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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제대로 배달 했습니다~ 수취인은... 호라이즌 분점의 천아 씨 맞으시죠?"


쾌활한 미소와 바닷바람을 싣고 착륙한 익스프레스의 손에서 택배 한 꾸러미를 받아 든 천아는, 익스프레스가 가지고 온 희소식에 비례하는 환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네! 항상 고마워요, 익스프레스 언니! 오늘 메이크업 안 들뜨고 잘 먹었는데요? 선크림 뭐 쓰는지 물어봐도 돼요?"

"어머, 후후. 천아 씨도 참~ 나중에 문자로 보내드릴게요. 저는 다음 건 가 봐야 해서 이만!"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수평선 너머로 사라져가는 익스프레스를 살갑게 배웅하고, 천아는 상자들을 찬찬히 살폈다. 오늘 치 식자재에 빙수 용 얼음까지 포함되어 있어 혼자 옮기기에는 조금 많아 보였다. 마침, 눈을 흘기며 이쪽을 지켜보는 장화가 눈에 들어왔다.


"우쭈쭈, 우리 고양이~ 거기서 뭐 해요? 배고파요? 까까라도 줄까요? 근데, 그 전에 언니가 지금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데..."

"얼씨구, 방금 딸랑대던 거 뭐냐? 진짜 토 나올 뻔 했다."

"우리 도도하고 잘나신 장화냥이한테는 없는 '사교성'이라는 거예요~ 왜, 너한텐 저렇게 안 대해 줘서 아쉬워?"

"지랄을 해라. 내 앞에서 딸랑거리면 진짜 패버리고 싶을 거 같으니까 하지 말고."

"그럼 니가 쳐 기어 나와서 택배 받든가! 하여튼, 둘 다 왜 택배 오면 어디 짱박혀있다가 가면 기어나오는 거야? 빨리 물건이나 옮겨!"


매번 혼자 택배를 받게 만드는 것엔 그래도 할 말이 없는지, 장화는 뭐라 혼자 꿍얼거리고는 상자를 옮겼다. 어느새 바르그도 처음부터 있던 것처럼 도착해서 상자를 눈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까지 쌓아서 들어올리고 있었다. 천아는 그 무게로 어떻게 그렇게 택배 올 때만 은밀하게 숨을 수 있는 지, 경이롭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해서 코웃음을 쳤다.


"킁킁, 음? 이거... 우리가 시킨 식자재가 아닌 거 같은데?"

"엥? 뭐? 그럴 리가..."

"과일이나 원두 냄새가 아니라, 맛있... 아니, 음. 밥이랑 고기반찬 냄새 같은 게 난다. 너희들 중 누가 따로 시켰나?"

"야, 장화!"

"나 아닌데?"

"잠깐 내려놔 봐."


천아는 눈쌀을 찌푸리며 바르그가 내려놓은 짐에서 냄새가 다르다고 한 박스를 빼냈다. 겉에 붙은 송장을 확인해 보니, 금세 답이 나왔다.


"어, 이거... 핫팩이 보낸 거다."

"뭐어?!"

"봐봐. '축, 호라이즌 분점 정식 오픈 환영.' 흐음~ 자기 때문에 오픈 밀린 게 미안했나 보지?"


사실, 엄밀히 따지면 쌍방과실이긴 했다. 실행범은 사령관이었다고 하더라도, 애초에 장화와 바르그가 그날 밤 사령관을 더 붙잡지 않았으면 컨디션 불량으로 한꺼번에 쉬느라 오픈이 늦어질 일은 없었을 것이니까. 물론, 방관하면서도 은근히 자기 이득을 챙긴 천아도 어느 부분에서는 공범이라고 할 수 있었다.


모두가 천아의 말로 인해 저절로 머리에 떠오른 그 날 밤의 격정에 사로잡혀 잠시 정지했고, 천아는 가볍게 헛기침을 해 상상에 빠진 둘을 끌어올렸다.


"흐, 흐흠. 뭐, 우리 똥강아지가 코에는 뭐 먹을 거 보낸 모양인데... 마침 점심시간이기도 하고, 볶음밥은 하도 먹어서 질렸으니까... 뜯어나 볼까?"

"뭐? 야... 내 볶음밥이 어때서?"

"동감이다. 사흘 째 점심으로 그것만 먹었더니 이젠 속에서 냄새가 올라오려 하더군."

"그럴 거면 니네가 점심 해! 밥 남기고 카페 식자재로 배 채울 거면! 주는대로 쳐먹지 못할 망정..."


장화의 투덜거림을 가볍게 묵살하고, 천아는 테이프를 깔끔하게 잘라내고 박스를 열었다. 포스트 카드 위에 깔끔한 필체로 사령관의 격려사가 적혀 있었다.


