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전관님. 작전관님!”


미호는 복도를 따라 빠른 속도로 걸었다. 숫제 내달리는 것과 같은 속도였다. 하지만 그렇게 내달리고 있음에도 미호의 마음은 급하기만 했다. 그녀는 가능한 한 빠르게 홍련을 만나고 싶을 뿐이었다.


“작전관님!”


미호는 마침내 작전관 홍련의 방문을 박차고 들이닥쳤다. 하지만 그녀는 홍련을 만날 수 없었다. 온갖 서적들로 가득한 홍련의 방에서 미호가 발견한 것은 홍련이 아닌 책 한 권을 편쳐든 채 끙끙대고 있는 드라코였다. 그녀가 읽고 있는 책의 표지에는 ‘cogito ergo sum’ 이라는 문구가 선명하게 적혀있었다.


“우왓! 깜짝이야. 미호? 아닌 밤중에 홍당무도 아니고 대체 무슨 일이야?”


잔뜩 당황한 드라코는 평소와 같이 엉성한 속담으로 미호를 맞이했다. 평소 같았더라면 그녀의 실수를 잔뜩 지적하며 놀려댔겠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었다. 미호는 흉흉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작전관님은? 여기 작전관님 안 계셔?”


“작전관님이라면 방금 전에 나가셨어. 블랙리버의 인간님들에게 보고할 게 있다는 것 같았거든.”


“그럼 언제 들어오시는데!”


“나, 나도 잘 몰라. 그냥 나가신다고만 들었…… 우왁! 지금 뭐 하는 거야!”


홍련의 책상으로 성큼성큼 다가온 미호는 곧장 거친 동작으로 홍련의 책상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한 드라코가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미호는 손을 멈출 생각이 없어보였다. 안절부절 못하던 드라코는 결국 미호의 손을 그러쥐었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 작전관님의 책상이잖아. 이렇게 함부로 뒤지면 안 되는 거잖아!”


“아무것도 모르면 가만히 있어! 어차피 너도 핀토랑 똑같겠지. ‘보이지’ 않으면 그냥 거기 가만히 있으란 말이야!”


미호는 드라코의 손을 강하게 뿌리쳤다. 죄책감 따위는 들지 않았다. 미호는 단지 의문을 해결하고 싶을 뿐이었다. 자신에게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은 이제 명확해졌다. 그렇지 않다면 방금 전 핀토의 반응을 설명할 길이 없을 테니까. 그렇다면 문제의 실마리를 쥐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홍련일 것이다. 미호는 그것을 찾아내고 싶었다.


미호는 책상을 쓸어내다시피 하며 구석구석을 뒤졌다. 하지만 눈에 띄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보이는 것이라곤 온통 작전과 관련된 것으로 여겨지는 서류들뿐이었다. 밀려드는 초조함에 미호는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바로 그 때 미호는 섬뜩함을 느꼈다. 간담이 서늘해지는 느낌이었다. 무언가 크게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막연한 느낌. 미호는 조심스레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서 미호는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드라코를 보았다.


“어째서…… 어째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나, 나는 자, 잘 모르겠어. 미호가 말한대로 난 아무것도 모르니까. 하지만 이건…….”


“드라코 잠깐 들어봐 이건 말이야…….”


미호는 조심스럽게 드라코에게 다가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가 다가가기도 전에 드라코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본격적으로 울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어. 미, 미호도 괜찮은 것처럼 보였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되면 이전이랑 다를 게 없잖아!”


드라코의 절규를 들으며 미호는 머릿속이 멍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전이랑 다를 게 없다고? 이게 대체 무슨 소리지?


미호는 당장에라도 드라코를 다그쳐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내고 싶었다. 하지만 목 놓아 울기 시작한 드라코는 정상적인 이야기를 나눌 만한 상태가 아닌 것 같았다.


엉망이 된 책상과 드라코를 번갈아보던 미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미호는 결국 들고 있던 서류와 책들을 내버려둔 채 두 팔을 벌려 울고 있는 드라코의 몸을 감싸 안았다.


“드라코. 정말 미안해. 많이 놀랐지? 나 여기 있어. 그러니까 이제 괜찮아. 앞으로 다 잘 될 거야.”


“미호……? 정말 미호 맞아?”


미호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 역시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드라코의 말에 특별한 의미가 담겨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미호는 선뜻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내가 정말로 미호가 맞는 건가?’ 지금의 미호는 도저히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내색할 수는 없었다. 억지로 미소 지은 미호는 훌쩍이는 드라코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그래 맞아. 나는 미호야. 네가 알고 있는 미호고, 몽구스 팀 소속의 저격수이지. 그리고 앞으로도 쭉 미호일 거야. 네가 그렇게 믿어주는 한 나는 그렇게 될 거야.”


“정말…… 정말로 그렇게 할 거야?”


드라코는 눈물이 가득한 얼굴로 미호를 올려다보았다. 미호는 손가락을 들어 그녀의 빨개진 코를 가볍게 꼬집어주었다.


“물론이지. 내가 언제 거짓말 하는 거 봤어?”


