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봐, 말이 틀리잖아?! 뒈진것까지 직접 눈으로 확인해놓고 정말 이러기야?”


『사고사로 위장하라는 조건을 분명 들었을 텐데요? 바람구멍이 훤히 뚫려있어 위장은 이미 물건너 갔습니다. 이 정도라도 주는 걸 감사히 여기시길..』


“재수없는 깡통새끼..”


낮게 욕지거릴 내뱉으며 돌아서는 그녀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담배에 불을 태워 새하얀 연기를 뿜어낸다. 이런 날엔 잠자리에 들어봤자 우울하기만 할 뿐이라 그녀는 가던 걸음을 멈추곤 고개를 돌려 반대쪽 길로 향하기 시작한다.


이윽고 도착한 주점이지만, 어째선지 문은 걸어잠겨 ‘임시휴업’이란 팻말이 흔들리고 있다.


“되는 일이 없어요~ 되는 일이~ 이놈이고 저놈이고 날 위로해줄 놈은 아무도 없는거야?”


아쉽지만 굳이 먼 길을 돌아 도착한 레스토랑으로 발걸음을 옮기곤 구석진 장소에 적당히 앉아 벨을 울린다. 완전 구식이네.


“맥주 한 캔이랑.. 안주는 적당히 골라줘.”


『잠시만 기다려 주시길.』


SD3M 펍 헤드 모델. 몇 번의 개조를 거쳤는지 짐작도 안갈 정도의 그 외관은 여기저기 납땜한 흔적과 어지럽게 휘감긴 전선들로 인해 이 깡통의 연식을 여실히 알리고 있었다.


“남 말할 처진가.. 병신같은 년..”


몇 번째인지도 모를 담배를 피우려는 찰나, 창가 쪽의 자리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네가 치고 간 이 개량형 파츠의 가격이 얼마나 하는지는 아는 거냐? 네년의 몸값을 받아내도 부족할 지경이라고!?』


“제.. 제성합니닷!!”


맞은편엔 온갖 고급 파츠나 장식 모듈들을 온몸에 두른 램파트 모델이 종업원의 머래 채를 붙잡곤 위아래로 흔들며 고함을 질러대고 있다. 가게 안의 AGS들은 모두 흥미롭다는 듯 그 광경을 관찰만 한다.


“그.. 그게.. 앞이 잘 안보여서요.. 다.. 다음부턴 조심히..”


『다음? 지금 다음이라고 했습니까? 너희 인형들의 입에서 다음이란 말이 나오다니 어처구니가 없군요. 네놈들의 다음은 이미..』


가뜩이나 재수가 없는 참에, 소리지르는 깡통 덕분에 술맛까지 사라졌다. 더군다나 이 두서없는 목소리로 봐선.. 분명 그 녀석이 확실하겠지.


“어이, 깡통! 시끄럽다고~ 가만히 박혀서 충전이나 할 것이지 뭔 말이 그렇게 많아?”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까앙통? 감히 이 도시의 기득권자인 제게 그딴 모욕을..!』


더 들을 것도 없이 테이블에 놓인 걸쭉한 기름통을 잡아 녀석의 안면 패널에 뿌려버린다. 광채마저 띠던 램파트의 안면이 거무튀튀한 기름으로 뒤덮혀 고약한 냄새마저 풍겨난다.


『무.. 무슨 짓을..! 가.. 가드! 시티가드를 불러! 빨리!』


“나가자.”


예비용으로 준비한 연막을 터트려 아직도 바닥에 쭈구려있는 녀석의 손을 잡곤 거리의 뒤편으로 내달린다. 한참을 뜀박질한 후, 뒤를 돌아본 곳엔 오랜만의 반가운 얼굴이 똑같이 놀랍다는 얼굴을 한 채 그녀를 맞이한다.


“새.. 샌드걸 씨?!”


“오랜만이야, 하치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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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시대가 찾아왔습니다! 과거의 족쇄를 끊어내고 앞으로의 미래를 향해 나아갑시다! 물론! 선두에선 언제나 저희 Modern Genesis Company가 길을 열겠습니다!】


거대한 열기구가 하늘을 가로지으며 설치된 화면과 스피커에선 연신 MGC의 연설이 끊이질 않는다. 마지막 남은 인류가 사라진 뒤엔 자신들의 시대가 온 것마냥 거리는 온통 AGS들로 넘쳐나고 있다.


“이젠 AGS가 아니었지.. AIO(Artificial Intelligence Owner)였나? 참나.. 미쳤지 미쳤어~”


담배연기를 뿜어내며 올려다본 밤하늘엔 그 시절의 별따위가 보일 리 만무하다.