"무더운 여름, 고된 카페 일로 몸 상할 까 걱정이 되어 든든하게 먹을 한 끼 식사를 보냅니다... 몸은 이제 다들 괜찮아졌나요? 좋은 기운 받아갔으니, 번창하길 바랍니다... 추신, 제일 작은 통은 백아 몫이고, 제일 큰 통이 바르그 몫입니다... 오늘 아침 일찍 소완 주방장이 고생해서 조리해 주셨으니, 나중에 잘 먹었다고 전해드리는 거 잊지 마세요..."


담은 메시지 만큼이나, 도시락 통은 아직도 뜨끈했다. 천아는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정말, 뭔데. 핫팩..."

"주, 주인님 편지는 내가 보관할게."

"주인님의 마음이 담긴 도시락... 먹기 너무 아깝군... 이거, 난 영구보존 할 테니까 오늘도 그냥 볶음밥으로 하지."


얌체처럼 잽싸게 편지를 챙기는 장화와, 얼토당토않는 무리수를 던지는 바르그를 보니 그 뭉클거림도 싹 가셨지만.


"야, 이런 건 따뜻할 때 먹어주는 게 보낸 사람 성의를 생각하는 거야! 잔말말고 빨리 까고 인증샷 찍어서 핫팩한테 보내자. 나 마침 배고팠단 말이야."

"흠, 그래? 그런거 치곤 주인님께선 몇 년 전에 받으신 발렌타인 초콜릿까지 다 안 드시고 보관하시고 계시는 거 같던데..."

"그, 그건 예외일 거야."

"이거, 그 총주방장이 만든 건가? ...경쟁자로서 좋은 참고가 되겠네. 위장을 붙잡는 게 중요하다고 했으니까..."

"푸핫! 니가? 핫팩한테도 볶음밥만 만들어 주는 거 아니야?"

"이 씨팔련이!"

"조용히 해라, 식전에 주인님께 드리는 기도에 집중이 안 되지 않나!"


한 차례 실랑이가 끝나고, 천아와 장화는 먼저 도시락통을 열었다. 바르그는 기도한답시고 아직도 합장한 채로 웅얼웅얼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외고 있었기 때문에 기다리지 않고 먼저 먹는 게 나을 거 같았다. 


"와아..."


푸짐하면서도 알찬 메뉴 구성을 본 천아의 입술 사이로 저절로 감탄사가 흘러 나왔다. 아스파라거스 베이컨 말이, 닭가슴살 스테이크, 따로 담은 단호박 수프에 직접 만든 드레싱을 곁들인 시저 샐러드까지... 그리고, 무엇보다 시선을 빼앗는 것은 백아의 머리 모양으로 섬세하게 세공된 삶은 계란. 새빨간 눈은 체리 물을 머금은 한천으로, 갈라진 혀는 얇게 저민 당근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조각된 비늘 모양이 무너질 것 같아, 젓가락을 대기에도 무서웠다.


수십 년 칼밥을 먹어 온 천아였기에, 그 솜씨에 담긴 숙수의 내공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말해봐야 입 아픈 고수였다.


장화도 넋을 놓고 흰쌀밥 위에 흑미로 수놓여진 흑장미를 쳐다보고 있었다. 흑미에서 나온 밥물이 배경에 깔린 백미의 색깔을 침범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밥을 따로 따로 짓고 하나씩 옮기는 번거롭고 수고스러운 작업을 해야 했을 것이다.


괜시리 질투가 났다. 새삼스레 내가 일편단심 바라보고 있는 그의 주변에는 이렇게나 매력적인 여자들이 많다는 것을 절감했기 때문일까?


천아의 입에서 비뚤어진 말이 흘러나왔다.


"보긴 좋지만, 과연 먹기에도 좋을까?"

"...뭐?"

"너도 기록 봐서 알잖아. 총주방장 전력."

"...하지만, 지금은 안 그러는 거 같던데."

"모르지? 그때 한 번 족쳐지고 다시 기회만 노리고 있는 걸지.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이 어려울까?"

"...갑자기 왜 그러는데?"


훅 다가온 장화의 일깨움에, 천아는 추하게 뒤틀린 자신의 속내를 깨닫고 입을 닫았다. 그리고는, 그 추악한 생각을 몰아내려는 듯이 일부러 큰 목소리를 내며 아무소리나 주워섬겼다.


"아, 몰라! 걍 그 아줌마, 맘에 안 들어! 그 허여멀건한 머리칼, 무슨 생각 하는 지 모르겠는 뱀 같은 눈깔, 말투도 행동도 음흉함이 뚝뚝 떨어지고. 완전 남자 잡아먹을 상이잖아?"

"..."


장화는 복잡미묘한 눈으로 천아를 쳐다보았다. 자기가 잘 알고 있는 누구랑 완전 똑같았기 때문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지금 자신 앞에서 뒷담을 열나게 까고 있는...


"...뭘 꼬라봐?"


