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키리"


눈보라가 매섭게 치는 어느 설산 중턱. 살을 에는 칼날같은 바람을 발키리는 온몸으로 맞고 있었다.


"...발키리"


각혈이 이어진다. 시야가 흐려지고 다리에 힘이 풀려 발키리는 이윽고 눈바닥에 주저앉았다.


"레이디 발키리."


"프레이야가... 저를 데리러 왔습니다. 에인헤리."


발키리는 숨을 몰아쉬며 말한다. 붉은 눈의 AGS는 주변을 경계하며 그녀가 자신을 짚고 일어날 수 있도록 돕는다.


"레이디 발키리, 그 음탕한 여신을 쫓아버리세요."


에인헤리라 불린 AGS는 발키리를 자신의 등에 태운 후 천친히 달리기 시작한다.


"어쩌면 제가 발할라로 갈 수 있는...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총기를 점검하십시오. 그리고..."


발키리가 소총의 상태를 점검하려는 그 순간, 광풍을 이기지 못한 나무가 둘의 머리 위로 쓰러지려 했다. 

에인헤리는 몸을 급하게 틀어 간신히 그곳을 벗어났다.


"아직은 그곳으로 가시면 안됩니다."


에인헤리는 속도를 높여 쓰러진 나무를 뛰어넘었다. 발키리가 잿빛 슈트를 다시 뒤집어 쓰자 치직 하는 소리와 함께 에인헤리의 등 위에서 그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발두르, 스쿨드로부터. 작전 개시.]


"수신 완료. 작전 개시. 꽉 잡으십시오!"


에인헤리의 통신용 안테나가 그의 몸 속으로 완전히 수납됐다. 그리고 지면을 박차 엄청난 스피드로 달리기 시작한다. 발키리는 하마터면 그의 등에서 떨어질 뻔 했다.


"오딘이시여, 저를 지켜봐 주소서..."


기계 종마는 광풍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속도를 높인다. 발키리는 숨을 들여마신 뒤, 소총을 다시금 단단히 붙잡았다 .




- 두 달 전‐






"...해당 경로로 순조롭게 이동할 경우 최소한의 전투로 열흘 이내 온칼로, 또는 온카이오로 알려진 미지의 시설로 접근하는 것이 가능할 것으로 보이며..."


오르카호의 회의실.


"기후와 작전지형을 고려해 모든 탐색인원들은 한랭형 사양 또는 이에 준하는 방한장비를 갖춘 후 투입될 것이며 혹한기 탐색 작전에 능한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의 발키리, 알비스 자매들과 한랭형 사양의 라인리터 9기를 우선적으로 투입 후..."


온칼로. 또는 온카이오. 그게 뭐든지 간에. 철충이 점거중이던 블랙 리버의 한 보안시설에서 찾아낸 정보에 따르면 이 비밀스런 장소에는 지구상의 모든 생물들을 피폭시킬수 있을 만 한 정도의 방사성 폐기물들이 쌓여 있는 모양이다. 멸망 전의 인간들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이 시설만은 철저하게 관리해왔고, 같은 인간들도 믿지 못했던 건지 시설의 위치를 철저하게 위장시켰다. 사령관과 오르카 호의 기술진은 각고의 노력 끝에 이 미지의 시설의 좌표를 특정해냈다. 그리고 철충 혹은 레모네이드 세력보다 먼저 찾아내 조속히 점거하기로 결정했다.


"다른 의견 없으십니까? 없으시면 브리핑을 마칩니다. 사령관님?"


"어어, 응?"


"괜찮으십니까? 이대로 진행 시켜도?"


"응. 좋네. 이대로 하자고. 괜찮지 발키리?"


"네. 이견 없습니다."


발키리는 언제나 그렇듯 덤덤하게 대답했다. 이전과 같은  대단할 것도 없는 탐색 임무. 벌써 몇 달째 그녀는 전투 업무가 아닌 탐색 엄무에 배정되어 왔다. 기량이 뛰어난 인원들의 합류와 기존 멤버들이 오리진 더스트 추가 주입 시술 등으로 능력이 월등해지는 일이 많아져 그녀는 사실상 주력에서 밀려났다. 발키리가 탐색 임무에 배정될 때 마다 한때 그녀와 전선에서 함께 싸우던 이들은 복잡한 심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령관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발키리는 어떤 내색도 하지 않았다.  


"좋아. 회의는 여기까지 하고 당장 준비에 착수하자. 모두 부탁할게. 발키리?"


"네, 각하."


고개를 숙이고 있던 발키리가 사령관의 부름에 얼른 대답했다.


"조심해서 다녀와."


발키리는 미소를 지으며 사령관에게 경례한 후, 빠른 걸음으로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개인 숙소에서 총기와 장구류를 점검하던 발키리는 뭔지 모를 답답함을 느끼고 복도를 나와 걷고 있다. 목적지도 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ags 유닛들의 대기실까지 와 있었다. 서둘러 숙소로 돌아가려던 발키리는 복도 모퉁이에서 붉은 눈의 ags와 거의 부딪힐 뻔 했다.






"이런. 괜찮으십니까 레이디 발키리."


붉은 눈의 ags- AT72 라인리터는 귀품이 느껴지는 태도로 그녀에게 사과했다. 


"마침 탐색대의 대장님께 인사를 드리러 가던 참이였습니다만, 이런 곳에서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결례를 용서하시길."


"아, 아닙니다. 그... 죄송합니다. 저기..."


"아, 저는 라인리터 기사단의 단장을 맡고 있는 에인헤리(Einheri)라고 합니다. 레이디 발키리."


"아아,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 에인헤리."


"다른 라인리터 단원들과는 생긴게 좀 다르지요. 방한 사양으로 개수받았습니다."


"예, 그...렇군요. 어..."


낯선 라인리터가 수다를 떨기 시작하자 발키리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자신을 '에인헤리'라고 불러달라 한 이 라인리터는 확실히 발키리가 알던 라인리터와는 어딘가 달라보였다. 흰색과 회색 패턴으로 몸 전체를 위장했고, 광학 모듈은 붉게 빛나고 있다. 덩치도 다른 라인리터들보다 컸다.  ags보다는 어딘가 켄타우로스에 가까운 형태. 그리고 등에는, 다른 라인리터에게서는 확실히 볼 수 없는 무언가가 달려 있었다.


"안장...?"


"맞습니다 maine Dame. 안장입니다. 한번 타 보시겠습니까?"


속마음이 새어나가고 말아 발키리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아니,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실례했습니다."


"사양 마시길. 발키리가 말에 타고 있는게 이상한 그림은 아니지 않습니까."


라인리터-에인헤리는 껄껄 웃었다. 발키리도 머쓱하게 웃었다. 우연히 만난 김에 둘은 이야기를 이어갔다. 발키리는 ags와의 진지한 대화는 처음이기에 어딘가 어색했지만, 신사적인 에인헤리의 태도에 곧 마음이 풀어졌다.


"개인 장비의 점검은 마치셨습니까 레이디?"


"거의 마쳤습니다. 그쪽은?"


"물론이지요. 안일함은 기사의 적입니다. 더군다나 이번 탐색 작전은 미지의 위험을 조사하는 아주 영광스러운 임무가 아니겠습니까."


발키리는 그 말을 듣고 시선을 살짝 다른 곳으로 돌렸다.


