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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레스티아는 잠시 생각하다, 이내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었다.



"만약... 그럴 수 없다고 하신다면... 어쩌시겠어요?"



그리고 질문에 대답한 것은 남자가 아닌, 남자가 거느리고 있던 메이드의 대답이었다.



"글쎄. 뻔한 대답 아닌가?"



세레스티아는 붉은 안광을 번뜩이며 거대한 가위를 뽑아 손끝에서 휘두르는 리제의 모습을 보자 흠칫, 몸을 떨었다. 자신을 비롯한 엘븐 자매들은 물론이고 올리비아까지 달려들어도 제압조차 하지 못했던 강력함을 가졌던 저 여자. 그리고 듣도 본 적도 없던 거대한 비행 골램의 굳건한 모습을 보자 세레스티아의 본능은 경고하고 있었다.



'이 자들은 강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물러설 수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드워프에 의해 보금자리를 잃어가던 엘프들의 영역 보존은 물론이고, 자신들에게 막중한 임무를 주었던...




"오메가 여왕 폐하께선 절대 바라지 않으시겠죠..."

"오메가... 스토리에서도 그 귀걸이로 잘도 세뇌하고 다녔는데, 여기 와서도 남한테 그 버릇 못 주는구나..."

"무엄하시군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진 모르겠지만, 절대로 물러서진 않을,"



그때였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골램이 푸른 빛을 머리에서 뿜어내었다.



[사령관. 때론 피를 흘릴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다.]

"... 세레스티아. 마지막으로 말할게."



냉랭한 알바트로스의 대답과, 한 번만이라도 들어달라는 듯한 남자의 대답. 하지만 세레스티아는 팔을 들고 엘프들에게 명했다. 일족의 해방과, 펙스 여왕의 명예를 위해 전투에 임하라! 세레스티아의 대답과 함께, 엘프들이 각자의 무기들을 들었다.



[명령을 내려라, 사령관.]

"발사!"



사정거리까지 다가 온 엘프들이 조악한 활을 들고 쏘았다. 하지만 알바트로스의 강철 장갑을 조악한 화살로 

뚫을 수 있을 리는 만무했다. 허무하게 픽픽 떨어지는 화살을 무시한 채 알바트로스와 리제는 고개를 돌려 남자, 라붕을 향해 입을 열었다.




[우리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사령관이다.]

"주인님. 명백히 저들은 주인님께 적대하고 있어요."

"... 승산은 어때?"



라붕의 질문에 알바트로스는 대답했다.



[저들의 무력은 한참이나 아래다. 작전이 아닌 일방적인 학살이 되겠군.]

"하긴... 군용 기계랑 중세시대 무기들의 대결인데... 당연히 그렇겠지..."

[엘븐 바이오로이드의 전투력도... 이상하리 만큼 약하군.]

"수인족들처럼 적당히 사로잡으면 좋으련만..."



라붕이 고민을 하던 중, 별안간 화살 하나가 그에게 날아왔다. 명백히 자신을 노린 공격이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그의 몸에 날린 화살을 페로가 몸을 바쳐 받아내었다. 라붕이 황급히 쓰러진 페로에게 달려갔다. 팔뚝에 박힌 화살을 스스로 몸에서 뽑은 그녀가 옅은 신음을 애써 삼키며 대답했다.



"페로!"

"하아... 읏, 괜찮아요... 주인님... 이정도 쯤이야..."



알바트로스가 뒤늦게 장막을 라붕과 페로에게 쳤다. 무수한 화살들이 비오듯 쏟아졌지만 맥없이 쓰러졌다. 라붕은 황급히 자신의 소매를 찢어 페로의 팔에 감아 지혈했다. 페로는 애써 그에게 웃어보이며 몸을 일으켰다.




"주인님... 괜찮아요... 그리고 신경 쓰지 마세요... 리리스 언니를 대신해서, 제가 주인님을 지켜드리려 왔으니까요."

"페로..."

[사령관. 사령관을 위해 싸울 고블린들도 모두 준비되어 있다. 본 개체 또한 섬멸 작전을 실행할 준비가 되었다. 하지만 명령은 오직, 사령관만이 내릴 수 있다.]

"주인님, 명령을 내려주세요..."



**



나는 생각했다.


이 세계에 처음 왔을 때, 리제가 참혹하게 왕국의 병사들을 도륙했던 것을.


