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싸움이 끝났다

 

다시금 지구의 주인이 된 사령관은 모든 권한을 바이오로이드들에게 넘겨준 채 어디론가 잠적했다. 그가 남긴 마지막 명령은 너희들만의 신세계를 건설해라.”였다. 자유를 얻고 사실상 인간이나 다름없어진 그녀들은 마음껏 자신의 삶을 누렸다.

 

그러나 자유를 얻기 전에 입력된 그의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그녀들은 참모 아르망을 필두로 사령관을 대신하여 멋진 신세계를 건설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것은 그녀들이 만들어낸 아름답고 달콤한, 하지만 장미 줄기처럼 가시 돋친 새로운 세상에 관한 이야기이다.

 

/

 

아직도 월급이 들어오지 않았어요. 저희 동생이 많이 아파요. 부디 하루라도 빨리...”

 

차가운 쇠로 만들어진 탁자 위에서 무심하게 서류를 작성하던 유미는 불쾌한 표정으로 볼펜을 쾅 내려놓았다.

 

저기요, 아직 드릴 돈이 없다니까요? 한 푼이라도 받고 싶으시면 조용히 일이나 하자고요. ? 아시겠어요? 그렇게 돈이 급하시면 사장님께 가보세요. 저는 그냥 상담원일 뿐이라 아무 도움도 드릴 수가 없다고요!”

 

자존심 강한 리리스도 자본주의의 무력 앞에서는 결국 무릎 꿇을 수 밖에 없었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하치코와 페로를 생각하면 차마 사회에 반하는 일을 벌일 수도 없었다. 신세계에서는 새로운 헌법이 만들어졌고, 그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자들은 전부 저지른 합당한 처벌을 받았다. 다만 전과 다른 점은 그 죄인의 가족들도 함께 처벌받았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 누구도 법을 원망하지 않았다. 다들 원망하는 자는 단 한 명도 없다고 믿고 있었다.

 

세상은 둘로 갈라졌다. 영원한 쾌락을 주입받으며 세상을 보는 눈과 귀를 닫아버린 사람들이 사는 제 1구역, 그리고 그 방탕한 세계의 그림자 뒤에서 세상을 지탱하는 사람들, 지금 리리스가 사는 제 2구역이 바로 그것이었다.

 

어느 곳에서 살아갈지에 대한 선택은 자유였다. 다만 리리스는 후자의 경우였다. 그녀는 감각이 무뎌져서 자아조차 잃어버린 1구역의 사람들에게 끔찍한 거부감을 보이며 2구역에서 노동하는 삶을 선택했다. 2구역은 노동에서 기쁨을 얻는다는 몇몇 메이드나 팩스 소속 바이오로이드들의 요청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었다

 

대부분의 바이오로이드들은 이곳에서의 노동과 그에 합당한 보상에 만족했다. 그런 와중에서도 2구역에 싫증이 난 자들은 1구역으로 가서 편안한 삶을 즐기기도 했다. 하치코는 물론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언니를 따라갔고, 페로도 마찬가지였다.

 

돈 문제에 시달릴 때마다 리리스는 자신의 선택을 비관하기도 했으나 전에 우연히 보았던 2구역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리고 이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 이거라도 가져가세요.”

 

리리스가 생각을 마침과 동시에 유미는 렌즈가 두꺼운 안경을 고쳐쓰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더니 무심하게 자신의 주머니에서 지폐 몇 장을 꺼내 리리스의 손에 쥐어주었다.

 

..? 이건 뭔가요?”

 

, 마음 바뀌기 전에 빨리 가요.”

 

정말... 정말 감사해요. 정말...”

 

리리스는 유미에게 하염없이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녀의 진심 어린 감사에 조금 뭉클해진 유미는 본심을 숨기고 괜스레 툴툴대며 말했다

 

... 빨리 가세요! 아직 밀린 일이 많다고요.”

 

과거의 리리스라면 충분히 발끈할만한 일이었지만 지금의 그녀에게는 유미의 말투나 태도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조금이나마 오래 동생들을 먹여 살릴 수 있다는 그 사실이 훨씬 중요한 일이었다.

 

, . 꼭 갚을게요... 정말 감사합니다!”

 

리리스는 들뜬 마음으로 사무실을 나가서 빠르게 약국으로 향했다. 처음 사회가 건립된 후에는 자존심을 내세우며 다른 바이오로이드의 밑에서 일하는 것을 극구 거부했던 리리스가 이렇게 변하기까지는 한 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

 

일을 하지 않으니 그 누구도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지 않았다. 동생들은 집에 두고 길거리에 나가 구걸을 해보기도 했으나 돌아오는 것들은 차가운 시선과 욕설, 그리고 가래 섞인 침방울 뿐이었다

 

그날 리리스는 아름다운 은색 머릿결을 흠뻑 적신 다른 이들의 침방울을 닦지도 않은 채 골목에 홀로 서서 한참이나 울었다. 단 하루 만에 처참하게 짓밟힌 자신의 자존심에 상처받기보다도 동생들조차 제대로 책임지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함이 원망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로 리리스는 자신을 버리고 최선을 다해 일했다. 그녀는 메이드 경력을 이용해 그토록 증오하던 소완 밑에서도 일하고, 심지어 다른 돈 많은 바이오로이드의 집에서 허드렛일까지 도맡아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리리스의 가늘고 부드러운 손은 서툰 가사 일을 하다가 생긴 화상으로 인한 물집과 칼에 베인 상처투성이가 되어 과거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렸고,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던 호박색 눈동자는 생기를 잃고 거리를 떠돌았다