"레이디 발키리는 분명 스칸디나비아 반도 출신이셨죠. 그리운 고향 땅으로 가는 소감은 어떠십니까?"


"저는 라비아타 통령에 의해 복원된 개체입니다. 선대 발키리들에게는 그렇겠지만, 딱히 고향이라 느껴본 적은 없습니다."


"음, 그렇군요. 하지만 그렇다 쳐도 마음의 고향은 맞지 않겠습니까. 저도 복원 개체이지만, 

가끔 옛 독일의 라인 강의 사진을 검색해 보곤 합니다."


"그렇습니까..."


"선대 라인리터들의 긍지, 기사도가 라인펠덴을 거쳐 본을 지나, 클레뵈를 거쳐 마침내 북해까지 이어지는 것을 느낍니다. 저에게 고향은 제 정체성을 상기시킵니다."


아, 물론 한번도 가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에인헤리는 덧붙였다. 발키리는 작전을 위해 봤던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떠올려본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저는 잘 모르겠네요..."


"그러십니까? 레이디께서 직접 가 보시면 생각이 달라지실수도 있겠죠. 잊었던 사명을 찾으실 수도 있고, 고민이 풀리실 수도 있고요."


"고민이라...."


"있으십니까?"


"아, 아닙니다. ...고민이 있다면, 그곳에서 내려놓을수 있다면 정말 좋겠군요..."


그럴수만 있다면. 발키리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발키리와 에인헤리는 이후 별다른 대화 없이 헤어졌다. 에인헤리는 그녀에게 짤막하게 인사한 후 포츈의 정비실로 들어갔다. 

발키리는 이후 복도를 한참 서성거리다, 저 멀리서 레오나와 사령관의 모습을 보곤 얼른 방향을 틀어 숙소로 돌아갔다. 

내가 왜 두분을 피한거지. 자신도 쉬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신을 능가하는 전투력을 가진 대원들이 오르카에 속속 합류해도 그녀는 흔들리지 않았다. 자신보다 기량이 아래였던 대원들이 오리진 더스트 시술을 받고 기량이 월등해 졌을 때도 발키리는 묵묵히 자신의 일을 했다.  

전투 작전에 참가하는 대원들의 명단에서 자신의 이름이 빠지는 일이 잦아져도 그녀는 내색하지 않았다.


"주어진 임무에 충실하면 돼. 주어진 임무에..."


아끼는 토끼 인형을 어루만지며 발키리는 중얼거린다.

그래도 마음이 쉬이 가라앉지 않아서 발키리는 털썩, 침대에 누워 웅크렸다. 오르카 호의 전력이 불안정해지기라도 한 건지 숙소의 전구가 깜빡 깜빡 거린다.

발키리는 감기지 않는 눈을 억지로 감고 잠을 청했다.





발키리와 5명의 알비스, 라인 리터 8기가 탑승한 출격 포트가 저녁 바다를 가르며 오르카 호에서 쏘아올려졌다. 


"발키리, 잘 들려? 감도 확인"


<감도 양호.>


발키리로부터의 통신이 선명하게 들리자 사령관은 안도했다. 기상이 좋지 않아 사령관은 난색을 표했지만 더 늦어지면 오르카 외의 세력들이 시설을 점거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결국 작전 당일 탐색조를 출격시켰다. 


"현 좌표."


"현재 좌표 64.592192에 6.226595. "





"15초 뒤 포인트 1에 진입합니다. ...3,2,1 포인트 1 진입. 가속 엔진 점화. 가속 시작."


"발키리, 대원들의 상태는?"


<14명 총원 이상 없음. 알비스 22가 약간 멀미를 느낍니다.>


"걔 멀미약 안먹고 갔어?"


<깜빡했다고 합니다.>


아이고 저런. 사령관이 피식 웃었다. 곁에 있던 레오나도 안드바리의 손을 꼭 잡고 싱긋 웃었다.


"좌현 엔진 점화 10초전. 6,5,4... 엔진 점화. 포인트 2로 선회 시작."


출격 포트가 우선회를 시작하고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거대한 산맥을 지나기 시작했다.  산맥 위에 짙게 깔린 두꺼운 구름 속으로 들어가자 

포트는 격렬하게 진동했다.


"포트, 상황 보고해."


<구름 속으로 들어가서 진동이 심하지만 괜찮습니다. 각 엔진 상태 양호, 통신 양호. 걱정 마십시오.>


철충만 없었어도 빙 돌아갈 일은 없었을텐데... 사령관은 속으로 읊조렸다. 본래 계획하던 비행 경로에 대공 장비로 

무장한 철충 부대가 발견되었다. 위성으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컸기에 이를 우회하기 위해 산맥을 최대한 이용해 우회하는 

경로를 새로이 만들었다. 그 때문에 예상보다 탐색대가 포트 속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졌다. 

포트에서 고생하고 있을 대원들의 걱정에 사령관이 혀를 찼다

그순간.


"시그널 로스트!"


"포트 시그널 로스트!  마지막 좌표68.601991에19.497478!"


"어떻게 된거야!?"


"확인 중 입니다 사령관님!"


통제실의 공기가 갑자기 바뀌었다. 포트의 신호가 산맥 위에서 갑작스레 사라졌다. 철충의 습격인가?! 모두가 긴장했다. 탐색대의 대원들은 각각 훌륭한 전투원들이며 반도의 혹독한 겨울을 이겨낼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췄지만, 위성에서 봤던 대공 방어중이던 철충의 무리를 상대하기엔 그 수가 턱없이 부족했다. 


"좌표 아직 확보 못했어!?"


"좌표... 잠,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빨리! 레오나, 추가 파병을 준비해야겠어."


<여기는 발키리, 사령관님. 저희는 괜찮---.>


"발키리! 괜찮아?! 어떻게 된거야? 나머지 인원들은?


<----....>


"발키리, 감도 불량하다. 발키리, 감도 확인. 발키리?"


<----.....>


"어떻게 된거야..."


"괜찮을 거야 사령관. 발키리가 있잖아. 좀 더 지켜보자."


레오나가 애써 사령관을 진정시키지만 그녀 또한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통제실의 모두가 하염없이 모니터를 바라보며 탐색대의 연락만을 기다렸다...



온통 눈으로 뒤덮힌 이름모를 산 중턱. 거꾸로 쳐막힌 포트의 문을 걷어차고 발키리는 반쯤 구르며 포트에서 탈출했다.


"젠장..."


입 안에서 비릿한 맛이 느껴진다. 지면과 충돌하는 순간 혀라도 씹은 모양이다. 발키리는 피 섞인 침을 뱉어버리고 포트의 나머지 문들을 완력으로 전부 뜯어버렸다.


"콜록콜록... 발키리 언니, 괜찮아요?"


"난 괜찮아. 다른 대원들은? 에인헤리, 무사합니까?"


"저희는 모두 괜찮습니다 레이디 발키리."


포트 한쪽의 격벽이 탕, 하고 떨어져 나가며 라인리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가 어딘지 아시겠어요?"


"갈릴레오 수신기의 상태가 먹통이라 확답은 드릴수 없습니다만... 제가 가진 위성 자료와 대조해 보면 스칸디나반도의 최북단 처럼 보이는군요. 흠, 저기 저 넓은 평원은 분명 '칼도아이비 황무지' 일겁니다."

발키리가 에인헤리가 바라보고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곳에는 끝도 없이 펼쳐진 눈과 바위의 평원이 펼쳐져 있었다. 

