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 한 점 없이 맑은 메리의 목소리에 나는 가볍게 눈을 감았다. 뻔뻔할 정도로 천연덕스러운 제의. 솔직히, 눈을 감지 않아도 이 제의를 받아들인 다음에 벌어질 일이 너무도 뻔하게 보였다. 너무도 익숙하고, 너무도 클리셰적인. 그래서 더 명약관화한. 아마 단순할 수록 좋다는 포르노 영화의 빌드업도 이 정도로 단순하면 오히려 오렌지에이드에게 썩은 토마토 세례를 받게 될 것이다.


눈꺼풀 너머로 내가 어떤 식으로 욕을 볼 지에 대해 14,000,605개의 미래가 떠오르고 지나갔다. 그 모든 미래를 도출해 내고, 다시 눈을 뜨기까지는 0.5초도 걸리지 않았다.


"...메리야."

"네?"


그런 권유를 하면서 눈썹 하나 깜짝하지 않는 거 봐라. 응큼한 아가씨 같으니라고.


"하고 싶으면 그냥 하고 싶다고 솔직하게 말해도 돼."

"에? 그게 무슨..."


놀란 토끼처럼 치켜올라간 메리의 눈망울이 살짝 곤란한 태도의 나를 맞닥뜨리고 대략 10초가 흘렀다. 그리고, 드디어 내 말의 함의를 알아챈 메리의 턱끝에서부터 벌건 기운이 차올라 이마까지 치밀었다.


부들부들 떨며 달싹거리던 메리의 입술이 열렸다.


"이, 이 변태! 호모 에렉투스! 호모 하빌리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점점 퇴화하며 추락해가는 메리의 매도를 정면으로 받아들이며 나는 고개를 기우뚱했다.


"어, 이거 내가 잘못한 거야?"

"다, 당연하죠! 저, 절 대체 뭘로 보고!"

"잠깐, 진짜 순수하게 데생이나 스케치만 할 거라고?"

"그럼 그거 말고 또 뭘 할 거라고 생각하셨는데요, 오라버니는!"


떽떽거리는 메리의 힐난과 함께 꽂혀오는 새초롬한 눈빛이 내 양심을 아프게 찔러왔다. 아무래도 더러운 건 나였나 보다. 하지만, 아무리 메리의 의도가 순수하다고 해도 이 험난한 세상은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는 법이었다. 어지간하면 나도 백지 같은 그녀의 순수함을 더럽히고 싶지 않지만, 이건 내 안위가 달린 일이니 어쩔 수 없었다.


"아니, 메리야... 정말 어떻게 될 지 몰라서 그래? 정말로 회화 수업만 하고 끝날까?"

"다, 당연하죠! 어디까지나 예술적이면서도 탐구적인 목적으로 진행하는 회화 수업이라구요! 보고 그릴 만한 게 조각상처럼 포징이 불가능한 것 밖에 없어서 어쩔 수 없다구요! 그래서 교보재로써 오라버니가 모델을 해 주셨으면 하는 의도로 권한 건데... 오라버니가 그런 파렴치한 목적을 갖고 계셨다면 저도 흥이에요! 그냥 멸망 전 남성 모델 홀로그램 자료 뒤져서 하나 띄워놓고 수업하죠, 뭐!"


단단히 토라져서 되란 듯이 말을 쏟아 내는 메리는 역으로 퇴짜를 놓으려고 했지만...


"하아... 알겠어. 할게."

"...네?"

"뭐, 문제 일으킬 아이들은 없는 거지? ...메리도 포함해서."

"어, 어휴 정말... 그런 걱정이야말로 정말 쓰잘데기 없는 걱정이에요! 오라버니만 단속 잘 하시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구요!"

"호오~ 그렇단 말이지?"


이쯤 되면 나도 자존심이 걸려 있었다. 내가 괜히 혼자 불순한 의도라고 오해한데다가 이대로 퇴짜까지 놓아버리면, 내 체면이 뭐가 되겠는가? 오히려 당당히 참석해서 흔들림 없이 역할을 수행해 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정면돌파가 될 것이다. ...그리고, 내 아이들이 (지금은 실존하지 않지만) 다른 남자 알몸을 보면서 그림을 그리는 게 싫다는 개인적인 이유도 조금은 있었다.


"시간이랑 장소, 말 해."