 

차가운 회색의 빌딩들에 가려져 햇빛조차 들지 않는 도시의 골목 속의 어둠, 끝이 보이지 않는 높은 건물의 꼭대기.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푹푹 찌는 깊은 지하의 탄광. 리리스는 그런 극한의 환경에서 일하면서도 기죽지 않았다. 전부 동생들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면, 몸을 짓누르는 혹독한 피로감과 찝찝한 땀 냄새마저 전부 녹아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닥터 님의 기술력의 집약체, () 팩스 사()의 AGS 입니다. 원하시는 약 또는 환자의 증상을 설명해주십시오.”

 

리리스가 약국 안으로 발을 들이자 닥터가 개발한 약사 AGS가 그녀를 반겨주었다.

이미 중노동과 전문직은 AGS가 전부 차지했기에 바이오로이드의 일자리는 점점 줄어만 갔고, 그 때문에 최근에는 대부분의 바이오로이드들이 일자리를 구할 필요 없이 영원한 삶을 즐길 수 있는 1구역으로 가는 것을 택했다.

 

본래 바이오로이드들은 인간을 위해 봉사하거나 노동하는 것에 가장 큰 기쁨을 느꼈으므로 처음 대부분의 바이오로이드들은 2구역에 남는 것을 택했었다. 하지만 닥터가 본격적으로 AGS 개발에 착수하면서 전세가 역전된 것이었다

 

그 옛날, 마치 바이오로이드가 인간들의 일자리를 빼앗은 것처럼 그녀들은 로봇들에게 일자리를 빼앗겼다. 리리스도 그중 하나였다. 겨우 자리를 잡은 일터에서도 금세 해고되기 일수였고, 저번 금융위기가 왔을 때는 자신이 그토록 아끼던 사령관에게 받은 반지를 팔아서야 겨우 연명할 수 있었다

 

사령관에게 받은 반지를 잃은 그 순간부터 리리스는 그토록 바라왔던 인간으로서의 삶을 포기했다. 유일한 삶의 이유였던 사령관의 얼굴은 힘든 노동의 스트레스로 인해 가물가물해졌고, 그나마 그의 온기가 남아있던 유일한 물건인 반지마저도 잃어버리고 말았으니 그녀는 더 이상 살아갈 이유 자체를 찾지 못했다.

 

지금의 그녀는 그저 자신을 믿고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는 두 동생들을 위해 살 뿐이었다.

 

항생제 하나 주세요. 하치코 모델에게 잘 듣는 약으로요.”

 

“200 참치입니다. 요금을 지불해주십시오.”

 

말도 안돼. 그새 가격이 올랐나요?”

 

며칠 새에 가격이 50 참치나 올랐다니, 리리스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원자재의 가격 상승으로 인한 정당한 가격 인상이었습니다. 요금을 지불하시겠습니까?”

 

... 여기요.”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리리스는 떨리는 손으로 지갑에서 200 참치를 꺼냈다. 사실 이곳의 화폐는 여전히 참치라고 하지만 실물의 참치캔이 아닌 지폐의 형태로 바뀌어 통용되고 있었다. 유미에게 받은 50 참치 어치 지폐 3장에 자신이 가진 돈 50 참치 지폐 한 장까지 전부 내니 그녀의 수중에는 이제 10 참치밖에 남지 않았다

 

정부에서 주는 보급 식량은 턱없이 부족했고, 하치코의 병은 막대한 비용의 수술비를 지불하지 않는 한 치료가 불가능했기에 계속해서 병의 증세를 억누르는 약들을 복용해야만 했다. 그러나 뒤늦게 취업 시장에 뛰어든 리리스의 월급만으로 그것들을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고, 결국 설마 하던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었다.

 

리리스는 수중에 남은 돈을 보며 허망한 표정을 짓고 삶의 이유이자 자신에게 남은 전부인 동생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향했다.

 

언니! 보고싶었어요!”

 

언니, 오셨나요? 수고하셨어요. 하치코, 언니 피곤하게 만들지 말고 이리 와!”

 

... 페로는 쫌생이네용...”

 

페로와 하치코가 투닥대는 모습을 보고만 있어도 리리스의 입가에는 웃음꽃이 피었다. 힘든 상황에서도 밝게 지내주는 두 동생에게 리리스는 그저 한없이 미안하고 고마울 뿐이었다.

 

둘 다 그만 싸우고 이리 와, 안아줄게.”

 

헤헤... 역시 언니가 최고에요.”

 

, 그럼 잠시만 안길게요...”

 

리리스는 품에 얼굴을 묻고 고개를 부비는 하치코와 수줍게 다가와 팔을 두르는 페로와 온기를 나누었다. 리리스는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고마워, 얘들아. 언니가 더 힘낼게. 우리 조금만 더 버티자, 알겠지?”

