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게 자른 머리와 큰 키, 전형적인 미남의 이목구비를 갖춘 그는 30대 초반처럼 보이는 건장한 체격의 사내였다.

 

“다시 한 번 묻겠다. 자네가 이 잠수함의 함장이 맞는가?”

 

“아......네, 넵, 맞습니다.”

 

사령관은 막 잠에서 깬 닥터가 당황하지 않도록 끌어안은 채로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나는 블랙리버의 인류 재건 프로젝트에 차출된 에이드리언 대위다.”

 

“자네가 숙면을 취하고 있던 도중 옆의 서류들을 훑어본 결과 철충으로 인해 인류는 결국 멸망하였고, 자네는 모종의 이유로 살아남은 민간인 생존자로 보이는군. 정확한가?”

 

사령관은 자신이 잠이나 자고 있던 사이에 깨어나 그리폰이 가져다 놓은 제복을 입고 책상의 서류까지 훑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하지만 그보다 서류들에서 현재의 상황과 사령관에 대한 정보를 읽어낸 그의 통찰력에 경외심이 들어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맞습니다. 저는 멸망 전......”

 

“자네의 소개는 필요 없네.”

 

“긴말하지 않겠다. 이 잠수함과 저항군 소속의 모든 바이오로이드의 지휘권을 현 시간부로 내게 넘겨라.”




11. 첫인상

 

AL 팬텀은 깨어난 인간과 사령관의 대화를 듣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팬텀은 탈론페더의 의뢰를 받고 광학미채를 활성화한 상태로 사령관실에 잠입해 있었다.

 

처음에는 내키지 않았으나, 사령관을 경호하는 목적도 이루는 일석이조의 임무라면서 카메라를 건네는 탈론페더의 말에 넘어가 캡슐을 옮길 때 위장 상태로 숨어들었던 것이다.

 

그녀가 외로워한다는 사실을 알아내, 자신의 친구가 되어달라고 먼저 다가와 준 사령관의 상냥함에 감격한 그녀는 그 우정을 소중히 여기고 있었다.

 

사령관과 닥터가 서로 기대어 자는 모습을 보면서 깨울 방법을 고민했지만, 몇 시간 동안 고심하던 중에 인간이 깨어나는 모습을 목격하여 지금까지 사령관실의 상황을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네??”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군. 네 휘하의 모든 바이오로이드를 지휘할 권한을 나에게 양도하라는 의미다.”

 

사령관은 갑작스러운 요구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고, 사령관에게 안겨있던 닥터도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에이드리언을 노려보고 있었다.

 

당황한 것은 이를 사령관실에 있는 이들뿐만이 아니었다.

 

탈론페더는 팬텀의 카메라에 찍히고 있는 상황을 호드 부대원들과 함께 보고 있었으며, 오르카호 통신망에 연결된 PC, TV, 모바일 디바이스 등으로 대다수의 함 내 바이오로이드 또한 이를 숨죽인 채로 지켜보고 있었다.

 

사령관은 너무나 당당하게 지금껏 쌓아온 자신의 권위를 빼앗으려는 그의 모습에 당혹감을 느껴 얼버무리기 시작했다.

 

“하........하지만...........그........저항군에 합류한 바이오로이드는 지금까지 제 지휘에 따라 줬고,........또, 그..........제 능력이 부족하긴 해도, 오르카호의 일거수일투족을 제가 관리해 왔는데...........아.........”

 

“횡설수설하고 있군. 그래서 네 결론이 무엇이지?”

 

에이드리언 대위는 순간 사령관 앞으로 성큼 다가오며 책상에 손을 강하게 짚었다.

 

팬텀 또한 유사시의 경우 빠른 행동을 위해 사령관 곁에 바짝 다가왔다.

 

“........못 넘깁니다.”

 

“........”

 

“제가 마음대로 넘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당장 넘겨줄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게 제 대답입니다.”

 

지금 대위의 행동은 충분히 위협으로 간주할 수 있었다.

 

사령관의 몸은 아직도 경직되어 있었지만, 마음을 다잡은 듯 그의 목소리에서는 결의가 느껴졌다.

