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 하나 없는 백은발. 붉은 빛이 감도는 금색의 눈동자. 세로로 대칭을 이룬 흑백의 독특한 패션.

허릿춤엔 권총이 맞나 싶은 사이즈의 권총이 2정. 등허리에는 보랏빛이 흘러나오고 있는 독특한 장비.

프로필상의 특징으로는 주인에의 충성심이 매우 강함. 집착적인 면모로 인한 우려로 공개 전 전량 리콜.

리콜 후 '조정'을 거쳤으나, 기존 예약자들의 요망에 따라 집착적인 면모는 완전히 제거하지는 않음.

바이오로이드 제조기술이 경쟁자들보다 두 단계는 앞서갔던 삼안산업의 최고급 라인 3인방 중에서도 가장 희귀하고 값비쌌던 최고의 경호원.


" ..노려보는걸로 탁자가 쪼개지나 안쪼개지나는 충분히 기다려준 것 같네.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나를 지켜줄 수 있겠나? "


10분째 탁자만 노려보던 신비로운 금색이 천천히 위로 올라와 사령관의 얼굴을 담아냈다.


" 명령하신다면, 따를 뿐 입니다. "


" 명령..쯧. "


다시 탁자만 바라보는 리리스와 그런 리리스의 살짝 숙인 정수리를 바라보는 사령관.

답답한 공기만 다시 5분이 흐르고, 각오를 굳힌 리리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


" 해. "


" 저희는 바이오로이드이고, 사령관님께서는 현 시점의 유일한 인간님이십니다. 명령하신다면, 따를 것 입니다. ... 굳이 저를 불러 물으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


" 못 믿어서. "


사령관의 대답은 즉각적이였고, 간신히 들어올려졌던 리리스의 머리는 다시 탁자를 향했다.

불신. 그 것이 그녀를 짖눌렀다.

본인이 짐작하던 이유를 직접 귀로 듣는 것이 겁나 미뤄왔던 만남이 후회되기 시작하는 순간.


" 너도. 너만이 아니라 다른 바이오로이드들도. 너희가 말하는 '명령'이란 것도. .. 그리고 나도. "


곧장 이어지는 불신의 대상들에 리리스의 고개가 갸웃? 하고 다시 조금 들려졌다.


후릅..꿀꺽 -


" 어차피 다른 방법이 없는거, 우리 서로 솔직히 말해보는게 어때? "


" 솔직..하게라 하심은..... 네. 믿어주신다면. 솔직히 답변드리겠습니다. "


리리스는 구부정하던 자세를 바로하고, 고개를 똑바로 들었다. 승부수를 던져보기로 마음먹고, 결심을 보이는 작은 변화에 사령관도 마음을 굳히고 먼저 입을 열었다.


" 우선 너를 못믿겠다는 건.. 너는 두번째대에 제조된 두번째 블랙 리리스 개체지? 아직 우리가 서로를 경험해보지 못한 관계로 각 개체마다 나타날 수 있는 차별점은 내가 알 수가 없으니 근거로 삼을 수 있는 정보는 너희의 프로필 뿐인데, 거기서는 너의 특.별.한. 성격과 그에 따르는 비범한 충성심이 굉장히 강조되어있더군. "


" 그건...! "


" 흥분하지말고, 나부터. 차분히 듣고 답하도록. OK? "


무릎 위의 주먹에 꾹- 힘을 한번 준 리리스의 기색이 다시 얌전해졌다.


" '명령'을 못믿겠다는 건... 내가 본 프로필에선 말이지? 어떤 경우에도 인간의 명령에 전력으로 따르는게 바이오로이드라고 되어있는데..

  너희들의 행적을 몇가지 보다보니까 미묘하게...명령 내린 사람의 의도랑 너희가 실제로 행동한 부분이 다른 경우가 있더라고? 너희의 지능은 인간보다 뛰어나면 뛰어났지 그 정도도 못 알아들을 정도가 아니던데 말이야.. 즉, 정말 행동 하나하나까지 세세하게 명령하거나. 정말 단순하고 명확하게 주어지는 명령이 아니면 '실행'에 대해서 너희들의 자의적인 판단이 끼어들 여지가 있어보이더라고. "


한번 숨을 고르는 사령관의 눈엔 작지만 명확한 리리스의 동요가 보였다.

바이오로이드도, 명령도, 주인이란 의미도 아직 잘 모른다던 사령관이 지금

'명령권 우회법'에 대해서 지적하고 있었다.


" 예들들면 내가 너한테 '이 물컵을 들어' 라고만 명령하면. 그 물컵을 오른손으로 들지, 왼손으로 들지, 아니면 발로 들어올릴지, 그 물컵을 얼마정도의 높이까지 들어올릴지는 너희의 자의적인 판단영역이 된다는거지. 