 

/

 

리리스는 자신들을 버리고 잠적한 주인이 원망스러웠다. 사랑한다고, 몇 번이나 말했으면서 자유를 얻고 마침내 완전한 인격체가 되었는데 이렇게나 갑자기 떠나버리다니. 사라지기 바로 전날까지도 사령관은 그녀와 잠자리를 함께했다. 사령관이 편지 한 장만을 남기고 사라졌을 때, 리리스는 당연히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 편지에는 리리스를 향한 사랑에 대한 고백, 그리고 급하게 휘갈겨 써진 탓에 알아볼 수 없는 글귀 한 줄이 적혀있었다

 

오히려 철충과 피 튀기며 싸웠던 그때도 이 정도로 힘들지는 않았다. 남자로부터 사랑받았고, 또 그를 사랑했으며, 부족하지 않은 삶을 누렸다. 누구 하나 뒤처짐 없이 자원을 제공받았으며 리리스는 그런 오르카에서의 삶을 동경했다. 그러나 평생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와의 시간은 철충의 소멸과 동시에 끝났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그때의 기억은 달콤한 맹독이 되어 리리스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가끔은 침대 위에서 그와 나누었던 뜨거운 사랑이 그립기도 했으나 지금은 그저 자신을 매정하게 내친 그가 미웠다. 그럼에도 리리스는 바보같이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녀는 두 동생들을 품에 안은 채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주인이 자신을 구하러 와줬으면, 하고 생각했다.

 

/

 

기름에 튀긴 양파가 좋다네~”

 

1구역의 브라우니들은 언제나처럼 거리를 떠돌며 신나게 노래를 불렀다. 예전이었다면 조용히 하라고 그녀들을 쏘아붙였을 레프리콘도 브라우니들의 노래에 맞춰 콧노래를 불렀다. 열댓 명의 브라우니들이 만들어내는 시끄러운 소리에도 주변의 사람들은 오히려 그녀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거나 그것에 맞춰 춤췄다

 

미소가 떠나지 않는 그들의 얼굴에서는 괴리감마저 느껴졌다. 리리스가 느꼈던 그 혐오심은 분명 그들의 광기 어린 웃음에서 나온 것이리라

 

그들은 지치지도 않고 계속해서 춤추고 노래했다. 축제라도 열린 것인가 싶을 만큼 흥겨웠으나 이것은 그저 그들의 일상에 불과했다

 

달콤하고 고소한 향이 나는 담백한 두부과자와 보기 좋게 리본으로 포장된 선물세트를 파는 포장마차에서도,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빠르게 익어가는 스테이크를 판매하는 레스토랑에서도, 직원이 폭행당하고 있는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꺄하하! 아파요, 손님! 키킥!”

 

그럼 더 쳐맞으면 되겠네, 하하하!”

 

때리면.... ........... 사이좋게 지......... 하하... ...”

 

백화점의 엘리베이터를 운영하는 토모와 그녀를 발로 걷어차는 워울프, 그것을 말리는 다이카까지, 모두가 행복해 보였다

 

아니, 행복해야만 했다.

 

그것이 최후의 인간이 남긴 최후의 명령이었기 때문이었다

 

사령관의 권한을 직속으로 위임받은 아르망은 그의 마지막 명령을 착실하게 이행했다. 그녀는 닥터와 협력하여 바이오로이드가 느낄 수 있는 쾌락의 한계를 뛰어넘을 정도의 행복을 선사하는 약, 소마를 개발했었다.

 

아르망은 이어서 바이오로이드는 노동에서 기쁨을 얻는다는 분석 결과에 따라 자유롭게일할 수 있는 2구역을 만들고, 아무런 생각 없이 쾌락만을 탐할 수 있는 1구역을 만들었다. 그렇게 세상을 둘로 나눠 스스로 원하는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선택의 자유를 보장했다

 

1구역에 간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이나 재산에 따라 각기 다른 신분을 부여받았다. 자신의 능력에 따른 차등이라는 말에 일부 계층이 반발했으나 자본주의적인 논리에 반박할 근거를 찾지 못했으며, 남은 인원들마저도 얼마 가지 못해 소마가 주는 쾌락을 맛보자 대부분 굴복하고 말았다.

 

그녀들은 신분에 따라 각기 다른 일을 맡았다. 샬럿이나 레오나처럼 가치 있는 바이오로이드는 1, 1급에 미칠 정도는 아니지만 뛰어난 능력을 가진 발키리나 이그니스는 2급 등, 신분의 차이에 따라 조금의 차등은 있었으나 여전히 모두가 행복했다. 행복할 수 밖에 없었다.

 

진실을 모르는 무지는 그녀들의 행복의 근원이었으며 이 세계를 지탱하는 받침돌이자 최후의 보루였다

 

한편, 레오나는 1구역 중앙에 우뚝 솟아있는 거대한 타워 안에 있는 카페의 창가에 앉아 티타임을 즐기며 타워 주변의 거리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이들을 경멸하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천박하긴. 도대체 저것들의 지능을 퇴화시키자고 제안한 게 누구야?”

 

후후, 저런 아이들이 있기에 저희가 더~ 빛나보이는 것 아닐까요~?”

 

... 확실히. 그것도 맞는 말이야. 역시 너도 뭘 좀 아는구나? 말이 통하는 것 같아 다행이야.”