타이런트가 무자비하게 모든 것들을 쓸어버리는 것들을, 그리고 바르그가 망설임없이 나와 같은 인간을 베어버렸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지금, 엘프와의 전면전을 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확실히 알바트로스의 말대로, 활과 칼 따위를 든 엘프들이 알바트로스나 리제 만큼 강할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상상할 수밖에 없었다. 곧 이 전장은 수많은 엘프들의 시체로 산을 쌓을 수밖에 없었다. 나와 같은 인간의 모습을 한 이들을 죽이라 명령할 수밖에 없는 난


쉽사리 명령을 할 수가 없었다. 필사적으로 세레스티아가 내 항복 권유를 들었으면 어땠을까 생각도 들었지만... 이미 귀걸이에 세뇌가 되었는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렇다면 결국, 남은 건 세레스티아의 엘븐 시리즈 아이들을 사로잡고, 이 엘프들을 모조리 섬멸하는 방법 밖에 없었다.


드워프들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망설이다, 페로와 같이 다치는 나의 아이들이 없게. 나는 명령을 내려야 했다. 라스트오리진의 게임 속에서, 기적같이 사망자가 없게 만든 무적 사령관이 아니었다. 알바트로스의 말대로, 희생을 감수하면서라도 학살을 명해야하는 아이들의 주인이었다.



"알바트로스, 그리고 리제. 최대한 엘븐 아이들은 생포하는 쪽으로 무력화를 시켜."

"만약... 생포가 불가능할 정도로 저항한다면요?"



10지역에서 바르그를 생포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라비아타와 티아멧, 그리고 샬럿이 떠올랐다. 생각 이상으로 강했던 바르그를 사로잡지 못해 피해가 누적될지도 모른다는 판단 하에, 사령관은 바르그의 사살을 고려하기까지 했다. 아주 만일의 상황이지만, 그 둘이 위험에 빠진다면...



"... 사살해."

"알겠습니다. 주인님."

[알겠다.]



그렇게 말한 알바트로스와 리제는 허공으로 떠올랐다.



**



한편 세레스티아는 불안해졌다. 미약한 공격 조차 하지 않던 알바트로스와 리제가 별안간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니. 이내 리제는 입체 기동 장치의 날개를 요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알바트로스의 어깨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매섭도록 요란한 날갯짓 소리가 들렸고, 세레스티아의 바로 앞에 리제의 몸이 날아들었다.


하토르가 황급히 몸을 날려 막았지만 이내, 리제의 검격과 함께 그대로, 그녀는 쭉 밀려 날아갔다. 황급히 다크엘븐과 엘븐이 보호하려 했지만, 리제는 개의치 않은 듯 검을 휘둘러 막았다.



 


"진짜... 무식할 정도로 세, 이 메이드!"

"하토르 언니! 괜찮아요?"

"엘븐님들을 보호하라!"



황급히 공격에 앞선 엘프들 중 일부가 공격을 멈추곤 엘븐들을 보호하기 위해 달려왔다. 그리고 리제가 검격을 휘두르자 기다란 핏줄기와 함께 엘프들이 말 그대로 조각이 나 떨어졌다. 검붉은 피들이 순식간에 엘븐들의 얼굴에 뿌려졌다. 툭툭, 가위의 끝에 묻은 피를 털어 낸 리제는 성큼 성큼, 그녀들의 앞으로 걸어왔다.



"투항하는 게 좋을 거야. 너희들도 이런 벌레 꼴이 되고 싶지 않으면 말이야."

"엘프의 긍지를 모욕하지 마라 벌레라니이이이!"



잠시 멍을 때리던 엘프 병사들이, '벌레'라는 말에 정신을 차리고, 무구를 치켜들며 달려들었다. 세레스티아가 황급히 그들을 말렸지만 리제는 가차 없이 그들을 베어버렸다. 순식간에 엘프들의 선혈이 눈밭에 뿌려졌다. 세레스티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째서 저런 괴물들이..."



잠시 델타 여왕의 부름을 받고 자리를 비운 올리비아의 부재가 괜스레 커졌다. 그리고 리제의 뒤에 서 있는 골램은 단지 역장 같은 것을 치고 있었을 뿐인데 모든 무기가 통하지 못했다. 마치 거대한 벽을 손으로 두드리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골램은 별안간 푸른 빛을 번쩍이더니 이내 손가락을 튕기며 외쳤다.



[자, 고블린 특임대들. 그간 훈련한 성과를 드러내라.]