어두컴컴한 밤이지만 발키리의 개조된 회색 눈동자는 저 먼곳의 평원을 또렷하게 포착해냈다.


"칼도아이비 황무지. 그렇다는 것은 여긴 작전 포인트와 상당히 먼 곳이겠군요."


"유감스럽게도 그럴 겁니다."


발키리는 주변을 대략 살핀 후 알비스들을 바라본다. 알비스들은 밤바람이 나무를 비껴가며 내는 으스스한 소리에 조금 겁을 먹었지만, 

이내 씩씩하게 추스리고 일어나 개인 장구를 점검하고 있었다. 벌써 초콜렛을 까 먹는 녀석도 있었다.


"일단 대략적인 위치를 알았으니 하산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에인헤리. 밤에 머물기엔 이곳은 좋지 않군요."


"동의합니다.  저 밑의 강줄기가 보이십니까? 저곳을 목표로 삼아 갑시다. 자, 타시죠!"


에인헤리와 라인리터들이 일제히 자세를 낮추자 발키리는 깜짝 놀랐다. 에인헤리가 계속해서 권하는 바람에 발키리와 알비스들은 

라인 리터들의 등에 올라타 안장에 앉았다. ags의 등에 앉는것은 그녀들에게는 사뭇 낯선 경험이었다.


"기사단, 출격합시다!"


에인헤리의 구령에 맞춰 라인리터들이 일제히 이동을 시작했다. 한랭지에 맞게 개조된 ags들은 빠른 움직임으로 설산을 거침없이 내려간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야행성 산짐승들의 울음소리가 황량한 설원을 각자의 색으로 물들여 갈 때 쯤 탐색대는 

마침내 설산에서 완전히 내려왔다. 바로 눈앞의 그리 깊지 않은 강을 건너니 마침내 황량한 눈의 평원이 그들의 앞에 펼쳐졌다. 





그 천혜의 광경에 모두들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루 종일, 심하면 몇개월 동안 잠수함 속에 갇혀 살아야 하는 그녀들로써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의 평원이 그녀들의 시신경을 물들였다.

흥분한 알비스 중 한명이 라인리터의 등에서 폴짝 내려와 제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그러다 저 멀리 어딘가에서 늑대 울음소리가 들리자 

금방 겁을 먹고는 다시 라인리터의 등으로 올라가려고 버둥거렸다. 모두가 그 광경을 보고 웃었다.



"모두들 이쯤에서 잠시 쉬는게 좋겠습니다. 알비스 22, 자매들과 캠프를 세워 주세요. 저와 라인리터 여러분들께서는 그동안 경계를 섭시다."



"알겠어요 언니! 전원 집합!"



알비스 22의 구령에 맞춰 알비스 자매들은 일사분란하게 다인용 텐트를 설치하고 물자들을 정리했다.  

그동안 라인리터들은 텐트 주변을 빙 둘러싸고 경계를 시작했다.



 "maine Dame?"



"아, 에인헤리."



에인헤리가 경계중인 발키리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피곤하지 않으십니까? 다른 숙녀분들과 함께 잠을 좀 청하시는게."



"문제 없습니다. 저도 제 할일을 하는 것이니깐요."



"군인정신의 훌륭한 귀감이십니다."



발키리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리곤 끝도 없는 평원의 어딘지도 모를 곳을 계속해서 지켜본다. 어딘가의 나뭇가지에서 

흰올빼미가 푸드득 날아올랐지만 그녀는 그 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사실은 탐색대에 편성된 직후, 당신의 과거 활동 내역들을 열람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제 활동 내역을요."



"그렇습니다. 레이디 발키리, 당신은 제 예상보다도 훨씬 뛰어난 전투원이시더군요. 놀랐습니다. 이런 분과 임무를 함께 할 수 있다니."



"칭찬은 감사합니다. 하지만 전 이제 그렇게 대단한 사람도, 중요한 사람도 아닙니다."



발키리는 그렇게 말하며 에인헤리를 쳐다보았다. 그의 붉은 눈이 자신을 유심히 바라보는 것을 그녀도 알 수 있었다.



"이제는 저보다 훨씬 뛰어난 분들이 오르카 호에 넘쳐납다.  제가 일주일이 걸려 해결할 문제를 그분들은 하루 이틀이면 할 수 있습니다."



"흠, 겸손이 지나치시군요."



"겸손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당신이 제 활동 내역을 최근 기록까지 보셨다면 눈치채셨겠죠."



"사령관님께 레이디는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지금껏 수많은 전투에서 당신을 믿고 보내셨을 테고요."



"그럴까요 과연? 제가 그렇게 특출나고 없어서는 안 될 존재라면 왜 사령관님께서는 지금 저를, 왜 이런...! 

아닙니다. 방금 한 말은 잊어주십시오."



발키리는 말을 끝까지 마치지 못했다.



"잘 만들어진 무기는 10년, 50년, 그 이상도 쓰여집니다. 개조되고 보수되어 계속해서 그것만이 할수 있는 일을 해내죠. 과거인들은 그런 존재를 명품이라 불렀던 것으로 압니다. 으음, 레이디 발키리도 최근 오리진 더스트 주입 시술을 받으신걸로 알고 있습니다. ."



"예, 그랬었죠."



바람이 조금씩 강하게 불기 시작한다. 발키리의 갈색 마리가 흩날린다.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날 줄 알았지만, 오래된 무기는 박물관으로나 가야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줄 뿐이였죠. 무의미한 짓이였습니다."



발키리는 말을 마치며 그녀의 소총을 만지작거렸다. 수없이 많은 임무를 이 소총과 함께했다. 스코프가 달리지 않은 오직 그녀만을 위한 저격총. 세월의 손때가 묻은 총을 발키리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명품이라 하셨습니까. 당신도 아시다시피 저는 라비아타님과 마리님, 레오나 님 처럼 특출난 기량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도 아닙니다. t-8w 발키리. 가격이 조금 비쌀 뿐 공장에서 찍어져 나온 양산품이죠. 그동안 운이 좋았습니다. 모두와 과분한 영광을 누렸습니다. 쉴 틈도 없이 전투에 투입되던 시절도 있었죠. 그때는 제가 특출나서, 저를 대체할 존재가 없어서라고 자만심에 차기도 했습니다. 이제야 현실이 보이는군요. 쩍어져서 나온 양산품의 현실이. 제 한계는 여기까지고, 개보수를 해도 본질이 변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에인헤리는 자신의 처지를 토해내듯 말하는 발키리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것 또한 보았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경계에 집중합시다. 발키리가 차갑게 말했다. 둘은 그 이후로 굳이 입을 열지 않았다.








탐색대가 임시 캠프를 세운 뒤 일주일이 조금 넘는 시간이 흘렀다. 발키리는 계속해서 오르카 호와 교신을 시도했지만 번번히 실패했다. 

자신들의 위치를 가르쳐줄 갈릴레오 위성 교신기마저도 완전히 기능을 상실했다. 탐색대의 모두가 자신들이 상당한 수준의 전파방해를 

받고 있음을 눈치챘다. 

철충의 소행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세력의 공작인지 알 수 조차 없다. 이곳은 생각보다 더 위험하다. 

발키리는 확신했고, 하염없이 연락만을 기다리는 것 보단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택했다. 

