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그럭거리는 소리로 분주한 주방과 빠르게 익어가며 지글지글거리는 맛난 소음을 방출하는 수많은 요리, 구슬땀을 소매로 닦아낼 새도 없이 얼마 남지 않은 연회를 위해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는 요리사들의 발걸음 소리는 곧 성대한 파티가 열릴 것을 예고하듯이 일사분란해져 갔다.

 

에피타이저, 메인디쉬, 디저트, 와인. 각각의 테마에 맞는 수많은 음식들이 질서정연하게 플레이팅 되고, 힘들게 구한 칠면조가 이글이글 불타는 오븐 속에서 맛깔난 갈색으로 익어갔으며, 엔진실의 와인 보관함에서 완전히 숙성된 검은 장미가 연상되는 시큼한 향의 포도주는 죽음을 연상시킬 만큼 진한 자주빛을 띄었다

 

이 모든 것은 오직 한 명, 과거에 21번 부대, 즉 21 스쿼드에서 호위대장을 맡았던 리리스를 위한 것이었다

 

사령관이 리리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은 우연한 계기였다. 총통이었던 라비아타가 본거지인 잠수함 오르카에 합류한 이후, 사령관을 위협한 대가로 좁은 방에 스스로를 가두고 근신 처분을 자처한 그녀는 사령관과 대화조차 거부했었다

 

다만 시간이 흘러 마음의 문을 연 그녀는 얼마 전, 사령관과 깊은 대화를 나누었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그를 구출하기까지의 과정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었으며 라비아타는 그 과정에서 리리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게 되었다.

 

사령관은 지금까지도 자신이 구출된 과정과 그 과정에서 발생한 희생들에 대하여 들은 바가 전혀 없었으므로 라비아타에게 들은 모든 것들은 그에게 충격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었으나 그중에서도 가장 깊게 뇌리에 박힌 이야기는 바로 리리스에 관한 것이었다

 

수많은 철충들에게 포위당한 21 스쿼드, 다른 이들을 먼저 보내고 홀로 남아 그들을 상대한 리리스의 영웅담은 그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다

 

그날로 사령관은 즉시 그녀를 찾아 구해낼 것을 명령했다. 살아있을 것이라는 확신도 근거도 없었으나 그는 홀린 듯이 리리스의 흔적을 수색하는 일에 모든 자원을 쏟아부었다

 

과거에 리리스와 조금이라도 접점이 있던 부대원들의 말과 리리스가 부대에서 떨어진 뒤 그녀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건진 생존자들의 경험담을 조합해 추측한 그녀의 이동 경로, 거기에 에이다의 위성을 활용한 위치추적까지 마치고서야 마침내 사령관은 리리스를 찾을 수 있었다.

 

대원들이 리리스를 찾는 동안, 사령관은 서적과 기록을 통해 그녀에 대한 정보를 탐닉하였다


주인의 눈을 즐겁게 만들기 위해 만들어진 찬란하게 빛나는 은발과 주인을 매료하기 위한 온몸에서 풍기는 장미 향기, 그리고 주인을 위해 죽음조차 마다하지 않는 철저한 헌신. 그녀는 주군의 검이자 방패이자 검이었고, 주인의 명예를 지키는 거대한 성벽과도 같은 존재였다

 

리리스에 대한 정보를 습득할수록, 사령관은 한 번도 직접 본 적 없는 그녀에게 강하게 이끌렸다. 에이다는 그 현상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고, 그것은 다른 바이오로이드들도 마찬가지였으나 얼마 가지 않아 그의 전략적 식견을 믿어보자는 의견으로 취합되어 사라지게 되었다.

 

샬럿은 이것을 첫눈에 반했다.’라는 말로 표현했다

 

리리스가 오르카에 합류한다면 분명 라비아타 만큼의 큰 전력이 될 것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으나 살아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은 그녀에게 이런 많은 자원을 쏟아붓는 일은 지도자로서 실책에 가까운 일이었으므로, 표현하지는 않았으나 대부분은 샬럿의 말이 맞다고 믿고 있었다.

 

다행히도 그들은 큰 손실을 보기 전에 리리스를 찾을 수 있었고, 사령관은 즉시 그녀를 데려오기 위해 부대를 출동시켰다

 

어두운 밤, 사령관의 명령을 받고 리리스를 데리러 간 부대에 소속되어있던 브라우니의 그녀의 첫인상에 대한 평가는 마치 여신 같았다.’ 였다

 

격렬했던 전투의 흔적을 알리는 듯이 사후경직을 일으키고 있는 스토커와 철충들의 시체에서 나온 합금과 연료의 범벅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산.

 

그 위에 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며 피 묻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는 그녀는 과연 전쟁의 여신이라고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조금은 쌀쌀한 바람에 흩날리며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는 머리카락과 어둠 속에서도 번뜩이는 호박색 눈동자는 여전히 리리스가 살아있음을 알려오는 듯했다.

 

같은 여성조차 매료시켜버릴 만큼 매력적인 그녀의 외모는 보는 이들을 한동안 그 자리에서 굳어버리도록 만들 정도의 황홀경을 선사했다

 

실시간으로 그 보고를 들은 사령관은 리리스에 대한 기대에 잠을 설치고 말았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마자 사령관은 모든 요리사들을 동원하여 리리스를 위한 환영의 연회를 준비시켰다


주방장 소완은 자신이 사령관이 아닌 다른 이, 그것도 단 한 명을 위해 자신의 능력을 쓰는 것이 탐탁치 않았으나 주인의 명령에 거부할 수는 없었으므로 묵묵히 맡은 바에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한편 사령관은 터질 듯이 두근대는 마음을 억누르고 리리스를 맞을 준비를 마쳤다. 책 속의 사진으로만 봐온 그녀를 현실에서 볼 수 있으리라. 단지 그 사실만으로도 그는 지금까지의 고생에 보상받는 것 같았다.

 

가로로 긴 테이블의 오늘의 음식이 차례로 진열되고, 그 가운데는 돔 형태의 뚜껑 아래 커다란 칠면조 구이가 담긴 그릇이 장식되었다

 

터벅터벅- 곧이어 리리스의 발소리가 사령실 앞 복도에 울려퍼지고 사령실의 문이 열렸다.

 

"안녕하세요, 주인님. 저는 리리스라고 해요."

 

리리스는 우선 시선을 낮추고 사령관에게 애교 섞인 목소리로 인사했다.

 

"소식은 들었어. 네가 21 스쿼드 아이들을 지켜주었다고 했지? 정말 고마워. 여기까지 오는 데 네 도움이 컸어."

 

사령관은 당장이라도 달려가 사랑스러운 리리스를 품에 안고 싶은 욕망을 겨우 진정시키고 그녀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조금 다가갔을 뿐인데 씻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유난히 강한 그녀의 향기로운 체취가 코를 찌르는 듯했다.

 

사령관이 악수를 청하자 고개를 슬쩍 들어 사령관의 얼굴을 마주 본 리리스는 크게 놀라고 말았다.