  그리고 그 점을 이용하다보면 명령한 사람이 원했던 결과와 너희가 가져오는 결과가 달라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거기서 '너희들'을 못 믿겠다는 부분으로 이어지지. 두번째 ㅈ간놈이 저격을 맞았을때 말이지? 위험하다고 그놈이 나가는걸 말린게 너밖에 없었던 것 같단 말이야. "


둘을 지켜보는 카메라 너머로 섬칫한 무언가가 스쳐지나 갔다.


" 스토커의 존재까지는 몰랐다쳐도, 주변에 철충이 있는 걸 이미 알고 있었는데.. 보고서에는 '주변에 철충이 있다' 고만 되어있지 그것들의 위치가 충분히 위협이 될만한 거리라는거에 대한 내용이 전혀 없더라고.

  그놈이 나가는걸 말리는 이가 있었나? 특히, 철충이 어디쯤 있는지 알고 있었을 녀석들 중에서... 

  내가 '인간'이니까 너희 바이오로이드들을, '명령'을 덮어놓고 믿을 수가 있겠어? 특히, 아직 그놈에게 충성심을 가지고 있을거라고 생각되는 근거를 가지고 있는 너를 말이야. 

  ... 차 한모금 마셔. 네가 아직 그놈에게 충성심이 남아 작전에 참여하지 않겠다고해도, 불이익은 없을거야.

  그냥 못하겠으면 못하겠다는 말이나 솔직하게 해달라는 거야. 확실하게 뒤지는 꼴 보겠다고 이 함의 다른 사람들까지 죄다 끌고 동반자살하지말고. "


창백하게 질린 리리스는 대답없이 차를 한모금 들이켰다. 

조용히 기다려주는 새로운 사령관을 잠시 잊기라도 한 듯이 - 자신이 제조기로부터 나와 처음 눈을 떳을 때부터의 기억들을 반추하고, 마지막으로 지금. 

이 방으로 향하던 자신을 바라보던 컴패니언 자매들을 떠올리고, 이내 몸가짐을 바로 잡았다.


" 바이오로이드가 이런 발언을 인간님께 드린다는게... 불량품으로 폐기당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긴 합니다만, 정말 제 솔직한 마음을.. 말씀드리겠습니다. "  


스읍~ 후-


"  저희의 카달로그에 나와있는 특정 기능이나 특성적인 몇몇 면모들은 저희의 주인님께만 발현하는 것 입니다.

  단적인 예로, 저 못지않게 '독특한' 성격을 가진 것이 널리 알려진 시저스 리제에 대해서 알고계신다면..

  공원을 가꾼다거나 공공봉사에 동원되던 주인없는 시저스 리제들이 지나가는 아무 행인분에게나 집착하게 되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랬다면 시저스 리제 프로젝트 자체가 이미 폐기되었었을 겁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저희들의 정식등록절차를 진행할 수 있는 기업이나 정부기관들이 모두 사라져버린 지금. 

  사령관님께서 그렇고, 전대 분들도 마찬가지로 정식적인 등록은 불가능했습니다. "


" ? 음.. 그러니까 정식 주인이 아니였으니까, 너의 그 특별한 성격이 발현되지 않았다..고 항변하는 건가? 그런 것 치고는 첫번째 리리스의 행적은 다르던데? "


" 그건.. 예시에 모순되긴 합니다만, 공공용 바이오로이드들로 인해 문제가 아주 발생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시저스 리제만이 아니라 간혹, 공공용 바이오로이드가 특정 인간님에게 '주인님'을 대하는 것 같은 행동양식을 보이는 사례들이 있었습니다. 

  소위 '감정모듈 이상' 으로 진단되던 문제로, 첫번째 사령관님의 보기드문 바이오로이드에 대한 인식이 해당 케이스들의 인간님들과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


" 자발적인.. 충성? 경애? ..어떤 감정들로 시스템을 넘어선 무언가가 발생할 수 있다는거군.. 너는 아니였던거고. 이건... 흠.. "


" 인간님께 이런 말씀을 드리는게 정말... 네. 제가 그런 '특수한 감정'으로 타고난 족쇄를 무시할 수 있을 만한 분은.. 아니셨습니다. 

  그래도 살아계신 동안은 최선을 다해서 모셨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어린 바이오로이드들을 명령대로 처형하는 것도.. 다른 분들을 지옥으로 밀어넣는 일도.. 제 자매들을 제 손으로.....폭행하는 것도.

  ...모두 다 행했습니다. 딱 한번만 빼고 말이죠. "


저 한번은 자신을 쏘라는 명령이였으리라 - 라는 생각과 함께 사령관은 소파로 등을 깊게 묻고 들은 것을 정리했다.


