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오르카 - 조금은 달콤쌉쌀한 후일담


완결편 : https://arca.live/b/lastorigin/8191792


 사령관이 정상으로 돌아오고 나서 한 달째. 오르카 호는 평온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서방님. 일어나셨나요?"


 알몸의 용은 사령관의 곁에 옆으로 누워서, 살며시 사령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있었다. 사령관은 조금 추운 듯, 이불을 끌어당기고 그대로 용의 품에 쏙 파고들었다. 따뜻한 용의 온기를 온몸으로 느끼며 피곤한 잠을 취하던 사령관의 눈은 이내 부스스 떠졌다. 용의 향긋한 살 내음을 맡고 있자니, 아랫도리가 뻐근해진 탓이었다. 그걸 눈치챈 용은 싱긋 웃었지만, 최근 피로가 쌓일 대로 쌓인 것을 알고 있기에 자신의 욕망을 우선시해 부딪히지는 않았다. 어디까지나 사령관이 원할 때만. 그것이 좋은 아내의 모습이라 용은 생각했다.


 그 대신, 사령관의 이마에 살며시 입맞춤을 해주고 눈곱을 상냥하게 손가락으로 떼어 내줄 따름이었다. 마치 아기 새처럼 용의 손길을 받아들이던 사령관은 그제야 또렷하게 눈을 뜨고 커다란 두 개의 언덕 너머로 미소를 짓고 있는 용을 보았다.


 "잘 잤어?"

 "네. 벌써 8시랍니다. 아침을 드시겠어요?"

 "응, 든든한 걸로...하아암. 아, 차가운 음료는 빼줘."


 용은 사령관의 말에 손가락을 뻗어, 침대 옆 서랍 위에 놓여있는 태블릿을 우아하게 두들겼다. 영국식 아침 식사. 차는 따뜻하게. 신호를 받은 소완이 아침 식사를 준비할 것이다. 완벽을 기하며 영양 균형까지 신경 쓸 테니 20분 정도 여유 시간은 있을 터다. 그 시간 동안 사령관의 꼼지락거리는 모습을 보며 시간을 보내려던 용은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어머, 하는 소리를 내며 미소를 지었다. 사령관의 작디작은 팔이 용의 몸을 꼭 끌어안고, 그의 얼굴이 그녀의 가슴께로 움직여 키스 마크를 새겼기 때문이다.


 "...20분만이에요?"

 "응."


 20분 후. 용은 유난히 붉어진 얼굴로 몸가짐을 똑바로 했다. 흘러내리면 아까운데. 그녀는 자신의 배를 살짝 쓰다듬으면서 나른해진 사령관의 몸을 깨끗하게 물수건으로 닦고 가운을 입혀주었다. 그녀도 아니고 사령관이라면 알몸으로 돌아다녀도 문제가 없겠지만, 그래도 체통이란 게 있는 법이다. 멋진 남편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그녀의 체면이 깎여버릴 터이니. 안 그래도 그녀의 정실 부인 자리를 노리고 갈고 닦는 만만찮은 경쟁자들이 많이 보였다.


 평소와 다른 나긋나긋한 말투로 사령관에게 어필하는 것은 그러한 이유이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다소 엄격하고 단단한 모습을 보이지만, 사령관의 앞에서는 부드럽고 나긋한 모습을 보인다. 이 갭이 용의 매력을 한층 더 돋보이게 하여줄 것이 분명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용은 그만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서로 이어주는 인연이 있었다고는 하나, 이 정도까지 깊게 그녀가 빠져들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게임 속의 기억은 절대적인 게 아니다. 비록 사령관이 게임 속에서 용을 무척이나 아끼고 잘 대해주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만나 대하는 건 또 다른 문제다. 하지만 용은 사령관에게 단 일주일 만에 빠져들고 말았고, 다른 이에게 뺏기고 싶지 않다는 사적인 욕망까지 품고 말았다. 무인의 길을 걷고자 마음먹었던 용에게는 생소하고 또 신기한 경험이었다.


 "음식을 내왔습니다."