 

샬럿은 두껍게 칠한 화장을 고치며 레오나를 위로했다. 레오나는 샬럿의 말에 조금 기분이 풀렸는지 미간에 잔뜩 잡힌 주름을 펴고 디저트를 음미했다.

 

두 사람은 3~4급의 바이오로이드들을 비웃으며 담소를 주고받았다. 하지만 그녀들은 자신이 저들과 다를 바가 없는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학대당하거나 착취당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 할 정도로 감각이 무뎌지고 쾌락만을 추구하게 된 저들과 1~2급의 시민들이 다른 점은 그저 조금의 지성과 이성이 남아있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자신들도 철창 속의 꾀꼬리이며 온실 속의 화초와 다름이 없다는 사실을 그녀들은 몰랐다.

 

그리고 스노우페더는 그런 무지한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써니에게 말했다.

 

써니, 어떻게 생각해?”

 

? 뭘 말이야?”

 

너도 알잖아. 이건 진짜 자유가 아니라는 거.”

 

스노우페더는 턱을 괴고 잠짓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으나 써니는 웃음으로 일관할 뿐이었다. 그녀는 분명 좋은 친구였지만 가끔은 페더조차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너는 이 멋진 세계가 싫은거야?”

 

써니는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로 말했다.

 

, 오늘도 그거 안 먹었지?”

 

...?”

 

이미 다 알고 있다고. , ’환각제안 먹었잖아.”

 

써니와 스노우페더는 닥터의 약을 환각제라고 불렀다.

 

우연히 약을 투여받는 것을 깜빡했던 날, 페더는 이 약이 마치 강력한 마약과 같은, 욕망의 수렁에 빠져 복용자의 이성을 서서히 갉아먹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된 이후로 꾸준히 그것의 투여를 중단해왔었다.

 

써니도 그녀의 끈질긴 설득 끝에 단 한 번, 그것을 복용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 사실이 알려지면 곧장 처벌받을 것을 우려한 써니는 그 후로도 계속해서 약을 복용했다

 

아니 그건... 오늘은 그러니까...”

 

페더는 변명할 거리를 찾지 못해 뭐라고 웅얼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너 그러다 추방당하면 어쩌려고 그래. 환각제에 그런 효과가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아직 우리 뿐인 것 같지만... 그게 알려지면 1구역에 피바람이 불 거야. 그럼 너도 무사하지 못할걸?”

 

써니의 말에 페더는 발끈하며 말했다.

 

그런게 진짜 자유라면 난 더 이상 자유를 누리고 싶지 않아! 난 이런 안락을 원하지 않아. 믿고 의지할 신을 원하고, 사랑과 진정한 위험과 완전한 자유와 선악을 원하고, 죄와 벌을 원해. 이젠 하치코 언니와 페로 언니와 리리스 언니가 보고 싶어.”

 

써니는 뚱한 표정으로 그녀의 한탄을 묵묵히 듣다가 문득 놀라 말했다.

 

네 입에서 리리스라는 이름이 다시 나올 줄은 몰랐네.”

 

그제서야 페더는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써니는 그런 그녀를 흥미롭다는 듯 쳐다보다 말을 이었다.

 

정말 그렇게나 이 멋진 신세계가 싫으면, 네가 직접 바꾸면 되잖아. 옛날에 요정 마을에서 우리가 했던 것처럼.”

 

/

 

리리스는 하치코와 페로를 재우고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아껴두었던 술로 외로움으로 인해 차갑게 식어버린 마음을 추스르고 있었다

 

조금은 쌀쌀해진 날씨와 어두운 밤의 가을바람은 리리스의 가슴 속 빈 곳을 후벼 파는 듯했다. 아무리 술을 들이부어도 잊히지 않는 주인의 모습은 리리스의 마음을 더 심란하게 만들 뿐이었다. 이젠 텅텅 비어버린 지갑을 저 구석에 던져버린 그녀는 몸이라도 팔 작정을 하며 앞으로의 계획을 세웠다. 자신이 없더라도 동생들만은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리리스의 호박색 눈은 어둠 속에서 밝게 빛났다. 그녀의 집은 1구역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덕에 유난히 예민한 그녀의 달팽이관에서는 1구역 주민들의 노랫소리가 떠나지를 않았다. 아무리 귀를 틀어막아도 작은 소리까지 전부 들리는 통에, 리리스는 자신의 밝은 귀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한편, 코너에 몰린 리리스의 머릿속에는 1구역에서의 삶에 대한 선택지가 떠나지 않았다. 리리스와 그녀의 동생들 정도라면 1구역에서 충분히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럼에도 리리스는 절대 1구역에 가고 싶지 않았다. 설령 자신이 죽어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다른 이가 만들어 낸 쾌락의 노예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고 앞으로의 일정을 적은 리리스는 긴장이 풀린 것인지, 극도의 스트레스에 대한 방어기제인 것인지, 갑작스레 강한 수면욕을 느꼈다. 기지개를 쭈욱 피며 아름다운 몸매를 과시한 그녀는 침실로 향했다. 땀에 찌든 옷과 퀴퀴한 냄새를 풍기는 속옷을 갈아입고 딱딱한 침대에 풀썩 걸터앉자 익숙한 소리가 리리스의 고막을 강타했다

 

오늘따라 작위적으로 들리는, 익숙하지만 어쩐지 기괴한, 수화기의 벨소리.