“…… 미호는 맨날 거짓말만 하잖아. 맨날 날 놀리기나 하고.”


“바보. 이거랑 그거랑은 다른 얘기지. 어쨌든 걱정하지 마. 미호는, 나는 ‘이런 쪽’으로는 절대로 거짓말 안 해.”


미호는 자신이 정확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단지 드라코의 표정이 평소처럼 돌아오는 것을 보며 다행이라는 생각을 할 뿐이었다. 드라코의 등을 토닥여주며 미호는 자신의 행동을 반성했다.


드라코를 달래준 뒤 미호는 어느덧 평상시의 쾌활한 모습으로 돌아온 드라코와 함께 방을 치우기 시작했다. 방금 전 그녀가 성대하게 벌인 난동의 영향으로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던 방 안은 아수라장이 되어있었다. 만약 홍련이 돌아와 이 광경을 본다면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말 것이다.


“미호 요령도 좋아. 그 짧은 시간동안 어떻게 이렇게 잔뜩 어지를 수 있는 거야?”


“자꾸 그런 말 하지 마. 안 그래도 후회하고 있으니까.”


그렇게 시덥잖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방을 청소하던 도중이었다. 문득 미호의 시야에 바닥에 놓인 사진 한 장이 들어왔다. 분명히 방금 전 책상 속을 뒤질 때에는 발견하지 못했던 사진이기에 미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미호는 사진을 들어 드라코에게 보여주었다.


“혹시 여기서 이런 사진 본 적 있어? 책상에서 떨어진 건 아닌 것 같은데.”


“아! 그 사진은 여기 책 사이에 끼워져 있던 거야. 아마도 작전관님이 책갈피 비슷한 걸로 쓰고 계셨던 것 같아.”


“책갈피라 이거지…….”


미호는 아무 말 없이 한참동안 사진을 바라보았다. 사진을 바라보는 미호의 표정은 모호했다. 겉보기만으로는 지금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동안 사진을 바라보던 미호는 원래부터 자신의 것이었다는 양 자연스럽게 사진을 품속에 넣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드라코는 당황한 듯 미호에게 말했다.


“어, 그거 작전관님 거 아니야? 그렇게 막 가져가도 될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건 원래 내거야. 내걸 내가 가져간다고 뭐라 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


“원래 미호 거였다고?”


드라코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미호는 설명하는 대신 그저 희미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런데 말이야. 드라코 너는 그 책을 왜 읽고 있는 거야? 무슨 내용인지는 알겠어?”


“실례네. 나도 이 정도는 알고 있거든. 이 책은 옛날에 살았던 인간 철학자? 라는 사람에 대한 책이야. 그리고 책의 내용은…… 내용은…… 솔직히 무슨 내용인지 잘 모르겠어.”


자신만만한 얼굴로 한껏 허세를 부리려던 드라코는 이내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했다. 미호는 그런 그녀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어휴 이 바보야. 무슨 내용인지 잘 모르겠으면 다른 책을 읽으면 되잖아.”


“자꾸 바보라고 하지 마! 미호가 자꾸 그렇게 놀리니까 내가 이걸 읽으려고 하는 거잖아. 내가 이걸 다 읽기만 하면 더 이상 미호도 나한테 바보라고 못 할걸?”


“아닌데. 난 네가 그 책을 다 읽어도 계속 바보라고 놀릴건데.”


“뭐어? 어째서?”


“그야 네가 그런 이상한 책을 읽고 있으니까 놀릴 수밖에 없지. 거기 써있는 것들은 다 이상한 말 뿐이라고.”


“미호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읽어보지도 않았으면서.”


“나야 당연히 알고 있지. 내가 직접 경험해봤는걸.”


“경험해봤다고?”


드라코는 미호의 말에 반문했지만, 그녀는 드라코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으며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을 피할 뿐이었다. 미호의 미적지근한 반응에 금세 흥미를 잃어버린 드라코는 어깨를 으쓱인 뒤 책에 대한 관심을 깔끔히 지워버렸다.


“뭐, 미호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겠지. 미호가 아무리 나를 놀리는 걸 좋아해도 나한테 나쁜 말은 안 하니까.”


“바로 그거야 드라코. 언제나 그 생각을 잊지 말고 살아가렴.”


미호와 드라코는 시답잖은 농담을 하며 청소를 마무리 지었다. 홍련의 방은 금세 원래부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끔히 정리되었다.

   


   

   

“타겟 제압확인. 머리 숙이고, 숨어 다니기. 다들 알고 있지?”


“좋아! 가보자!”


모퉁이 뒤에서 돌격조를 습격하려던 테러리스트를 제압한 미호는 경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말이 신호라도 된 듯 스틸 드라코와 핀토가 양쪽에서 동시에 적들을 향해 뛰어들었다. 두 바이오로이드의 압도적인 화력 앞에 테러리스트들이 쓰러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홍련의 방에서 소동을 벌인 뒤로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났다. 미호는 자신이 안정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더 이상 두통도, 알 수 없는 위화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홀로 잠 못 이루고 손가락을 보는 일 역시 그만둔 지 오래였다. 이제 미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오케이 이쪽도 제압 완료! 인질들도 모두 상처 하나 없이 무사하다 오버. 이거 너무 쉬운 거 아니야?”