목표 지점으로 향하며 전파 방해를 일으키는 원인을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탐색대가 온칼로를 찾기 원하지 않아서 그들을 방해하는 것이라면, 역으로 생각해 필시 그곳으로 향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 그들은 결정을 내리고 곧 임시 캠프를 떠났다. 


처음에는 설산에서 내려올 때 처럼 라인리터들의 등에 올라타 빠른 속도로 이동했다. 하지만 얼마 못가 그들은 기계 종마의 등에서 내려와야만 했다.  날씨가 그들을 돕지 않았다. 눈보라가 매섭게 몰아치고, 라인리터들은 종마의 모습으로는 도저히 이 눈의 지옥을 헤쳐나갈수 없었다. 라인리터의 등에서 내려온 탐색대의 이동 속도는 현저히 낮아졌다.  그렇게 그들은 몇날 며칠동안을 걸었다.  속도가 더뎌지자 모두들 조금씩 피로를 느끼는 와중이었다. 방위 확인을 위해 대열이 잠시 걸음을 멈춘 그 때-


<콰앙-!!>


"적습이다!!"


"모두 엄폐해!! 알비스 17, 머리 숙여!"


"바위 뒤로 숨어요 어서!! "


어디선가 날아온 탄환을 맞고 대열 우측의 라인리터 1기가 완전히 파괴됐다. 발키리는 서둘러 주변을 살피지만 근처에 철충이나 ags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어디서 날아온거죠!?"


"확실하지는 않습니다만, 저기 1시 방향에 위치한 돌산이 보이십니까. 병력을 숨길 만한 곳은 저 곳 밖에는 없어보입니다."


에인헤리가 가리킨 방향을 보자 꽤 먼 곳에 위치한 온통 검은 바위가 가득한 높다란 산이 보였다. 








발키리는 산 중턱의 가장 굴곡져 보이는 바위를 유심히 쳐다봤다. 

그 순간, 발키리의 오른쪽 눈동자가 바위 틈에서 불꽃이 번쩍이는 것을 포착했다. 


"또 옵니다!!"


"숙여!"


 두번째 탄환은 발키리의 머리 위를 아슬아슬하게 지나갔다. 티잉- 하는 소리와 함께 탄환은 발키리 뒤의 단단한 바위를 때리고 

어딘가로 날아갔다.


"저격수? 그게 아니라면 저격형의 ags나 철충..."


"모습을 보셨습니까?"


"아니요. 하지만 위치는 확실히 확인했습니다. "



발키리는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간의 탐색임무에서 전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동안은 미리 주변 정보를 

확실히 입수한 상태에서 싸웠다. 전투의 빈도도 적었고, 지금처럼 기습을 당할 일은 거의 없었다.



"지통실, 여기는 발키리. 기습을 당했다. 사령관님 들리십니까? 여기는 발키리. 응답 바랍니다....!"



초조하게 무전을 해 보지만 노이즈가 잔뜩 낀 잡음만이 들릴 뿐이었다.


"에인헤리."


"말씀하십시오."


"사격을 유도 해 주실수 있으십니까?"


"상대 해 보려 하십니까."


"방법이 없군요."


발키리는 엎드려쏴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총을 단단히 잡았다. 그녀의 호흡이 서서히 느려지는것을 모두가 느꼈다.


"맡겨주시길."


에인헤리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포신을 살짝 들어봤지만 별다른 반응이 없자 아예 종마의 형태로 변신해 과감히 몸을 노출시켰다. 

반응은 즉각 찾아왔다. 또 한발의 탄이 그를 꿰뚫을 기세로 날아왔다. 에인헤리는 아슬아슬하게 몸을 틀어 이를 피했다. 

총알이 그들을 스쳐지나감과 동시에, 발키리의 총도 불을 뿜았다. 총성이 평원을 강타했다. 놀란 새들이 날아올랐다. 

발키리는 조심스럽게 쌍안경을 꺼내 바위산을 살펴보았다. 돌 틈에서 널브러진 ags의 잔해와 그것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어떻게 됐습니까?"


발키리는 말없이 엄지를 들어올렸다. 양옆에서 알비스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에인헤리는 조심스럼게 광학 모듈만을 내밀고 검은 연기가 오르는 곳을 살펴보았다.


"처음보는 형태의 ags입니다. 에인헤리는 저 기종에 대해서 아는 것이 있습니까?"


"아니요. 저도 저런건 처음 봅니다. 아, 하지만 비슷한 녀석은 본 적 있습니다. 붙임성 없는 녀석이죠."


"비슷한...?"


"예. 형태나 크기는 비슷해 보이는군요. 쉐이드 기종. 레이디 발키리는 잘 아시겠죠."


"쉐이드... 그럼 저건 파생형 모델일까요?"


"워낙에 정보가 적은 기종이라 확답은 드릴 수 없지만, 첩보 작전에 투입되는 모델이 히트블레이드를 달고 다니는 형태 

한가지일 뿐일리는 없겠죠."


" 쉐이드의 파생형으로 저격형 모델을 만들었다... 가능성 있군요. 쉐이드 기종은 위장에 능하고 기만 전술에 강점을 보이니-- !!!"


"...? 왜 그러십니까?"


"기만 전술... 디코이(Decoy, 위장 표적)...!"


"이런!"


"일어나지 마십시오! 전부 엎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또 한발의 총알이 그들에게 들이닥쳤다. 그것은 발키리와 에인헤리의 대화를 듣고 긴장이 풀어져 자리에서 일어나 있던 알비스들 중 한명의 허벅지를 그대로 관통했다. 팍, 하고 붉은 피가 눈 위에 흩뿌려졌다.


"꺄아아악!!"


"알비스 22!! 지혈대 가져오세요! 17, 지혈대!"


급하게 지혈대를 챙겨 알비스 22에게 가던 알비스 17에게도 총알이 날아왔다. 총알은 다행히도 17의 몸을 엄폐하던 방패에 맞았지만 

그녀는 방패에 전해진 충격을 고스란히 맞고 땅 위를 나뒹굴었다.


"알비스17!! 정신 차려요! 일어나! 이럴수가..."


"발키리! 진정하십시오!"


"구해야 합니다! 기다리세요, 제가 가겠습니다."


"안됩니다! 당신마저 당합니다! 기다리세요! 안됩니다!"


반쯤 이성을 잃은 발키리에게 에인헤리의 필사적인 만류는 들리지 않았다.  발키리는 지혈대를 들고 쓰러진 두 알비스들을 향하여 달렸다. 


"기사단! 일제 포격 개시! 시간을 벌어라!"


에인헤리의 구령에 맞춰 라인리터들의 전차포가 불을 뿜었다. 그러나 그들의 경량형 전차포로는 정밀한 포격이 어려웠다. 좋지 못한 날씨와 성능의 한계가 맞물려 라인리터들의 포탄은 제멋대로 날아가 바위산 여기저기에 뿌려졌다. 적은 포격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맞대응했다.

포격을 위해 몸을 드러낸 라인리터들은 적의 사격에 속수무책으로 몸 여기저기를 피격당했다.


"알비스 22, 알비스 17, 정신 차리세요...! 미안합니다... 미안해요."


발키리가 떨리는 손으로 알비스 22의 다리에 지혈대를 감았다. 허벅다리가 거의 떨어져 나가려 하고 있었다. 

알비스 22는 지혈대가 감기기 시작하자 격통을 이기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조금만 참아요, 알비스 22..."



"언니... 너무... 너무 아파요..."



