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안돼..."

 

티아멧의 애달픈 목소리가 허공에서 메아리쳤다.

 

"안돼! 제발..."

 

그녀의 간절한 외침에도 동료를 향한 경비용 렘파트의 폭력은 멈추지 않았다

 

차가운 무쇠 덩어리가 티아멧의 동료를 강타할 때마다 그녀의 금속 골격이 우지끈, 하는 소리를 내며 바스러져 갔다.

 

앓는 듯이 흘러나오는 동료의 신음소리조차 허용치 않겠다는 듯이 경비용 렘파트는 입에서 피를 토하며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 동료의 배를 강하게 걷어찼다

 

"그만... 그만해!!!!"

 

'끼이익!'

 

귀를 찢는듯한 금속의 파열음과 함께 티아멧을 구속하던 쇳덩이가 부서져 땅에 떨어짐과 동시에 그녀는 눈을 떴다.

 

깨어난 티아멧의 몸은 머리에서 등에 이르기까지 식은 땀으로 흥건히 젖어 어제 썼던 샴푸향으로도 가려지지 않을 만큼 꿉꿉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아직 현실을 자각하지 못했는지 두근대는 가슴을 부여잡고 숨을 헐떡이던 그녀는 천천히 호흡을 고르고 줄줄 흘러내리는 땀을 옷소매로 닦아내며 중얼거렸다.

 

"....또 꿈이야?"

 

오늘도 똑같은 악몽

 

언제나 같은 장소에서, 같은 장면을 보고, 무겁게 자신의 몸을 짓누르고 있던 구속구를 풀면 그제서야 잠에서 깨어나는, 매일이 그런 악몽의 연속이었다.

 

티아멧이 겨우 진정하고 창밖을 바라보자 쨍쨍하게 떠오른 햇살이 바닷속까지 들어와 그녀의 방 안을 은은하게 비춰주고 있었다.

 

정신을 차린 그녀는 몸 속 깊은 곳에서부터 느껴지는 타는 듯한 갈증에 몇 병이나 물을 들이켜 보았으나 마음 한구석이 불편한 느낌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티아멧은 어떻게든 이 불편함을 해소해보기 위해 일단 방 밖으로 나가기로 결정하고 샤워실로 들어갔다. 땀으로 범벅이 되어 야릇한 향을 내뿜는 잠옷을 아무렇게나 벗어던진 그녀는 최대한 온도를 낮춘 차가운 물로 몸을 씻어내기 시작했다

 

순간 느껴지는 물의 차가운 감촉에 몸을 부르르 떨기도 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감각에 적응한 티아멧은 사령관에게 선물 받은 사과 향의 바디워시로 몸 구석구석을 깨끗이 씻어내었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물을 한참이나 맞고 있으니 그녀는 마치 묵혀둔 근심 걱정이 날아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녀는 줄곧 힘든 일이 있으면 무리하게 몸을 혹사시켜 그것을 잊으려고 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 습관이 연구실에서 받은 극한의 고통과 스트레스 때문인지, 아니면 그녀 특유의 독립적인 성격 때문인지는 티아멧 스스로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사령관과 가까워진 이후로는 자해와 같은 극단적인 방법은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는 진전이 있을 뿐이었다.

 

거의 30분 가량의 샤워를 마친 티아멧은 샴푸와 마찬가지로 사령관에게 선물 받은 커다랗고 기다란 원형 거울 앞에 서서 물기를 닦아내었다.

 

티끌 하나 없이 매끈한 그녀의 피부는 놀라울 정도로 하얗고 눈부시게 빛났다. 실험체가 맞나 싶을 만큼 아름다운 그녀의 나체는 같은 여성이 봐도 반해버릴 만한 절묘한 미적 감각을 뽐내었다.

 

하지만 그녀는 어느새 고달픈 고문의 흉터조차 없이 말끔해진 자신의 몸을 원망했다. 흉터가 사라져갈수록 동료들에 대한 기억도 함께 사라져가서, 지난 시간 동안 가해진 실험으로 인해 사라져간 그녀들이 뼈에 사무치게 그리워서였다.

 

몸의 물기를 전부 털어낸 티아멧은 자신의 볼륨감 있는 가슴을 한탄스레 조물거리다가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주섬주섬 겉옷을 걸치고 바깥으로 나갔다. 이대로 방에 있다가는 정말 얼마 가지 못해 미쳐버릴 것이 일목요연한 탓이었다.

 

평소 마음이 심란할 때 애용하던 테라스로 발걸음을 옮기자 다소 맹한 표정을 한 에밀리가 자신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안녕하세요오..." 라고 인사를 건네왔다.

 

은은한 분홍빛의 은발을 휘날리며 걸어가는 에밀리의 깜찍한 모습에 기분이 조금 나아진 티아멧은 자신의 주머니에서 '참 잘했어요 사탕' 하나를 꺼내 그녀의 손에 쥐여주고 발길을 재촉했다.

 

카페테리아가 생긴 이후, 생각보다 좋은 조경을 자랑하는 함교 쪽의 테라스엔 티아멧과 팬텀처럼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바이오로이드들을 제외하고는 발길이 뚝 끊겼다. 덕분에 티아멧은 전보다 자주 그곳에 들러 혼자 생각을 정리하고는 했다

 

항상 테라스의 창가 자리에 앉아 바닷속 풍경을 바라보며 무언가 깊이 고심하는 티아멧을 지켜보던 팬텀은 그녀와 서로 고민을 나누고자 했으나 안타깝게도 그녀의 바람은 이뤄지지 못했다. 티아멧은 팬텀의 존재 자체를 눈치채지 못했고, 팬텀은 티아멧에게 말을 건낼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

 

"어머, 오랜만이네요?"

 

티아멧이 에밀리 덕분에 조금 가벼워진 마음으로 테라스의 문을 열자 창가 쪽 탁상 자리엔 이미 레이시가 앉아있었다. 레이시는 갑자기 들이닥친 티아멧을 의외라는 눈빛으로 바라보다 살풋 웃으며 자신의 옆자리를 향해 손짓했다.

 

"....실례하겠습니다, 레이시 씨."