“그야 당연하지. 고작 이 정도 적들로는 우리 팀을 상대할 수 없다고.” 


순식간에 테러리스트들을 제압해낸 핀토와 드라코는 기세등등하게 외쳤다. 그녀의 말대로 이제 어지간한 테러리스트들은 몽구스 팀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수없이 많은 실전경험을 통해 몽구스 팀의 팀워크는 최고의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너무 자만하지는 마. 제일 위험한 순간은 승리한 다음의 순간이니까.”


즐거워하는 이들 사이로 불가사리의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핀토는 그녀의 지적이 합당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불가사리의 말이 맞아. 아직 우리가 모르는 위험이 남아있을지도 모르니 주의를…… 어라? 불가사리 너, 숙소로 돌아간 거 아니었어?”


“나라고 맨날 숙소로 먼저 돌아가는 줄 알아? 좀 신경 쓰이는 게 있어서 개인적으로 조사하고 있던 참이었어. 이것만 끝나면 말 안 해도 알아서 돌아갈 거야.”


“하하하 미안 미안. 그런 의도로 말한 건 아니었어.”


불가사리와 핀토의 대화를 들으며 미호는 미소를 지었다. 개인적으로 조사할 것이 있다는 불가사리의 변명은 알기 쉬운 거짓말이었다. 그녀는 단지 몽구스 팀원과 함께 돌아가고 싶을 뿐인 것이다.


불가사리는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다. 작전이라면 학을 떼고 싫어하던 그녀가 최근에는 제법 적극적으로 나서는 일도 늘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 명, 변해가고 있는 바이오로이드가 있었다.


“작전 중에 통신으로 잡담을 하면 안 된 다고 그렇게 말했건만…….”


“헉 자, 작전관님.”


홍련은 겁먹은 드라코를 향해 다가갔다. 하지만 그녀는 언제나 진지한 표정만을 지었던 이전과는 다르게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드라코의 앞에 선 홍련은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곤 잔뜩 움츠린 드라코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주었다.


“부상자도 없이 신속하게 작전을 끝냈으니 이번 한 번만큼은 넘어가도록 하겠어요. 그래도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없도록 주의하세요. 알겠나요?”


“아, 알겠습니다…….”


홍련의 가벼운 경고를 받은 드라코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예전 같았다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작전 중에, 그것도 홍련이 근처에 있는 상황에 잡담을 하고도 크게 혼나지 않는 드라코의 모습이라니. 감히 꿈에서조차 상상하기 힘든 광경이었다.


그러나 그 모습들은 꿈 따위가 아닌 현실이었다. 작전은 언제나 순조로웠고, 팀원 중에서 부상자는 전혀 나오지 않았다. 물론 그녀들의 일이 변한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그녀들은 테러리스트들을 제압하고, 때때로 인간인 그들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은 더 이상 미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몽구스 팀뿐이었다. 몽구스 팀만이 미호가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였다.


미호가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현장의 팀원들은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테러리스트들의 신병을 넘기기 위해 현지 경찰과 연락을 하는 사이 핀토와 드라코는 인질로 붙잡혔던 사람들을 안심시키는 중이었다. 특히 친화력 좋은 핀토는 어린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미호는 그런 그녀들의 밝은 성격이 내심 부럽다고 생각했다.


“좋겠다 핀토는. 나는 다가가기만 해도 애들이 도망가던데.”


“미호가 너무 심술궂은 표정을 지어서 그런 거야. 애들은 나처럼 친절한 바이오로이드를 좋아한다고.”


“너한테 물어본 거 아니거든. 그리고 애들이 널 좋아하는 건 친절해서 그런 게 아니야. 자기랑 수준이 맞는 것 같으니까 좋아하는 거지.”


“우이씨. 미호 또 날 놀렸어?”


“하하하 둘 다 그만해. 어린아이들을 좋아하게 만드는 건 쉬운 일이야. 정의로운 마음가짐과 불타는 심장! 이 두 가지만 기억하면 돼.”


“정의로운 마음이라 이거지…….”


미호는 핀토의 말을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가치판단이 혼란스러워진 이런 시기에도 핀토의 정의관은 처음과 같이 여전했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모두 조금씩 변해가는 몽구스 팀원들 중에서 핀토는 가장 변하지 않은 팀원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건 핀토의 타고난 천성 덕분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감상에 젖어있었기 때문에 미호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아니, 애초에 그러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저격을 위해 작전현장과 한참 떨어진 건물에서 대기하던 그녀는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인질들이 모여 있던 장소의 구석에서 홀로 웅크리고 있던 사내가 마치 소리없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유령처럼 일어선 사내는 품속에서 꺼내든 작은 권총으로 열심히 인질들을 달래고 있던 드라코를 겨냥했다.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세 발의 총성이 울릴 때까지 그 누구도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마침내 드라코가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몸에 난 상처를 만졌을 때 그녀의 손은 새빨갛게 물들어있었다.


“드라코!”