 바닐라와 콘스탄챠의 목소리가 들렸고, 용은 입실을 허가했다. 사령관의 침실에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건 용만이 가진 특권이었다. 탈론페더조차 이곳에 시크릿 포인트를 뒀다가는 목이 달아날 각오를 해야 했으니, 용의 어깨는 절로 으쓱해졌다.


 "오늘도 피곤해 보이시옵니다, 주인님."

 "아, 소완. 매일 준비하느라 수고가 많은 것 같네."

 "아니옵니다. 주인님을 위해 준비하는 것은 소첩의 기쁨이옵니다."


 그렇게 말한 소완은 용을 은근슬쩍 흘겨보았다. 용은 그런 소완의 시선을 대범하게 흘러넘기며 사령관과 같은 색의 가운을 자랑하며 슬쩍 사령관의 어깨에 자신의 팔을 올렸다. 소완의 눈매가 가늘어지고 바닐라와 콘스탄챠가 본능적으로 방어를 위해 몸을 움찔거렸지만, 그래도 그 이상 행동하지는 않았다. 세 바이오로이드가 사령관을 저격하고 나서는 이제 같은 바이오로이드조차 믿을 수 없다며 경호 인력들이 예민해진 결과물이었다. 그나마 용은 사령관이 직접 지목해 자신의 전언을 전할 이로 정했으니 다행이지만, 레오나, 칸, 홍련은 사령관의 앞에 얼굴조차 못 내밀 정도로 경계 받고 있었다.


 그나마 용이 매번 작전 회의 때마다 불러주고 있기에 망정이지, 그조차 아니었다면 그들은 나중에 사령관이 '그런 애들이 있었나?'하고 되물을 정도로 존재감이 희미해졌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반대로 사령관을 직접 보필한 리리스, 라비아타, 배틀 메이드, 컴패니언, 메이, 둠 브링어, 스카이나이츠는 주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었다. 덕분에 슬레이프니르의 아이돌 프로젝트가 대성황을 이루고 있으니 인생사는 참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 먹을까. 너희는 먹었어?"

 "예. 소첩과 이 아이들은 이미 했사옵니다. 그러니 부담 갖지 말고 드시옵소서."

 "그러면..."


 사령관은 소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선 식사를 시작했다. 푸짐하다 못해 언덕처럼 쌓인 고기의 접시. 아무리 소완의 요리라고 해도 보기만 하는 것으로 질릴 정도였지만 사령관은 꾹 참고서 꾸역꾸역 먹기 시작했다. 본래 그의 입맛은 한국식으로 밥 먹고 풀 뜯어 먹다가 고기도 좀 먹는 그런 입맛이었다. 하지만 한 달간 기절하고 나서, 그동안 쌓여온 수많은 일거리를 밤낮없이 처리하다 보니 풀떼기만 먹고서는 도저히 몸이 버티질 못하고 있었다. 덕분에 그는 팔자에도 없이 고기, 고기, 고기만 먹으면서 속을 기름기로 채워나가고 있었다.


 "서방님. 이것도 좀 드셔 보시지요."

 "응, 고마워."


 용은 일부러 사령관과 다른 산뜻한 식단을 골라 조금씩 자신의 몫을 사령관에게 떼어내 주며 알콩달콩한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다.


 "아, 그리고 차도 있습니다. 드시지요."

 "음."


 무적의 용이 건넨 차를 보며 사령관은 반가운 기색을 드러냈다. 사령관은 자그마한 손으로 컵을 양손으로 들어 올리며 호록, 하고 차를 들이켰다.


 "단맛이 강하네."

 "어린아이의 몸이니까요. 쓴맛은 민감하게 느끼시는 듯해서 꿀을 좀 더 넣었습니다."


