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충 어울리겠다 싶은 브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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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에 갇힌 수도사 필라레트, 일랴 레핀







바실리는 멍한 표정으로 닥터를 바라보았다. 이 수중전함의 밖에는 바닷물밖에 없다는 사실은 차치하고서라도, 바깥에 우글거리는 여인들을 통솔하는 '지휘관급'들의 눈을 피해 나갈 수 있겠는가? 아무리 그 지휘관들이 에스파냐군을 상대한 잉카인들만큼 무지하고 지리멸렬하다 치더라도 그 숫자는 무시할 수 없었다. 심지어 기술력의 차이는 반대였다. 19세기 초에서 온 바실리는 미래세계 감시기술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알 길이 없으니, 에스파냐군에게 둘러싸인 잉카 황제와 같은 꼴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실 그 전에 중요한 사실은 따로 있었다. 저 여성들이 어째서 바실리를 가두려 하는지 그는 전혀 알지 못했다. 하르페이아가 읽어준 그림책에 의하면 저들은 바실리에게 헌신적이어야만 했다. 하지만 감금과 소위 '여러 힘든 조치'는 어느 모로 보아도 헌신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분명 이 현실에는 상당한 모순이 보였다. 어째서 저들은 그런 결정을 내렸는가?


하지만 바실리에게는 바로 옆에 놓여있는 보고서를 읽을 용기가 없었다. 저 보고서를 들춰본다면 그 이유에 대해 확실히 알 수 있겠지만 그는 그러지 못했다. 그건 저 표지를 보는 순간 머리에 불현듯이 스친 어떤 가능성 때문이었다. 자신이 자신이 아닐 가능성. 세면실에서, 샤워실에서 거울을 마주 볼때마다 마주치는 그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제기하는 가능성을 바실리는 너무도 두려워했다. 그 가능성이 가능성으로 남아있는한 바실리는 바실리로 남아있을 수 있다. 하지만 가능성이 현실로 바뀌는 순간, 그는 바실리 바실리예비치 이바노비치로 남아있을 수 있을까?


아직도 침대에 앉아있던 바실리는 고통에 찬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무릎에 파묻은채 머리를 감싸쥐었다. 닥터는 바실리가 자신의 존재에 관해 공포에 떠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바닥에서 일어나 의자에 앉아 메모장을 들고 주머니에서 펜을 꺼내 뭔가 휘갈겨쓰기 시작했다. 바실리는 망연자실한듯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닥터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바실리의 주머니에 메모장을 우겨넣으며 말했다.


"지금 오빠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배신감을 느끼는지, 공포를 느끼는지, 절망을 느끼는지, 아니면 모든 감정이 한꺼번에 찾아왔는지 알 길이 없다고. 그래도 지금 결정해야 할건 단 하나야. 저 높은 양반들이 원하는대로 거기에 가만히 앉아서 저들의 손 안으로 기어들어갈건지, 아니면 여기서 빠져나가 뭐라도 할건지 선택해야해. 여기서 나가지 못한다면 전에 열심히 읽던 책에서 말하던 러시아는 물론이고, 오빠 자신도 찾을수 없을거야."


닥터는 문 쪽으로 걸어가더니 문 고리를 잡았다. 그 자세로 잠깐 멈칫하고는 고개를 돌려 바실리를 바라봤다.


"그 메모장에는 믿을 수 있는 인원들 이름을 적어놨어. 아는 사람도 있을거고 모르는 사람도 있을거야. 만약 과거와 현재를, 미래를 찾고자 한다면 거기 있는 이들중 한명한테 말해. 아 그리고 앞으로는 말 조심하는게 좋을거야. 조만간 이 방 곳곳에 감시도구가 달릴거거든. 미래 기술로 만들어진 감시도구니까 진짜 조심해야해. 알겠지?"


그리고는 방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바실리는 여전히 영혼이 없는 듯한 표정으로 문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에 앉은 그는 주머니에 구겨진채 쳐박혀 있는 메모장을 꺼내보았다. 동그랗게 구겨진 메모장을 책상 위에 펼치고 내용을 확인했다.


닥터, 하르페이아, 블랙 리리스... 셋이 끝이었다. 별로 많지도 않구만. 명단을 읽은 바실리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세 강인한 여자와 한 무능력한 남자. 그 넷으로 저 어마어마하게 많은 군단을 뚫어낼 수 있겠는가? 바실리는 종이를 구겨서 책상에 내던진 후 침대로 쓰러졌다. 닥터의 말 그대로였다. 여기서 주저앉아 혼란에 빠진 채로 저들의 알수 없는 목적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가, 아니면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탈출을 감행하여 또 다른 혼란 속으로 빠져들어가야 하는가?


