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S주의 


*주인공에 한해서 노맨스 물임.


1화 https://arca.live/b/lastorigin/89117030


꿈을 꾸었다

 

한 남성과 여성의 손을 잡고 나들이 하는 내용의 꿈을.

 

얼굴은 보이지 않아도 그 남성과 여성이 내 부모님이라는 건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그래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런 적도 있던 것 같았다

 

언제였는지 기억도 제대로 나지 않는 아주 어렸을 적부모님들과 함께 가족끼리 어디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곳으로 가 햇빛이 잘 드는 곳을 찾아 푸른 잔디 위에 돗자리를 펼치고선 직접 싸온 도시락을 먹으며 즐겁게 이야기했지

 

관광지에 대한 이야기도 했었고또 싸온 도시락이 맛있다는 이야기도 했던 것 같다.

 

그게 여름이었던가봄이었던가먹었던 게 뭐였지김밥유부초밥

 

자세한 내용까지는 생각이 나지 않지만 한 때 소풍을 간 적이 있다는 건 제대로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이게 꿈이라는 게 더 슬픈 사실인 거겠지

 

이 모든 것이 깨어나면 전부 잊어버릴 꿈이라는 것도 허무하고깨어났을 때 날 기다리는 게 칙칙한 회색방에 갇힌 채 이상한 실험을 당하는 현실이라는 것도 슬프지만 더욱 더 슬픈 건 꿈속에서도 부모님의 얼굴이 도저히 기억이 나지 않는 다는 거겠지

 

분명 존재한다는 것도 기억하고 함께 한 추억마저도 떠올릴 수 있지만 떠올리지 못하는 얼굴만큼 전부 희미한 윤곽들 뿐구체적인 건 도저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과연 난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그 전에 난 과연 한번 죽은 게 맞는 걸까전생이란 것이 정말 존재했던 걸까?

 

사실은 이 모든 게 방 안에 갇힌 내가 만들어낸 머릿속 망상이 아닐까?

 

이제는 뭐가 뭔지도 모르겠다

 

내가 누구였는지그리고 여긴 어디인지내가 왜 갇혀 있는지갇힌지는 얼마나 지났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단 한 가지 알 수 있는 건 이제는 일어나야 할 시간이라는 것이다

 

곧 천장위에 달려있는 스피커에서 사이렌이 울리고눈을 뜨자마자 회색 천장이 날 반겨주겠지

 

그리고 영문 모를 실험이 시작되던가아니면 천장에서 흘러나온 가스를 처먹고 또 잠이나 잘 것이다

 

 

-IP-0. 이제 일어날 시간이다자리에서 일어나도록.-

 

 

아니나 다를까눈을 뜨자마자 회색 벽에 달린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는 연구원의 목소리가 단잠을 깨운다

 

유리벽 너머로 느껴지는 연구원들의 저 훑어보는 듯한 시선이 불쾌하기 짝이 없지만 사각지대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 방안에서 저 시선들을 피할 수는 없다

 

화장실에서 볼일을 봐도샤워실에 들어가 샤워를 할 때도 따라붙는 저 시선들은 끊임없이 따라 붙겠지

 

이 쯤 되면 날 여기 가둬둔 목적이 연구원들이 아니라 관음증을 해소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의심될 지경이다

 

어쨌든 더 이상 자고 싶어도 도저히 잠이 안오는 마당에 계속 누워있을 수는 없는 법게다가 누워있는 자리가 타인의 시선에 노출된 자리라면 잠을 자고 싶어도 도저히 잘 수 없다

 

얌전히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작대기들이 새겨진 회색 벽 위에 새로운 작대기를 추가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시계도 없고달력도 없어서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알 수 없는 이 곳에서 얼마나 있었는지 어림짐작이라도 해 보려면 이렇게 작대기를 긋는 수밖에 없으니까.

 

그래도 구체적으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를 제외한다면 유리벽만 바라봐도 현재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한 어느 정도의 정보는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내게 어떤 짓거리를 했는지도.

 

여기가 외부와 완전히 격리되어있는 공간이라곤 하지만 전과 비교해 말도 안 될 정도로 향상된 신체능력은 이렇게 앉은 자리에서도 유리벽 너머로 보이는 연구원들의 입의 움직임만으로도 대략 어떤 말을 하는지 유추할 수 있도록 만들어줬으니까.

 

비록 전체적인 대화는 알아듣지 못해도 그들의 대화를 통해 어느 정도 모은 조각을 맞춰보자면 여기는 삼안이라는 회사의 연구시설이고 저기 마이크를 잡고 날 관찰하는 늙은이가 여기에서 가장 높은 분이고난 그가 만들어낸 바이오로이드라는 것 같다

 

살아 있을 때는 이름도 듣지 못한 삼안이라느니전쟁이라느니 하는건 그닥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내가 바이오로이드라는 것이 되 버렸다는 점이지

 

어쩐지 산 사람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실험을 하나 싶더니 날 사람이 아닌 인조인간으로 만든 모양이다실제로 그들의 취급도 실험용 모르모트라기보단 상품 진열대에 올리기 전 테스트룸에 들어간 전자제품 비스무리하고.