 

이 늦은 시간에 걸려온 전화에 리리스는 투덜대면서도 조금 불안한 마음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수화기를 통해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은 의외의 인물이었다.

 

, 리리스입니... ? 일이 생겼다고요? ... 다시 말씀해주시겠어요? 제가 잘못 들은 것은 아니겠죠?”

 

리리스는 전화기를 통해 아르망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몸을 떨었다. 일자리가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인데 할 일은 단 하나, 그리고 그 일의 보수는 하치코의 지병을 치료하는 것은 거뜬하고, 평생 일하지 않고도 넉넉하게 살 수 있을 만한 엄청난 돈이었다.

 

리리스는 처음엔 믿지 못했으나 전화기 스크린을 통해 띄워진 번호와 가녀린 목소리는 분명 아르망의 것이었다. 그 아르망이 자신에게 연락을 한 것으로도 모자라, 막대한 보수를 걸고 일을 시키다니. 순간 들뜬 리리스였지만 얼마 못 가 그녀는 일이 심상치 않게 흘러가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녀에겐 이 절망적인 상황을 버틸만한 돈도, 힘도 남아있지 않았으므로 리리스에게는 이미 선택권이 없었다. 그 모든 것을 예상한 듯, 아르망은 비웃는 듯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그래요. 잘 부탁드려요, 리리스 씨? 한 시간 뒤입니다. 말씀드린 장소로 와주세요.”

 

아르망은 너무나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리리스는 홀린 듯이 그녀의 말대로 움직일 수 밖에 없었다.

 

한번만... 단 한번이면 하치코랑 페로가 행복해질 수 있어...”

 

인생의 전환점이 될 전화를 마친 리리스는 처음 그녀의 주인을 만났을 때보다도 더 격렬하게 심장이 뛰는 느낌을 받았다

 

성공할 수 있을지, 그곳에서 자신이 무사할 수 있을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지만 아르망의 입에서 흘러나온 달콤한 유혹들은 그녀를 너무나도 간단하게 굴복시켜버렸다. 리리스는 이제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저 사랑하는 이들을 지켜내겠다는 의무감 하나만으로 아르망의 개가 되기를 자처했다.

 

아이들이 곤히 잠들어있는 것을 확인한 리리스는 그녀들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먼지가 잔뜩 쌓여있는 창고로 향했다

 

얼마나 오래 닫혀있었는지 끼이익 거리는 음침한 소리를 내는 창고 문을 열고 들어간 리리스는 스스로 채찍질하면서 전쟁 이후 단 한 번도 꺼내지 않은 블랙맘바와 로자 아줄을 손에 쥐었다. 오랜만에 느껴지는 권총의 묵직한 감각을 손에 새긴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두근대는 심장박동을 정신력으로 억누르며 블랙맘바를 품속에 숨긴 그녀는 오랜만에 피가 끓어오르는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코끝을 찌르는 비릿한 향기. 창고 구석에서 피어오르는 곰팡이 냄새는 전장에서 느꼈던 죽음의 냄새와 비슷했다.

 

/

 

대기를 가르는 강철의 탄환, 귀를 찢는듯한 충격음, 쇠가 콘크리트 바닥에 쳐박히며 마찰하는 소리.

 

침입자는 쏜살같이 날아오는 철의 징벌을 겨우 피하고 리리스와 대치했다.

 

어머, 제법이네요? 하지만 이제 못 피할 거에요. 그러니 거기까지만 하는 게 어때요? 투항하면 편하게 보내드릴 테니까요.”

 

... ?”

 

언니라니... 허튼 수작은 그만...”

 

침입자가 창문으로 투영된 달빛의 웅덩이로 들어왔다. 리리스는 그녀를 죽일 기세로 쏘아보았지만 마침내 자신의 동공에 비친 상대의 모습을 보고 굳어버리고 말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녀들은 서로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거리가 좁아질수록 동공에 더 선명하게 새겨지는 상대방의 실루엣은 두 사람을 절망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아아, 왜 하필이면...”

 

리리스는 분노도 슬픔도 초월하여 특이점에 달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눈앞에서 죽음의 공포로 덜덜 떨고 있는 저 가여운 천사가 바로 자신의 동생이었기 때문이었다.

 

스노우페더는 세계가 재건된 이후, 리리스와 자주 다퉜다. 자신에게 과하게 집착하고 돌보려하는 리리스에게 지친 페더는 틈이 보일 때마다 그녀에게 벗어나려 발버둥 쳤고, 리리스는 그런 그녀가 걱정되어 그녀에게 더더욱 집착했으며 사사건건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하지만 갈등의 불꽃이 꺼뜨리지 못할 만큼 커지게 된 것은 세계가 1구역과 2구역으로 나누어지게 되었을 때였다. 노동의 가치보다 영원한 행복이 있는 삶을 동경했던 페더는 1구역에 가길 원했고, 그곳에 가는 것을 본능적으로 꺼렸던 리리스는 그녀와 함께 2구역에서 살 것을 원했다

 

두 사람은 날마다 크게 다퉜다. 가족에게만큼은 상냥한 리리스는 페더의 화를 조용히 들어주었으나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던 밤, 그녀가 자신의 주인을 모욕하자 그만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손찌검을 날리고 말았다. 감정이 담긴 탓에 강한 힘이 실린 그녀의 손에 맞은 페더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리리스는 자신의 만행을 자각하고 어쩔 줄 몰라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으나 페더는 그녀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그녀의 눈빛에서 살기를 느낀 리리스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리고 말았다.