"안전한 곳으로 옮겨줄게요. 아프더라도 참아주세요."



발키리는 자신의 구급상자에서 몰핀 주사를 꺼냈다. 손의 떨림이 멈추지 않아 두세번 주사를 떨어트릴 뻔 했지만 겨우겨우 

알비스 22의 허벅지에 주사를 놓았다.

알비스 22는 몸을 바르르 떨더니 이내 축 늘어졌다.

발키리는 알비스 22의 팔을 어깨에 감았다. 어깨에 걸쳐진 자매의 무거움을 느낀 순간 그녀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



그제서야 발키리의 눈에 주변 상황이 들어왔다.

알비스들은 하얗게 질려 몸을 방패로 가리고 떨고 있었고 라인리터들은 포신이 벌겋게 과열될 정도로 무리해서 포격을 하고 있었다. 

몸 여기저기에 구멍이 뚫려 거의 기능이 정지되려 한 라인리터도 있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자세를 잡으려 했다. 

에인헤리는 전열의 가장 앞에 서 있었다. 그 역시 포신이 지나치게 과열돼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몸 여기저기에 총탄이 지나간 흔적이 

보였고, 제때 방열을 하지 못해 포신 주변에서 검은 연기가 나오고 있었다.



"에인헤리...!"



"발키리, 지혈을 마치셨습니까? 서둘러 이쪽으로 오십시오! "



"죄송합니다..."



"그런 말을 하실 때가 아닙니다! 서두르십시오!"



발키리는 눈보라가 거세진 틈을 타 알비스 22를 끌고 바위 뒤로 숨었다. 알비스 22는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지만 얼굴에 고통이 묻어나오지는 않았다. 

발키리는 호흡을 가다듬고, 건너편에 아직 누워있는 알비스 17을 바라보았다. 



"눈보라가 거세지고 있습니다. 놈도 쉽사리 사격하지 못할 것입니다. 레이디 발키리, 준비되면 말씀해 주십시오."



에인헤리가 결의에 찬 목소리로 발키리에게 말했다. 발키리가 굳은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언제 기회가 다시 올지 모릅니다. 자, 기사단이 다시 한번 시간을 벌겠습니다. 어서 가십시오!"



발키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단, 사격 준비!"



에인헤리의 구령에 라인리터들은 엄폐물 뒤에서 다시 한번 몸을 일으켜 포신을 높이 세웠다.



"발사!!"







굉음이 평원을 가득 메웠다. 검은 연기가 사방에 깔리고 동시에 적의 총탄이 그들 주변을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발키리는 그 틈을 타 땅을 박차고 달려나갔다. 입에서 쇳내가 느껴질 정도로 숨도 안쉬고 알비스 17에게 달려갔다. 알비스 17은 기절했지만 

다행스럽게도 무사해 보였다. 발키리는 그녀를 어깨에 들쳐메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순간 깡 하는 큰 소리가 나더니 에인헤리 왼편에서 포격을 하던 라인리터 한 기가 폭발을 일으키며 완전히 파괴되는 것을 보았다. 발키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곤 있는 힘을 다해 내달렸다. 



"으윽!!"



총알이 발키리의 허리를 아슬아슬하게 빗겨나갔다. 발갛게 드러난 살에서 피가 흘렸다. 발키리는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에인헤리 근처의

엄폐물까지 다다른 그녀는 알비스 17을 바위 뒤로 거의 집어던졌다.

순간 발키리는 심장이 멎는 것 같은 한기를 느꼈다. 뭔가가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발키리는 그대로 굳어서 간신히 

고개만을 돌렸다. 흉탄은 그대로 그녀의 얼굴을 스쳐 지나가 에인헤리의 포신을 뚫고 지나갔다.


"에인헤리!!"



"으음...!"



에인헤리는 그 충격에 자세를 잃고 전복됐다. 발키리는 속에서 무언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앉아쏴 자세를 취하고 적을 겨누었다. 

순간 눈보라가 잦아들고 그녀의 눈에 검고 불길한 ags의 모습이 들어왔다. 쉐이드를 닮은, 그러나 기존의 히트 블레이드를 달고 있는

팔의 자리에 대구경의 대물 저격총이 달린 모습이 확실히 보였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을 겨누고 있음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는 몸을 피하지 않았다. 호흡을 멈추고 손가락을 방아쇠에 걸었다. 그리곤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그보다 조금 늦게 적 ags의 총에서도 화염이 뿜어져 나왔다. 발키리에겐 이 모든 광경들이 슬로우 모션처럼 천천히 지나갔다. 발키리의 총알은 적 ags의 허리춤을 맞췄다. 구동계가 지나가는 자리였는지 검은 ags는 그대로 자세를 잃고 자빠졌다.

발키리는 팔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적의 총알은 발키리를 맞추지 못하고 바로 오른편의 바위를 부수고 지나갔다. 무수한 파편이 튀었다. 발키리가 피할 새도 주지 않고 파편은 그녀의 얼굴에 쏟아졌다. 


발키리는 피를 뿜으며 그대로 쓰러졌다.








뒷통수에 느껴지는 한기에 발키리는 서서히 눈을 떴다.

익숙한 얼굴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언니가 일어났어요! 발키리 언니, 괜찮아요?!"



알비스 17이 엉엉 울며 발키리의 손을 잡았다. 발키리는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알비스들이 그녀에게 우르르 몰려들었다. 한 명을 제외하고. 다리를 다친 알비스 22는 누운 채로 고개를 돌려 발키리를 바라보았다.



"무사한가요 17... 22도... 나머지도..."



발키리는 부쩍 야윈 알비스 17과 나머지 자매들의 뺨을 어루만졌다. 어지러움이 조금 가신 후 발키리는 주변을 살펴보았고, 자신이 참호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두컴컴하고 습한 공간에 알비스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제가 얼마나 누워있었나요... 라인리터 분들은? 에인헤리..."



발키리는 땅을 짚고 일어서려다 심한 어지러움을 느끼고 다시금 주저앉았다. 그제서야 오른쪽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meine Dame, 일어나셨군요 "



발키리의 뒤에서 에인헤리가 조용히 말했다. 



"우리 둘 다 몰골이 영 말이 아니군요."



그가 껄껄 웃었다. 언어 출력 모듈에 이상이 있는지 부쩍 잡음 섞인 목소리였다. 그는 상처 입은 말 처럼 무릎을 꿇고 

조용히 벽에 기대 앉아 있었다. 몸 군데군데 총알이 지나간 흔적이 보였고, 구멍 뚫린 포신은 내다 버렸는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표정 없는 모습이지만 어쩐지 지쳐 보인다고 발키리는 생각했다.


"그 ags는 어떻게 됐나요."



"유감스럽게도 아직 가동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레이디 발키리께서 놈의 허리를 끊은 덕분에 그 자리에서 한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하늘이 도운 건지 버려진 참호를 발견해 대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당신이 없었다면 이런 기회조차 잡지 못했을 겁니다."



"에인헤리, 여러분들을 사지로 내몬 건 접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레이디 발키리께서 지옥의 문턱까지 간 저희를 구하신거죠. 부끄럽지만 저와 다른 기사들은 

놈의 근처도 맞추지 못했습니다."



"제가... 제가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mein dame, 그런 말씀 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에인헤리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고 말했다. 발키리는 주먹을 꽉 쥐었다. 두 팔이 떨렸다. 어찌나 입술을 꽉 물었는지 입에서 피가 조금 나왔다. 알비스 17이 손수건을 가져와 발키리의 입을 닦아주었다.