"네, 이틀 뒤에 오후 세 시인데요."

"오케이."


일정을 미리 비워놔야겠네. 마침 영화제도 막 끝난 터라 그리 바쁘진 않았다. 나는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


...근데, 누드 모델 하려면 뭘 준비해야 하는 거지? 진짜로 거시기까지 까는 건가?



**



"생각보다 인원이 많구만..."


그땐 호기롭게 대답했다지만, 단상 너머로 집합한 인원을 보고 있으니 아무리 나라도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근데, 진짜 많은데? 순수하게 예술적인 목적이 맞는 거지 이거?


그렇게 무대 뒤에서 우물쭈물하고 있는 내게 메리가 단정한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아, 오라버니. 이런 건 처음이라 긴장 되시죠... 다들 그래요. 심호흡 한 번 하고 준비하시죠."


태연해 보이는 건지, 태연함을 가장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메리의 태도는 겉보기로는 표표했다. 근데, 나는 여기서 짚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다들?' 나 말고 다른 남자 모델도 있었어?"

"아, 아하하... 안심시켜 드리려고 여유 있는 척 해 본건데... 저도 여성 모델 분은 여러 번 안내한 적 있는데 남성은 처음이라..."


처음엔 여유를 가장하던 옅은 미소가 내 지적에 멋적게 변했다. "...들켰네요." 하며 에헤헤 웃는 메리가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에휴, 그럼 그렇지... 베테랑인 척 하더니... 괜히 나까지 더 긴장되는 거 같아서 벗기 힘들잖아.


하지만 어쩌겠는가? 하기로 했는데. 나는 타올을 여미며 동그랗게 마련된 조그마한 무대 위에 올랐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밝은 조명이 단상을 비추고 있었다. 그... 뭐냐, 명암인가 뭔가를 위해서 어쩔 수 없는 거겠지? 그런 거지?


그리고, 조명만큼이나 부담스러울 캔버스 너머의 무수한 시선들. 아무리 직업 상 일대 다를 자주 하는 나라지만, 이 정도 인원 앞에서 주목받으며 스트립 쇼를 해본 적은 없었다. 타올을 끌러내리려던 나는 두어 번 정도 주저하다가, 눈을 질끈 감고 일단 까기로 했다.


스르륵.


톡. 하고 타올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고, 그렇게 내 벗은 몸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일부러 시선을 아무하고도 마주치지 않게 허공에 고정하고 있어서 그런 걸까? 내 예상보다 반응은 훨씬 조용하면서도 건조했다. 분위기에서는 오히려 어떤 종류의 엄숙함까지 느껴졌다. 알몸을 드러내고 있는 수치심을 견디고 있을 나에 대한 배려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처음에 이 모임을 무슨 컨셉 플레이에 미친 변태들처럼 취급했던 게 켕기기 시작했다.


그런 내 마음에도 아랑곳않고, 무대에 널브러진 타올을 치워 주며 메리는 작게 말했다.


"오라버니, 다리는 어깨보다 반 발짝씩 넓게 벌리고... 두 손은 배꼽 아래쪽 배 위에 다소곳하게 모아주세요."


그래도 자세는 쉽구만. 모두의 배려에 부응하기 위해 일부러 나는 초점을 흐리멍텅하게 하여 방 안의 누구와도 시선을 맞추거나 몸을 쳐다보지 않으려 애썼다. 그렇게 캔버스 위로 연필이 사각이는 소리와, 메리가 느린걸음으로 돌아다니는 소리만이 방 안을 적막하게 채우고 있었다.


그렇게 있길 몇 분, 슬슬 내 몸도 긴장이 풀리며 적응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니 슬슬 여유를 부려보고 싶었다. 물론 그 상태에서의 내게 허락된 자유라는 건,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눈알만 굴려서 누가 어떻게 잘 그리고 있나 훔쳐보는 정도였다. 일단, 메리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러는 게 아니었는데.


"저, 이쪽 근육은 이렇게 뻗어나오는 게 아니고요... 여길 이렇게..."


내 시선이 멀지 않은 곳에서, 메리는 성실하게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소묘를 가르쳐주고 있었다. 캔버스 너머로 끄덕이는 빨간 머리칼이 보였다. 저건... 레프리콘이군. 스틸라인 생활관에서 보급되는 꽉 끼는 국방색 탱크탑에 상병부터 입는 게 허락된다는(브라우니의 푸념을 받아주며 주워들었다.) 검푸른색 돌핀 팬...