 

생각지 못한 성대한 환영 때문만이 아닌 라비아타에 의해 되살아난 후, 지금껏 모시고 싶다고 염원해온 상상 속의 주인님의 모습과 너무나도 닮아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단 외모뿐 아니라 목소리의 높낮이와 말투, 그 리리스가 상상한 그 모든 것들이 소름 돋을 만큼 비슷했다.

 

어딘가에 있을지 모를 주인님의 존재는 다시 태어난 리리스에게 있어 유일한 삶의 이유이자 버팀목이었다. 소중한 동생들이 철충에 의해 죽어나갈 때도, 플라즈마 탄환에 배가 관통되는 끔찍한 고통에도 리리스는 오직 주인님을 구하기 위한 일념 하나로 버텨왔었다

 

그 수많은 역경의 끝에서 만난 나의 주인님. 리리스는 당장이라도 달려가 사랑하는 주인님을 품에 안고 싶은 욕망을 겨우 억누르고, 대신 살며시 미소지었다. 조금 거리가 가까워졌을 뿐인데 씻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유난히 강한 그의 샴푸 향기가 리리스의 코를 찌르는 듯했다

 

고소하고 짭조름한 음식 냄새, 그중에서 조금만 마셔도 취해버릴 듯 유난히 강한 장미 와인의 냄새, 하지만 뚜렷하게 느껴지는 그의 체취와 목소리는 리리스의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었다.

 

감정을 다스리는 방법을 잘 아는 그녀는 금방 정신을 차리고 침착하게 그의 인사에 화답했다

 

"후후... 드디어 지킬만한 가치가 있는 분을 만난 것 같네요."

 

두 사람만을 위해 차려진 호화로운 밥상, 그들은 멋진 만찬을 음미하며 사사로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동안 있었던 일들, 페로나 하치코가 사이좋게 간식을 나눠 먹거나 때로는 둘이 싸웠던 일처럼 별것 아닌 이야기들이었다.

 

그런 단순한 소싯거리가 오갈 뿐이었지만 리리스는 처음 느껴보는 주인의 따스한 위로를 받는 것만으로도 지금껏 느끼지 못한 황홀한 기쁨을 느꼈다

 

하지만 부끄럼 많은 그녀는 두근대는 마음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열 띈 목소리를 조금 죽이고 담담하게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ㅡㅡㅡㅡ

 

페로, N 14도 방향에 칙 스나이퍼 한 마리 처리, 하치코는 다른 것... 다른 분들을 지켜. 나머지는 내가 처리할 테니.”

 

과연 리리스는 최고의 전투원이었다. 혼자서 수많은 전장을 휩쓸었던 그녀는 특히 자신의 동료들과 함께라면 전투에서 지는 일이 없었다

 

페로가 적들의 시선을 끌고, 하치코는 다른 동료들을 지키고, 그 사이에 리리스가 적진 한가운데로 쳐들어가면 대부분의 철충은 리리스의 총알 세례를 받으며 대부분 죽거나 도망치고 말았다

 

숙적이었던 소완과 함께일 때는 심지어 그 처형자조차도 그녀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폭풍처럼 흩날리는 강철의 파도 속에 휘말린 것은 무엇도 살아남을 수 없었고, 그것은 익스큐셔너의 창과 방패도 마찬가지였다. 리리스가 자신의 역장으로 공격을 받아내고 반격하면 소완은 그 틈을 노려 처형자의 모든 것을 분쇄했다

 

비록 철충들에게 감정따윈 없겠지만, 모든 무기를 잃고 홀로 남아 죽음을 기다리는 처형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그들에게 공포와 절망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많은 전투를 거치며 리리스는 많은 부분에서 성숙해졌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수도 없이 다른 이들과 다투는 바람에 사령관은 걱정할 수 밖에 없었다. 아무리 강한 그녀라도 동료와 힘을 합치지 않는다면 전투에서 이기는 것은 힘들다는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 리리스는 빠르게 사회생활에 적응했다. 리리스가 주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든 한다는 것을 이용한 그는 그녀에게 동료들과 사이좋게 지낼 것을 부탁했고, 그것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말을 섞던 그녀는 점차 다른 이들과 감정을 공유하고 대화하는 것에 재미와 기쁨을 느끼게 되었고 몇 주 뒤에는 사령관의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정상적인 생활을 하게 되었다.

 

가장 크게 다투었던 리제와 밝게 웃으며 대화하던 장면은 사령관에게 있어 특히 잊을 수 없는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

 

물론 사령관과 리리스의 관계는 말할 것도 없이 가까워졌다. 두 사람은 취미와 음식 취향, 심지어는 개그 코드까지 일치했으므로 빠르게 친해진 것이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가끔 서로에 대한 이해관계가 맞지 않을 때면 리리스는 자신이 한걸음 양보하여 갈등을 해결했고, 사령관은 넓은 아량을 베풀어주는 그녀에게 더 깊이 빠져들었다

 

조금의 시간이 흘러 두 사람의 연모의 감정이 최고조에 이른 어느 여름날, 멸망 전에 아주 드물지만 바이오로이드들과 영원을 약속하려 했던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특수한 반지가 요정 마을 앞바다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

 

방수 처리된 케이스에 들어있던 덕분에 여전히 번뜩이는 황금빛과 형태. 서약의 반지는 여전히 고운 빛을 내며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 영롱한 빛에 취해있던 사령관의 머릿속은 온통 리리스에 대한 생각으로 만발해 있었다. 풋풋한 연애를 계속해 나가던 두 사람은 이미 미래를 약속한 상태였으므로, 리리스야말로 이 반지를 받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사령관은 지체없이 리리스의 방으로 향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우스운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평소의 제복 차림으로 평범한 방에서 평범한 옷을 입고 있는 리리스에게 프러포즈라니, 비록 두 사람이 평소에 꿈꿔온 낭만적인 프러포즈는 아니었으나 그녀는 그것만으로도 족했다. 아로마 향기로 가득 찬 방 안에서 두 사람은 영원한 사랑을 맹세했다.

 

손에 반지를 낀 리리스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굳어버렸으나 이내 환하게 웃으며 그의 고백에 화답하였다

 

그렇게 몇 년이나 흘렀을까? 셀 수도 없이 많은 전투와 희생, 그리고 또 다른 만남. 그 모든 것들은 결국 인류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리고 오늘은 앞으로의 인류 역사에 있어서도 가장 큰 전환점이 될만한 사건이 벌어지는 날이었다. 사실상 금기시 되어왔던, 바이오로이드의 뇌에 걸려있는 가장 강력한 제약인 인간에게 절대복종하고 해를 끼칠 수 없다는 것을 비롯한 모든 제한을 풀어주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그녀들은 자유의 몸이 되는 것이다. 물론 반발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사령관에게 가장 큰 복종심과 사랑을 보였던 메이드들과 경호원들은 특히나 크게 반대하였고, 리리스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사령관도 그 결정을 한순간에 덜컥 내린 것은 아니었다. 그녀들과 생사고락을 함께하면서 이미 그는 평화의 시대가 온다면 가장 먼저 그녀들의 제약을 풀어주자. 그렇게 마음먹고 있던 터였다

 

게다가 그는 사랑했던 그녀들이 자신의 머리에 총구를 들이밀어도 운명을 받아들일 준비를 마친 상태였고, 대부분의 바이오로이드들이 자신들이 절대 사령관을 배신할 리 없다며 손사래를 쳤으므로 일은 속전속결로 진행되어 마침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리리스는 그녀들, 심지어 자신이 자유를 얻게 되면 무슨 일을 벌일지에 대한 의심을 끝까지 거두지 못했다

 

주인님, 마지막으로 물을게요. 정말 괜찮을까요?”

