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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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제게 직접 덤비다니, 차라리 잘됐어요. 이참에 당신같은 스토커는 뿌리를 뽑아드리죠!”


“히히히, 해츙.. 네가 사라지면 주인님의 곁은 영원히 내 자리야..”


“..이젠 하다하다 우리 컴패니언의 자리까지 넘보려는 걸까? 좋아요, 우리 고양이의 몫까지 합해 당신에게 돌려드리죠.”


분명 가상세계에서 이루어질 전투이지만 어째선지 자신의 무장을 서로에게 들이대는 둘. 그런 그녀들에게 손사래를 치며 달려온 닥터가 간신히 둘을 떼어낸다.


“언니들~ 의욕은 그 정도면 충분하니까 빨리 자리로 돌아가줄래? 나머진 가상세계에서 즐기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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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여느 때와 같이! 셋~ 둘~ 하나~ 출발~!】


닥터의 외침과 함께 시야가 갈라지더니 익숙한 풍경이 리리스를 맞이한다. 익숙해도 너무 익숙하다.


“여긴.. 오르카 호잖아?”


오르카 호 내의 복도 중 한 곳. 평소 다수의 바이오로이드들이 지나쳐 언제나 왁자지껄한 이곳은 어울리지 않는 정적에 휩싸여 이따금 씩 바다생물들의 울음소리마저 들려오고 있다.


“여기라면 길을 잃고 헤매일 일도 없을뿐더러~ 미리 지형지물을 파악하기 위해 뛰어다닐 필요도 없어 보이군요.”


여유롭게 함 내를 둘러보던 리리스는 그제야 이곳이 가상현실의 공간임을 깨닫곤 고개를 끄덕인다. 그나저나 같이 온 스토커는 어디 있으려나~? 짐작이 안 가는 건 아닌데..


발걸음을 돌려 빠른 걸음을 재촉한다. 이내 당도한 곳은 주인님의 침소 앞. 아니나 다를까 안쪽에선 여성의 미약한 신음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이봐! 스토커! 본인만의 취미는 때와 장소를 가리라고~!!”


문을 박차며 들어가니 예상대로 반쯤 맛이 간 듯한 얼굴의 리제가 상기된 표정을 숨길 생각도 없이 자신의 뺨을 침소의 이곳저곳에 문지르고 있다.


“내가 진짜 못살아... 이럴거면 현실이든 가상이든 다를 게 전혀 없잖아!”


이마를 짚으며 미간을 찌푸린 리리스는 허리춤의 권총을 빼 들어 이젠 네 발로 기어다니기 시작한 리제의 곁으로 위협사격을 가한다.


“거기까지야, 이 스토커. 스토커 질도 거기까지 가면 이젠 아웃이라구. 슬슬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게 어때?”


“아.. 아아.. 아, 안돼. 주인님과 나만의 보금자리에 해충의 알이..!!”


“누구보고 알이라는 거야! 당장 일어서. 아니면 왜? 직접 이렇게 마주치니 무서운가 봐~?”


우스꽝스런 자세의 리제를 도발하는 리리스. 그런 그녀를 아니꼽게 처다보는 리제 역시도 무언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은 채 자리에서 일어난다.


“햇충.. 주인님을 향한 내 사랑을 방해하지 마.”


“그건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라 하는 거야. 하긴~ 넌 주인님의 사랑을 아직 받은 적이 없겠지? 동정하게 돼~”


“...”


한동안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리제는 이내 결심한 듯 사령관의 침대 아래로 손을 집어넣는다. 이번엔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저러나, 라며 지켜보던 리리스는 그녀의 손에 들려 나오는 거대한 가위 날을 보곤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미친.. 스토커 짓으로도 모자라 기어이 저주까지 퍼부으려는 건가요, 당신은?!”


“해충.. 넌 항상 주인님과 나 사이를 갈라놓으려 하지. 이젠 알겠어. 거만떠는 흰개미와 주인님을 납치해 남몰래 알을 깔 심산인거야. 용서못해. 용서못해.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


“망상도 그 정도면 병이에요. 부탁이니 동생의 반이라도 좀 닮아봐요.”


거대한 블레이드의 손잡이를 양손으로 쥔 리제가 우측 발을 뒤쪽으로 비스듬히 젖히곤 금방이라도 달려나갈 자세를 취한다. 어느새 감춰진 그녀의 날개도 네 갈래로 갈라져 피어난다.