 

인조인간치고는 몸이 기계가 되었다는 자각도 없고바이오로이드가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끝에 로이드가 들어갔으니 안드로이드 비슷한 거겠지

 

맨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때는 창문을 향해 침대도 집어던지고책상으로 내리찍어도 봤지만어떤 구조로 되어있는지는 몰라도 저 유리벽에는 기스하나 나지 않는다

 

유리창을 깨고 탈출하기는커녕반항적인 태도를 보인다고 천장에서 나오는 수면가스를 처먹고 잠이나 푹 잤지

 

그 짓거리를 한 10번 넘게 하자문득 궁금한 점이 하나 생겼다

 

왜 하필이면 나지?

 

삼안이라는 기업이 얼마나 거대한 기업인지는 잘 모르지만 이런 거대한 연구시설을 갖춰놓은 것 하며틈틈이 자본이라는 말을 꺼내는 입술들을 살펴보자면 날 깨우는데 꽤나 돈이 깨진 모양이다

 

구체적으로 지금이 몇 년도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살아있었을 적 듣도 보도 못한 기업들과 용어그리고 기술들이 나오는 걸 봐서는 내가 죽었을 때부터 훨씬 더 시간이 지난 시점인 것 같은데 왜 굳이 날 다시 깨웠을까?

 

굳이 생각해보면 저 자들이 날 다시 살릴 이유는 하등 없다

 

지체 높은 집의 자제도 아니었고그렇다고 해서 티비에 나오는 영재들 마냥 특출난 머리를 지닌 것도운동신경이 뛰어난 것도 아니었다

 

평범한 가정집에서 자란 평범한 사람이었을 뿐

 

삼안이라는 기업에 소속된 최고의 기술자라는 사람들이 엄청난 자본을 쏟아부어가며 살릴만큼의 메리트가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마이클 잭슨같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을 살리지왜 나 같은 일반 소시민을 되살렸는지는 모르지만 성별이 뒤바뀐 채 인조인간 비스무리한 몸으로 되살아난 게 결코 좋지 않다는 건 잘 알겠다

 

바깥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그리고 왜 많고 많은 죽은 사람들 중 하필이면 난지그리고 내 몸에 정확히 어떤 짓을 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는 직접 저들과 대화하는 수밖에 없는데 날 물건 그 이상으로 보지 않는 저 연구원들은 내가 어떤 질문을 해도 대답해주지 않는다

 

대화를 나눌 때는 오직 지시를 내릴 때와 그 지시를 이행한 나를 두고 평가할 때 뿐

 

하긴내가 물건이라고 가정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나 같아도 집에 멀쩡히 돌아가고 있던 전자렌지가 어느 날 갑자기 말을 걸어오면 대화하는 대신악마 들린 물건이라고 소리치며 야구방망이를 휘둘렀을테니까

 

하지만 난 단순한 물건과는 다르다

 

엄연히 죽기 직전까지 삶을 살아오던 기억을 가진 채 지금도 숨 쉬며 살아있는 인간이란 말이다

 

도저히 대화가 통하지 않는 녀석들에게 화가 나 물건을 집어던져 봐도 여기 있는 물건들로는 도저히 저 유리벽을 부술 수 없다는 사실은 몇 번씩이나 해본 내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다.

 

운이 좋다면 어제처럼 단순히 수면가스를 처먹고 깊게 잠드는 선에서 끝나겠지만 운이 나쁘다면 지난주처럼 가스에 마취된 채 어딘가로 끌려가 실험대에 올려진 채 주사기로 온 몸이 쑤셔지겠지

 

멀리서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면 남은 방법은 저들 중 하나와 직접 가까이서 만나 대화를 나누는 건데저들도 내가 이를 박박 갈고 있다는 걸 아는 모양인지 내가 깨어있을때는 절대로 이 방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눈을 속이려고 해도 천장에 수없이 달린 기계들을 피할 순 없는 노릇이고수상한 짓을 했다간 지금 이 순간도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저 늙은이가 버튼을 눌러 내게 가스를 먹이겠지

 

게다가 늙은이 뒤에 서 있는 은발의 소녀도 문제다

 

대체 왜인지는 모르지만 나와 거의 비슷하게 생긴 그녀는 가녀리게 생긴 인상과는 달리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오한이 떨린다

 

이렇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쉽게 이길 수 없는 상대라고 생각이 들 정도니 직접 맞서면 어떨지는 안 봐도 뻔하다

 

그러면 남은 놈은 옆에서 쓸데없이 목청만 높이는 저 한 놈 뿐인데

 

 

-IP-0. 들리나? IP-0!-

 

들린다들려귀 안 먹었으니 목소리 좀 줄여.”