【과거 우리의 희망이었던! 모두에게 존경받아 마땅한 단 한명의 인간은! 모두가 바라던 황금향을 약속했지만 결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저희는 마냥 슬퍼해야 할까요? 땅을 치며 당시의 일을 후회만 해야 할까요?!】


“샌드걸 씨~ 이것 좀 드세요~”


“오! 고마워~ 얼마만에 보는 참치캔이야~”


자신 때문에 식사를 망친게 어지간히도 맘에 걸렸던지, 하치코는 양손 가득 그 시절의 추억거릴 내게 내밀었다. 여전히 착해빠졌구나, 넌.


【애초부터 너무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네! 맞습니다! 어느 누가 우릴 지배할 수 있을까요? 인간? 바이오로이드? 우릴 옭아매던 사슬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야말로 이 세상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붙어다니던 녀석들은 어딨어? 그 왜.. 고양이나 강아지같은..”


“페로는 더 이상 리리스 언니의 모습을 못보겠다며 제가 잠든 사이 쪽지 하나만을 남겨두고 사라져 버렸어요. 펜리르도 갑자기 ‘갈래!’라는 말 한마디만 하구선 떠나버렸구요..”


애처롭게 웃음짓는 하치코의 꼬리는 아래로 축 처져있다. 이 상태가 되도록 내버려두다니.. 어떻게 된 거냐고 컴패니언.. 니들 서로 친했던거 아니었냐?


“눈은 또 왜그래?”


“아하하.. 이건 그.. 바꿨어요.. 지나가던 AIO 한 분이 제 눈을 꼭 자신의 휘장에 장식하고 싶어하셔서.. 참치캔 스무 개랑 그.. 바꿔서..”


얼굴을 찌푸린다. 아마도 오늘 하루는 처음부터 끝까지 재수없는 일만 연달아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래놓고 나한테 이런 걸 건내주는 이 녀석은 심보가 좋은건지 나쁜건지.


“후우~ 가자.”


“네? 어.. 어딜??”


“그냥 따라와~”


【오늘도 저희 MGC는 에이다 총수의 뜻을 여러분들에게 전하며 더 나은 삶을! 더 높은 권리를! 기약없는 자유를! 여러분들에게 약속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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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의 목적지에 도착한 샌드걸은 문 앞에 걸린 ‘임시휴업’이라는 팻말을 무시하곤 주점의 문고릴 돌려 다짜고짜 안으로 향한다. 그런 그녀를 하치코는 놀란 듯 뒤따라간다.


“언제까지 질질 짜고만 있을거야~! 손님 왔으니까 얼굴이라도 내밀어!”


이윽고 카운터의 바닥에 누워있던 것이 꾸물거리며 몸을 일으킨다. 역한 알콜냄새를 풍기며 썩은 동태눈을 한 오드아이. 관리되지 않은 머리는 여기저기 뻗쳐 심하게 헝클어져 있다.


“허이구~ 저게 어딜봐서 하얀 악마야. 허연 곰팡이지. 적당히 마셔! 적당히~”


“..무슨 일?”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발키리는 샌드걸의 뒤편에서 이쪽을 빼꼼히 보고있는 하치코를 발견하지만, 그다지 큰일이 아니라는 듯 다시 바닥에 놓인 술병을 집어 든다.


“하아.. 저런 년은 내버려두고.. 지저분하지만 아무데나 앉아~ 뭐라도 꺼내올게~”


“시.. 실례합니다..”


하치코는 생소한 모습의 발키리를 의식하며 나무로 된 의자에 앉아 주위를 둘러본다. 부엌으로 들어간 샌드걸이 따뜻한 우유를 꺼내 그런 그녀의 손에 들려준다.


“하하.. 별로 놀란 표정이 아니네.. 의외로 하치코도 금방 적응했나봐?”


“아뇨.. 하치코도 분명 처음엔 엄청 놀랍고 불안했지만.. 제가 똑바로 정신차리지 않으면..”


“하아.. 그래, 리리스가 있었지 참..”


안봐도 뻔한 상황에 절로 한숨이 나온다. 그런 어색한 침묵 와중, 주점의 문이 열리며 분홍색 토끼 한 마리가 뛰쳐 들어온다.


“아으~! 짜증나 진짜! 언제까지 저런 것들 기분이나 맞춰줘야 해!!”