 

자신이 대면하고 있는 큰 체격의 사내가 그 누구도 아닌 기업 블랙리버의 군 간부라는 사실을 다시금 인지한 듯, 사령관의 눈은 오랜만에 각오로 빛나고 있었다.

 

“어째서지?”

 

“그걸 몰라서 물으........”

 

“자네는 멸망 전 일개 민간인이었다. 어떤 종류의 군 조직도 지휘해본 경험이 전무하고, 바이오로이드를 지휘해왔다고는 해도 지휘 능력과 경험이 부족한 것은 자명하지.”

 

“........”

 

“나는 블랙리버 사가 차출한 지휘관이다. 더불어 강화인간 시술을 거듭해 지휘 능력도, 육체의 힘도 극한으로 끌어올리는 절차를 거쳤다. 인류 재건을........”

 

“댁의 능력에는 관심 없어. 다, 다만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지도 못하는데 오르카호를 넘길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흥분한 사령관은 대위를 노려보며 책상 서랍 속에 떨리는 손을 집어넣었다.

 

“애초에 그녀들의 의사를 먼저 물어봐야 하는 문제지 않습니까. 


제 입장이 마음에 안 드신다면 여기서 결판을 내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이는군요.”

 

에이드리언 대위는 생각했다.

 

(책상 서랍 속 무언가를 만지작거리고 있군. 그리고 저 안겨 있는 바이오로이드는 필시 080기관의 닥터, 지금은 나에게 명령권이 없어 어떤 변수가 될지 모른다.)

 

그의 시선은 사령관에게서 떨어져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 팬텀에게 가서 멈추었다.

 

정면으로 눈이 마주치자 팬텀은 흠칫하며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고, 대위의 눈은 순간의 일렁임을 놓치지 않았다.

 

(AL 개체.........팬텀인가? 인기척은 느꼈지만 하필 팬텀이라니 성가시다.)

 

사령관이 책상 속 물건을 계속 만지작거리며 대위의 행동을 지켜보는 와중에 사령관실 문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불가사리가 파일 벙커를 가지고 대기하는 것인가, 저자나 바이오로이드나 예상보다 훨씬 완강해. 무능해 보이는 녀석에게 의외의 충성심을 보이는군.)


에이드리언 대위는 생각에 잠긴 듯 잠시 동안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언뜻 교착상태에 도달한 것처럼 몇 초간 방 안에는 긴장감만이 감돌았다.

 

대위의 손이 잠시 제복 안주머니로 향하는 듯 했지만, 문 밖에서 소란이 일자 이내 멈추었다.

 

길게 느껴지는 침묵을 깬 것은 나지막한 중얼거림이었다.

 

“........이대로는.......”

 

“뭐라고?”

 

“.......아닐세, 내가 초면에 무례를 범했군. 너그럽게 용서해 주길 바란다.”

 

“.......?”

 

“내가 자네의 겉모습만 보고 자질을 잘못 판단한 것 같다. 상황을 쓸데없이 고조시킨 것에 대해 사과하지.”

 

그는 양 손바닥을 내보이고는, 모자를 벗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의 태도가 갑자기 바뀐 것과 중얼거린 말이 신경 쓰였으나, 사령관 또한 이 상황을 유지할 마음이 없었으므로 책상 서랍 밖으로 손을 꺼내 놓았다.

 

“괜찮습니다. 대위님의 능력이 오르카호를 이끌어 나가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은 저도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자부심을 가지시는 것이 당연하겠죠.”

 

사령관은 닥터를 무릎에서 내려가게 한 뒤 일어서 에이드리언 대위에게 다가갔다.

 

“저항군의 총사령관으로서 오르카호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함께 철충을 지구상에서 쫓아내 봅시다.”

 

사령관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영광이다. 사령관. 앞으로 잘 부탁한다.”

 

에이드리언은 사령관의 손을 잡았고, 두어 번의 악수 끝에 다소 위협적이었던 상황은 막을 내렸다.

 

“그럼 오르카호의 시설을 안내해 드릴 테니 따라오시죠.”

 

사령관은 속으로 안도하면서 에이드리언 대위와 사령관실 문으로 향했다.