핀토의 절규가 신호가 된 것처럼 모든 일이 순식간에 일어났다. 무전기를 내팽개친 홍련은 즉시 드라코를 쏜 사내를 향해 빙결 볼트를 발사했다. 손이 얼어붙은 사내는 즉각 비명을 지르며 허물어졌다. 그러나 그 사내뿐만이 아니었다. 지금껏 무기력하게 앉아있던 인질들 몇 명이 총기를 꺼내들고 홍련을 향해 대응사격을 했다. 머리에 총을 맞은 홍련은 그 충격으로 비틀대다 건물 밖으로 추락했다.


핀토가 몸을 던져 쓰러진 드라코의 방패를 치켜세우고 드라코를 지켜내는 장면까지가 미호가 파악한 전부였다. 미호는 즉시 사격자세를 취한 뒤 저격을 시작했다. 한 발, 그리고 또 한 발. 미호의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총을 든 괴한들이 쓰러져갔다. 그러나 미호는 좀처럼 마음을 안정시킬 수 없었다.


“제발…… 제발……!”


미호는 자꾸만 떨리려는 몸을 다잡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바이오로이드도 총에 맞으면 죽던가?’ 물론 죽을 것이다. 바이오로이드들은 어디까지나 강화인간일 뿐 완전한 기계는 AGS는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호는 그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드라코는, AS-12 스틸 드라코는 방패를 든 돌격조의 역할을 맡는 만큼 내구성이 단단하게 제조되는 기체였다. 드라코는 얼마든지 버텨줄 것이다. 하지만 건물 밖으로 추락한 홍련은?


미호는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려는 듯 온 신경을 사격에만 집중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드라코의 몸에서 배어나오던 붉은 피와, 피를 뿜으며 추락한 홍련의 마지막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그녀의 침착한 대응 덕분에 괴한의 숫자는 빠르게 줄어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진짜 인질과 총을 든 가짜 인질들이 뒤섞인 방 안은 그야말로 수라장이나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테러리스트들은 인질로 위장한 채 민간인들 사이에 교묘하게 섞여있었다. 미호는 최대한 민간인과 테러리스트들을 구분하려 애쓰며 사격을 이어나갔다.


매캐한 화약의 연기, 쓰러진 괴한들의 고통에 찬 몸부림, 갑작스런 총성에 놀란 어린아이들의 울음, 그리고 쓰러진 드라코에서 쏟아지는 붉은 피.


미호는 지금이라도 당장 팀원들에게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억눌렀다. 지금은 습격자들을 소탕하는 일이 우선이었다. 미호는 계속해서 포인트를 옮겨가며 남은 괴한들을 찾아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미호는 마침내 그것을 발견했다..


평범해 보이는 상자를 들고 있는 사내였다. 얼핏 보기엔 그저 상자를 들고 있는 평범한 아저씨라고 생각될만한 모습이었지만 미호는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무른 바이오로이드가 아니었다. 사내가 들고 있는 것은 평범한 상자가 아닌 일종의 부비트랩일 것이 분명했다. 미호는 재빨리 사내를 조준했다.


그러나 최후의 순간, 미호를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감히 당길 수 없었다. 미호는 사내의 얼굴 속에서 이글거리는 복수심을, 그리고 얼마 전에 그녀가 직접 쓰러뜨린 어린 아이의 얼굴을 보았다. 아마도 그 아이는 자신의 아버지를 무척이나 많이 닮았던 모양이었다.


미호는 망설였고, 그 짧은 시간은 상자를 든 사내에게 너무나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스코프로 조준해야 할 정도로 먼 거리였지만 미호는 입모양을 통해 사내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저주받을 것들. 내 아들의 복수다!’ 미호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미호는 곧 일어난 거대한 폭발을 대비했다.


그러나 눈을 떴을 때 폭발 따위는 눈 씻고 찾아봐도 볼 수 없었다. 대신 미호는 입에 거품을 문 채 쓰러지는 사내의 모습만을 볼 수 있었다.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현장을 살펴보던 미호는 이내 비명 같은 탄성을 내질렀다.


“핀토!”


핀토가 자리에서 일어나 사내에게 무언가를 집어던졌다. 드라코를 보호하던 그녀가 위협이 어느 정도 사라졌다고 판단하자 행동을 개시한 것이 분명했다. 미호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핀토의 지원이 더해지자 나머지 테러리스트들을 제압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육안으로 식별되는 모든 테러리스트들을 제압한 미호는 서둘러 작전현장을 향해 달려갔다.


무리한 달리기로 숨이 막히고, 다리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후들대긴 했지만 어쨌든 빠른 시간 내에 도착할 순 있었다. 현장의 건물로 향하는 계단 앞에서 미호는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불가사리!”


미호는 불가사리의 이름을 부르며 드라코의 상황에 대해 물어보려 했다. 하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낡은 벽에 등을 기대고 웅크리고 앉은 불가사리는 넋이 나간 얼굴로 끊임없이 무언가를 중얼거릴 뿐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몰라. 나는 아무것도 안 했어. 나는 아무것도 몰라. 나는 아무것도 안 했어. 나는 아무것도 몰라. 나는 아무것도 안 했어. 나는 아무것도 몰라. 나는 아무것도 안 했어. 나는 아무것도 몰라. 나는 아무것도 안 했어.”