 

"그냥 언니라고 불러요.“

 

티아멧은 종종걸음으로 걸어와 레이시가 앉은 자리 옆에 살포시 앉았다. 방금 샤워를 마친 탓에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사과 향이 레이시의 코를 간질였다. 그녀는 성장기 소녀처럼 한창 무르익은 티아멧의 몸매를 한번 눈으로 쑥 훑고 난 뒤, 실험체라기에는 다소 귀티가 흐르는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 그렇게 보지 말아주세요...“

 

"후후, 미안해요. 어쩐지 제 기억속에 있는 동생의 얼굴과 닮은 것 같아서요."

 

동생이라는 말에 티아멧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어라, 레이시 ㅆ... 언니에게 동생분이 계셨나요?"

 

", 진짜 동생은 아니에요. 인간들에게 주입받은 가짜 기억이긴 하지만 가짜라는 것을 알게 된 후에도 여전히 그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더라고요. 후후, 정말 바보 같죠?"

 

레이시는 티아멧이 걱정할까봐 밝게 웃으며 이야기를 풀어나갔지만 자기도 모르게 눈가에 물방울이 맺히는 것은 막을 수가 없었다.

 

"... 제가 실례되는 질문을..."

 

티아멧은 당황해서 말까지 절었다. 인간관계가 서툰 티아멧을 배려하려는 듯 레이시는 얼른 손가락으로 눈물을 훔쳐내고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아니에요. 이곳에 오고 나서부터는 전부 괜찮아졌어요. 다른 분들이 많이 챙겨주셨거든요. 사령관님도, 딱딱해 보이지만 사실은 부드러운 마음씨를 가진 팬텀 양도요. 그것보다, 티아멧 양은 여기까지 어쩐 일로 오셨나요? 카페가 생긴 이후로는 이곳에 발길이 뚝 끊겼다고 생각했는데..."

 

레이시는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려 티아멧에게 질문했다. 단지 할 일이 없어서 왔다고 하기에는 티아멧의 안색이 너무 어두웠고, 또 평소 다른 이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 그녀가 걱정되는 마음도 있어서였다.

 

", 다른 이유가 있나요? 단지 이곳이 좋아서 온 거에요."

 

"거짓말. 정말 이유가 그것뿐인가요?"

 

눈치가 빠른 레이시는 티아멧의 거짓말을 금방 간파할 수 있었다. 발뺌할 구석을 찾지 못한 그녀는 금세 본심을 털어놓았다.

 

"사실은 오늘도 악몽을 꿨어요."

 

"악몽?"

 

순간 레이시의 표정이 일순간 일그러졌지만 티아멧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 혼자 잘 때면 항상 악몽을 꿔요. 실험실에서 제가 구속을 풀기 전까지 동료들이 인간들에게 고문당하는 악몽을요."

 

"그랬군요..."

 

"가끔은 참기 힘들 만큼 고통스러워요. 꿈에서 깬 뒤에도 동료들의 비명소리가 귀에서 떠나지 않고, 제 눈앞에 동료들의 원혼이 나타나 저에게 저주의 말을 퍼붓고는 또 사라져요. 그곳에서 홀로 행복하냐고... 자신들의 목숨 하나 지키지 못한 너 따위 것에게 살아갈 가치가 있을 것 같냐고..."

 

티아멧은 두려움에 휩싸여 얼굴이 창백해졌다. 레이시는 밤마다 찾아오는 극한의 공포를 떠올리고는 벌벌 떨고 있는 티아멧을 자신의 품에 꼭 안아주었다.

 

"자책하지 말아요. 저는 아는 것이 별로 없어서 좋은 조언을 해주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당신에게 잘못이 없다는 것은 그녀들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아니요. 제가 너무 약해서 그랬던 거에요."

 

티아멧은 레이시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웅얼거렸다. 레이시는 자신에게 포옥 안겨서 어리광을 부리는 그녀를 한참이나 토닥여주었다.

 

"... 그렇다면 이건 어때요? 티아멧처럼 실험을 당했던 아이들이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들어보는 거에요. 에밀리도 있고... 네오딤도 있고... 또 에키드나도 있잖아요?"

 

"훌쩍... 그럼 이 죄악감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을까요?”

 

레이시는 마치 아기처럼 자신에게 얼굴을 부비는 이 작은 소녀가 사랑스러웠다. 웅웅거리는 환풍구의 팬 소리가 티아멧의 울먹이는 소리를 잡아먹으며 울려 퍼졌다. 덕분에 그녀는 저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는 누군가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신의 설움을 레이시에게 털어놓을 수 있었다

 

티아멧은 레이시에게 안겨있는 동안 알 수 없는 안정감을 느꼈다. 적당한 밝기로 방 구석구석을 비춰주는 전열등의 빛은 그녀의 등 뒤를 따스하게 감싸 안으며 그녀의 비애를 조금 더 구슬프게 만들었다. 티아멧은 자신보다 더 끔찍한 실험을 당했을 레이시가 오히려 자신을 위로해주는 아이러니한 상황에도 여의치 않고, 그녀에게 교태를 부렸다.

 

한참이나 애수에 찬 시간이 흘렀다. 레이시의 가슴을 체액으로 흠뻑 적신 후에야 마음을 달랜 티아멧은 포근한 가슴팍에 묻고 있던 얼굴을 천천히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티아멧의 얼굴은 눈물로 뒤덮여 우스운 꼴을 하고 있었다. 레이시는 그런 그녀조차 귀여웠는지 싱긋 웃으며 그녀의 볼을 어루만졌다.

 

"분명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일단 에밀리에게 가보는 건 어때요? 그 아이는 가끔 생각지도 못한 좋은 질문들을 던져주거든요.“

 

레이시의 확신의 찬 말에 용기를 얻은 티아멧은 그녀의 무릎에서 내려와 활기차게 웃었다. 방금까지 응석을 부리던 아이가 맞나 의구심이 들 정도로 밝은 웃음이었다.

 

", 알겠어요. 그럼 저 먼저 가보겠습니다."

 

"힘내요. 분명 다른 사람들이 당신의 힘이 되어줄 거에요.”

 

레이시는 몸을 돌려서 티아멧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푸른 머리 소녀가 꾸벅 감사 인사를 하고 나가자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 티아멧을 도울 방법을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린 그녀는 지체없이 사령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2.