바실리는 침대에 누워 창백한 천장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어째서 주님께서는 그에게 이런 고통을 내리시는가? 어째서 그가 이런 모든 아픔을 홀로 감내해야 하는가? 그 무엇도 알 수 없는 이 세계에 떨어진것이 어째서 그여야 했는가? 진실로 하나님께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여기에 바실리를 보내긴 한 것인가? 며칠 전만 하더라도 이 땅을 다시 구원하겠다고 불타던 바실리의 열정은 처음 여기에 내려오던 그 시점에 그를 엄습하던 혼돈으로 다시 바뀌어 있었다.


그러던 와중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바실리는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철문을 조금 열며 바깥을 내다보았다. 식당에서, 함교에서 수없이 보이던 똑같이 생긴 병사들 중 한명이었다. 어디에서든 돌아다니던 그 음란한 복장에 붉은 머리를 한 여인. 상당히 긴장한 표정으로 바실리를 바라보던 병사는 각 잡힌 경례를 하면서 귀청이 떨어질 듯 충성을 외쳤다. 바실리는 초췌한 표정으로 그 황당한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충성! 사령관... 아니, 인간님을 호위하라는 명령을 받고 온 레프리콘 5281번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감시원이로군. 이렇게나 자신감이 없는 간수는 처음이었다. 호위는 핑계고 그가 여기서 나갈 수 없게 감시하고 통제하는 역할을 부여받았겠지. 닥터가 말한 감시도구를 설치하기 전까지 임시로 놔둔 간수가 분명했다. 바실리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자 병사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래서 밖에 있을 생각이요, 안에 들어올 생각이요? 안이 생각보다 넓지 않으니 잘 생각해보고 결정하시오."


레프리콘은 한층 더 당황했다. 도데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 표정을 바라보는 바실리의 한숨도 동시에 한층 더 깊어졌다. 만약 탈출을 택한다면 저 자가 간수인 쪽이 훨씬 편하겠지. 아마도 그 소위 '지휘부'에서는 그가 탈출을 고려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풋내기를 감시원으로 보낼 리가 없지 않는가? 바실리는 또 다시 한숨을 쉬며 문을 활짝 열어 들어오라고 고갯짓을 했다.


레프리콘이 문 앞에 서서 쭈뼛쭈뼛하며 대답을 못하자, 바실리는 문을 닫고 책상 위에 던진 종이뭉치를 집어 주머니에 쑤셔박고 서류철을 베개 밑으로 집어넣었다. 혹시 발견했을때 머리가 아파질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문을 열은 바실리는 아까 닥터가 들어왔을 때와 같은 구도로 침대에 앉아서 의자를 가리켰다. 병사는 여전히 잔뜩 긴장한 채로 의자에 정좌 자세로 앉아서 전방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바실리가 더 불안할 정도로 부자연스러운 표정이었다. 이 적막을 깨기 위해 바실리는 나오는 대로 내뱉었다.


"리리스 씨는 어디가고 당신이 온거요?"


역효과였다. 레프리콘은 급기야 눈동자를 바들바들 떨면서 말을 더듬었다. 그녀가 웅얼거리는 소리는 더 이상 인간의 말 조차 아니었다. 지금 바실리에게는 앞에 앉아있는 레프리콘은 중요한 건 축에도 들지 못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병사를 한번 흘겨본 그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 


생각을 정리해야했다. 바실리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생각에 빠졌다. 일단 첫번째 결정사항은 이 수중전함에서 탈출할지, 아니면 저들에게 모든 일을 맡길지가 문제였다. 저들에게 맡긴다면 다가올 위험은 단 하나였다. 닥터가 말했던 '여러 힘든 조치'가 뭔진 모르겠지만 확실히 긍정적인 단어는 아닌게 분명했다. 그리고 닥터가 그에게 거짓말을 할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탈출하는 쪽도 문제였다. 실패한다면 상상도 못할 끔찍한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 분명했고 성공한다 해도 문제였다. 처음 이 세계에 왔을때 마주쳤던, 그리고 수많은 문헌이 일제히 말하는 그 '철충'이라는 쇳덩이가 바깥을 둘러싸고 있다고 했다. 당연히 안전할 리가 없다. 그리고 이 함선이 제공하는 방대한 보급품도 이용할 수 없게 된다.


