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지른 글 모음:https://arca.live/b/lastorigin/92695588

전편: https://arca.live/b/lastorigin/83196623


-----------------------------------------------------------------------------------------


“적 저격수 처리했슴다!”


“RPG도 처리했다. 땃쥐?”


“조금만... 됐다. 길 다 뚫었어.”


오르카 측에서 연결체들을 처리해 놓은 덕분에 우리가 할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오르카까지 가는 길에 우리가 하는 일은, 따로 돌아다니는 잔당들을 처리하거나...


“이야, 용병이라길래 큰 기대를 안 했는데, 웬만한 전문가 뺨치시지 말임다!”


“엑, 우릴 그렇게 보고 계셨슴까? 실망임다!”


“아니... 그, 그 말이 아니지 말임다!”


“흐히. 장난임다, 장난. 이래 뵈도 저희 모두 연합전쟁 때부터 살아왔지 말임다.”


“그, 그게 진짜임까? 저희 마리대장만큼 베테랑이란 말이잖슴까! 대단함다!”


“헤헤헤.”


...브라우니들의 수다를 듣거나 하는 일이 전부였다.

젠장. 저렇게 즐거워하는데 닥치라고 할 수도 없고...

 



“다 왔슴다! 여기에 사령관님이 계시지 말임다!”


 영원할 것 같았던 브라우니들의 이중주는 우리가 함교 앞에 도착하자 끝을 맺었다.

자, 이제 정산할 시간이다. 철충 46마리에, 길 뚫느라 쓴 폭발물 2패키지...


“무슨 속셈이지? 이 괴물?!”


 누군가의 우렁찬 고함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눈 앞에는 거구의 여인이 자신의 몸만큼이나 되는 대검을 누군가에게 겨누고 있었다.


“언니? 무슨...”


 소스라치게 놀란 것도 잠시, 옆에 서 있던 콘스탄챠 모델이 그 여인에게 총을 겨눈다.


“칼을 내리세요. 언니, 주인님께 무슨 짓이죠?”


 그제서야 그 누군가에게 시선이 간다. 인간의 모습에... 철충이 몸을 잠식한 건가? 근데 누가 봐도 철충은 아닌 것 같은데...?


“콘스탄챠, 어쩔 수 없어. 지금의 너로썬 이해할 수 없겠지.”


“언니, 다시 한 번 말씀드릴게요. 칼을 내리세요. 아무리 언니라도 주인님께 무례한 건 어쩔 수 없어요.”


 주인님이라고? 아, 그럼 저 양반이 사령관이구만? 근데 어째 낯이 익은 것 같기도 하고...

어딘가에서 본 것 같은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넌... 저 괴물이 안 보여? 저게 인간으로 보여?”


“외모가 무슨 상관이죠? 주인님은 완벽한 인간이에요.”


“알아. 넌 뇌파로만 인간을 인식하지. 하지만... 최소한 저 모습이라면 의심을 했었어야지.”


 더는 못 들어주겠다. 모가지를 딸 거면 적어도 대금은 치루고 하라지.


“어이, 아줌마. 거기까지 하시지? 난 그쪽 사령관님한테 받을 게 있으니까.”


 거구의 여인에게 총을 겨누자 그 살벌한 눈초리가 나에게로 향한다.

 이 씨발... 뭐 이리 기가 세? 오금이 저리다 못해 자리에 주저앉아버릴 것 같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흐른다.


“대장! 지금 누구한테 총을 겨누는 거야!”


“저 아줌마가 누구건 알바야? 지금 우리가 개털되게 생겼는데!”


땃쥐의 핀잔에 그제서야 그 여자를 훑어본다.

 거대한 덩치에 흰색 머리카락, 그리고 새빨간 눈, 휘두르는 게 가능할까 싶은 무식하게 큰 검...

‘라비아타 프로토타입.’

 멸망 전 대 인기 바이오로이드이자 바이오로이드 저항군의 총통. 그리고...


“주인님! 정신차리세요!”


 사령관이 기절해버렸다. 그 덕분에 라비아타의 살벌한 시선도 거두어졌고, 모든 관심이 사령관에게 꽂혔다.


“의무팀에게 알립니다! 함교에 상황발생! 코드 레드! 코드 레드입니다!”

 



“초면부터 불미스러운 광경을 보여드렸네요... 죄송합니다.”

콘스탄챠는 공손하게 고개숙여 사과했다.


“괜찮습니다. 뭐, 누구 하나 머리 안 날아갔으니 된 거 아니겠어요?”


“대장, 좀.”


“아하하...”


 눈살을 찌푸리는 땃쥐와 어색하게 웃는 콘스탄챠. 이런 어색한 분위기야말로 비즈니스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어울린다.


“그래서, 브라우니 2056씨의 일 말인데요.”


“네... 혹시 배상 건으로 오신건가요...?”