현기증이 몰려와 그녀는 제대로 앉아있을 수 없었다. 발키리는 식은땀을 흘리며 웅크려 누웠다. 알비스 17이 그런 그녀의 이마를 손수건으로 

닦아주었다.

시간은 무심하게도 흘러 해가 지고 밤하늘에 별이 가득해졌다.



"에인헤리."



발키리가 조용히 그를 불렀다.



"말씀하시길."



"놈은 단독행동을 위해 분명 자가 수복 기능을 갖추고 있을겁니다. 더디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회복할 겁니다."



"아마도 그렇겠지요."



"저희를 노리는 다른 적들이 있었다면 벌써 저희는 제거됐겠지요. 필시 여기는 저 놈 밖에 없을겁니다. 

놈이 회복하기 전에 완전히 무력화 시키면 분명 활로가 보일 겁니다."



발키리의 목소리는 분노로 떨리고 있지만, 결의에 차 있다. 에인헤리는 그것을 느낄수 있었다.

하지만 발키리가 제시한 작전을 듣고난 뒤, 에인헤리는 그 무모함에 적잖이 당황했다.



"이러면 당신의 생존 확률은 극히 낮습니다."




"저를 희생해 모두를 구할수 있다면 제가 망설일 이유는 없습니다."




"다른 방법이 있을것입니다. 상황이 물론 좋지 않지만-"




"부디, 제 명예를 걸고 부탁드리는 겁니다."




에인헤리는 말문이 막혔다. 눈앞의 여전사는 목숨을 걸고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최후의 전투를 치르기 위해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다. 

기사의 도리로 이것을 돕는것이 옳은 결정일까.

발키리의 눈에서는 망설임이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피를 흩뿌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에인헤리는 한참동안이나 대답을 하지 못했다. 

긴 고민 끝에, 그도 결단을 내렸다.


"좋습니다. meine dame. 당신의 명예를 위해 함께 싸우겠습니다."



"미안합니다. 마지막까지 당신께 염치없는 부탁만 드리는군요."



"그런 섭섭한 말씀을."



에인헤리가 나지막히 웃었다. 발키리도 미소를 지었다. 오래간만에 지은 담담한 웃음이었다. 









눈보라가 햇빛마저 가려버릴 정도로 거센 어느 날.




"발두르, 스쿨드로부터. 일출 예정 시각은 언제인지 송신바람."




알비스 17이 커다란 바위 뒤에서 조심스럽게 무전을 날렸다.




[여기는 발두르. 예정 1시간 이후.  오늘은 3개의 해가 뜬다. 입감했는지.]




"입감완료."




알비스 17은 심호흡을 하고 다른 자매들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세 명의 알비스들은 조심스럽게 각자의 위치로 향했다.


그리고는 전술방패에서 조명탄 발사기를 꺼냈다.




"발두르, 스쿨드로부터. 태양의 온기가 느껴진다. 발두르는 느껴지는지."




[여기는 발두르. 완벽하게 느껴진다.]




알비스 17이 오른팔을 조심스럽게 올리자 두 알비스들은 열화상 교란탄 발사기를 꺼내어 조립한 뒤 바위산을 향해 겨누었다.




"발두르, 스쿨드로부터. 일출을 확인했다." 




무전을 마치자마자 알비스 17은 조명탄을 쏘았다. 동시에, 열화상 교란탄 발사기에서 요란한 소리가 나며 기만체들이 발사되었다.


밝게 빛나는 나트륨과 마그네슘 혼합물이 하늘로 퍼졌다. 




"다들 숙여요!"




바위 산 중턱에서 총알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총알들은 알비스들을 향하지 않고, 목표를 잃고 그들 주변 여기저기로 날아갔다.




"발두르, 교란을 확인했습니다."




알비스 17은 심호흡을 한번 크게 했다.




"발두르, 스쿨드로부터. 작전 개시." 




[수신 완료. 작전 개시. 꽉 붙잡으십시오!]




알비스 17은 무전기를 꼬옥 안았다. 다른 자매들도 자신의 무전기를 초조한 표정으로 잡고 있었다.




"언니, 돌아올 수 있는 거지..."




그녀는 다른 알비스들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멀리, 알비스 22가 들것을 개조해 만든 썰매에 누워있는 모습이 보였다. 알비스 17이 손짓하자 라인리터 한 기가 썰매를 끌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알비스 17은 바위산을 한번 더 바라봤다. 그리곤 대열을 이끌고 그곳에서 벗어났다.



발키리는 대물 저격총의 발포음을 듣고 소총을 장전했다. 에인헤리가 한발 한발 지면을 내딛을 때 마다 그녀의 오른쪽 눈을 감은 붕대에서 핏방울이 흘렀다. 




"mein dame, 마음의 준비는 마치셨습니까."




"물론입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놈이 보일 것 입니다."




알비스 17이 보낸 무전을 신호로, 에인헤리를 포함한 3기의 라인 리터들은 각자 세 방향으로 흩어져 바위 산을 빠르게 올라갔다.


발키리는 적이 혼자뿐이고 교전이 길게 이어졌는데도 지원 병력 같은것이 나타나지 않았음을 근거로 적- 검은 ags가 위성 지원 같은 

어떠한 정보 지원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자신의 감지 장치에만 의존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녀는 검은 ags의 기반이 됐을 거라고 추측되는 쉐이드의 스펙을 떠올렸다. 매우 정밀한 열 화상 카메라와  음향 탐지 장치, 근거리 레이더. 

저격을 위해 개조됐다면 고배율의 카메라 정도가 달려있으리라. 또한, 쉐이드 모델의 특성상 골격을 뜯어 고치지 않았다면 

탑재할 수 있는 무기의 갯수와 중량에는 한계가 있을 터. 발키리는 정신을 잃기 직전 보았던 검은 ags의 외형을 기억해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확실히 검은 ags의 외형은 기존 쉐이드와 별 차이가 보이지 않았다.

놈의 대물 저격총은 그 구경과 크기가 상당해 보였다. 무언가를 얻었으면 잃는 것도 있다. 

검은 ags는 대구경의 대물 저격총을 댓가로 근접 전투에 필요한 장비들을 바쳤을 것이다. 


적의 근접전 능력은 빈약하다. 그리고, 지원이 없기에 자가 수복을 마치기 전까지는 움직이지도 못할 것이다.


만에 하나 저의 가정 중 하나라도 틀린 것이 있다면 그녀와 라인리터들, 그리고 알비스들 까지 몰살당할 지도 모를 노릇.

하지만 발키리는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추론을 믿기로 했다. 수많은 전투를 치르며 얻은 경험들이 그녀에게 강한 확신을 줬다.


발키리는 이동 능력을 잃은 적의 사선에서 접근하여 적의 감지 장치를 교란시킨 후 접근전으로 적을 몰고 간다는 도박수를 두었다. 플레어를 뿌려 열화상 카메라를 교란시키고, 눈보라가 가장 심한 때를 골라 음향 탐지 장치의 탐지 범위를 제한시킨다. 남은 것은 근거리 레이더.



"에인헤리, EMP탄 준비 완료."



번쩍, 하고 그녀의 눈에 적의 저격총에서 뿜어져 나온 화염이 보였다.



"적, 2시 방향!"



"발사!!"



