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 https://arca.live/b/lastorigin/1507448 




 이른 태풍이었을까, 아니면 너무 늦은 태풍이었을까. 전례없는 초봄의 태풍에 도쿄에는 언제 눈이 내렸냐는 듯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누구나 비가 내리는 소리를 좋아하던 시절은 있었다. 쿠니키다 쿠니히로에게 그 시절이란 어릴 적의 일이었다. 마루에 앉아 마당에 내리는 비를 보며 수박을 먹던 그 시절은 그에게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이제는 먼 옛날이었고 비는 이제 그에게는 거추장스럽고 습기만 차고 우산을 들어야 하고 옷이 젖어야 하는 것이었다. 양복을 갖춰입은 그의 어깨에는 비가 조금 묻어있었다. 코트를 입고 여러개의 우산이 그가 비를 맞는 것을 막아주었지만 폭우 앞에서는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가 걸어가고 있는 곳은 어릴적의 기억과 크게 다르지 않은 곳이었다. 나무로 된 마루에 유리창 너머로는 마당에 떨어지는 비를 잘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손에는 수박이 들려있지 않았다. 아니, 수박을 들고 있을 생각조차 없었다.

모든 것은 먼 추억에 불과했다. 지금은 그런 것에 빠져들 때가 아니었다. 그런 여유는 퇴임 이후에 즐겨도 늦지 않았다. 퇴임이라. 언제가 될지 몰랐다. 임기를 마친 다음일수도 있고 여러 번의 임기가 이어질 수도 있고 당장 내일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쿠데타의 앞에서 쿠니키다의 정치인생은 위태로운 것이었다. 그의 손에는 수박 대신에 문서 한장이 들려있었다. 그는 절대로 들고 싶지 않았던 문서였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들고 갈 수밖에 없었다.

“쿠니히로군. 오랜만이네.”

방에 들어선 쿠니키다는 자리에 멈춰 커튼 뒤에 있는 사람을 향해 절을 했다. 그 사람은 옛 전통복을 입고 있었다. 전 일본에서 그 복장을 입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사람뿐이었다.

“오랜만에 폐하를 영접합니다. 작년 생신 이후로 처음이었던가요.”

상대는 전 일본 국민이 알고 있지만 그의 본명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지 모르는 사람이었다. 모두는 그를 호칭으로 부르고 있었다. 그 호칭이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었다.

“그렇지. 아내분은 잘 계시고? 그날 밤에 크게 놀랐을 것 같은데.”

그날 밤. 해상자위대의 쿠데타가 있었던 날의 이야기였다.

“다행히 그날은 아내가 친정에 아이들을 데리고 가있던 날이어서 말이죠. 조금 놀랐던 것 같습니다만 여러번 전화를 했더니 조금 안도하는 것 같더군요. 폐하께서는 몸은 괜찮으십니까?”

“항상 말하지 않는가. 나는 자네보다 오래 살 거라고 말야. 자네도 나이가 들었으니 이제 몸관리를 해야 하지 않나. 술과 담배는 줄이고 운동을 늘리는 것 말야. 최초로 임기중 사망하는 총리를 노리는 것이라면 말리지 않겠다만.”

“어머니와 똑같은 말씀을 하시는군요.”

그렇게 말하며 쿠니키다는 황거에 들어오기전 피운 담배 냄새가 아직 나는 건가 자신의 입냄새를 맡아보려 했지만 자신의 냄새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국민이면 누구나 그렇게 말할 걸세. 자네 같은 골초도 보기 힘드니. 그래서, 자네 손에 들려있는 문서에 대한 이야기를 할까?”

그의 말에 쿠니키다는 바닥에 들고온 문서를 내려놓았다. 그 문서를 궁내청 직원이 들어 커튼너머의 사람에게 전해주었다.

“오랜 재위기간동안 알게 된 것은 하나네. 내게 총리가 먼저 찾아오는 건 단 한가지를 위해서라고. 자네도 그러하겠지?”

“네. 헌법 7조에 대한 행사를 부탁드리려 온 것입니다.”

일본국 헌법 제 7조. 천황의 국사활동에 대해 규정한 조항이었다. 총 10가지의 조항을 설명하지만 두 사람은 그중 무엇을 말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제 3호. 중의원을 해산하는 것.

“쿠니키다군. 지금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잘 알고 있겠지?”

해상자위대가 장악하지 않은 유일한 곳이 바로 국회였다. 만일 중의원이 해산한다면 국회는 무용지물이 되는 것이었다. 내각에게는 무력으로 국회를 제압하지 않아도 그들을 무력화할 수 있는 수단이 있었다.

참의원은 해산할 수 없었지만 중의원은 국회의 대부분의 권한을 쥐고 있었고 참의원은 그를 승낙하는 조직에 불과했다. 참의원들 또한 중의원이 해산하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해상자위대에 항복하게 될 것이었다.

“알고 있습니다. 이 쿠데타는 성공적으로 끝나는 것이 되겠지요. 하지만 폐하, 거스를 수 없는 물결 속에서 결국은 떠내려갈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에 대해 저항하는 것이 옳다고 할 수 있을까요? 제 손이 쥐고 있는 짐을 놓치고 저도 떠내려가는 것보다는 제가 떠내려가더라도 그 짐을 끝까지 붙잡는 것이 더욱 가치가 있지 않을까요?”

“쿠니키다군. 결정은 자네가 내리는 걸세. 나는 그저 자네가 들고온 문서에 국새를 찍어줄 뿐인 사람이네. 내게 거부권이라는 것이 있나?”