“해충..! 해충은.. 박멸..!!”


“네, 네~ 개소리도 그 정도면 수준급이네. 계속 그렇게 떠들기만 할 거야~?”


강한 진동을 일으킨 리제의 날개가 그녀의 동체를 공중에 띄우곤 튕기듯 리리스를 향해 돌진한다. 정확히 그녀의 목을 노리고 벌려진 칼날은 마치 먹이를 노리는 독사와도 같은 소릴 울리며 번개처럼 맞물린다.


허나 그 정돈 이미 예상했다는 듯 리리스는 위태로운 칼날 위로 폴짝 뛰어올라 흥분한 리제를 내려다본다. 눈이 마주친 순간, 기다렸다는 듯 한쪽 입꼬릴 올리곤 백덤블링으로 멀어짐과 동시에 리제의 턱을 걷어 차올리는 것도 잊지 않는다.


“쿠엑?!”


갑작스런 충격에 비틀대며 입을 틀어막는 리제. 혀를 씹었는지 가려진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선 붉은색 피가 흘러내리고 만다.


“애초에 전제부터가 잘못됐어요! 당신은 처음부터 화실의 관리를 위해 설계된 정원사! 그리고 전! 친애하는 주인님을 그 어떠한 위험으로부터라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보디가드!!”


잽싸게 달려든 리리스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이쪽을 노려보는 리제의 관자놀이를 향해 오른발을 휘두른다. 군더더기 없는 완벽한 동작에 리제 역시 왼손을 들어 방어하지만 그녀의 팔과 맞닿아진 발끝을 축으로 회전한 리리스가 눈 깜짝할 새 리제의 뒤쪽으로 자리 잡는다.


혼비백산한 그녀의 목에 팔을 휘감아 반대쪽 손으로 단단히 고정하는 리리스. 피가 섞인 침을 튀겨가며 버둥거리는 리제는 손톱을 세워 휘적이지만 끝내 바람빠진 풍선마냥 바닥으로 축 늘어지고 만다.


“다음부턴 이렇게 처음부터 실력행사를 해야겠네요. 아직 의식은 있겠죠?”


바닥에 얼굴이 처박힌 리제는 몽롱해져 가는 의식 속에서 간간이 들려오는 리리스의 음성에 귀를 기울인다. 뭐라는 거야, 저 해충은. 좀 더 크게 말하라고.


“이제 알겠죠? 당신과 나 사이엔 채울 수 없는 갭이 있다는 걸?! 그러니 스토커 짓도 그만 포기하고 얌전히 화실이나 지키세요! 혹시 알아요? 운이 좋다면 주인님께서 방문하실지.”


조금 심했나, 라고 생각한 리리스 였지만 매번 그 정도가 심해져 가는 리제의 행동을 통제할 수 있는 건 자신뿐이라 여겨 마음을 강하게 다잡기로 한다.


“그럼.. 시간도 남았겠다. 평소 가보지 못한 곳이라도 구경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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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멀어져 가는 해충의 뒷모습이 보이는데 손조차도 뻗을 수 없다니. 채울 수 없는 갭이라고? 화실이나 지켜? 주인님이 방문? ...가보지 못한 곳?!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설마하니 해충 녀석 벌써 주인님과의 관계에 진전이 있었나?! 그래서 난 더 이상 필요가 없다는 거야? 내가 아직 가보지 못한 은밀한 곳에서.. 주인님과의 정사를 즐기려고..?!?!


눈을 까뒤집으며 몸을 떠는 리제. 그런 그녀의 등 뒤로 펼쳐진 날개가 붉게 변해가며 어느새 제 자리로 돌아온 와인색의 눈동자는 작게 수축해 불길한 빛을 내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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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엔 몰랐는데.. 이렇게 보니 우리 오르카 호도 나름 운치가 있네요.”


복도의 창문은 여전히 어두운 바다 속만을 내비치지만, 이따금 씩 들려오는 생물의 울음소리가 이곳이 정말 현실인지 가상인지 구분짓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쿵!


작은 충격음이 들려오며 눈길을 끈다. 있다, 가끔씩. 이 거대한 오르카 호를 고래나 다른 생명체로 착각해 부딪혀오는 녀석들이. 생각외로 정말 구현이 잘 되어있다.


쿵! 카가각..!!