 소소한 배려에 사령관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사실 그런 미소와 달리 사령관의 속내는 용의 호의를 살짝 부담스럽게 느끼는 것도 있었다. 자신이 잘해준 거라고는 게임하다가 반지 끼워주고 애지중지 아껴준 것밖에 없건만, 무한한 호의를 받고 있으니 얼떨떨한 것이다. 물론 철충을 구축하고, 문명을 재건하기 위해 인간의 존재가 필수불가결이며 자신이 그 자리에 가장 적합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고 하여도, 그런 이해타산을 떠나 보내오는 호의에는 아무래도 사령관도 양심이 쿡쿡 찔릴 수밖에 없었다.


 "아, 그리고 용도 너무 무리하지 말고 쉬어도 돼."

 "제가 곁에 있고 싶어서 그렇습니다만, 폐였는지요?"


 슬쩍 말을 돌려서 곁에서 조금 내보내려 해도 돌아오는 것은 용의 글썽거리는 눈망울이었으니 사령관의 양심 회로는 타버리다 못해 활활 녹아내릴 지경이었다. 선생님, 양심이 너무 아파요. 오토런으로 맨날 마무좌만 돌렸단 말이에요. 만약에 문명 재건에도 노동법이 적용되었다면, 사령관은 가석방없는 종신형에 필적하는 형벌을 받았을 것이 분명한 가혹한 노동행위였다. 심지어 구형 폰을 안 버리고 넣어서 매일 집에서 24시간 오토를 돌렸단 말을 듣는다면 변호사조차 변호를 포기할 게 분명했다.


 "아, 아냐. 괜찮아. 전혀 문제 될 거 없어."


 네가 괜찮다면 괜찮은 거겠지. 사령관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그마한 몸으로 차를 모두 마신 뒤, 소완과 메이드들을 물렸다. 계속 붙들고 있는 것도 미안했고, 소완과 용이 기 싸움을 벌이는 게 불편하다는 이유도 있었다. 그렇게 사람들을 물리고 나니 닥쳐온 일거리에 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이제 다시 일할 시간인가."

 "어제 자로 밀린 업무는 다 끝나셨으니, 오늘은 쉬세요."

 "그래도..."

 "정 그러시다면 오늘은 시찰을 도시는 게 어떨까요?"


 시찰이라. 사령관은 한 번 슬슬 자신의 눈으로 상태를 확인해볼 필요는 있다고 느꼈다.


 "좋아, 그럼 옷 갈아입고 가자."

 "예, 준비해 드릴게요."


 사령관은 기지개를 쭉 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행히 의자에서 내려오는 것까지 용의 도움은 받지 않았기에 사령관의 얄팍한 자존심은 지켜질 수 있었다. 고작해야 메이보다 1cm 더 클 뿐이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용은 사령관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자연스럽게 옷장에서 옷을 꺼내 그에게 입혔고, 그녀 역시 갈아입은 뒤 그의 바로 오른쪽 뒤에 섰다. 마치 거기가 자신이 있어야 할 당연한 장소인 것처럼. 그러나 사령관도 요 한 달 동안 그럭저럭 익숙해져 있었기에 막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가 침실 밖으로 나서자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LRL과 코코, 더치걸이 달려들었다.


 "권속이여!"

 "LRL, 코코, 더치걸. 잠깐-"

 "괜찮아. 얘들아, 내가 잠수함 내에서는 너무 뛰어다니면 안 된다고 했지?"


 세 아이들은 조곤조곤 말하는 사령관의 말에 확 달려드는 걸 멈추고 사령관의 앞에 얌전히 서서 양팔을 확 벌렸다. 그리고 사령관은 그런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뒤 한 명씩 따스하게 안아주었다.


 "오늘도 무사하구나..."

 "괜찮다니까 그러네. 걱정이 참 많아."


 어지간히 트라우마로 남았던 모양인지, 아이들은 그의 몸을 꼭 끌어안고 살아있다는 걸 확신한 뒤에야 사령관을 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사령관이 잠깐 밖에 나갔다가 왔더니 갑자기 몸에 바람구멍이 나서 피투성이가 되어 왔는데 트라우마로 남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 될 것이다. 실제로도 가끔 몇몇 바이오로이드는 밤일을 떠나서 그저 사령관이 무사히 살아있는 걸 확인하고 싶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령관의 침실에 CCTV를 설치해야겠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기도 했었다.


