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으으음... 이걸 어떻게 말해줘야.. 아니 애초에 이걸 대체 뭐라고 해야 하지?
오르카 최고의 두뇌,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과학자인 알버트 아인슈타인과 존 폰 노이만과 견줄만한 사람인 닥터는 사령관이 내린 한 가지 과제에 쩔쩔매고 있었다. 그것도 근 한 시간 째.
- 저기.. 닥터야? 그 정도까지 신경 써 줄 필요는 없어..
- 오빠 조용! 지금 생각하고 있잖아! 으으..
처음에는 오기가 생겨 닥터에게 부탁한 사령관은 닥터가 할 일을 미루고 자신의 부탁에 답해주기 위해 오르카 호 한켠에 마련된 도서관의 모든 인문학 책을 꺼내 읽.. 아니 분석하는 것을 보고 자신이 폐를 끼치는 것 마냥 생각이 들은 것이다. 두 사람이 옥신각신 하는 한 편, 도서관을 자신의 은밀한 휴식처로 생각하던 하르페이아는 때 아닌 소동을 호기심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 주제에 대해 골돌히 생각해보던 하르페이아의 뇌리에 무언가 번쩍하고 생각났다.
- 음.. 사령관, 닥터?
- 어? 하르페이아? 미안해 바로 나갈게! 닥터야 이러지 말구 이제 가자.
- 내가 모르는 게 있을 수는 없어! 오빠 이거 놔!
닥터는 악에 받친 나머지 이제는 자신을 잡아당기는 사령관의 손을 뿌리치면서 반 실성상태로 떼를 쓰기 시작했다. 그런 닥터에게 하르페이아는 천천히 다가가 손을 잡고 지긋이 말을 건넸다.
- 닥터야. 언니가 되게 좋은 생각이 있는데 한 번 들어볼래? 근데 그 생각을 실행하려면 닥터의 힘이 엄청 필요한데 도와줄 수 있지?
- 으응? 어..물론이지 언니가 그런다면야.. 그런데..
- 괜찮아. 애초에 사령관이 원하는 설명을 하는 건 우리 바이오로이드들에게는 어려워. 아예 없는 개념이니까 말이야. 닥터가 아니라 누가 오더라도 힘들걸? 무엇보다도 닥터는 그런 것보다 더 어려운 걸 엄청 많이 알고 있잖아.
- 그으래? 뭐 내가 다루는 게 좀 어렵긴 하지! 히히. 좋아! 언니 말대로 할게. 뭘 도와주면 되는 거야?
- 그건 말이야. 닥터의 연구실에 있는…….
그 와중 사령관은 하르페이아의 리더십에 감탄하고 있었다. 닥터를 추켜세워 주면서 이 소동을 잘 잠재운 하르페이아의 그것은 내심 하르페이아를 향한 존경심 비슷한 것을 느껴지게 만들었다.
‘역시 사람은 책을 많이 읽어야 하나.’
- 사령관? 뭐해 빨리 따라와~.
- 어? 어어 갈게 갈게.
하르페이아는 연구실 구석에서 사령관이 이전 실험기지에서 철충과 싸울 때 쓰던 가상현실장치를 가져와 사령관과 닥터, 그리고 방법을 찾았다는 소식을 듣고 온 샬럿, 아르망, LRL이 모여 있는 연구실 중앙 테이블로 가져와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 하르페이아 언니? 그런데 이걸로 뭘 하려구?
닥터가 하르페이아를 잘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 닥터야, 멸망 전 인간님들이 엔터테인먼트적 요소와 교육용 요소 등으로 제작한 가상현실세계가 있다는 거 알고 있지?
- 응. 당연하지 내가 누군데~. 그런데 그게 왜?
- 내가 읽었던 책에서 찾은 건데 인간님들의 역사에서 처음 ‘자유’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사건은 ‘프랑스’라는 나라에서 일어난 혁명이었대. 그런데 인간님들도 그 사건을 생생하게 체험해보고 싶으셨나봐. 가상현실세계 중에 프랑스 혁명을 다루는 프로그램이 있더라구. 그래서 이걸 이용한다면 우리 모두 ‘자유’라는 걸 알 수 있지 않을까?
