는 호화스러운 검은 코트를 몸에 두르고 있었다. 가느다란 몸선을 덮은 보랏빛 드레스 아래 프릴은 마치 고혹한 꽃을 연상시키는 것만 같았다. 왼손에 들린 파이프 담배를 우아하게 한 모금 들이키자 붉은 입술에서 연한 담배 연기가 흘러나왔다. 마치 중세 시대의 귀족 부인을 연상케 하는 여자는 와인잔을 탁자에 내려놓은 순간,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 와-"



그러자 문이 열리고 들어 온 여자는 어두운 표정을 가진 한 여자였다. 분홍의 올림머리. 붉은 눈동자를 가진 여자는 목례를 하곤 그녀에게 말했다.



"델타 여왕 폐하. 보고를 드리옵니다."



'문리버'를 다스리는 여왕, 레모네이드 델타.


그녀는 우아한 발걸음으로 걸어 와 천천히 여자의 앞에 섰다. 진한 아이라인과 유려하게 구부러진 쌍커플이 한 번 깜빡거리다 떴다. 그녀는 자애로운 미소로 그 여자에게 입을 열었다.



"그래. 그 실패작은 어떻게 되었지, 올리비아?"

"라 만차 대삼림으로 도망쳤사옵니다..."

"기대하던 전투력은 보여줬나? 너가 생각할 땐 어땠지, 올리비아?"



델타의 질문에 올리비아는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었다.



"현격히... 약하옵니다. 여왕 폐하의 기대에는 못 미쳤사옵니다."



그때였다. 델타는 쭉, 손을 뻗었다. 순간 올리비아라고 불린 여자는 찔끔 눈을 감았다. 손찌검이 날아들까 걱정이 되었지만, 그녀는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몸을 흠칫 떨자 델타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놈이 넘겨준 삼안의 바이오로이드 유전자도 별 것 아니네?"

"네, 폐하. 소녀 또한, 그렇게 느꼈사옵니다."

"그래. 알겠어. 가보도록 해."



델타의 말에 올리비아는 몇 걸음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델타는 그런 올리비아에게 은은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황급히 목례를 하고 도망치듯 집무실에서 도망쳤다. 그리고 그제야, 델타의 표정이 점차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미간에 주름이 생기기 시작했고, 생기 있는 입술을 터트려버릴 듯 물어버렸다.



"씨발... 씨발 씨발! 씨발! 씨발 역겨워! 역겨워 좆같다고 씨발! 내가! 이 내가! 저 하등한 기체한테 이딴 굴욕을! 씨발!"



그리고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을 내던지며 고함을 질렀다. 마시던 고급 와인잔 조차 냅다 내던졌던 그녀가 거친 숨을 몰아대던 그때였다. 별안간 그녀의 귓가에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목소리를 가다듬곤 천천히 허공에 외쳤다.



"수신, 발동."



델타의 손가락에서 푸른 빛이 반짝였다. 이내 그녀가 귀에 손가락을 대자, 그녀의 귓가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델타.]

"네, 회장님."

[바이오로이드 완벽 복원 작업은 어느 정도 진행되었지? 그리고... 그놈이 샘플로 준 삼안 바이오로이드 유전자들은 제법 쓸만하느냐?]

"... 송구스럽습니다만, 회장님. 아직 바이오로이드 복원 작업은 시간이 더 필요하다 사료됩니다. 아무래도 이 세계에서 캔 오리진더스트는 지구에 있던 오리진더스트보다 그 질이 다소 조악하기에 다운그레이드 정도의 성능을 보이고 있습니다."



델타는 상대방이 보이지 않으면서도 마치 앞에서 보고하려는 듯 몸을 연신 굽혔다. 잠시의 침묵 후, 노인은 델타에게 말을 이었다.



[델타.]

"네... 네 회장님!"