 사령관이 옆에 용을 둘 테니까 안심하라고 하지 않았다면 정말로 실행했을 것이다. 사령관으로서는 본인의 사생활이 적나라하게 까발려지는 꼴을 차마 볼 수 없었던 탓이지만, 그만큼 바이오로이드의 마음속에 새겨진 상처는 깊었다. 그리고 사령관의 생존을 확인한 아이들이 물러나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경호대원들이 들이닥쳤다.


 "사령관님."

 "알아. 알아...."


 안 그래도 자그맣게 변한 몸이라, 컴패니언 대원을 비롯한 바이오로이드의 걱정은 마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밥 먹다가 실수로 물컵 하나 떨어뜨렸다고 완전무장한 팬텀과 레이스가 은신을 풀고 나타나 사방을 경계했을 정도였으니, 사령관의 스트레스는 하늘을 뚫다 못해 정지궤도를 돌파할 정도였다.


 그나마 하치코나 페로는 애완동물 같은 느낌이 들어서 같이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기라도 했기에 다행이었다. 그조차 아니었다면 스트레스가 터진 사령관이 다시 드러눕는 끔찍한 사태가 발생했을지도 몰랐다. 그걸 아는지, 최근 들어서 리리스가 다프네와 사령관의 정신면을 고려한 경호 계획을 짜느라 머리카락이 우수수 빠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 오곤 했다. 미안, 리리스. 사령관은 속으로 그렇게 사과를 하면서도 일상생활도 못할 정도의 밀착 경호는 지긋지긋했기에 리리스를 말리지는 않았다.


 "그럼 어디부터 돌아볼까..."

 "식당은 지금 쉬고 있을 테니 나중에 돌아보고, 휴게실에 한 번 가보는 게 어떻겠소?"


 애들끼리 노는 데 방해하는 건 아니려나. 그는 잠깐 고민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간다는 건 비밀로 해줘."

 "물론이오."


 그리고 당연하게도 비밀은 비밀이 아니었다. 그가 휴게실에 도착하자 각 잡힌 상태로 대기하고 있는 스틸라인 병사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또 탈론페더인가. 탈론페더는 칸이 소외당하는 이 상황을 어떻게든 타개해보겠다고 온갖 방면으로 일을 벌이고 있었다. 대부분 그렇게 나쁜 일은 아니긴 했지만, 사령관으로서는 제법 부담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래도 발키리에 비하면 훨씬 낫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발키리는 몇 번이나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시도했으니까.


 제정신을 되찾고 나서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깨달은 발키리는 속죄를 위해, 그리고 레오나와 자신의 동료를 위해 몇 번이고 목숨을 끊으려 했었다. 사령관이 깨어나기 전, 성공 직전까지 간 것이 16회, 발각 미수된 것이 58회. 사령관이 깨어난 뒤에는 각 5회, 12회라는 기록적인 수치를 알리고 있었다. 사령관이 명령으로 중단하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아마 언젠가는 자매들의 눈을 피해 기어코 성공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나마 카멜의 경우는 칸이 카리스마로 강하게 억누르고 있었고, 미호는 놀랍게도 스틸 드라코가 멘탈 케어를 해주고 있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용의 표정은 마치 오크가 발레리나가 되어 물 위에서 탭댄스를 추고 있다는 말을 들은 사람과 같았다. 물론 다른 바이오로이드도 그게 사실이냐고 먼저 되묻는 일이 있었을 정도로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그러나 스틸 드라코의 바보 같을 정도의 순수함과 활달함이 미호에게 많은 힘이 되고 있다는 걸 직접 보고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가곤 했다.


 "다들 편히 쉬어. 내가 있다고 눈치 보지 말고."


 사령관은 그런 옛일들을 떠올리며 바이오로이드들에게 말했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 이는 없었다. 물론 사령관이 진심으로 저렇게 말했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혔거나, 혹은 자신의 부대가 저지른 일에 부담을 느꼈거나, 그것도 아니면 단순히 상급자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불편함을 느끼는 이들은 많았다.