그리고 그때였다. 세레스티아의 등 뒤로 별안간 함성 소리가 들리더니, 그녀의 가슴께 위까지 오는 키를 가진, 굳건한 고블린들이 제각기 무구를 들고 달려오기 시작한 것은. 그리고 그 고블린들은 숲 속에서 보았던 고블린과는 명백히 다른 움직임들을 보였다. 생각 없이 공격해오지 않았다. 특히나, 저 골램에 의해 화살이 거의 다 떨어진 궁수 부대들을 집중적으로, 고블린들이 파고들었다.


고블린들의 날 선 도끼들이 순식간에 엘프 병사들을 도륙내기 시작했다. 그제야 세레스티아는 자신의 실책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저 고블린들은 원거리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애써 화살을 소비하길, 저 골램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까. 다크 엘븐이 황급히 총을 들어 겨눴지만 이내 고블린 중 한 명이 던진 도끼가 순식간에 다크 엘븐의 총에 찍혔다.




"꺄앗-!"

"다크 엘븐!"


총을 놓친 다크 엘븐이 주저앉았고, 고블린들은 다크엘븐을 도끼로 포위했다. 세레스티아의 주변 엘븐들은 이미 모두 고블린들에게 포위된 상태였고, 남은 고블린들은 전투 의지를 잃은 엘프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남은 엘프들은 떠밀리듯 비행 골램, 알바트로스에게 밀려들었다.




"사, 살려줘! 제..."



뒤에서부터 고블린들이 신나게 엘프들을 도륙했다. 그간 만났던 숲 속의 고블린들과 다르게, 그들은 엘프들에 대한 일말의 자비도, 성욕도 느끼지 않은 듯 보였다. 이윽고 엘프들은 공포에 질려 알바트로스가 쳐놓은 장막 앞에 밀려들었다. 그리고 알바트로스의 장막을 통과하지 못한 채 점차, 엘프들은 압사당하듯 깔리기 시작했다.



"얼른 앞으로 가라고!"

"갈 수가 없어!"

"수, 숨막혀... 여기로 몰리지 말라고!"



그리고 알바트로스는 자신의 장막 앞에서 깔려 죽어가는 엘프들을 보며 말했다.



[제법 훌륭해.]



*



"... 우웁!"



그 학살의 현장을 보던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다시금 오바이트를 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정도 무력화되어 사로잡히게 된 엘븐과, 공포에 질려 알바트로스의 장막 앞에서 압사당하는 엘프 병사들을 차마 맨눈으로 지켜 볼 수는 없었다. 이미 전쟁 수행 의지를 모두 잃어버린 그들에게 지금이라도 항복을 권유하고 싶었지만, 이미 고블린 병사들은 남김 없이 병사들을 모두 도륙내었다.



"실로... 잔인한 수준이구먼..."



그리고 성벽의 드워프들 또한 공포에 질린 채 아래에서 벌어지는 참극을 지켜보다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정말로 살육이나 다름 없는 현장, 이것이 다름 아닌 나에 의해 벌어진 상황이란 것이 믿겨지지 않았다. 엘프들을 이런 식으로 굴복시키고 싶진 않았지만... 필연적으로 피를 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스스로 위로하며 남은 엘프들과 엘븐들에게 항복을 요구하기 위해 알바트로스에게 명령 중지를 하달하기 위한 순간이었다.


별안간, 리제의 앞에 누군가 빠른 속도로 접근해왔다. 순간 리제는 두 검으로 방어자세를 취했으나,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그대로 리제가 연기 속에서 몸을 날렸고, 그 연기 속에선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하얀 머리칼에 메이드 드레스를 입은 백은발의 여성, 옆의 머리에 나 있는 분홍색 머리는 마치 브릿지를 한 것처럼 독특해 보였다. 자신의 몸보다 큰 관을 이고 나타난 그녀의 눈가는 붉은 눈이 번뜩이고 있었다.



"너..."





연기 속에서 거대한 기관총과 관을 들처 맨 여자의 익숙한 모습,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뽀삐..."

"..."



설원에서 길게 숨을 내쉰 그녀는 이터니티였다. 그녀는 망설임없이 총구를 돌리더니, 이내 엘븐들을 포위하고 있던 고블린들에게 기관총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갈린다는 말이 어울렸다. 빈 탄환들이 튈 때마다 호응하듯 고블린들이 너절한 육편으로 튀었다.