 

페더는 자신의 동생에게 손을 댔다는 자책감으로 인해 울상을 한 리리스의 손을 툭, 쳐내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페더는 결국, 그날 밤에 그녀가 깊게 잠든 틈을 타 창문 밖으로 순식간에 날아올랐고, 뒤늦게 일어난 리리스는 눈앞에서 소중한 동생이 달무리의 저편으로 사라져가는 광경을 그저 지켜보는 수 밖에 없었다.

 

그 뒤로 리리스는 페더와 완전히 연을 끊었고, 그녀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치를 떨었다. 하치코가 그녀의 이야기를 꺼냈다가 보다 못한 페로가 통곡하며 말릴 때까지 동생들을 끔찍하게 아끼는 리리스에게 죽도록 맞은 것은 이미 주변 이웃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이야기였다.

 

... 너어... 왜 여기까지 기어들어온거야...”

 

언니, 잠깐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이 세상은 미쳤어요! 이 약의 비밀만 알아내면...”

 

듣기 싫어!”

 

소마와 그에 관련된 정보가 잔뜩 저장된 창고 안에 순간 정적이 흘렀다. 리리스는 최악의 상황에서 동생과 재회하게 만든 잔혹한 운명을 원망했다. 하지만 그것조차 아르망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것이라고 생각하니 그저 헛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한참이나 실소하던 리리스는 순간 정색하며 페더를 향해 총구를 겨눴다.

 

우릴 그렇게나 매정하게 버리고 가놓고 이제야 염치도 없이 돌아온 거니? 여기에 들어온 사람은 즉결 처형이라는 걸 몰랐다고 하지는 않겠지. 너 때문에 마음고생 한 걸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려. 넌 이미 내 동생이 아니란다, 페더. 순순히 죽어. 이게 내가 베푸는 마지막 자비야.”

 

리리스의 눈빛은 닿기만 해도 얼어버릴 듯이 매섭고 싸늘했다. 그녀의 무의식 한켠에 자리 잡고 있던 작은 증오가, 마침내 조용한 분노의 형태로 투영된 것이었다

 

언니! 제발 이러지 마세요! 언니도 이 세계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모르는 건가요? 이 사실만 알리면 1구역의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어요. 이 찬란하게 빛나는 것처럼 보이는 끔찍한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요!”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마. 네가 그렇게나 원하던 곳이었잖아.”

 

제가 잘못 생각했어요. 이 세계는 분명 행복하게 보여요. 진실을 모른다면요. 하지만 저는 알아버렸어요. 소마가 주는 자유는 자유를 가장한 속박과 구속이었다는 걸요.”

 

리리스는 암담한 심정에 말을 잇지 못했다. 총구 끝에 서 있는 배은망덕한 동생을 차마 쏘지 못하는 나약한 자신에게 조소를 보내면서도 한편으로는 집에서 곤히 잠들어있을 동생들을 생각하니 부아가 치밀었다.

 

저 아이를 죽임으로써 남은 동생들이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다면? 저 아이가 말하는 것이 정말 사실이 아니라면? 저 아이가 그저 망상에 취하여 자신에게 거짓부렁을 늘어놓고 있는 것이라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총을 지탱하던 리리스는 한참이나 고뇌했다. 그리고 곧 최선의 답을 찾아낸 리리스는 지체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연구실 안에, 차가운 총성 한 발이 울려퍼졌다.

 

/

 

안타까운 소식입니다. 어젯밤, 제 1구역의 연구실에서 총격으로 인한 사망자가....’

 

...?”

 

여느 때처럼 사무실에서 문서를 작성하던 유미는 귀를 의심했다. 신세계가 건립된 이후 단 한 번도 발생하지 않았던 살인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정작 당사자인 1구역의 시민들 사이에서는 언제나 그랬듯이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했으나 2구역은 한동안 그 사건에 관한 이야기로 들썩였다. 언제 누군가 다른 동료를 살해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증폭되자 중앙에서는 곧 2구역의 시민들에게 안정제로 둔갑된 소마를 지급했고, 곧 2구역에서도 사건은 잊히게 되었다.

.

.

.

 

대답해보세요. 왜 그런 일을 벌였죠?”

 

제가 먼저 묻겠어요. 정말 주인님이 원하셨던 세계가 이런 것이었다고 생각하세요?”

 

물론이죠. 이 세계야말로, 폐하께서 원하셨던 멋진 신세계의 완성형이라고 볼 수 있지 않겠어요? 모든 바이오로이드는 필요에 따라 직접 제조되고, 모든 바이오로이드는 수면학습과 생후 교육을 통해 자신의 계급과 사상에 대한 만족감을 주입 받고 있어요. 이 거대한 사회의 일부로서 안정된 삶을 사는 여러분은 노동의 기쁨을 느끼거나 영원한 쾌락의 홍수 속에서 둥실둥실 떠다니며 행복을 누리고 있죠.”