“응?”


처음 듣는 소리. 창문에 다가가 바깥을 본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건 무리지어 헤엄치는 귀상어 무리가 해안가를 향해 헤엄을 치고 있다.


“상어들이 내는 소리일까요? 이런 건 생전 처음 듣는데..”


쿵! 쿵! 쿵! 캬가가가가각..!!!!


재빨리 뒤돌아 팔을 교차하며 전방으로 권총을 들이민다. 철과 철이 서로를 깎아내며 탄생한 비명과도 같은 소음이 복도를 가득 채워간다.


“하! 그럼 그렇지. 이렇게 쉽게 끝난다면 정말 실망했을거에요! 모습을 드러내, 이 스토커!”


점점 커져가는 소리. 명백히 이쪽을 향하는 악의에 대응코자 턱을 당기곤 상체를 구부린다.


?!?!, 오르카 호의 복도. 정확히는 복도의 바닥에서 삐져나와 한 줄기 성흔을 새겨가며 돌진하는 거대한 블레이드 한 자루.


마치 해안가에 삐죽 존재감을 드러내 모든 이들을 공포에 빠뜨리는 상어의 지느러미처럼, 미칠듯한 스피드로 눈앞의 모든 것들을 둘로 나뉘어 버리곤 제물로 삼아간다.


“같잖은 짓을..?!”


사출되는 리리스의 권총 탄환. 정확하게 블레이드의 날과 충돌하지만 대부분 튕기거나 둘로 갈라져 버리는 기행을 선보인다.


코앞까지 다가온 칼날이 매섭게 덮쳐오지만, 눈조차 깜빡이지 않은 리리스는 침착하게 우측의 벽을 타고 올라 회피. 목표물을 놓친 블레이드는 다시금 방향을 꺾어 속도를 높여온다.


다가오는 칼날에 집중하며 갈라지는 바닥의 틈을 조준한다. 벽에 매달린 자신을 공격하기 위해선 어쩔 도리없이 그 모습을 드러낼 수 밖에 없으리.


“해추우웅~!!”


예상대로 튀어나온 리제는 반대쪽 손에 쥔 블레이드의 날을 서슴없이 리리스에게 휘두른다.


“참신하긴 했지만 그뿐이에요. 조금 더 앞을 생각하라고, 이 스토커 변태!”


튕기듯 뛰어오른 리제의 오른쪽 어깻죽지와 허벅지, 그리고 옆구리를 리리스의 총알이 관통한다. 하지만 충혈된 눈동자로 리리스를 응시하는 그녀에겐 고통 따윈 의미가 없는 듯하다.


내려치는 칼날에 눈을 크게 뜬 리리스는 총열의 안쪽을 교차해 간신히 그 기세를 막아낸다.


“용서못해.. 감히 내게서 주인님을 앗아가다니! 말해! 나 몰래 무슨 짓을 한 거야?!”


“당신.. 정상이 아니에요. 그 꼴로 대체 어떻게 움직이는 거죠?”


서슬퍼런 동공을 내비치며 리리스와 대립하는 리제는 관절 부위 부위가 관통당하는 치명상을 입었지만 상관없다는 듯 그 힘이 계속해서 거세어진다.


“나 뿐이야.. 나 만이..! 주인님의 곁을 지키며 기생하는 해충을 잘라내야 해!!”


대치하는 칼날의 등에 또 다른 칼날을 X자 형태로 덧대어 리리스를 강하게 압박해간다.


“아까부터 무슨 영문모를 소릴..!”


분석은 끝났다. 안타깝지만 눈앞의 이 여자에겐 영원한 침묵을 선사해주자. 결심한 리리스가 리제의 정강이를 걷어차곤 중심을 잃은 그녀에게 다시금 발길질을 날린다.


“계속 자빠져있으면 편했을 것을..! 모두 당신이 자초한 결과에요!!”


리리스의 동공이 밝게 빛나며 공명해간다. 이내 그녀의 등 뒤로 피어나는 두 송이의 푸르스름한 장미. 두 자루의 총을 바닥으로 내리 눕힌 리리스는 눈앞의 인물을 적으로 판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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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원에게 있어 눈썰미는 상당히 중요한 측면에 속한다. 함정이나 기습, 저격 등을 경계해야 할 보디가드에겐 더더욱 당연한 일. 그렇다면 정원사에겐?