리제의 기동 장치가 켜졌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온 그녀가 가위를 들어 이터니티에게 휘둘렀지만 그녀는 관을 들어 그것을 막았다. 놀랄 만큼 빠른 반응속도, 이내 이터니티가 짊어진 관의 문이 열리더니, 기관총들이 드러났다. 철컥 소리와 함께 리제의 코앞까지 나온 기관총에서 불이 뿜었다.



[위험...!]



여태껏 침착을 유지하고 있었던 알바트로스가 급히 리제의 앞으로 장막을 펼쳤다. 간발의 차로 기관총의 탄환들이 튕겨져 나갔지만, 충격 때문이었는지 리제는 뒤로 밀려났다. 이내 엘븐들의 앞을 가로 막고 선 그녀는 알바트로스와 리제를 흘끔 쳐다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괴이한 금속음이 섞인 목소리였다.




[이 세계의 존재들이 아니군요.]

"..."



그리고 고개를 돌린 이터니티의 모습을 본 나는 어딘가 위화감을 느꼈다. 마치, 철충에 감염된 사령관의 모습처럼 그녀의 얼굴 한 면은 이미 거무스름한 얼굴에 뒤덮혀 있었다. 그리고 리제는 아까의 여유로운 모습과 다르게, 가위를 양손으로 거머쥔 뒤 살기가 가득한 표정으로 이터니티를 노려보았다.



"바이오로이드... 철충?!"



말도 안 됐다.


설정 상, 바이오로이드는 철충에 감염될 수 없었다. 아예 몸이 기계로 이루어진 ags야 쉽게 철충이 감염시킬 수 있다고 했었지만, 바이오로이드에게 철충이 감염될 수 있다니. 아니 그것을 떠나서... 이 세계에 철충이 존재한다고? 그렇다면 이 세계에선 펙스의 레모네이드들은 물론이고, 철충 세력까지 존재한다는 건가?


내 벙찐 표정을 힐끔, 올려다 본 이터니티는 천천히 고개를 돌리더니 이내 나를 말없이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때였다. 이터니티의 눈이 몇 번 깜빡이더니 붉게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치 내 귓가에 이어폰을 꽂은 듯 잔잔한 목소리가 빨려들어왔다.



[이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니... 당신도 폐하에 의해 세례를 받은 존재입니까?]

"세례?"



지잉, 머리가 울리는 듯했다. 미약한 두통이 찾아왔다. 잠시 비틀거리는 것을 본 페로가 황급히 나를 부축했고 리제는 이터니티를 보며 비틀거리는 나를 보자, 단숨에 검을 거머쥐며 달려들었다. 가볍게 관으로 막은 이터니티는 관에 이은 사슬을 거머쥐어 크게 휘둘렀다. 리제가 쭉 밀려났다. 여태껏 밀려나본 적 없던 리제가 처음으로 밀리는 것을 본 것도 잠시, 그녀는 번쩍거리는 눈을 내게 고정시키며 다가왔다.



"뽀삐... 아, 아니... 이터니티! 그, 그 모습은 어떻게 된 거야? 아니, 그보다 폐하라니... 그건 또 누구고?"

[이상하군요. 분명 당신께 세례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데 말이죠.]

"세례? 흔적? 제기랄... 대체 뭐가 어떻게 또 돌아가는 거야? 너... 펙스한테서 만들어진 거지? 그렇지?"



내 질문에 이터니티는 고개를 천천히 내저었다.



[당신이 어째서 저와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무언가 다른 느낌 때문에 이렇게 말을 걸었지만... 라 만차 대삼림의 준동 사건도 그렇고. 폐하께는 상세히 보고를 해야 할듯 하군요.]

"폐하? 네가 모시고 있는 폐하란 자는 또 누구야?"

[그걸 당신께 알려드릴 의무는 없습니다. 하지만 최근의 일로 폐하께선 당신을 주시하고 있단 말씀을 전해드리고 싶군요.]



알 수 없는 말을 쏟아내던 이터니티는 고개를 천천히 돌려 패닉 상태에 빠진 엘븐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델타님과 폐하의 명입니다. 당장 현 작전을 중단하고 복귀하란 명을 받았습니다."

"당신은..."

"지금 저들은 당신들이 이길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계획을 수정하도록 하죠."



그리고 어느새 올리비아도 나타나 이터니티의 옆에 서며 말했다.