이런, 너무 거두절미했나?


“임무 중 길을 잃으셔서 저희를 고용했는데요. 돈이 없어서 결제를 귀하 사령관님한테 받으라고 해서요.”


“아...”


콘스탄챠의 얼굴이 어두워진다. 설마.


“그 문제는 제가 답해드릴 수 없을 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설마, 우리 떼어 먹힌거야?


“피곤하실 테니 일단 남는 방으로라도 안내해 드릴까요?”


“네! 네! 부탁드림다!”


뭐라고 따지려고 하자 케이크가 팔 한쪽을,


“케이크, 이렇게 넘어갈 문제가...”


“에이이! 아직 사령관님이 쓰러져 계시지 않슴까! 그리고 저희도 좀 쉬는 게 좋지 않겠슴까!!”


“그래, 대장. 조금만 쉬자. 며칠 동안 걷다가 겨우 케이크 한 조각만 먹고 일했잖아.”


땃쥐가 다른 쪽 손을 꼭 쥐고 뒤로 살짝 당긴다.


“제기랄, 이런 식으로 우리가 몇 번씩이나 떼어먹힌...”


“우리 대장님도 많이 피곤한 것 같네요. 콘스탄챠 씨? 방으로 안내해 주시겠어요?”


“앗, 네!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할 말은 많았지만, 여느 때처럼 땃쥐와 케이크 때문에 아무 말도 못 하겠다. 참 나, 누가 대장인지...

콘스탄챠를 따라 함교를 나서자 문 앞에 서 있던 브라우니들이 파도처럼 갈라진다.


“저 분... 남자 아니심까?”


“그렇슴다! 남자 바이오로이드는 처음 보지 말임다!”


“라비아타 통령님을 직접 뵌 것도 모자라 남자 바이오로이드라니! 오늘은 운이 좋지 말임다!”


“저기! 한번만 만져봐도 됨까?!”


 돈 못 받은 것도 서러운데 무슨 사람을 동물원 원숭이 취급하고 있어... 이 미친년들이 진짜!


“대장. 있다가 술 좀 깔까?”


“...그래.”


그래. 내가 참아야지. 돈도 못 받고 쫓겨날 수는 없으니깐... 어으 씨발...

 



“아이고! 나죽네에에!”


콘스탄챠의 안내에 따라 방에 들어서자마자 케이크는 짐을 내팽개치고 침대에 뛰어들었다.


“안 씻냐? 그럼 나부터 씻는다?”


“잠시잠시잠시! 이러는 게 어딨슴까?!”


“뭐가. 방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다이빙 한 게 누군데.”


“아니, 그게 아니지 말임다! 여자 둘 있는 방에 남정네가 같이 오는 게 말이 됨까?! 이 변태!”


부끄러운 듯이 이불을 가슴께로 모으고 있는 케이크였지만, 상기된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시질 않는다. 


“그래, 그래, 나가지 뭐. 다 씻으면 불러라.”


“우우... 재미없어...”


죽는다니 뭐니 호들갑을 떨었으면서 장난칠 여력은 남아있나 보다.

 


“낯익은 얼굴이 있다 했더니... 역시 너였군.”


방을 나서자 들려오는 허스키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서 뵙는군요, 칸.”


“요원.”


가벼운 악수를 나눈 그녀는 내 옆에 기대어 섰다.


“블랙리버 일은 그만둔 건가.”


“아시잖습니까. 철충에, 휩노스 덕분에 블랙리버건 뭐건 전부 결딴나버린 걸.”


“하, 그건 그렇지.”


허탈함이 느껴지는 웃음에 나는 그녀에게 담배를 건넸다.


“피우시겠습니까?”


“아니.”


그럼 나도 못 피우겠군. 아쉽게 됐어.


“흠, 그렇군요. 좀 걸으시겠습니까?”


“그래.”


 우리는 복도를 따라 하염없이 걸었다. 전등이 간간히 나간 을씨년한 복도를 배회하는 망령들이라, 공포영화가 따로 없네.


“이번에는 김철식이라는 이름을 쓰던데, 좀 어떤가?”


“그게 본명이 될 뻔 했죠. 안타깝게도 물 건너갔지만.”


“네가 정착을? 의외인데.”


“나이가 먹었는지 돌아다니는 게 피곤하더군요.”


“농담은 여전하군.”


“그런가요?”


어쩌면 당신과 농담따먹기나 했던 그 시절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모두가 모두를 평등하게 증오하던 그 시절이.


“그나저나. 여기 오르카는 어떻습니까? 어떻게, 살만 합니까?”


“야전보다는 낫지.”


“사령관이라는 인간은 어떻습니까?”


“나쁜 인간은 아닌 것 같다. 조금 더 지켜봐야 알겠지만.”


“전술적 측면에서는?”


“미숙한 점은 많다만... 지금까지 부상자는 있어도 사망자는 없다.”