 

그와 동시에 방문 밖에서 다수의 인원이 돌아가는 발소리가 들렸으며, 어느 저격수가 경계를 풀고 한숨을 내쉬었지만 사령관으로서는 알 방법이 없었다.




12. 책임 없음의 쾌락

 

휴우우우우.......

 

사령관은 침대에 누우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일이 있은 지 벌써 두어 달이 지났다.

 

에이드리언 대위는 예상과는 달리 바이오로이드에게 친화적으로 대했다. 그녀들도 처음에는 그의 첫인상 때문인지 다가가기를 꺼려했으나, 이제는 그의 지시를 잘 수행하며 철충을 박살냈다.

 

블랙리버의 강화인간답게 그의 지휘능력은 사령관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그는 합류 후 며칠 간 지금까지의 전투에 대한 보고서, 오르카호의 시설에 관한 정보, 바이오로이드에 대한 기록들을 닥치는 대로 읽더니 전투를 직접 지휘해보겠다고 나섰다.

 

사령관은 그가 지휘하는 방식을 보고, 심한 아군의 피해가 예상되면 제지하겠다는 심정으로 소규모 교전의 지휘를 맡겨 전투를 바로 옆에서 지켜보았다.

 

하지만 사령관과 대다수 전투원들의 걱정과는 달리, 그는 군더더기 없는 지휘로 순조롭게 철충들을 격파해냈고, 때로는 그 마리나 레오나마저 예상치 못한 전술을 보여주었다. 바이오로이드와 AGS도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그의 지휘에 응했고, 승전을 거듭하여 저항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사령관이 가장 눈여겨 본 것은 그 와중에도 사망자는 없었고, 부상자 또한 자신이 지휘하던 때보다 적었다는 사실이었다. 자신과는 격이 다른 그가 사령관의 직무를 수행하기에 손색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한 사령관은 점점 더 많은 전투를 그에게 맡기기 시작했다.

 

책임을 떠넘긴다는 생각에 죄책감도 들었으나 그는 언제나 흔쾌히 받아들였고, 지휘관 개체들도 아무런 불만을 표하지 않았기에 이제는 그가 모든 전투를 계획하고,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

 

직책이 유명무실해진 사령관은 스스로 사령관실에서 나와 개인 침실에서 하루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는 침실에서 나오는 것을 꺼리고 매일 바닐라가 전해주는 서류들을 결제하면서 편안한 나날을 보냈다.

 

사령관이 지휘 체계에서 한 발짝 물러난 뒤로 그에게 찾아오는 바이오로이드는 크게 줄었다. 

 

전투 임무를 수행한 바이오로이드나 탐색을 다녀온 바이오로이드는 새로운 사령관에게 보고하였고, 임무 외적인 일로 사령관을 찾아오던 이들은 에이드리언 대위에게 더 큰 관심을 보였다.

 

예외적으로 티아멧은 임무를 마친 뒤 언제나 사령관을 찾아왔고, 짧게 보고를 마친 후 언제나 사탕을 입에 문 채로 방을 떠났다. 그녀가 새 사령관에게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기에 사령관은 그녀가 마음을 조금 더 열 수 있도록 언제나 격려의 말을 덧붙이곤 했다.

 

사령관은 현재 침대에 누워, 손 안의 물건을 만지작거리며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있었다. 

 

그때의 일이 지금 생각난 것은 필시 이것 때문이라, 사령관의 손 안에서 아담한 크기의 장비가 전등 빛을 받아 반짝였다.

 

평소라면 전혀 낼 수 없을 용기가 갑자기 샘솟았는지, 너무 무시당하는 것 같아서 순간 발끈한 건지 몰라도 용케 대위에게 위협을 가하려고 만지작거렸던 그 물건이다.

 

그리폰이 기념품으로 주워온 조그만 파편을 보자마자 사령관은 그녀에게 200참치를 안겨주고 그것을 고이 모셔왔다.

 

약 백년 간 활성화 상태를 지속한 내구성, 광학위장 기술까지 탑재한 방어역장은 사령관이 꿈에나 그리던 최고의 기술이었다.