 

착잡한 심경의 리리스가 사령관에게 물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리리스는 사령관의 측근들 중에서도 가장 먼저 '자유'를 얻게 될 바이오로이드였으나 그녀는 여전히 자신을 믿지 못했다. 혹시나 그에 대한 감정이 변해버리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바로 그녀의 불신의 원천이었다.

 

물론이지. 괜찮을거야.”

 

그랬다가 제가 주인님을 해치면 어떡하죠? 이 감정이 사실 인공적으로 설계된 기계적인 것이라면 어떡하죠?”

 

아니, 괜찮을거야. 적어도 난 너희가 인간과 다름없다고 믿고 있어. 비록 만들어진 감정이라고 해도, 지금 우리가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그러니까 날 한 번 믿어봐. 리리스는 변하지 않을 거야.”

 

, 믿어볼게요. 지금까지 쭉 믿어왔으니까.”

 

가벼운 입맞춤을 나눈 리리스는 종종걸음으로 닥터의 기계 안으로 들어갔다. 닥터가 힘차게 장치의 레버를 내리자 기계가 끔찍한 소리를 내며 작동을 시작했고, 몇 분이 지나자 문이 열리며 리리스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몽롱한 눈의 리리스를 사령관이 큰 소리로 부르자 그녀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달라진 점을 빠르게 눈치챌 수 있었다. 가슴 한구석을 억누르는 것 같던 느낌. 그 중압감이 어느새 사라져 있던 것이다. 그리고 곧 그녀의 심장은 눈앞에 서있는 남자의 사랑을 갈구하며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느끼지 못한 특별한 이 감정은 바로 인간의 것이었다. 행복, 고통, 고뇌, 참회, 자유와 같은 인간의 감각들이 리리스의 뇌리를 스쳐 지나가며 그녀의 생명을 약동시켰다

 

자유를 얻은, 인간이 된 리리스는 자신을 경계하는 페로를 손짓만으로 쓰러뜨리고 사령관의 앞에 우뚝 섰다. 바닥에 엎어진 페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다른 이들은 리리스의 갑작스런 행동에 빠르게 사령관을 지킬 준비를 마치고 경계했지만 하치코와 페로는 이미 리리스에게 공격 의사가 없음을 파악했으므로 가만히 서서 리리스의 행동을 주시했다.

 

리리스는 살기가 가득한 눈빛으로 그와 눈을 맞추었다. 아무리 다른 이들이 경계태세를 갖추었다지만 이 거리라면 사실상 그녀의 공격으로부터 살아남는 것은 불가능했다. 물론 그는 이미 죽을 각오를 마친 상태였기에 크게 동요하지 않고 마찬가지로 리리스의 눈을 노려보았다

 

한동안 무거운 정적 끝에 리리스는 풉, 하고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후후, 죄송해요, 주인님. 당신의 믿음을 과소평가한 나쁜 리리스를... 혼내주시겠어요?”

 

ㅡㅡㅡㅡ

 

리리스가 무사히 수술을 마친 후, 모든 바이오로이드들이 차례대로 제한을 풀었다. 사령관은 역사에 길이 남을 이 기념비적인 날을 기억하고 축하하기 위해 큰 축제를 열었다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 그들은 자유롭게 울고 웃으며 자기 나름대로의 자유를 즐겼다

 

누군가는 아직 적응이 되지 않아서 혼란스러워하기도 하고, 이 알 수 없는 해방감을 만끽하며 술로 배를 채우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전과 별로 달라지지 않은 바이오로이드들도 있었다.

 

한편, 오늘도 어김없이 사령관과 잠자리를 함께한 리리스는 뜨거웠던 관계의 후희를 느끼며 사령관의 품에 안겨있었다. 그러다 그녀는 문득 의문이 들어 그에게 물었다.

 

주인님, 주인님! , 궁금한 것이 있어요.”

 

이제 주인님이라고 부르지 말라니까.”

 

헤헤, 저는 이 호칭도 나쁘지 않은데. 아무튼, 주인님은 자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저는 전과 달라진 것이 뭔지 잘 모르겠거든요. 어딘가 후련한 기분은 들지만 정확히 어떤 느낌인지 설명하기에는 애매한, 그런 기분이에요.”

 

자유라... , 별거 있을까? 원하는 사람과 사랑하다가 미워하기도 하고, 또다시 사랑하고. 그게 자유지. 우리처럼 말이야.”

 

... 후후, 맞는 말이네요.”

 

사령관은 사랑스럽게 자신의 가슴팍에 볼을 부벼대는 리리스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꿈이라면 부디 깨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제발

 

 

 

 

 

제발

 

 

 

 

제발

 

 

 

ㅡㅡㅡㅡ

 

결국 리리스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제약을 풀기 전까지만 해도 사령관을 맹목적으로 사랑했던 그녀들은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 마음속에 꿈틀대는 욕망에 굴복해버리고 말았다

 

일의 시작은 한 브라우니의 농담이었다.

 

인간들이 다시 태어나면 멸망 전의 지옥으로 돌아가지는 않을까, 라는 장난 섞인 말 한마디는 이곳저곳으로 퍼져나가며 그 크기가 점점 불어나 불안이 되었고 그 불안은 곧 인간의 제거라는 결론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책임 없는 자유는 없다. 그녀들은 자유를 얻기에는 정신적으로 너무 나약했다. 몇몇 소문 따위에 휘둘려 은인의 덕을 잊을 만큼 미성숙한 그녀들은 곧바로 자신들의 신념을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했고, 그 소문은 라비아타와 무적의 용의 귀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소, 통령?”

 

예상하지 못했던 일은 아니지만 저희 자매들이 이렇게나 무지하고 이기적일 줄은 생각하지 못했어요. 이제 겨우 일주일이 채 안 지났는데 벌써부터 반란 모의라니...”

 

우리의 전력만으로는 블랙리버 출신의 물량을 막아낼 수 없을 거요. 바다 위에서 승부를 보거나 애초에 그들이 지상으로 올라오지 못하게 막아야 하오.”

 

. 제 동생들과 컴패니언 분들은 여전히 저희 편이라는 점은 희망적이지만 그것만으로 저쪽의 전력에 맞서는 건 불가능할 테니까요.”

 

용과 라비아타는 처음부터 자유 의지를 지니고 있었으므로 지금까지도 사령관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믿고 있었다. 따라서 여전히 사령관을 따르는 메이드들, 그녀들의 유전자가 포함되어 여전히 주인에게 우호적인 페어리들과 경호원인 컴패니언들, 그리고 용이 지휘하는 해군 병력들을 이용해 사령관을 보호하고 반역자들을 처단할 계획을 세우는 것이었다.