사망자 0명? 대단한데, 어떤 인간일지 궁금해진다. 몸에 철충 커스텀을 한 것부터 보통 인간은 아니겠지만.

 어쩌면 날 도울 수 있을만한 인간일지도 모른다.


“아직까지도 그 여자를 쫓고 있었나?”


“그렇습니다. 보기 좋게 실패했지만요. 흐흐흐.”


“...유감이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대강 알았다는 듯이, 칸은 내 등을 두드렸다.


“때로는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는 것도 좋을 거다.”


“신속의 칸에게서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는데요.”


“이곳에서 얻은 교훈이라고 해두지.”


그 때, 무전기가 울렸다.


“대장, 대장? 들려?”


“그래, 잘 들려. 무슨 일이야? 또 케이크가 사고쳤어?”


“이번엔 아냐, 우리 다 씻었다고.”


“그래? 그럼 좀 있다가 들어간다. 먼저들 마시고 있어.”


“응, 너무 늦게 들어오지는 마. 케이크 서운해 할라.”


“그래, 그래.”


“이번 팀원들인가?”


“살아남은 가족들이죠.”


“훗. 그런가.”


그녀는 아까와는 다른, 아름답고도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천하의 칸이 저렇게 웃을 줄도 안다니. 오늘 상상도 못한 광경을 많이 보는걸.


“슬슬 들어가 보는 게 좋겠군. 가족들이 기다릴 테니 말이야.”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늑대는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나는 지금까지 왔던 길을 되짚어 방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더 나가기 싫은 검다.”


“그렇긴 하지. 낡아빠진 침낭에서 자는 거랑 침대에서 자는 거랑은 하늘과 땅 차이니까.”


쿰쿰한 밀주 냄새가 방 안에 가득 찰 무렵, 케이크가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다.


“대장, 그냥 우리 여기서 눌러 살면 안됨까?”


“그래, 언제까지 떠돌기만 할 수는 없잖아. 여기만큼 사람이랑 시설 좋은 곳도 없었고.”


땃쥐도 수긍하는 눈치였다.


“...여기서 삯 받기 전까진 안 나갈 거니까 걱정하진 마.”


“진짜임까?”


“그래. 이번에는 진짜 돈 받아낼 거야.”


“아니, 그거 말고. 진짜 안 나갈 감까?”


“돈 받으면 나가야지.”


“으엑... 안 나간다고 하지 않았슴까...”


정상적인 대화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걸 보니 우리 모두 취한 것 같다.


“다들 취했네. 잠시 나갔다 온다.”


“으... 나는 토 좀 하고 올게...”


“예에엑... 다들 어디가심까아... 오엑... 으어... 커어어...”


아무래도 밖에 나가서 바람이라도 좀 쐬어야 될 것 같다. 담배도 좀 피우고.

 


 갑판 위에는 아무도 없이 찬바람만이 불어왔다.

담배를 피워 물고, 니코틴이 들어가자 이쪽으로 다가오는 자그마한 여자애가 눈에 들어왔다.


“안녕, 오빠?”


오빠? 오빠라니, 그나저나 닥터 모델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왜 내가 여기 있냐는 표정이네? 히히.”


“당연하죠. 당신 같은 최고급 기종이 이런 곳에 있을 이유가 없잖습니까.”


“그건 오빠도 마찬가지잖아? 더군다나 원 오프 타입인데.”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요. 전 그냥 불법 제작 바이오로...”


“나는 애덤 존스 납치 고문치사에 관여한 적 없어.”


뭐라고?


“...어디까지 알고 있습니까.”


“오빠 나이가 아~주 많다는 것부터 펙스를 정말정말 싫어한다는 것 까지?”


다 알고 있군.


“원하는 게 뭡니까.”


“우리랑 같이 일하지 않을래? 그러니까, 오르카에 합류해달라는 거야.”


 모르겠다. 술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내 얄팍한 자존심 때문인지 당장 여기서 뛰쳐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하지만 여기 머무른다면? 최후의 인간이 있고, 라비아타 프로토타입이 있고, 닥터도, 칸도 있다. 그 썅년을 짓밟을 수 있는 명분과 기초가 마련되어 있는 셈이다. 애들이야 다들 남고 싶어하는 눈치인 것 같고.


“팀원들에게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헤헤, 다행이다. 아! 그리고, 미안한데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어떤 겁니까...?”


“내일쯤 김지석의 묘에 도착할거야. 그 때 우리 언니들이랑 같이 가줄 수 있어?”


“...알겠습니다.”


“고마워, 오빠! 내일 조심히 잘 갔다가 오면 내가 좋은 걸 줄게. 기대해도 좋아! 히히.”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도박수에 몸을 던지기로 했다.

닥터의 저 순진한 웃음 뒤에 무엇이 있는지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

생각보다 안써진다

다들 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