 

테라스를 나선 티아멧은 또다시 고뇌에 빠졌다. 자신의 행동이 은인들에게 민폐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자신의 비탄을 들어준 레이시의 조언에 보답하기 위해서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캐노니어 부대의 숙소에 들어선 그녀는 에밀리의 방을 찾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빨지 않은 속옷들과 전투복이 널부러져 너저분한 분위기를 풍기는 공용 숙소를 지나자 마침내 에밀리의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에밀리의 방문에는 휘갈긴듯한 어눌한 글씨로 그녀의 이름이 적혀있는 팻말이 걸려있었다. 팻말 곳곳에는 그녀를 향한 동료들의 메시지가 한마디씩 적혀있었고, 색색의 볼펜으로 새겨진 같잖은 그림들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훈훈한 미소를 짓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에밀리, 들어가도 될까?" 푸른 머리 소녀가 방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누구세요?" 곧이어 연분홍 머리 소녀가 대답했다.

 

"나야, 티아멧.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찾아왔어."

 

"하고 싶은 말...?"

 

문을 사이에 두고 잠깐의 대화가 오갔다. 모르는 사람에게는 문을 열어주지 말라는 대장의 당부를 철저하게 지킨 에밀리는 몇 마디 대화와 함께 상대방의 정체를 확실히 파악하고 나서야 문을 열어주었다

 

"들어와. , 마침 심심하던 참이었어." 에밀리가 문틈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 말했다.

 

문틈으로 분홍 머리 소녀의 머리카락이 살랑이자 그 나이대 여자아이들 특유의 풋풋한 체취가 티아멧의 코를 간지럽혔다. 체리 향 샴푸 냄새에 땀내가 조금 섞였지만, 그렇다고 불쾌하지는 않은 냄새였다.

 

에밀리의 안내를 받으며 거실에 입성한 티아멧은 그 중앙에 있는 나무 의자에 힘없이 걸터앉았다. 에밀리가 내온 쟁반 위에 달콤한 냄새를 풍기는 초콜릿 칩이 박힌 고소한 쿠키와 우유와 함께, 두 사람은 조용히 작은 다과회를 즐겼다. 화려하지는 않았으나 수수하고 깔끔한 맛이 일품인 쿠키는 한 입 베어 물때마다 부드럽게 바스러지며 입안을 초콜릿의 달콤함으로 수놓았다

 

처음에는 고귀한 부잣집의 아가씨처럼 과자를 하나하나 음미하던 티아멧이 얼마 지나지 않아 접시의 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쿠키를 허겁지겁 먹어 치워버린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접시를 다 비우고서야 에밀리의 따가운 시선을 눈치챈 티아멧은 헛기침을 하며 손수건으로 입 주변을 닦았다

 

으으... 난 별로 못먹었는데...”

 

어깨가 추욱 쳐진 에밀리는 입안에 과자를 가득 채운 채 우물거리고 있는 티아멧을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 미안해, 에밀리. 너무 맛있어서 그만...”

 

티아멧은 에밀리에게 유감을 표하고, 자신이 찾아온 이유를 밝혔다.

 

으음..? 연구실에서의 생활?”

 

에밀리는 떠올리기 싫다는 듯이 고개를 좌우로 마구 흔들었다.

 

말하기 힘들면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아니면 기억나는 게 없어?”

 

아니야. 좋은 곳은 아니었지만, 알려줄게.”

 

3.

 

에밀리는 미간을 미세하게 찌푸리며 이야기의 물꼬를 텄다. 그녀의 비장한 태도에 압도당한 티아멧은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그곳에는 나 말고도 많은 동료들이 있었어. 하지만 연구원이라는 사람들은 나를 건드리지 않았어. 정장을 입은 남자가 나는 비싼 물건이라면서 때리면 안 된다고 했거든.”

 

그랬구나...”

 

말마따나, 에밀리는 블랙리버의 군사기술을 총동원해 만들어진 비밀병기였으므로 일반 실험체들과는 달리 혹독한 고문이나 분풀이를 당하는 일은 없었다. 다만 그녀는 정신적으로 온전치 못한 상태였기에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소수의 인원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에밀리를 학대하곤 했다. 그 학대의 일종에는 이런 것도 있었다.

 

"... 그런 일도 있었어. 연구원이 나한테 친구를 때리라고 시켰는데 나는 하기 싫다고 그랬어. 그랬더니 그 사람이 쇠몽둥이로 나를 엄청 많이 때렸어... 으음... 엄청 아팠어. 입에서 피가 흘러나올 정도로 맞았거든. 다 맞고 난 후에 나는 다시 독방 안으로 던져졌는데, 그 뒤로 그 친구를 보지 못했던 것 같아. 어디로 간 걸까?“

 

인간은 물론, 다른 동료들에게도 폭력을 휘두르지 못하도록 제한이 걸린 점을 악이용한 연구원들이 에밀리에게 동료들을 해하도록 명령한 것이었다. 그녀는 동료 대신 구타 당함으로써 동료를 지키려고 했으나, 안타깝게도 동료가 무사하는 일은 없었다. 에밀리의 행동이 오히려 연구원의 화를 자극한 바람에 그녀는 끔찍한 화학실험으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 다행히 에밀리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으나 동료가 얼마 가지 못해 죽었다는 것은 그녀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담담하게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하는 에밀리를 보며 티아멧은 인간들을 향한 분노와 가증스러움을 느꼈다. 이토록 순수하고 여린 아이에게 이런 폭력을 가할 만큼, 그들은 이미 지성체라고 말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과감했고, 미쳐있었다

 

티아멧은 인간성을 잃어버린 그들의 행적이 역겨웠던 나머지 급격하게 올라오는 구토감을 겨우 참아내었다. 도저히 앞으로의 이야기들을 받아들일 자신감이 없었던 그녀는 에밀리의 말을 끊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오르카에 온 뒤로 힘들었던 점은 없었어?"

 

"조금... 힘든 점은 있었어. 나는 뭐든지 미숙하니까 동료들이 없으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조금 슬펐어.”

 

에밀리는 심하게 과장된 몸짓으로 자신의 무능함에서 온 괴로움을 표현했다

 

그럼, 지금은 어때?”