 

현재 반란을 주도하는 자들은 대부분이 블랙리버 출신이오. 나머지는 본래 인간에게 우호적이도록 유전자가 설계되어있거나 팩스 출신처럼 굳이 이 반란에 참여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자들, 즉 우호적이거나 중립적인 자들이라는 것은 다행이지.”

 

용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한숨을 푹 내쉬며 다시 말했다.

 

서방... 사령관이 육지로 나가기만 하면 우리의 승리가 될거요. 나머지는 이 잠수함과 함께 바다에 수장시키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 것 같네만...”

 

눈에 띄지 않고 주인님을 내보낼 수 있을까요?”

 

그것이 문제일세. 누군가 시선을 끌어준다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너무 잔혹해요. 그 말은 결국 누군가가 이들과 동귀어진 해야 한다는 뜻 아닌가요?”

 

방법이 없지 않은가. 여기서 사령관이 죽고 그녀들이 세상을 지배한다면 그 미래는 뻔하지. 분명 증오와 불신으로 가득 찬 세상이 될 것이 아닌가.”

 

다른 방법을 찾아봐요. 너무 비인륜적인 방법일뿐더러 그 많은 사람의 시선을 전부 끌어모을 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도 없잖아요.”

 

아니, 한 명 있지. 그 많은 적들과 싸우며 그들의 관심을 돌릴 수 있는 자가.” 

 

ㅡㅡㅡㅡ

 

그렇게 된 걸세.”

 

“.... 그래서 제가 물귀신이 되라는 건가요?”

 

리리스는 텅 빈 천장을 바라보며 허망하게 웃었다.

 

그렇게 하면 주인님이 무사할 수 있나요?”

 

용은 침묵하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약속하지. 반드시 구할 것이라고. 그리고 그대의 희생을 영원히 잊지 않을걸세.”

 

그런 건 필요 없어요. 저는... 저는... 주인님만... 흐윽...”

 

미안하오. 방법이 없었소...”

 

이렇게 운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니...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실래요?”

 

그럼.”

 

주인님께는 말하지 말아주세요. 제가 이곳에서 나가지 못하리라는 것도, 이 일을 당신이 주도했다는 사실도.”

 

어째서지? 마지막 인사를 나누지 않아도 괜찮겠소?”

 

그걸 알게 되면 주인님은 차라리 자신이 죽는 것을 택할 분이니까요. 겨우 세운 계획이 물거품이 되면 안되잖아요? 그리고 슬프지만, 리리스는 얼마든지 있잖아요. 다른 리리스나 다른 분들이 주인님을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면 저는 몇 번이고 죽을 수 있어요.”

 

존경스럽군. 진작에 그대와 친구가 되었으면 좋았을텐데.”

 

띄워주는 것은 여기까지. 저를 대신해서 주인님을 잘 부탁드려요. 주인님이 울기라도 하는 날엔 지옥에서 돌아와서라도 당신을 저주할 테니까요.”

 

후후, 물론이오. 자네의 몫까지 웃게 해드리지.”

 

믿을게요.”

 

리리스가 자신의 머리끈을 풀어 용에게 건내며 말했다.

 

믿어주시게.”

 

ㅡㅡㅡㅡ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사령관은 리리스가 아닌 인공지능이 제거된 AGS가 시선을 끄는 사이 다 함께 탈출하는 계획으로 알고 있었고, 사령관과 용의 지휘 아래 탈출 작전은 빠르게 형태를 갖춰갔다

 

그리고 결전의 날, 리리스는 마지막으로 사령관의 얼굴을 보기 위해 그의 방으로 향했다. 그는 리리스가 온 줄도 모른 채 떠날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주인님, '마지막으로' 안아주세요. 아니, 키스해주세요."

 

리리스는 조급하게 물건을 챙기는 사령관의 팔을 붙잡고 아양을 떨었다. 사령관은 평소와 같은 애교라고 여기고 리리스를 떨쳐내며 말했다.

 

"갑자기 얘가 왜 이래. 리리스, 너도 빨리 네 짐 챙겨. 일단 여기서 무사히 탈출하면 그때 많이 하자. 알겠지?"

 

주인님, 한 번만요. 잠깐이면 돼요. 저 지금 너무 무서운데, 주인님의 키스를 받으면 용기가 생길 것 같아요.”

 

미안해, 리리스. 지금 바쁜거 알잖아. 일단 무사히 탈출해야지. 안그래?”

 

짐을 다 꾸린 사령관은 잔뜩 풀이 죽은 리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다가 라비아타의 무전을 받고 밖으로 나갔다.

 

밖에서 만나자, 리리스.”

 

안타깝게도 사령관은 리리스가 말한 '마지막'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것이었다.

 

리리스는 사령관이 나가고 다시 닫힌 차가운 철문을 허망하게 바라보다 이내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이게.... 마지막 인사였는데."

 

사령관이 나갈 채비를 마치자 마침내 블랙리버 바이오로이드들의 주도로 -팩스의 바이오로이드들은 자유를 찾은 후 미련 없이 도시로 떠나 자신의 할 일을 계속했고, 삼안의 바이오로이드들은 사령관을 여전히 주인으로 모셨기 때문에- 사령관의 처분에 대한 회의가 열렸고, 그 자리에는 리리스도 참가했다.

 

리리스는 삼안의 바이오로이드의 대표로서 그 회의에 참가한 유일하게 블랙리버 출신이 아닌 바이오로이드였다.

 

"그럼 지금부터 사령관 각하의 처분에 대한 회의를 시작합니다."

 

대부분의 인원이 모이자 마리는 회의를 시작했다.

 

더 이상 볼 거 있어? 없애버려야지. 그리고 우리들의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거야.”

 

인류가 재건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너무도 뻔한 일이야. 솔직히 사령관이 불쌍하기는 하지만 우리를 위한 일이라고 하면 순순히 죽어줄걸? 원래 무른 남자였으니까.”

 

확실히, 인류는 같은 실수를 반복할거다. 그 전에 뿌리를 뽑아야지.”

 

여론은 거의 압도적이었다. 인간이 없는 지상낙원을 꿈꾸던 몇 인원들이 주도한 이번 회의는 결국 싱거울 정도로 빠르게 마무리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이번 회의의 결과, 사령관 각하의 처형은 전원 찬성으로..."

 

"말도 안되는 소리 말아요! 정말 당신들에게 마지막 양심이 남아있다면 이러면 안되죠!"

 

사령관에 대한 각자의 생각이 오고 가는 회의 내내 침묵을 지키던 리리스는 격분하여 다른 이들을 향해 소리쳤다.

 

"주인님을 죽인다고 뭔가 달라질 것 같나요? 웃기는 말이네요. 은혜도 모르고 은인을 죽이려고 달려드는 당신네 같은 양반들이 얼마나 갈지는 뻔한 일이죠. 두고 보자고요. 배신자들의 최후가 과연 어떻게 될지."

 

"말을 삼가게, 리리스 양. 자네가 각하를 진심으로 아낀다는 것은 잘 알지만 결국 공익을 위한 일이야. 멸망 전과 같은 참극이 다시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나?"