 

닥터와 포츈에게 달려간 사령관은 그 역장을 소형화해서 전투원 개개인이 사용할 수 있도록 대량 생산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현재로서는 파편을 직접 개조해 시제품을 2개까지 만들 수 있다는 대답을 듣고 못내 아쉬워하였지만, 블랙리버 시설에서 부품을 뜯어오면 더 수급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그는 쾌재를 불렀다.

 

이것만, 지금 손에 쥔 이것만 충분하면 아무도 잃지 않는 완벽한 승리가 그저 막연한 꿈이 아니게 될지도 모른다.

 

그 승리를 이끄는 것은 그가 아니겠지만 말이다.



13. 메이드장

 

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주인님, 결제한 서류를 받으러 왔습니다.”

 

“아, 네 여기 있어요, 바닐라 씨.”

 

바닐라가 문을 열고 들어와 사령관이 건네준 서류를 받아 들었고, 뒤이어 콘스탄챠가 방에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주인님. 조금 전 식사는 맛있게 하셨나요?”

 

소완이 에이드리언의 전속 요리사로 임명되었으나, 사령관의 식단은 언제나 포티아가 담당했기에 변화가 없었다.

 

“여느 때처럼 아주 게걸스럽게 드시더군요. 뒷정리하기 힘들게.”

 

“엇, 제가 먹는 걸 보셨다고요?”

 

“주인님의 행동은 안 봐도 눈에 선합니다. 아이들 그만 괴롭히시고 어서 잠자리에 드시지요.” 

 

“넵! 바닐라 씨 덕에 오늘은 좀 일찍 자겠네요. 헤헤.”

 

드라코, 브라우니, 워울프 등과 함께 스틸라인 온라인을 하며 밤을 샐 계획이었지만, 지금 무산되어 버린 것 같다.

 

바닐라는 돌아서서 문으로 향했고, 두 명의 대화를 웃으며 듣고 있던 콘스탄챠가 사령관에게 다가왔다.

 

“LRL과 더치 양은 벌써 잠들었네요. 마리아씨에게 부탁해서 방에 데려다 주어야겠어요.”

 

오늘은 저녁 식사 후 LRL과 더치가 찾아와서, 놀아주다가 침대 위에서 둘이 잠들어 버렸다.

 

“네, 그래야겠네요. 2명이니까 모모씨도 와주셔야 하겠어요.”

 

두 명은 흐뭇한 미소를 지은 채 잠시 동안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

 

“.........주인님”

 

“주인님은.........요즘 생활에 만족하고 계시나요?”

 

콘스탄챠가 달라진 어조로 말을 걸어왔다.

 

“외롭지는.........않으신가요?”

 

언뜻 보면 이상한 질문이었다. 수복실에 누워있는 바이오로이드들을 찾아가 장비에 모모 스티커를 붙여 주기도 하고, 하치코, 켈베로스와 산책을 나가기도 하면서 매일을 즐겁게 지내고 있는데, 외로움은 무슨 의미일까.

 

하지만 사령관은 언제나 자신을 걱정해주는 메이드의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지휘관들, 그리고 수시로 전투 임무를 수행하던 그녀들을 근래에는 좀처럼 만날 수 없었다.

 

새로운 사령관이 매일 밤 지휘하는 바이오로이드를 침소에 들인다는 소문이 오르카호에 돌고 있었다. 그가 오르카호 모든 전투의 지휘권을 거머쥔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들려오기 시작한 이 가십거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도 있었고, 자신과는 관련이 없는 이야기로 치부하는 자들도 있었다.

 

사령관은 후자에 속했다.

 

그는 상급 바이오로이드들이 자신에게 더 이상 찾아오지 않는 이유를 알게 되었고, 그녀들이 에이드리언 대위 옆에서 밝게 행동하는 모습을 보면 오히려 잘 된 일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자신이 그동안 해소해주지 못한 욕구가 그녀들에게 쌓여있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멸망 전 영상물을 유포하는 등 갖은 노력을 해왔지만, 그녀들이 자신을 매력적인 남성으로 보지 않는 것을 해결하지 못하는 이상 큰 의미가 없었다.