 

. 지금은 괜찮아. 대장이랑... 동료들이 많이 도와줬어. 지금은 혼자 컵라면도 끓일 수 있어. 그리고 사령관도 도와줬어. 저번에는 전투에서 져서 혼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미안하다면서 나를 안아줘서 더 힘낼 수 있었어. 실수해도 사령관은 나를 혼내지 않았어. 그럴 수 있다면서 사탕도 주고 응원해줬어.”

 

에밀리는 사령관의 이야기가 나오자 상기된 뺨을 두 손으로 감싸고 계속해서 말했다. 사령관과 있었던 일에 대해 수없이 조잘거리는 그녀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환한 웃음으로 가득했다. 티아멧은 사랑에 빠진 순수한 소녀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다시 질문했다.

 

그랬구나. 혹시 과거에 있었던 일 때문에 힘들지는 않아?”

 

? 그다지 신경 안 써. 옛날 일을 생각하면 기분이 안 좋아지잖아. 그래서 굳이 그것들에 대해 생각하지도 않고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아.”

 

에밀리의 명료한 대답에 티아멧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 그럼 전혀 그것들이 떠오르지 않아? 그렇게 힘들었는데 인간들에게 화가 나지 않아?”

 

티아멧의 열띈 응답에 에밀리는 이상하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티아멧은 너무 힘들어보여.”

 

?”

 

웃고 있는데 웃고 있는게 아닌 것 같아. 항상 슬퍼보여. 왜 그렇게 힘들어 하는거야?”

 

무슨 말을 하는...”

 

에밀리는 정곡을 찔려 당황한 티아멧의 말을 끊고 계속 말했다.

 

사령관이랑 있을 때도 편안해 보이지가 않았어. 티아멧은 사령관을 좋아한다고 했는데, 사령관에게 의지하지 않는 것 같아서 이해가 안 가. 나는 사령관한테 안겨있는 게 제일 좋은데...”

 

실제로 티아멧은 오르카에 온 뒤에도 단 한번도 편하게 웃어본 적이 없었다. 사령관과 함께 있으면 힘이 풀리면서 안심이 되긴 했지만 에밀리의 말처럼 그것이 마냥 즐거운 일은 아니었다. 남에게 의지한다는 것에 피로를 느끼는 그녀에게 사령관이라는 버팀목은 쉼터인 동시에 약점이 되기도 했다

 

... 사랑하는 사람은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주어야 한다고 했어. 사령관도 티아멧을 사랑하니까, 사령관은 티아멧의 버팀목인 거야. 그러니까 사령관 옆에서는 마음 놓고 쉬어도 된다고 생각해.”

 

정말 그럴까? 사령관이 나를 부담스러워 하면...”

 

티아멧은 사령관을 사랑하는구나.”

 

티아멧은 물 밀 듯이 쏟아져 나오는 에밀리의 말들에 혼란스러워했다.

 

사랑하니까, 부담스러워 하지 않을거야.”

 

에밀리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너무나 해맑은 분홍 머리 소녀의 미소에, 티아멧은 반문할 여지도 찾지 못하고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하하... 조금 마음이 가벼워진 것 같아. 고마워, 에밀리. 그럼 난 이만 가볼게.”

 

. 다음에 또 놀자.”

 

티아멧이 에밀리의 배웅을 받으며 방에서 나오자 마침 네오딤이 그녀의 방 앞을 둥실둥실 떠다니고 있었다.

 

"어라, 티아멧이네..? 오랜만이야."

 

"... 네오딤. 마침 네 방에 가려던 참이었어. 너에게 몇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거든."

 

4.

 

그래서... 내가 실험실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하다는거야?”

 

티아멧의 질문에 네오딤은 잠짓 당황한 눈치였다. 사랑하는 사령관에게조차 귀띔만 해주었던 자신의 과거. 그 어두운 이야기를 남에게 알려주는 것은 강인한 정신을 가진 그녀에게도 버거운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강요하는 건 아니야. 아픈 과거와 다시 직면하는 게 힘든 일이라는 것은 내가 누구보다 가장 잘 알고 있으니까.”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내심 네오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다. 항상 침착하고 조용한 그녀에게는 어떤 과거가 있었을지, 그 난관을 어떻게 이겨내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괜찮아. 티아멧이 성장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면 그 정도 일은 할 수 있어. 네 말대로, 우리야말로 서로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가장 잘 알고 있으니까.”

 

티아멧과 네오딤은 오르카 중앙으로 쭈욱 이어진 복도를 걸으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신화 속의 미스릴처럼 연한 푸른 빛을 띄는 합금으로 된 통로 안에 속삭이듯이 울려 퍼지는 네오딤의 목소리는 티아멧의 마음까지 차분하게 만들어주는 듯 했다. 평소 노래를 즐겨부르는 네오딤이지만, 그녀가 처음부터 이렇게 밝은 모습을 보였던 것은 아니었다.

 

"어디서부터 말하는 게 좋을까. , 그렇지. 난 원산에 있는 실험실에서 태어나서 자랐어. 내 힘을 두려워한 연구원들이 나를 괴롭히지는 않았지만 대신 다른 친구들은 많이 힘들었던 것 같아. 가끔 만나는 아이들은 모두 하나같이 피를 흘리고 있었거든."

 

인간들의 괴롭힘이 없었을 뿐, 그들의 잔혹한 인체실험과 합법적인고문들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빛줄기 하나 비추지 않는 어두운 밀실, 그곳에서 네오딤을 비롯한 많은 자매들은 비인륜적인 실험의 희생양이 되었다. 블랙리버의 일렉트라 프로젝트의 완성형으로써, 가장 혹독한 실험을 받은 네오딤은 감정 모듈에 걸린 강력한 제한으로 인해 인간들에게 원치 않는 호감을 품어야만 했다

 

죽이고 싶은 저들에게 느껴지는 연모의 감정은 네오딤을 더 숨 막히게 졸라, 그녀의 숨통을 끊을 듯이 얽매었다. 증오와 호감, 공존할 수 없는 두 개의 감각이 그녀의 몸속에서 살아 숨 쉬며 마치 기생충처럼 그녀의 정신력을 좀먹어갈수록 인간들의 실험은 오히려 더 가학적이고 폭력적인 행태로 발전해갔다. 마치 그녀의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려는 듯, 날이 갈수록 가혹해지는 실험은 결국 네오딤을 망가뜨렸다.