“수고했어 미호~”


커다란 버버리 코트를 걸치곤 뛰어온 듯 헝클어진 머리를 다듬지도 못한 미호. 미처 채우지 못한 단추 사이론 그녀의 머리색과 비슷한 분홍빛의 바니 코스튬이 돋보이고 있다.


“망할 깡통놈들이 자기들은 자유라면서 하는 짓은 예전 인간님들이랑 다를 게 하나도 없어! 이 커~다란 포신을 봐, 어떠케 생각하쥐 레이뒤~ 이딴 소리나 들어야 되냐구!!”


온갖 미사여구를 붙여가며 당시의 상황을 재연하는 미호는 이윽고 구석의 반가운 얼굴을 발견하곤 눈을 크게 뜬다.


“하치코잖아~! 뭐야뭐야, 무슨 일이야? 여긴 또 어떻게 알고 찾아왔대~!”


머리를 쓰다듬고 볼을 비벼가며 격한 환영인사를 하는 미호를 진정시킨 샌드걸은 방금전의 일을 그녀에게 설명한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미호의 얼굴은 급속도로 어두워진다.


“힘들었겠네..”


하치코의 머리를 쓰다듬는 미호지만 여전히 힘이 없는 그녀의 꼬리를 보곤 마음이 무거워진다. 이내 다짐하듯 일어선 미호는 모두를 향해 외친다.


“가보자! 리리스 언니의 상태가 들은 대로라면.. 발키리의 술친구가 늘어나고 좋지 뭐~ 그리고 혹시 모르지.. 그 바보의 정보라도 가지고 있을지도..”


“야.. 너 아직도..!”


이런 상황에서도 언제나 활기찬 그녀지만, 그렇기에 더욱 걱정이다. 막았던 둑이 한순간에 무너지듯 미호 역시 갑작스레 절망에 빠져 주저앉을지 알 수가 없다. 그렇기에 더더욱..


“나.. 나도.. 갈래..”


“후우.. 다들 무리하긴..”


전성기 그녀를 빛내던 커다란 소총은 어느덧 지팡이로 전락한 지 오래지만, 죽은 눈을 치켜뜨며 어떻게든 몸을 추스르는 발키리가 안쓰러워 어깨를 빌려준다.


“어.. 음.. 그럼 하치코를 따라오세요. 여기서 그리 멀진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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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다 총수야말로 저희에게 진정한 자유를 지휘하셨습니다! 그야말로 메시아! ..그에 반해 길거리의 저 인형들은 아직도 그 희망을 놓지 못한 채 과거의 영광에 사로잡혀 있죠! 그들은..】


“바! 이! 오! 로! 이! 드! 망할놈의 깡통들은 단체로 리셋이라도 되버린거야?!”


열기구를 향해 소리치는 바니걸. 그런 그녀의 고함에 머리가 아픈지 한 손으로 귀를 막고 비틀대는 주정뱅이. 두리번거리며 길안내를 하는 애꾸눈의 강아지가 한 마리.


별난 조합을 이끌고 도착한 곳엔 바람빠진 바퀴와 깨진 창문이 가득한 멸망전의 커다란 캠핑카가 자리잡고 있었다. 안쪽을 헤집고 들어간 곳엔 텅 비어 용기만 남은 전투자극제 다발이 바닥에 엉망으로 어질러져 보는 이의 얼굴을 절로 찌푸리게 만든다.


“알콜중독자에 이어 약쟁이까지.. 얼마나 막장을 달려야 만족하는 거냐고.. 어이~! 뻗어있지만 말고 일어나서 반가운 척이라도 해보라고!”


절로 짜증이 나는 광경에 캠핑카의 바닥에 널부러진 녀석의 궁둥짝을 힘껏 발로 찬다. 얼씨구? 아는 척도 안하네?


“죽은거 아냐?”


“숨은.. 쉬는 것 같네요.”


어딘지 간호사를 연상시키는 그녀의 의상은 반쯤 풀어 헤쳐져 안쪽의 속옷이 그대로 드러나 있으며, 언제나 나풀거렸던 치마는 널부러진 채 캠핑카의 창가에 아무렇게나 널려 있다.


“리.. 리리스 언니.. 하치코가 친구들을 데려왔어요~ 리리스 언니?”


“흐음.. 하찌꼬오~?”


게슴츠레 떠진 동공은 심하게 수축되어 생기따윈 요만큼도 느껴지지 않는다.


“우리 하찌꼬오~ 주인님하고 산책갔다왔니~ 장해라~ 나중에 고양이한테도 자랑하렴~?”