 

마리는 리리스를 벌레 보듯이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결국 자네의 선택과는 관계없이 진행될 일이야. 이미 대부분의 지휘관이 동의한 상태다. 자리에 나오지는 않았지만 그 칸 대장도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이 일에 동의한 상태이고. 그러니 차라리 자네도 우리와 뜻을 함께하는 것이 어떤가?"

 

"더러운 년들... 당신들을 거둬주시고 자유를 주신 주인님께 죄송한 마음조차 없는 건가요?"

 

리리스는 탁상을 주먹으로 쾅 내리치며 증오와 분노로 몸을 떨었다. 그녀는 저런 것들과 자신이 같은 땅을 밟고 있다는 사실조차 부끄러운 기분이었다.

 

"거기까지 하는 게 좋아, 리리스. 사령관이 나쁜 사람이 아니란 것쯤은 우리도 알고 있어. 하지만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불가피한 일이야. 만약 그를 살려두었다가 너 같은 아이들이 사령관의 더러운 자손을 품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는 거야? 계속 그렇게 나온다면... 결국 너도 무사하지 못하게 될 거야. '평화'와 '균형' 그리고 우리의 '번영'을 위해서 말이야."

 

상황을 보다 못한 레오나가 마리에게 동조했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격렬한 분노로 인해 리리스는 어느새 울고 있었다. 전쟁을 함께해온 동료들이, 이런 배은망덕한 짓거리를 한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요... 정말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리리스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흘러 넘치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고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제 목숨도 가져가세요!"

 

리리스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녀의 리볼버에서 발사된 총알이 레오나의 심장을 관통했다.

 

젠장, 방심했군! 모두 전투 준비! 블랙 리리스를 사살하라!”

 

사령관의 처형이 결정되자 리리스는 홀로 오르카 전체를 헤집어놓았다. 그녀는 그것이 가능할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전부 죽어버리세요, 배은망덕한 년들!”

 

압도적인 전력 차이에도 불구하고 리리스는 수많은 적을 도륙했다. 언젠가 한 번 본 적이 있는 듯한 얼굴의 브라우니와 레프리콘의 대가리를 날려버리고, 운 좋게 총알이 빗맞아 목숨을 건졌으나 타는 듯한 고통에 몸부림 치는 이프리트를 구원하고,

 

지휘부를 잃고 이성을 유지하지 못하는 발키리의 심장을 주먹으로 관통하고, 저 멀리서 저격하려는 어리석은 미호의 손을 분쇄하고

 

거대한 몸집으로 자신을 제압하려는 블러디팬서의 약점을 찾아 무릎 꿇게 만들고, 빠르게 하늘로 뛰어올라서 폭탄 세례를 쏟아부으며 거슬리게 만드는 샌드걸의 멱살을 잡아 바닥으로 던져버리고.

 

수없이 빗발치는 총알 세례에 팔다리가 긁히고 내장이 뚫렸지만 리리스는 지치는 법이 없었다. 오히려 그런 가벼운 생채기들은 가학 성향을 폭주시키며 과거에 영광스런 전쟁을 함께했던 이교도들을 학살하는 데에 도움을 줄 뿐이었다.

 

꺄하하! 배신자들은 전부 죽어 마땅해요!”

 

젠장, 화력을 더 쏟아부어라! 겨우 한 명한테 이렇게나 휘둘리다니, 부끄러운 줄 알아!”

 

아무리 졸개들이 총을 휘갈겨도 리리스의 방어 역장을 뚫어낼 수는 없었다. 빈틈없는 수비와 공격은 일개 사단이 감당하기에도 벅찰 만큼 가차 없는 위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블러디 팬서와의 전투에서 너무 많은 힘을 소진한 리리스는 점점 한계에 도달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심장은 터질 듯이 빠르게 펌프질을 계속하고 있었으나 조금만 더 무리하면 터져버릴 것처럼 고통스러웠고, 총알이 박힌 팔다리는 후들거리며 말을 듣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힘이 빠질수록 그동안 느껴지지 않던 고통이 한 번에 밀려와 리리스의 숨통을 조이며 그녀를 궁지로 내몰았다.

 

마리는 리리스의 변화를 빠르게 눈치챘고, 직접 공격에 나섰다. 안 그래도 벅찬 상황에 마리의 맹공이 펼쳐지자 리리스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음을 직감했다

 

결국 마른의 포격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역장의 에너지를 전부 소모한 그녀는 최후의 발악으로 레프리콘의 기관총을 난사하다가 마리의 일격을 맞고 무릎 꿇고 말았다.

 

"하윽... 콜록... 허억... 히히히... 주인님은 제가 지킬거에요... 결국 당신들은 스스로 자멸하게 되겠죠... 저는 죽지만 저의 의지는 영원히 죽지 않아요."

 

"유언은 그걸로 끝인가?"

 

마리는 초주검이 된 리리스를 차갑게 쏘아보며 검은 피가 흐르는 그녀의 배를 세게 걷어찼다.

 

꺄윽! 커헉... 허억... 허어억... 으윽... 이봐요, 당신. 하아... 이 목걸이가 무슨 용도인지 아시나요?”

 

리리스의 광기서린 미소에 마리는 뒷걸음질 쳤다.

 

그게 무슨...”

 

자폭을 준비한 리리스의 눈앞에 그동안의 기억들이 아득히 스쳐지나갔다

 

라비아타에 의해 다시 태어나, 최후의 인간을 찾아 나서고, 동료들과 떨어져 한참을 홀로 떠돌아다니다 결국 사령관과 만났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 자신이 상상했던 주인과 너무나 닮아서 놀랐던 기억, 부족한 면이 많은, 가끔은 과도한 집착으로 속을 썩였던 자신을 포용하고 진심으로 자신의 내면을 사랑해주었던 그에게 완전히 빠져버렸던 기억, 그리고 마침내 반지의 형태로 발현된 사랑을 손가락에 끼움으로써 기나긴 시간의 결실을 맺었던 기억, 그날 밤에 나누었던 뜨거운 첫 경험의 기억.

 

그 모든 기억들은 리리스의 전부였고 리리스의 가장 소중한 것이었다

 

죄송해요, 주인님. 주인님의 곁을 지키지 못한 나쁜 리리스를 용서해주세요.”

 

눈을 감고, 밝게 웃은 리리스는 회한의 눈물을 쏟아내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마리는 뒤늦게 사태를 파악했으나 도망칠 새도 없이 리리스의 목에서 뿜어져 나오는 섬광에 잡아먹혀 한 줌의 재가 되어버렸다

 

커다란 불길과 천지를 뒤엎는 폭음과 함께, 메이드들이 미리 설치해둔 폭탄들이 연쇄적으로 폭발했다. 바다 위까지 솟아오른 거대한 불기둥은 바닷가 근처의 높은 절벽에서 상황을 관망하던 사령관에게 모든 것이 끝났음을 알려주었다.

 

끝났군.”

 

, 끝났어.”

 

사령관과 그의 충직한 동료들은 몇 년 동안 보금자리가 되어준 오르카 호가 줄초상이 나서 가라앉는 모습을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보다 조금 늦게 출발할 것이라는 리리스의 말을 떠올리고는 다른 이들에게 물었다.

 

, 그러고보니 리리스는 아직 안왔어?”

 

“.....”