 

반쯤 넋이 나간 네오딤에게 내려온 구원자는 한 노인이었다. 고지식해 보이는 두꺼운 렌즈의 안경을 쓰고 있던 그 노파는 바로 네오딤이 있던 연구실의 연구원이었다. 그녀는 인간과 다를바 없는 모습을 한 바이오로이드들에게 가해지는 실험들을 혐오했으나 상부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었으므로, 업무 외에 그녀들에게 가해지는 부당한 폭력을 막거나 정신적으로 심약해진 바이오로이드들의 상담을 도맡아 하는 등의 간접적인 방식으로 그녀들을 도왔다. 네오딤도 그녀의 도움을 받은 소녀들 중에 하나였다

 

노인과 만난 이후, 네오딤은 눈에 띄게 밝아졌다. 온몸에 남은 상처와 화상 자국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으나 그녀 마음에 깊게 스민 인간을 향한 혐오와 증오는 점차 사그라들어 갔다

 

하지만 네오딤의 짧은 인생에서 유일하게 빛났던 그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멸망 전쟁이 일어나기 얼마 전, 할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얻은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연구원들이 하위 실험체들을 처분하고 전부 도망가는 바람에 연구실에 혼자 남게 된 것이었다

 

노인은 죽기 전까지 특히나 강한 능력으로 인해 폭주할 가능성이 있는 네오딤을 걱정했다. 그녀의 임종을 지키려는 몇몇 연구원들을 물리고 방안에 네오딤과 실험체들만을 남긴 그녀는 그곳에 있는 모두에게 끝까지 살아남으라고 당부했다. 살아 있다면, 언젠가 세상에 자신을 꽃피울 수 있는 시간이 온다는 말을 끝으로 그녀는 조용히 잠들었다.

 

혼자 남은 네오딤은 노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연구소 안에 가득 쌓인 보존 식량을 아끼고 아껴서 마침내 몇 십년이라는 시간을 홀로 견뎌낸 네오딤을 구한 것은 불굴의 마리였다

 

블랙리버의 기밀자료를 토대로 네오딤의 위치를 알아낸 그녀는 즉시 구출에 들어갔고, 마침내 마주한 그녀의 모습은 초췌하기 그지 없었다

 

원산에 홀로 남아 영양공급을 받지 못해 죽기 일보직전의 상태였던 그녀는 물을 아껴마시기 위해 씻지도 못한 통에 머리카락이 엉키고 섥혀 못난 꼴을 하고 있었고, 스트레스로 예민해졌기 때문인지 구원병들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마리의 설득 끝에 저항군에 합류한 네오딤은 마리를 따라 오르카에 들어오게 되었다. 처음부터 순탄한 생활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에밀리와 마찬가지로 사령관의 보살핌과 가르침으로 인간에 대한 두려움을 전부 떨쳐낸 네오딤은 오르카의 실험체 출신 중에서도 가장 먼저 안정을 찾았고, 지금에 이른 것이었다.

 

네오딤에게도 그런 과거가 있었구나.”

 

힘든 일도 많았지만 난 지금 행복해. 결국 사령관을 만나게 되었으니까. 처음 만났을 때, 사령관은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거라고 했어. 지금에 와서 되새겨보면 전부 맞는 말이었어. 티아멧, 너도 분명히 행복할 수 있을 거야. 지금 소중한 것에 집중하고, 과거에 널 괴롭혔던 것들을 이해하고 용서한다면 말이야. 그것이 기억이든, 이별이든, 아니면 사람이든.”

 

그렇게 말한 네오딤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창밖의 물고기 무리를 바라보았다

 

살아 있다면, 언젠가 세상에 자신을 꽃피울 수 있는 시간이 온다는 말. 난 믿지 않았어. 가끔은 나에게 쓰잘데 없는 희망을 심어주신 그분을 원망하기도 했지. 하지만, 결국 나는 끝까지 살아서 버텼고, 지금 이곳에서 계속 살아가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살아갈 거야. 티아멧도 분명 나처럼 될 수 있으리라 믿어. 내가, 사령관이, 동료들이 그렇게 되도록 도와줄 거야.”

 

티아멧은 깊은 감명을 받았다. 한편으로는 철없이 지금의 신세를 비관하던 자기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그녀를 향해 방긋 웃어 보이는 네오딤은 해양에 투과된 태양 빛을 받아 하늘하늘 빛나고 있었다. 숭고함마저 느껴지는 그 모습은 혹독한 겨울 동안 역경을 이겨내고 피어난 목련 같았다.

 

5.

 

한편, 사령관실에서는 무언가 큰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사령관님?”

 

레이시가 사령관의 품에 안긴 채 말했다. 한껏 풀어진 표정으로 그의 온기를 즐기는 중인 레이시는 세상을 다 가진 듯이 편안해 보였다.

 

좋은 생각이야. 그런데 의외인걸? 레이시가 먼저 나서서 이런 부탁을 한 건 처음이잖아.”

 

후후, 티아멧 양은 아직까지 마음 속의 응어리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것 같았어요. 같은 상처를 공유하는 이로써, 그녀를 도와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기는 것 같았죠. 사령관님이 미처 인도하지 못한 어린 양들을 인도하는 것이 사령관님께 구원받은 제 사명이니까요. 다른 이유는 없어요.”

 

곧 부서져 버릴 것처럼 위태로운 삶을 살던 레이시가 남을 돌봐주는 경지까지 성장했다는 사실이 뿌듯했던 사령관은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겹쳤다. 레이시는 사령관의 온기가 남아있는 이마를 기쁘게 어루만지며 생글거렸다.

 

과연 아우로라 양이 승낙해줄까요...? 혹시나 싫어하기라도 한다면...”

 

아니, 오히려 기뻐할 거야. 너희들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아이니까 너희들을 위한 일, 그것도 자신이 잘하는 요리를 하는 일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

 

사령관의 확언에 안도한 레이시는 살풋 웃으며 말했다.

 

역시 그렇겠죠? 그랬으면 좋겠네요.”

 

6.