" 즉- 두번째가 너를 제조하긴 했지만. 정식 등록 주인은 아니였던.. 나와 같은 '사령관'일 뿐이라 너의 집착적인 면모까지는 발현하지 않았다. 

  살아있는 동안은 최선을 다했고, 죽어버린 지금 그 복수같은 걸 생각할만한 감정은 남아있지 않다. 맞나? "


" ........네. " 


" 그런데 이야기에 조금 의문점이 생기는군? 니가 제조된지가 ... 앞서서 들었던 예시는 인간들이 멸망 전 이야기를 하는거 같은데? "


" ..아시는분이 거의 없는 이야기입니다만, 저는 '리콜' 이전에 제조되어 거의 멸망 직전까지 살아있었던 어떤 연구소 경비로 배치되었던 블랙 리리스-005 의 기억을 이어받았습니다.

  전투기술의 승계를 원하셨던거지만.. 다른 기억이 훨씬 많네요. "


사령관의 묵묵한 시선이 다시 리리스를 향했고, 이번엔 리리스도 고개를 숙이지 않고 담담히 눈을 마주쳤다.


" 좋아. 믿어보지. ..최소한 너의 자매들까지 죽는걸 바라는 성정은 아닐테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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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일 째. 오르카호 침몰까지 2~3일.

결행을 앞둔 오르카의 최종회의.


" 개요는 매우 단순한 작전이오. 스토커가 모습을 드러내게 유인, 포격으로 타격한 길을 지원조가 넓히고, 타격조는 최단거리로 급파- 스토커를 처치. "


정말 복잡할게 없는 작전이였다. 문제라면, 뭔가 더 자세히 설명할만한 정보자체가 부족하다는 것과 그 실행력뿐.


" 정말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아무리 그래도 ... 그 위력앞에 사령관님이 미끼가되는건..."


" 라비 언니. 그건 정말 방법이 없어. 유인도 유인이지만, 사령관 오빠가 나가지 않은채로 오르카가 부상했다가 저 레일건에 맞으면 우린 그대로 침몰이야. 이 스토커의 공격력이 유별라다니까? 내가 괜히 최소 핵방호 이상급 방어력이 필요하다고 제한했던게 아니야. 나랑 2호기가 어떻게 계산해봐도 똑같다구. 

그러니까 언니가 오리진더스트를 싹 다 날려버린다고 각오하고 최대한 빨리 잡아줘야 하는 거야. "


닥터의 일축에 라비아타가 자신의 비대해진 몸을 내려다 보았다. 간단한 작전이지만, 쉬울 것 같지는 않았다.

특히, 이 유난히 강한 공격을 쏴대는 스토커에 대한 정보가 너무 적었다.


" 쯧. 초탄으로 위치를 특정하고 포격해버리면 쉬울 것을... 모두에게 미안하군. 부관만이라도 멀쩡했다면 ... "


" 캐노니어 상황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괜한 소리 말게. 이번엔 우리 호드가 주역을 맡도록 할테니. 길이나 잘 터주게. "


" 사령관 각하. "


마리의 부름에 사령관뿐만이 아니라 회의에 참석한 모든 대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사령관이 미끼역을 수락한 이후로, 어느새 마리의 호칭에는 '각하'라는. 나름의 경의가 들어갔다.


" 사령관 각하께서 개조한 화이트 셸에 탑승하여 출격 포트로 사출. 초탄을 받아내면, 가용가능한 모든 인원을 투입하여 길을 열고 그 사이 1진으로 라비아타 통령과 앵거 오브 호드의 대원들이 돌격, 2진으로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의 대원들을 투입하여 스토커를 잡아낸다는 작전입니다. 

대공방어가 강한 것으로 보아, 상대 철충들의 주 무장이 지대지 부분에는 약할 것이라는 전망이 희망적인 소식이나, 특수개체로 의심되는 스토커가 다른 개체들과 같이 방어능력이 약할지가 알 수 없는 상황이지만.. 저희를 믿어 주시고, 경ㅎ...블랙 리리스와 차탄까지 견뎌 주시겠습니까? "


" 쓸데없는 소릴 더하면 불쾌할 것 같은데. 이 배를 방패로 삼겠다고 도망오진 않을테니, 작전대로 너희들이 해내야 할 일을 해내라.  .. 명령이다. 이거면 됬나? "


" ...결코. 그런 의미는 아니였습니다. ..스틸라인. 반드시 명령을 수행해내겠습니다. "


작전결행 - 2시간 뒤 일출. 떠오르는 태양이 잠시라도 저격수의 눈을 가려주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