“불가사리! 정신 차려봐. 어서!”


“미……호?”


마치 폐인과 같은 불가사리의 모습에 놀란 미호는 그녀의 몸을 세차게 흔들었다. 불가사리의 몸은 미호가 손길에 따라 흔들렸지만, 그것뿐이었다. 불가사리는 외부의 자극에 대해 반응했지만 그것은 단순히 기계적인 반응인 것 같았다.


“정신차려 불가사리. 드라코는 어떻게 됐어? 홍련 작전관님은. 여기 있으면서 아무것도 못 본 거야?”


“드라코……? 작전관님……? 나는 아무것도 몰라. 나는 그냥 구멍을 뚫으러 여기 왔을 뿐이야. 그런데 갑자기 비명이…… 피가…….으아아아아아!”


알 수 없는 말을 중얼대던 불가사리는 미호가 채 말리기도 전에 빠른 속도로 사라져버렸다. 어쩔 수 없이 미호는 불가사리를 내버려 둔 채 즉시 계단 위로 뛰어올랐다. 


계단을 오르며 미호는 끊임없이 되뇌였다. 제발 아무런 일도 없기를. 부디 행복했던 일상으로 다시금 돌아갈 수 있기를. 그녀의 그런 바람을 비웃기라도 하듯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비릿한 피냄새가 훅 끼얹어졌다.


오리진 더스트로 강화된 바이오로이드들은 맨손으로도 능히 인간을 찢어죽일 수 있다. 이것은 모두가 은연중에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쉽사리 떠올리기 힘든 사실이었다. 기본적으로 선량하고 인간에게 호의적인 바이오로이드들이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리라곤 상상하기 힘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호는 잠깐 동안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미호가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깨달았을 때 미호는 요란하게 구토했다.


“핀토…… 어째서 이런 짓을 한 거야.”


간신히 구토를 멈춘 미호는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끔찍한 현장의 한 가운데에서 피칠갑을 한 핀토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아, 미호도 왔구나. 마침 잘 됐어. 안 그래도 지금 막 악당들을 물리치고 있던 참이었어. 미호 너도 같이 하지 않을래?”


“악당들이라고? 정신 차려 핀토! 이 사람들은 인질들이었어. 테러리스트나 악당 따위가 아니었단 말이야!”


미호는 눈앞에 펼쳐진 지옥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곳에는 분명 테러리스트들의 시신도 많았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의 시신이 훨씬 더 많았다. 그러나 핀토는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여기 있는 이 사람들은 전부 악당이야. 그렇지 않으면 정의의 편인 우리를 향해 총을 겨눴을 리 없잖아?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선 때로는 과격한 수단도 필요한 법이야.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 수단이 필요할 때지.”


너무나도 당당한 핀토의 말에 미호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핀토는 잔뜩 충혈된 눈으로 미호를 쏘아보고 있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어딘가 불안정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드라코와 홍련이 피습당했다는 사실이 핀토의 무언가를 건드려버린 모양이었다. 


미호는 핀토를 상대하는 대신 서둘러 근처에 있는 드라코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불행 중 다행으로 드라코의 출혈은 이미 멈춰 있었고 호흡 역시 안정적으로 변해있었다. 핀토의 응급처치가 유효했던 모양이었다. 의학적 지식은 부족했지만, 미호는 그 두 가지 지표가 대단히 긍정적인 지표라는 점만은 알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드라코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낸 미호는 다시금 핀토를 바라보았다.


“핀토. 제발 이러지 마. 아직 늦지 않았어. 지금이라면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어. 응? 그러니까 제발 정신을 차려줘.”


미호는 핀토를 설득하려 했지만 그녀의 말은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핀토는 충격을 받은 듯 퀭한 눈으로 미호를 응시했다.


“어째서……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미호. 지난번에는 분명 나를 이해해준다고 말했었잖아. 우리가 함께 정의를 만들어가자고 했었잖아. 그 약속은 전부 잊어버린 거야?”


“잊지 않았어. 하지만 이 방법은 아니야. 이런 건 절대로 정의가 아니야.”


“정의가 아니라고……? 내가 그게 무슨…… 아니, 아니야. 미호가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지. 너는 미호가 아니야. 그렇다면 지금 거기 앉아있는 넌 누구야? 정말로 미호가 맞는 거야?”


미호는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핀토의 말은 그녀가 지금껏 묻어두고 있던 고민을 다시금 들춰내었다. ‘나는 정말 미호인가? 혹시 나는 그저 스스로를 미호라고 착각하고 있는 바이오로이드인 건 아닐까? 미호는 곤혹스러웠다.


바로 그 때 시체더미 속에서 누군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어린 아이가 우는 소리 같았다. 그러자 곧장 핀토의 시선이 소리가 들린 쪽으로 향했다. 미호는 그런 핀토를 향해 다급히 외쳤다.


“안 돼 핀토. 그러지 마.”