"델타 여왕님의 명이십니다. 퇴각 후 재정비를 하도록 하죠... 지금 이 상황은 우리에게 명백히 불리하니까요."

[그렇게 놔두도록 본 개체가 놔둘 것 같은가?]



알바트로스가 리제의 뒤로 다가 와 이터니티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때였다, 이터니티의 등 뒤로 붉은 빛을 뿜어내는 무언가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메이드복에 초록 단발머리, 그리고 AK소총을 거머쥔 그들은 이터니티와 같이 철충을 이식한 것으로 짐작되는 바닐라 A1 개체들이었다. 일제히 알바트로스와 리제를 향해 총구를 겨누었고, 이터니티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은 이쯤에서 끝내도록 하시지요."

"이터니티... 너희들이 이만한 병력을 끌고 와서 관둔다는 말을 믿을 것 같아?"



내 질문에 이터니티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솔직히 말씀드린다면... 이번의 전투로 당신을 레모네이드 가문의 여왕들 만큼이나 위험한 존재로 분류했습니다.]

"뭐야, 너희는 협력 관계가 아니었던 거야? 그리고 그런 말을 함부로 해도 괜찮은 거고?"



내 질문에 이터니티는 톡톡, 자신의 미간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언어는 오직 선택된 자들만이 할 수 있는 하늘의 언어입니다. 세례를 하지 못한 당신이 어떻게 이 언어를 아시는지 모르지만...]

"..."

[부디 경거망동하지 마시길.]

"무슨 말을 주인님과 하는지 모르겠지만... 너희가 과연 여기를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아?"

"리제! 그만해!"

"주, 주인님!"



그래, 지금 나는 알바트로스와 리제만을 데리고 있는 상태였다. 설사 이터니티를 둘이서 제압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미, 모종의 기술로 인해 철충과 융합한 바닐라 아이들을 중세 시대 무기를 든 고블린들로 이길 수 있을리는 만무했다. 일단 그들이 물러나는 제스처를 취했으면 우리 쪽에서 오히려 감사했을 지도.


그렇게 부상당한 엘븐들을 데리고 이터니티가 사라진 이후, 나는 설원에 버려진 엘프들의 시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펙스의 레모네이드들과 '폐하'로 지칭되는 자들에 의해 결국 희생된 것은 이 세계의 힘 없는 자들의 시체들 뿐이었다. 착잡한 마음을 뒤로 하고 나는 떨리는 모습으로 모든 것을 지켜 본 드워프를 보며 대답했다.



"아마 당분간 엘프들의 침공은 없을 것 같습니다. 이것으로 한숨 돌릴 수 있겠군요..."

"맙소사, 당신들은 대체 정체가 뭔지 모르겠구먼..."

"그냥... 딴나라 마족이라고 생각하면 되려나요..."

"설마, 자네들 정말 마족인가?!"

"그냥, 그렇게 생각하세요... 어떻게 설명하기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해서 제가 저 펙스 쪽 사람들처럼 수를 쓰는 건 아니고..."

"... 펙스라면 펙스 연합 왕국? 그렇다면 펙스 여왕들이 지금 이 전쟁에 관여를 한다는 것인가? 저들은 엘프들 아닌가?"



아무래도 펙스와 철충 세력들이 이 세계에서 신분 위장을 하고 무슨 일을 꾸미는지 까지는 이 세계의 사람들이 모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 또한 그들이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모르는 상태. 하지만 바이오로이드들을 양산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철충화까지 시키는 기술력을 가진 존재들이 나를 잠재적인 적으로 설정했다면... 골치가 아파졌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확실하게... 이 세계를 최대한 활용해서 저 둘과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을 구축하는 게 중요했다. 그 흔하디 흔한 ags 개발 기술도, 바이오로이드 제조 기술도 없으니... 그래도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적어도 라스트오리진 세계 속 설정들이 어느 정도 이 세계에 있는 바이오로이드들의 설정과 일치한다는 점이었다. 단 한 번에 세레스티아가 걸고 있는 귀걸이가 오메가의 작품이란 걸 아는 것도 그렇고.



"주인님... 여쭤볼 게 있는데요?"

"응?"



그때 페로가 나를 깜빡거리며 쳐다보더니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 아까 그 관을 짊어진 메이드 분과, 그리고 주인님께선 전혀 들은 적 없는 말로 대화를 하시던데... 어떤 대화였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그래, 처음 들어보는 단어더군."