"그... 그럼 블랙 리리스님... 님을 데려오겠습니다!"


갑자기 병사가 방을 뛰쳐나갔다. 왜지? 갑자기 왜? 바실리는 그 경호원을 데려오라고 말한 적이 없었다. 바실리는 한숨을 쉬며 안 그래도 머리 아파 죽겠는데 골치아픈 일을 하나 더 얹어준 감시원에게 돌아오라고 말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시 대상을 이렇게 내버려두면 어떤 좋은 취급을 당할지는 너무도 명백했기 때문이다. 수감자가 간수를 생각해준다니. 바실리는 어이없다는듯 웃으며 문을 열었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문을 연 바실리는 멀찍이 흰 제복을 입은 여인이 병사를 붙잡은 모습을 목격했다. 바실리가 천천히 그쪽으로 걸어가려는 순간 여인은 병사의 뺨을 사정없이 때리기 시작했다. 한대, 두대, 세대... 아, 이런 젠장. 진짜 귀찮게 하는군. 바실리는 폭력의 현장을 막기 위해 달려가서 제복을 입은 여인의 손목을 붙잡았다.


"이게 뭐하는 짓일까 사령관?"


지적할 내용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뛰어온 바실리는 숨을 몰아쉬며 여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쪽도 질 생각은 없다는 듯이 바실리를 날카롭게 노려봤다. 옆의 병사는 눈물 흘리며 연신 죄송하다고 말하고 있었고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죄송하다지 않소."


여인은 경멸하는 표정으로 병사를 흘겨보며 당장 복귀하라고 말하고는 바실리의 손을 팽개쳤다.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바실리를 돌아보고 말했다.


"병사가 자기 업무 하나 똑바로 안 보고 돌아다니고 있길래 훈계한것 뿐이야. 지금 정신도 똑바로 못차리는 사령관한테 제지당할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저 자도 나를 사령관이라 부르는군. 바실리는 생각했다. 그녀의 질문에 대답할 생각도 의무도 없던 바실리는 입을 꾹 닫은채로 아직도 벌벌 떨며 우두커니 서 있는 병사를 방으로 데리고 갔다. 바실리의 머리 속에 그 끔찍한 가능성이 서서히 자리잡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여기에 있고 싶지 않았다. 저들은 바실리의 의문에 대답해줄 생각이 없다. 더 이상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 그리고 저 불평등한 상하관계에서 도망치기 위해서 바실리는 이집트를 떠나는 모세처럼 이 배에서 탈출하기로 결심했다.


병사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던 바실리는 우연히 옆을 지나가던 녹색 머리의 메이드를 붙잡아 닥터를 방으로 불러달라고 말하고는 문을 닫았다. 양 뺨이 붉게 올라온 병사는 온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바실리는 그녀를 침대에 앉히고 손에 조각케이크가 얹힌 접시를 들려줬다. 병사는 울음을 터트렸다. 바실리는 의자에 앉았고 그녀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많이 무서웠나보군. 바실리는 손수건으로 병사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레프리콘은 히끅거리는 소리를 내며 죄송하다고 우물거리기 시작했다.


"죄송할 필요는 없소. 한번쯤은 실수 할 수도 있지. 누구 하나 죽일 잘못 한 것도 아니잖소? 케이크나 먹고 기운 차리시오."


그러고 보니 먹을 도구를 주지 않았군. 바실리는 투명하고 가벼운 특이한 재질로 된 포크를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다. 병사는 금방이라도 울 듯한 표정으로 케이크를 조금씩 깨작거리기 시작했다. 순간 불현듯이 뭐라도 떠오른 듯 바실리는 병사의 어깨를 쥐고 물었다.


"그대는 저들과 나 중 누구를 따를 생각이오?"


레프리콘은 우물우물거리며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바실리를 향해 손짓하는 그 순간 닥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바실리는 닥터가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문을 닫고 말했다.


"여기서 나갈 것이오. 계획을 말해 보시오. 어서!"












[참고 TMI]

1532년 카하마르카에서 스페인군 186명이 잉카군 8만을 격파하고 단 한명의 사상자도 내지 않음. 그리고 잉카 황제는 사로잡힘.

최초로 플라스틱을 정제해낸건 1856년의 일이고, 그걸 처음으로 공개한건 1862년의 일임. 바실리는 플라스틱이 뭔지도 모를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