 

그 또한 그녀들을 이성보다는 소중한 가족과 같이 생각하였기에, 사령관은 조금은 섭섭한 마음을 뒤로하고 그녀들과 대위가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빌어주었다.

 

“아니요, 이 아이들도 있고, 저랑 놀아주는 분들이 얼마나 넘쳐나는데요.”

 

“무엇보다, 콘스탄챠 씨가 항상 옆에 계신데 외로울 틈이 있을 리 없잖아요.”

 

콘스탄챠는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주인님도 참. 제가 조금 더 자주 뵈러 와야 하는데, 부쩍 바빠져서 큰일이에요.”

 

사령관이 깨어났을 때 가장 먼저 본 얼굴. 그 얼굴은 지금도 변함없이 사령관을 걱정해주고, 아껴주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괜찮아요, 아침에 콘스탄챠 씨 목소리만 들어도 저는 힘이 나는걸요.”

 

어느새 둘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손을 마주 잡고, 온기를 느끼며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갑작스럽지만 콘스탄챠 씨는, 제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음........솔직하게 말씀드려도 되나요?”

 

사령관은 말없이 웃어보였다.

 

“주인님은.........너무 상냥하신 분 같아요. 365일 언제나 저와 자매들이 실수를 해도 용서해 주시고, 자기 자신보다 저희를 먼저 생각해서 힘든 내색도 안하시고.......후훗, 너그러운 아버지 같다고나 할까요?”

 

말해놓고 보니 역시 의외의 비유였는지 콘스탄챠도, 사령관도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 무슨 소리예요, 저 그 정도로 노안은 아닌데ㅋㅋㅋㅋ.”

 

“그, 그런 의미가 아니라 그만큼 저희가 의지할 수 있는 분이라는 거죻ㅎㅎㅎㅎ.”

 

별것 아닌 일로 한참을 웃고 난 후에야 두 사람은 조금 진정할 수 있었다.

 

“으흠, 음........뭐, 그렇다면........하나만 더 물어봐도 될까요?”

 

“뭐든지요, 주인님.”

 

“콘스탄챠 씨는, 저를 사랑하시나요? 아니면.........”

 

콘스탄챠가 그를 두 팔로 끌어안으면서 사령관의 말이 멈추었다.

 

“..........”

 

“사랑해요,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제 주인님.”

 

“............저도...........정말로 사랑해요, 콘스탄챠 씨.”

 

두 사람은 서로를 힘껏 끌어안고 사랑을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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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닐라가 호출했는지, 잠시 후 나타난 모모와 마리아에 의해 애정행각은 제지당했다. 아이들 앞에서는 자제해달라는 꾸지람을 조금 듣고, 사령관은 아이들이 돌아간 후 방에서 콘스탄챠가 준비를 마치고 다시 찾아오기를 기다렸다.

 

주인에게 온 마음을 다해 헌신하는 그녀는, 사령관이 오르카호에서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바이오로이드였다.

 

사령관이 생각하기에 그녀는 자신에게 너무나 과분했다. 지금보다 훨씬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자격이 있었고, 사령관은 그러한 방향으로 그녀를 이끌어줄 의지가 충만했다.

 

애초에, 그녀와 같은 훌륭한 비서는 사령관의 책무를 다하는 자에게 필요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마음을 굳힌 사령관은, 콘스탄챠와 함께하는 밤이 부디 오늘로써 마지막이 아니기를 염원하며 나이트 드레스를 입은 그녀를 맞이했다.



14. 목표

 

이 빌어먹을 바이오로이드년들은 권위의식이란 것을 상실한 것 같다.

 

새 사령관이 저녁 식사를 마치고 신경질적으로 외투를 내팽개치며 한 생각이다.

 

바이오로이드 여럿이 그가 총사령관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 마냥 상관에게 협상을 시도하는 태도를 보이는가 하면, 그것으로도 모자라 교태를 부리며 안겨오는 것이었다.

 

그가 깨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는 모두가 경계를 하는 듯 보였으나, 시간이 지나자 에이드리언 대위가 보기에는 권위에 복종하지 않는 암고양이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전 사령관이 더욱 눈엣가시처럼 여겨지기 시작했다. 사령관 스스로의 열등감 덕분에 지휘권을 순조롭게 차차 넘겨받을 수 있었으나, 그의 방식에 따라 과한 자유가 주어진 인류 재건의 도구들이 인간의 권위를 넘보는 듯하였다.