 브라우니만 빼고.


 "그럼 쉬겠슴다?"

 "너는-"

 "브라우니 8792입니다!"


 8792? 사령관은 자신의 머릿속 기억을 뒤졌다. 아, 그 8792?


 "건강하게 지내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

 "전부 사령관 덕분이지 말임다! 사령관님 덕에 튀긴 양파랑 스팸도 실컷 먹었지 말임다!"


 사령관은 브라우니의 뒤에서 필사적으로 옷깃을 잡아당기는 레프리콘을 봤지만 애써 웃음을 참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상황을 눈치챈 용도 쿡쿡 웃음을 터뜨리긴 했지만, 사령관과 브라우니를 말리려 들진 않았다.


 "아, 그렇지. 사령관님! 상추가 훌륭하게 자랐는데 나중에 삼겹살 파티하시는 거 어떻슴까? 냉동 삼겹살 창고를 찾았지 말임다!"

 "오, 그거 좋네. 어느 정도 규모지?"

 "엄청 커다란 창고였지 말임다! 근데 주변에 철충이 있어서 안에 확인은 못 했다는 거지 말임다..."

 "용, 나중에 그쪽으로 정찰 계획을 좀 잡아줄 수 있어?"

 "예. 알겠습니다. 브라우니 8792. 나중에 보고서를 써서 제출하세요. 뒤에 있는 레프리콘 상병의 도움을 받아도 좋습니다."

 "알겠지 말입니다!"


 브라우니 8792는 힘차게 대답했고, 레프리콘은 아예 입에 거품을 물고 그대로 졸도해버렸다. 이런이런. 사령관은 쓴웃음을 지었지만, 그래도 브라우니의 행동을 말릴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극상을 벌이는 것도 아니고, 긍정적인 의견을 제시해주는 데 굳이 이걸 막을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딱딱하게 굳은 분위기를 잘 풀어준 일등공신인 만큼 더더욱.


 "그나저나 요새 스틸라인 온라인이라는 게임이 유행한다던데-"

 "아, 사령관님도 그거 해보셨슴까?"

 "유감스럽지만, 시간이 없어서 못해봤지."


 사령관은 진심으로 유감이라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덕분에 그는 유미가 만들어준 메신저 아이디도 한 번도 접속을 못 해보고 있었다. 물론 메신저를 켜는 순간 폭주하는 메시지의 홍수에 파묻힐 것을 걱정한 것도 있지만, 솔직히 말해 여가에 쓸 시간은 조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전 사령관이 저지른 그 파멸적인 스노우볼링을 간신히 처리할 만한 수준으로 억눌렀더니, 곧바로 그가 드러누워 버리는 바람에 파멸의 나팔이 울려 퍼졌기 때문이다. 보급물품 같은 것은 각 부대장이 재량껏 처리한다고 해도 철충은 이야기가 달랐다. 바이오로이드는 여전히 철충을 인간으로 인식했고, 그때마다 사령관이 강하게 명령을 내리지 않는다면 저항조차 힘들었다. 철충을 철충이라고 인식하더라도, 효율은 인간이 직접 명령을 내릴 때의 반의반 수준으로 뚝 떨어지고, 대부분 회피나 방어로 일관하곤 했으니 문제였다.


 그리고 철충은 갑작스러운 이상 사태를 눈치채지 못할 만큼 멍청이가 아니었고, 그 덕분에 오르카 호는 철충의 파상공세에 맞서 기적적인 버티기를 1달 가까이 펼치고 있었다. 사령관이 알아본 바로는 아직 세레스티아는 찾아내지도 못했기에 그는 일단 챙길 수 있는 물자는 최대한 챙기고 나머지는 소각한 후, 빠르게 괌 지역으로 이동할 것을 며칠 전에 명령했다. 이미 대부분 거점은 너무 소모되었으니, 지킬 이유가 없었던 탓이다.