발키리의 소총에서 검고 이질적으로 생긴 탄이 높은 각도로 하늘로 날아갔다. 검은 emp 탄은 공기의 저항을 받고 급격하게 속도가 줄어들었다. 발키리는 빠르게 다음 탄을 장전했다. 그리고는 그녀만이 할 수 있는 마술을 부렸다. 




"제2탄 장전 완료, 발사!"



이번에는 은빛 총알이 발사됐다. 은색의 탄은 그 날렵한 모양처럼 검은 탄환보다 빠른 속도로 나아갔다. 은빛 총알은 검은 emp탄을 거의 따라잡았다.   



"제 3탄 장전 완료, 발사!"



피처럼 붉고, 화살처럼 가느다란 총알이 마지막으로 먼저 발사된 두 탄환을 향해 쏘아졌다.  검은 총알과 은빛 총알, 붉은 총알은 한 점에서 동시에 부딪쳤다. 푸른 섬광이 번쩍였고, 뒤이어 아주 고운 은빛 부스러기들이 하늘을 가득 메웠다. 적의 레이더를 근거리에서 교란하기 위해 만든 3종의 탄환. 발키리가 아니면 누구도 정밀한 장치의 도움 없이 이 세 총알을, 달리는 말 위에 앉아서 공중에서 서로 충돌하게 만들지는 못할 것이다. 



"EMP 교란 확인."



"정말로..."



"예?"



"정말로 대단합니다. 레이디 발키리."



보잘것 없는 재주입니다. 발키리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잡담을 나눌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짧은 시간 동안 적의 레이더는 마비될 것이다. 적의 감각을 마비시켰으니, 이제는 혼란을 가중시킬 때였다. 



"헤르모드, 당신 차례입니다."



[작별이군요. 명예로운 죽음을!!]



에인헤리와 발키리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진 라인리터- 헤르모드가 가지고 있는 모든 포탄을 산 중턱에서 그들을 내려보고 있을 적에게

쏟아부었다. 전차의 형태가 아닌 기마의 형태에서 무리하게 포격을 감행한 탓에 그의 몸이 심하게 휘청거렸다. 포탄은 적의 근처에도 맞지 않았지만 적의 이목을 돌리기엔 충분히 요란했다. 적의 장비들 중 사격에 필요한 광학 카메라가 가장 먼저 기능을 회복할 것이다. 

발키리의 예측은 슬프게도 맞아떨어졌다. 검은 ags는 헤르모드를 향해 탄환을 발사했다. 이미 몸 여기저기에 구멍이 나 있던 그는 

정통으로 날아든 총알에 유폭을 일으키며 기능이 정지됐다.

마침내 산 중턱까지 다다르자 발키리의 눈에 검은 ags의 모습이 점점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라니..."



[발키리님, 에인헤리님. 발할라에서 뵙겠습니다.]



검은 ags의 정면에서 돌진하던 라인리터- 그라니 역시 그의 차례가 오자 헤르모드가 그랬던 것처럼 모든 탄을 빠르게 발사했다. 

검은 ags는 무너져 내리는 주변의 바위에 몸을 기대며 힘겹게 그를 향해 총구를 돌렸다. 그리고는 그의 적을 겨눴다. 

발키리에게는 이 모든 광경이 아주 천천히, 그리고 너무나도 또렷하게 보였다. 검은 ags에서 마침내 화염과 함께 총탄이 쏘아졌다. 

그라니 또한 몸에서 검은 기름을 쏟아내며 쓰러졌다. 그리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발키리는 마침내 검은 ags를 조준했다. 맹렬히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호흡을 가다듬었다. 검은 ags 또한 결국 발키리와 에인헤리를 발견하고 저격총을 목발처럼 짚으며 방향을 돌렸다. 발키리의 눈에 마침내 검은 ags의 몸체에 새겨진 제식명이 보였다. 


S-12-f '미스텔리(Misteli)' .  그리고 그 옆에 발키리가 만든 커다란 구멍이 보였다. 


ags의 핵심 구동계가 훤히 드러난 그곳을 발키리는 겨눴다.


발키리는 호흡을 완전히 멈췄다. 그리고 검은 ags-미스텔리가 그녀를 쏘기 전에 먼저 그것을 저격했다. 


발키리의 소총에서 발사된 7.62mm의 초소형 유탄- 발키리가 아끼고 아낀 최후의 일격은 그녀의 총을 떠나 순식간에 미스텔리의 치부에 도달했다. 검은 ags의 몸 여기저기서 불이 뿜어져 나왔다. 발키리는 마침내 긴장이 풀려 에인헤리의 등에 털썩 쓰러졌다.




"우리가 이겼습니다. 레이디 발키리."




"에인헤리... 고맙습니다."




"오르카 호의 양방향 통신 요청이 이제서야 들리는군요. 전파 방해를 일으킨 것도 저녀석이었던 모양입니다."



발키리는 에인헤리의 등에서 내려와 검은 ags를 바라보았다. 금속과 금속이 부딪치는 듣기 거북한 소리와 함께 그것은 

천천히 자세를 잃고 쓰러지려 했다. 



"사령관님 들리십니까? 여기는 탐색대. 라인리터 기사단장 에인헤리 입니다. 예, 걱정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에인헤리의 통신기에서 마침내 그리운 사령관의 목소리가 들리자, 발키리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미스텔리는 커다란 소리와 함께 마침내 완전히 쓰러졌다. 



"...?!"



순간, 발키리는 정체모를 공포를 느꼈다. 쓰러진 검은 ags의 총구가 그들을 향해 있는 것을 보았다. 발키리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검은 ags의 눈에서 붉은 안광이 다시금 빛났다.



"에인-"



"--!!!"



먼저 반응한 것은 에인헤리였다. 그는 있는 힘껏 발키리를 걷어 차 날려버렸다. 검은 ags의 총구에서 순간 화염이 뿜어져 나왔고, 대구경 총알이 그대로 에인헤리를 덮쳤다. 에인헤리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커헉...쿨럭... 에인헤리...!"



눈바닥에 엎어진 발키리가 입에서 피를 토하며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에인헤리는 대답하지 못했다.



"안돼..."



발키리의 왼쪽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저주받을 검은 ags를 노려봤다. 미스텔리의 붉은 눈 또한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도...온...칼로....접근 할....수....없다...."



검은 ags의 음울하고 낮은 목소리가 화염을 뚫고 울렸다.



"빌어먹을 자식...!"



"제거한...다..."




발키리는 총을 짚고 간신히 일어났다. 미스텔리 또한 화염을 뿜으면서도 어떻게든 발키리를 향해 몸을 움직였다. 

발키리의 눈에 반쯤 회복된 허리 아래의 구동계가 보였다. 망설일 틈이 없었다. 발키리는 온 힘을 쥐어짜내 달리며 검은 ags를 겨눴다. 



"으윽!?"



그 순간 검은 ags의 허리춤에서 뭔가가 빠르게 그녀를 항해 날아들었다. 발키리가 채 반응하기도 전에 그것은 발키리의 폐에 꽂혔다. 


사람 손 만한-그러나 아주 뜨겁게 달궈진- 히트 블레이드였다. 생각지도 못한 일격에 그녀는 그대로 나뒹굴었다. 더 고통스러울수 없을 격통이 몰려왔다. 



"끄흐으으으으악..."