 

블랙리버 군에서는 병사 개개인에게 과한 자유를 부여하지 않았다. 수뇌부는 그저 전장에서 그녀들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방법을 모색했을 뿐, 인간도 아닌 양산된 소모품을 권위로 복종하게 만들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현재 오르카호에서는 상급 전투원뿐만 아니라 말단 병사까지 일반 군인, 아니 그 이상의 권리를 누리고 있었다.

 

바이오로이드들은 명령을 통해서가 아닌 사령관의 부탁을 받아 각종 특수 임무를 수행하였고, 이를 거절할 수도 있었다. 브라우니와 같은 병사도 사령관과의 상담을 거쳐 병과를 변경하거나, 심지어 전투에서 열외 하여 며칠 간 전혀 다른 업무를 해보기도 하였다.

 

전투에서 목숨을 잃는 일이 없어졌기에 그녀들은 많은 자매들과 우정을 쌓기 시작했고, 각자 취미를 하나씩 가지거나 편의시설에서의 여가를 즐겼다.

 

소모품으로서 적에게 돌격하던 병사들은 죽어서 잃을 것이 너무나 많아졌고, 멸망 전과 같은 저돌적인 모습을 전혀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전장에서 죽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그녀들은 사령관의 부탁이자 지시를 따라주는 것이었다.

 

군 조직이 유지되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기강이 해이해진 모습, 이것이 대위가 본 인류 최후의 군대의 민낯이었다.

 

“주제에 상관에 대한 경외심은커녕 명령을 내리면 불쾌해하는 것들이라니.......”

 

전 사령관 덕분에 한 번 맛 본 권리를 바이오로이드들이 지금 와서 포기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이제는 그가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입맛대로 명령 체계부터 시작하여 군의 기강을 뜯어고칠 수는 있었으나, 그것에 대한 반발이 극심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전 사령관이 사실상 물러나기는 했어도 오르카호의 편의시설에 관한 것과 바이오로이드의 ‘복지’는 아직도 그의 관할이었다. 덕분에 그 또한 친절한 가면을 쓰고 도구나 다름없던 것들의 요구를 어느 정도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비효율적에, 비이성적에, 전쟁을 이길 생각도 없는 족속들 같으니!”

 

그는 개인 침실에 붙어있는 동침 스케줄을 찢어 버린 후 애써 화를 진정시키며 의자에 앉았다.

 

그는 많은 바이오로이드의 요구를 수용하여 매일 밤 스케줄에 따라 그녀들을 안았다.

 

오갈 곳 없는 화를 조금이라도 풀기 위하여 때로는 격하게, 때로는 느긋하게 밤일에 임하였지만 갈수록 그녀들의 신음소리는 역겹게 느껴질 뿐 그에게 아무런 만족도 가져다주지 못하였다.

 

그가 격해진 감정을 누그러뜨리는 방법은 언제나 전투에, 임무에 골몰하는 것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모니터 앞에 앉은 그는 오르카호의 이전 기록물들을 훑기 시작했다. 전투 결과 보고서, 정찰 보고서, 모두 철충의 동향과 전략을 파악하기에 필수적인 자료들이었다.

 

파일을 정신없이 뒤지던 중 한 가지 영상이 그의 눈에 띄었다. 꽤 긴 길이의, 예전에 회의실에서 촬영한 듯 보이는 영상, 스크롤을 내려도 내려도 문서밖에 보이지 않던 오르카호 데이터베이스에서 단연 돋보였다.

 

이를 흥미롭게 여기고 영상을 재생하자 전 사령관의 모습이 나타났다.

 

통상적인 회의와는 사뭇 다른 광경이 대위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했다.

 

빔 프로젝터의 사진 자료 앞에 직접 서서, 신이 난 채로 무언가를 설명하는 사령관.

 

“쉽게 말해서 이 바이오로이드 거주구역이라는 개념은........”