확실히 일리 있는 말이라고 사령관은 생각했다. 멸망 전 인류, 특히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온갖 고증을 따지고 역사적 사료를 집어넣어 만든 가상현실세계 프로그램은 현실과 똑같은 퀄리티를 자랑했다. 이 때문에 사령관 자신도 처음 가상현실에 들어갔을 때 현실과 너무나도 똑같은 감각을 느낄 수 있는 것에 놀라지 않았던가? 사령관은 신이 나서 말했다.
- 그러면 빨리 그걸 이용해서 다 같이 그 사건을 체험해보자!
- 어.. 오빠? 이런 말 하고 싶지는 않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어.
닥터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 응? 무슨 문제인데?
- 장치가 두 개 뿐이야. 오빠가 예전에 썼던 거 하나, 그리고 스페어로 쟁여둔 거 하나. 그래서 나머지 4명은 여기 있는 모니터로 봐야 돼. 참고로 장치는 해당 회사제조시설에서 만들기 때문에 우리 오르카 호에서 바로 뚝딱뚝딱 만드는 건 불가능해.
- 아앗...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하르페이아가 말했다.
- 그.. 사령관? 한 가지 문제가 더 있어...
- 으응?
- 프로그램이 프랑스어뿐이야..
그렇다. 온갖 전문 인력과 자금을 갉아 먹는데다가 사용자도 별로 없는 역사 시뮬레이션을 자선사업 하듯 밀고나갈 수 있는 것은 오직 해당 국가의 관공서뿐이었다. 그런데 관공서가 왜 돈을 더 들여서 외국인을 신경 쓰겠는가? 엔터테인먼트 시뮬레이션이라면 모를까.
- 그렇다면~ 소신이 들어가 볼 수밖에 없겠네요~.
정적을 깨고 샬럿이 능청스럽게 말했다. 사령관은 아쉬웠지만 어떻게 하랴. 사령관이 쓸 수 있는 언어는 오직 모국어뿐이었고 애초에 바이오로이드와 자신은 뇌파를 이용하여 언어를 초월한 것일 뿐 해당 바이오로이드의 모국어를 배운 것은 아니었기에 시뮬레이션 안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연구실에 있는 6명 중 오직 샬럿과 아르망뿐이었다.
- 아르망?
- 네? 폐하? 왜 부르셨나요?
- 살럿이랑 같이 시뮬레이션에 들어가 봐 우리 걱정은 말구.
- 하지만 소신이 가면..
- 괜찮아 우리는 여기서 모니터로 지켜보면 되니까. 오랜만에 고향 구경한다고 치고 둘이 잘 다녀와.
- 네.. 폐하..
아르망은 풀이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내심 좋아하고 있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자신은 한 번도 자신의 모태가 된 프랑스를 가본 적이 없었고 멸망 전 인류의 모습도 보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사령관을 향한 아르망의 마음이 작다는 것은 아니지만 사령관과는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앞으로도 쭉 같이 있을 수 있었지만 이런 기회는 자신이 닥터에게 가서 사정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기회였고 아르망 자신도 닥터에게 굽신굽신하기에는 체면이 따라주지 않았기에 사령관의 제안을 좋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 자 그러면 이제 시뮬레이션 시작한다! 샬럿 언니랑 아르망 언니 둘 다 실제로 가는 건 아니지만 몸 조심해! 시뮬레이션 안에서는 모든 오감이 작동하니깐!
닥터는 장치를 쓴 두 사람에게 주의사항을 얘기하고 연구실 찬장에서 과자와 탄산음료를 꺼내 사령관과 LRL, 그리고 하르페이아에게 나누어준 뒤 자신의 몫으로 따로 챙겨둔 더 큰 과자와 탄산음료를 꺼내 연구실 모니터 앞 소파에 앉았다.
닥터가 가상현실장치의 버튼을 누른 순간 샬럿과 아르망은 번쩍하는 섬광과 함께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며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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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다 이번 2편은 1편 보다 조금 더 많이 썼어. 1편이 추천을 엄청 받아서 헤드라인 올라간거보니까 속으로 뿌듯해서 프로젝트 회의 끝나자마자 작업에 착수했음. 글을 못써서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