“이, 이 해충..!! 한 눈판 사이 성체가 되버렸어..! 박멸해야해. 1초라도 빨리 박멸해야해!”


날개짓에만 의지해 바닥에서 일어난 리제가 앞뒤 재지 않고 달려든다. 합쳐진 블레이드의 날을 이번에야말로 리리스에게 향하지만 푸른 장막에 가로막혀 기분나쁜 소음만을 울리고 만다.


“처음에 말했었죠? 당신과 나 사이엔 채울 수 없는 갭이 있다고?! 모르겠다면 제가 뼈저리게 느끼게 해드리죠.”


동시에 불을 뿜는 두 자루의 권총. 긴 블레이드의 날은 공격에는 유용하나 방어에는 취약한 모양. 블레이드를 분리해 양손에 꼬나쥔 리제는 천장으로 날아올라 사선에서 벗어난 뒤, 아래쪽의 리리스에게 기습을 시도한다.


하지만 푸른 역장이 그녀의 공격을 수포로 돌림과 동시에, 오히려 발사된 탄환에 왼쪽 어깨마저 뚫리고만 리제. 새하얗던 그녀의 앞치마는 이미 빨갛다 못해 검게 물들기 시작한다.


“이익..!! 쓸데없이 껍질만 딱딱해가지고..!! 이러면 박멸할 수가 없잖아!!!”


“박멸되는 건 당신이에요. 그만 제 눈앞에서 꺼져요!”


땅을 차고 달려나가 리제의 복부를 팔꿈치로 가격하곤 번개처럼 회전해 권총을 아래쪽으로 비스듬히 발사. 양쪽 발등에 구멍이 뚫린 리제가 중심을 잃고 앞으로 무너지려 하자 그녀의 미간을 향해 무릎을 들어 차올린다.


지탱하는 다리로 다시 한번 반 시계 방향으로 회전해 한쪽 무릎을 땅에 댄 리리스는 날아가는 그녀에게 망설임 없는 마지막 총알을 선물한다.


명중. 리제의 왼쪽 가슴께와 목울대에서 분수처럼 피가 솟구친다.


“여기까지에요. 당신의 공격이 제게 닿는 일은 추호도 없어.”


양팔과 다리를 벌리곤 쓰러진 리제. 그녀의 주위로 붉은 피가 뿜어져 나와 바닥을 적셔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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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너무 나쁘게 생각지 말아요. 제가 배리어를 전개했다는 건 그만큼 당신을 인정했단 소리기도 하니까.”


“...”


드러누운 리제는 미동이 없다. 괜시리 기분이 찜찜해진 리리스였지만 이내 이곳이 가상세계인 것을 인지하곤 머리를 가로젓는다.


“...뭐, 진짜가 아니니까. 닥터?! 들리나요? 이제 그만 여기서 꺼내주세요~!”


변화가 없다. 뭔가 잘못됐나? 설마 아직 숨이 붙어 있다던가?


“..그럴 리가 없지~”


조금 기다리기로 한 리리스는 이번에야말로 함 내를 둘러보기 위해 발걸음을 옮긴다.


“.....려..”


“응?”


처음엔 잘못들은 줄 알았다. 하지만..


“....기다, 려. 해충...”


돌아본 곳엔 뿌옇게 물든 붉은색의 안개를 주위에 흩뿌리며 헝클어진 머리의 사이로 드러난 진홍색의 눈동자가 이쪽을 째려보고 있다.


“말도 안돼...”


두 팔을 아래로 늘어뜨린 리제는 이미 완전히 검게 변한 날개에만 의지한 채 동체를 들어 올린다. 피로 범벅이 된 그녀의 옷과 블레이드의 날은 공포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저질스런 상황을 연출해 역겨운 기운마저 풍겨오고 있다.


“하! 이젠 하다못해 귀신이 된 건가요? 적당히 하시죠, 적당히!”


아직 열기가 식지 않은 권총을 다시 장비하는 리리스. 이번엔 정확하게 머리를.


“각오하세요. 이번에야말로 머리를 날려.. 뭣?!”


없다. 정면으로 당당히 다가온다 생각한 순간, 갑작스레 시야에서 사라진 리제.


카가가각!!


칠판이 긁히는 희한한 소리가 울렸다 싶었을 땐 눈앞의 리제는 이미 자취를 감춘 뒤. 눈을 크게 떠 상황을 파악한 리리스는 황급히 뒤를 돌아 방아쇠를 당긴다.