괜히 뜨끔한 천아는 장화에게 역으로 시비를 걸었다. 장화는 흐린 눈으로 대충 얼버무렸다.


"아니, 아무것도. 밥이나 먹자."

"야, 똥개! 그러다가 있던 밥도 다 달아나겠다! 그쯤 하고 먹자!"


기분 좋은 해풍이 왁자지껄한 카페 호라이즌의 야외 테라스를 한 바퀴 휘감고, 먹음직스러운 음식 냄새를 싣고는 저 바다 너머로 흘러갔다.



**



사령관은 간만에 부상한 오르카 호의 선미에서 눈을 감고 바닷바람을 맞고 있었다. 습하고 짭쪼름한 소금기 속에서, 어딘가 구수하면서도 군침 도는 냄새가 한 가닥 섞여 들어왔다. 바닷바람과는 어울리지 않는 그 냄새에 사령관의 입가에 웃음이 피어올랐다. 소완이 점심 준비를 마칠 시간이긴 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사령관의 주머니에서 발신기가 울렸다. 사령관은 패드를 꺼내 받았다.


"어, 소완. 나 지금 옥상이야. 곧 밥 먹으러 내려갈게."

"저, 주인... 그것이 아니오라... 외람되오나, 소첩이 큰 실수를 했사옵니다..."

"응? 뭔데?"

"주인께서 부탁하셨던 그 찬합... 가장 큰 육고기 덩이가 있는 세 층짜리 말이옵니다..."

"아, 바르그 꺼? 그게 왜?"

"하치코 양이 펜리르 양 것과 헷갈려서 잘못 가져가 버렸사옵니다..."


뭐야, 심각하게 무게 잡은 것에 비해 별 거 아니잖아? 사령관은 문을 열고 계단을 타고 내려가며 심드렁하게 답했다.


"에이~ 난 또 뭐 별거라고. 둘이 식성이 비슷해서 도시락 바뀌어도 맛있게 먹을 거야. 내가 나중에 설명하면 되지."

"저... 펜리르 양은 오늘 출격 예정이 없어서... 바르그 양에게 전해진 도시락은 아마... 비어 있었을 것이옵니다."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사옵니다..."


바르그에게... 빈 찬합이 갔다고?


"씨발 좆됐네."


사령관은 통신을 끊고 다급하게 다시 옥상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어지러이 여러 회선을 호출하기 시작했다.


"...당장 항구 봉쇄하고, 알바트로스 불러. 빨리! 콘스탄챠, 콘스탄챠? 호라이즌 분점에 연결해 줘! 알바트로스! 나 지금 잠수함 위니까, 빨리 나 태우고 호라이즌 분점으로 가 줘!"



**



달칵.


"...오르카 저항군에 투신한 지 어언 1년... 더는 주인님의 녹을... 먹을 수가 없겠구나..."

"뭐야, 얘 왜 이래?"

"알겠습니다, 주인님.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야, 똥강아지! 너 어디 가?"

"주인님."

"뭐야, 도시락 비었네? 핫팩이 잘못 보냈나본데? 쟤 설마 이것 때문에 이지랄 하는 거야?"

"이러실 필요까진 없으셨습니다."


풍덩!


"야! 야! 씨발 쟤 막아!"

"아니 이게 갑자기 미쳤나! 어푸! 어우 씨발 존나 가라앉네! 야! 너 왜 이래!"


뿌리치는 손과 붙잡는 손길로 거센 물보라가 사방으로 흩뿌려지고, 하울링과 같은 바르그의 울부짖음과 두 소녀의 새된 고함이 해변을 울렸다. 다행히도 바르그의 작은 신장으로도 다 잠길 깊이까지는 거리가 있었기에, 장화와 천아는 종아리까지 오는 물에서 바닥에 엎드려 빠져 죽으려고 울고불며 발광을 하는 바르그를 간신히 뜯어말릴 수 있었다. 멀리서 보기엔 웃기지만, 가까이서 보기엔 참으로 웃지 못할 몸싸움이었다.


"이거 놔라! 놔... 으흐어어어어어엉~! 주인니이이임~~!"

"야! 핫팩한테 전화해보면 될 거 아니야! 어우, 힘은 또 쓸데없이 드럽게 쎄네! 야, 니가 저쪽 잡고 있어!"

"흑, 흐윽, 훌쩍, 흐아아아아앙!!! 나, 나르흘, 이 이상, 추, 추하게 만드흘지, 마아... 으아아아앙!!!"

"뭐래는거야, 씨발! 너 지금도 존나 추하거든? 더 추해질 곳도 없거든? 야, 쫌 진정해 봐!"


해변에서의 난데 없는 물놀이는, 사냥개 셋이 점심 대신 바닷물로 배를 반쯤 채웠을 즈음에 알바트로스와 함께 하얗게 질린 얼굴로 도착한 사령관 덕에 끝났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