 

“충분히 이해했어, 사령관. 철충을 몰아내고 그 영토를 점거해서 주택도 만들고, 빌딩도 세우고........바이오로이드들이 사는 마을을 만들자는 거지?”

 

“역시 레오나 씨라면 바로 이해해주실 것 같았어요. 근데 최종 목표라기엔 너무 소박한 것 같아서, 이왕 하는 김에 아예 도시를 세우는 것까지 생각해 봤어요!”

 

“멸망 전처럼 멋진 건물도 만들고, 상점도 세우고, 음식점도, 공원도 있는 도시에서 모두 걱정 없이 사는 거예요! 철충도 없고, 괴롭히는 인간도 없이 행복하게...........신인류가 되는 거죠!”

 

“그렇게 크기를 점점 불려가다가 나라도 세우고, 대통령도 뽑고, 인류 문명을 우리 손으로 다시 만들어나간다고 생각하면 상상만 해도 멋있지 않나요???”

 

회의실의 바이오로이드 중 슬레이프니르, 오드리 등 몇몇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칸이나 아르망 등은 가볍게 미소 지었다.

 

레오나 또한 얼굴에 웃음이 살짝 스쳐 지나갔으나, 유독 마리만은 심각한 표정이었다.

 

“사령관 각하, 그렇다면 인류의 재건에 대한 계획은 없으십니까?”

 

마리는 어렵사리 말을 꺼냈고, 그와 동시에 그녀들의 모든 시선이 사령관에게 고정되었다.

 

“어.........그, 그건........”

 

“그, 잘 아시잖아요, 괜히 사람들이 늘어나면 또 예전처럼.......”

 

“왜, 사령관치고 귀여운 계획이라 난 마음에 드는데. 다들 전처럼 여러모로 못난 인간님들 보고 살기 싫잖아?”

 

“마, 맞아요, 메이 씨, 그래서.........”

 

“너도 포함이야, 답답아.”

 

“엑..........”

 

“푸훗......”

 

“크, 크흡........”

 

사령관과 메이의 대화를 듣고 누군가가 웃음을 터뜨린 것을 시작으로 회의실은 순식간에 웃음으로 가득 찼다. 메이가 이따금씩 사령관에게 틱틱대는 것은 흔한 일이었기에 사령관을 포함한 모두가 웃기 시작했고, 마리 또한 충분한 대답을 들은 듯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폐하의 고집은 가끔 추기경인 저로서도 어쩔 수 없으니까요, 후훗.”

 

“호호, 지킬 인간님이 한 명뿐인 건 저희로서도 좋죠.”

 

“왜, 왜 다들 웃는 건데! 내, 내가 웃긴 말 한 것도 아니잖아!”

 

메이가 빨개진 얼굴로 소리치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회의실을 도촬하던 카메라가 꺼지며 영상은 끝이 났다.

 

전 블랙리버 군의 간부로서 충분히 불쾌할 영상이었지만, 컴퓨터의 전원을 끈 그의 표정은 전보다 평온해져 있었다.

 

에이드리언 대위는 이로써 전 사령관의 방식을, 목적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인류를 재건하지 않고 오직 바이오로이드의 국가를 세운다. 그리고 모든 바이오로이드가 시민이 되어 일상을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겠다.

 

어찌 보면 지극히 민간인다운 발상이었고, 그가 바이오로이드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 그 목표에 충실하고자 노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확실히 이해했다.”

 

“너는.......전혀 다른 이상을 가지고 있군.......”

 

그는 책상 위에 놓인 서류더미를 뒤지기 시작했다.

 

무언가 결심한 듯, 진지해진 표정. 그저 강한 결의 외에는 일말의 고민도, 어떠한 감정도 드러나지 않는다.

 

몇 초간의 격한 움직임 끝에 그는 다이카의 정찰 보고서를 꺼내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레이더에 포착된 몇 개의 점이 오르카호에서 멀지 않은 곳에 머물러 있었다.

 

“너와 나는.......이 오르카호에서 공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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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처음 써보는 글 => 오타, 개연성 지적 등 피드백 대환영

2. 이제 매운 부분 쓰기 시작해야 할 듯

3. D-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