[현재 유일하게 우리만이 바이오로이드를 만들 수 있는 기술력을 갖추지 않았나? 너의 케스토스 하마스 정도라면 지구에 있던 바이오로이드 급의 성능은 낼 수 있지 않느냐. 게다가 마법까지 배울 수 있는 바이오로이드를 운용한다면... 고철덩이만을 운용하는 오메가 산업을 뛰어넘을 수 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이 델타,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미, 믿어주세요 회장님!"

[기대를 저버리지 않도록, 델타.]



순간 날 서린 노인의 목소리에 델타의 두 동공이 크게 커졌다. 웅웅거리던 잡음이 사라지자 손가락에서 들려오던 노인의 목소리도 멎었다. 그리고 델타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이내 물건들을 모조리 발로 차버리기 시작했다. 쿵, 쿵. 모든 걸 엎어버리고도 씩씩거리던 델타는 이내 다시금 손가락을 귀에 대곤 버럭 소리를 질렀다.



"발신, 발동!"



푸른 빛이 다시금 귓가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까 방을 빠져 나간 올리비아의 목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씨근덕거리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금 헬반도에서 사온 수인종을 모조리 분해기에 갈아 넣어. 지금 당장, 당장!"

[... 폐하. 지금... 분해기에 갈아넣는 오드리도, 테일러 언니도 피곤한...]



올리비아의 목소리 너머에선 끔찍한 비명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표정하나 변하지 않은 채, 델타는 다그치듯 소리를 질렀다.



"당장 갈아 넣어! 당장 당장 당장!"

[...]

"... 대답해. 당장 갈아버려!"

[...]



대답이 없자, 델타는 씩 웃곤 날이 선 목소리로 대답을 이었다.



"만약 오늘 안에 재료가 안 모아진다면... 니 자매들도 같이 갈아버릴 거야. 알겠어?"

[... 죄송합니다 폐하.]

"니가 목숨 줄 붙잡고 니 언니들이랑 살 수 있는 건 순전히, 문리버 회장님 때문이니까 감사하게 생각해. 알겠어?"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 발신, 종료."



다시 푸른 빛이 반짝이더니 올리비아의 목소리가 멎었다. 두손을 쥐고 부들거리던 델타는 애써 마음을 다독였다.



"괜찮아... 회장님은, 회장님은 내게 실망하지 않으셨을 거야... 회장님은, 내가, 내가 살렸잖아.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 델타가, 회장님을 살렸잖아. 그러니까... 회장님이, 그 자매년들 대신 나를 측근으로 두신 거잖아. 그렇지? 그렇잖아... 후우... 진정하자..."



몇 번이고 자문자답을 하던 델타는 애써 히죽히죽 웃었다. 그러면서도 델타는 몸을 튼 뒤 거대한 문리버 왕도를 보며, 그리고 찬란하게 햇살 아래 펄럭거리는 문리버 인더스트리의 사기(社旗: 회사 깃발)보며 탄성에 젖어가는 목소리로 외쳤다.



"회장님... 기대하세요... 이 델타가! 회장님께 이 세계를 드릴게요. 이 세계는 회장님과, 그리고 저의 것이 될 거랍니다... 오메가 그 오만한 년도, 감마 그 멍청한 근육년 보다, 그리고 회장님 앞에서도 뻣뻣하게 고개를 드는 그놈도 모두, 회장님의 발 아래 굴복시킬 겁니다... 문리버 회장님이, 다른 회장님보다 더 훌륭한 지고의 회장님이시란 걸, 이 델타가 보여드릴게요-"



그렇게 말한 델타는 잠시 느릿하게 방을 걷다, 이내 걸음을 멈추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여태껏 인외종으로 바이오로이드의 재료를 만들긴 했지만... 인간을 분해해서 재료를 얻는 방향도 생각해봐야겠어. 그 멍청한 왕국을 멸망시켜서, 통째로 갈아 바이오로이드 군대를 만드는 방향도... 나쁘진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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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카이 페로를 만든 분은 가구 장인 바르그 엄마셨던 거읾...

우리 바르그 엄마 이세카이 오기 전에 배신 당한 적 있어서 훨씬 가구 자매들한테 착해지셨잖아. 그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