발키리는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목에서는 바람 빠진 소리만 나왔다. 그런 그녀에게로 검은 ags는 아주 천천히 다가와서


- 저격총을 방망이처럼 발키리에게 휘둘렀다. 발키리는 커다란 저격총에 맞고 무력하게 날아가 그대로 바위에 부딪쳤다. 

이제는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미스텔리는 그런 그녀를 완전히 끝장내기 위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다가갔다. 발키리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검은 ags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끝일까. 이게 내 마지막인걸까. 발키리는 조용히 지난 날을 떠올렸다. 처음 세상에 태어났을 때. 처음으로 총을 잡았을 때.


처음 사령관을 만났을 때... 



"사령관 각하..."



무한히 영광스러운 순간을 그와 함께했다. 그는 그녀를 굳게 믿었고, 발키리는 한번도 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점점 그녀에게서 멀어지는 것만 같았다. 사령관은 그녀만의 것이 아니었고, 최후의 인류라는 사명은 모두에게 공평할 것을 


강요했다. 모두를 지키기 위해 더 강한 힘이, 더 강하고 유능한 인물이 필요한 건 당연했다. 발키리가 더 나아가지 못하자, 더 강해지지 못하자 사령관은 그녀에게서 점점 멀어질 수 밖에 없었다. 원망스럽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발키리 자신이 그의 자리에 서도 같은 결정을 했으리라.


더이상 그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것은 이제는 납득해야만 했고, 발키리는 납득했다. 하지만...



그에게, 자신의 마지막을 패잔병으로 기억하게 둘 수는 없었다.



적어도 승리를, 가는 길에 그에게 선물하리라. 영광스러운 전사로 기억되리라. 발키리라는 이름에 걸맞는 마무리를 하리라...!!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발키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비로운 기운이 그녀를 감싸는 것만 같았다. 검은 ags는 당황한듯 잠시 

주춤거렸지만, 이내 다시 천천히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발키리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 보았다. 이미 쏟을 수 있는 피는 다 쏟은 듯 했고, 

차갑게 식은 히트블레이드는 여전히 그녀의 가슴에 꽂혀있었다. 그러나 발키리는 다른 것을 보았다. 자신의 몸을 감싸는 황금빛을, 아아, 


프레이야 여신이시여! 아직 제 곁에 계셨군요...


발키리는 미소지었다. 그리고... 코트를 벗고 허리춤에 감긴 탄입대를 풀었다. 알비스가 쓰는 반응 장갑을 개조한 폭탄이 여러 개 감겨있었다.


검은 ags는 마침내 그녀의 앞까지 다가왔다. 천천히, 천천히 대물 저격총을 들어올려 그녀를 내리찍으려 했다.




"사령관님, 레오나님... 에인헤리...!! 먼저 가 있겠습니다."




발키리는 폭탄의 기폭 스위치를 전부 눌렀다. 그리곤 기합을 크게 한번 내지르고 탄입대를 그대로 검은 ags에게 내던졌다.




"발할라로!!!"




큰 폭발과 함께 검은 ags는 몸에 아주 커다란 구멍이 난 채로, 마침내 완전히 정지했다. 발키리는 공중에 떠서 그 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잠시 후 커다란 침엽수의 줄기에 부딪치며 떨어졌다. 더이상 아무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발키리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고양이 마차와, 마차에 탄 여신을 보았다. 그녀는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발키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여신의 따뜻한 손이 그녀를 감싸는 것을 느끼며 발키리는 눈을 감았다.....









모두의 비관적인 예측을 비웃기라도 하듯, 발키리는 오르카 호의 중환자실에서 마침내 눈을 떴다.  그녀가 눈을 떠 고개를 돌리자 다프네는


기절할 것처럼 놀라곤 사령관을 부르러 정말 빠르게 병실을 뛰쳐나갔다. 잠시 후, 사령관과 바이오로이드 동료들- 그녀들의 제일 앞에는 


레오나가 있었다- 이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한채 그녀에게 달려왔다.




"발키리...! 발키리!! 깨어났구나! 고마워... 고마워!!! 너무 미안해..."




사령관은 눈물을 펑펑 흘리며 그녀를 껴안으려다 다프네들에게 저지당했다. 발키리는 벙벙한 표정으로 모두를 바라보았다. 레오나는 아예 발키리의 침대를 붙들고 울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뒤에는 알비스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서로 껴안고 울고 있었다.




"발키리 언니...!"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자 너무나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알비스 22가 그녀를 보며 역시 울고 있었다.  그녀의 다리에는 철심히 빽빽하게 박혀 있었지만 그걸 빼면 안색도 괜찮아 보였다. 발키리는 그제서야 현실감을 느꼈다.




"각하. 걱정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발키리는 사령관의 손을 잡았다. 병실의 모두가 발키리의 손을 잡고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울었다. 오르카 호의 모두가 발키리의 이야기를 기쁘게 나누었다.




그 후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발키리는 완벽하게 회복했다. 닥터의 말에 의하면, 심리적인 이유로 위축돼 있었던 그녀의 신체가 '어떠한 계기로' 자신감을 얻어 회복했고, 체내에 추가 투입된 특수한 오리진 더스트의 잠재력까지 완벽히 터져나와 그녀는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힘을 얻었다고 했다. 확실히 그녀는 예전보다 훨씬 많이 여러 전투에 투입됐고, 예전보다 월등한 성과를 거두어 사령관과 모두를

놀라게 만들었다. 그녀는 2계급 특진되어 대령이 되었다. 하지만 그런 건 그녀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되찾았다는 것이 그녀에게는 그 모든 것보다 중요했다. 모두가 자신을 필요로 할때, 예전처럼


든든한 전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기뻤다. 


발키리가 다시금 최중요 전투원이 됐음에도, 그녀는 짬짬이 탐색 등 전투 외의 임무를 자처했다. 그중 그녀가 가장 신경써서 하는 것은


물론, 온칼로 주변의 탐색과 시설의 방어 업무였다. 최후 저지선이었던 미스텔리를 물리친 이후 인류 저항군은 온칼로를 완전히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온칼로에는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양의 방사성 폐기물들과, 소름끼치게도 재가공을 거쳐 무기화가 진행된 플루토늄 등의 물질로 가득 차 있었다. 이제 온칼로를 지키는 일은 그들의 중요 임무중의 하나가 되었다. 누구보다 온칼로를 확보하는데 큰 역할을 한 

발키리는 주기적으로 이곳을 찾아 시설의 안전 확보에 힘썼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 날, 발키리는 다시금 온칼로로 향했다. 한때 미스텔리가 지키던 온칼로의 입구에 서서 발키리는 격렬했던


지난 기억을 되짚었다. 바위 산 여기저기에 남은 포격의 흔적들을 보며 자신과 함께 싸웠던 기사들을 떠올렸다. ags를 파괴되기 전의 상태로 복원하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이라고 포츈이 그녀에게 말해주었다.  그녀는 하염없이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의 기사들은 기약이 없었다.


발키리는 저무는 해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meine dame."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에 그녀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검은 빛의 라인리터-그러나 여전히 다른 라인리터와는 다른 모습의- 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곳에서 만나게 될 거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에인헤리...!!"




그녀는 온 힘을 다해 에인헤리를 향해 달려갔다.  검은 기사는 그런 그녀를 보고 껄껄 웃었다. 해가 마침내 완전히 저물었다.


프레이야의 마차처럼 황금빛이 하늘을 가득 물들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