드워프까지 맞장구를 치자 나는 점차, 긴가민가하던 것이 사실로 굳혀짐을 깨달았다. 라스트오리진의 사령관은 철충과의 대화가 가능했다. 그리고 다시 말해, 어쩌면 숨어서 세력을 기르고 있는 철충들 또한 라스트오리진의 설정 법칙을 따른다.



"별 건 아냐... 그냥, 알고 있을 뿐이었어."



완벽히 내가 불리하진 않았다.




**




"발신, 발동."



한편 퇴각한 이터니티는 지쳐보이는 엘븐들을 끌고 산맥을 내려가고 있었다. 이내 그녀는 손을 펼치고 외치자 푸르스름한 빛이 감돌았다. 이윽고 그녀는 검지와 중지를 귓가에 대더니 입을 열었다.



[폐하이자, 이 세계 메시아의 명을 받듭니다.]



알 수 없는 언어로 무어라 중얼거리자 이터니티의 귓가로는 금속음이 섞인 말이 들려왔다.



[연락을 기다렸다 이터니티. 델타의 부탁으로 파견되어 직접, 그를 만나보니 어떠더냐?]

[아무래도 대삼림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넘어 온 자는 폐하와 같이... 지구에서 넘어온 자로 추정되옵니다.]



순간, 금속음이 날카롭게 들렸다. 이터니티는 자신도 모르게 표정을 찡그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애써 진정시킨 듯한 목소리라 이어 들려왔다.



[그래, 그와 그가 데려 온 자들의 전력은 어떠한가?]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세례를 받은 저희와 힘은 엇비슷한 정도이옵니다.]

[뭐라... 그 하등한 살덩이들이...!]

[죄송한 말씀이오지만... 레모네이드 여왕들이 만든 존재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말도 안 된다!]



쾅, 소리와 함께 시끄러운 잡음이 연신 들려왔다. 이터니티는 입을 다물었다. 지금 자신이 섬기는 메시아는 상당히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하지만 이내, 차분한 금속음의 목소리가 이어 들려왔다.



[그래, 하여튼... 그렇단 말이지? 그렇다면... 적어도 그자와, 그리고 그 자가 거느린 바이오로이드는 이 세계에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다... 그 시건방진 델타가 들으면 제대로 발광할 할 말이군.]

[아뢰옵게 황송하오나, 폐하. 저 또한 델타에 의해 설계된 존재이옵니다.]

[그래, 하지만 이 몸의 세례로 인해, 너는 그 하등한 살덩이들보다 충분히 강해졌다. 그런 너와 맞설 수 있는 바이오로이드라면...]

[...]



잠시의 침묵 후, 금속음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지구에서 넘어 온 바이오로이드다. 그것도 이 몸과 대적했던... 바이오로이드 말이다.]

[폐하께서 끝내 정화와 구원을 실패하셨던 그 곳 말씀이십니까?]

[그래. 어쩌면... 그자가 그 오르카인지 뭔지 하는 사령관일 수도 있겠지.]

[... 폐하께서 설교하셨던, 적 그리스도.]

[이터니티. 혹시라도 그들이 대규모의 병력을 가진 채 이곳으로 왔다면 필시 경계해야 할 것이다... 필요하다면 그 멍청한 레모네이드들과 회장이란 놈들을 구워삶아서라도 말이다.]

[알겠습니다, 폐하.]

[임무를 완수하고 제국으로 귀환하도록.]

[아멘.]



이윽고 금속음이 픽, 까지자 이터니티는 허공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오늘 자신과 잠깐이었지만 대적했던 바이오로이드, 리제의 모습은 여태껏 느끼지 못했던 무언가를 꿈틀거리게 했다. 그간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죽음'에 대한 자각. 이미 죽음을 받아들이는데 익숙한 자신이었지만, 자신에게 죽을 수도 있다는 자각을 하게 한 바이오로이드, 리제의 살벌한 모습, 그리고 엄청난 완력을 떠올리며 그녀는 여전히 저릿한 팔을 몇 번이고 매만졌다.



"..."



그리고 메시아의 세례를 받지 않고도 하늘의 언어를 하는, 그 남자를 그녀는 계속해서 그렸다. 불경한 생각인 것을 알고도.



=



존나게 더워서 손 놓고 있다가 쓰게 됨.

라붕이들도 더위 조심해라...


삽화 출처: https://www.pixiv.net/artworks/855916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