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하나의 고고한 난초였다. 댕기로 끝맺음 한 부드러운 검은 머리. 금빛실로 곱게 수놓아진 난초 문양의 명주치마와 장갑. 가느다란 허리춤에는 고고한 환도와 동개일습. 그리고 왼손 약지에 끼워진 색바랜 금빛 가락지.


금란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우아하고 고상한 자태를 은연중에 드러내었다. 이 자태를, 그녀의 '주인님'인 사령관은 퍽 마음에 들어했다. 멸망전의 개체임은 둘째 치더라도, 은연(隱然)중에 흘러나오는 기품은 다른 메이드들과는 사뭇 다르다고 느낄정도였다. 그것이 연륜에서 살아남은 자의 아우라인지 금란이라는 개체의 특징인지는 자세히 알지는 못했지만.


그렇기에 그는 그녀를 더 알고 싶었고,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흥미가 생긴다면 듣고싶은 것이 당연지사. 그 또한 그랬다. 멸망 전 인간들과의 '인간'관계, 그리고 멸망 후의 이야기를. 물론 어느정도는 보고를 통해 알고 있었다. 명성 높은 명문가의 호위무사였다는 사실과 그의 전(前)주인이었던 '나으리'를 잊지 못했다는 것을. 하지만 그는 보고서로 얻는 단편적인 정보와 기억에 의거한 이야기는 확연하게 다르다는 지론을 내세우며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그녀를 호출했다.


기다림은 찰나였다. 남빛의 사령관실의 문이 열리고 그녀, 금란은 의구심없이 그의 '주인님'에 대한 경의와 예의를 표할 뿐이었다. 


"주인님. 소첩을 찾으셨사옵니까?"


"응. 다름이 아니라, 네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소첩의 이야기라 하시면...? 어떤..."


사령관은 꽤 오랫만에 그녀의 의구심과 당황이 가득한 표정을 보았다. 당황스러움 사이에서 냉정함을 유지하려는 미묘한 줄타기. 분명 그녀는 제 스스로 얼굴에 드러나게 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보였다. 하지만 사령관의 옆에 서있던 부관들, 뽀끄루와 콘스탄챠는 그녀를 보곤 멋쩍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음... 일단 앉을까?"


가벼운 사령관의 헛기침과 함께 금란은 사령관의 맞은 편에 다소곳히 앉아 다시금 표정을 바로 잡았다. 콘스탄챠는 꽃향기가 은은히 풍기는 차를 끓이기 시작했다. 뽀끄루는 사령관의 옆에 앉아 눈만을 꿈뻑거릴 뿐이었다.


"당황스럽게 했다면 사과할게."


"아니옵니다. 아주 조금 당혹스러웠을 뿐이옵니다."


"그러면 다행이지만..."


"주인님. 괘념치말고 말씀해 주십시오."


소록한 차의 향기가 사령관실을 맴돌았다. 조금씩 향을 내며 보글보글 끓는 차와 쭈볏거리며 사령관의 눈치를 보는 뽀끄루. 아무 미동 없이 눈을 감고 있는 금란. 그는 다시금 헛기침을 내었다. 조심히 내뱉는 자신의 말에 미안함을 담으며.


"사실, 멸망 전의 네 이야기를 듣고 싶어. 물론 네가 불편하다거나 그렇다면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돼. 이건 명령이 아니라 부탁이야."


그녀, 금란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그 작은 미동에는 그녀의 감정이 묻어 나오는 듯 했다. 머뭇거림과 당황. 그리고 잠시뒤의 체념과 결의. 달싹거리는 작은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지극히 담담했다.


"아닙니다. 주인님께서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허나, 소첩의 이야기가 주인님의 흥미를 충족시킬지는..."


머뭇거리는 금란의 말을 덮는 콘스탄챠의 찻잔이 탁자 위에 올려졌다. 연한 노란빛의 차 위에 올려진 고운 꽃 한송이와 그 밑에 비춰지는 단아한 난초 하나.  난초는 서서히 기억속에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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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쩍새가 고요히 우는 밤이면 소첩은 나으리와 10평 남짓한 조촐한 방에서 마주 앉아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지요. 고급스럽게 새겨진 가문의 문양틀 사이로는 중천의 달빛이 흘러 비췄습니다. 은은한 조명 아래에선 책을 넘기는 소리와 숨소리가 편안히 들렸지요. 종종 나으리와 소첩의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소록하게 흔들리기도 했습니다. 언제나처럼 고귀한 나으리의 온기와 미천한 결합품 하나의 두근거림이 느껴지는 밤이었습니다.


소첩의 나으리는 학자이며 동시에 이단아라고 불리었습니다. 고서(古書)에 기록되어있을 법한 지체 높고 명망 있는 가문의 선비 같은 분이었지요. 인(仁)과 예(禮)를 중시하시었고, 다른 인간님들이 입지 않으시는 가문의 문양이 수 놓인 전통복을 입고 다니셨습니다. 또한 제 자신을 낮추시며 소첩과 같은 도구에게도 자비를 베풀어 주셨지요.

그 일례로, 소첩의 예민한 감각을 이해하시어 황금색 실을 섞어 짠 고운 명주실 위에 난초꽃을 수놓은 곱디고운 치마와 장갑을 하사하셨사옵니다. 