그러나 미호의 말은 공허한 메아리가 될 뿐이었다. 핀토는 느릿느릿하지만 확고한 발걸음으로 소리가 들린 쪽을 향해 걸어갔다. 대단히 살기등등한 모습이었다.


어쩔 수 없이 미호는 자리를 박차고 핀토를 향해 달려갔다. 근접전에서라면 미호는 핀토의 상대가 되지 못 할 거라는 사실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미호는 그녀를 막아야만 했다. 이 이상으로 핀토의 죄를 늘려서는 안 됐다.


결과적으로 미호는 핀토를 막아서지 못했다. 그녀를 막아선 것은 건물 잔해 속에서 뛰쳐나온 인물이었다. 미호는 그 인물을 향해 반갑게 외쳤다.


“작전관님! 무사하셨군요!”


건물 아래로 추락했던 홍련이었다. 홍련의 솜씨에 핀토는 마치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허물어졌다. 홍련은 쓰러지는 그녀가 충격을 받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안아들었다.


“고생 많았습니다 미호. 덕분에 최악의 상황만은 면했군요.”


홍련은 머리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괜찮아보였다. 지휘관급의 고급 개체인 만큼 홍련의 신체는 일반적인 바이오로이드들보다 월등히 튼튼하게 제조되었던 모양이었다. 


그 사실을 확인한 미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다 문득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방이 피투성이였다. 미호는 망연자실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로 이런 걸 보고 최악의 상황을 면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최악의 상황은 면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단은 그렇게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하지만 이 사람들은요. 핀토가…… 이렇게 만들어버린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죠?”


“그것 역시, 내가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미호는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다 괜찮아질 겁니다.”


아니, 거짓말이다. 미호는 홍련의 말에서 민감하게 거짓을 읽을 수 있었다. 회사 소속의 일개 바이오로이드인 그녀의 팀이 이런 상황을 ‘좋게’ 해결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미호는 지금 홍련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예측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몽구 스팀에게는 언제나 홍련이 필요했다. 미호는 머뭇거리며 홍련을 향해 말했다.


“작전관님. 제게 생각이 있어요. 만약 작전관님께서 허락만 해 주신다면…….”


“절대로 안 됩니다.”


미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홍련은 그녀의 말을 끊어내었다. 그러나 미호는 멈추지 않았다. 미호는 다시 한 번 차분한 태도로 홍련에게 말했다.


“하지만 들어보지도 않으셨잖아요. 좋은 생각이에요. 그러니까 한 번만 들어주시면…….”


“너는 또 나에게 그런 걸 명령하게 할 셈이니?”


미호는 아무 말 없이 홍련을 바라보았다. 피 때문일까? 그녀는 평소의 냉철한 말투도 잊어버린 채 붉게 충혈된 눈으로 미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호는 그녀의 눈에서 많은 것들을 읽을 수 있었다. 미호는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


“말해주세요. 작전관님. 저는 ‘몇 번째’ 미호인가요?”


홍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미호는 그녀의 태도에서 이미 대답을 들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의심이 확신으로 변하는 순간. 그렇지만 미호는 슬프다는 생각보다는 묘하게 후련하다는 생각을 했다. 미호는 말없이 홍련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제발 부탁이에요. 제가 이 모든 상황을 해결할 수 있어요. 그러니 부디 저에게 맡겨주세요.”


“왜…… 너는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려는 거니. 이번 한 번쯤은 네가 희생하지 않아도 돼. 원래 너희들을 지키는 건 내 의무란 말이야. 그런데 넌 항상 혼자만 짊어지려 하는 거니?”


미호는 절대로 자신의 생각을 말로 옮길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래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고민하던 미호는 이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래야 제가 미호로 남아있을 수 있을 테니까요.”


“미호로 남아있을 수 있을 거라고?”


홍련의 반문에 미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딘가 불안해보였던 이전까지와는 다른 자신감에 찬, 확고한 태도였다.


“단지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는 부족해요. 그것만으로는 내가 나라는, 미호가 미호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없어요. 그걸 증명하기 위해서는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죠.”


“그 무언가가 대체 뭐지?”


“작전관님께서도 이미 알고 계시잖아요. 제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그녀의 말대로 홍련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홍련은 더 이상 미호를 향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눈을 맞추며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 그래서 그 날은 하루 종일 드라코를 놀리면서 놀았어요. 아무래도 금방금방 받아들이는 핀토보다는 반응이 좋은 드라코 쪽이 놀리기 더 쉬웠거든요. 제가 어떤 식으로 드라코를 놀렸는지는 통신채널에 남아있는 제 기록을 보시면 알 수 있을 거예요. 참 그리고 그 날 밤엔 냉장고에서 몰래 불가사리가 숨겨놨던 푸딩을 꺼냈는데, 그걸 핀토랑 같이…….”


미호는 편안한 의자에 홍련과 마주앉아 있었다.