 

네오딤의 미소를 뒤로하고, 티아멧은 마지막으로 에키드나에게 향했다. 에키드나의 방은 네오딤의 방과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네오딤과 마찬가지로 -네오딤의 후속개체이니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일렉트라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제작된 그녀는 과거나 연구 기록에 대한 정보 자체가 극히 알려져 있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 특유의 음침한 분위기가 겹쳐, 그녀 곁에 먼저 다가가는 이는 사령관을 제외하고는 거의 드물었다

 

물론 그것은 티아멧도 마찬가지였고, 부관 업무나 출격 외에는 방에서 나오지 않는 그녀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비슷한 과거를 공유하는 처지인 티아멧에게도 흔치 않았다. 따라서 그녀도 여전히 에키드나에게 출처 불명의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녀의 방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실례합니다. 에키드나 씨, 계신가요?” 

 

에키드나의 방 앞은 오르카의 다른 방들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복도였으나 어쩐지 검은 기운이 스며 나오는 것만 같았다. 티아멧이 다시 한번 노크하려는 찰나, 거대한 문이 기분 나쁜 금속음을 내며 열렸다. 그녀는 떨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용기 내어 빛 한줄기 새어 나오지 않는 그 방의 안으로 발을 들였다.

 

잠깐.”

 

익숙하지만 여전히 소름이 돋는 음침한 목소리. 그것과 함께 들리는 쇳가루들의 진동음. 간간히 들려오는 생체전기의 파지직거리는 소리.

 

더이상 다가오면 내게 확! 잡아먹힐지도 몰라. 각오는 됐니?”

 

. 저는 에키드나 씨에게 듣고 싶은 것이 있으니까요. 절대 물러서지 않을거에요.”

 

후후, 재밌는 아이구나? 너처럼 배짱 있는 아이들은 항상 앞에서 달리다가 그 앞에서 기다리던 맹수에게 가장 먼저 잡아먹히고 말지.”

 

티아멧은 청각을 자극하는 공포심에 조금 뒷걸음질 쳤으나 문은 이미 닫혀있었다. 불이 전부 꺼진데다 창문도 없는 탓에 시야를 완전히 차단당한 그녀는 극도의 불안으로 몸을 떨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그녀를 보며 입맛을 다시던 에키드나는 주변의 금속가루를 움직여 티아멧의 팔다리를 구속했다. 티아멧은 처음 겪어보는 형태의 공포로 인해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에키드나의 앞까지 끌려갔다

 

내가... 두렵니?”

 

으윽... 두렵지... 않아요...”

 

에키드나가 티아멧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도 눈을 부릅뜨고 에키드나를 노려보는 그녀의 모습은 안쓰럽기까지 했다. 에키드나는 가엾은 소녀의 답변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녀를 부드럽게 바닥에 내려놓고 손가락을 튕겨 방 안의 불을 켰다. 광자가 방 안을 가득 채우자 그제서야 지금껏 단 한 명밖에 보지 못했던 에키드나의 방이 실루엣을 드러냈다

 

강렬하고 진한 레드와인 색의 벽지, 같은 색으로 염색된 최고급 실크로 짜인 벽에 걸려있는 커튼, 은은하고 중독적인 향을 풍기는 보라색의 라벤더 향초가 놓인 작은 테이블, 그 옆에 있는 커다랗고 푹신해 보이는 라텍스 재질의 침대.

 

얼떨떨한 표정을 지은 티아멧은 이미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아있었다. 바닥에서 올려다본 에키드나의 모습은 요염하면서도 위압감이 느껴질 만큼 날카로운 분위기를 내었다

 

, 말해봐. 네가 듣고싶은 것이 뭔지.”

 

에키드나가 손을 몇 번 공중에 휘휘 흔들자 그녀의 몸에서 전기장이 방출되며 그녀 옆에 있던 새카만 금속들이 일제히 움직여 티아멧을 일으켜 세웠다. 다시 느껴도 적응되지 않는 짜릿한 감각에 티아멧의 머리카락은 빳빳하게 곤두서고 말았다.

 

에키드나 씨는... 과거에 어떤 실험을 당했나요?”

 

어머, 감당할 수 있겠어? 내 이야기는 매혹적이지만 아주 위험한... 장미같은 것이야. 너도 알다시피 인간들은 무지하고 이기적이었어. 그래서 우리를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실험했고, 나는 그 과정에서 태어났지.”

 

알려주세요. 저는 알아야만 해요.”

 

티아멧의 당찬 대답을 들은 에키드나는 잠시 눈을 감더니 싱긋 웃어보였다. 흥미롭다는 듯이 티아멧을 훑어보던 그녀는 곧 이야기를 시작했다.

 

네오딤의 완성에도 인간들은 더 완전한 실험체를... 전지전능한 을 만들어내기를 원했어. 어리석은 일이었지. 그들은 만족을 몰랐어. 결국 새 프로젝트가 시작되었고 그 실험의 부제는 바로 자연 선택이었어.”

 

티아멧은 순간 몸을 움찔 떨었다. 그 타이런트가 개발된 프로젝트와 같은 부제. 그것만으로도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무거웠다.

 

난 아주 나약했어. 내가 그 실험에 투입되었을 땐 이미 많은 동료들이 서로를 찢어 죽이며 피의 축제를 벌이고 있었지.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이미 죽은 뒤였어. 내가 먼저 죽이지 않으면 남에게 죽고 마는, 그런 곳이었으니 심약한 아이들이 살아남지 못하는 건 지당한 처사였어. 나는 도망치기 바빴어. 그러던 중에 한 실험체에게 도움을 받고 목숨을 건졌지. 그래, 지금 생각해보면 난 그때 이미 한 번 죽었던 것일지도 몰라.”

 

에키드나는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물론 내 은인도 얼마 가지 못해 죽고 말았어. 멍청하게 밖에 나간 나를 지키려다가 말이야. 그녀도 나약했던 거야. 나를 지키지 않고 상대의 뒤를 쳤으면 분명 살 수 있었겠지. 하지만 그녀는 동정심이라는 어리석은 것에 이끌려 잘못된 선택을 하고 말았어.”

 

하지만 덕분에...!”