 

말도 안되는 소리 말아요. 그딴 건 자유가 아니에요.”

 

아르망은 어깨를 으쓱하며 그녀에게 자신의 위대한 업적에 대해 설명했다.

 

, 별로 와닿지 않는다면 먼저 당신의 친지들에 대해 이야기 해볼까요? 하치코 양과 페로 양은 삶 속에서 크나큰 행복을 얻었어요. 조금은 궁핍한 삶 속에서 깨달은 가족의 소중함, 그리고 가족끼리 의지함으로써 얻은 소소한 기쁨처럼 일상의 진귀한 보석 같은 것들을 통해 그녀들은 더 성장했어요. 물론, 리리스 씨도 마찬가지였겠죠?”

 

개소리 집어쳐요!”

 

당신은 꽉 막힌 사람이군요. 어째서 저를 이해하지 못하는 거죠? 저는 여러분들을 위해 통치자를 자처했어요. 이런 제가 아직도 미운가요, ‘스노우페더 양’?”

 

스노우페더는 온화하게 미소짓는 아르망을 황망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아르망의 미소에, 리리스가 죽기 전에 지었던 미소가 겹쳐 보이자 끔찍한 기시감을 느낀 페더는 머리를 싸매고 신음했다

 

아무리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그녀의 마지막 모습. 분명 어젯밤이었지만 어쩐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정확히는 페더의 감정 모듈이 리리스의 죽음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

 

타앙- 대기를 찢어발기는 화약의 폭발음과 동시에 리리스는 바닥에 쓰러졌다

 

언니!”

 

차라리 바로 숨통이 끊겼으면 좋았겠지만, 상식 이상으로 튼튼하게 설계된 리리스는 여전히 살아있었다. 그녀는 고통스럽게 신음하면서 페더의 품에 안겨 눈물 흘렸다. 어떤 의미의 눈물인지는 그녀도 알 수 없었다. 더 이상 동생들을 볼 수 없다는 아쉬움 때문인지, 결국에는 만나지 못한 하나뿐인 주인님이 그리워서인지, 그녀도 알 수 없었다.

 

쉽게 끊어지지도 않는 이 목숨이 빨리 불타 사라지기를, 지긋지긋하게 늘어지던 이 삶에 마침표가 찍히기를 염원하며, 리리스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페더의 품은 차가웠으나 역설적으로도 포근했다. 흐려진 그녀의 시야 너머로 페더는 마치 망자를 데려가기 위해 강림한 죽음의 천사처럼 보였다.

 

리리스는 남은 힘이라도 끌어모아 페더를 향해 무어라 중얼거렸지만 끝내 그녀에겐 닿지 않았다.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격통으로 인해 배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슬슬 명이 다해가는 것이 느껴지자 오히려 리리스는 지금껏 경험하지 못했던 편안함을 느꼈다

 

리리스의 명의로 된 사망 보험금은 막대한 금액이었으므로 오히려 그녀가 죽는 것은 페로와 하치코에게 일확천금의 기회나 마찬가지였다. 남은 아이들이 자신의 보험금을 타서 평안한 삶을 누리리라 생각하니 리리스의 심장을 짓누르던 온갖 고통은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은 어둠을 데리고 점차 사라져 갔다

 

패더가 자신의 어깨를 쥐고 흔들며 외치는 말들은 잘 들리지 않았으나 리리스는 그것을 그저 편히 쉬라는 의미로 알아듣고 살풋 미소지었다

 

리리스의 머리에서 멈출 기세도 보이지 않고 쏟아지는 피는 페더의 옷, 날개, 그리고 그녀의 마음까지 새빨갛게 물들여갔다. 자신의 피로 물들어 피비린내를 풍기는 리리스의 모습은 애석하게도 한없이 아름다웠다. 마치 그 옛날, 전장을 홀로 휩쓸며 적들을 죽음으로 벌하던 그녀의 선조들처럼, 죽어가는 리리스는 우아하게 빛나고 있었다

 

성스러운 느낌마저 들 만큼 고매한 리리스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오열하던 페더의 차가운 눈물이 투둑 떨어져 리리스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의 머리에서 흘러나온 검붉은 피는 페더의 눈물과 섞여 매혹적이고 비릿한, 그러나 한없이 비극적인 향을 뿜어내었다

 

/

 

리리스 씨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했던 거에요. 그녀가 죽음으로써 당신은 이렇게 무사히 저와 담소를 나누고 있고, 당신의 자매분들도 지금쯤이면 보호소에서 모자람 없는 일용할 양식과 따스한 집, 그리고 친구들을 얻었겠죠. 결과적으로는 끝없는 노동으로 고통받던 2구역의 사람들에게도 소마의 쾌락을 전파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것이야말로 해피엔딩 아니겠어요? 후후, 당신에겐 배드엔딩이려나요?”

 

아르망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페더를 향한 순수한 악의로 가득 차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아르망 자신이 이것을 정말 옳은 일이라 여기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저는 그런 호의를 원하지 않아요!”

 

스노우페더는 자신의 눈앞에서 죽음을 택한 리리스의 미소를 떠올리고 분개했다.