아차.


그녀의 복장을 식별하려는 내 뇌를 떼내듯 나는 눈알을 재빨리 굴려 맹점 너머로 방금 떠오른 광경을 묻었다. 필사적으로 그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생각하며 다른 슬픈 무언가를 결사적으로 떠올리려 애썼다. 


'슬픈 생각, 슬픈 생각, 슬픈 섹...'


하지만, 인간의 뇌는 부정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간과했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않는다.' 라고 뇌에게 명령하면, 어떻게든 코끼리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이치였다. 어느새 내 아랫쪽이 묘하게 묵직해지려고 하고 있었다.


'제발... 제발 슬픈 생각...'


살짝 스위치가 들어가려는지, 반사적으로 오므린 항문 근육의 여파와 함께 가랑이 사이로 늘어진 물건이 미세하게 진자 운동을 하는 것이 느껴졌다. 느린 공기의 흐름이 끝부분으로 슬몃 다가오자, 나는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마음 같아서는 질끈 감고 싶었지만, 동요한 것을 보이면 안 되었다.


그래, 델타. 얼마 전에 묻어버린 델타의 비참하고 처연한 최후를 떠올리자. 수많은 악행을 저지른 그녀이고 옹호할 여지도 없는 악한이지만, 그녀 스스로도 불행한 여자였지. 델타는 자신의 최후가 이딴 식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면 피를 토하겠지만, 이미 죽은 사람은 내 알 바가 아니었다.


내 노력이 하늘(혹은 좆 끝)에 닿았는지, 진자 운동은 다시 잠잠해졌다. 나는 십년감수한 심정으로 간신히 안도했다. 반쯤 꼴릴 뻔하다가 진정시킨 거라서 민감한 아이들은 내가 위기였다는 것을 눈치 챘을 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내 자존심을 사수한 셈이다.


그렇게 30분쯤 지났을까?


"저... 오라버니, 자세 좀 바꿀게요."


그제야 난 조금 굳어진 근육을 풀 수 있었다. 그런데, 메리가 낑낑대면서 십자가 모양의 큰 형틀을 가져오고 있었다. 어째, 방금 전까지 안 보이더만...


"읏차."


메리는 내가 십자가에 등을 대고 기댈 수 있게 단상 위에 세워 놓았다. 지금 보니, 팔을 받치라고 만들어 둔 받침대도 있어서 기대면 꽤 편할 것 같았다. 근 30분을 지지대도 없이 홀로 서 있으려니 다리가 꽤 굳어서, 나는 등 윗쪽을 기댄 채로 메리의 안내대로 두 발을 모아 뒤꿈치를 십자가에 딱 붙였다.


"아니요, 오라버니. 그렇게 말구요..."


허리는 십자가에 붙이지 않고 편하게 있으려는 꾀를 부리는 게 들통났는지, 메리가 자세를 다시 교정해주러 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자... 여기, 허리를 더 붙이고..."


움찔거리는 내가 답답한지 메리는 과감하게 손을 내밀어 내 몸을 만지면서 자세를 바로잡아 주었다. 배에 와 닿는 새하얗고 섬세한 손길, 허벅지를 누르는 얇은 손가락, 그리고...


"다리는 이렇게..."


메리가 고개를 숙이면서, 머리카락 몇 올이... 내 그곳을 쓰다듬듯 스치고 지나갔다.


아, 망했다.


그 때까지 겸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내 똘똘이가...


"어, 어머...?"

"저, 저거..."

"허억..."

"...읏."


하늘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런 씨발...'


메리는 이미 사고를 쳐 놓고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여기서 사고를 친 건 나지만.


엄숙하고 경건하던 회장의 분위기에 쩍, 하고 금이 갔다. 이미 맨 앞줄은 눈에 띄게 동요하며 술렁이고 있었다.


한 번 금이 가니, 그 다음부터는 걷잡을 수도 없었다. 내 아랫쪽도, 이 회장의 분위기도. 지금까지 이 동호회를 꽉 쥐어잡고 있던 엄숙주의는 어디로 갔는지, 술렁거림에 약간의 키득거림과 음탕한 호기심이 담긴 눈빛이 섞이기 시작했다.