 

계속되는 침묵에 사령관의 얼굴에는 불안으로 찬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뭐야, 왜 말을 안해?”

 

사령관, 천천히 알ㄹ...”

 

어딨냐니까... 빨리 말해.”

 

사령관은 초조한 목소리로 다른 이들의 답변을 재촉했으나 모두들 그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뒷걸음질 쳤다.

 

씨발 리리스는 어디에 있냐고!”

 

미안하오, 사령관... 소관의 책임이오.”

 

책임 같은 거 필요 없어. 리리스 데려와. 당장.”

 

리리스 양은 죽었소.”

 

“.... ?”

 

리리스 양은... 죽었다고 했소. 지금쯤이면 저 바다 밑까지 가라앉아 있겠지.”

 

무슨 소리하는 거야. 어젯밤에도 말했다니까? 육지로 나가면 이 절벽 위에 집을 짓고 살고 싶다고, 우릴 닮은 아이랑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근데 뭐? 죽어? 아하하! 그게 죽기 직전의 사람이 할 말이야? ? 거짓말인 거 알아. 너무 장난이 심하잖아. 리리스, 이제 얼굴을 보여주렴? 리리스?”

 

사령관! 정신차리시오!”

지금 정신 차리게 생겼냐고!”

 

사령관은 용의 멱살을 낚아채고 소리쳤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광기와 분노가 서린 그의 눈동자에는 비애와 불신으로 가득 찬 채로 용에게 자신이 원하는 말을 해주기를 애원하고 있었다

 

그대는 아직 우리를 이끌어야할 책무가 있소. 리리스 양의 희생은 안타깝지만 그대는...”

 

순간, 용의 고개가 돌아가고, 귀를 찢는 듯한 타격음이 대기를 갈랐다

 

개소리 집어쳐. 그걸 말이라고 하는거야? 내 상의도 없이 리리스를 저 불구덩이 속으로 밀어 넣어 놓고 그런 소리가 나오냐고.”

 

그것을 알리지 말자고 한 것은 리리스 양이었소.”

 

손자국으로 인해 볼이 빨갛게 부어오른 용은 흘러내리려는 눈물을 간신히 참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진실을 알리면 분명 그대가 이 작전을 실행하는 것을 거부할 것이라고, 그렇게 말했소.”

 

....”

 

사령관은 더 말할 힘도 없이 주저앉아 한참 동안 울부짖었다. 애석하게도, 사령관의 외침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오르카는 더 큰 소리를 내면서 어둠으로 가득 찬 심연 속으로 가라앉으며 비명을 질러댔다.

 

ㅡㅡㅡㅡ

 

트리아이나는 조금 우울한 표정으로 사령관이 바다 근처에 임시로 세운 본부에 들어왔다

 

"오늘도 못 찾았어...?"

 

트리아이나는 수색대를 오늘도 이끌고 오르카 호가 가라앉은 바닷가 주변을 탐사했다. 역시나 리리스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였다.

 

본래 감정이나 기분을 잘 숨기지 못하는 그녀의 표정에는 안타까운 기색이 역력했으므로 사령관은 오늘도 허탕이라는 사실을 단숨에 파악할 수 있었다.

 

"... ... 미안해, 사령관. 다들 최선을 다하고는 있지만 역시 리리스 씨는..."

 

트리아이나는 오르카에 남아있던 각종 귀중품이나 자료들을 가져오기는 했지만 리리스와 관련된 것은 어느 하나 발견하지 못했다.

 

사령관도 알고 있었다. 아무리 튼튼한 리리스라도 그 폭발에서 몸이 성할 리가 없다는 것을. 그럼에도 여기에서 수색을 포기해버리면 더 이상 이성을 유지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많은 비용을 감당하면서까지 트리아이나를 고용한 것이었다

 

얼마 전, 바이오로이드들이 바깥으로 나간 이후로 그녀들은 모두 정당한 보수를 받고 일하게 되었다. 멸망 전의 화폐 경제를 다시 되살리기 위한 사령관의 제안이었다. 물론 사령관에게 여전히 연심을 품고 있던 그녀들은 그에게서 일에 대한 보상을 받는 것을 거부했으나 사령관의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었으므로 그녀들은 얼마 가지 않아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경제구조를 만들어 내었다

 

빠르게 시장 구조를 파악하여 간단하게 평생 먹고 살 만한 돈을 모은 이프리트가 있는가 하면, 직접 만든 골동품 가게에 많은 인파가 몰려 큰돈을 번 레아, 도박에 모든 돈을 탕진해 아르망의 은행에서 나오는 최저 생활 보장을 위한 지원금을 타 먹으며 거리를 전전하는 브라우니와 그녀를 위해 멋모르고 보증을 서줬다가 같이 빚쟁이 신세가 되어버린 레프리콘까지, 그녀들의 세계는 천천히 복구되어가고 있었다.

 

트리아이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보물을 찾으며 그것으로 돈을 버는 자신의 직업에 크게 만족하였으나 이번만은 조금 상황이 달랐다. 사령관에게 직접 의뢰받은 일이 좀처럼 풀리지 않자 트리아이나는 속이 타들어 가는 듯했다.

 

", 사령관! 이거라도 받고 기분 풀면 안될까? 이 몸이 뭘 찾아왔는지 보라구!"

 

트리아이나는 무언가를 떠올리고 그새 표정이 밝아졌다. 사령관은 그녀가 또 시덥잖은 것을 떠올린 것이려니 했지만 그녀의 손에 쥐어져 있던 것을 보자 그는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색이 바래고 금이 가 있었지만 분명하게 남아있는 형태, 서약의 반지는 여전히 고운 빛을 내며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히히, 그렇게 놀랐어? 이제 나를 칭찬해줄 마음이 들었지?"

 

트리아이나는 사령관이 기쁜 나머지 다리에 힘이 풀려 버린 것이라고 여기고 어깨를 으쓱거렸지만 그의 시선은 그녀의 손에 들린 반지에 꽂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 그리고 이런 것도 발견했어! 반지 근처에 떨어져 있던 건데, 감이 딱 오더라고. 보물의 기운이 말이야."

 

"닥터..."

 

"?"

 

"빨리 닥터 불러!"

 

ㅡㅡㅡㅡ

 

갖가지 복잡해 보이는 기계들과 지시약을 끓이는 소리가 잠잠하게 울려 퍼지는 연구실에서 트리아이나가 가져온 작은 부품을 한참이나 관찰하던 닥터는 사령관에게 할 말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녀는 진작에 오르카에서 나가 근처 건물에 연구실을 만들어 그곳에 거주하고 있었으므로 사령관은 별 부담 없이 그녀에게 트리아이나가 주워온 부품에 대한 조사를 맡길 수 있었다.

 

사령관이 자신의 말로 인해 큰 충격을 받아 미쳐버리면 어쩌나, 혹시 삶을 포기하려고 하면 어떻게 말릴까, 하는 복잡한 생각들을 정리하느라 닥터는 오랜만에 에너지 드링크에 손을 댔다. 실험실 안에서 들리는 작은 로봇들의 덜그럭거리는 소리는 닥터의 마음만 더 심란하게 만들 뿐이었다.