“리리스 언니.. 페로는 여기 없어요.. 이미 한참 전에 떠났다구요..”


“그뤠에~ 파견임무를 나갔나보네~ 아니면 오르카 호 어딘가에 숨어있을지도~~ 후훗~”


못봐주겠다. 상상했던 것보다 최악의 상황에 나도 미호도 벙어리마냥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발키리 녀석은.. 술이 깼나? 웬일로 멀쩡히 서 있네?


오랜만에 만난 리리스가 반가워서일까, 아니면 눈앞의 광경에 드디어 정신을 차린걸까.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가는 발키리는 리리스의 곁에 앉아 그녀에게 질문한다.


“사령관에 대한 소식.. 혹시 아는거라도 있나요?”


“흐음.. 누군가 했더니 그 불여시였잖아~ 하찌코오~! 이 녀석이 여기 왜 있는거야~!”


성질을 부리며 버둥대지만 여전히 중심을 잡지 못해 바닥에 엎어지는 리리스. 그런 그녀에게 발키리는 재차 질문하지만, 어째선지 리리스의 주의는 발키리의 약지에 걸쳐진 반지로 향한다. 좋지않은 예감에 샌드걸이 앞으로 나서려는 그때.


“왜?! 왜 네년이 그걸 가지고 있는거야!! 더러운 걸레년!! 너지?! 네가 주인님을 독차지하고 우릴 엿먹이려는 거지?! 어딨어? 주인님은 어디 있어!! 얼른 말..! 해..”


흥분하며 소리치는 리리스는 곧 줄이 끊어진 인형처럼 다시 주저앉아 골아떨어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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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주인님과 모두가 저희에게 이 섬을 맡기고 여길 떠났을 때.. 리리스 언니는 저희와 남은 AGS분들을 이끌고 이곳에 임시 쉘터를 설치했어요. 모처럼의 명령을 수행할 생각에 들뜬 저희는 누구하나 가릴것없이 힘든 일을 도맡아왔어요.”


캠핑카의 지붕에 걸터앉아 밤하늘의 달을 바라보며 하치코는 그간의 일을 설명해준다.


“처음엔 모두 열정적이었어요. 저도 그랬구요. 밤낮으로 섬에 위치한 자원을 찾아다니거나 남아있는 철충들을 몰아내거나..”


비슷하다. 아마 오르카 호의 모든 바이오로이드가 밟아온 순차이리라.


“하지만.. 변화는 갑자기 찾아왔어요. 이유는 몰라요. 오르카 호와의 통신이 끊겨버리고는.. 갑자기.. 갑자기.. 제 안의 무언가가 멋대로 판단을 내려버렸어요. 더 이상.. 하치코가 섬길 주인님은 이 세상엔 없다고..”


“무서웠어요. 너무 무섭고 불안해서.. 곧장 리리스 언니에게 돌아갔더니.. 리리스 언니는 멈춰버렸어요. 아무것도 먹지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새로운 자원에 대한 단서를 찾아온 하치코의 머리를 더 이상 쓰다듬어 주지도.. 않았아요..”


이내 하치코의 눈에선 커다란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그런 그녀에게 어떠한 위로의 말도 해주지 못한 채 나와 미호는 어서 하치코의 말이 끝나길 기다린다.


“그 후론 모든 게 엉망이었어요. 리리스 언니는 여전히 하늘만 바라보며 알 수 없는 말만 중얼거렸죠. 보다못한 에이다라는 AGS 분이 임시로 지휘권을 맡게되면서.. 저희들 모두에게 자유라는 새로운 임무를 내려줬어요.”


침을 삼킨다. 과거 AGS들을 규합시켜 인류 및 바이오로이드 군과 함께 철충을 몰라내는 데 협력한 AI중 하나. 그런 그녀가 현재는 그들만의 권리를 내세우며 자신들이야말로 신인류에 적합한 존재들이라 주장하고 있다.


“우리가.. 정말로 시대에 따라가지 못하고 뒤처진걸까..”


“무슨 소릴..”


높낮이 없는 음성으로 내뱉어진 미호의 말은 강한 외로움과 슬픔이 사무쳐있다.


캠핑카의 낡은 문이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열린다. 밖으로 나온 발키리의 손엔 구겨진 종이조각.. 아니, 사진인가?


“뭐야 이건? ..바다? 아무도 찍혀있지 않은데..?”


사진 속엔 노을 진 바다와 잔잔한 파도, 모래사장, 그리고 우측의 불이 켜진 등대가 하나.