"폐하~ 힘들면 쉬고 오셔도 돼요~ 화장실도 좀 다녀 오시고..."


샬럿, 악의 없이 한 말이겠지만 그렇게 즐거운 듯이 말하면 오히려 역효과야. 그와 함께 파문처럼 이는 시시덕거리는 소리에 내 아랫쪽 뿐만 아니라 얼굴에도 피가 몰리기 시작했다.


완전 울상이 된 메리가 눈물 어린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쉬, 쉬고 오시겠어요...?"


나는 여기서 더 꼴릴까 봐, 일부러 눈은 맞춰주지 않고 답했다.


"...됐어..."


여기서 쉬란다고 진짜로 쉬고 오면 딸치고 온 거 인증하는 거잖아.


이제부턴 내 자제력에 기대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수천 년 전, 나와 똑같은 자세로 이 형틀에 묶였을 성인에게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 성인의 정신성이 내게도 내려와, 제발 내 아랫도리가 경건함과 겸손함을 배우기를 간절히 빌었다.


'전능하신아자젤이시여, 호루스신이시여, 붓다시여, 시바시여, 아후라 마즈다시여, 하느님, 예수님, 부처님, 씨발. 아무나 씨발!'


내 거시기를 수그러뜨릴 수만 있다면 악마에게도 영혼을 팔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내 기도가 조금이나마 하늘에 닿았는지, 다행히도 발기 각도가 조금씩 낮아지기 시작했다.


'오오, 씨발 감사합니다 아자젤님...'


하지만, 이미 깨져버린 회장의 엄숙주의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한껏 분방해진 분위기는 고요하던 회장을 두런거리는 목소리가 돌아다니는 살롱으로 뒤바꿔 버렸다. 그리고, 이미 욕정에 사로잡힌 내 뇌가 일으킨 착각일지, 아니면 진짜로 고의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녀석들의 손동작이나 눈길에 뭔가 색기가 어리면서 분명하게 아까는 안 했던 행동들을 하는 것 같은...


앞에서 두 번째 줄에 있던 카엔이 연필을 세워 무언가의 길이를 골똘히 재고 있었다.


오른쪽 끝에 있는 엠프리스의 호흡이 가빠지며 얼굴에는 홍조가 떠올랐다.


맨 뒷줄의 하베트롯이 흘금거리면서도 새빨개진 얼굴로 그림에 열중하고 있었다.


맨 앞자리에서 직관하던 티아멧은 이미 연필을 내려놓고 무례할 정도로 넋을 놓고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방금 겨우 자제시킨 내 물건에 다시금 피가 몰리기 시작했다.


'이런 씨발. 안 돼...'


제발, 신이시여. 제게 구원을.


점점 고개를 치켜드는 번뇌에 나는 불경이라도 읊고 싶었지만, 알고 있는 경이 없었다. 그런 내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하늘은 무심하게도 쐐기를 박고야 말았다.


스으윽-


그림은 뒷전이고 내 물건에만 정신이 팔려 있던 티아멧이, 앉아 있던 자세가 불편했는지 한 쪽 다리를 들어 올려 책상다리를 했고...


'허어억.'


새하얀 허벅지로 젖혀 올라간 스커트 너머로 일상감이 넘치는 청량한 하늘색 줄무늬가 보였다.


나는 속으로, 수천년 전 이 형틀에 똑같이 묶여서 고난을 받았을 성인과 똑같이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

"어머, 저거 어떡해..."

"어머, 어머..."

"와아..."


모두의 감탄사가 향하는 곳이 어딜지는, 짐작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진짜로 대형사고가 터지자, 메리는 종종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쐐기를 박듯, 귓가에 속삭였다.


"히, 힘드시면... 좀 쉬실래요?"


향긋한 내음과 함께 귀를 간지럽히는 도착적인 간지러움...


'아니 시발-'


속으로 단말마처럼 내뱉은 욕지거리와 함께, 나는 분기탱천하게 발기했다.


이젠 숫제 배꼽을 톡톡 두드리며 꼿꼿하게 선 내 자지는, 그렇게 가감 없이 모두 앞에서 100% 풀발하고야 말았다.


쇠 판도 뚫는 가을 좆이라고 했던가? 그 풀려난 가을 좆이 제철 전어처럼 팔딱거리며 모두에게 발정났다고 광고하듯 날뛰고 있었다.