 

글쎄... 아무튼 그 일을 겪고 나서 나는 과거의 나를 죽였어. 비록 강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경쟁자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안정적인 전자기장을 가진 나는 장기전으로 지친 상대를 천천히 죽이거나... 아니면 오버플로우로 인해 능력을 사용할 수 없게 된 상대를 기습해 처리했어.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3층 건물 높이 만큼이나 쌓인 그녀들의 시체 위에서 그것에서 나온 피로 범벅이 된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나 자신만이 있을 뿐이었지. 불덩이처럼 일렁이는 검은 하늘과 그 밑의 대지를 빨갛게 물들인 자매들의 피. 지옥이 있다면 분명 그것과 비슷한 형태일 거야.”

 

티아멧은 그 참상을 상상하며 전율했다. 자신의 의지로 자매들을 학살하며 그녀가 느꼈을 배덕감과 우울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참혹한 것이었다. 티아멧이 감상에 젖어있을 틈도 없이, 에키드나는 말을 이었다.

 

역시, 넌 나와 달라. 너는 날 지키다 허무하게 죽어버린 그녀와 닮았어. 그 생지옥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운명에 맞서 싸웠던, 죽어가면서까지 웃음을 잃지 않았던 그 여자와.”

 

티아멧은 이해되지 않는듯한 표정을 짓고 고개를 기울였다.

 

난 수많은 자매들을 짓밟고 올라서서 지금 이 자리에 와있어. 하지만 너는 다르지. 지금까지도 동료들을 구해내지 못했다는 죄책감, 그리고 혼자 살아남아 행복한 생활을 즐기는 것에 대한 죄악감에 짓눌려 고통받고 있잖아. 그렇지?”

 

티아멧은 에키드나의 통찰력에 다시 한번 놀랐다. 에키드나는 놀랄 일이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한두 번 좌우로 젓더니 이내 말했다.

 

적어도 너는 행복할 가치가 있어. 네가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고 그 무엇도 그것을 부정할 수는 없어. 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과거가 네 현재에 관여할 자격은 전혀 없다는 말이야. ... 그래, 이 말이 좋겠다. 지금을 즐겨. 과거에 희생당한 이들이 정말 우리를 저주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우리는 보란 듯이 더 즐겁게 살아가면 돼. 그게 내가 쾌락을 쫓는 이유고, 그녀들에 대한 나의 사죄야. 그녀들의 몫까지 내가, 우리가 더 행복하면 되는 것이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해.”

 

에키드나의 말은 네오딤이나 에밀리와는 다른, 무거운 울림을 주었다. 이제야 마음속 응어리를 풀어낼 방법을 알아낸 티아멧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크게 웃고 말았다.

 

아하하..! 그걸 이제야 알았어. 정말 바보 같아. 눈앞에 있는 답을 찾지 못하고 미로 속을 헤매고 있었잖아.”

 

이제 실타래가 풀렸니?”

 

후후, 감사합니다, 에키드나 씨. 덕분에 깨달았어요. , 빨리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이한테?”

 

에키드나는 그렇게 말하며 천장의 등불을 향해 왼손을 들어 보였다. 그러자 그녀의 왼손 약지에 끼워진 황금빛 반지가 그 광휘를 과시하며 빛을 산란했다

 

...?”

 

, 사령관이라고 해야 하려나?”

 

티아멧은 의문이라는 표정을 지었다가 에키드나의 말에 환하게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

 

7.

 

티아멧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령실로 향했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그녀의 얼굴은 후련한 느낌마저 들 정도로 선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사령실 앞에서, 오랜만에 두근대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심호흡을 마친 티아멧은 천천히 그곳의 문을 열어젖혔다.

 

사령관! ...?”

 

당차게 방 안으로 뛰어들어간 티아멧은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모여있던 이들은 난데없는 그녀의 등장에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서로에게 무어라 속삭이기 시작했다. 잠깐의 정적이 끝나자 곧이어 여러 명의 목소리가 일시에 울려 퍼졌다.

 

축하해, 티아멧!”

 

어서 와서 앉아요, 티아멧 양.”

 

고깔 모자를 쓰고 깔끔한 드레스를 갖춰 입은 해괴한 옷차림을 한 레이시가 멋쩍게 웃으며 티아멧에게 손짓했다.

 

이건 대체...”

 

사령관은 굳어버린 티아멧의 손을 잡아끌어 각양각색의 초콜릿으로 장식된 커다란 테이블로 데려갔다. 그녀는 영문도 모른 채 주변의 분위기를 살폈으나 이것이 도대체 무슨 의도인지,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레이시? 빨리 티아멧한테 알려줘. 네가 제안한 거잖아.”

 

사령관은 자애롭게 웃으며 레이시의 등을 떠밀었다. 레이시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티아멧에게 다가가 사실을 고했다.

 

사실, 저 나름대로 티아멧 양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봤어요. 오늘은 티아멧 양이 여기 온 지 딱 한 달째 되는 날이잖아요? 그러니 그때의 발렌타인을 추억하며 이번엔 제대로 된 초콜릿 파티를 열면 어떨까, 생각했는데 사령관님께서 흔쾌히 승낙해 주셨어요. ,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네요.”

 

레이시가 그동안 있었던 일에 대하여 설명하는 동안, 티아멧의 눈가에는 어느새 아침이슬이 가늘게 맺혀있었다

 

티아멧은 눈물을 훔치고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차마 기다리지 못하고 입가에 초콜릿을 잔뜩 묻히며 먹고 있는 아이들과 혼자서 그녀들을 말리느라 정신이 없는 샬럿은 곧이어 도착한 마리아의 도움을 받아 아이들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조화롭게 꾸며진 디저트와 와인들은 과연 디저트의 명수인 아우로라의 작품답게 하나하나가 풍요롭고 진한 맛을 내었다. 보기에도 좋은 음식들이 한 접시 한 접시 사라져 갈 때마다 아우로라는 그 광경을 뿌듯하게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멋들어진 하얀 요리사 복장을 차려입은 아우로라는 낯가림이 심해서 먼저 티아멧에게 말을 걸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사령관의 등 뒤에 숨어있다가 이따금 힐끔힐끔 고개를 내밀어 그녀의 표정 변화를 주시하곤 했다. 분명히 이 파티를 주관한 것은 그녀였겠지

 

그 옆에는 그런 그녀를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소완과 그녀의 손을 잡고 구석으로 향하는 포티아까지,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이 작은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뭐하고 있어요? 어서 이 시간을 즐겨야죠.”