그의 말이 맞았다. 일본의 천황이란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권력을 전부 국민에게 이양을 했을 뿐, 그가 가진 권력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언제나 결정은 내각에서 하는 것이었고 천황은 그저 그에 대한 승인을 해줄 뿐이었다. 일본 역사에서 내각의 결정을 천황이 뒤집은 사례는 없었다.

“하지만 폐하는 저를 설득할 수 있으십니다. 저는 이 결정을 따르고 싶지 않습니다. 대신들 중에서도 중의원 해산에 동의하지 않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해상자위대는 그 자리에서 그들을 퇴임시키고 자리에 있던 장성들을 그 자리에서 사퇴하게 한 뒤에 저로 하여금 그들을 대신으로 임명하도록 했습니다.”

내각은 문인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하지만 자위대 출신의 민간인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조항이 아니었다. 해상자위대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고 총리를 쥐고 있는 그들에게 맞설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저는 최후의 방법으로 제 자신이 사퇴하는 방법도 생각해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런다 한들 바뀌는 것은 없겠지요. 자신들을 따르는 사람을 부총리로 세워 어떻게든 중의원해산 결의를 이끌어냈을 것입니다. 제가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없었죠.”

“쿠니키다 군, 이제 내가 어떤 심정인지 잘 알겠지? 결정권자지만 실제로는 아무 결정권도 없는 그 심정을 말이네. 좋은 경험으로 생각하게나. 그렇게 말해주고 싶지만 교훈치고는 너무 큰 대가지. 중의원 해산 이후로는 어떻게 할 건가?”

“비상사태 선언을 하고 정세를 안정화하겠죠. 막료장들은 전부 해상자위대의 뜻에 맞는 사람으로 물갈이 하고요. 쿠데타는 이걸로 성공적으로 끝날 겁니다.”

쿠니키다는 분했다. 하지만 더욱 분한 것은 그 앞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었다. 일본국 내각총리대신이라는 직함에 맞지 않은 권력이었다. 그는 그저 해상자위대가 원하는 일을 들어줄 뿐인 형식적인 존재가 되어있었다.

“자네는 분명 내가 저항하라는 말을 할 것을 기대하고 그렇게 말했겠지. 나도 그렇게 말해주고 싶네. 아무리 저항하는 것이 무의미하더라도 그 저항하는 것에 가치가 있다고 말야. 하지만 쿠니키다군. 그 저항에 수많은 사람이 달려있다면 그 저항에 가치가 있는 것일까.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저항에 가치가 있는 것인가, 아니면 가치가 있는 것을 위해 저항을 하는 것인가.”

“그 질문에 가치가 있는 것입니까? 어느 선택을 하던 저는 역사에 일본 최악의 총리로 남을 것입니다. 쿠데타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총리로 말이죠.”

쿠니키다는 그렇게 말하곤 품에서 액상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궁내청 직원은 그런 쿠니키다를 보고 말리려 했지만,

“이구이군, 놔두게. 쿠니히로군은 담배없으면 못사는 사람이니. 안그래도 견디기 힘든 사람에게 담배마저 견디게 할 순 없지 않는가.”

“폐하. 이 내각 결의안을 거부해 주십시오. 저 해상자위대도 폐하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결정권 없는 결정권자라 하시지만 폐하께는 엄연히 결정권이 있으십니다. 지금까지 그 결정권을 쓰지 않으셨을 뿐입니다. 제발, 부디 이 결의안을 거부해 주십시오.”

쿠니키다는 그렇게 말하며 분하다는 듯 담배를 빨아들였다. 그러는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그는 쿠니키다의 심정을 잘 알 것 같았다.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아무것도 못하는 그였다. 그렇게 분할 수가 없을 것이었다.

“나는 그럴 수 없네. 이 자리는 그런 자리가 아니란 것을 잘 알고 있지 않나.”

그가 손으로 궁내청 직원을 부르자 그는 옥새가 담긴 나무상자를 들고 그에게 다가갔다.

“자네는 내 결정권 행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가? 헌법에서 인정한 이 나라의 수장이 거부권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네. 내 선조가 인간선언을 한 이후로 지금까지 지켜져온 천황과 정치의 분리를 지키려는 것이네. 나는 그저 아버지의 자식으로 태어나 이 자리에 있을 뿐인 사람일세. 그런 사람에게 권력을 주는 것이 옳다 생각하나? 이 나라의 주권은 국민의 것일세. 내가 이 결의안을 부정한다면 나는 헌법에서 규정한 국민주권을 부정하는 것이 되는 거지.”

나무상자에서 옥새를 꺼낸 그는 옥새에 인장을 묻혔다.

“하지만 폐하, 주권을 가진 국민들은 이를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이 결의안을 막을 수 있는 건 폐하뿐입니다.”

쿠니키다는 절을 하며 그를 막으려 했다. 하지만 그는 천천히 옥새를 들었다.

“저항에 가치가 있다면 말이네. 내 저항에도 가치가 생기는 걸세. 그 가치는 지금의 일본에서는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야. 이 결정은 일본국을 위험에 빠트릴 수 있지만 동시에 일본국의 근간을 지키기 위한 걸세.”

그리고 그는 문서에 옥새를 찍었다.

“이누이군. 이 문서를 가지고 가게. 그리 급하게는 말고, 가능한한 소란스럽게, 아주 천천히 국회의사당으로 가져가주게. 중의원은 현시간부로 해산되었다고 말이네.”

“폐하!...”

쿠니키다는 바닥에 눈물을 흘렸다.

“쿠니히로군, 미안하네. 자네나 나나 이미 물결에 쓸려가는 사람들이네. 이미 저항 할 수 없으니 손에 쥔 짐이라도 끝까지 붙잡고 있는 수밖에 없네.”

커튼 너머의 그는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