흥, 빨라 봤자 총알을 앞지를 순 없을걸! 그녀의 예상대로 발사된 탄환은 정확히 리제의 미간으로 날아가지만, 피가 뿜어져 나오는 목을 비틀어 치명상을 피해내는 신기를 목격한다.


“당신.. 정체가 뭐죠? 제가 아는 그 스토커가 맞는지 의심되네요..?”


뼈가 맞물리는 기이한 소릴 내며 원위치로 돌아온 그녀의 머리. 하지만 리리스에 의해 터져나간 리제의 뺨은 피에 젖은 잇몸을 그대로 들어내 그로테스크한 광경까지 연출하고 있다.


“대답할 상황이 아닌가요. 조금은 빨라진 것 같지만.. 당신의 공격이 제게 닿는 일은.. 응?”


올려다본 곳엔 조금은 붉게 변한 자신의 방어 역장이 시야의 구석에 들어온다. 이건.. 피? 여태껏 배리어에 피가 튀는 상황이 없었던 터라, 의아해하는 그녀. 하지만..


“무슨..?!”


블레이드에 베인 배리어가 떨어져 나간다. 아니, 정확하겐 핏방울이 튄 부분을 중심으로 배리어가 녹아내리기 시작한다.


눈을 크게 떠 리제의 모습을 확인한다. 그녀의 곁에 흩뿌려진 붉은 안개. 내장된 분석 시뮬을 가동시켜 주변의 안개를 관찰한다.


“저건.. 마이크로 페어리? 분명 동생인 다프네가 회복실에서 주로 사용하는..”


평소 부상당한 바이오로이드를 치료하기 위해 쓰이는 다프네의 마이크로 페어리는 한데 뭉쳐 상처 부위를 소독하거나 감염된 피부를 정밀히 떼어내는 데 용이하게 쓰인다. 동생 쪽의 전유물인 줄 알았는데, 설마 저 녀석도?


“불쾌하군요. 그런 능력이 있었다면 진작 회복실의 업무를 도왔으면 될 것을. 쯧..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그것도 아니군요. 다프네의 페어리는 다정한 초록빛이었어. 헌데 왜 당신 것은 그리도 불쾌한 색을 띄는거죠?”


대답은 없다. 대신 피가 치덕치덕 발린 블레이드를 수평으로 들어 올리는 리제.


“그리고 제 배리어를 녹이다니.. 그 라비아타조차도 애먹은 제 방벽을 그딴 식으로..!”


이젠 자존심의 문제다. 자신의 방어 역장은 일반적인 양산형 물건과는 차원이 다른 고급품. 또한, 그 성능은 전략 핵탄두에 노출되어도 주인을 지킬 만큼의 내구성을 자랑한다.


“이렇게 된 거.. 무조건 한쪽은 끝장을 봐야 하겠군요!”


이미 시들어버린 두 송이의 장미를 동체에서 분리시킨다. 있어봤자 걸리적대기만 하겠지.


리리스의 손목에 감긴 수갑과 목을 감싼 초커에서 푸른빛이 새어 나와 오리진 더스트를 분출한다. 이내 다시 몸속으로 스며드는 그것들은 그녀의 새하얀 머리칼과 공명해 황금빛으로 물들어간다.


“덤벼, 리제. 이젠 더 이상 봐주거나 하지 않아. 만약 나에게서 한순간이라도 눈을 뗀다면..”


리제를 겨눈 총구의 끝이 빛난다. 맞은편의 리제 역시 흥건해진 피로 바닥을 적셔가며 블레이드의 칼날을 교차해 리리스를 겨눈다.


“영원히 구천을 떠돌게 해주지.”


떨어지는 리제의 핏방울을 기점으로 둘은 충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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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보니 길어져 둘로 나눕니다.


아무래도 리리스 설정이 리제보단 많이 앞서잖아요? 그래서인지 리제한테 이것저것 제 나름의 설정을 덧붙였으니 이해 부탁드립니다 ㅠㅠ


단체전 같은 여러명의 캐릭터가 등장하는 것도 써보고는 싶지만 제 필력으로 커버가 될 지 모르겠네요. ㅡㅡ;;


아무쪼록 긴 글 읽어주셔서 항상 항상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