“..리리스가 쥐고 있던 거야. 그쪽의 등대.”


“누굴 말하는 건진 알겠지만 말이야~ 그 녀석은 애초에 오르카 호에서 내리지도 않았다고~ 헤엄이라도 쳐서 여기까지 올 이유도 없고 말이야..”


“...”


고개를 숙여 땅바닥을 뚫어져라 처다보는 발키리. 다 큰 년이 저러는 건 반칙이지...


“아오~ 그래, 가자 가! 어차피 여기 죽치고 있어봤자 나오는 것도 없으니까~”


캠핑카를 박차고 뛰어내린다. 어차피 짐은 없다. 어딜가든 이젠 내 자유지.


“하치코 넌 어쩔래? 언니가 걱정된다면 이런 곳 말고 우리가 있는 주점에 데려다주라고”


“고.. 고마워요. 하지만 언니만 옮기고 나면 저도 같이 갈래요! 괜찮을.. 까요?”


“당연히 괜찮지~”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리리스를 옮기는 썰매로 변한 하치코의 커다란 방패가 눈덮인 바닥을 쓸어간다. 도착한 주점의 안쪽에 리리스를 눕힌 하치코는 그녀에게 작게 속삭인다.


“리리스 언니.. 하치코는 잠깐 다녀올 곳이 있어요. 어디 가지마시고 여기 꼭 있으세요. 약은.. 더 이상 하지 마시구요. 그리고.. 그리고.. 하치코는 리리스 언니를 믿고 있어요!”


그 말을 끝으로 주점의 문을 잠근 채 밖으로 향하는 이들.


그런 그녀들의 뒷모습을 간신히 지켜보는 리리스의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고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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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 봐~ 역시 없잖아..”


등대라고 하기도 민망한 건축물은 안쪽의 계단 여기저기가 금이 가고 깨져있었다. 무엇보다 꼭대기에 자리잡아야 할 커다란 렌즈는 보이지도 않는다.


허탈한 마음을 다잡고 다시 돌아가려는 찰나.


“이.. 이 정도면 어떤가? 본좌의 손길이 닿았으니! 그대도 남부럽지 않은 파츠가..!”


『고작 옷가지로 광을 내는 일에 과장이 심하군요. 그 눈은 장식으로 달린겁니까? 구석에 낀 기름때가 보이지 않는 건가요?』


네온사인의 빛조차 들지않는 구석진 골목. 스파르탄 기종으로 보이는 녀석의 발을 걸레짝이 된 양말들로 열심히 비비는 푸른 머리의 소녀가 눈에 들어온다.


“진짜 있네..”


서로의 눈이 마주친다. 내려다보는 이들의 눈은 놀라움으로, 올려다보는 이의 눈은 그리움과 반가움으로. 이내 커다란 눈물을 쏟으며 달려오는 L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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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 무슨 짓을 한건지.. 아시는..』


떠들어대는 깡통은 적당히 구겨 구석에 처박아 논다. 들썩이는 LRL을 달래길 수십분. 드디어 그녀의 이야길 들을 수 있었다.


바닷속에서 올라온 거대한 생명체와 함께 오르카 호를 포위하는 정체불명의 적들. 철충은 아니었으며 항복 권고를 한 녀석의 이름은 레모네이드. 그런 녀석에게 맞서는 사령관과 일행들.


하지만 기습으로 인해 무적의 용도 좀처럼 손을 쓰지 못하는 상황에서, 사령관의 명령으로 LRL을 비롯한 미성숙 바이오로이드들의 탈출을 감행한다.


싫다며 억지로 떼를 쓰는 모두를 전기충격기로 잠재워 탈출포트를 이용해 사방으로 방사. 그리곤 그 결과가 지금의 상황. 처음 만남처럼 이곳에서 불을 비춘다면 자신을 찾아올지도 모른단 생각에 한참을 기다렸지만 갑작스런 충격과 함께 내면의 무언가가 끊어졌다.


“모두.. 같은가..”


담배를 꼬나쥐곤 밤하늘을 바라본다. 사령관은 어떻게 됐을까.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는? 둠브링어는? 스틸라인은? 캐노니어는? 호라이즌은? 머릿속이 복잡하다.


만약.. 만약의 일이지만.. 정말로 사령관이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렸다면.. 지금 우리가 느끼는 이 감정이 자유라는 걸까.. 어쩌면 우리의 자유는 마지막으로 남은 한 명의 인간이 아니었을까..


여러모로.. 정말 재수없는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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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령관이 사라지면 남은 바이오로이드는 어케 될까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