 다만 무적의 용이 세레스티아보다 먼저 합류한 부분 때문에 시간 순서가 꽤 이상하게 꼬이긴 했지만, 애초에 전 사령관부터가 이상함의 극치였으니 그는 불평하기보다는 차라리 세레스티아는 온존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었다. 레모네이드가 수작을 부렸을 가능성이 9할 이상이니, 처음부터 전력으로 밀어붙여야겠지만 말이다.


 "다음번에 저랑 꼭 같이 해보시지 말입니다!"

 "그래, 시간이 되면. 그럼 난 신경 쓰지 말고 재밌게 놀도록."

 "예!"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사령관은 자리를 비웠고, 휴게실을 떠나자마자 그는 용과 상담했다.


 "지금 휴게실에 없던 부대가 누구지?"

 "몽구스 팀과 앵거 오브 호드,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였소."

 "여전히 신경 쓰고 있나..."


 대부분의 인원이 한 명, 혹은 두 명 정도까지는 모여서 놀고 있던 휴게실이었다. 심지어 24시간 가까이 주방에서 일하고 있는 애니웨어 시리즈인 포티아도 비번인 인원은 나와서 편하게 쉬고 있던 광경을 보았다. 게다가 지금은 괌으로 이동하기 위해 모든 인원이 함선에 탑승한 상황이다. 보이지 않는다는 건, 오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디부터 둘러볼까."

 "몽구스 팀은 그래도 잘 회복하고 있소. 홍련 양이 의외로 PTSD 환자를 다루는 데 익숙하더군.."

 "별로 좋은 기억은 아니었을 거야."


 사령관의 말에 용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몽구스 팀이 과거 북한 지역에서 행했던 실전 훈련에 대해서는 용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 우선 호드부터 가볼까."

 "주인님. 위험할지도 몰라요."


 그러자 리리스가 곧바로 조언을 올렸다. 숨어있던 팬텀과 레이스 역시 마찬가지라는 반응이었다. 하치코와 페로, 펜리르에 이르러서는 아예 이를 드러내며 아직 만나지도 않은 두 사람에 대한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특히 하치코는 정말 진심으로 화가 난 듯한 표정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아마 눈앞에 있었다면 당장 방패로 상대를 후려치다 못해 핑크색 죽으로 만들어버릴 정도로 말이다. 사령관은 그런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달랬고, 그러자 하치코와 페로, 펜리르는 화를 내다가도 곧 그의 손길에 응석 부리며 화를 살짝 누그러뜨렸다.


 "언제까지고 그 아이들이 고통받게 할 순 없잖아."

 "흠. 솔직히 돌발 상황을 대비해 미리 대처 정도는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오만..."

 "거기까지 말리진 않을게."

 "그럼 제가 미리 가서 작업하고 올게요. 바닐라, 콘스탄챠. 따라와 주세요."


 리리스가 먼저 앞장을 섰고, 사령관은 리리스가 돌아올 때까지 잠시 용의 품에 안겨서 쉬기로 했다.


 "내가 가서 말 거는 게 잘하는 건지 모르겠네."

 "피해자에게 용서를 받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 생각하오."

 "괜히 트라우마만 자극해서 더 아프게 하는 건 아닐까?"


 사령관의 말에 용은 부드럽게 자신의 반려자를 안아주었다. 바이오로이드는 커녕 인간 여성의 힘으로도 안아 들 수 있을 정도로 작아진 그녀의 반려자였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의 심성과 마음이었다. 용은 안아 올린 사령관의 입술에 부드럽게 키스해주며 말했다.


 "그대의 그런 마음이 그들에게는 무엇보다 따뜻한 약이 될 것이라 믿소."

 "그럴까?"

 "틀림없소. 내가 선택한 반려를 내가 믿지 못하면 누가 믿겠소이까?"


 용의 말에 사령관은 살풋 웃음을 지었다.


 "고마워, □□."

 "천만의 말씀."


 용 역시, 얼굴에는 예쁜 해바라기 꽃이 피었다. 오직 한 사람만이 볼 수 있고, 한 사람을 바라보는 해바라기 꽃이.



---


아, 더 쓰기 귀찮다. 2부 이벤트 기념으로 좀 써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