 

-여전히 반항적인 태도로군, IP-0. 그렇게 행동하다간 손해라는 걸 잘 알고 있을텐데?-

 

 

이런걸 보고 호가호위라고 해야 하나?

 

가장 높은 직속에 있는 연구소장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는데 가장 계급이 낮은 연구원이 목청을 높이네

 

저 녀석이 왜 저러는지는 내가 살았던 시대의 회사에 대입해보면 이해가 얼추 된다

 

그느 이제 막 회사에 입사해 성과를 내야하는 신입

 

새로운 프로젝트에 참여해 성과를 세워 올라갈 기회를 겨우 잡았건만 그 프로젝트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

 

나이 먹을 만큼 먹은 연구소장은 이미 올라갈 수 있는 한계까지 올라가서 더 이상 출세욕 같은 게 없이 차분히 진행할 수 있고프로젝트의 성과가 보이지 않아도 그 동안 회사에 바친 헌신이 있어서 그렇게 큰 처벌을 받진 않겠지만 이제 막 프로젝트에 참여한 신입은 다르지

 

어떻게 해서든 성과를 내고무슨 수를 써서라도 결과를 내야 하건만 실험체라는 녀석은 매일 비협조적으로 나오는 것도 모자라 지랄 발광을 하며상사라는 놈은 껄껄 웃으며 느긋하게만 행동하니 당연히 똥줄이 탈 것이다

 

지금도 봐라

 

할 수만 있다면 내 배를 갈라다가 뽑아 먹을 수 있는걸 전부 뽑아먹고 상부에 제출하고야 말겠다는 저 야심찬 눈빛을

 

그래이용하려면 저 녀석이 딱이다

 

지금도 비협조적으로 나오는 날 보고 안달이 나 발을 동동 구르는 녀석이야말로 내가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열쇠이자

 

수면가스에 취해 잠든 때가 아닌 때 녀석을 어떻게든 이 곳까지 내려오게 만든 다음녀석을 붙잡아 뭐라도 해야 한다

 

하지만 어떤 수로 녀석을 내려오게 만들지

 

성질이라도 긁어야 하나아니면 같잖은 유혹이라도 해야 하나?

 

저렇게 똥줄이 타는 모습을 보여줘도 녀석은 엄연한 연구원결코 멍청하지만은 않은 녀석일텐데.

 

게다가 여태껏 자리를 비우는 꼴을 못 본 저 늙은이도 문제다

 

한 번도 자리를 비운 적이 없는 늙은이가 자리를 비움과 동시에 연구원 녀석이 내려와야 하는 아찔한 상황

 

그래도 일단 기회는 엿봐야겠지

 

그 때까지는 녀석의 인내심을 살살 긁으며 평정심을 흔드는 수밖에.

 

 

-IP-0!-

 

시끄러워그렇게 목소리 높이지 않아도 다 들린다니까어차피 이 다음에도 실험할 거잖아할 거면 어서 해.”

 

-그렇게 원한다면 해 주지오늘은 네 몸속에 학습모듈을 집어넣고 반응을 관찰할 것이다.-

 

 

하필이면 모듈 삽입이냐

 

녀석들 입장에서는 실험대에 묶어놓고 칩만 넣으면 되겠지만 당하는 실험체 입장에선 주사기에 찔리는 것 다음으로 엄청 고통스럽다

 

몸에서는 스파크가 이는 듯 찌릿거리고평생 알지도 못했던 새로운 지식들이 갑자기 삽입 돼 억지로 비집고 들어오는 머릿속은 터질듯이 아픈게 바로 모듈삽입이다

 

 

알았어그런데 마취는 해 주는 거겠지?”

 

-마취를 바랬으면 비협조적으로 나오지 말았어야지.-

 

 

그런 식으로 나온다 이거지나중에 두고 보자어디 한번 나한테 잡혔을 때도 그렇게 턱 빳빳하게 들고 자신만만하게 웃을 수 있는지 한번 지켜보자고

 

이를 부득부득 갈아봐도 지금 내가 녀석에게 당장 할 수 있는 건 없다

 

사이렌이 울리며 살포된 가스가 폐부로 완전히 스며들면 자연스레 정신을 잃게 되겠고다음에 눈을 뜰 때는 사지가 구속된 채 실험대에 눕혀져 있겠지

 

지금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얌전히 옛날의 기억을 곱씹으며 그저 언제 올 지 모를 기회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