 

무언가의 성분을 분석하기보다 그 결과를 어떻게 알려야 할지에 더 시간을 쏟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만큼, 사령관이 리리스와 관련된 이야기에 민감했고, 또한 닥터가 사령관을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자유를 얻기는 했으나 여전히 그녀들은 사령관의 인도가 필요했다. 그런 상황에 사령관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기껏 얻은 자유가 오히려 발목을 잡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결과는 언제쯤 나오냐며 자신을 들볶는 사령관을 겨우 돌려보낸 닥터는 하루를 더 고민하고 나서야 그에게 진실을 전할 수 있었다.

 

"오빠, 일단 나랑 약속해. 내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오더라도... 절대 포기하지 말기로."

 

"뭘 포기한다는 거야."

 

"... 오빠의 인생이든... 우리들이든. 그 어떤 것도 포기하면 안돼. 약속한거다...?"

 

닥터의 얼굴에는 소녀 특유의 발랄한 미소는 사라지고 진지하게 그의 안위를 걱정하는 눈빛만이 남아있었다.

 

리리스가 죽은 이후로 일주일이나 단식을 한 전적이 있는 그였기에 닥터가 이렇게나 조심스러운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어. 좋은 소식은... 일단 오빠 예상대로 이건 리리스 언니의 기억 모듈이 맞아. 도대체 눈으로만 보고 어떻게 안 거야?"

 

닥터는 과장되게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그의 기분을 조금 상기시켜주었다.

 

"그럼 나쁜 소식은 뭐야? 기억 모듈만 있으면 복원할 수 있는 거잖아. 그렇지?"

 

", 그건 맞아. 그런데..."

 

"...."

 

"걱정했던 대로 모듈의 절반 이상이 손상됐어. 사실 형체가 남아있는 것만으로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긴 하지만... 아마 오빠에 대해서는 기억하지 못할 거야. 아니, 애초에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어. 무사히 언니가 복원된다고 해도 그 언니는 더 이상 오빠가 알던 사람이 아닐 확률이..."

 

말이 나오지 않아.’

 

"미안해... 미안해... 정말... 미안해."

 

닥터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녀에게 있어 자유는 자신이 원하는 연구를 마음껏 진행할 수 있는 권리였으나 그와 동시에 그 연구의 결과에 짊어질 책임을 의미하기도 했다. 사령관을 만나, 철충과 싸우고 수많은 고난을 이겨내며 닥터는 크게 성장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어린 아이였다. 자유에서 오는 중압감과 책임감은 그녀에게 있어 너무나도 큰 짐이었던 것이다.

 

목놓아 우는 닥터를 보자 사령관은 절망할 기운조차 잃어버렸다. 닥터의 슬픔이 그녀를 다 큰 어른처럼 여긴 자신의 잘못인 것처럼 느껴져 가슴 한구석이 욱씬욱씬 아려오는 듯했다. 쓰레기통을 가득 채우고도 바닥에 쌓일 만큼 많은 음료수 캔, 볼펜으로 휘갈긴 흔적이 가득한 종이뭉치들, 아직 빨지 않았는지 야릇한 냄새를 풍기는 빨래통 안의 옷가지들

 

무겁게 가라앉은 어둠, 점점 커지는 전자기장 발생기의 구동음, 자욱한 기름 냄새, 먹다 남은 음식을 정리하고 있는 작은 로봇의 삐빅- 거리는 소리, 그 정돈되지 않은 혼돈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두 사람.

 

사령관은 울음을 멈출 기세를 보이지 않는 닥터를 품에 안고 그저 가만히 그녀의 곁을 지켜주었다. 그들은 짙어지는 심연 속에 빨려들어 가듯이, 끝없는 고독과 절망 속으로 가라앉았다.

 

ㅡㅡㅡㅡ

 

기괴함이 느껴질 정도로 조용한 방. 어떤 소리도 향도 느껴지지 않는 이곳에 모인 사령관의 측근들은 얇은 유리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은밀한 대화를 나누는 그와 닥터를 애타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유리 벽에 귀를 바짝 붙이고 주인의 이야기를 엿들으려는 리제와 그 우스운 꼴을 보고 그녀를 비웃는 소완이 한바탕 싸우다가 라비아타에게 멱살을 잡혀 끌려나가는 작은 소동이 벌어진 후, 메이드들 중 한 명인 콘스탄챠가 운을 띄웠다.

 

무슨 소리라도 들리면 좋을 텐데요. 최근 며칠 동안 저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전환점이 될만한 일이 일어난 것 같아요. 지금 주인님께서 닥터 양과 이야기 하시는 것도 그 일에 관한 것 같고요.”

 

그러게나 말이에요. 평소에 주인님께서 원체 종잡을 수 없는 일들을 벌이시니 저도 걱정이 되는군요. 이번에는 또 어떤 사고를 치려고 그러시는지 두렵네요. , 물론 주인님의 막무가내인 점이 싫은 건 아니지만... 그게 좋은 것은 아닌데... 아니, 그렇다고 주인님이 싫은 건 아닙니다.”

 

금란에게도 저 너머의 소리가 안들리나요?”

 

메이드들은 혼자 사랑에 취한 채 횡설수설하는 바닐라를 내버려두고 대화를 이어갔다.

 

, 언니. 감각을 최대한 집중해도 미세한 공기의 진동조차 느껴지지 않아요. 그것보다 이 방, 정말 좋네요. 어떤 소리나 향기도 느껴지지 않으니 간만에 오감에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아요. 아마 방의 소재에 신경을 많이 쓴 것이 아닐까요?”

 

금란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폐 안을 채우는 상쾌하고 깨끗한 무취의 공기와 자매들의 도란도란 이야기 소리만이 그녀의 감각을 자극하니 금란은 마치 사령관에게 안겨있을 때와 같은 편안함을 느꼈다. 익숙한 그의 체취가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쉬울 따름이었지만.

 

금란에게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 완벽하게 방음처리가 되어있다는 뜻이겠네요. 이렇게 얇은 유리 벽에 소리가 전부 막히다니, 닥터의 기술력은 가끔 아주 세세한 부분에서도 감탄을 불러일으켜요.”

 

, 다들 기다리고 있었군요.”

 

뒤늦게 도착해서 메이드들의 대화를 조용히 관망하던 용이 한 마디 했다.

 

용은 그 사건 이후, 사령관에게 저지른 죄를 용서받기 위해 깊고 험한 산속으로 들어가 극한 수련을 시작했다. 사령관은 오히려 그녀를 용서하고 만류했으나 용은 스스로 회개하기 위해 그곳으로 떠났다

 

수행의 상처인지, 뽀얗고 라벤더 향이 나던 그녀의 손은 여기저기 크고 작은 흠집과 물집 투성이였고, 털 코트 틈으로 보이는 살결은 나뭇가지나 맹수의 발톱으로 인해 생긴 자상이 아물지 않아 옅은 핏빛을 띄고 있었다.

 

주인님께 그리도 큰 죄를 지었는데 염치도 없이 오셨군요? 용 씨.”