하지만 혹자는 제 나으리를 고상한 척하는 위선자라고 평하기도 했습니다. 도구를 도구처럼 다루지 못하는 심약한 도련님이라는 뒷이야기도 심심찮게 들려왔지요. 심지어는 사람을 만날 용기가 없어 바이오로이드에게 감정을 느끼는 샌님이라고도 하였사옵니다. 하지만 소첩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사옵니다. 이 세상 어떤 인간님께서 폐기될 운명의 결합품에 손을 내밀런지요?  다른 동형기 자매들보다 한참 뒤떨어진 불량품에 이름을 붙여줄 이는 또 누구란 말입니까? 소첩의 나으리는 세간의 평보다 더 상냥한 분이시라고 감히 말할 수 있었사옵니다. 오히려 세상의 모든 인간님들께서 나으리의 단면 만을 보고 판단을 하는것이 참으로 야속할 뿐 이었사옵니다.


휘영청 밝은 달이 수줍게 나무 뒤로 제 모습을 감출 즈음, 나으리께선 서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선 소첩을 바라보셨습니다. 연한 저녁 하늘 같은 두 눈을 바라보지 못함은 비통할 일이었습니다. 아무리 결합품이라 하여도 다른 자매들보다 예민한 감각과 알 수 없는 고양감이 그것을 힘들게 하였기에. 그저, 실낱같이 뜬 눈으로 바로 보지 못할 뿐이었사옵니다. 아마 제조과정에서부터 어긋나버린 결합품인 소첩이기에 감정모듈에 문제가 생긴것이 분명할 것이라 생각했지요. 그렇게 여기지 말것을. 너무 늦게 깨달아 버릴것이 사무친 한이 되어버릴줄 그 누가 알았겠사옵니까.


잠시간의 침묵이 지나가고 다시 소록한 바람이 불어올 때 즈음 나으리께선 나긋히 소첩에게 이르셨습니다.


"란(蘭)아. 너는 인간이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인간님의 정의를 묻는다고 하옵시면...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라는 학명을 가진, 언어를 가지고 사고할 줄 알고 사회를 이루며 사는 지구상의 고등 동물. 소첩의 학습 모듈에는 그리 명시되어 있사옵니다."


나으리께서는 소첩의 대답이 만족스럽지 못하거나 어긋날 땐 아이를 달래듯 은은히 웃어주셨습니다. 물론 그 미소엔 경멸과 멸시가 한 점 섞이지 않았습니다. 필시, 나으리께서는 선문답 사이에서 소첩이 새로운 것을 깨닫기를 바라셨겠지요. 하지만 불초 금란. 우매하여 나으리의 속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소첩은 그저 주인님의 가르침을 바랄 뿐이었습니다.


"주인님. 소첩의 대답이 틀렸는지요?"


또 다른 침묵. 따사로운 나으리의 눈동자는 소첩을 향하고 있었사옵니다. 그렇기에 이 하찮은 도구는 그저, 입을 다물 뿐이었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너는 스스로를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소첩은 바로 대답할 수 없었사옵니다. 도구는 자신의 존재의의를 의심하면 아니되었기에. 혹여 나으리의 심기를 건드린다거나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조심스럽게 소첩의 생각을 내뱉었사옵니다.


"소첩은 주인님의 검입니다. 검은 생각하지 않사옵니다. 그저 주인님의 명령에 따라 휘둘러질 뿐이옵니다."


"그것 뿐이더냐?"


"예. 소첩, 한시도 그것을 의심한 적이 없사옵니다. 결합품으로 폐기되어 생을 마감할 비천한 저를 거두어 주신 주인님의 은덕을 어찌 저버릴 수 있겠사옵니까. 이 불초 금란. 하해(河海)와 같은 성은(盛恩)을 베푸신 주인님께 바칠 수 있는건 이 비루한 몸뚱아리 뿐이옵니다."


초저녁 하늘같은 눈에 수심이 가득한 구름들이 몰려왔고, 바람은 서서히 풀꽃내음과 같이 사라져가는 이 깊어가는 밤에 야속한 침묵은 사라지지 않았사옵니다. 그저 하염없이 기다릴 뿐이었사옵니다.


"란아."


"예. 주인님."


"다시는 네 스스로를 도구나 검으로 생각하지 말거라. 혹여 누가 너에게 도구라고 하거든... '나비'라고 하거라."


"그것은 명령이옵니까?"


"명령이 아닌, 부탁이다."


그때의 소첩은 우매하게도 나으리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였사옵니다. 그저 도구로써, 검으로써 나으리의 명에 따르는 어리석은 결합품. 그것이 소첩이었사옵니다.


"주인님. 어찌하여 소첩에게 명령하지 않으신지요? 어찌하여 부탁하신단 말씀이십니까."


"역경(易經)의 계사(繫辭)에 이르길, 금란(金蘭). 쇠보다 견고하고 난초보다 향기로운 것은 서로의 우정이라 하였다. 너와 나의 관계는 그런것이다. 너는 친우에게 명령하는 것을 보았느냐?"


나으리는 저를 도구가 아닌 '나비'로 여기셨사옵니다. 하늘을 자유로이 날아다니며 언제나 사군자의 옆에 그려져 있는 나비. 나으리는 그런 분이셨습니다. 허나, 소첩은 아무 말 하지 못했사옵니다. 그런 소첩을 향해 나으리께서는 역정 한 번 내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소첩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로해 주셨사옵니다. 사실, 그 날 심장이 터질것만 같았사옵니다. 고양감에 붉게 물든 얼굴과 갈 곳을 잃은 두 손. 소첩은, 그때 깨달았어야 했사옵니다.


"... 괘념치 말거라. 아직은 때가 아닌 듯 하구나. 시간은 많고 너는 내 옆에 있으니, 서로 배워가자꾸나."


"예. 주인님. 소첩, 언제나 주인님의 옆에서 보필하겠사옵니다."


나으리와 소첩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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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로 생각하고 있긴한데 짬이 안남. 문체 힘빠지는게 눈에 보임. 터졌으면 좋겠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