그녀가 늘어놓고 있는 것은 몽구스 팀과 함께 보냈던 추억들이었다. 미호는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눈가에 눈물이 맺힐 정도로 웃어가며 자신이 겪었던 이야기들을 홍련에게 들려주었다,


그와 대도적으로 홍련의 반응은 진지함 그 자체였다. 홍련은 마치 귀중한 복음을 옮겨 적듯 진중한 태도로 미호의 말 하나하나를 녹음하고, 써내려갔다.


“하아 이걸로 끝이에요. 정말이지 최근에는 즐거운 일이 너무 많아서 말하는 것도 오래 걸렸네요.”


“고생 많았습니다. 미호가 말해준 데이터들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기록될 거예요.”


“기록된다라…… 그러면 그 기억들이 전부 새로운 미호에게 덧씌워지는 거겠죠?”


미호의 질문에 홍련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사건은 민간인 사상자가 다수 발생한 몽구스 팀 최초의 실패로 기록되었. 그리고 그 책임을 모두 짊어진 것은 바이오로이드 T-14 미호였다.


홍련의 보고서 속에서 미호는 테러리스트들의 자살테러를 효과적으로 막지 못한 원흉으로 규정되었다. 미호가 결함개체라는 것은 이미 다수의 메디컬체크 요청과 혼란스럽다는 본인의 면담기록이 있었기에 제법 설득력 있는 주장이었다. 


미호가 테러리스트를 제때 저지하지 못한 탓에 폭탄은 터지게 되었고, 그 결과 몽구스 팀은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채 퇴각. 건물 안에 있던 생존자들은 소수의 어린아이를 제외한 채 모두 잔해 속에 매몰되었다. 이것이 홍련이 꾸며낸 시나리오였다.


핀토에게 끔찍하게 살해당한 시신을 숨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방법이었다. 블랙리버는 책임을 져야 했으나 아직 몽구스 팀을 해체하고 싶진 않았고, 그 결과 팀을 유지한 체 문제를 일으킨 미호 개체만을 변경한다는 방안을 내놓게 되었다.


“다른건 몰라도 이거 하나만큼은 참 아쉽다는 생각이 들어요. 언젠간 초콜릿을 정말 원 없이 먹어보고 싶다고 생각했거든요. 이 부분은 작전관님이 신경을 좀 서주세요. 제 기억을 쓴 개체라면 아마도 저랑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거예요. 아! 그리고 온수샤워도요.”


“충분히 고려하겠습니다. 그러니 안심하시길.”


기존의 미호가 지니고 있는 기억들을 새로운 개체에 이식한다는 것은 홍련이 성공한 유일한 반란이었다. 잔인하고 괴로운 일이지만, 정신적으로 불안한 팀원들을 위해서는 이런 방법이 필요했다. 무엇보다도 미호 본인이 강력하게 주장한 일이다. 기억에 약간의 조정을 거친 팀원들은 미호가 그저 포상휴가를 다녀온 줄로만 알게 될 것이다.


“다행이다. 저는요 정말이지…….”


미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곧 방문객의 도착을 알리는 알람이 들려왔던 것이다. 이제 얼마 있으면 폐기를 담당한 블랙리버사의 직원들이 이곳으로 올 것이었다.


“조금 더 말하고 싶었는데…… 이제는 정말로 시간이 많이 없네요. 전 어디로 가게 될까요. 듣기로는 폐기된 바이오로이드들은 탄광이나 노예 비슷한 걸로 끌려가기도 한다던데. 저 역시 그렇게 될까요? 으…… 그런 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더러운 건 정말이지 딱 질색이거든요.”


“미호의 경우에는…… 그런 일은 겪지 않을 겁니다. 군 경력이 있고, 인간에게 해를 입힌 경력이 있는 바이오로이드들은 안전상의 이유로 그런 종류의 노동에서 제외되거든요.”


“그러면 저는 곧장 폐기되겠군요.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미호는 어두운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강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하고 있었지만 역시나 미호는 두려운 것 같았다. 홍련은 충동적으로 미호를 부를 뻔했다. 지금이라도 도망치자고, 팀이 함께 움직이면 효과적으로 도망칠 방법이 있을 거라고 제안하고 싶었다.

하지만 작전관의 냉철한 이성은 그것이 말도 안 되는 헛소리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머릿속에 회오리치는 수많은 가능성들은 전부 실현가능성 없는 쓰레기에 불과했다. 홍련이 그렇게 고뇌하는 사이 미호는 경쾌한 동작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는 정말 가야 될 시간이네요. 이왕 가는 거 마지막 걸음 정도는 제 생각대로 걷고 싶어요. 작전관님도 따라와 주실 거죠?”


홍련은 미호를 따라 묵묵히 걸었다. 애석하게도 창밖으로 보이는 세상은 오랜만에 너무나도 밝고 따듯해보였다. 바이오로이드 미호의 마지막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홍련은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미호는 문 앞에서 우뚝 멈춰 섰다. 홍련은 참을성 있는 태도로 그런 그녀를 바라보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미호는 홍련의 쪽을 바라보지 않은 채 말했다.


“정말 마지막으로요. 이건 정말로 개인적인 질문인데요. 혹시 대답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얼마든지요.”