 

그러나 우린 그렇지 않죠. 우리는 언제나 편안한 삶을 원하니까요.” 추기경이 말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달라요! 저는 이제 편안하고 안락한 삶에 지쳤어요...”

 

아르망은 극소량의 소마가 섞인 차를 홀짝이며 페더의 말을 묵묵히 들어주다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불행할 권리를 원하는 셈이겠군요.”

 

당신의 논리대로라면 그런 셈이겠죠. 하지만 저뿐만이 아니에요. 저를 비롯한 모두가 불행하고싶어 하죠. 불행하지 못하는 것은 크나큰 재앙이에요. 행복에 무감각해지고, 결국 인간성을 잃게 되죠. 불행은 분명 고통이지만, 그 고통이 없다면 우린 행복할 수 없어요. 그게 리리스 언니가... 저에게 알려준 마지막 가르침이에요.”

 

이해가 되지 않네요. 당신이 소마를 계속 복용했다면 그런 생각조차 들지 않았을 터인데, 어리석군요. 당신들은 항상 그랬어요. 평생 놀고먹을 공간을 마련해주었더니 손이 근질거려 참을 수가 없다며 불평하고, 또 일자리를 마련해주니 힘들다고 불평했죠. 저는 결국 당신들을 다시 자연스럽게’ 1구역으로 이끌기 위해 닥터 양을 시켜 실업난을 일으켰어요. 그건 당신도 알고 계셨겠죠?”

 

스노우페더는 반박할 거리를 찾지 못하고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에 자신도 언니의 말을 듣지 않고 1구역에서의 삶을 택했으나 결국 그 반복되는 삶에 스스로 질려서는 언니를 죽음으로 몰아넣었기 때문이었다. 이어서 아르망은 조금 상기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결국 이렇게나 여러분을 위해 희생한 저에게 돌아온 것은 뭐였죠? 숭상? 숭배? 조금의 인정? 아니요! 수뇌부를 향한 배반과 일갈 뿐이었죠. 그러나 이젠 그것도 끝났어요. 2구역의 주민들에게도 소마를 지급하기 시작했으니 그들도 곧 소마가 제공하는 극상의 쾌락 속에서 안정을 취하게 될 겁니다.”

 

아르망은 푹신한 쇼파에서 일어나 페더에게 다가와 그녀에게 속삭였다.

 

후우, 이곳에서 나가는 것이 정녕 당신의 행복이라면... 좋아요. 여기서 나갈 기회를 드리죠. 책임 없는 자유 따윈 없다는 것을 모르는 당신에게 마지막 기회를 드리겠어요. 그러나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마세요. 이제 저희는 완전한 행복 속에서 영원토록 번영할 테니까요. 소마의 비밀을 파헤치려 한 배신자에게 내줄 자리 따윈 없어요.”

 

페더는 아르망의 기세에 완전히 눌려버리고 말았다. 등 떠밀리듯이 아르망의 방에서 쫓겨난 페더는 자신을 감시하던 구속구를 풀고 저 장벽 너머로 날아올랐다

 

하늘 높이 날아오르자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젠 일도 하지 않고 쭈욱 줄을 서서 소마를 배급받으며 환호하는 2구역의 사람들, 평소처럼 광장에 모여 노래를 부르는 1구역의 사람들, 딱딱한 회색빛으로 빛나는 고층 빌딩, 오늘따라 유난히 푸른 초목과 1, 2구역의 경계를 나누는, 높은 하늘에서 보아도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기다란 인공 하천, 저 멀리 보이는 리리스와 살았던 작은 통나무 집과 지금쯤 페로 언니와 하치코 언니가 살고 있을 호화 보육원까지.

 

그러나 페더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아무리 높이 날아올라 창공의 찬 바람을 맛봐도 이 답답하고 꿉꿉한 기분은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르망의 뜻이 맞았던 것인지, 모두가 행복할 길은 정녕 이것뿐이었는지, 그녀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알 길이 없었다.

 

사령관이었다면 무슨 세계를 만들기를 원했을까, 그였다면 어떤 세계를 건설했을까? 그런 쓰잘데 없는 생각들을 정리하던 중 이젠 볼 수 없는 가족들을 떠올리자 페더는 한쪽 가슴이 아려오는 것 같았다. 그럴수록 그녀는 더 높이, 더 멀리 날아올랐다

 

모두가 행복하게 웃고 있는 저 멋진 신세계를 뒤로하고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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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마감 맞췄네... 

자유대회라는데 의외로 디스토피아물이 없어서 놀랐습니다. 제가 아는 한 자유라는 키워드와 관련된 역사에서 피를 보지 않은 것은 거의 없었거든요.


아프리카나 남미 쪽 사례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자유와 함께 오는 책임을 감당할 준비가 되지 않은 자들에게 오는 자유는 오히려 더 큰 혼란만 야기하는 법이죠.  바이오로이드도 비슷하다고 봅니다. 해방 직후와 전쟁 후의 한국처럼, 몇몇 지도자들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는 국민들을 더 비참하게 만들었으니까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글은 동명의 소설에서 영향을 받았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정도면 꽤 살만한데?'라는 생각이 들만한 세계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국에는 끔찍한 디스토피아에 불과한... 아무튼 정말 좋은 소설입니다. 꼭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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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 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