부끄럼 한 점 없이 당당한 내 아랫도리와 대비되게, 내 정신은 산산조각나서 이미 침잠하고 있었다.


'메리야, 네가 생각이 있었다면... 나한테 쉬자고 권유하는 게 아니라 그냥 모두를 향해서 잠깐 휴식 좀 갖자고 했겠지?'


그러나 소리 없는 아우성, 대답 없는 메아리에 불과했다.


나는 그렇게 형틀에 묶여 수치심의 가시관을 쓰고 30분을 더 십자가에 매달려 있어야만 했다.


몸 이곳저곳(특히 말할 수 없는 어느 부위)에 꽂히는 시선이 마치 두 손바닥을 꿰뚫은 못과 같았고, 여기저기서 들리는 탄성과 신음은 마치 옆구리에 꽂혀오는 창과 같았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강탈당하며 추하고 천천히 생명을 갉아먹히는 것이 십자가형의 진정한 무서움이다.


그렇게 난 심장박동과 함께 배꼽을 두드려 오는 묵직하고 흉측한 죄의 무게를 감내했다.


이미 내 존엄과 혼은 산산히 바숴져 있었다.


그렇게 자포자기하고 있으려니, 이젠 몇 번째일지도 모르는 이완기가 찾아왔다.


드디어 이 고통이 끝나려는 걸까? 지금까지 아플 정도로 땡땡하게 서 있어서, 은근한 뻐근함이 구원처럼 느껴졌다. 나는 속으로 실소했다. 하늘에 대한 원망인지, 나 자신에 대한 실망인지 모를 웃음이었다.


그리고...


"어머, 저거 어떡하면 좋아..."

"아이고, 어머나..."

"어우..."


아니 시발 이번엔 또 뭔데? 나는 고개를 내려 아래쪽을 쳐다보았다.


내 발 밑이, 요도구에서 흐른 진득하고 투명한 쿠퍼액으로 웅덩이가 져 있었다.


"..."


그리고, 나는 의식을 유지한 상태로 내 마음을 죽였다.


처음에는 그 참사를 보고도 나몰라라 하던 메리도 보다못해 휴지로 조금씩 처리해 주기 시작했지만, 혼이 빠져나가 텅 빈 내 몸은 어떤 자극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부끄러움이 한계까지 도달하니, 마치 무아의 경지처럼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기 시작한 탓이다.


그렇게, 100년 같던 1시간도 마침내 끝이 났다.


드디어 내 몸에 타올을 다시 두르는 것을 허락받았으나, 그토록 원하던 해방이 다가왔음에도 조용히 몸을 다시 감싸는 내 동작은 굼뜨기만 했다.


말도 없이 황폐한 모습으로 옷을 추스르고 있는 내게, 메리가 다가왔다.


"워, 원래 처음엔 다 그렇다고 들었, 어요..."


위로하듯 꺼낸 말이었지만, 내 고막에 툭툭 와닿기만 할 뿐이고 뇌를 통해 인식되지는 않았다.


"그, 그래서... 남자 모델들은 그런 거 진정하는 약 먹고 한다고..."

"그런 약이 있어?"


갑자기 뇌에 확 들어오는 문구가 들려, 나는 득달같이 메리를 쳐다보았다.


메리는 절박함과 분노와 여타 복잡한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내 눈길을 견디지 못하고 딸꾹질하듯 답했다.


"...네..."

"그럼 왜..."

"그... 알파 님이, 절대 그런 거 드시게 하지 말라고 하셔서..."

"..."

"그리고 저, 오라버니..."


또 뭔데.


"...저기... 다른 분들이 애프터 신청을..."


쭈뼛거리는 메리의 뒤로, 문 너머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는 간악한 무리들이 보였다. 설마 이런 수모를 겪고 내가 세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비릿하게 웃는 내 면전에서, 메리는 아랫쪽을 보고 살짝 탄성을 내뱉었다.


"...아."


부끄러움 없게도, 그런 창피를 당하고도 내 물건은 여전히 설 수 있는 모양이었다.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지만, 내 마음은 이미 애저녁에 꺾여 있었다.


하지만, 마음은 꺾여도, 자지는 서 있었다.


...그렇다면 서 있는 걸로 뭐라도 할 수밖에.


화실에 달콤한 내음이 감돌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