 

바닐라는 용의 눈을 똑바로 쏘아보며 불쾌한 감정을 거리낌 없이 내비쳤다. 주변의 메이드들도 그녀의 분노를 모르는 것은 아니였으므로 차마 그녀를 말리지는 못했다

 

“.... 죄송합니다. 부디 소관의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아무리 그분을 잊으려 노력해봐도 제 마음속에서 차마 그분을 떠나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멀어지려 발버둥 쳐보아도 더 가까워만 지는 이 어리석은 여인의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었기에... 님의 부름에 거역할 수가 없었기에 실례를 무릅쓰고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정녕 분이 풀리시지 않으셨다면, 차라리 소인을 이 검으로 베어주십시오.”

 

어리석은...! 비겁하게 죽음으로 죄를 뉘우칠 생각이라니! 정말 주인님께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살아서 갚으라는 말입니다! 죽음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제일 잘 아시는 분 아닌가요?”

 

“....”

 

살아요. 죽지 말고 살아요. 주인님도 분명 그것을 원하실 테니까요. 그리고 그게 당신이 주인님께 속죄할 유일한 방법일 겁니다.”

 

용은 다시 한번 자신의 무지에 대해 깨닫게 되었다. 자신을 몰아붙이는 것은 그저 자신의 짐을 덜기 위한 합리화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잠깐이라도 죽기를 자처했던 자신이 부끄러워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ㅡㅡㅡㅡ

 

오빠, 마지막으로 물을게. 정말 괜찮겠어?”

 

닥터가 사령관의 손을 잡고 비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물론이지. 이젠 괜찮아. 내가 전부 짊어질 거니까 닥터는 아무 걱정 하지마.”

 

그랬다가 또 저번처럼...”

 

아니, 그땐 내가 바보 같았어. 너희들 생각을 못 한 내 불찰이었지. 닥터, 한 번만 더 날 믿어주면 안 될까?”

 

“.... . 하지만 또 그때처럼 단식이라도 했다가는 내가 강제로 어린애 몸으로 바꿔버릴거야. 이제 우리에게도 자유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

 

마음대로 해.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내가 너희를 두고 먼저 떠나는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

 

좋아. 믿어볼게. 그럼... 시작한다?”

 

닥터는 종종걸음으로 걸어 힘들게 구한 리리스의 유전자 씨앗과 새빨간 액체, 그리고 그녀의 기억 모듈이 함께 담겨있는 배양조 옆의 레버로 향했다.

 

그녀가 이어서 까치발을 들어 두 손으로 레버를 잡고 힘차게 내리자 주변의 기계장치가 끔찍한 소리를 내며 배양조 안에서 복합적인 화학작용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조금 역한 냄새를 풍기는 암모니아와 함께 강력한 전류를 흘리자 배양조에서 흘러넘칠 기세의 많은 양의 거품이 생성되고, 동시에 큰 스파크가 일며 아름다운, 그러나 보는 이의 눈을 멀게 만들 정도의 매혹적이고 위험한 빛을 발산했다.

 

무릎 꿇고 용서를 구하는 용을 보고 어쩔 줄 몰라하던 메이드들은 그 빛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 사령관의 안위를 걱정했고, 용은 걱정스런 마음에 그 즉시 자리를 박차고 나가 두 사람이 있는 실험실로 빠르게 달렸다.

 

긴 소동이 끝나고, 실험실 안에 고요함이 내려앉았다. 완전히 잠잠해진 뒤, 천천히 빨간 액체가 배양조 아래의 구멍으로 빠져나가며 리리스의 몸만이 안에 남았다. 사령관은 침을 꿀꺽 삼키며 그녀가 밖으로 나오길 기다렸다. 심지어 닥터는 눈을 꼭 감고 그녀가 단편적인 기억이라도 가지고 있기를 빌었다.

 

터벅터벅- 몇 초 뒤, 드디어 합금으로 만들어진 백청색의 문이 천천히 열리며 연구실 안에 그녀의 발걸음 소리가 울려퍼지고, 말끔하게 옷을 갖춰 입은 리리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하세요, 주인님? 저는...”

 

리리스...! 리리스...! 보고싶었어... 정말 보고싶었어...”

 

첫만남이 조금 과격하네요? 이런 플레이가 싫은 것은 아니지만.”

 

리리스는 우선 시선을 낮추고 사령관에게 애교 섞인 목소리로 인사하려고 했으나 그의 갑작스런 포옹에 그만 할 말을 잃었다.

 

어머, 리리스가 여기 있어요, 주인님. 울지 마세요.”

 

이렇게 다시 와줘서 고마워. 이제 떠나지 마...”

 

사령관은 당장이라도 리리스와 정을 나누고 싶은 욕망을 간신히 억누르고 그녀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리리스는 처음 보는 이의 과감한 행동에 조금 당황했으나 그것이 싫지는 않은 듯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해도 좋아. 그저 내 곁에만 있어줘.”

 

무슨 말씀이세요. 리리스는 절대 주인님 곁에서 떠나지 않아요. 저는 착한 리리스니까요.”

 

사령관은 고개를 슬쩍 들어 리리스의 눈을 마주보았다

 

그러자 리리스의 중추신경을 관통하는 강렬한 기시감.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이 상황에 그녀는 혼란스러워했다. 떠오를 듯 떠오르지 않는 이 익숙한 감각은 리리스의 가슴 한 켠을 바늘로 찌르듯이 아리게 만들었다.

 

눈물이 뚝뚝. 주체할 수 없이 뜨겁게 차오르는 눈물이 뚝뚝 흘러 사령관의 몸을 적셨다. 북받쳐 오르는 이 감정은 리리스의 가슴 한 켠에 작은 꽃을 피워 그녀의 생명을 다시 한 번 약동시켰다.

 

처음 그를 만나자마자 첫눈에 반해버린 기억, 처음 그와 손을 잡았을 때 느꼈던 설렘과 기쁨, 저격당한 자신을 구하기 위해 직접 대군을 이끌고 온 그에게 안겨 흘렸던 감동의 눈물, 마침내 이뤄낸 사랑의 결실과 첫 키스의 달콤함, 길었던 전쟁의 끝과 새로운 세계의 시작을 알렸던 자유를 얻은 그 날의 파티.

 

무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르는 수없이 아름다웠던 시간들.

 

작게 피워낸 검붉은 장미는 꽃잎을 틔워내고 리리스의 마음속을 아득히 수놓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텅 빈 기억을 채워나가는 과거의 기억들은 그녀의 얼굴에도 환한 웃음꽃을 피워주었다.

 

헤헤, 지킬 가치가 있는 분을 다시 만났네요.”

 

그녀는 사령관과 처음 만난 그날처럼 활짝 웃어보였다.

 

 

그리고 그녀가 그에게 다가와 입을 맞추었을 때

 

 

 

 

 

리리스는 한 송이 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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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 대칭되는 식으로 서술하려고 많이 노력했음 


특히 사령관이 리리스랑 처음 만나는 부분과 다시 태어난 리리스와 만나는 부분이라던가 리리스가 자유를 얻기 전이나 닥터가 리리스를 복원하기 전에 사령관에게 괜찮을지 물어보는 것과 같은 부분.


쓰다보니 엄청 길어졌는데 봐준 사람들은 전부 복받을거임