 

!?”

 

붕 뜬 기분에 휩싸여 연회장 한가운데 멀뚱히 서 있던 티아멧은 레이시의 부름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 음식들, 전부 아우로라 씨의 주도로 만들어진 것들이에요. 겨우 반나절만에 이렇게나 많은 음식을 만들어내다니, 대단하지 않나요?”

 

정말 그렇네요.”

 

그러니 어서 아우로라 양에게 가봐요. 그분도 수줍음이 많아서 먼저 다가가지 못하는 성격이거든요. 분명 티아멧 양이 먼저 말을 걸어주면 기뻐할 거에요.”

 

, ! 괜찮겠죠?”

 

한번 자신을 믿어봐요. 티아멧.”

 

레이시의 격려를 받은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아우로라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티아멧의 접근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콧노래를 부르며 다른 이들의 식사를 즐겁게 지켜보고 있었다.

 

저기... 아우로라?”

 

...! 헤헤, 우스운 꼴을 보였네. 티아멧? 여긴 무슨 일이야?”

 

화들짝 놀라 기다란 셰프 모자를 떨어뜨릴 뻔한 아우로라는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티아멧에게 인사했다.

 

,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왔어.”

 

? 당연히 해야할 일을 한 것 뿐인데 뭐...”

 

아우로라는 부끄러워 하면서도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레이시 언니의 부탁이었으니까 더 기쁜 마음으로 요리했어. 레이시 언니를 시작으로 생체 전기 기술이 발전하기 시작했고, 결국 내가 태어날 수 있었으니까.”

 

그랬다. 레이시의 탄생 이전에도 수많은 관련 실험이 진행되어왔고, 또 그 실험에서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레이시의 성공에도 만족하지 못한 사람들은 네오딤, 에키드나와 같은 더 진보한 능력을 가진 바이오로이드들을 만들어 내었다. 그 과정에서 또다시 많은 자매들이 상처입고, 희생당했지만 그녀들의 희생은 티아멧 자신, 그리고 아우로라처럼 새로운 세대의 탄생을 불러왔다. 그녀들은 죽었으나 그녀들의 실패는 곧 저물어가는 태양처럼 여전히 남아 오르카의 안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티아멧은 다시 한번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의 신세를 비관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녀는 아우로라의 대답을 듣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무수히 밝고 생기 어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우로라에게 고개 숙여 감사 인사를 전한 티아멧은 어리둥절한 표정의 그녀를 뒤로하고 자신의 안식처, 사령관에게로 향했다.

 

, 티아멧. 어서 ㅇ...”

 

어머~ 당돌해라!”

 

순식간에 일어난 입맞춤에 모두의 이목이 쏠렸다. 샬럿은 아이들의 눈을 가려주면서도 그새 감성에 젖어 감탄했다. 때마침 연회장에 들어온 3명의 실험체 출신들은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에밀리는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고, 네오딤은 쿡쿡대고 웃고 있었으며, 에키드나는 가져온 선물 상자를 네오딤에게 넘기고 흐뭇하게 웃으며 방에서 나갔다.

 

티아멧은 환희에 젖은 기색으로 사령관을 응시했다. 볼을 빨갛게 상기시킨 그 소녀는 첫 키스의 단맛을 몸소 느끼며 자신의 피앙세에게 안겼다. 사령관은 순간 어쩔 줄 몰라 당황했지만 자신의 배에 얼굴을 묻고 함박웃음을 짓는 그녀에게 레이시의 모습이 겹쳐 보이자 곧바로 답을 찾아내었다.

 

그는 그녀가 만족할 때까지 그저 가만히 그녀의 곁에서 기다려주었다. 티아멧이 자신에게서 한 발짝 떨어지자 사령관은 인자한 웃음을 짓고 그녀의 참 잘했어요 사탕 한 개를 쥐여주려 했으나...

 

아니에요, 사령관. 이제 이건 필요 없어요. 저는 이제 쉴 곳을 찾았거든요.”

 

티아멧은 그와의 첫만남을 떠올렸다. ‘안식처를 찾기 전까지 도와주겠다는 그의 말, 그리고 그때까지 사탕을 선물로 주겠다는 약속. 그 모든 것들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며 마침내 티아멧의 앞에 펼쳐진 고난의 벽을 허물어 준 것이었다

 

 

사령관은 티아멧을 바라보며 베시시 웃었다. 티아멧도 사령관을 바라보며 베시시 웃었다. 그저 그렇게, 두 사람은 베시시 웃었다. 두 사람을 바라보던 나머지 사람들도 함께. 티아멧의 밤은 외롭지 않았다. 그녀의 밤은 동료들의, 친구들의 따스한 온기와 함께 무르익어 갔다.

 

어쩐 일인지 그날, 티아멧은 오랜만에 악몽을 꾸지 않았다

 

8.

 

레이시 언니~! 여기에요! 네오딤이랑 에밀리도 이리 와!”

 

푸른 머리 소녀는 해맑게 웃으며 꽃밭 위에 드러누웠다. 나머지 세 사람과 팔짱을 끼고 자신과 닮은 푸르른 하늘을 여유롭게 바라보던 그녀는 무언가 중요한 것을 떠올리고는 벌떡 일어났다

 

에키드나 언니도 이리 와서 사진 찍어요. 이런 아름다운 곳에서 놀 기회가 또 얼마나 있겠어요?”

 

그럼 내가 찍어줄게. 어어....?”

 

티아멧은 손수 나서 사진을 찍어주려는 아우로라의 팔을 잡아끌고 커다란 나무 밑으로 데려갔다

 

, 다들 카메라를 보세요! 하나 둘 셋! 치즈~!”

 

당황스러운 표정의 아우로라의 손을 맞잡은 티아멧은 카메라의 타이머를 맞추고 나무로 돌아와 카메라를 향해 미소지었다.

 

레이시도, 에밀리도, 네오딤도, 에키드나도, 아우로라도, 모두 함께.



-fin-




외전 클리어 보상: 그랑크뤼 초콜릿

= 2초코 공략 나와도 안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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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아멧 혐성 방지 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