홍련은 목소리를 한 번 가다듬은 뒤에야 간신히 미호의 말에 대답할 수 있었다. 미호는 여전히 뒤돌아보지 않은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예전에 한 번 물어봤던 질문이에요. 그런데 그 때는 아무래도 상황이 그렇다 보니 제 질문에 제대로 대답해주지 않으셨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제대로 물어보고 싶어요. 작전관님께, 저는 ‘몇 번째’ 미호였었나요? 그러니까 제 앞에 몇 명의 미호가 있었는지 알고 싶었어요.”


홍련은 눈을 감았다. 흔히 양산되는 바이오로이드 개체들 사이에는 차이점이 없다고 여겨진다. 틀에 대고 찍어내는 공산품처럼, 바이오로이드들 또한 그러한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양산된 개체라 할지라도 개개인의 차이는 분명 존재한다. 어떤 개체는 속눈썹이 더 길다던가, 어떤 개체는 얼굴이 조금 더 갸름하다와 같은 외형적인 차이부터, 미세하지만 취향과 능력과 같은 성격적인 차이까지.


그런 점에서 생각해본다면 홍련은 지금껏 그녀와 함께했던 T-14 미호 개체들의 차이점들을 쉽사리 떠올릴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 미호들은, 전부 다른 바이오로이드였던가? 질문해볼 것도 없었다. 홍련은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한 명도 없었어.”


너무나도 단호한 홍련의 대답에 미호는 잠시동안 그녀가 대답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다. 곧 미호는 놀라움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홍련을 돌아보았다. 홍련은 손을 뻗어 그런 미호의 얼굴을 부드럽게 매만져주었다.


“미호 이전의 미호 따위 단 한명도 없었어. 미호 네가 어떤 모습이던 상관없어. 나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미호는 언제나 한 명 뿐이었어.


홍련의 손이 미호의 길고 부드러운 손가락을 감싸 쥐었다. 홍련의 손길을 따라 줄곧 차가웠던 그녀의 손가락에 따스한 온기가 전해졌다. 


“그러니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아도 돼.”


미호는 그제야 처음으로 자신의 손가락에 따스한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미호는 홍련을 끌어안았다.


“정말로 감사해요. 저는 언제나 그 대답이 꼭 듣고 싶었어요.”


미호는 눈물을 흘렸다. 슬픔이나 좌절의 눈물 따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공산품 따위는 절대로 흘릴 수 없는, 진정으로 자유로운 자만이 흘릴 수 있는 눈물이었다.

   

   


   

자신의 방에서 홍련은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최근 몇 달간 감쪽같이 사라져버려 잃어버린 줄로만 알았던 사진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마치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사진은 원래 사진이 놓여있었던 그 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사진 속에는 해맑게 웃는 몽구스 팀 4명과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있는 홍련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아마도 맨 처음 이 지역에 투입되었을 때 찍은 사진인 것 같았다. 홍련은 사진 속 자신의 미소가 어색하다고 생각했다. 홍련은 작은 손거울을 들여다보며 미소 짓는 연습을 해 보았다. 하지만 미소가 어색하기는 그 때나 지금이나 매한가지였다. 결국 홍련은 연습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그 뒤로도 한참동안 사진을 들여다보던 홍련은 사진을 책상에 넣어둔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냥 감상에 젖어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제부터 그녀가 해야 할 일이 아주 많았기 때문이다.


홍련이 사진을 책상에 넣어둠과 동시에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홍련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들어와도 좋다고 말했다. 그러자 곧 문이 열리며 씩씩한 발걸음의 소녀가 홍련의 방 안으로 들어왔다.


홍련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되려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도 많았기 할 수 없는 것에 가까웠다. 말들은 그녀의 안에서 가득 차올라 넘실댔지만, 그 중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대신 그녀는 행동하기로 했다. 방금 전의 실패로 그다지 자신은 없지만, 계속해서 보고 있던 사진을 참고하여 따라 하기만 하면 어떻게든 될 것이라 생각했다.


“T-14 미호. 무사히 휴가를 마치고 복귀하였습니다.”


홍련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새롭게 태어난 소녀를 맞이했다. 자연스러운 미소는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쉽게 지을 수 있었다.

   

-fin-









여기서부터는 굳이 안 읽으셔도 무방한  이야기들입니다.


사실 자유대회라는 주제를 처음 봤을때부터 가슴이 막 두근거렸습니다.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바이오로이드라는  소재를 가장 좋게 활용할 수 있는 주제는 다름아닌 '자유'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저는 바이오로이드들에게 과연 '자유' 란 어떤 의미를 지닐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해보다 문득 '자유'로운 존재란 어떤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던 중 몽구스 팀의 옛날 이야기에 대한 설정을 읽게 되었고 지금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생명체가 한 객체로서 자유롭게 있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많은 조건들을 필요로 합니다. 자유란, 아이러니하게도 홀로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쟁취해낼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홀로 남는 자유는 자유가 아닌 고독일 뿐입니다. 자유는 타인과의 관계설정에서 자신을 발견했을 때 비로소 비롯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무쪼록 부족하고,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번에는 더욱더 재미있는 글로 찾아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